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세계를 붕괴시키는 일에 대하여
닐 (w. 에녹(핀))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 묻지 마. 나 지금 숨 쉬는 것만으로도 너무 아파서 죽을 것 같아.”
“…….”
“대답이 부정이라면 그냥 잘 가라고 인사해줘, 핀. 그거면 돼.”
“……나는 그 어떤 대답도 되돌려줄 수 없어, 닐. 하지만 네가 죽지 않았으면 해. 죽지 마.”
어떤 다정은 마음을 죽이는 맹독이 된다. 그 다정한 선고가 닐의 마음을 깊이 후벼팠다. 핀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 거절이 닐의 마음에 얼마나 큰 상처를 남길지를. 그럼에도 핀의 혀와 입술은 단정히 그 잔인한 문장을 빚어냈다. 새파란 빙하 담긴 눈을 일렁이게 만들던 눈물이 기어이 범람하고 말았다. 차라리 냉정하게 말하지. 못된 말을 뱉어내지. 그랬다면 원망이라도 마음껏 할 수 있었을 텐데. 자신의 보잘것없는 영지, 집으로 돌아온 닐은 내리 며칠을 울었다. 그리하면 마음 가득 빠듯하게 차오른 사랑을 다 토해낼 수 있는 것처럼 눈물을 흘려냈다. 눈에 담긴 새파란 빙하가 오랜 빙하기 끝에 녹아버리기라도 하는 듯 닦고 닦아도 넘쳐흘러 언제부턴가 눈가를 닦아내는 것도 포기했다.
미어지는 가슴을 어떻게 해야 할지 도저히 알 수가 없어서 사라지고 싶었다. 그러나 우습게도 소멸하는 일조차 무작정 저질러버릴 수 없었다. 그가, 핀이 원하지 않았으니까. 며칠을 내리 울고 기진맥진해 의식을 잃듯 수면에 빠져들었다. 꼬박 하루를 죽은 듯 잠에 빠져있다 깨어난 닐은 멍하니 황량한 방 안을 훑었다. 버석하게 메마른 낯으로 몸을 일으킨다. 몸이 천근만근 무거워 한없이 가라앉고만 싶었다. 우는 행위가 이렇게 체력을 많이 소모하는 일이라는 걸 난생처음으로 깨달았다. 나무로 짜 넣은 방문을 여는 것도 성가시고 귀찮아 곧장 집 밖으로 이동한 닐에게로 수많은 시선이 조용히 쏟아졌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빗겨나갔다.
닐의 권속이되 권속이 아닌 악마들이 침묵 속에서 저들끼리 시선을 주고받았다. 방랑하는 자들의 방패, 나베리우스를 추종하는 악마들은 누가 이르지 않아도 자연스레 지옥 서쪽 끝의 이 검은 호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보잘것없고, 배척당하며, 떠도는 악마들이 자신의 집 주변으로 둥지를 틀어도 닐은 그들을 내버려 두었다. 그렇게 하나의 주거촌과 같은 형태를 갖춘 그들은 자신들의 방패가, 머리 셋 달린 맹견이 누구에게 자신의 목줄을 물어다 주고자 하는지 잘 알았다.
순백의 마르바스가 그를 손수 거두어 길렀다는 사실은 지옥의 서쪽에서 제법 잘 알려져 있었다. 적어도 서쪽에서 기갈이 든 아귀 나베리우스를 모르는 자는 드물었으니까. 본래 나베리우스는 그의 조그만 영지 근처가 아니고선 거의 알려지지 않은 나약한 이름이었다. 그리하여 나베리우스의 죽음을 아는 자 하나 없었고, 다음 대의 나베리우스가 눈을 뜬 사실 또한 그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다. 홀로 죽음을 맞이한 악마의 뒤를 이어 홀로 태어난 작고 어린 악마. 선대의 나베리우스처럼 그저 그런 힘을 품고 빌빌거리며 살았다면 이보다 더 짧은 삶을 살다 소멸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어린 나베리우스는 닥치는 대로 먹어 치워 강해졌고, 살아남았으며, 어엿한 성체로 완성되었다. 자처하여 권속이 된 악마들은 그들의 주인 되는 나베리우스가 그보다 몇백의 해를 더 살아온 악마 하나 정도는 거뜬히 잡아먹을 수 있는 힘을 가졌다는 걸 알았다.
부드러웠으나 마냥 무른 자는 아니란 것도 알았다. 그런 자가 며칠을 내리 자신의 집에 틀어박혀 펑펑 우는 것은, 그들에게도 낯설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어제 하루는 기척도 없이 고요하기에 드디어 울다 지쳐 잠들었겠거니 했다. 하여 그들은 숨죽인 고요 속에서 하루를 보냈다. 자신들의 주인이 조금이라도 깊이 가라앉아 쉴 수 있기를 바라며. 권속들은 나베리우스가 방랑하는 자신들에게 그저 목숨 하나 부지할 최소한의 보호만을 보장해줄 뿐, 딱히 이상적인 주인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권속들이 그를 주인으로 인정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지옥의 먹이사슬 바닥이나 다름없는 방랑자들의 방패를 자처했기 때문이다. 주인 없이 지옥을 방랑하는 자들은 그 누구의 보호 아래에도 있지 않으므로 언제든 잡아먹어도 되는 존재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 방랑자들에게 누군가의 권속이라는 꼬리표를 달 수 있도록 해주는 존재. 그것이 자신들의 주인 된 자였다.
“저기… 나베리우스.”
조심스레 닐에게 다가서며 말을 건네던 악마 하나가 자신을 돌아보는 텅 빈 눈에 주춤거리며 멈춰 섰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 그에게 더 다가섰다간 죽는다는 것을.
“…….”
아무런 대꾸도 않은 채, 물러서는 악마로부터 시선을 거둬들인 닐이 아무런 말도 없이 곧장 핀의 성으로 이동했다. 핀을 만나 다시 한번 더 이야기하고 싶었다. 인정할 수 없었다. 그 어떤 대답도 되돌려줄 수 없다면서, 죽지 않았으면 한다고. 이제 자신은 핀의 사랑이 아니면 숨이 닳아 살 수조차 없게 되었는데. 살 수 있는 길을 터 주지 않으면서 살길 바라는 것은 언어도단이 아닌가. 잔인했다. 다정한 만큼 잔인하고 지독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니 차라리 그의 입으로 사형선고라도 들어야 이 모든 것을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핀의 성은 언제나와 같이 고요했다. 이전과 다른 점이 한 가지 있다면 어딘지 모르게 서늘한 기분이 든다는 점일까. 핀에게 마음을 털어놓고서 며칠이 흘렀는지 정확히 가늠이 되지 않았으나, 서늘함을 느낄 정도의 시간이 흐르진 않았다는 것쯤은 알았다. 성의 곳곳을 확인한 끝에 서늘함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곳엔 핀이 없었다. 성의 어느 복도에 우두커니 선 닐의 머릿속으로 런던에 있는 그의 집이 떠올랐다.
핀은 악마와 인간을 가름짓지 않고 어리고 힘없는 것들을 주워 보듬길 좋아하는 이였으니까, 런던에 머무르며 언제나처럼 인간 아이들을 돌보는 데에 시간을 쓰고 있을지도 몰랐다.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무자비하게 박살 내고서는 다른 것들을 보살피고 있을 핀이 야속했다. 그래. 닐은 언제고 그의 사랑을 독점하고 싶었다. 힘없고 보잘것없는 것들이 그의 고귀한 사랑 조각을 얻는 것이 못마땅했다. 태만하게 주저앉아 힘을 갈구하는 것들에게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힘을 나누어 주는 것이 싫었다.
언젠가부터 그런 생각을 했다. 그는, 순백의 마르바스는 저만의 것이어야 한다고. 그의 모든 감각이 제게만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의 사랑도, 시간도 제가 독식해야 마땅했다. 그러나 그는 감히 따라잡을 수조차 없는 긴 시간을 쌓아 올려 앞서간 존재. 닐은 그 사실에 언제나 전전긍긍해야 했다. 자신이 알고 지낸 핀의 모습보다 알지 못하는 핀의 모습이 더 많다는 것이 언제나 불만이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시간 속에서 핀은 얼마나 많은 이들을 곁에 머무르게 했을까.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다양한 형태와 크기의 애정을 건넸을까. 닐은 존재조차 알 수 없는 미지의 것들을 향한 질투를 자주 품었다.
질투 이후로 닐의 마음을 잠식한 것은 두려움이었다. 모든 것에는 끝이 있게 마련이고, 일반적으로 더 높게 쌓인 시간이 먼저 허물어지는 법이니까. 결코 무너지는 일 없으리라 생각해온 핀에게조차 끝이 있을 거란 생각이 때때로 닐의 숨을 멎게 했다. 실제로 닐은 한번쯤 핀을 잃을 뻔 하지 않았던가. 곱씹고 싶지도 않은 지난날의 악몽 같은 기억에 고개를 저어 금세 털어낸 닐의 모습이 또다시 자취를 감춘다. 핀의 런던 집을 찾아갈 생각이었다.
“…….”
추적추적 내리는 빗속 어둠에 잠긴 집을 올려다보며 닐은 가만히 숨을 죽였다. 그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고개를 살짝 돌리면 인간의 시력으로는 인식할 수 없는 거리에 세워진 시계탑이 보였다. 이제 겨우 아홉 시를 넘어가고 있을 뿐인데. 어째서 불이 꺼진 채 비어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핀의 성에서부터 따라붙은 서늘하고도 기묘한 냉기가 뒷덜미를 타고 스멀스멀 위로 번진다. 빗물에 젖은 손으로 뒷목을 쓸어내린 닐이 돌아섰다. 재단 쪽에 가 있는 걸까. 그러나 핀은 재단에서도, 곳곳의 보육원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닐은 초조해졌다. 형체 없던 두려움과 불안이 조금씩 선명해지며 닐의 뒤에서 킥킥 비웃음을 흘려댔다. 고개를 털어 그 비웃음을 흩트려낸 닐이 지친 듯 얼굴을 쓸어내렸다.
핀이 일언반구 예고도 없이 자취를 감추었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처럼 또 사라진 걸까. ……그때처럼. 주인 없는 런던의 집 거실에서 서성이던 닐의 발이 서서히 멈춰 섰다. 스스로 악마로서의 기억과 능력을 봉인하고 인간의 생활을 했던 곳. 그곳이 아직 남아있었다. 어쩌면 또 기억과 힘을 봉인하고 인간인 척 지내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잠시 기억을 더듬은 닐이 이윽고 소박한 집을 떠올렸다. 한갓지고 작은 관광마을. 마을의 상징색으로 곱게 칠한 문이 돋보이던 집. 곧장 그곳을 향해 움직이려던 닐이 멈칫했다. 만약. 정말 만에 하나의 경우 핀이 그곳에도 없다면 또 어디를 찾아야 만날 수 있을까. 이번엔 만나는 데에 얼마의 시간이 걸릴까.
사실 몇 년의 시간이 걸리든 상관없었다. 자신은 반드시 핀을 찾아내고 말 것이니까. 설령 핀이 자신을 피해 스스로를 봉인했다 해도 찾아낼 생각이었다. 설령 그를 찾아낼 수 없다면 제게로 불러들이리라. 소담하게 꽃이 핀 조그만 마당과 작은 집이 밝아오는 하늘의 창백한 푸른빛에 물들어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새벽 특유의 공기가 닐의 코끝을 엷게 스치고 흩어진다. 설핏 벌어진 입술 사이로 가느란 숨이 새어 나왔다. 파르랗게 물든 새벽을 깨우는 집집의 생활소음이 하나둘 더해지고, 닐은 묘한 긴장이 묻어나는 걸음으로 집안을 향해 움직였다. 어쩐지 능력을 써 들어가고 싶지가 않아 닐은 마당을 가로질렀다. 발아래에서 희고 동글한 자갈이 잘그락잘그락 존재감을 드러냈다.
몇 걸음 걷지 않고도 대문 앞에 도착한 닐이 조용히 문고리를 붙잡았다. 기름칠이 부족했던지 경첩의 작은 비명과 함께 문이 아가리를 벌린다. 악마의 눈을 가리기엔 미약한 어둠 사이로 오롯이 들어선 닐이 등 뒤로 문을 닫았다. 집안을 맴돌던 침묵이 닐의 다리를 휘감고 올라와 혀를 날름댔다. 소리 죽인 걸음이 한 걸음, 두 걸음 혼자 지내기에 모자람이 없는 집의 거실로 향했다. 그를 닮아 환한 색과 따뜻한 질감을 가진 카우치 소파의 등받이가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그 옆으로 놓인 조그만 원형의 테이블 위 두툼하게 놓인 엽서 뭉치. 익히 아는 것들이었다. 자신이 인간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핀에게 차곡차곡 안부를 전한 기록들이니까.
어째선지 입술이 바짝 말랐다. 심장이 불온하게 술렁였다. 소파로 다가설수록 숨을 죽이게 됐다. 이상하게도 머릿속에 새붉은 경고등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그야, 조금만 기감을 돋워도 파악이 가능한 집안 어느 곳에서도 기척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에. 닐은 오래지 않아 그 경고등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기척을 느낄 수 없었던 이유를, 심장이 불온하게 속삭인 이유를 목도할 수 있었다. 등받이 너머로 보이는 새카만 그을음. ……아. 닐의 입술 사이로 낮은 탄식이 흘렀다. 모르려야 모를 수 없는 흔적. 닐의 머릿속이 징징 울렸다. 날카로운 이명이 세상의 모든 소리를 덮었다. 소파 등받이를 짚은 채 간신히 소파 앞으로 돌아간 닐은 긁어모아도 한두 줌밖에 되지 않을 듯한 잿더미를 마주하고 뒷걸음질 쳤다.
거짓말.
거짓말일 것이다.
아니, 반드시 거짓말이어야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저것이 핀이어서는 안 됐다.
뒷걸음질의 끝, 등에 와닿는 벽을 느끼고 닐은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먹혀 흡수되지 않고 소멸한 악마가 어떠한 형태를 띠는지 닐은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딱 저렇게 새카만 그을음과 같은 잿더미가 되어서……. 거짓말이다. 한때 설원처럼 순백의 색채를 띠었으며 언제나 따뜻하고 다정하던 손길이었고 그 무엇보다 온유하게 그려지던 미소가 저 모르는 곳에서, 이렇게 소리소문없이 잿더미가 될 수가 있다고. 어떻게?
“아…”
미처 언어로 빚어지지 못한 목소리가 닐의 목을 긁으며 튀어나왔다. 핑 돌며 이지러지는 시야에 닐은 자신이 제대로 호흡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곧 죽을 것처럼 숨이 찼다. 숨이 막혀서, 쉬어지지 않아서. 닐이 손톱을 세워 제 가슴팍을 깊게 할퀴어냈다. 우악스런 힘에 옷감을 찢고 파고든 손톱이 살갗 위로 길고 붉은 줄을 남겼다. 아물고, 재차 찢어진다. 몇 번인지 셀 수조차 없는 반복 끝에 닐이 헐떡이며 간신히 숨을 토해냈다. 울음을 토해냈다. 형체 없던 두려움과 불안이 하얗게 빛을 발하며 좁은 거실을 빙글빙글 돌았다. 광흥의 장단에 맞추어 겅중겅중 뜀박질을 하는 망령들이 박장대소했다. 깔깔, 귀청을 찢을 듯 날카로운 웃음이 닐의 정신을 흔들었다. 이를 악다문 닐이 바닥에 이마를 찧었다.
그렇게 하면 마치 정신을 차릴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이 모든 게 꿈처럼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붉어진 살갗이 이윽고 찢어져 바닥으로 핏물이 흥건해져도 닐은 멈추지 않았다. 빠드득 금이 가기 시작하는 잇새로 짐승의 것과 진배없는 울음소리가 비어져 나왔다. 죽고 싶었다. 죽을 것 같았다. 죽고 싶었다. 죽을 것 같았다. 닐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오로지 그뿐이었다. 한참 머리를 찧어대던 닐이 바닥을 기어가 엽서 뭉치로 손을 뻗었다. 우악스런 손길에 테이블이 옆으로 쓰러지며 유리 상판이 박살 나 흩어진다. 유리와 뒤섞여 바닥에 흩어진 엽서들을 긁어모으던 닐의 손길이 어느 한 엽서에서 뚝 멈춰 섰다. 제 것보다 고아하고 유려한 필체는 핀의 것이다. 몰라볼 수 없는 핀의 흔적.
Dear naberius,
Don’t be so sad.
Sincerely, your finn.
눈물이 후드득 떨어지는 눈을 깜빡이며 몇 번이고 그 짧은 편지를 반복하여 읽어내리던 닐이 실소를 터트렸다.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그 한 문장이 핀의 소멸을 선명하게 닐의 마음속에 각인시켰다. 핀이 없다. 이 세상에 더는 자신의 방패가 없다. 저를 오롯이 서 있게 하는 주춧돌이 사라졌다. 제 사랑을 모조리 독식한 이는 어쩌면 이렇게나 잔인할 수 있는가. 그 스스로의 존재가 누군가의 숨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으면서.
“어떻게……어떻게 나한테, 말도 없이…”
지독한 배신감이 와르르 일었다. 심장이, 마음이 수만 개의 조각으로 저며진다. 제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 소멸을 비밀로 한 것이라면. 그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멍청이임이 틀림없었다. 닐은 러그 위에 웅크려 엎드린 채 고통에 찬 울음을 쏟아내며 헐떡였다.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 닐의 둔중해진 감각에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귓가에서 뭉개지고 바스라져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알고 싶지 않았다. 필요치 않았다. 웅크려 머리를 처박고 있던 닐은 누군가의 손길이 등에 와 닿는 것을 느끼곤 손을 휘둘렀다.
여린 피부가 찢어지고 골육을 가르는 감각이 손을 스친다. 끼쳐 드는 피비린내, 이어지는 비명, 비명, 비명……. 시끄러웠다. 성가셨다. 고개를 들어 올리면 눈앞은 여전히 눈물로 얼룩져 흐리기만 했다. 닐의 고개가 천천히 옆으로 돌아간다. 한때 사람이라 불리었을 고깃덩이가 두 동강 나 작은 거실 한구석을 더럽히고 있었다. 닐의 눈동자가 느리게 굴렀다. 비명을 지르는 것조차 잊고 얼어붙은 것이 하나, 둘, 셋. 곧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질 여리고 여린 생들. 이미 머리부터 발끝까지 비탄으로 가득 찬 닐에게 그들을 향한 자비와 추도가 들어설 자리는 없었다.
지옥으로 돌아온 닐은 자신의 검은 호수 앞에 우두커니 주저앉아 며칠이고 호수만 눈에 담았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고, 들리지 않았고, 보이지 않았다. 외부로부터 쏟아져 들어오는 것들을 받아들일 여력이 없었다. 닐의 권속들은 불안한 시선으로 작은 움직임조차 없는 그들의 주인을 지켜보았다. 자신들의 방패가 흔들리고 있다. 흔들려선 안 될 것이 위태롭게 휘청인다. 그러나 누구도 선뜻 닐에게 다가서지 못했다. 생존을 꾀하는 일에 도가 튼 본능이 ‘위험'을 말하고 있었으므로.
“…모르고……?”
“…아마도……”
“말……새……”
“마르바스……어떻게…”
마치 그대로 굳어버린 것처럼 움직이지 않던 닐의 고개가 움직였다.
“…마르바스가 왜.”
저들끼리 낮은 소리로 소곤거리던 악마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꾹 닫았다. 그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닐이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새파란 빙하의 조각을 감싸고 있던 흰자위가 검게 물든다. 닐의 등 뒤로 커다란 피막의 날개가 움트듯 돋았다.
“말해.”
사람의 말소리와 함께 목구멍을 울리며 흘러나오는 것은 짐승의 으르렁거림이었다.
“……그러니까… 새, 새로운 마르바스가… 태어난 지…며칠 돼, 됐다고…”
닐의 눈이 짧게 흔들렸다. 새로운 마르바스. 핀을 대신할 다음 대의. 누구 마음대로. 새파란 분노가 일었다. 인정할 수 없었다. 그 자리는 핀의 것이어야만 했다. 그 이외에는 누구도 앉아서는 안 되는 자리인 것이다. 닐은 곧장 핀의 성으로 이동했다. 어째서 그 생각을 못 했지. 새로운 마르바스가 태어날 것이라는 걸 왜 놓치고 있었지. 새로운 마르바스라니, 마치 핀을 갉아먹고 그를 양분 삼아 자라난 기생식물 같았다. 닐은 결코 그 자리를 다른 악마에게 줄 수 없었다.
고작 며칠이라고 했던가. 성의 분위기가 이질적이었다. 항상 고요하던 핀의 성 곳곳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닐은 익숙한 성안을 헤집고 다니며 마주치는 악마란 악마는 모조리 찢어 죽였다. 어느 놈이 마르바스일지 알 수 없으니, 거슬리는 것은 그냥 모두 죽여버리는 것이 간단하고 손쉬웠다. 어차피 제게 악마들이란 먹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나뉠 뿐이다. 두 손으로 꼽기 어려운 수의 악마를 죽이고 피를 뒤집어쓴 닐의 앞에 새카만 머리와 눈을 가진 남성체가 나타났다. 닐의 눈이 찬찬히 그 외양을 훑었다. 대부분의 마르바스가 띄는 특징. 갑자기 성으로 쳐들어와 행패를 부려대는 무뢰한을 쏘아보는 눈에는 명백한 불쾌감이 서려 있었다.
“너구나. 새로운 마르바스가.”
“너는 누군데 남의 성에서 이렇게 행패를 부리지.”
닐이 실소를 터트렸다. 어설프게 웃긴 농담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건조한 웃음을 흘려낸 닐이 이죽였다.
“남의 성? 그렇지. 여긴 네 성이 아니야, 핏덩아.”
말을 끝맺음과 동시에 거리를 좁혀 다가선 닐이 검은 마르바스의 가슴을 노리고 손을 뻗었다. 제아무리 악마라 해도 심장을 뜯어내 터트리면, 머리를 박살 내면, 갈기갈기 찢어버리면 살 수 없다. 몇 번의 공방이 이어졌다. 성인 남성의 모습으로 빚어졌으니 당장 마르바스의 모든 힘을 다룰 순 없다 해도 신체적 능력은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접전 끝에 닐은 한쪽 팔의 살점 절반을 내어주고 마르바스의 심장을 꿰뚫을 수 있었다.
“컥…!”
울컥 피를 쏟아내는 입이 무어라 말을 빚어내려는 듯 움직였으나, 닐은 듣고 싶지 않았다. 기껏해야 왜 이러냐는 정도일 테니까. 닐은 이윽고 말단에서부터 검은 잿가루가 되어 바스라지는 마르바스의 눈을 마주했다. 고통과 공포,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의문이 한데 뒤엉킨 눈이 우스웠다.
“넌 마르바스로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
그날 이후 닐은 마르바스의 성에 줄곧 머물렀다. 어디에서든 성 내부로 들어오는 악마는 죽였다. 새로이 태어나는 마르바스도 모조리 죽였다. 남성, 여성, 아이, 그 어떤 모습을 하고 나든 하나도 빠짐없이 닐의 손 아래에서 한 줌 재로 바스라졌다. 돌보지 않는 성이 점차로 황폐해지고, 망가져 갔다. 무언가를 죽이지 않을 때의 닐은 멍하니 넋을 놓고 주저앉아 있거나 짙은 피로감에 내몰려 수마의 품에 안겼다.
잠이 들면 닐은 꿈을 꿨다. 순백의 마르바스를 보았다. 지옥의 그 어떤 존재보다도 환하고 새하얗게 빛나는 존재. 나의 것. 날 지켜주었던 내 방패. 스스로 번견을 자처하여 목줄을 건넬 수 있는 유일무이한 이. 그러나 꿈속에서조차 닐은 웃을 수 없었다. 항상 반복되는 똑같은 꿈. 몇백의 시간을 살며 차곡차곡 쌓인 기억의 조각들이 하나둘 흐려져 간다. 핀의 웃음, 목소리, 얼굴, 손길, 눈빛 그 무엇도 붙잡을 수 없다. 모래처럼 모두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그것은 지독한 형벌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시달리다 눈을 뜨면 지옥 속의 지옥이 닐을 반겼다.
몇의 마르바스를 죽였는지 더 이상 알 수 없었다. 그저 죽이고 또 죽여나갔다. 닐이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있는 마르바스는 오로지 순백의, 핀뿐이었으니까. 그가 돌아올 때까지 자리를 비워두면 될 일이다. 첫 마르바스를 살해한 이래로 닐은 날카롭게 곤두세운 기감을 누그러뜨린 적이 없었다. 새로운 마르바스의 탄생을 알아차려야 했고, 성 내부로 들어오는 악마를 감지해야 했으니까. 그러나 이번의 방문객은 달랐다. 닐이 모든 것을 걸어도 상처 하나 남길 수 없을 게 자명한 자. 닐의 눈이 적대감으로 번뜩였다.
“주인 잃은 짐승이 따로 없군.”
“…….”
사탄이었다. 그가 부러 드러낸 강대한 위압감이 닐을 짓누르듯 압박해왔다. 모르려야 모를 수 없는 무언의 경고. 핀이 자주 앉아있곤 하던 소파에 무릎을 감싸고 앉아있던 닐이 목 안으로 위협적인 소리를 냈다.
“꺼져.”
닐의 위협에도 낮게 목을 울려 웃은 사탄의 시선이 어지러운 공간 내부를 찬찬히 훑는다. 군데군데 말라붙은 핏자국과 망가진 물건들, 흔적만 남은 검은 잿가루 따위로 엉망진창이었다. 이윽고 녹음과 바다가 뒤섞인 눈이 닐에게로 꽂혀 들었다.
“어린 것아, 네 영지로 돌아가라.”
“…….”
“그와의 연을 생각해 베푸는 자비다.”
“…….”
“악마장들이 너를 주시하고 있다. 우리는 지옥의 질서를 유지할 의무가 있고, 지금 너는 그 질서를 어그러뜨리는 주된 문젯거리지. 네가 아는 순백의 마르바스는 숨을 다했다. 이제 그만 받아들여.”
“…웃기지 마.”
작위적으로 안타까운 한숨을 내쉰 사탄이 등을 보이며 돌아섰다. 어울리지도 않게 굳이 경고를 하러 찾아온 것은 제 연인의 일로 빚졌던 것을 갚기 위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사탄에게는 그의 행동을 저지하고 목숨을 부지하도록 애써야 할 이유가 없었고, 악마장으로서 판단해야 한다면 다른 악마장들과 마찬가지로 지옥을 위해 나베리우스를 소멸시키는 일에 동의하는 게 옳았다.
“그래, 굳이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겠다면 더는 말릴 이유가 없지.”
사탄이 자취를 감춘 후 닐은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모래알이 낀 듯 버석이는 눈을 꾹 힘주어 감는다. 핀의 소멸을 알게 된 이후로 부서져 내리기 시작한 세계를 도저히 다잡을 수 없었다. 바스라진다. 무너진다. 망가진다. 종내에 도래할 결말은 파멸뿐임을 닐도 알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닐은 숨을 쉴 수 없었다. 파멸을 향해 달려가는 길만이 닐을 숨 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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