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c.

光らない竹林

레벨(2024), 대니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있다. 

낯선 타국의 냄새가 밴 공기를 처음 폐부 깊숙이 들이마셨다 뱉어냈을 때.

괜한 구박을 들으면서도 부득불 챙겨온 필름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 순간을 가둘 때. 

페리 갑판 아래로 시선을 내려 누런 흙빛의 강물조차 포말은 희게 부서진다는 걸 알았을 때. 

평소라면 서지 않았을 긴 대기줄을 따라 종종종 움직여 근방의 명물이라는 간식을 손에 쥐었을 때. 

노곤한 다리를 쭉 펴고 앉아 하루의 일정을 되돌아보던 때.


무수한 찰나의 연속이 완성한 낡은 영화 필름은 그 누구도 찾지 않는 공간에서 끊임없이 반복된다. 

세상을 삼킨 탁색의 베일

비산하는 것들의 왈츠

메아리 없는 부름

흐려져 가는 생

매캐한 음울

맑게 갠 날씨는 언제쯤 죽림을 비추어 댓잎 사이사이 스밀 수 있을까.




光らない竹林



‘먼 길 왔는데 미안합니다만, 본 캠프 내 일본인 생존자 중 타케우치라는 성을 가진 사람들은 없습니다.’

터벅터벅 걸어나오는 군홧발 아래서 부연 흙먼지가 몸을 일으키다 이내 사그라든다. 기대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나 동시에 마음 속에서 이미 희망을 내려둔 것 또한 사실인지라. 바라던 대답이 아니었음에도 실망과 같은 눅눅한 감정이 치밀지는 않았다. 구태여 심리 상태를 이를 만한 표현을 찾자면 조금 막막하다—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까. 일렬로 늘어선 여러 대의 생존 캠프 차량을 지나, 주차공간의 가장 끄트머리에 세워둔 2인승 차량에 몸을 실었다. 그래. 애초에 규모가 그리 크지도 않은 캠프였다. 상해 중심부에서 차로 4시간이나 떨어진 곳. 시티 세븐의 끄트머리에서도 조금 더 벗어나야 도착할 수 있는 해당 생존 캠프는 일종의 거점과 같은 느낌으로 남아 유지되는 곳이었다. 

이 생존 캠프의 영역 너머는 사람이 생존할 수 없는 상태로 분류된 구역이었으나, 아주 드물게 경계 너머에서 생존자가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가 있어왔다. 하나같이 피골이 상접한 몰골로 발견된 생존자들은 생존 캠프 부지에서 최소한의 컨디션을 회복하는 동시에 시티 세븐으로의 입주가 가능한지 여러 검진을 거친다고 했다. 생존 불가능 지역에서 넘어온 이들이 어떤 질병이나 균을 보유하고 있을지 장담할 수 있는 게 없으니 만약을 위한 안전조치라던가. 그러나 관리정부에서 주안점으로 삼는 목표 중 하나가 인구의 확충이었으므로. 설령 질병에 감염된 상태라 해도 중앙에서 그에 대한 치료 준비가 완료되면 곧장 도시로의 입주 허가가 떨어졌다.

 

물론 캠프로 입소하게 되는 생존자가 이제는 바늘 구멍으로 낙타를 통과시키는 수준의 확률로 떨어져서 관리정부에서도 해당 캠프의 존폐를 논의하는 중이라고 지나가듯 들었더랬다. 시티 세븐이 건설되어 사람들의 삶이 조금이나마 안정된 지 이제 겨우 2년 정도가 흘렀다. 상해에 안전도시가 건설되었으니 생존해 있다면 찾아오라는 메세지를 라디오로 꾸준히 송출하곤 있다지만, 안전도시가 건설되기 이전의 삶을 버텨낸 이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생존의 가능성이 극히 희박하다는 것을. 

애초에 상해에서 잃은 가족이 이렇게나 멀리 떨어진 곳까지 흘러와 생존을 이어가고 있을 가능성이 없었다. 알면서도 굳이 이곳을 찾은 건 실낱 같은 희망이라도 잡아보자는 마음과 세븐 인근의 몇 안 되는 생존 캠프 중 찾아보지 않은 유일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핸들에 팔을 얹고 엎드리듯 푹 기댄 대니가 착잡한 기색으로 긴 한숨을 뱉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이젠 실종·사망자 명단으로 시선을 돌려야 할 때다. 얼굴을 묻은 채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제 행동이 신기루를 쫓아 달리는 일이라는 걸. 오래 전부터 마음 속으로는 그들의 추가 한 쪽으로 기울어져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주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고집스럽게 가족의 생존 가능성에만 눈길을 주고 있었을 뿐이다. 의미 없는 허상에 지나지 않을 희망을 붙들고 있는 것과 가족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현실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 무게가 달랐으니까. 

고작 스물이다. 이렇듯 엉망으로 무너진 세상에서 그게 무어 그리 대단한 의미를 갖겠냐만서도, 고작 스물에 불과한 제겐 아직 가족의 존재가 필요했다. 물론 세븐 건설 이전의 척박한 생존 환경에서 저를 가족처럼 여기며 챙겨주던 이들이 있긴 했다. 부모 뻘이라 여기기엔 젊은 축에 들었던 홍콩 출신의 부부. 그들은 스스로를 소개할 때면 꼭 부부라 말했다. 비록 그들의 모국은 결혼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서로의 마음이 서로만을 향해 있으니 부부라고. 중국 출장에서의 일이 끝나면 돌아가는 길에 대만의 작은 성당에 들러 둘만의 식을 올리려 했었다며 수더분하게 웃던 얼굴을 기억한다. 그 밤의 대화가 그들과 나눌 수 있었던 마지막 대화가 되고 말았다는 건 여전히 거짓처럼 느껴지곤 했다. 조금만 더 같이 있지. 그랬다면 그 이후 건설된 안전 도시에서 함께 지낼 수 있었을 텐데. 한결 안정된 생활 속에서 마음 놓고 웃는 날이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하아…….”

깊은 한숨이 또 한 번 핸들 위로 부서져 내린다. 착잡한 마음이 탁한 빛으로 머릿속을 물들인다. 차라리 가족의 소식을 여기서 그만 찾는 게 낫지 않을까. 그냥 그들이 어딘가에서 생존하여 살고 있으리란 사실에 홀려버리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그러면 적어도……

[대니 오고 있어? 차 반납 늦어도 18시까지 해야 돼 더 늦으면 나도 곤란해]

부르르 진동하는 핸드폰을 꺼내 메시지를 확인한 대니가 뒤로 고갤 젖히듯 머릴 기댄다. 군에서 일괄적으로 보급되는 핸드폰이니 연락이 와 봐야 군 내부의 연락이 다라는 건 알지만. 흘긋 시선만 내리깔아 시간을 읽곤 세 번째로 한숨을 내쉰 대니의 손이 이제야 차량의 시동을 켠다. 

“센치해질 시간을 안 준다, 안 줘….”

중얼거리는 한탄과 함께 안전벨트를 죽 끌어당겨 맨 대니가 차를 출발시켰다. 고르지 않은 길을 따라 차가 출렁인다. 현재 세븐을 책임지는 관리정부의 손길이 미치는 곳은 모두 돔과 흡사한 형태의 에너지 배리어가 생성되어 반 년씩이나 지지 않고 뜨지 않는 해를 대신하여 낮과 밤을 조절하고 있다. 지지 않는 해가 지상을 불지옥처럼 만들 때 외부의 열기를 상당수 차단하고, 빙하기가 내린 듯 오랜 밤이 지속될 때 지독한 냉기를 막아낸다. 흔히들 ‘돔’이라고 부르는 배리어가 있기에 세븐은 안전도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흘긋 눈을 들어 저만치 높은 곳에 반투명한 장막을 일별한다. 외곽의 외곽이라 한들 사람이 오가긴 해야 하니 에너지 배리어를 설치하긴 했겠으나, 굳이 길까지 다듬을 이유는 없었을테니 차가 덜컹일 수밖에 없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느린 속도로 울퉁불퉁한 구간을 지나며 마뜩잖은 듯 찌푸러들었던 미간은 안전도시의 외곽을 지나고 생활 영역으로 진입하여 고르게 포장된 길을 달리기 시작하자 서서히 평화를 되찾았다. 여섯 시까지 차를 반납하려면 쉬지 않고 꼬박 달려야 맞출 수 있을 터였다. 본래 임무용으로 구비되어 있는 차량이니 사적인 이유로 빌리는 건 허가되지 않은 사항이다. 차량 반출입을 담당하는 이와 쌓인 친분이 없었다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으리라. 그래도 나름 이리저리 오가는 사람들이 있는 도보와 달리 차도를 달리는 차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나마도 95%는 관리 정부나 군 등의 조직 차량이고, 나머지 5% 정도가 시민들을 이동시키는 운송 수단이었다.

세븐 건설 이후 삶은 얼추 재앙 이전과 비슷하게 돌아간 듯 했다. 물론 도시 밖은 여전히 재앙의 영향권에서 죽음의 땅으로 남아있었고 배회하는 괴생명체가 도시의 경계에서 시시때때로 안으로의 진입을 시도하지만, 세븐은 사람들에게 다시 일상이라 부를 수 있을 만한 것을 되돌려주었다. 지독한 열기와 냉기를 감소시키고 강풍을 막아내는 에너지 배리어 아래에서 사람들은 조금씩 다시 삶을 다듬어나갔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낯에 웃음이 떠오르는 날이 많아졌다. 한 걸음 멀어진 채 그 광경을 보는 게 좋았다. 대니 또한 평범하게 일반 시민처럼 살아갈 수 있었다. 뭘 하며 살아갈 수 있었을지는 몰라도 살고자 하는 마음과 욕심이 있으니 무엇이든 할 수 있었을 터다. 하지만 도시의 치안관리 조직과 각 군이 결성된다 발표되었을 때, 대니는 망설임 없이 군에 자원했다.

당시의 대니에겐 이어갈 제 삶보다 가족의 소식을 알아내는 게 우선이었으니까. 군인의 신분이 그에 좀 더 유리한 작용을 하리라 판단했었다. 시티 세븐의 공군으로서 충분한 일인분을 할 수 있도록 훈련을 받고, 공부하였으며, 노력했다. 군에는 저처럼 이제 갓 스물이 되었거나 아직 열아홉인 경우도 있었고 반대로 중장년의 나이인 이들도 있었다. 도시가 건설되고 그럴듯한 모양새를 갖추며 편입되거나 이주하여 시민의 수는 꾸준히 증가했다지만, 도시를 굴리고 지키는 데에 필요한 인력의 수도 그와 비례하여 증가해왔으므로. 군에서는 자원 입대의 나이 제한 폭을 넓게 두었다. 덕분에 저 또한 스물이 되기 전에 군인의 신분을 얻을 수 있었으니 나쁜 일은 아니었다. 흔히 알려진 군대라는 집단의 통상적인 이미지를 떠올리며 과연 잘 적응하여 지낼 수 있을까 따위의 두려움을 품은 적도 있었으나, 막상 지내 보니 걱정했던 게 무색하리만치 잘 맞았다. 어쩌다 사석에서 마주쳐 몇마디 대화를 주고 받았던 상관의 말대로 생사를 위협하는 일 앞에서 인간의 단결력은 유난히 빛을 발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고 말이다. 

얼마 전엔 파일럿으로서의 첫 정식 비행도 수월하게 끝마쳤다. 비행을 마친 전투기 바퀴가 지면과 닿던 순간 전해진 무게감은 여전히 대니의 손 안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당시의 감상 또한 생생히 남아 한 번씩 불쑥불쑥 솟고는 했는데 그 부분이 참 묘하다면 묘했고, 우습다면 우스웠다. 제아무리 산 사람은 살아야 하는 거라지만 모든 것이 예전과 같지 않은 상황에서 태평하게 성취감을 느끼고 의욕을 가지고 희망을 품어도 되는 걸까. 항상 마음 한 구석엔 의문이 있다. 그늘진 곳에서 우두커니 선 의문이 조금씩 움트는 희망을 집어삼키려 할 때마다 대니는 가족을 생각했다. 언제나 자신의 성취를 축하해주고 힘껏 응원해주던 가족의 다정함과 애정 같은 것들을. 살랑이는 바람결 사이로 내리쬐어 그늘을 물러서게 하는 따뜻한 빛무리를. 

“수고하십니다.”

“예, 신분 확인 하겠습니다.”

한참을 달려 공군 부지 시설의 초입에 들어선 대니는 출입차량을 관리하는 초소에 정차해 제 신분증을 꺼내 보였다. 시티 세븐의 공군 소속 타케우치 히요리, 코드네임 대니. 사무적인 눈으로 신분증의 내용과 전산 상의 정보를 비교한 군인이 마지막으로 대니의 얼굴까지 흘긋 확인한 다음에야 신분증을 돌려주었다. 

“확인했습니다, 대니.” 

“수고하십쇼.” 

고개를 꾸벅여 인사하곤 차를 몰아 초소를 지난다. 얼마 못 가 불현듯, 인사를 할 거였다면 군인답게 경례를 했어야 했던 걸까 하는 생각이 떠올라 대니의 낯이 머쓱한 빛으로 물들었지만 말이다. 차량을 반납하기로 한 장소에 무사히 주차까지 마치고 차키를 반납하니 딱 18시였다. 건물 밖으로 돌아 나오는 시야에 서서히 노을지듯 불그스름하고 어두운 색으로 물들어가는 에너지 배리어가 보인다. 대니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세븐의 해질녘엔 그림자가 생기지 않는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림자가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지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야, 세븐에는 해와 달이 존재하지 않으니까. 밤이 찾아올 시간이면 배리어는 전체적으로 어둡게 물들어 지지 않는 태양을 가리고 인위적으로 밤을 가져온다. 만들어진 어둠 아래에서 사람들은 자전을 멈춘 지구의 과거를 추억하며 잠에 빠져들었다.

머물고 있는 관사로 돌아온 대니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책상 서랍에 넣어둔 리갈 패드를 꺼내 펼치는 일이었다. 노란빛의 얇은 종이를 팔락팔락 몇 장이고 넘기면 하나의 리스트가 모습을 드러낸다. 상해 인근의 생존 캠프 또는 거점을 적어둔 목록으로, 붉은 펜으로 줄을 그어두지 않은 맨 아랫줄을 착잡하게 한참 바라보던 대니가 펜을 꺼내 줄을 그었다. 가족의 소식을 더 찾아보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그들의 죽음은 이미 기정사실화된 사실이다. 속을 다 들여다 볼 수 있는 투명한 상자에 담겨 앞에 놓여있는 셈이다. 굳이 열어보지 않아도 안에 든 것을 알 수 있다. 하여 상자는 더 이상 단순히 물건을 담아내는 게 아니라 비극과 현실을 분리하는 격벽의 역할을 한다. 그 벽을 허무는 순간 비극은 해일처럼 대니를 덮쳐들 터였다. 들이닥치는 걸 알아도 피할 길 없는 자연재해처럼 집어삼켜지리라. 잠들 수 없는 밤이 깊어간다. 두려움을 두른 불면의 품에서 대니는 몇 번이고 마음을 전복시켰다.

“대니. 잠시 나 좀 볼까.”

다음 날 대니는 곧장 재앙 실종 및 사망자 명단의 열람 요청을 상부로 올렸다. 그로부터 약 한 시간여 만에 마주한 부대장의 얼굴이 꼭 그렇게 묻는 것만 같았다. 상자의 뚜껑을 기어이 열어 확인하겠느냐고.

“명단 열람 요청을 올렸던데.”

“예. 가족의 생사를 확실하게 알고 싶어서 올렸습니다.”

“생존자들 가운데선 수소문해 봤고?”

“반 년간 찾았습니다만 없었습니다. 이제 남은 건 명단 뿐이라서요. 당시엔 어렸고 경황이 없어 명단을 훑어보지 못했습니다.”

“……. 그래. 허가해 줄테니 찾아 봐.”

“감사합니다.”

하루의 주어진 일과를 마치고 난 뒤 대니는 다시 사무용 책상 앞에 앉았다. 명단 열람을 허가 받은 기간은 사흘. 어차피 검색 프로그램을 돌려 찾는 것이니 사흘이 모자라진 않을 터였다. 시스템에 제 코드를 입력해 접속한 대니는 등록된 인명의 수를 마주하고 가슴 위로 묵직한 돌이 내려앉은 양 숨이 답답해짐을 느꼈다. 지금이라도 포기하고 컴퓨터를 종료하는 게 나을까. 그렇게 한다면 가족들이 어딘가엔 살아있으리라 자위하며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른다. 키보드 위에 놓인 손가락이 사늘하게 식어내린다. 하지만 가족들의 생사를 명확히 확인하지 않는다면, 저는 언제까지고 그들을 찾기 위해 곳곳을 뒤지고 헤집고 다닐 게 뻔했다. 점점 가늘어져 가는 희망에 매달리다 못해 종내엔 미쳐버릴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마주해. 피하지 마. 받아들여. 마음 속으로 스스로를 꾸짖은 대니가 굳은 손을 움직여 느리게 검색어를 입력했다.

[ Search word: Takeuchi ]

검색이 시작되자 마우스 커서의 모래시계가 빙글빙글 느린 속도로 돌기 시작했다. 일일이 세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길고 까마득한 명단이다. 그러니 검색 결과가 나타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고, 그동안 다른 일을 하는 게 효율적이리라. 머리로는 분명 그리 하는 게 좋을 거라는 생각이 불 켜진 전구처럼 반짝이며 몸을 종용했으나 대니는 마치 석상이라도 된 양 멀거니 앉은 채 모니터만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시시각각 가까워지는 막다른 길의 끝을 알면서도 전속력으로 달려가는 기분이었다. 심장이 불편한 박동으로 술렁거린다. 숨통이 죄인 듯 가늘어진 호흡 끝이 희미하게 떨린다. 더 이상 시간의 흐름을 가늠할 수 없었다.

“……아.”

멍하게 앉아 하릴없이 시간만 흘려보내던 대니가 정신을 차린 것은 컴퓨터에서 들려온 짧은 비프음 덕분이었다. 뻣뻣하게 굳은 목을 주무르며 가볍게 좌우로 돌리듯 풀었다. 왼편으로 자리한 창밖의 에너지 배리어가 새벽녘 하늘처럼 창백하게 밝아져 있었다. 낙엽의 색을 닮은 눈동자가 서서히 모니터로 옮겨간다. 대니가 차게 식은 손을 꾹 말아쥐었다.

[ Search result: 3 ]

Tetsuya Takeuchi (D)

Ryoko Takeuchi (D)

Yuto Takeuchi (D)

동명이인은 아닐까. 동명이인일 수도 있다. 동명이인일지도 모를 일이다. 동명이인이라면………….

“…웃기고 있네.”

오래도록 말하지 않았던 목소리가 버석이며 꺼질 듯 희미하게 새어나왔다. 그래, 웃기는 소리다. 일본도 아니고 상해에서, 동명이인이 세 명이나 존재할 확률이 어디 있단 말인가. 실종자의 이름 뒤 분류는 L이다.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시신의 경우에만 D를 붙일 수 있다. 그러니 부모님과 오빠는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던 시신으로… 차라리 다행인 일이다. 그들이 신원조차 확인할 수 없는 상태로 훼손되어 신원 미상의 기록으로 남아있었다면 영영 찾을 수 없었을 테니까. 무수히 많은 John Doe 또는 Jane Doe 사이에서 뭉뚱그려지는 것보다 나았다. 이는 비극이 아니다. 오히려 희소식이라고 보아야 한다.

だから息をして、ひより。

일렁일렁 차올라 넘쳐 흐르기 시작하는 눈물을 닦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대니는 의식적으로 숨을 천천히 들이쉬고 내쉬려 노력했다. 치미는 울음을 끅끅 삼키다 결국 두 손에 얼굴을 묻고 만다. 둥글게 굽어진 등이 소리 없이 들썩인다. 누군가 심장을 꽉 움켜쥔 것처럼 조여와 아팠다. 가족들과 지하의 쇼핑몰을 구경하고 지상으로 올라갔다, 나오기 전 들렀던 화장실에 핸드폰을 두고 온 것이 생각나 가족을 기다리게 하고 저 혼자 다시 지하로 내려갔었다. 왜 같이 내려가자고 하지 않았을까? 왜 핸드폰을 두고 나왔던 걸까. 왜 나만 살아남은 걸까. 지금 이 순간에도 안전도시 밖을 할퀴고 있을 강풍이 머릿속에 들이닥친 듯 생각이 엉망으로 뒤엉켰다. 그들의 죽음이 부당하단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살 거라면, 죽을 거라면 가족 모두가 똑같은 운명을 맞이하는 게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혼자 이런 고통에 잠기지 않아도 됐을 텐데.

“……대니.”

등 뒤에서 차분히 들려오는 나직한 부름에 대니의 등이 움찔 튀었다. 부대장의 목소리였다. 아직 새벽일텐데. 대니는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손등으로 벅벅 닦아내며 몸을 일으켰다. 물기를 닦아낸다고 해서 운 적 없는 멀끔한 얼굴이 될 리가 없음에도 등을 보이고 선 채 한참 얼굴만 닦았다. 그러나 눈물이 멈추지 않았으므로 아무리 닦아내도 소용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대니는 등을 보인 채 울음기를 눌러 목을 가다듬었다.

“왜…, 왜 이렇게 일찍, 출근하셨습니까?”

“…명단은. 확인했고?”

“…….”

“……. 한참 늦었겠지만… 조의를 표하마.”

감사합니다, 그 짧은 한마디를 겨우 대꾸한 대니가 왈칵 넘치는 눈물을 닦아낼 생각도 못한 채 눈을 질끈 감았다. 눈가가 따가웠다. 그만 울고 싶어도 좀처럼 제 마음대로 되지가 않는다. 차오르는 슬픔에 숨이 막혀 그대로 죽어버릴 것 같았다. 이미 짐작하고 있었으면서. 가족의 죽음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으면서. 고작 그 투명한 상자의 뚜껑을 열어젖힌 게 다인데. 그 안에 담긴 슬픔이 이렇게나 숨막히고 거대하고 지독할 수 있다고? 소리 없이 헐떡이듯 울음을 삼키는 대니의 등 뒤로 묵직한 군홧발 소리가 다가온다. 비통함 묻어나는 손길이 어깨 위로 툭툭, 위로를 전하며 내려앉았다.

“…오늘 하루는 병가로 처리해 둘 테니 마음 추스도록 해.”

카테고리
#오리지널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