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새벽
미스래블(2024), 투라
경고. 비행 모듈 다운. 비상착륙에 대비하세요.
함체 하단에 다량의 액체가 감지됩니다. 해상 운항 모드를 전개합니다.
아득한 정신과 섬뜩한 고통 사이로 들려오는 익숙한 음성에 멀어지려는 의식을 간신히 현실로 붙들어 맨다. 몸이 들썩이도록 터진 기침을 뱉어내면 복부에서 뜨거운 것이 꿀럭 넘쳐 흘렀다. 아직 돌아오지 않은 시야는 검었고, 널을 뛰듯 어지러운 맥박을 따라 몸 곳곳에서 지독한 통증이 신경을 바짝바짝 태운다.
경고. 에너지 다운. 함선 관리 시스템 위험.
연구기지에 닿으면 수비 함대와의 교전이 있으리란 것은 예상했다. 짐작했던 것보다 이르고 과격한 충돌에 몇 마디 욕설을 씹어 뱉은 기억도 있었다. 전투를 대비해 폭발적으로 뛰는 심장의 고양감과 상황의 흐름을 읽고 분석하여 이끌기 위한 머리 회전이 쉴 틈 없이 바삐 기능했다. 직접 몸을 움직이고, 지시를 하달하고, 죽이고 또 죽였다.
리햅 모드 실행. 절전에 따라 통신 시스템 블락을 해제합니다.
그러나 본디 세상의 흐름이라는 것은 한낱 인간의 계산과 계획으로 모두 따라잡을 수는 없는 법이므로. 사각지대로부터 피격 위험을 목전에 둔 크루를 잡아당긴 것은 계산에 없는 일이었다. 그대로 맞았으면 즉사했을 것이고 교전 후 상황을 고려했을 때 (적어도 자신의 계획에 의하면) 그래선 안 되는 사람이었다.
[응답하라. 미확인 함선, 응답하라.]
발신지, 미상. 발신자, 미상. 통신에 응답할까요?
야. 누가 응답 좀 해라. 내뱉지 못한 말이 입안을 메운 쇠비린내에 녹아 자취를 감춘다. 어룽어룽 초점이 맞지 않는 시야가 엉망이 된 연구실 내부 곳곳에 닿았다 멀어지길 반복했다. 그제야 구멍난 배를 움켜쥐고 겨우 연구실로 발을 들이는 데까진 성공했던 것을 떠올린다. 이후는. 어떻게 됐지? 크루의 손실은 어느 정도지.
[소속을 밝히고 인계 절차를 진행하라.]
[다시 한 번 말한다. 여기는 상하이 MSA 재난 대책부.]
[너희는 지구상의 어느 국가에도 등록되지 않은 함선으로 확인된다. 소속을 밝히고……]
온몸이 욱신거리는 가운데 그제야 비식 웃음이 흘렀다. 희미한 안도와 기어이 막다른 벽을 뛰어넘고 말았다는 짜릿한 감각이 몸의 긴장을 한결 놓게 했다. 배신한 국가에 붙잡혀 모조리 반역으로 처형당하거나, 에너지원의 재료로 갈려들어간 것은 아니란 걸 확인했으니까. 듣는 것만으로 구분할 수 있는 몇 크루의 익숙한 목소리가 연구실의 곳곳에서 들리는 것을 끝으로 다시 암전이었다.
“어스. 함선 내 생체 에너지 스캔해줘.”
…….
“…어스. 잘 자라.”
캄캄한 허공을 향해 중얼거린 투라가 옆으로 돌아누우며 모포를 어깨까지 끌어올렸다. 어스가 더는 가동되지 않으며, 곁에 있지도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함선에서 으레 그러했듯 인공지능을 찾았다. 버릇이고 습관에 지나지 않는 행동임을 알면서도 말이다. 깊은 한숨이 설핏 벌어진 입술 사이로 흘러나와 흩어진다. 오늘밤 역시 잠에 들기엔 그른 듯 싶었다. 어둠에 잠겨 그 끝을 명확히 가려낼 수 없는 실내는 종종 우주를 닮았다. 인간이 가진 그 어떤 말로 표현하여도 모자랄 만큼 광활하고 아득한 우주, 그곳을 유영할 때면 한낱 인간이란 얼마나 미약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인가를 자주 절감하곤 했다. 아마 이제 다시 우주로 걸음할 일은 없을 테지만.
07 함선은 '성공적으로' Z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같은 차원과 시간선에 있으나 결코 같다고 볼 수 없는 쌍둥이 행성으로의 이동을 통해서. 크루 전원이 무사히 올 수 있으리란 생각은 처음부터 하고 있지 않았으므로, 이정도의 손실은 예상범위 안이니 성공적인 탈출이었다 판단하는 것이 옳았다. 그래. 그것이 옳다. 허나 동시에 화가 일었다. 잃지 않았어도 될 이들이라는 생각을 쉬이 떨치기가 힘들었다. 의식을 잃지 않았더라면 그딴 선택에 스스로를 던지려는 그들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잘 설득하여 한둘 정도는 제가 대신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야, 저는 살고자 함선에 올라 국가를 등진 것이 아니었으니까.
자신들의 선택을 '그딴 것'으로 치부해버리는 것을 알았다면 그들도 화를 냈을까. 하지만 이미 연소되어 흔적도 남지 않은 이들이 화를 낸들 어쩔 건가. 당시의 상황이 급박했다는 것은 의식을 다시 차린 이후에 전해들었다. 일정 정도의 희생을 감수하고 있었다곤 하나, 불가피한 외력으로 인해 발생하는 희생과 전술을 짤 때면 늘 최우선으로 생존을 고려했던 이들이 자발적으로 부나방이 되길 택하는 것은 결이 다르지 않은가. 그들의 생각이나 마음 따위 저는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들끓는 속에 결국 쯧, 혀를 차며 몸을 일으킨 투라가 어둠 속으로 손을 뻗어 협탁의 작은 등을 킨다. 아직 실밥을 풀지 못한 상처가 욱신거리며 당겨왔다. 입고 있던 티셔츠 아랫단을 걷어올리면 어스름한 불빛 아래서도 감아둔 붕대에 핏기가 스며오른 것이 보였다. 거친 손을 들어 마른 얼굴을 쓸어내린다. 상처를 아물게 할 생각은 있는 거냐 따져묻던 목소리가 귓가를 스치는 듯 했다. 지가 자꾸 터지는 걸 어쩌라고. 가녀린 빛으로 협탁 주위를 밝히던 불빛이 깜빡이다 이내 어둠에 잡아먹혀 사그라든다. 픽 실소가 터졌다.
"씨바… 가지가지 한다."
익숙한 듯 낯선 세계에 안착한지 이제 약 삼주일이 지났다. 이곳은 이곳대로 그들에게 도래한 재앙으로부터 생존하고자 한창 싸움을 이어가는 중이었고, 그 탓에 지구상 그 어느 곳과도 연관되어 있지 않은 '훈련받은 군인'이라는 전력을 무작정 배척하고 제거하려 들 수 없음이 당연했다. 그들에게 07 함선의 크루는 귀한 전력인 셈이다. 그러니 적절한 치료와 머물 곳을 제공하고 시간을 주는 것이리라. 낮은 건물들과 곳곳의 큰 텐트들로 구성된 이곳은 일종의 생존캠프에 가까운 형상을 띠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관리되고 있는 물자와 자원 역시 무한하지 않았으므로, 제아무리 이곳을 통솔하는 이들이라 해도 전력을 저 좋을대로 마음껏 사용하지는 못하는 것으로 보였다.
함선에서 크루들과 그런 이야기를 했었더랬다. 쌍둥이 행성은 어떤 곳이었으면 하느냐던가, 군인으로서의 삶을 관두게 되면 무엇을 하며 살고 싶냐던가. 그저 희망사항에 지나지 않으며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고 이룰 일도 없으리라 생각했던 내용들을 떠들어댔었다. 막상 그렇게 떠들었던 것들이 모두 허상으로 끝나니 간사하게도 일말의 아쉬움이 이는 듯 하다가도, 맞닥뜨린 상황이 조금이나마 이쪽에게 유리하게끔 조성되어 있다는 점이 다행이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물론 이후 상황이 어떻게 흐르고 변할지는 이곳을 통솔하고 있는 이들과의 대화에 따라 크게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한참을 우두커니 앉아 생각에 잠겨있던 투라가 결국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어차피 오지도 않는 잠, 억지로 좇으려 누워있은들 그만큼 시간을 허비할 뿐이리라. 편히 운신하진 못해도 조금은 움직이는 것이 잡생각을 털어버리기 좋을 것 같았다. 잠들지 못하는 밤이 그렇게 또 하루 깊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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