消失點
닐 (w. 에녹(핀))
소실점을 처음 발견한 것은 미술가였다. 그의 이론은 건축가를 만나 더욱 발전되었고, 여러 화가의 손을 거쳐 보급되기 시작했다. 16세기의 화가나 건축가에게 원근법과 소실점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소실점을 확인하게 되면 공간의 입체감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닐은 소실점의 정의를 떠올릴 때면 종종 모순을 느끼곤 했다. 평행으로 된 두 선이 멀리 가서 어느 한 점에서 만난 것처럼 보이는 것이 소실점이다. 점, 고작 1차원의 점이 되었을 뿐인데 그로 말미암아 특정 공간의 3차원적 입체감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는 그 기묘한 상관관계가 닐은 묘하게 거슬렸다.
무엇이 거슬렸던 것인지는 또렷하게 구분 지을 수 없으나 마치 그것과 같은 이치였다. 평소에는 인식조차 할 수 없던 부분─예컨대 호흡 같은─을 한 번 의식하기 시작하면 그 자체가 불편해지는 그런 종류의 것 말이다. 그래서 닐이 호흡강박을 가진 적이 있느냐면 결단코 그런 일은 존재치 않았다. 살고자 하는 본능이 그득한 자에게 호흡은 마치 자연의 섭리와도 같은 사세고연한 행위였으므로. 살고자 하는 본능을 놓기 전까지는 일어날 이유가 없는 일이었다.
닐 러스크. 검은 호수의 나베리우스, 방랑하는 자들의 방패. 장엄함이나 웅고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꼬리표는 구백에 가까운 해를 살아온 악마에게 붙은 이명 치고는 조금쯤 초라했을지도 모른다. 그간 닐이 품고 살아온 생을 향한 열망과 강함을 좇는 본능의 총량을 생각한다면, 일견 순진해 보이는 껍데기 안에 내재되어 있는 힘을 생각한다면. 기실 저보다 이백은 더 살았을 악마들의 힘을 가분하게 웃돌았으니 더더욱 그랬을지도 모를 일이다. 종종 구색 갖추기에 지나지 않는 권속들이 어째서 더 넓고 좋은 영지를 가지려 하지 않느냐 묻는 말에도 닐은 그네들이 뭘 모르고 있다는 듯 모호한 웃음을 지어보이는 게 다였다. 닐에게는 이 정도의 영지와 이명이 딱 알맞았다. 물론 언제나 보다 더 강한 힘을 욕망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두동진 이름을 입고 있으려는 데에는 깨끗하지 못한 속내가 있기 마련이다.
어린 시절을 곱씹으며 추억하는 인간과 성체가 되고도 본인이 작은 줄 아는 대형견의 공통점은 과거의 한 때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닐 또한 그들과 같은 갈래로 분류될 수 있었다. 닐은 핀이 만들어둔 보호 아래에 웅크리고 있는 것을 사실 제법 좋아했다. 그는 제게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손을 내밀어 준 존재이고, 악마로서의 자신을 어엿한 성체가 되도록 이끌어준 존재였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높낮이가 제법 많이 달랐을 때, 핀은 닐에게 그 무엇도 뚫지 못하는 방패였다. 그의 존재 덕분에 생을 지속하기 위해 더는 그악스럽게 발악하지 않을 수 있었다. 발악하지 않게 되면서 닐은 스스로의 존재를 보다 더 뚜렷하게 정립할 수 있었다. 핀의 아래에서 닐은 힘을 다루는 법을 배웠고, 옷다운 옷을 입었으며, 따뜻한 음식을 먹었다. 단지 힘만이 삶을 이어가는 목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어느 덧 눈높이가 비슷해진 지금, 이제 더는 핀의 보호가 필요치 않았음에도 닐은 여전히 핀의 곁에서 예쁨 받기를 원했다. 그가 주었던 모든 것들이 너무나 다정하고 따뜻한 색이었기 때문에.
구백 해에 가까운 시간은, 무수히 많은 인간들을 시간의 뒤안길로 낚아채갔다. 인간을 그저 흘려보내는 것에 익숙해졌을 즈음. 닐은 종종 세상의 모든 풍파를 한 걸음 빗겨나가 관망하고 있는 듯한 핀을 볼 때면 기저를 알 수 없는 기이한 두려움을 느꼈다. 그것이 제 시간의 몇 곱절을 산 존재에 대한 경외였을까? 혹은 억겁과 다를 바 없는 세월을 품은 규격 외 존재를 향한 기묘한 거부감이었을까. 구백에 가까운 해를 살아온 저 조차도 가늠하는 것이 까마득한 시간을 살아온 존재의 안에는 어떤 것이 도사리고 있을지를 생각하며 닐은 그 아득한 격차에 무력감을 느끼곤 했다. 어쩌면 굳은 방패라 생각했던 그 역시도 언젠가 시간의 뒤안길로 스며들어 흩어져 버릴 수 있다는 불안이었는지도 몰랐다. 형체 없는 유령에 불과했던 불안이 선명한 몸을 입고 닐의 목을 움켜쥔 때는 스스로를 봉인하고 인간인 양 살아가던 핀에게 위협이 들이닥쳤을 쯤이었다.
스스로를 지킬 힘도 없이 여럿의 악마를 마주한 핀을 보며 덜컥 불안함이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다. 두드려도 흔적조차 남지 않을 것처럼 단단한 방패가, 맥없이 시간의 뒤안길로 낚아채인 한낱 인간들처럼 스러질 수 있다는 것이 닐의 두려움에 불을 놓았다. 생을 향한 홧홧한 갈구를 처음으로 버렸다. 그 앞에 핀의 존재를 세웠다. 무언가를 해치고 집어삼키는 것이 당연한 삶에 낯선 보호를 들였다. 닐은 여전히 핀에게 예쁨을 받고 싶었고, 그가 주었던 모든 것들이 필요했으므로. 그래서 닐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를 놓쳐서는 안 되었다. 주춧돌을 잃은 기둥은 종래에 무너질 수밖에 없으므로. 닐은 맥없이 무너지고 싶지 않았다. 핀을 살리겠다는 목적 하나만으로 그의 앞에서 학살 아닌 학살을 벌인 그 날, 드물게 짙어진 패색 앞에서 간신히 버티고 선 닐을 지켜낸 방패는 결국 또 다시 핀이었다. 과거의 어느 날을 답습하듯 망설임이 없는 등을 바라보며 닐은 다시, 아득했고 무력했다.
인간의 삶에 스스로를 가두었던 핀이 악마로서의 권능과 기억을 되찾은 것은 분명 닐이 줄곧 원해왔던 일이었으나 닐은 더 이상 핀을 이전처럼 대할 수 없었다. 악마로서의 그를 해칠 수 있는 존재는 한 손에도 간신히 꼽을 정도라는 것을 잘 알았다. 그럼에도 한 번 어둠을 갉아먹기 시작한 불안은 쉬이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그의 부재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전에 없던 두려움이 생겼다. 언젠가 어느 책에서 읽었던 ‘지키고 싶은 것이 있는 존재는 약해질 수밖에 없다’는 한 문장이 문득 뇌리를 스쳤다. 그래, 닐은 핀을 지키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이 이렇게나 약해진 걸까. 약해진다는 것은 생을 이어가는 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닐의 갈구보다 앞선 위치에, 핀이 있었다. 교묘하게 박힌 가시처럼 삶의 갈구를 앞선 핀의 존재는 좀처럼 뽑히지 않았다. 기실 그는 보호가 필요치 않은 존재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지켜야 할 것만 같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강박에 시달리기 시작한 이래로, 닐은 어쩌면 자신이 어떠한 종류의 곰팡이에 감염되어 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생각─물론 멍청하기 짝이 없는─을 하곤 했다. 균류 중에서도 진균류에 속하는 곰팡이는 어둡고 습기 찬 곳에서 자란다. 어둠에서 뿌리를 내린 곰팡이는 소리도 없이, 흔적도 없이 숙주를 집어삼킨다. 아무도 정확히 알 수 없는 은밀한 속도로 숙주를 점령한 곰팡이는 마지막에 다다라서야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가시적으로 틔워 보이는 것이다. 보이지도 않고, 흔적도 없는데다, 완벽히 떨쳐내려면 빠르게 도려내야만 하는데 감염부위조차 정확히 알 수 없다. 때문에 닐은 종종 멍하게 생각했다. 내 어느 부분을 도려내야만 할까. 혹은 이미 다 감염되어 버렸나? 물론 단 한 번도 해답에 다다른 적은 없었다.
언제부턴가 점차로 주변의 변화에 둔감해져갔다. 계절이 흘렀던가? 혹은 그대로 멈춰있었던가. 아, 어쩌면 해가 바뀌었을지도. 사실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방랑벽은 또 완전히 지워낼 수 없어서. 닐은 유령처럼 인간 세상의 곳곳을 떠돌았다. 모든 게 그저 저를 스쳐지나갔다. 얼마의 시간을 흘려보낸 건지 의식도 되지 않는 채로 드문드문 의식이 맑게 개일 쯤이면 반복적으로 깨달았다. 어쩌면 이것이 감염의 증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이 모든 것은 생을 향한 갈구 앞에 핀을 세웠을 때부터 시작되었던 건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몇 번의 반복인지 알 수 없는 깨달음 끝에 닐은 생을 향한 갈구보다 앞서있는 핀을 제 안에서 도려내어 갈구 뒤로 욱여넣었다. 이게 맞는 순서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탓이다.
제 안의 어딘가를 도려내고 기운 다음 닐은 돌아왔다. 핀의 곁으로, 원래대로. 모든 게 다시 정상을 되찾았다. 되찾은 것 같았다. 되찾았다고 생각했다. 되찾은 것이어야 했는데. 그러나 닐은 괴로웠다. 도저히 뿌리가 어디에 닿아있는지 가늠조차 안 되는 고통이 매일 닐을 갉아먹었다. 무어라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제 안에서 기지개를 켜며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 명백하게 느껴지는데, 그것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닐은 가슴께에 도사리고 있는 미지의 것이 두려웠다. 그 미지의 것이 자신을 한없이 나약하게 만드는 것만 같았다. 도려내버리고 싶어도 정확히 도통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어서 도려내는 것조차 마음대로 안 됐다. 스스로를 보호하는 방벽이 무너진 존재는 으레 익숙한 보호를 그리워하게 되는지라. 닐은 핀을 찾았다. 그가 유일무이한 자신의 방패였으니.
“핀, 여기가 아파. 이게 뭔지 모르겠는데 좀 죽을 것 같아.”
“아직 덜 컸구나.”
“농담 아니거든.”
“아직도 애정과 관심이 필요해?”
“당연히 필요해.”
“새삼스레. 주고 있잖아. 알다시피 내가 사랑하지 않는 자식은 누구도 없어, 닐.”
“내가 받고 싶은 건 그게 아니야.”
“그럼 뭔데?”
“…….”
그거구나. 닐은 일순 숨 쉬는 것조차 잊어버릴 만치 선연하고 날카로운 진실이 마음을 푹 찔러왔다는 걸 알아차렸다. 가슴께에 도사리고 있는 이 미지의 것을 도려낼 수 있는 칼이 바로 그것인 것만 같았다. ‘자신이 받고 싶은 것’ 그것의 정체를 알아내면, 이 기이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기이한 믿음이었다. 꼭 판도라의 상자를 마주한 것처럼. 불편한 냄새가 스멀스멀 풍겼다. 평생을 갈고 벼려온 본능이 외치고 있었다. 위험하다고. 그러나 닐은 그 기이한 믿음조차 붙잡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간절했기에.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상자를 열어버린 판도라처럼, 닐은 그악스러운 버릇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진실 위로 드리워진 베일을 벗겨내고 마는 것이다.
본능을 무시한 대가는 참독했다. 닐은 뼈저리게 깨달았다. 제 가슴께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도저히 도려낼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는 걸. 도려내는 것은 자살행위와 매한가지라는 걸. 아팠다. 통증 그 자체를 두려워하게 될 정도로, 닐은 길게 아팠다. 자각조차 없던 사랑은 그 어떤 방패든 뚫을 수 있는 창처럼 닐의 마음을 끊임없이 후벼 팠다. 핀에게 닿은 애정이 부모를 향한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 혐오를 불러일으켰다. 감정을 가졌다는 사실만으로도 무결한 존재에게 진흙을 묻히는 것 같았다. 전에 없던 호흡강박을 맞닥뜨리며 닐은 발작적으로 들숨을 삼켰다. 도저히, 숨 쉬는 법을, 기억해낼 수 없었다. 자각과 동시에 희망을 잃는 것은 지독히도 잔인한 일이라는 것을,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진실을 기어이 손에 쥐는 일만은 하지 않았을 텐데.
시간개념이 허물어졌다. 공간을 지각하는 것조차 어려운 상태에서 닐은 얼마인지 모를 시간을 홀로 삼키고 감내했다. 부정하고 타이르고 지워내고 되새기고 밀어내고 빛줄기 하나 들지 않는 어둠에 잠겨 끊임없는 굴레 속에서 닐은 마모되어갔다. 도저히 인정받을 수 있는 마음이 아니라는 결론만이 점차로 명료해졌다. 핀은, 자신을 길러낸 방패는. 제게 사랑을 주기 위해 안배된 존재는 아닐 터였다. 핀에게 건네기에 제 사랑은 너무 모독적이었고 그는 너무 멀고 고고했다. 닐은 마음을 가만히 덮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마 제 연심을 버리는 것만은 할 수 없어서. 그래서 닐은 차라리 이 마음을 끌어안고 함께 침몰하기를 택했다. 생을 향한 갈구조차 깎여나간 폐허에 챙길 것은 남아있지도 않았다.
오랜 고통을 삼켜낸 끝에 닐은 검은 호수처럼 잔잔히 가라앉았다. 폐허 위에서야 비로소 평화를 되찾은 것이다. 닐은 기계적으로 몸을 깨끗이 하고 옷을 갈아입고 황량한 제 영지만큼이나 가구가 없는 방을 정리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악스럽게 발버둥해 온 역사란 것이 사실은 아무것도 없었다는 뒤늦은 깨달음이 둔중하게 닐의 폐허를 쓸고 지나갔다. 짧은 실소가 터졌다. 창밖으로 펼쳐진 검은 호수에 눈길이 가 닿았다.
아무래도 마지막 숨 한 줄기를 뱉는 곳은 저 자리여야 할 것 같았다. 처음 눈을 뜬 장소에서 마지막 숨을 뱉는 것 정도는 욕심내도 되지 않을까. 그리고 자신의 그리 넓지 않은 집밖으로 첫 걸음을 내딛는 순간, 닐은 폐허가 또 한 차례 뒤집어짐을 느꼈다. 싫었다. 그러나 그것은 제 뜻대로 되는 일이 아니었으므로. 위태롭던 평화가 산산조각나는 여파에 맥없이 휩쓸린 닐은 결국 눈물을 터트리고 마는 것이다. 시선 끝에 걸린 것은 어른 악마 두엇이 팔을 둘러야 안을 수 있는 곧고 튼튼한 호두나무. 모든 게 죽어버린 이 땅에서 유일하게 지상의 색을 간직하고 있는, 자신의 방패가 처음 안겨 준 온기였다.
원망이 일었다. 어쩌면 이다지도 제게 평온을 선사하려 하지 않는 것일까. 이제 그저 바라는 것은 침몰하는 일일 뿐인데. 사라지는 일 오직 그 하나만을 바라는데. 핀이 제 영지에 심어두고 간 녹음은 마지막 의지의 발목조차 잡아 붙든다. 닐은 볼품없이 엉엉 울었다. 울지 않으면 다시 숨을 쉴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더 망가질 것도 없는 폐허가 닐의 심장을 짓이겼다. 문자 그대로 죽을 것 같았고, 그냥 죽고만 싶었다. 억울했다. 분명 자신이 원하는 것은 죽음뿐인데. 그 뿐이어야 하는데 이대로 죽어야 한다는 것에 열분이 일었다. 제 방패는 자신이 마모되어 죽음만을 바라고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할 것이다. 언제나처럼 세상의 모든 풍파를 한 걸음 빗겨나가 관망하고 있는 듯 굴 게 뻔했다. 고결하다고 생각한 그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싶다는 욕구가 불쑥 고개를 쳐들었다. 핀이 제 존재를 평생 되새기고 곱씹으며 아픔으로 남겨두었으면 싶었다. 결코 지워질 수 없는 존재가 되고 싶었다.
닐은 그대로 핀의 성, 핀의 앞으로 이동했다. 권능을 써 기세 좋게 핀의 영지로 쳐들어갔건만. 겨우 말라붙은 눈물샘이 때도 모르고 다시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또 아팠다. 이제 짓이겨질 속조차 없다고 생각했음에도 핀을 마주하는 일 자체가 그렇게 아팠다. 그에게 직접적으로 부정당해도 좋다고 넘겨짚었던 것이 심각한 오류였음을 닐은 깨달았다. 언제나 올곧게 마주했던 눈을 쳐다볼 수조차 없었다. 두려웠고, 늘 다정했던 눈에 경멸이라도 서린다면 정말이지 견딜 수 없을 것 같았기에.
“…당신이 좋아. 너무 좋아서 죽을 것 같아. 이게 어떻게 가족을 사랑하는 거야? 난 당신이 가족 이상으로 너무 좋아.”
“……너 내 나이가 몇인 줄은 알아?”
이제와 그게 중요할까. 눈물이 넘실거려 시야가 일렁이는 와중에도 그게 우스웠다.
“내가 아니라 다른 악마가 그때 어린 널 구해줬으면, 그 악마도 사랑했을까? 그럼 그건 사랑이 아닌 거야.”
“…지금 그게 중요해? 날 구한 건 핀, 당신이잖아.”
그렇게 회피하려 하는 것이 비겁했다.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그 오래전 지옥의 서쪽 끝자락에 자리한 검은 호수에서 어린 나베리우스를 구한 것은 핀이었다. 그 사실만은 변하지 않는 진실이다.
“원하는 게 뭐야, 닐?”
이 또한 비겁했다. 제가 사랑하고야 말았던 방패도 결국은 고결한 규격 외 존재이기 이전에 하나의 악마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 어울리지 않게 닐을 안심시켰다.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 묻지 마. 나 지금 숨 쉬는 것만으로도 너무 아파서 죽을 것 같아.”
역시 답은 정해져있었던 것이다. 닐은 이 순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핀의 앞에서 고개를 들었다. 지옥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새파란 빙하의 눈이 물기에 어룽어룽 흔들렸다.
“대답이 부정이라면 그냥 잘 가라고 인사해줘, 핀. 그거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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