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c.

슬픔에 대하여

녹턴(2020), 카림


모든 사고하는 존재는 감정을 가진다. 감정의 크기는 각각 다를지라도 희노애락에 뿌리를 둔 다양한 갈래의 감정을 갖는다. 물론 드물게 감정을 갖지 못한, 혹은 잃어버린 경우가 있긴 했으나 어쨌든 진리에 가까운 한 문장임은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카림 또한 빗겨가지 못하는 명제였다. 지구를 담은 듯한 눈을 뜨고 세상을 보게 되면서, 카림은 제 안에서 피어오르는 다양한 감정들을 하나씩 경험해나갔다. 분노하는 것이 생겼고 즐거워하는 것이 생겼으며 싫어하는 것이 생겼다. 그리고 그보다 조금 더 느리게, 좋아하는 것이 생겼다. 한 번 깨우친 감정은 그 안에서 또 다양하게 세분화되어 차곡차곡 저장되듯 카림의 기억에 남았다. 그 모든 것이 백 년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시간이 켜켜이 쌓였다. 백, 이백, 삼백. 거기에 또 백, 이백, 삼백. 카림은 꽤나 그럴듯하게 삶이라는 것을 살아나갔다. 그러나 카림은 좀체 슬픔이란 것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주변으로 시선을 돌려도, 제 안을 들여다보아도 슬퍼하는 것을 찾을 수 있는 길은 요원해보이기만 했다. 세상에 슬픔이라는 감정이 존재하지 않는가 하면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아,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을 향한 카림의 갈구는 그 깊이를 더해갔다. 마치 그 슬픔이라는 감정이 가질 수 없는 트로피 혹은 메달처럼 느껴졌다. 삶을 살아감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요소는 아니지만 가져보지 못 했으니 한 번쯤 손에 쥐어보고 싶은 것. 슬픔을 대하는 카림의 생각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리고 팔백 년의 시간을 쌓아올렸을 때 카림은 어쩌면 자신에겐 슬픔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계기는 사소했다. 친근하게 지내던 악마가 제 삶의 동반자를 잃고 가슴 치며 슬퍼하는 모습을 본 것이다. 마치 통증을 느끼듯 가슴을 움켜쥐고 꺽꺽대며 우는 모습을 멀거니 서서 내려다보았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그가 낯설게 느껴졌다. 슬퍼하는 존재는, 비탄에 빠진 존재는 그렇게 되는구나. 그것이 감상의 전부였다. 이후 그 자신의 집에 틀어박혀 하루가 다르게 메말라 가던 악마는 스스로의 의지로 구마 사제의 품에 자폭하듯 뛰어들었다고 했다. 이해되지 않았다. 미련하고 멍청했다. 

친근하게 지냈던 악마를 잃었으나 카림에게 이렇다 할 추모의 감정이 생겨나는 일은 없었다. 그것은 결국 그의 선택이었으므로 동정할 가치도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빈자리는 금방 채워졌다. 카림의 주변은 언제나 다양한 존재들로 붐볐기에. 기실 무언가를 잃었다는 느낌조차 없었다. 그리고 그 즈음 카림은 처음으로 그녀를 만났다. 솔로몬의 72 악마 가운데 끄트머리에 가까운 이름을 가진 은발의 악마. 7대 죄악을 관장하는 이름을 가진 카림에 비하면 나약하기 그지없는 존재였다. 

프랑스 파리, 파리 식물원을 마주보고 선 뷰퐁 가 여섯 번째 집. 얼굴을 알고 지내는 정도의 동족이 인간 세상에서 주최한 악마들만을 위한 파티였다. 악마들 사이에서 나름 자신의 존재를 확고하게 다져나가고 있던 존재들이 참석자의 대부분이었고, 그 속에 끼지 못하는 몇 악마들이 마치 신기한 동물처럼 다른 악마들의 노골적인 구경거리가 되고 있었다. 그녀 또한 구경당하는 입장에 있었는데, 카림은 그저 그녀의 머리가 불빛을 받아 금발로 보이지만 사실은 은발이라는 것 외에는 별다른 감상을 느끼지 못했다. 

어느 파티를 가도 카림은 대체로 그 장의 중심에 위치했다. 그것은 7대 죄를 관장하는 악마장으로서 당연히 감당해야 할 이목이었고 카림은 그것을 아주 적절하게 잘 이용하는 편에 속했다. 그러나 그것이 전혀 성가시지 않은가 하면 또 그런 것은 아니어서, 오늘도 어김없이 부나방처럼 주변에 몰려들어 한마디라도 더 붙이려 떠드는 악마들을 적당히 물리고 테라스로 나가려던 참이었다. 옆에서 은발이 쏟아지듯 휘청인다 싶었더니 예의 악마가 카림의 앞으로 털퍽 넘어졌다.

카림은 그녀가 쥐고 있던 술잔을 어렵지 않게 낚아챘다. 그것을 들고 그대로 넘어졌다간 자신의 옷을 적실 것 같았기 때문이다. 황망한 얼굴의 그녀가 바닥을 짚은 채 카림을 올려다보았다. 작은 소란 아닌 소란에 주변으로부터 시선이 쏟아졌다. 누군가로부터 작게 키득이는 소리가 흘렀다. 그것만으로도 카림은 그녀가 혼자 넘어진 것이 아니라 다른 이의 발에 걸려 넘어진 것임을 대충 짐작 할 수 있었다. 질이 나쁜 놈들은 그런 유치한 짓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모든 악마가 그런 장난을 간파할 수 있는 영악함을 지닌 것은 아니었다. 

짐시간 그 황망한 얼굴을 무감히 내려다보다, 손에 쥔 것을 가까이 선 다른 악마에게 대충 떠넘기고는 커튼을 드리워 놓은 테라스로 빠져나갔다. 고작 커튼 한 장을 사이에 두고 있을 뿐인데 안쪽의 소란함이 한결 차단되었다. 여름의 끝자락에 다다른 저녁공기는 이전에 비하면 한결 서늘함을 품고 있었다. 잔잔하게 빛을 발하는 달을 올려다보고 있을 무렵, 또각이는 발소리와 함께 인기척 하나가 뒤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나약한 기척이 조금 전 제 앞으로 넘어졌던 악마임을 짐작할 수 있게 했다. 

“사탄… 맞으시죠?”

카림은 그제야 몸을 돌려 그녀를 마주했다. 허리께까지 길게 내려오는 은발이 온전한 제 색을 띠고 바람에 흔들렸다. 적당한 넓이의 동그란 이마와 오똑한 콧대, 붉게 칠한 입술이 작은 얼굴에 오밀조밀 모여있었다. 카림은 시선을 아래로 내리다가, 그녀의 손이 블리오 자락을 꾹 움켜쥐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마치 긴장한 이처럼. 

“누가 보면 내가 널 잡아먹기라도 하는 줄 알겠군. 무슨 용건이지?”

“아… 저는, 저는 은발의 데카라비아… 한나라고 하는데… 사탄께 부탁이 있어서…”

“카림.”

“네?”

“인간 세상에서 진명을 함부로 부를 건가?”

짧게 탄성을 터트리며 고갤 주억거린 악마가 연신 블리오 자락을 만지작거렸다. 카림의 얼굴에 이내 심드렁한 빛이 들었다. 그녀의 입에선 아직도 용건이 나오지 않고 있었다. 한나절은 걸리겠군. 시선도 마주치지 못하는 얼굴을 빤히 보던 카림이 걸음을 뗐다. 그녀를 지나쳐 다시 안으로 들어가려던 때에, 뒤에서 옷자락이 미약하게 붙들렸다. 카림의 입술 사이로 흐르는 한숨은 귀찮은 기색이 여실했다.

“처음이니 말해주는 건데, 나는 날 함부로 붙잡는 걸… 제법 불쾌해하지. 할 말이 있다면 손 놓고 빨리 하도록 해. 내겐 널 위해 쓸 시간 같은 건 없으니까.” 

“아… 죄송합니다. 그게, 그러니까… 제게 힘을… 힘을 조금만… 나눠주세요. 강해지고 싶어요.”

카림은 그제야 그녀를 다시 쳐다보았다. 카림의 옷자락을 놓은 그녀는 제 손을 꼼지락거리며 아래만 쳐다보고 있었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다 새어나왔다. 지금 들은 게 자신이 이해한 대로가 맞는 건가? 일면식조차 없는 나약한 악마가 강해지고 싶으니 제게 힘을 나눠달란다. 악마가 강함을 숭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 부탁을 굳이 저에게 한다? 카림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첫째, 너와 나는 힘을 나눠줄 정도의 친밀함을 갖고 있지 않지. 둘째, 거래가 하고 싶으면 대가를 제시해. 셋째, 정에 기대려는 얄팍한 짓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라고 말해주지. 그리고… 굳이 내게 부탁하는 이유도 알 수 없군. 내가 그런 걸 들어줄 정도로 자비로워 보이던가?” 

머뭇머뭇 망설이나 싶던 그녀가 한 발자국 다가섰다. 카림은 저보다 한 뼘은 아래에 있는 눈을 쳐다보았다. 연둣빛 눈이 청포도의 색을 떠오르게 했다. 

“아까… 저 안에서 저를… 동물 보듯 보지 않은 악마가…몇 있었죠. 사, 카림은 그 몇 안 되는 악마 중에서 가장 강한 존재였어요. 그래서 부탁드리는… 거예요. 도와주세요. 제게… 제게 힘을 나눠주시면 저는, 당신께 없는 것을 하나 찾아서 드릴게요.” 

카림이 짧게 소리 내어 웃었다. 당돌하고 재미있는 제안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은 이미 웬만큼 가질 것은 다 가진 존재였다. 없는 것이 무엇인 줄 알고 준다는 말인가? 카림의 반응을 살피듯 잠시 말을 쉬며 눈을 굴리던 그녀가 재차 목소릴 냈다. 

“대신… 당신께 없는 것이 무언지 알 수 있도록 저와 종종 만나주세요. 두 달 동안… 여덟 번 만요.”

“찾지 못하면?”

“그럼… 저희의 이야기는, …없던 게 되는 거겠죠.”

제 할 말을 다 끝냈다는 듯 그녀는 입을 닫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카림의 눈이 의구심을 품고 가늘어졌다. 딱히 그것이 감춰왔던 본 속셈인 것처럼 보이진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카림은 그녀가 아주 뛰어난 연기력을 지녔거나, 정말 그저 힘이 필요할 뿐일 것이라 생각했다. 잠시 생각에 잠겨 고개를 설핏 기울였던 카림의 입술이 느릿하게 열렸다.

“거래를 들어주지. 네가 과연 내게서 뭘 찾아서 건넬지 궁금하군.”

“아… 감사합니다.”

“일주일 뒤 해질 무렵에, 투르의 생 쥘리앙 성당 옆 푸케에서 만나지.”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가 이내 눈에 띄게 웃었다. 카림은 그녀의 인상을 기억에 남기듯 얼마간 빤히 바라보고는 미련 없이 걸음을 뗐다. 힘을 조금 나누어 준다 해서 그녀가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수 있을 리도 없거니와 자신에게 해가 될 것도 없었다. 거기 더해 과연 무엇을 찾아내어 제게 건네겠다는 것인지 궁금했으므로 나쁜 거래는 아니었다. 

약속된 일주일 후, 카림은 해가 뉘엿뉘엿 다 넘어간 후에야 생 쥘리앙 성당 옆의 서점 푸케에 모습을 드러냈다. 국왕 로베르 2세의 어머니인 아키텐 공녀 아델라이드가 다녀갔다는 이유만으로 일대에서 유명해진 서점은 기실 유명세에 비하면 크기도, 서적의 종류도 유명세에 못 미쳤다. 애초에 서적을 일반 백성이 가지기엔 어려우니 서적의 종류가 적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을 터였다. 여유롭게 서점 안으로 걸어들어간 카림은 금세 구석에서 얌전히 서서 책들을 살펴보고 있는 그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책장에 머물러있던 연둣빛 시선이 카림에게로 닿았다.

“아, 오셨네요.” 

카림이 짧게 고갤 끄덕이고 돌아섰다. 서점 밖으로 나서자 또각또각 뒤를 따르던 걸음이 조심스레 옆으로 다가왔다. 사위는 온통 어둠이 내려 어둑했지만 두 악마에게 어둠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카림이 반걸음 앞장서서 걸었고, 그녀가 뒤따랐다. 오가는 사람 없는 길을 한참 걷는 동안 두 악마 사이엔 침묵만이 내려앉아 있었다. 

“사실… 뒤늦게 떠올랐는데, 당신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누구에게.”

“미리암을 아시죠?”

미리암이라면 삶의 반려를 잃고 고통 속에 몸부림치다 구마사제의 품에 뛰어드는 것으로 자살을 택한 그 악마였다. 카림의 시선이 어느 틈엔가 나란히 보조를 맞추어 걷고 있는 그녀에게로 닿았다. 담담한 눈으로 정면을 주시하는 옆얼굴이 보였다. 

“그녀에게 들은 이야기를 이용하는 것은 반칙이 아닌가?”

잠시 생각에 잠겼던 카림이 불쑥 내뱉었다. 미리암과는 제법 오랜 시간을 친근하게 지내왔으니 적어도 그녀, 한나에 비하면 저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존재였을 것이다. 그런 이의 이야기를 듣고 제게 없는 것을 유추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명시하지 않으셨으니까요.” 

작은 헛웃음이 터졌다. 그녀의 말대로, 거래를 할 때에 명시하지 않은 사항이었다. 뒤늦게 떠올랐다는 말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이건 자신이 접어주어야 한다는 의미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순진해보여도 악마는 악마라 이건가. 예상치 못한 영악한 구석이었다. 카림은 불쾌한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 없는 걸 찾아낸다 해도 네가 그걸 줄 수 있을지 없을지는 아직 알 수 없는 일이니… 그 정도는 관계없겠지. 그래, 미리암에게서 무슨 이야길 들었나?”

“미리암은… 당신이 슬픔을 느끼는 것에 둔하다고 했어요.”

“그것은 내가 슬퍼할만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지.”

“테오는 당신과도 친밀한 사이였다고 들었는걸요.”

“그래서 내게 슬픔을 주겠다?”

“그러고 싶어요.”

테오는 미리암이 잃어버린 삶의 동반자였다. 비교적 친밀한 관계에 있던 두 악마를 차례로 잃었으나 카림이 미리암처럼 슬픔에 빠지는 일은 없었다. 지금껏 카림은 애초에 그들을 제 삶의 동반자라 생각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왔는데, 그녀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검지로 뺨을 가볍게 긁적인 카림이 애매하게 침음했다. 

“그들을 아꼈지만 사랑하진 않았으니 슬프지 않은 것은 당연한 게 아닌가?”

“보통은 아끼던 존재를 잃으면 슬퍼해요.”

“나는 존재 자체가 보통의 논외지역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야.”

연둣빛 눈이 카림의 얼굴을 향해 도로록 굴렀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눈치였다. 카림은 뻔뻔한 얼굴로 할 말이 있냐는 듯 그 시선을 마주했고, 오래 지나지 않아 그녀가 시선을 거둬갔다.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아끼는 존재를 잃는 것도 슬픈 일이라는 건 알아주세요.”

“기억은 해두지.” 

카림과 그녀는 밤거리를 오래도록 걸었고,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대체로 그녀가 이야기 하고 카림이 반응하는 쪽이었는데 이윽고 하늘의 저 구석이 아슴푸레 밝아올 무렵 카림은 마치 그녀에게 삶에 대해서 가르침을 받고 있는 것만 같다는 걸 느꼈다. 기분이 몹시 오묘해서, 턱을 매만지던 카림이 그녀의 말을 불쑥 잘랐다.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네가 날 가르치고 있는 것 같군.”

“아…… 그러려던 건 아니었어요. 죄송합니다.”

“너는 테오와 미리암을 잘 알았나?”

다시 처음의 주제로 돌아온 이야기의 흐름에 잠시 눈을 깜빡이며 카림을 쳐다보던 그녀는 보일 듯 말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땋아 내린 긴 은발이 새벽녘의 하늘에 물들어 푸르게 보이기 시작하는 광경을 카림은 가만히 쳐다보았다.

“잘 알았죠. 그들이 저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을 살긴 했지만… 우린 좋은 친구였어요.”

“그들의 소멸이 너를 슬프게 하던가?”

“네. 슬프게 했죠. 마음이 아프고 눈물이 났어요. 다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되돌리고 싶었죠. 그들이 보고 싶어요.”

카림으로서는 쉽사리 공감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들의 소멸이 애석한 일이라고는 생각했지만, 딱히 시간을 되돌리고 싶지도 그들이 보고 싶지도 않았다. 이미 시간의 뒤안길로 스러진 이들을 곱씹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마을의 이곳저곳을 거쳐 어느덧 다시 생 쥘리앙 성당 앞에 다다른 걸음이 천천히 멎었다. 카림의 눈이 한 뼘 아래의 옅은 녹안과 마주쳤다.

“여덟 번 중 한 번이 지나갔군.”

“다음 주에 또 뵐 수 있을까요?”

“그땐 베네치아에 있을 예정인데.”

“제가 그리로 갈게요.”

“산 마르코 광장의 종탑 앞에서.”

잠시 생각에 잠기는가 싶던 그녀가 맑게 소리 내어 웃자 그 웃음의 이유를 찾을 수 없었던 카림의 고개가 모로 기울었다. 

“왜 웃지?”

“우리는 악마인데, 또 성당이 보이는 곳에서 만난다는 사실이 웃겨서요.” 

“별 게 다 웃기는군. 어쩔 수 없잖은가. 가장 알아보기 쉬운 건물이 성당이니.”

“그건 그렇죠. …그럼, 다음에 봬요.”

카림은 가볍게 인사해 보이는 그녀를 일별하고 돌아섰다. 그리고 두 악마는 약속대로 다음 주에 베네치아에서 만나 함께 곤돌라를 타고 수로 이곳저곳을 누볐고, 그 다음 주에는 베로나의 시청사 앞에서 만나 시간을 보냈으며, 또 그 다음 주엔 좀 더 이르게 만나 함께 식사를 했다. 그즈음 두 악마는 서로를 조금 더 편하게 생각하게 되었고 친근해졌다. 카림을 대하는 한나의 생각은 알 수 없었으나 적어도 카림은 그녀에게 일말의 흥미를 품기 시작했다. 

“카림, 내일 열리는 엘레나 부인의 파티에 가나요?”

“음. 런던의?”

“네. 장미 정원이 예쁜 저택이에요.”

글쎄, 어떨까. 모호하게 말을 흐린 카림의 시선이 문득 그녀가 걸친 숄의 끝자락으로 떨어져 내렸다. 처음 마주쳤던 날 조금 선선해지기 시작했던 공기는 이제 제법 냉기를 품고 몰려왔다. 지난주부터 그녀가 두르고 나오기 시작한 숄은 세월감이 묻어나는 것이 족히 30년은 되어 보였다. 유행에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는 뜻이다. 풀어지다 만 올 한 가닥이 바람에 가느랗게 흔들리고 있었다. 못 봐주겠군. 혼잣말을 중얼거린 카림의 옆얼굴로 그녀의 시선이 닿았으나 카림은 그것을 저 좋을 대로 무시하고 걸음의 보폭을 넓혔다. 

“카림? 같이 가요.” 

그 다음 주의 약속에, 카림은 붉은색 바탕에 금사로 수를 놓은 숄을 그녀에게 건넸다. 최근 콘스탄티노플에서 가장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 형태의 수가 놓인 숄이었다. 유행에 뒤쳐지는 숄을 두르고 다니는 것이 보기 싫다는 이유에도 그녀는 웃음 띤 얼굴로 감사의 인사를 해 보이는 게 다였다. 두 악마의 약속은 어느 샌가 자연스레 매주 반복되는 당연한 일상이 되어있었다.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갔고 여덟 번의 약속은 어느 샌가 색이 바래 의미를 잃은 뒤였다. 그녀는 카림에게 힘을 요구하지 않았고 카림 또한 그녀에게 무얼 줄 것인지 묻지 않았다. 카림은 그 해의 첫눈을 그녀와 함께 맞았다. 그것은 퍽 로맨틱하게 들리는 말이었으나 카림에게 있어 그녀는 미리암과 테오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끼지만 그 이상은 될 수 없다는 것을 카림은 느끼고 있었다. 

좋아하는 것과 아끼는 것, 사랑하는 것은 각각 그 성질이 달랐다. 적어도 카림에게는 그러했다. 그리고 지난 팔백 년의 시간에 비추어 볼 때 구분지어 놓은 선의 가장 깊은 곳으로 다른 존재를 들이는 일은 영영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카림의 생각에 ‘사랑’이라는 감정은 미련하기 짝이 없었으므로. 테오와 미리암의 예에만 비춰보아도 사랑이 미련하다는 것은 자명했다. 사랑은 사람을, 악마를 멍청하게 만들었다. 저 자신 아닌 다른 존재에게 자신의 삶을 모두 의탁하는 짓이었다. 타인에게서 그 정도의 가치를 찾을 수 있다는 말인가? 카림은 단언했다. 자신에게 자신의 목숨을 다할 수 있을 만큼 소중한 존재는 없을 거라고. 

지난한 겨울이 지나고 계절은 다시, 봄과 여름을 지나 가을을 앞두고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런던에서 기거했다. 카림은 베네치아와 콘스탄티노플을 저 좋을 대로 왔다 갔다 하며 지냈다. 두 악마는 매주 이곳저곳에서 만나 함께했다. 함께 파티에 가기도 했는데, 그녀는 자연스럽게 카림의 곁에 섰고 이전보다 조금 더 당당해졌다. 다른 악마들로부터 무시당하거나 구경거리로 전락하는 일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는 나약한 악마였다. 힘을 줄까. 어느 날 카림이 넌지시 물었다. 아뇨, 지금은 당신 곁에 있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그녀가 가볍게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래서 카림은 그녀의 선택을 존중했다. 여전히, 사랑에는 미치지 못했다.

메마르는 낙엽의 냄새가 코끝을 스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지옥에 다녀올 일이 있다던 그녀가 일주일이 다 되도록 기별조차 없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에서, 카림은 평소와 다르게 십여 분을 기다렸다. 기다리는 것은 익숙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조금 더, 조금만 더. 그렇게 삼십여 분이 흘렀다. 그러나 그녀는 끝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바스락대며 울어대는 낙엽소리가 어딘가 구슬펐다. 카림은  런던에 있는 그녀의 집을 찾아갔다.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는 그리 넓지 않은 공간 어디에도 그녀가 몸을 숨길만한 곳은 보이지 않았다. 이후 카림의 시선이 향한 곳이 지옥임은 당연한 수순었다.

지옥의 이곳저곳을 다녔으나 그녀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녀는 거대한 지옥에서 아주 조그만 부분을 빌려 쓰는 정도에 불과할 나약한 악마였으므로, 주먹구구식으로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카림은 여기저기 흩어져있을 데카라비아들을 찾아갔다. 같은 이름을 공유하는 악마들이라면 은발의 데카라비아, 한나의 행방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사탄으로서의 이름도 힘도 숨길 생각이 없는 카림에게 그들은 쉽게 머리를 조아렸다. 대답은 쉽게 얻을 수 있었다. 얼마 전 그들 사이에서 서로의 힘을 흡수하기 위한 움직임이 있었다고 했다. 그 일로 네 명의 데카바리아가 하나의 악마에게 힘을 흡수당하고 소멸했단다. 모르긴 몰라도 일주일동안 흔적도 찾을 수 없는 것이라면, 소멸했을 거라고. 

소멸이라는 단어가 묵직하게 가슴에 내려앉았다. 카림은 심장을 짓누르는 낯선 무게감에 당혹스러워졌다. 가슴 저 안쪽이 아릿했다. 지금 스스로가 느끼고 있는 것이 무언지 알 수 없었다. 통증을 닮았나 하면 또 그것은 아닌 것 같고, 분노인가 하면 그렇다기엔 기이한 탈력감이 뒤를 이었다. 얼마간의 수소문 끝에 넷의 힘을 흡수했다는 악마를 찾아냈다. 은발의 데카바리아를 아느냐고,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그가 두르고 있는 붉은색 바탕에 금사로 수를 놓은 숄은 카림이 그녀에게 준 물건이었으니까. 

카림은 그 악마를 ’사냥’했다. 일방적으로 구석에 몰아서 잡아 죽였다는 의미다. 왜 그녀를 죽여 힘을 흡수했는지 물어보려던 멍청한 질문조차 잊었다. 그리하여 이것이 그녀를 위한 복수였던가? 자문했으나 확실히 답을 내릴 수는 없었다. 한 줌 잿더미로 화한 악마의 흔적을 보며, 카림은 자신이 느꼈던 감정이 슬픔이라는 것과 그녀의 존재가 누구도 닿은 적 없는 선의 앞까지 와 있었다는 것을 자각했다. 슬픔이란 감정을 느꼈으나 상실감은 뒤따르지 않았다. 그녀는 처음부터 카림의 것이었던 적이 없기에. 카림은 한 존재의 소멸이 슬픔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 슬픔을 주고 싶다던 그녀의 원함은 그녀 자신의 소멸로 달성된 셈이다.

세상은 존재의 소멸을 기억하지 않는다. 미리암과 테오의 자리가 그러했듯, 그녀의 빈자리 또한 빠르게 채워졌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녀만큼 깊은 곳에 다다르지 못했다. 가장 깊은 곳에 다다른 그녀조차도 사랑은 아니었다. 때문에 카림은 또 한 번 단언했다. 그녀가 깃대를 꽂은 곳까지 도달할 수 있는 이는 없을 거라고. 세상에 함부로 하는 단언처럼 무너지기 쉬운 것은 없다는 것을, 팔백 살의 악마는 미처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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