Etc.

단언의 붕괴 中

녹턴(2020), 카림 with 디디


디디가 자취를 감추고 한 달을 조금 넘겼을 때, 카림은 더 참지 못하고 추적에 나섰다. 이정도면 많이 참아줬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온 햇수가 천 년을 넘어가며 분노의 임계점은 높아질 대로 높아져 있었는데, 모처럼 뚜껑이 열릴 듯 말 듯 아슬아슬했다. 그가 한국에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거리에 선 채 카림은 저를 흘긋거리며 지나는 인간들을 무심한 눈으로 보았다. 무수히 많은 인간들의 기척 중에서 제 것을 닮은 기척을 찾아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기척을 좇은 카림이 어느 한 음식점 안으로 들어섰을 무렵 그는 그와 비슷한 생김의 이들과 한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었다. 어느 곳에서나 튀던 그의 모습이 처음으로 주변과 무리 없이 섞여든 것처럼 보였다. 매사 무덤덤한 얼굴에 희미하게 웃음기가 보이는 것도 같았다. 그리고 그것이 카림의 뚜껑을 반쯤 열리게 만들었다.

“알 껍질은 많이 깼나, 비메?”

이미 오래 전 죽어버린 옛 언어가 카림의 입을 빌어 흘러나왔다. 테이블에 앉아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카림에게로 모였다. 위협적으로 웃어 보이는 카림의 입에서 또 다른 언어가 쏟아져 나왔다. 일순 멈칫한 그를 보며 표정을 가다듬을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곧 간다고 했잖습니까?”

“얼마나. 한 달? 석 달? 난 네가 몇 달 전 말했던 ‘인간의 시간 감각’으로 사는 게 어떤 건지 조금 알 것 같더군. 그래서 알 껍질째로 씹어 먹을까 하고 왔지. 내가 정말 못 잡을 것 같았나?”

으르렁거리며 음식점의 분위기를 얼어붙게 만든 카림은 결국 그의 손에 이끌려 그가 살고 있다는 조그마한 집에 도착했다. 그리고 카림은 또 한 번 기가 찼다. 그의 통장이 지극히 인간적이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제게서 도망치듯 흔적을 지우고 떠나서 살고 있는 곳이 고작 이런 작은 곳이라는 게 어이가 없었다. 들고 있던 가방을 적당한 곳에 내려놓은 그가 피곤한 얼굴로 돌아섰다. 마치 자신을 귀찮게 여기는 듯한 그 표정에 카림의 분노는 식을 줄 몰랐다.

“왜 쫓아왔습니까? 당신한테서 영원히 사라지는 건 있을 수도 있는 일도 아닌데 왜 그렇게…… 짜증을 내는데요. 그거 자식 망치는 과잉보호, 부부 관계 망치는 의부증, 연인 관계 망치는…….”

“어디 끝까지 해보지 그러나?”

“…….”

“넌 내가 그딴 식으로 사라진다면 안 찾을 건가?”

카림이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속에서 들끓는 짜증과 화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느끼기는 거의 처음인 것 같았다. 분노를 다루는 것이 몸을 쓰는 것만큼이나 익숙한 분노의 악마는 지금 느껴지는 자신의 분노가 낯설었다. 그 분노를 한 꺼풀 들춰내면 드러나는 불안감 역시도 낯설었다. 카림은 이대로 디디 로렌스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불안했다. 여지껏 상실이라는 것에 대해 실감한 적은 없었다. 그녀, 한나를 잃었을 적조차 슬픔을 느꼈을지언정 상실감을 느끼진 못했다. 긴 생애에 처음으로 무언가를 상실할 수 있다는 사실이 카림을 불안하게 했다. 오래 가지 못한다 해도 그에게 제 흔적을 새겨 넣고 싶었다. 자신의 것이라는 흔적을 남겨야 그가 사라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미운 말만 골라 하는 입술을 물어뜯었다. 단단한 몸을 벽에 밀어 붙이고 목덜미를 짓씹었다. 다리를 벌리고 제 것을 처박았다.

“원하는 게, 이겁니까?”

“…….”

“진작 말하지 그랬습니까, 이거라면 쉬운데요. 다른 어떤 것보다 제일 쉽습니다.”

“그 입은 때도 못 가리나?”

서로를 물어뜯고, 짓씹고, 할퀴었다. 거칠어진 욕구와 감정을 가감 없이 쏟아냈다. 입술이 찢어지고 목 주변과 어깨가 잇자국과 울혈로 뒤덮였다. 서로를 망가뜨릴 목적에 가까운 섹스였다. 거칠고 엉망진창이었던 관계를 가진 후 카림은 그를 서울에 남겨둔 채 뉴욕으로 돌아갔다. 당장 데리고 돌아갈 생각이 없던 건 아니었으나 그는 그 빌어먹을 근로계약서에 메인 몸이었고, 어쨌든 소재를 파악했으니 마음이 조금 놓인 것도 있었다. 떠날 때 본 그의 얼굴이 다시 도망갈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는 이유도 있겠다.

뉴욕으로 돌아온 카림은 복잡하기 그지없던 머릿속이 한결 정리되었음을 깨달았다. 자신이 그에게서 얻어내고 싶은 것이 연인의 위치에 가까울지도 모른다는 것 또한 깨달았다. 가볍게 만나고 헤어지길 반복했던 인스턴트적인 관계와는 그 무게가 달랐다. 가늠할 수 없었던 마음 속 그의 자리를 찾은 것 같았다. 짙은 슬픔으로 남은 누군가의 자리에, 디디 로렌스의 깃대를 새로이 꽂았다. 벽이 되어버린 선의 코앞이었다. 그럼에도 카림은 그에게 퀘스쳔 마크를 붙여놓았다. 그에게서 얻어내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설령 그를 특별히 아끼게 되더라도 여전히 타인의 가치가 저보다 앞서는 일, 즉 그를 위해 자신을 내던지는 일만은 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적당히 깨물지 그랬습니까? 멍이 지워지질 않잖아요.”

“내가 할 소릴 하는군.”

나흘 뒤 불쑥 찾아와 불평을 터트리는 그에게 카림은 똑같이 응수해주었다. 아닌 게 아니라, 실컷 키워놨더니 악마를 개껌처럼 씹어놨다고 생각하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배은망덕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화가 나지는 않았다. 그렇게 그가 다녀간 이후 카림은 종종 서울로 향했다. 달리 특별한 일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기별도 없이 불쑥 찾아가 묘한 얼굴로 그의 얼굴을 보고는 돌아왔다. 보고 싶은 마음이 조금, 그 망할 알 껍질은 얼마나 깼는지 알고 싶은 마음도 조금, 저 없는 곳에서 얼마나 잘 지내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까지 조금 섞인 복합적인 상태였다.

“때 되면 알아서 갑니다. 그만 오세요. 애도 아닌데 왜 자꾸 감독하러 옵니까?”

어느 날 참다못한 그가 한숨과 함께 한마디를 뱉을 때까지, 카림의 방문은 산발적으로 이어졌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다. 그는 더 이상 도망가지 않고 때가 되면 올 것이고, 물가에 내 놓은 애도 아니다. 자꾸 찾아올 이유가 없었다. 카림은 그제야 자신의 방문이 그에게는 ‘감독’으로 비춰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당혹스러웠다. 저 자신에게 이렇게 질척이는 면모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그 사실을 깨달은 뒤 발길을 끊었다. 스스로의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단속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약 일주일 뒤, 카림은 뉴욕 집의 거실에 기별도 없이 떡하니 선 채 저를 쳐다보는 그를 마주할 수 있었다.

“당신, 무책임합니다.”

“…….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추라는 건지 둘 중 하나만 하지 그러나.”

“…….”

카림은 억울했다. 그만 오라고 해서 그만 갔더니, 대뜸 찾아와서는 한다는 소리가 무책임하단다. 말 그대로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어이가 없어 드물게 할 말을 잃은 얼굴로 빤히 보고 있자니 그대로 끌어 안겼다. 그가 뭘 하고 싶은 건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싶었다.

“가겠습니다.”

가만히 안긴 채 그가 깊게 숨 고르는 소리를 느끼고 있던 카림이 눈을 깜빡였다. 가겠다는 말은, 드디어 알을 다 깼다는 말일까. 그래서 제게서 완전히 벗어나겠다는 뜻인가? 삽시간에 불안을 닮은 무언가가 차올랐다. 아직 그를 놓고 싶은 생각이 없는데. 솔직하게 말해 제대로 쥐지도 못 했다.

“…어디로?”

“돌아가야죠. 내일 출근해야 합니다.”

카림의 얼굴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또 이런 식이지. 이건 분명 저를 놀리는 게 틀림없었다. 김이 샜다. 모난 소리라도 한마디 해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아 입을 열었다가, 목덜미의 살갗이 찢어지는 감각에 흘깃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가 이로 상처를 내 피를 마시고 있었다. 과거의 일을 답습하고 싶은 걸까. 피를 나눠주는 것은 이미 익숙할 대로 익숙해진 일이라 카림은 잠자코 입을 닫은 채 목을 조금 기울여주었다. 이윽고 그가 품에 안고 있던 몸을 놓아주었을 때, 카림은 가볍게 제 목덜미를 쓸었다. 손짓을 따라 상처가 빠르게 아물어 사라졌다.

그때 가만히 뻗어온 손이 카림의 눈가에 닿았다. 위협이 느껴지지 않는 손을 가만히 내버려두자 엄지가 눈가를 살살 쓸었다. 색이 엷은 황갈색 눈이 카림의 눈을 마주했다. 문득 카림은 그의 눈을 이렇게 마주 보았던 적이 드물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기억을 더듬어 봐도 그의 시선은 대체로 아래를 향해있거나 묘하게 어긋나 있었다. 근거리에서 보는 그의 눈은 마치 맑은 연못의 바닥을 들여다보는 것 같이 홍채의 세세한 무늬까지 선연히 보였다. 그렇게 얼마를 마주했을까. 느릿하게 눈을 깜빡인 그가 손을 거두어갔다.

그리고 그는 다시 서울로 돌아갔다. 여전히 그 망할 근로계약서에 메여있는 몸이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카림은 기다리는 법부터 새로이 배워야 했다. 이따금 한 번씩 찾아와 얼굴을 보고 돌아가길 반복하던 그는 꼬박 1년을 채운 후에야 돌아왔다. 파견이 끝났다는 이야기도 없이 대형 캐리어와 함께 불쑥 돌아온 그를 마주한 채 카림은 못마땅하게 팔짱을 꼈다. 그새 제게서 연락도 없이 불쑥불쑥 찾아오는 걸 배워가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정말 못된 것만 골라서 배우는군.”

“내가 뭘요.”

그가 여유롭게 웃었다. 그 웃음에서 카림은 지난 1년의 시간이 그에게 상당한 변화를 안겨주었다는 것을 느꼈다. 확실히, 뭔가를 깨고 나오긴 한 모양이었다. 그것이 이전만큼 불안하지 않았다. 그의 세계가 넓어지는 것도 보아 넘길 수 있을 것 같았다. 1년은 카림에게도 변화의 시간이었던 셈이다. 그가 파견에서 돌아온 이후 집은 여전히 두 사람의 생활감을 품어 안고 있었다. 카림은 그가 함께 지내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였고 그 역시 딱히 다른 집을 구해 나갈 생각은 없는 듯 했다. 뉴욕의 집값은 인간적인 통장으로 감당하기엔 약간의 어려움이 있기 때문일 거라고, 카림은 제멋대로 생각했다.

두 악마는 천천히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카림은 초대받은 파티에 모습을 비췄고, 그 자리엔 자연스럽게 디디 역시 함께했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가 더 이상 카림의 옆에서 얌전히 논-알콜 음료만 마시며 시간을 때우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다. 카림은 자주 그를 눈으로 좇았는데, 스스럼없이 여러 사람과 어울리거나 가끔은 누군가와 사라졌다 돌아오곤 했다. 기분이 묘했다. 알을 깨고 나온 그의 모습을 직접 확인하니 후련한 한편 더는 자신의 보살핌이 필요 없어 보인다는 것이 아쉬웠다. 특히 그가 다른 누군가와 사라지는 뒷모습을 볼 때면 그게 유난히 마음에 들지 않아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느냐 질문을 듣곤 했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저도 똑같이 보란 듯 다른 이와 사라졌다 돌아오면 그가 꼭 그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어디 다녀왔습니까? 어이가 없어서. 내가 여기 있는데 왜 혼자 사라져요?”

카림이야말로 어이가 없었다. 이게 바로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건가. 카림의 긴 손가락이 그와 자기 자신을 번갈아 가리켰다.

“너는 되고. 나는 안 된다고? 하, 기가 차는군. 언제는 날더러 부부 관계 망치는 의부증이라더니.”

“당신은 태생부터 악마지만 저는 본래 인간인데요. 인간은 원래 비합리적입니다. 당신이야 내가 뭘 하든 그럭저럭 상관없겠지만 나는 신경 씁니다. 조심해요.”

드물게 할 말을 잃은 카림이 짧게 실소했다. 이 나이를 먹고 몸가짐을 조심하라는 말을 듣고 있는 게 실화인지 분간이 되질 않았다. 뭐 이런 인간 놈이 다 있지. 이젠 악마지만.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렇게 따지면 이쪽도 할 말은 있었다.

“지적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하나 짚어주지. 이쪽도 상관없지 않으니 너도 조심하라고.”

그의 입술 사이로 웃음이 흐름과 동시에 카림의 미간이 구겨졌다. 웃어?

“무슨 소립니까, 당신은 살아온 세월이 있으니 그 정도 마음은 적당히 조절할 수 있잖아요. 난 그게 안 됩니다. 그리고 솔직히, 술탄 노릇 할 적에 할 만큼 다 했을 것 아닙니까.”

“그래서 너도 할 만큼 하겠다고?”

“숙제나 과제도 아닌데 뭘 할 만큼 합니까. 1800년이나 산 악마가 이런 걸로 좀스럽게 굴지 말란 뜻입니다……. 자녀의 성생활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죠.”

“정말 저 좋을 대로 여기 붙였다 저기 붙였다 하는군. 이름을 잘못 줬어.”

이게 부인인지, 자식인지. 카림은 기가 차 이마를 짚었다. 말 바꾸기를 잘 하는 악마의 이름을 줘야 했다. 사기 당한 인간의 기분을 십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1800년에 가깝게 산 세월을 생각해보자면 조금은 너그러워져 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카림은 그의 제안 아닌 제안을 수용해주기로 했다. 그저 자신이 행동에 조금만 더 신경을 쓰면 되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카림의 다짐은 일주일을 못 갔다. 곱씹을수록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카림은 아예 하루를 외박했다.

언제나처럼 별 대단할 것은 없는 파티였다. 딱히 취하지 않는 술을 진탕 마시고 늘 그래왔듯 제게 접근하는 인간들과 어울려 놀았다. 거리낌 없이 스킨십을 나누었다. 그렇게 밤을 꼬박 지새우고 바깥의 냄새를 잔뜩 묻혀 아침 해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물을 한 병 꺼내 마시러 주방으로 향한 카림은 마침 커피를 한 잔 따르던 그와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묘하게 기분이 상한 이의 그것이었다.

“재밌었습니까?”

“역시 수절하는 것은 성미에 안 맞아서.”

“아뇨, 재미있었냐고 물어봤습니다.”

묘하게 속이 끓어 보이는 그를 보는 것이 만족스러웠다. 카림은 부러 지난밤을 곱씹는 양 즐거운 얼굴을 해보였다.

“재미있었지.”

“그럼 내게도 소개해주지 그럽니까. 재미있는 일이라면 나도 좋아하는데요.”

“이런 즐거움은 혼자만 알고 싶은 법이라.”

뻔뻔한 얼굴로 그렇게 대꾸한 카림은 그를 지나쳐 냉장고 문을 열고 생수를 한 병 꺼냈다. 그 일련의 동작들이 퍽 우아했다. 카림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으며 커피를 한 모금 마시는 그에게선 더는 이렇다 할 대꾸가 돌아오지 않았다. 유치하게도 그를 이겼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돌아오는 대꾸가 없으니 금세 기분이 찝찝해졌다. 잠시 입을 달싹이던 카림은 고개를 젓고 돌아섰다. 방으로 돌아가 느긋하게 한숨 잘 생각이었다. 뒤통수에 와 닿는 시선의 느낌이 오래도록 남아 카림의 신경을 갉작댔다.

그로부터 열흘 뒤, 카림은 으레 그래왔듯 어느 한 파티의 초대장을 받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디디 로렌스의 앞으로 온 초대장도 있었다는 것 정도였다. 호스트는 그의 연락처를 몰라 부득이하게 함께 초대장을 보낸다는 메시지를 전해왔다. 카림은 그것을 전달해야 할지 말지 고민했다. 파티에서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던 그의 모습을 떠올리면 전달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전달하지 않으려니 그런 저 자신이 너무 좀스럽게 느껴져서. 미간을 구긴 채 한참 고민하던 카림은 그날 저녁에서야 그에게 초대장이 왔었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참석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그는 선뜻 함께 가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파티에서 두 악마는 떨어진 자리에서 시간을 때우듯 보냈다. 논-알콜 칵테일을 홀짝이는 그는 이전까지의 파티와 다르게 누군가와 사라지지도 않았고, 간간이 주변으로 다가오는 이들을 귀찮아하는 것처럼 보였다. 카림은 제 주변으로 찾아드는 인간들을 적당히 상대해주면서도 그에게로 시선을 자주 주었다. 스스로 의식하고 있지도 않은 행동에 가까웠다.

“카림, 지난번에 즐거웠어요. 오늘도 밤새 있다 갈 거예요?”

어깨를 감싸오는 사붓한 손길에 카림의 눈이 제 옆으로 다가온 이에게 닿았다. 짙은 무화과 향이 훅 끼쳐들었다. 음, 글쎄. 아직 모르겠는걸. 습관처럼 웃음기 서린 음성을 내뱉었다. 그리고 흘긋, 가볍게 돌린 시선에 그가 곧게 저를 주시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시선을 마주한 채 그가 턱을 까딱인다. 마치 하던 대로 해보라는 듯한 제스쳐였다. 그것이 못마땅해 카림의 턱에 가볍게 힘이 스몄다. 하란다고 제가 못 할 줄 알았다면 오산이다. 카림의 큼지막한 손이 어깨를 감싸 안은 이의 허리에 자연스럽게 감겨들었다. 가볍게 웃는 표정으로 귓속말을 하듯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시선은 여전히 그에게로 향한 채였다.

“무슨 얘길 그렇게 재밌게 합니까?”

잠시 시선을 거둔 사이에 다가온 그가 불쑥 대화를 끊고 끼어들었다. 평소와 같은 빛을 띤 그의 황갈색 눈이 카림과 그 옆에 선 이에게 차례로 머물렀다.

“오늘의 불륜 상대는 이쪽입니까?”

마치 마시고 있는 음료가 맛이 없다고 이야기 하는 듯 무심한 어조였다. 팔로 감싸 안은 몸이 멈칫 굳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불륜이라는 자극적인 단어에 주변의 시선이 잠시 모였다 흩어진다. 물론 두 당사자에게 남의 시선은 신경을 쏟을 거리도 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카림이 재미있다는 듯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불륜?”

“왜요, 새엄맙니까? 제가 어머니가 이미 좀 많은데…….”

“괜한 시비를 거는군.”

“하하, 두 분이 할 이야기가 많은 것 같네요. 대화 나눠요.”

가운데 낀 이가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둘 중 누구도 황급히 자리를 떠나는 이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날의 파티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더 있어봐야 파티장에서 신경전을 벌이는 일밖에 없을 거라고 판단한 카림은 그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내내 두 악마 사이엔 오가는 말이 없었다.

“…….”

“거기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해서 집에 오니 할 말이 없나?”

명백한 시비조의 말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이 담긴 눈빛으로 카림을 빤히 쳐다보던 그가 긴 한숨을 지었다.

“그래요, 아까는 내가 조금 유치했습니다. 그러니까 눈에 안 띄게 그러면 좀 좋아요. 신경 쓴다고 했잖습니까. 조심하면 서로한테 좋을 텐데 왜 굳이 그 사단을 만들어요?”

“네가 먼저 도발했잖은가? 기꺼이 거기 어울려줬을 뿐인데 적반하장이군.”

“…….”

카림의 뻔뻔한 작태에 그가 눈을 깜빡였다. 할 말을 잃은 건지도 몰랐다. 카림은 그가 분명 눈으로 욕을 하고 있는 중이라 확신했다. 카림이 빈정거리듯 입술을 비틀었다.

“그래서, 너는 나를 상대로 뭘 하고 싶은 거지? 악마에게 수절을 바란다는 농담은 하지 않길 바라지.”

“독점하고 싶지만 책임지고 싶지 않습니다.”

기가 찼다. 독점하고 싶은데 책임은 지고 싶지 않다니, 이 얼마나 무책임한 소리인가.

“아주 훌륭한 악마가 다 됐군. 넌 선택을 해야만 해. 날 독점하고 싶으면 책임을 지란 소리지. 그게 싫다면 더는 내게 아무 것도 요구하지 말도록.”

“그럼 나에 대한 당신의 책임은 지난 2년으로 끝입니까? 불멸에 가까운 생을 줬으면 그걸 책임질 각오까지는 했어야죠. 당신에게 2년은 찰나지 않느냔 말입니다.”

“네가 먼저 내 책임의 경계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하지 않았나? 그때 그렇게 작정하고 사라지면서 결과적으로는 내 책임 아래에서 벗어났지. 그래놓고 지금 와서 책임을 들먹인다고. 인간은 이기적이라더니 지금 네가 딱 그 꼴이군.”

카림은 숫제 으르렁거렸다. 말을 할수록 그가 흔적을 감추고 증발하듯 사라졌던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제야 그때 느꼈던 감정 가운데에선 서운함도, 허전함도, 아쉬움도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카림은 지금껏 그와 함께 지내오면서 많은 것을 양보하고 참아왔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그가 도망을 쳤을 때조차 한 달을 기다려주지 않았던가.

“그래봐야 결국 당신 손바닥 안이라서 곧 잡히지 않았습니까.”

그 또한 지지 않고 으르렁댔다. 카림은 어느새 눈을 빨갛게 물들이고 있는 그를 향해 코웃음 쳤을 뿐이었다. 감정이 격해지면 드러나는 악마로서의 신체적 변화가 그에게도 나타나는 것이다. 이제 악마가 되었으니 당연히 그럴 밖에.

“네가 이 인간 세상에 발붙이고 있는 이상, 내게서 이름을 받아간 이상 내 손바닥 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일은 없을 거야. 알겠나?”

“……. 날 지하 세계로 끌어내린 이유가 뭡니까?”

카림은 근본적인 이유를 묻는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언젠가는 한 번쯤 받을 질문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카림 저 스스로도 고찰해본 적이 있는 질문이었다. 진실만을 말하자면 첫 시작은 단순 흥미에 가까웠다. 카림은 그 사실을 인정했다. 그는 인간인 주제에 언제든 미련 없이 발을 뗄 수 있는 사람처럼 말했기 때문이다. 거기 더해 한낱 말 한마디로만 끝날 수 있었던 것을 구두계약이라는 말로 묶은 것은 그였다. 그 말을 들으며 그가 사실은 인간인 것에 욕심이 없는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심지어 그는 제 장례식에 와서 짜증내지 말고 부지런해지라며 못까지 박았다. 그래서 카림은 궁금해졌다. 디디 로렌스라는 인간을 타락시키면 욕심이란 것을 갖게 될까. 욕심을 품은 디디 로렌스는 어떤 존재가 될까. 알고 싶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선 카림의 욕심이기도 했던 것이다.

“…악마도 욕망하는 존재이기 때문이지.”

하지만 그 사실을 그에게까지 밝혀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자기의 밑천을 모두 드러내 보이는 것은 불리한 일이라는 것을, 카림은 오랜 삶의 끝에 습득했으므로. 하지만 모든 것을 차치하고 카림은 그의 근본적 물음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금에 와서는 돌이킬 수도 없는데 그깟 이유가 무어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

“이유야 어쨌든 너는 내 손을 잡고 새로운 대안을 골랐는데 지금에 와서 그 이유가 중요한가?”

“그럼 다음번에 또 당신의 호기심을 끄는 인간이 생기면, 그 인간도 여기 데려올 겁니까? 그럼 이 집엔 앞으로 도대체 몇 명의 내가 더 추가될 예정인지 미리 예고나 해주시죠.”

지금까지 참고 있던 카림 또한 그 말에는 뚜껑이 반쯤 열렸다. 분노가 들끓자 손톱이 금세 새카맣게 물드는 것이 보였다. 습관적으로 가볍게 손을 말아 쥔 카림이 싸늘하게 내뱉었다.

“내가 미쳤다고 그렇게 공을 들여가며 또 악마를 만들어내겠나? 너 같은 지옥의 주둥이는 하나면 충분해.”

“차라리 내가 당신 손바닥 안에서 영원히 멍청하게 있는 게 나았을 법 합니다.”

“네 성격에 뛰쳐나가는 건 예견된 수순이었겠지.”

가볍게 조소했던 카림의 웃음이 서서히 멎었다. 이내 애매모호한 얼굴로 턱을 매만졌다. 깨달음의 순간은 종종 밑도 끝도 없이 갑작스러울 때가 있었는데, 카림은 지금이 그랬다.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카림은 여전히 그의 세계가 넓어지는 것이 싫었다. 그의 세계 안에 저만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의 세계가 오롯이 자신만의 것이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진실된 욕구였다. 그에게 얻어내고 싶었던 것은 연인에 가까운 위치가 아니라 연인으로서의 자리였던 것이다.

이쯤에서 카림은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했다. 정말 그를 위해 자신의 가치를 내던지지 않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 그리고 그 답이 이전과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이 당혹스럽게 다가왔다. 기실 카림은 그가 다른 부네들에게 있어 좋은 먹잇감으로 비춰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악마장 중 하나인 제 피로 악마가 되었다고 해도, 그는 능력을 활용하는 것이 아직 미숙한 신생 악마에 불과했다.

실제로 카림은 그가 한국에 있을 때 그를 노리는 다른 악마를 제 손으로 소멸시킨 적이 있었다. 카림은 분명 그 악마를 소멸시키는 것에 망설임이 없었다. 자신의 안위 같은 건 애초에 고려사항에 들어있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를 단지 제 권속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다른 권속이 똑같은 위험에 처했을 때에도 자신은……. 아니다. 카림은 제 생각에 제동을 걸었다. 다른 권속과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짓이었다. 그는 유일무이한 존재였으므로. 거기 더해 단지 가진 힘의 크기 차이 때문에 자신의 목숨이 위험에 빠지는 일은 없었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자신의 힘을 믿었기 때문에 고려사항이 아니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7대죄악의 악마장이라는 자리는 우습게 볼 것이 아니니까.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조금은 편했다. 카림은 마음 속 디디 로렌스의 깃대가 꽂힌 자리를 확인했다. 어느덧 짙은 슬픔으로 남은 자리를 지나 두껍게 쌓아올린 벽에 바짝 붙어 꽂혀있었다. 영원불변할 거라 생각했던 벽이 흔들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편했던 마음이 삽시간에 불안해졌다. 그것은 마치 자신이 딛고 선 바닥의 기반 자체가 흔들리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을 변화시키고 있다. 그를 이대로 둬도 괜찮은 걸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바닥을 내려다보던 카림의 시선이 그의 얼굴에 가 닿았다. 그의 입술 사이로 짙은 체념조의 말이 흘러나왔다.

“…그럼 나도…… 아무렇게나 굴지 않을 테니까, 당신도 내 속 시끄러워지는 일은 웬만하면 하지 마십시오. 어차피 나는 소멸하기 전까지 당신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고, 당신도 내가 신경 쓰이는 건 마찬가지일 테니…… 서로의 심기를 어지럽지는 일은 삼가자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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