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c.

단언의 붕괴 上

녹턴(2020), 카림 with 디디

*[슬픔에 대하여]에서 이어집니다.


목숨을 다할 수 있을 만큼 소중한 존재는 없을 거라고 단언한 이래, 카림은 천 년의 시간을 보냈다. 단언은 확언이 되어갔고 그어놓은 선은 견고한 벽이 되었다. 그사이 카림의 옆자리엔 여섯 명의 부인이 차례로 머물렀다 떠나갔다. 그들은 모두 인간이었고, 사탄의 계약자이거나 그가 악마라는 것을 알고도 스스로가 원해 유희에 어울려준 이들이었다. 인간의 사회에 스며들기 위해서는 인간의 행동양식을 흉내낼 필요가 있었으므로 고른 선택지가 결혼이었던 것이다. 짧게는 5년, 길게는 30년의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도 카림의 마음에는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카림에게 마음을 요구했던 부인은 두 명 정도였는데 그들 모두 결말은 좋지 않았다. 스스로가 불행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카림의 곁에서 자연스레 새 사람을 찾아 마음만 건네는 식으로 그들 자신의 삶을 살았다. 자유롭게 사랑하는 그녀들을 보며 카림은 종종 제 마음 속 깊은 곳에 꽂혀있었던 한나의 깃대를 떠올렸다. 이제는 삭아 그 흔적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지만 그녀 이상으로 마음 속 깊이 들어온 존재는 없었다. 때문에 천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타인에게서 자신을 내던질만한 가치를 찾을 수는 없을 거란 카림의 생각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녹턴으로의 초대장이 날아왔을 때 카림은 이번의 유희를 슬슬 정리해볼까 마음 먹고 있던 참이었다. 성을 찾지 않은 기간이 오래 되기도 했거니와 놀고 먹는 일에도 조금 질려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사의 가호를 받은 인간들과 악마들이 한 공간에 모여 평화를 이야기한다는 것이 결코 쉽게 일어나는 일은 아니었으므로 도무지 빠질 수가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곳에서 뭐가 벌어져도 벌어지지 않겠는가 하는 마음도 있었고. 

그래서 어땠는가를 생각해본다면 아주 즐거운 일이 벌어지긴 했다. 그 즐거운 일이 불러온 결과는…… 자신의 예상 밖이긴 했지만 말이다. 카림은 힘의 일부를 봉인―그것이 일시적이란 것은 후에야 알았지만―당했다. 그 어느 누구도 아닌 자신의 선택에 의한 결과였다. 한 번도 누려본 적이 없다면 모를까, 본디 제 것으로 누리던 것을 일부나마 잃고 나니 불편한 것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카림은 겸사겸사 제 성으로 돌아갔다. 제게 있어 가장 안전한 곳. 힘의 일부를 잃었어도 사탄은 여전히 사탄이었으므로, 결코 쉬이 구마당할 존재는 못 되었지만 무드라는 게 있는 법이다. 그리고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다.

녹턴에서 카림은 조금 특이한 성직자 하나를 마주쳤다. 성경으로 남의 발등을 찍고도 뻔뻔하기 그지 없이 요즘은 공장이 잘 돌아가 성경이 훼손되어도 새 것을 사면 된다고 하던 그는 흔히 생각되어지는 성직자의 모습을 갖추고 있지는 않았다. 그 탓에 한정된 공간의 호텔에서는 오래지나지 않아 악마보다 더 악마같은 사제라는 별칭이 그에게 따라붙은 모양이었다. 비록 별칭의 기원은 알 수 없었으나 느긋한 태도로 살얼음판 위 평화를 즐기던 카림의 귀에도 그 소식이 들릴 만큼, 그럴듯한 별명이었겠거니 했다.

그 일로 말미암아 디디 로렌스라는 사제에게 조금 흥미가 생긴 것도 사실이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녔기에 그런 별칭이 붙은 건지 궁금했다. 카림은 그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번의 관찰 끝에 그가 사제보다는 악마에 더 어울리는 것 같다는 결론을 제멋대로 내렸다. 묘하게 모든 것에 애착이 없어보이는 태도도 그러했고, 악마보다 악마같은 사제라는 소리를 듣는 점에서 악마가 된다면 인간의 삶을 사는 것보다 더 잘 살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웃기네. 날 지하로 데려가서 뭘 할 생각입니까. 거기도 변호사가 필요해요?”

“악마가 되기에 썩 괜찮은 재목 같아서 말이야. 방법이 없을까 강구해 보려고.”

“그럼 이렇게 합시다. 당신이 그 방법을 찾아오면, 군말없이 따라가죠.”

“그래? 이 곳을 나가면 곧장 지옥으로 돌아가야 할 이유가 생겼군.” 

구두 계약도 계약이라 말하는 단정한 목소리를 들으며 카림은 조금 웃었다. 주로 자신이 인간들에게 하던 소리를 인간에게 듣고 있으니 신선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카림에게는 반드시 지켜야 할 계약이 생겼고, 아주 긴 외출 끝에 성으로 돌아온 카림은 그간 다른 이에게 맡겨놓았던 성을 직접 살피고 손보았으며 그 이외의 시간을 서재에 틀어박혀 지냈다. 몇 가지 방법을 찾아내는 것은 생각만큼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개중에서도 마음에 드는 방법을 찾고 싶다는 욕심에 시간을 더 쏟았다. 저로서도 악마를 만들어보기는 처음이었으므로, 공을 들이고 싶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래서 마음에 드는 방법을 찾았는가 하면 애석하게도 그것은 아니었으나 어쨌든 자신이 제시한 방법 가운데 하나를 그가 선택했다는 것이 중요했다. 

공을 들이고 싶다던 제 생각을 읽기라도 한 건지. 그는 굳이 많은 시간을 투자해가며 서서히 악마로 변해가길 원했다. 한번에 많은 피를 먹고 싶지 않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디디 로렌스가 계약을 이행하기로 하면서 카림은 로마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몇 년 전 뉴욕에 구해두었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와 함께 지냈다. 자신의 집에는 방이 많았고, 그러니 한 명의 식구가 늘어난다 한들 문제될 것은 없었다. 다만 낯선 것이 있다면 집에서 느껴지는 다른 존재의 인기척이라던지 제 것이 아닌 옅은 생활감 정도가 다였다. 그러나 그것이 크게 거슬릴 정도는 아니었으므로 디디 로렌스는 동거인으로 두기에 썩 괜찮은 인간이라는 게 카림의 감상이었다. 

카림은 하루에 한 번, 손가락을 그어 그에게 피를 나눠주었다. 처음엔 묘하게 거부감을 내비치는 듯 보였던 그도 오래지 않아 적응해나갔다. 피를 마시기 시작하면서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냈고, 카림 또한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면서 한 사람과 한 악마는 집에서 얼굴을 자주 봐야했다. 애초에 한 지붕 아래에서 사는 이상 마주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집이 넓다곤 해도 주방은 하나였으니 자연스레 함께 식사는 하는 일이 생겼고 가벼운 산책을 나가거나, 한 공간에서 각자의 책을 탐독했다. 마치 가랑비에 옷 젖듯 서로가 조금씩 친근해졌다. 의식하지 못한 사이 곁을 조금씩 내어주고 있었다. 

“왜… 그게 안 되지?”

“그게 어떻게 됩니까?”

“그러니까 날개를 펼친다는 느낌을 상상하라고.”

“날개를 가져본 적이 없는데 뭘 어떻게 상상합니까.”

“…….“ 

디디가 피를 마신지 일 년이 되었을 무렵 그는 거의 악마에 가까웠다. 카림은 그에게 능력을 사용하는 법 따위의 악마로서 살아가는 데에 필요하다 생각되는 것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카림이 생각키에도 저는 좋은 스승이 아니었지만, 그 역시 좋은 학생은 아니었던지라 둘의 수업 아닌 수업은 대체로 난항을 겪었다. 그 가운데 특히 가장 어려웠던 것은 날개를 꺼내는 법이었는데 눈을 뜬 그 순간부터 자유롭게 날개를 써왔던 카림이 이제 막 날개를 펴는 것부터 배워야 하는 그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에는 상당한 애로사항이 있었다. 오랜 갈등 끝에 카림은 그에게 날개를 펴는 법을 가르치길 포기했다. 앞으로 시간은 많으니 언젠가는 되겠지. 그것이 카림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 년이 되었을 쯤 카림은 이미 완벽히 악마가 된 디디 로렌스에게 부네Bune라는 새 이름을 주었다. 탄생시킨 악마에게 이름을 주는 것은 부모격 존재의 의무였으므로 카림은 제법 진지하게 고심했다. 화술로 벌어먹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변호사라는 직업을 가졌던 그에게 화술과 학습력, 회화술 따위를 지배하는 부네란 이름은 썩 괜찮게 느껴졌다. 거기 더해 카림은 그가 원한다면 그를 지옥 유일의 부네로 만들어 줄 의향도 있었다. 제 권속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어디 가서 무시당하거나 기는 죽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 탓이다. 물론 지극히 악마적인 그 제안이 먹혀드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카림은 그를 온전한 악마로 만든 뒤에도, 그와 한 집에서 같이 살았다. 살던 곳에서 계속 살고 싶다는 게 그의 의견이기도 했고, 카림 역시 동거인의 존재가 그리 나쁜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카림은 녹턴을 다녀온 후에라도 정리하려 했던 유희를 그렇게 계속 이어갔다. 그에 대한 흥미가 여전히 고개를 쳐들고 있었으므로 그를 지켜보고 싶었고, 거기 더해 그가 악마로서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얼마간은 곁에서 길잡이의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는 묘한 책임감을 느꼈기에. 

 2년의 칩거 끝에 그는 다시 일을 시작했다. 카림은 여전히 ‘옛 귀족의 후손으로 물려받은 재산이 많아 놀고먹는 한량’이라는 자신의 컨셉에 충실했다. 느긋하게 일어나 아침 식사를 하고, 습관처럼 인스타그램을 확인하거나 사진을 찍어 올리곤 비교적 친근한 지인들의 댓글에 어울려주었다. 인간들은 가진게 많은 이들의 삶을 그렇게들 궁금해 했다. 카림은 그들에게 그 일부를 드러내 주는 것으로 그들의 욕망을 해소시켜주었다. 한때 왕조를 일으킬만큼 부지런히 살았으니 한껏 게을러진대도 자신을 탓할 존재는 없으리라. 애초에 이젠 그때의 일을 기억하는 인간도 더는 없었다. 

그러나 한때 부지런했던 습관은 쉬이 버려지질 않아서. 카림은 느긋한 삶을 바쁘게 살았다. 세상은 넓었고 그만큼 할 수 있는 것은 많았다. 시간이 흐르며 변화하는 인간 세상은 카림의 눈을 즐겁게 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 도시 저 도시를 옮겨다녔다. 때로는 얌전히 집에서 웹서핑을 즐기거나 사람이 많이 오가는 곳으로 나가 그들의 모습을 그림으로, 사진으로 담기도 했다. 그리고 늦은 오후 쯤 집으로 돌아와 소파에 길게 기대앉아 책이라도 읽고 있으면 일에 시달린 그가 돌아와 묘한 얼굴로 앞에 서는 것이다. 

“심심하지 않습니까?”

“그래야 하나?”

“전 악마가 덜 됐나, 일을 안 하면 심심하고 일을 나가면 빡칩니다. A/S 좀 해주시죠.”

“너무 성실한 것도 문제군. A/S가 아니라 노는 법을 공부해야 할 것 같은데. 주말마다 놀아줄까.”

종종 식사와 산책을 같이 하는 정도였던 두 악마는 그 이후 대부분의 주말을 함께했다. 카림은 자신의 취미를 그에게 소개시켜주었다. 카레이싱을 체험시켜주었고 함께 요트를 탔다. 그 외에도 돈을 실컷 쓰는 쇼핑의 즐거움에 대해 알려주거나 평범하게 영화를 보기도 했고 수영장―그가 절망적인 맥주병이란 사실을 카림은 동거 2년만에 처음 알았다―을 간다던지 혹은 그의 취미를 함께 했다. 수영은 그렇게 잼병인 주제에 승마며 사격과 같은 여타 스포츠의 실력은 좋아서, 그는 카림을 제법 즐겁게 했다. 지금껏 홀로 살아오는 것에 익숙했던 카림에게 디디 로렌스의 존재는 단순한 동거인을 지나 친구 또는 가족에 가까워 가고 있었다. 카림은 그를 선뜻 ‘자신이 아끼는 존재’ 카테고리에 넣었다. 기실 카림이 아끼는 존재는 드물었다. 하지만 악마가 된 그는 피로 이어진 존재나 마찬가지이니 그 정도 위치를 차지할 자격이 있다고. 마음 깊은 곳에 흐리게 남은 누군가의 흔적을 떠올리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즈음 악마들 사이에선 이상한 소문이 알음알음 돌았다. 사탄이 인간을 악마로 바꾸어 옆에 끼고 산다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새롭게 탄생한 부네의 대디. 소문은 발 없는 말을 타고 돌고 돌아 당사자인 카림의 귀에도 들어왔는데, 카림은 그 소문을 듣고서도 코웃음 칠 뿐이었다. 인간의 파티며 악마의 파티를 가리지 않고 초대에 응하다가 한동안 발길을 끊었더니 별의 별 소문이 다 돈다 싶었다. 그래서 카림은 다시 자신을 찾는 이들에게 조금씩 응해주기 시작했다. 주말이면 파티에 참석하느라 집을 비우는 일이 늘었다. 그러던 어느날 문득, 주말에도 집에만 있는 그를 떠올렸다. 이십칠 년간은 인간이었으니 인간관계가 아주 없지는 않을텐데 그의 주말은 저와 함께 외출하는 것이 아닐 때엔 항상 정적이었다. 

“파티에 초대를 받았는데. 같이 가겠나?”



인간들은 파티에 유명세를 가진 이를 초대하길 좋아했다. 그것으로 자신이 연 파티의 가치가 올라간다고 믿고 있는 것 같았고, 참석한 인간들의 반응을 살피면 그것이 아주 틀린 말도 아닌 것 같았다. 제게 말 한 번이라도 더 걸어보려 눈치싸움을 해대는 모습들이 우습기도 했고. 어쨌든 지금 인간 카림 칸의 신분은 ‘혈통이 귀한 놀고먹는 한량’이며 ‘인스타그램 셀럽’이기도 했으니 인간들에게 아주 좋은 게스트인 셈이었다. 때문에 카림이 디디를 대동하고 파티에 나타났을 때, 그가 사람들의 호기심어린 시선의 주인공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착각이라면 미안합니다만 사람들이 쳐다봅니다. 저 몰래 연예계 데뷔라도 하신 거면 지금 빨리 말씀하시죠.”

조용히 중얼거리는 것에 가까운 말을 들은 카림이 재미있다는 듯 소리내어 웃었다. 그리고 그것이 또 사람들의 시선을 이끌어왔고, 디디는 결국 말을 잃은 채 조용히 샴페인잔을 기울이는 게 다였다.

“이분은 누구예요? 무슨 사이? 처음 보는 분인데.”

이 파티를 주최한 호스트가 다가와 물었다. 애초에 초대를 받은 것은 저 하나였기에, 카림은 파티에 오기 전 동행을 데려가도 되겠냐 물었고 흔쾌히 승낙한 호스트의 관심이 동행인 그에게 쏠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카림은 부드럽게 눈을 휘어 웃었다. 

“글쎄, 무슨 사이일 것 같지?”

인간 카림 칸에게는 무수히 많은 소문이 있었다. 셀럽 누구와 사귄다더라, 아니다 갈아치웠다더라, 누구와 잤다더라, 사실은 어디의 후손이라더라 따위의 가십들이었다. 물론 카림은 그 어느 것에도 대응한 적이 없었다. 인간들 사이의 구설은 제게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했으니 굳이 말을 덧댈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카림은 그 소문에 소문이 하나쯤 더 추가되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고 카림에게 불분명한 답을 들은 호스트는 야릇한 표정을 하고서 다시 사람들 사이로 모습을 감추었다. 

질문에 되물음을 하는 것으로 두루뭉술하게 넘겼으나 카림은 한동안 호스트의 질문을 곱씹었다. 문득 그와의 관계를 지칭할만한 적절한 단어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탓이다. 가족은 아니되 피를 나눈 존재였고, 악마됨을 가르치는 제자였다가, 때로는 취미생활을 함께 즐기는 친구이기도 했다. 거기 더해 아끼는 존재라는 호칭은 그가 자신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알 수 없으니 상당히 일방적인 구석이 있었으므로 적절하지 않은 것 같았다. 

“밖에서 보통 그런 식으로 웃습니까?”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전혀 예상에도 없던 질문을 받은 카림의 눈이 조금 동그랗게 변했다. 질문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기는 오랜만이었다. 

“그래서, 싫었나?”

“싫을 게 뭐 있겠습니까? 그냥 궁금해서요.”

카림의 고개가 기울었다. 아무리봐도 싫어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가 싫어할 이유가 뭔지, 손에 잡힐듯 말듯 어룽어룽했다. 한동안 그는 무언가를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혼자하는 외출을 늘려나갔다. 처음엔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드디어 버려두었던 인간관계를 돌보는 건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것이 점차로 반복되어갈수록 카림은 자신의 기분이 오묘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건 마치 자기가 오래도록 품었던 새끼를 떠나보내는 부모의 심정인 것 같기도 했고 밖으로 나도는 권속에 대한 묘한 배신감 같기도 했다. 이대로 제게서 떠나가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웃겼다. 애초에 그와 자신은 구두계약을 통해 묶인 사이일 뿐, 떠나간다는 말이 성립할 수 있는 관계도 아니었다. 그 사실이 카림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요즘 외출이 잦던데.”

그의 외출은 그러고도 한동안 쭉 이어졌다. 결국 카림은 그에게 의문을 던졌다. 그가 나가서 무엇을 하고 다닐지도 궁금했고, 누굴 만나는지도 조금은 궁금했다. 카림은 이것이 사건사고와 재미있는 일을 좇는 자신의 성정 탓이라고 생각했다. 

“회사에서 잔업을 했습니다. 최근에 개봉한 영화를 보기도 했고 성당에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그것 외에도 이것저것 했죠.”

그렇게 나가서 하고 오는 게 고작 그런 것 뿐이라니. 딱히 뭔가 대단한 것을 하고 오길 바랐던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궁금함을 품은 것에 대한 답이 시원찮아 조금은 김이 샜다.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개운해진 것도 아니어서 카림은 그를 앞에 두고 모호한 얼굴로 턱을 매만졌다. 자신이 그에게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마음이, 묘하게 복잡했다.

“난 네가 혼자 나가는 게 마음에 안 드는데. 너도 이랬나?”

자신이 파티에 참석하느라 자리를 비울 때 비슷한 것을 느꼈냐는 의미였다. 그가 가만히 웃었다. 오래지 않아 그렇다는 대답이 되돌아왔다. 

“하지만 우리가 지난 이년간 너무 허물없이 붙어있었으니까요. 당신에게 그런 마음이 드는 것도 이상하지 않겠죠.”

그의 말대로, 지난 이년간 너무 허물없이 붙어있긴 했다. 하지만 조금은 달랐다. 카림은 디디 로렌스를 특별히 아끼고 있다. 그것은 단지 지난 이년간 허물없이 붙어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적어도 그의 존재를 자신과 대등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다른 인간을 애완에 가깝게 보고 있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카림이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다른 인간도 애완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단번에 딱 자른 그가 재차 입을 열었다. 

“당신에게 여덟 개의 계절은 눈 깜짝할 새겠지만 나는 아직 인간의 시간 감각을 사는 중이라 그렇지 않아요. 그 시간동안 당신에게 부모와 형제와 친구, 연인의 위치를 전부 줘버렸으니까 이제 회수해야겠습니다. 물론 좋았습니다. 누군가의 소속이고 누군가의 무엇이라는 안정감이요. 하지만 둘 중 하나가 소멸하기 전까지 계속 이렇게 살 수는 없으니까요.”

지난 이년간의 시간이, 서로에게 다르게 느껴졌을 거라는 것을 카림은 처음으로 실감했다. 그의 말대로 자신의 지난 이년은 눈 깜짝할 사이의 짧은 계절에 불과했다. 그것은 자신의 삶이 무한에 가깝기 때문이고, 한정된 시간을 갖고 살았을 그에겐 당연히 그럴 수 없는 문제였다. 간과하고 있었다. 그리고 뒤이어 깨달았다. 자신의 마음이 복잡했던 것은 가족, 친구, 연인 그 모든 감정이 일정부분 다 섞여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는 분명 ‘자신이 아끼는 존재’ 카테고리에 분류되어 있지만 카림은 그의 자리가 어디쯤인지 알 수 없었다. 짙은 슬픔으로 남은 누군가의 자리를 생각한다. 어쩌면 그 자리와 비슷한 위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안정감에 조금 더 안주해도 되지 않겠나?”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엔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하는 희미한 조급함이 묻어있었다. 회수해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것이 카림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어쨌든 그는 제게 있어서도 유일무이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지난하기 그지없던 삶에 들여놓은 새로운 존재를 이렇게 놓치는 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손에 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내가 어디로 가겠다는 건 아닙니다. 일단 여기가 직장하고 가까워서요.”

“…….”

카림의 미간이 불만스럽게 와작 구겨졌다. 그걸 말한 게 아니었을텐데. 

“그리고 내가 인간일 적에 얼마나 편하게 살아왔는지 알겠군요.”

“…지금껏 네가 살아온 세상은 정말 그저 알 속이었겠지.” 

모든 인간은 좁은 알 속에서 산다. 그것을 깨고 나오느냐 마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그는 이제 인간이 아니게 되었으니 더는 제게 맞지 않는 그 알을 깨고 나와야 했다. 하지만 그것이 제게서 완전히 독립하는 일이어선 안 된다고, 카림은 저조차 모르는 은연중에 그렇게 생각했다. 그것이 비틀린 소유욕을 닮아있다는 자각 또한 없었다. 그래서 카림이 디디를 손에 쥐어야겠다고 생각한 이후, 무언가의 행동을 취했는가 하면 딱히 그렇지는 않았다. 다만 그를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하는 날이 늘었다. 이도저도 아닌 날들이 한 달, 두 달 흘렀다. 그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둘 중 하나가 소멸하기 전까지 무어라 지칭할 말도 없는 이런 이상한 관계로 살 수는 없었다. 그를 손에 쥐기 위해선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지? 

그쯤이었다. 디디 로렌스가 자취를 감춘 것은. 제게 배운 것을 써먹어 흔적을 지우고 자취를 감췄다. 그가 잘 배운 것을 칭찬해야 하는지, 증발하듯 사라진 것에 화를 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카림은 그가 남겨놓고 간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한 권과 그 책 사이에 끼워져 있었던 곧 온다는 내용의 메모 한 장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메시지를 끼워둔 페이지의  구절은 이미 여러번 읽어 외웠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그 내용을 찬찬히 곱씹을수록 화가 났다. 손 닿는 곳에 있다가 자리를 박차고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나가버린 그에게. 태어나려는 자는 세계를 파괴해야한다. 동의하는 구절이었다. 하지만 그는 제가 탄생시킨 제 것인데. 제 손 안에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래. 카림은 그의 세계가 넓어지는 것이 싫었다. 

그러나 그가 스스로를 지킬 줄 아는 어엿한 악마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은 진심이어서 카림은 저 스스로가 그를 어떤 위치에 놓고 싶어 하는 것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손에 어느정도 쥐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달아나버렸다. 안주해도 되지 않겠냐는 자신의 물음에 딴소리를 한 것은 도망치기 위해서였나. 하루에도 몇 번씩 화가 났다. 아주 오랜만에 골치가 아팠다. 그가 어디로 모습을 감추었는지 소재를 좇으면서 디디 로렌스의 존재를 곱씹고 또 곱씹었다. 그럴수록 화가 났다. 괘씸했고, 배신감이 들었다. 왜 화가 나는지 스스로 알 수 없다는 점이 또 화가 났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