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c.

Karim Kahn

녹턴(2020), 카림

사고하는 존재라면 누구든 꿈을 꾼다. 어느 대학 강의에서 교수가 칠판에 정갈히 쓴 문장을, 카림은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었다. 이제 그 때가 정확히 천팔백 몇 년도 즈음이었는지, 어느 대학의 어떤 교수였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와중에도 말이다. 그 문장이 유난히 기억에 남은 이유를 꼽으라면 글쎄. 당시엔 신선한 말이었기 때문일까. 칠판에 그 한 문장을 써 내린 교수는 강의실에 앉아있는 학생들을 향해 돌아서며 말했다.

 

‘이것은 언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짐승에게도 적용되는 말이며, 인간에게는 당연히 적용되는 말입니다. 기억하지 못할 뿐. 꿈을 꾸지 않는 인간은 없습니다.’

 

학생들 사이에서 작은 소곤거림이 일었다. 굳이 집중하여 듣지 않아도 자신은 정말 꿈을 꿔본 적이 없다거나, 동물이 어떻게 꿈을 꾸냐는 식의 내용들이었다. 강의실의 가장 뒷줄에 앉아 턱을 괸 채 시큰둥한 얼굴로 소곤거리는 한 놈의 머리꼭지를 내려다보던 카림의 시선이 강단에 선 교수에게로 향했다. 맨 뒷줄은 강의실 내에서 가장 높은 자리였기에 눈은 여전히 아래로 내리깐 채였다. 느긋하게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손을 머리 높이까지 들어올렸다. 그는 학생들의 질문을 싫어하지 않는 교수였고, 예상대로 반가운 웃음을 지어보이며 카림의 이름을 직접 불러주는 정성까지 들였다. 강의실 내의 모든 시선이 노골적으로 카림에게 쏠렸다. 타인의 시선을 받아내는 일은 카림에게 이미 그 어떤 중압감도 가져다주지 못했으므로. 카림은 턱을 괸 느긋한 자세를 유지한 채로 닫혀있던 입술을 열었다.

 

‘그 말씀은 인간에 준하는 존재 또한 꿈의 손길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인가요.’

‘인간에 준하는 존재,란 어떤 존재를 말하는 겁니까?’

‘예를 들자면… 천사나 악마 같은 존재겠지요.’

 

강의실 어딘가에서 조그만 비웃음이 터졌다. 그러나 카림도, 교수도 굳이 그곳을 향해 시선을 돌리는 의미 없는 일은 하지 않았다. 카림은 여전히 눈을 내리깔아 강의실의 가장 낮은 곳에 선 교수를 내려다보았다. 대답을 요구하는 무심한 눈을 가만히 올려다보던 교수가 가능한 이야기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천사와 악마는 일반적으로 인간의 위에 선 고차원의 존재로 여겨지지만 그들도 결국은 사고하며 움직이는 존재란 사실은 당연할 테니 말입니다.’

‘그 존재를 믿으시는지.’

‘믿습니다. 세상엔 과학으로 증명되지 못한 일들이 아직 많기 때문이고, 인간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믿기 어려운 선행과 악행들이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잠시 시선을 마주쳐 오던 교수는 카림이 무언으로 납득을 표했다 생각하곤, 인자하게 웃은 뒤에야 강의를 이어갔다. 카림은 교수의 목소리를 흘려들으며 칠판에 쓰인 단정한 글씨로 시선을 옮겨갔다. 사고하는 존재라면 누구든 꿈을 꾼다, 라. 거기 더해 천사나 악마들에게도 가능성이 있다고. 신선했다. 아닌 게 아니라 카림은 천칠백 해 이상의 시간을 살아오며 꿈이라는 것을 꾼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교수의 말대로라면 기억해본 적이 없다는 뜻이리라. 카림은 애초에 꿈이란 것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했다.

 

인식해 본 적이 없었으므로 꿈은 대체 어떤 것이고,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 어떤 결과를 낳는지 알고 싶어 수강한 강의였다. 다른 악마들과 꿈이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었기에 꿈은 인간에게만 존재하는 것이라 생각해왔다. 아무리 인간을 흉내 내도 닮을 수 없는 몇 가지 가운데 하나일 것이라 믿었다. 인간들이 이 땅에 처음 생겨나 제대로 된 무언가를 갖추기 전부터 인간들은 꿈을 대단히 불가사의하게 여겼다. 어떤 이들은 꿈을 꾸는 것은 영혼이 잠시 몸으로부터 외출을 하는 것이라 했고, 또 어떤 이들은 꿈을 통해 신성한 존재의 의지가 계시되는 것이라 했으며 그 외의 어떤 이들은 미래를 들여다보는 거울이라 칭했다. 꿈을 바라보는 인간들의 시선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어왔고 또 그만큼 각양각색이었다. 그러니 그 존재에 대해 더욱더 알고 싶어질밖에.

 

그리고 그날 밤, 카림은 처음으로 꿈이 제게도 존재함을 인식했다. 단순한 변덕으로 일으켜 세웠던 지난날의 짧은 영광과 역사의 일부로 남겨진 이름을 위해 그 이면에서 흘러야만 했던 피 따위의 것들이 되새김질 하듯 눈앞을 스쳐 지났다. 개중에는 한때의 웃음도 즐거움도 섞여있었다. 이후로도 카림은 종종 꿈을 꾸었다. 가장 깊게 인간의 역사에 관여했던 시기를 보기도 했고, 그보다 훨씬 앞선 과거의 일을 떠올리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미래의 갈래를 들여다보는 일만은 하지 못했다. 소수의 인간들은 앞으로 일어나게 될 일을 보는 경우도 있다던데 말이다. 카림이 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과거, 지나온 시간과 겪어온 일에 대한 것이 전부였다. 드물게 터무니없는 내용의 꿈을 꾸긴 했으나 미래와는 관련이 없었다. 그래서 그것이 아쉬운가 하면 딱히 그렇지는 않았다. 어차피 제게 미래란 그리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Karim Kahn

 

 

 

 

 

때때로 찾는 인간의 땅은 지역에 따라 기후가 천차만별이었다. 지옥도 곳에 따라 온도의 차가 존재하는 편이었지만, 대체로 거기서 거기에 지나지 않았기에 이승의 다양함에 견줄 것은 못 되었다. 마지막 기억이 춥디추운 땅이었던 것을 기억하면 이곳의 냉기는 보드라운 수준이었다. 큰 보름달이 떠오른 늦은 밤이었다. 잔잔하게 일렁이는 오아시스의 수면을 따라 비춰진 달이 몸을 흔들고 있었고 밤을 보내는 짐승들과 인간들의 고요한 숨소리만이 조그맣게 깔려들었다.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그리 넓지 않게 퍼진 천막들은 임시처럼 보였으나 부락의 형태를 하고 있어 사탄은 그들이 유목민이겠거니 지레 짐작했다. 시선이 발치로 떨어져 내렸다. 달빛을 얼굴로 받아내며 황망하게 저를 올려다보는 시선은 오랜만이었다. 가장 최근 들어 소환에 응한 것이 오십여 년은 족히 되었으니 오랜만이라는 감상이 드는 것은 당연했다. 사탄은 제가 만들어 쓰고 있는 인간의 탈과 얼추 비슷하다고 봐줄 수 있을 정도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솔직하게, 제법 닮아있어 조금은 놀라웠다.

 

“네가 날 소환했구나.”

“…신…이신가요?”

“네가 그러길 바란다면 나는 네 신이 될 것이고, 바라지 않는다면 재앙이 될 것이다.”

“저는, 저는 단지…”

 

사탄은 친히 손을 뻗어 제 앞에 무릎 꿇은 인간의 머리를 가벼이 짚었다. 달빛을 업은 몸 주변으로 희미하게 달무리가 졌다.

 

“너는 분노하지 않았느냐? 분노하는 한편 간절히 바라는 게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지. 네 영혼을 불사를 만치 거대한 분노의 힘을 나는 느꼈다.”

“…….”

“말해보렴, 인간아. 무엇이 너를 그리 분노케 하였는지.”

 

밤벌레가 모래더미에 몸을 파묻고 숨죽여 울었다. 사탄이 손을 거두어들이자 무릎 꿇은 인간은 몸을 더 낮추었다. 신분 낮은 자의 특유의 굴종이 몸에 밴 인간이거나, 굴종을 익힐 수밖에 없었던 인간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사정이야 어찌되었든. 사탄은 두려움을 알고 굴종하는 자를 나쁘게 보지 않았다. 때문에 대답이 돌아오기까지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으나 너그러이 기다려주었다. 고개를 아래로 처박았던 인간이 손안으로 모래를 한 움큼 꽉 움켜쥐었다.

 

“저는, 라크족의 잔드 가문 출신인 카림 칸이라고 합니다. 저희 잔드 가문 사람들은 본디 서부의 피루즈에서 줄곧 살아왔습니다. 헌데 나디르 샤께서, 아니, 그가 저희에게 북동부의 호라산으로 강제 이주를 명했습니다. 단지 그 자신의 사욕 때문에요. 저희는 가진 것들을 대부분 빼앗기고 오로지 가문 사람들의 힘으로만 땅을 가로지르고 있습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이곳의 낮은 뜨겁기 그지없습니다. 또 그만큼 밤은 차갑죠. 먹을 것은 점점 더 떨어져가고, 소금 성분이 강한 오아시스에서는 마실 물을 많이 구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저희는 살기 위해 강행군을 이어와야 했습니다.”

“…….”

“하지만 다 큰 어른들도 지쳐갑니다. 그러니 어린아이들이 이런 강행군을 버텨낼 수 있을 리가 없지요. 하나둘씩 죽어가고 있습니다. 오늘도 아이 하나가 죽었어요. 아무런 죄도 없는 제 어린 조카가 하얗게 튼 입술을 하고 죽었습니다. 빛이 꺼져가는 눈을 보며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어요. 저는 복수하고 싶습니다. 저희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싶습니다. 그러니 저를 가엽게 여겨 도와주십시오. 무엇이든, 제 목숨이든 영혼이든 다 드리겠습니다.”

 

길고 긴 이야기였다. 노골적으로 무료한 낯빛을 하고 이어지던 카림 칸의 이야기를 대충 흘려들으며 사탄은 오아시스 위의 찰랑이는 달을 구경하고 있었다. 기실 인간의 상세한 사정 따위에 별 관심을 두지 않게 된지 제법 되었다. 인간은 언제나 그 각자의 심오하고도 깊은 사정을 갖고 있었고, 처음엔 물론 그것이 흥미로웠다. 하지만 그것이 올해로 천육백 하고도 몇의 해였다. 누구든 질리는 게 당연지사일 터였다. 언제쯤 끝이 나려나. 그렇게 무료한 시간을 보내며 가만히 서있을 뿐이던 사탄을 사로잡은 것은 이야기의 말미에 나온 말 한마디였다. 그것은 사탄이 기다리고 있던 말이기도 했다. 언제 그랬냐는 듯 무료한 낯을 깨끗이 지운 사탄이 퍽 다감한 얼굴을 하고 카림 칸을 내려다보았다.

 

“그래, 카림 칸.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지. 정말 무엇이든 내어놓을 각오가 되어 있느냐?”

“예. 제 모든 걸 다 내어놓겠습니다.”

“네가 원하는 것이 복수와 가문의 부흥이라고?”

“그렇습니다. 단지 그 뿐입니다.”

“내 발등에 입 맞추렴. 네가 원하는 것을 이루도록 도와주마. 대가는 너의 영혼이다.”

 

대개 악마를 소환할 정도의 강한 마음을 품는 이들은 이미 모든 것을 내던질 수 있을 만큼 궁지에 몰려있었다. 대가가 그 어떤 것이어도 망설이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카림 칸은 무릎걸음으로 가까이 걸어와 사탄의 발등 위로 고개를 떨구었다. 고운 모래를 딛고 선 맨발의 매끄러운 발등 위로 거슬거리는 입술이 닿았다 멀어졌다. 사탄은 카림 칸의 뒷목에 불그스름한 색으로 생겨나는 계약의 인을 내려다보았다. 악마들에게만 보이는 그 인은 인간이 어떤 악마의 계약자인지를 알려주는 표식이었으며 사탄으로 하여금 계약자의 위치와 생사를 알 수 있는 일종의 장치였다. 다른 악마의 공격으로부터 계약자를 최소한으로 방어할 수 있는 수단이기도 했다. 사탄은 조심스레 고갤 들어 자신을 올려다보는 카림 칸에게서 한 걸음 물러섰다.

 

“아침에 눈을 뜨면 먹을 것과 물이 이곳에 있을 것이다.”

“아…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복수와 가문을 부흥시킬 방법은 조금 더 궁리를 해보자꾸나.”

 

물론 지금 당장이라도 나디르라는 인간을 찾아가 죽여 버릴 수는 있겠으나 금세 시시해질 것이다. 이들을 곧장 호라산으로 이동시켜줄 수도 있을 것이다. 호라산은 사탄 저 역시도 가 본 적이 있었으므로. 그러나 카림 칸이 원한 것은 가문의 부흥이지 당장 코앞의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것은 아니었다. 조금 더 궁리를 해보자는 것은 그런 의미였다. 쉽기만 해서는 재미가 없으니 자신이 조금 더 즐거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는. 오십여 년 만에 올라온 이승이고, 오랜만의 계약이었다. 너무 쉽게 정리해버리면 시시하지 않겠는가.

 

지옥으로 돌아온 사탄은 종을 시켜 카림 칸과의 약속대로 오아시스 옆에 곡물과 과일, 물이 담긴 자루를 가져다 놓도록 했다. 사흘에 한 번씩 이승에서 밤이 찾아올 시간이면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카림 칸과 잔드 가문의 인간들은 느리지만 꾸준히 호라산을 향해 나아갔다. 사탄은 종종 그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바로 잡아주었고, 그가 원하는 복수의 방법에 대해서 또는 가문을 어떻게 일으키고 싶은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카림 칸은 딱히 욕망이 그득한 부류의 인간은 아니었으나 가문을 생각하는 마음만큼은 지극정성이었다. 가문이 가벼운 일에 쉽게 흔들리지 않을 정도의 부와 명예만을 원했다. 그것은 네 가문이 이전에 가졌던 것보다 적지 않느냐? 사탄의 의아한 물음에도 카림 칸은 가만히 웃어보였다. 그보다 적게 갖는다면 이런 일을 다시 겪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싶어 그렇습니다.

 

카림 칸이 사탄과 계약한 이후로 잔드 가문의 인간이 여정 길에 죽어나가는 일은 더 일어나지 않았다. 적절한 시기에 조달되는 최소한의 식량으로 그들 또한 조금이나마 심적 여유를 찾았기 때문이다. 이윽고 호라산에 도달한 잔드 가문의 인간들은 남은 것의 대부분을 털어 작은 집을 두세 채 얻었다. 당연하게도 모든 가족이 들어가 살기엔 부족했다. 그들은 작은 집에 이리저리 가족을 나누어 자리를 잡았다. 카림 칸은 사탄의 도움을 바라지 않았고 사탄은 그가 바라지 않았기에 건네지 않았다. 사탄은 제게 집을 구해달라거나, 집을 구할 재물을 달라거나 요구하지 않는 카림 칸을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굳이 자신이 손을 쓸 일은 아니라고 여겼다.

 

기실 호라산은 지내기에 나쁜 곳은 아니었다. 기후가 좋았고, 금광이나 은광이 있을 뿐 아니라 보석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었다. 벌어먹고 살기에 모자람이 있는 지역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잔드 가문의 인간들은 대부분 노동계층이 아니었지만 살아가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은 이른 아침부터 해가 다 떨어질 때까지 일을 했고 저녁이면 피곤한 몸을 좁은 집에 뉘였다. 시간은 무심하게 흘렀다. 사탄은 여전히 사흘에 한 번 카림 칸을 만나기 위해 이승으로 올라왔다. 계약을 한 지 이미 여러 달이었다. 카림 칸은 사탄에게 단 한 번도 나디르 샤를 죽여 달라 직접적으로 청하지 않았다. 그를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싶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긴 했지만 그것으로 다였다. 이쯤 되니 사탄은 카림 칸이 언제쯤 제 시커먼 속을 드러낼까 궁금해졌다. 분명 그에게서 느낀 분노의 힘은 나디르 샤를 여러 번 죽이고도 남음이 있는 증오였다. 그런 것을 속에 품고 있으면서 점잖은 가식을 떠는 것이 우스운 한편 얼마나 더 지속될 수 있을지 알고 싶었다.

 

계약을 맺었던 계절이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사탄의 의문이 해소되는 날은 오지 않았다. 그 전에 카림 칸의 숨이 다했기 때문이다. 멍청하고 어처구니없는 죽음이었다. 호라산과 그 일대에는 전갈이 많이 살았다. 야음을 틈타 움직이는 전갈은 민가로도 쉽게 숨어들었고, 인간들이 신고 다니는 신발 속에 기어들어가는 경우도 많았다. 카림 칸은 고작 신발에 발을 집어넣었다 전갈에게 찔려 쓰러진 것이다. 그로부터 이틀이 지난 깊은 밤, 사탄은 황당함을 감추지 않은 얼굴로 침상에 누운 카림 칸을 내려다보았다. 독이 잔뜩 올라 거의 보랏빛으로 보이는 입술이 무어라 달싹였다. 독해 취해 내뱉는 헛소리와 그가 하고 싶은 말이 두서없이 뒤엉켜 있었다.

 

사탄은 지금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모처럼 즐거운 일을 하게 될까 기대했는데, 고작 전갈 한 마리로 일을 그르치게 생겼다. 느리고 고통스레 죽어가는 계약자를 오래도록 내려다보던 사탄의 고개가 문득 기울었다. 얼추 닮았다고 봐줄 수 있을 얼굴. 몇 달간 봐온 그의 성격이며 행동양식. 흉내를 내는 데에는 무리가 없을 정도였다. 그렇다면 자신이 카림 칸의 자리를 꿰어 차도 되는 것이 아닐까. 그가 원했던 복수와 가문의 부흥을 이용하면 퍽 재미있는 유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인간들의 틈에 스며드는 일은 이미 해 보았다. 어려울 것 없었다. 카림은 곧장 자신의 가장 충직한 권속을 불러들였다.

 

“찾으셨습니까, 왕이시여.”

“히다야트. 이 자를 성으로 데려가라.”

 

한 줌의 연기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악마는 정중히 부복하여 예를 차리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탄의 명령에 흘긋 시선을 돌려 침상에 누운 것을 살핀 히다야트가 의아한 눈으로 사탄을 보았다.

 

“인간이 아닙니까?”

 

인간은 지옥에 발을 들일 수 없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살아있는 인간은 지옥에 발을 들일 수 없다. 사탄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내가 필요한 것은 껍데기다. 영혼은 나와 계약으로 묶여있으니 육신에 갇혀있기만 할 테지.”

“예, 알겠습니다.”

“다시 쓸 일이 있을 테니 썩지 않도록 신경 써라.”

“예, 그리 하겠습니다.”

 

사탄은 한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느릿하게 쓸어내렸다. 손이 한 차례 쓸고 내려간 얼굴은 어느새 침상에 누운 계약자의 것과 한 치의 다름도 없이 같았다. 그 모습을 올려다보던 히다야트가 덤덤히 내뱉었다.

 

“훨씬 못합니다.”

“안다. 갑자기 바뀌면 심약한 인간들이 놀라지 않겠느냐. 서서히 바꿔가야지.”

 

사탄이 짤막하게 웃었다. 마지막으로 예를 갖춘 히다야트가 계약자의 몸을 안아들었다. 맥없이 늘어진 손이 허공에서 흔들렸다. 그 모습을 보며 얼굴 뿐 아니라 몸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사탄이 깨달음의 탄성을 작게 내뱉었다. 지옥으로 돌아가려던 히다야트가 기민하게 그에 반응해 고갤 돌렸다. 사탄은 별 일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젓고는 물러가라는 듯 손짓했다. 이윽고 히다야트가 다시 한 줌의 연기로 화하며 모습을 감추었다. 잠시 조그만 방 내부를 둘러본 사탄은 이내 몸마저 비슷하게 바꾼 다음에야 옷장을 열었다. 개중에서 그나마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갈아입었다. 꼭 맞는 것으로 보아 몸을 적당히 알맞게 바꾼 듯 싶었다.

 

사탄은 그렇게 카림이 되었다. 파리하게 죽어가던 이가 갑자기 멀쩡해진 것을 두고 잔드 가문의 인간들은 신이 굽어 살피셨노라, 신의 기적을 보았노라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카림’은 한 달 정도 카림 칸의 삶을 그대로 살았다. 카림 칸은 호라산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겨우 구해 하고 있었고, 그것은 카림에게 제법 고난의 시간이 되었다. 인간의 아이는 정말 쉽게 죽었으므로. 장난을 치겠답시고 달려드는 것을 살려두는 것만으로도 힘이 들었다. 한 달의 시간이 흐른 뒤 카림은 교사 일을 그만두고 권속 두엇을 이승으로 불러들였다. 하나는 수도에 있을 나디르 샤의 곁으로 보내 그곳의 상황을 살피게끔 하고, 나머지로는 반란 세력을 조금씩 규합하기 시작했다.

 

외부로 시선을 돌려 주변국의 점령에 열을 세우고 있는 나디르 샤는 국내에 소홀했다. 때문에 세력을 키우고 통제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카림은 여느 때보다 바삐 움직였다. 잔드 가문의 인간들은 그들의 카림 칸이 변했다고 생각하며 걱정스러운 눈빛을 내비치곤 했으나 카림은 더 이상 그들의 염려 따위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얌전히 숨을 붙이고 목숨을 보전하다 자신이 일으켜 세울 잔드 가문의 부흥을 직접 경험하는 산증인만 되면 되는 것이었다. 카림은 카림 칸이 보다 조심스러워지길 바라는 가족의 뜻에 따라 그들이 고른 인간 여성과 혼례를 치러 주었다. 그녀는 고분고분하고 수줍음이 많으며 부지런한, 당대에 손꼽는 신붓감의 모습 그대로를 갖추고 있었다. 혹이 하나 붙은 기분이었으나 그것이 가족들의 바람대로 카림의 행보를 저지하는 걸림돌이 되기엔 역부족이었다.

 

세력을 규합한지 일 년, 카림은 고의적으로 반란의 움직임을 나디르 샤에게 흘렸다. 그 즈음 국내의 각 지방에서는 여러 약소 조직들이 조금씩 움트고 있었다. 남은 것은 어느 누가 먼저 들고 일어서느냐 뿐이었다. 카림은 나디르 샤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호라산의 마슈하드로 직접 움직일 수밖에 없도록 상황을 짜 만들었다. 나디르 샤의 곁에 심어놓은 권속이 그의 신임을 잘 얻어내어 일이 한결 수월했다. 그렇게 몇 달의 시간이 흐르고 나디르 샤가 마슈하드를 향해 출병했다. 그사이 카림은 잔드 가문의 인간들이 다시 서부의 피루즈로 옮겨갈 수 있도록 준비해나갔다. 그들의 카림 칸으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말들을 들어주는 것도 지겨웠기 때문이다.

 

군대를 이끌고 출병한 나디르 샤는 마슈하드에 도달하지 못하고 죽었다. 오는 도중 자신의 막사에서 초라하게 마지막을 맞았다. 그를 죽인 것은 카림이 심어두었던 권속이었다. 나디르 샤를 죽인 후 곧장 찾아와 악마인 것을 들켜 죽이고 말았다고, 일을 그르쳐 죄송하다 고개를 숙여 보이는 권속에게 카림은 드물게 용서의 말을 내렸다. 전쟁을 하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이었으나 일이 이렇게 흘러가는 것도 딱히 나쁘지 않았다. 어차피 나디르 샤는 죽었어야 했다. 만에 하나 악마임을 들켰음에도 그 사실을 자신에게 숨겼다던지 나아가 나디르 샤와 계약이라도 했더라면 카림이 직접 제 권속을 소멸시켰을 것이다.

 

머리를 잃은 나디르 샤의 군대는 우왕좌왕하면서도 호라산으로의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지방의 여러 조직들 또한 나디르 샤의 움직임에 주목하고 있었기에 그의 죽음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수도에서도 그 사실을 접했을 것이고 그러니 다시 수도로 돌아가 보아야 그들 앞에 남은 길이 몇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카림은 나디르 샤의 군대가 호라산에 도달하기 전에, 잔드 가문의 인간들을 서부의 피루즈로 떠나보냈다. 계획보다 서두른 출발이었지만 올 때는 초라했으되 돌아가는 길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나디르 샤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각 지방에서 힘을 모으던 조직들이 기지개를 켰다. 비로소 군웅할거가 시작된 것이다. 아프샤르 제국은 제국의 이름을 잃었고 각 지방의 패권을 손에 쥔 자들이 자신들의 영역과 통치권을 공고히 하며 서로를 향해 서슴없이 칼을 겨누었다. 그 패권 다툼의 가장자리로 밀려난 나디르 샤의 직계들은 호라산에 모여 숨을 죽이고 독립국처럼 가늘고 길게 명맥을 유지하길 택했다. 잔드 가문의 인간들이 피루즈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을 때에도 카림은 여전히 호라산에 머물렀다.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기 위해서였다. 호라산 인근에서 일어난 난전의 흔적들 사이를 산책하듯 거닐며 카림은 생각에 잠겼다. 발길에 채인 활대가 시체 하나를 툭 건드리자 까마귀가 시위하는 양 울며 푸덕거렸다. 어둑한 밤이었음에도 까마귀들은 시체를 뜯어먹고 배를 채우겠다 부산히 움직여대고 있었다. 그렇게 몇 걸음을 옮겼을까. 한 마리가 어깨 위로 올라와 아양을 부렸다. 카림은 까마귀를 손으로 옮겨와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계약의 내용을 유희거리로 삼기로 하긴 했다만 나디르 샤가 죽었으니 카림 칸이 원했던 것 중 한 가지는 어쨌든 이루어졌다. 남은 것은 가문의 부흥. 적당한 부와 명예만을 원한다고 했던가. 그 상한선의 이유를 여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으나 인간은 본디 그 숫자만큼이나 다양성을 지닌 존재들이었다. 이해하려 하기보다 그러려니 하는 게 정신건강에 좋다는 것을 카림은 잘 알았다. 그리고 인간 카림 칸은 이미 죽었으니 그의 뜻을 어떻게 해석하는지는 온전히 자신의 몫이다. 적당히 즐기다 손을 떼면 되는 일 아니겠는가.

 

오매불망 카림 칸을 기다리는 잔드 가문의 인간들에게로 돌아간 카림은 피루즈와 그 주변을 자신의 영역으로 삼아 혼란한 군웅할거의 시대에 발을 걸쳤다. 그 즈음 카림의 부인은 아들을 얻었다. 당시에는 감당하지 못할 아이를 낳아 기르지 못하고 파는 일이 드물지 않았으므로, 카림은 돈을 주고 갓난아기를 데려와 그녀에게 떠안겼다. 전쟁 통에 부모를 잃은 아이라 말했다. 카림의 부인은 아이를 가엽게 여겼고 젖동냥까지 해가며 정성을 들여 키웠다. 카림은 종종 드물게 그 가족놀이에 어울려 주었다. 인간 카림 칸이 죽은 지 일 년이 조금 지났다. 틈틈이 바꿔온 모습은 어느덧 완전히 카림의 것이 되어있었고, 카림은 인간 카림 칸의 자리에 크게 모난 자국 없이 스며들어 있었다.

 

잔드 가문은 과거의 영광을 반절 정도 되찾았다. 인간 카림 칸이 원하던 정도가 딱 이정도겠거니, 싶었다. 그러나 카림이 없는 잔드 가문의 인간들은 그것을 지켜낼 힘이 부족했다. 타고난 성정들이 무력에 친숙한 이들은 못 되었기 때문이리라. 카림이 잔드 가문의 인간 가운데서 그나마 가장 가문을 잘 이끌어 갈 만한 이를 고르고 있을 시기에, 인접한 지역으로부터는 소규모의 침탈이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성가셨다. 영역의 끄트머리에서 속속 들어오는 보고를 들으며 카림은 혀를 찼다. 자신이 지옥으로 돌아가면 피루즈와 그 주변의 땅은 흔적도 없이 갈가리 찢겨 어디론가 흡수될 것이 자명했다. 애가 닳았다기보다 한심하게 느껴졌다. 이정도의 몫도 지켜내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들. 어쩌면 호라산으로 쫓겨 가던 것이 이들의 수준에 딱 어울렸을지도 몰랐다.

 

잔드 가문의 인간들을 한심하게 여기면서도 카림은 인접한 지역을 하나둘 삼켜나갔다. 야금야금 이어지는 공격이 성가시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나약한 인간들이 그들로선 감당키 어려운 힘을 쥐고 필연적으로 짓눌려갈 모습을 보고 싶다는 것이 두 번째 이유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들에게 권력과 명예, 힘 따위를 쥐여 주어야 했으니 인접한 지역의 세력을 시작으로 카림의 정복은 쉬지 않고 이어졌다. 두엇의 권속은 여전히 카림의 곁에 남아 손발을 자처하며 인간들로만 이루어진 군대를 지휘했다. 악마장으로서의 힘을 사용한다면 정복은 쉬웠을 것이다. 물론 그만큼 재미는 떨어졌으리라. 거기 더해 카림은 엄연히 유희 중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인간의 힘으로 일을 해결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아프샤르 제국에 속해있던 영토의 중부와 남부의 주요 거점들을 장악하는데 꼬박 삼 년이 걸렸다.

 

그 사이 카림은 이미 국가의 기틀이 되는 실권을 대부분 손에 쥔 상태였다. 남은 것은 작디작은 세력들뿐이라 딱히 위협이 될 것 같지도 않았고 그나마도 차차 정리해 갈 생각이었다. 이윽고 중남부의 대부분을 차지한 카림은 1750년에서야 남부에 자리한 쉬라즈를 수도로 삼고 왕조의 이름을 잔드로 명명했다. 인간 카림 칸이 원했던 잔드 가문의 부흥. 이정도면 어느 한 정점을 찍은 셈이었다.

 

“바킬. 시린이 바킬을 뵙니다.”

“돌아왔구나, 시린. 시킨 것은?”

“구해왔습니다. 이쪽으로.”

 

카림은 최고 통치자를 뜻하는 호칭, 샤Shah를 버리고 섭정자를 뜻하는 바킬Vakil이란 호칭을 택했다. 국내를 돌보는 것에 소홀했던 나디르 샤와는 다른 길을 걷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했고, 왕이라는 존재에 불만이 많았던 인간들을 조금이나마 다독이려는 얄팍한 수이기도 했다. 인간들이 새 지도자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반란을 일으킨다면 카림으로선 당연히 그들을 학살할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카림은 자신의 권속 가운데 하나인 시린의 뒤를 따라 햇볕이 길게 들이치는 회랑을 걸었다. 나디르 샤의 목을 벤 자였다. 줄곧 남성체로 지내오다 무슨 변덕이 든 것인지 정복을 시작할 적부터 여성체의 몸으로 다니고 있었으나, 카림의 주변에서 시린을 무시할 수 있는 존재는 없었다. 무수한 소규모 정복전에서의 그 기세를 본 자들이라면 더더욱.

 

“이곳에 있습니다.”

 

시린이 문을 열고 비켜선 방 안으로 카림이 발을 들였다. 얇은 실크로 덮인 커다란 바구니가 테이블에 놓여있었다. 얇디얇은 실크 아래로 꼬물거리는 움직임이 보였다. 무감한 눈의 카림이 손을 뻗어 천을 걷어내자 잿빛에 가까운 녹안을 빛내는 갓난아이가 바구니 안에서 입을 오물거리며 살풋 눈을 찌푸렸다. 통통하고 말랑한 볼을 가벼이 눌러 본 카림이 손을 거두어들인다. 한 걸음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시린이 입을 열었다.

 

“고아인 듯 했습니다. 저들도 억지로 떠맡았으니 제발 데려가라며 웃돈이라도 얹어 줄 기세더군요. 그래서 달리 돈은 주지 않았습니다.”

“상관없겠지. 그들이 그리 데려가길 바랐다고 하니.”

“둘째로 들이시는 겁니까?”

 

카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아이는 이제부터 인간 카림 칸의 둘째 아들이 될 것이다. 둘째를 갖고 싶어 하는 부인의 뜻─물론 그 뜻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카림은 제 씨로 태어난 아이를 그다지 보고 싶지 않았다─을 들어주기 위함이었다. 지켜본 결과 제 부인이 된 인간은 잔드 가문의 인간들과 같이, 결코 모진 성정을 가질 수 있는 이는 아니었다. 그러니 둘째 아이도 어찌 되었든 키워낼 것이다. 허울뿐이라곤 하나 카림은 부인을 부인으로서 존중했고 아이를 나름대로 아꼈다. 그러나 그나마도 최근에는 신경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바빴다. 왕조를 일으켜 세운 뒤 카림은 쉬라즈가 수도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요새와 모스크, 욕탕과 시장 따위를 건설하게끔 했으며 잔존해있는 세력들을 반란세력으로 간주해 남은 지역 모두를 평정하기 위해 전략을 짜고 있었다.

 

“요를 가져오도록. 아이를 지금 데려가야겠군.”

 

그때 눈앞이 한 차례 이지러졌다. 무어라 말하는 시린의 목소리가 길게 늘어졌다. 세상을 돌리는 태엽이 풀린 것처럼 모든 것이 느려지다 멈췄다. 의아함을 느끼던 것도 잠시, 그제야 카림은 깨달았다. 아, 이것은 꿈이로군. 자각과 동시에 의식이 빠른 속도로 분리되어 떨어져나간다. 과거는 과거의 한 때로 기억 속에 남아 다시 잠들고 현재를 사는 의식이 부유하기 시작할 때 느릿하게 내려감은 눈꺼풀을 다시 밀어 올리면 눈앞에 보이는 것은 제 연인의 머리칼이었다. 현재였다. 카림은 가만히 숨을 내쉬며 눈을 깜빡였다. 잠기운이 금세 달아났다. 디디의 머리를 받치지 않은 쪽 손을 들어 그 머리칼을 가볍게 매만졌다. 빛 아래에서 다정한 갈색 빛을 띠는 머리칼은 실내에선 보통 검게만 보였다. 가벼이 흐트러진 머리칼 아래로 잠에 빠져 조금은 풀어진 얼굴이 있었다.

 

깊게 잠든 얼굴을 보는 것이 제법 즐거운 일이라는 것을 그는 앞으로도 모르겠지.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잠에 빠진 그는 누가 업어 가도 모를 것이다. 디디는 이유로 저혈압을 꼽긴 했지만, 아침에 유달리 약한 것은 이유야 어쨌든 사실이었다. 품 안에서 가만히 규칙적으로 호흡하는 숨소리와 안온한 체온, 단단한 무게감을 느끼며 카림은 디디의 드러난 어깨를 이불로 덮어주었다. 조금 몸을 돌려 침대 옆 협탁 위에 올려두었던 핸드폰을 가져와 시간을 확인했다. 맞춰놓은 알람이 울기도 전이었다. 디디를 깨우기엔 당연히 이른 시간이었고 저 역시 조금은 침대 안에서 게으름을 부려도 될 정도였다.

 

핸드폰을 적당히 베개 밑으로 밀어 넣은 카림이 디디의 이마에 슬몃 입 맞추곤 떨어졌다. 그도 꿈을 꾸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긴 꿈을 꾼 탓인지 잠은 깼으되 머리가 맑지 않았다. 이렇게 길고 선명한 꿈을 꾼 것은 모처럼의 일이었다. 지금은 이란이라는 이름의 국가가 된 땅을 생각한다. 한때 호라산을 제외한 전역을 정복했지만 그곳에 남은 카림의 흔적은 이제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쉬라즈를 찾지 않은지 제법 오래 되었다. 팔구십 년은 족히 된 것 같았다. 생각이 난 김에 쉬라즈에 들러보는 것도 그리 나쁠 것 같지 않았다. 카림이 왕으로 앉아있었던 시기는 이제 이백 년도 더 된 과거였으니 자신을 알아볼 이도 없으리라.

 

그렇게 얼마간 더 게으름을 부리던 카림은 디디의 머리를 조심스레 베개로 옮겨주고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가볍게 씻고 나와 조금 앉아있으면 그를 깨울 시간이었다. 일어나고 싶지 않아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것도 귀여웠고, 혹여 공주님 소리라도 내뱉을까 제 입을 막는 것 또한 귀여웠다. 카림의 시선에서 디디는 무척이나 일어나는 것을 고통스러워했는데 그럼에도 결국은 몸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카림은 디디의 정신력을 높게 사주고 싶었다. 욕실로 사라지는 뒷모습을 본 다음에야 카림은 주방으로 향했다. 이제는 익숙해진 손길로 커피를 내리고 두 장의 식빵을 토스터에 넣어둔 다음에야 냉장고를 열었다. 여러 종류의 잼과 스프레드 따위가 냉장실의 한 칸을 차지하고 있었다. 제법 진지한 얼굴로 고민에 잠겼던 카림이 손을 뻗어 마멀레이드를 집어 들었다. 세빌 오렌지를 이용해 만든 마멀레이드는 진한 향과 달콤쌉싸름함이 유독 돋보여 뜨거운 토스트에 버터와 함께 발라먹으면 그 맛이 제법 훌륭했다. 적당히 상큼하니 아침을 깨우기에도 나쁘지 않을 터였다.

 

계획대로 토스트에 버터와 마멀레이드를 발라 반을 자른 다음 접시에 담아두고, 샤인머스캣 한 송이를 꺼내 흐르는 물에 씻어냈다. 아침의 디디는 먹는 속도가 그리 빠르지 않았으니 아마 과일까지 먹고 일어나진 못할 것이다. 카림은 찬장과 서랍을 이리저리 열어보며 적당한 것을 찾았다. 아마 디디가 가져다 두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투명한 플라스틱 병이 눈에 들어왔다. 입구가 넓어 과일을 넣기에도 무리가 없을 것 같았다. 알알이 떼어 병에 집어넣고 있는 사이 출근준비를 마친 것인지 인기척이 다가왔다.

 

“…뭐 합니까?”

“음. 내조?”

“조신하고 정성스럽네요.”

 

짧은 입맞춤이 목덜미에 닿았다 멀어지고, 디디의 말에 카림이 나직하게 웃었다. 한 병을 다 채우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알이 큰 탓에 반 송이도 채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한 병을 채워 넣은 카림은 뚜껑을 돌려 닫아 아일랜드 식탁 위에 올려두었다. 그사이 디디가 따른 커피 두 잔이 각자 앉을 자리 앞에 놓여 있었다. 마주보는 자리에 앉으며 카림은 그 앞으로 토스트가 담긴 접시를 살짝 밀어주었다. 디디가 자연스럽게 토스트를 집어 들었다.

 

“오늘은 점심에 스케줄이 있습니다.”

 

디디가 토스트를 베어 물기 전 느릿하게 내뱉은 말에 카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야근은?”

“아직 예정 없습니다.”

 

오래지 않아 토스트의 반이 디디의 입속으로 사라져갔다. 카림은 느슨한 자세로 그 광경을 지켜보며 커피를 한 모금 조심스레 마셨다. 아무리 악마라 해도 뜨거운 것을 벌컥거리며 마실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입안을 맴돌고 내려가는 커피의 향을 음미하던 카림이 입을 열었다.

 

“나는 오늘 이란의 쉬라즈에 다녀올까 하는데.”

 

카림이 그날의 행선지를 미리 밝히는 것이 아주 없는 일은 아니어서, 디디는 말로 대답하는 대신 입을 열어 토스트를 한 입 더 베어 물었다. 아직 맑게 개이지 못한 그의 황갈빛 눈이 부연설명을 요구하듯 카림의 얼굴에 달라붙었다. 하고자 하는 말을 정리하던 카림의 미간이 설핏 찌푸러들었다. 어떻게 설명을 해도 우습다는 생각이 든 탓이다. 카림은 그냥 간략히 설명하기로 했다.

 

“꿈을 꿨더니… 오랜만에 찾아가볼까 싶더군.”

“오랜만입니까?”

“팔구십 년 만이지.”

“많이 변했겠네요. 잘 다녀오세요.”

 

짧게 고개를 끄덕인 카림은 디디가 남은 반쪽을 마저 먹고, 커피를 두어 모금 마신 뒤 남은 것을 텀블러에 따르는 모습까지 보고서야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샤인머스캣이 담긴 플라스틱 물병을 잊지 않고 챙긴 카림이 디디와 함께 현관까지 걸어 나가 그것을 내밀었다. 디디가 잠시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들고 갈 손이 없습니다.”

“가방에 넣어 가지 그러나.”

“그러면 가방이 안 잠깁니다.”

“품에 안고 가면?”

“웃깁니다.”

“그럴 리가. 와이프에게 사랑받는 가장처럼 보일텐데.”

 

단단하고 무던한 얼굴 위로 결국 웃음이 피식 번졌다. 카림은 내밀어진 손에 물병을 넘겨주고 디디의 뺨에 가볍게 입 맞춰 주었다. 마찬가지로 가벼운 입맞춤이 되돌아왔다.

 

“다녀옵니다.”

“그래.”

 

디디가 현관문 너머로 모습을 감추고, 카림은 느긋하게 식탁으로 돌아와 남은 샤인머스캣과 제 몫의 커피로 아침을 해결했다. 접시와 두 사람분의 컵, 버터나이프를 설거지─최근 간단한 음식을 만들게 되면서 카림은 필수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는 설거지 정도는 직접 하게 되었는데 생각만큼 어렵지도, 성가시지도 않았다─해둔 뒤에야 베개 밑에 넣어 두었던 핸드폰을 꺼내 쉬라즈의 날씨와 시간부터 확인했다. 이십구 년을 그곳에서 지냈다고 해도 이미 오래전의 일이니 날씨와 같은 세세한 부분은 기억하지 못했으므로 체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시간은 사뭇 달랐지만 뉴욕과 크게 차이나지 않는 기온에 조금 의외란 얼굴을 해 보인 카림이 적당히 옷을 챙겨 입고 핸드폰이며 지갑을 챙겨들었다. 마치 집 앞으로 산책이라도 나가는 사람처럼 가벼운 준비였다.

 

뒤이어 기억 속에 남아있는 쉬라즈의 어느 한 골목을 떠올리며 능력을 사용한 카림은 자신이 제법 오가는 이가 많은 대로에 서 있음을 깨닫고 혀를 찼다. 골목이 더 이상 골목의 기능을 하고 있지 않았던 모양이다.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카림의 눈에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멈춰 선 중년의 여성이 눈에 띄었다. 시선이 곧장 이쪽으로 향해있는 것을 보아 이곳에 갑작스레 나타나는 광경을 보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카림은 입매를 조금 휘어 웃으며 검지를 입술 위로 가져다댔다. 못 본 척 하라는 의미였지만 어디 가서 말해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었다. 말해본다 한들 아무도 믿지 않을 테니까.

 

인간이 사는 곳은 대체로 다 거기서 거기다. 아침을 여는 뉴욕과는 반대로 쉬라즈는 퇴근시간을 맞이한 듯 보였다. 늦은 오후였고, 제법 기울어진 해가 그림자를 길게 늘였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거리를 저 혼자 느긋하게 거닐며 카림은 좌우로 펼쳐진 모습들을 눈에 담았다. 거의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달라져 있었다. 인간들은 생이 짧은 만큼 빠르게 변화해왔으니 어쩌면 그것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카림은 그저 발이 나가는 대로 걸었다. 분명한 목적지가 있었더라면 구글 맵스라도 켜 경로를 찾아보았겠지만, 지금은 그런 것도 아니니 굳이 지도를 켜가며 돌아다닐 필요가 없는 것이다. 팔구십여 년 전 쉬라즈를 찾았을 때엔 분명한 목적이 있었기에 목적을 위해 움직였고 다른 곳들을 둘러볼 여유가 딱히 없었던 터라 모든 것이 유달리 더 낯설게만 느껴지는 걸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여러 개의 대로를 건넜다. 병원을 지나고, 두어 곳의 학교를 지났다. 눈에 익은 강줄기 위로 가로지른 다리를 건너 한참을 걷자 저만치 황색의 벽돌로 쌓아올린 타워의 일부가 띄었다. 지나치려야 지나칠 수 없는 익숙한 형태였다. 한 시간여를 걸어오며 이곳에 더 이상 자신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저렇게 버젓이 남아있는 것을 보니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카림은 그제야 핸드폰을 꺼내 구글 맵스를 통해서 저것이 요즘엔 어떤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지를 찾아보았다. 카림 칸 요새. 지나치게 직관적인 이름이었다. 물론 다른 휘황찬란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더라면 그건 그거대로 조금 문제였겠지만 말이다.

 

카림은 찬찬히 걸어가 너른 요새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네 개의 낮은 타워와 성벽으로 둘러진 그 속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타워가 조금 기울어 보이는 것을 빼고는 크게 상한 구석도 없는 것 같았다. 이십구 년간 이어진 자신의 재위 기간이 끝난 이후 예상대로 잔드 왕조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왕권 다툼이 심했고 빠른 속도로 권세가 기울어갔다. 고작 십오 년 만에 새로운 왕조가 들어섰으니 말은 다 한 셈이었다. 새 왕조가 들어서며 건물은 대부분 파괴되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요새를 돌다 보니 그 주변으로 지어둔 다른 용도의 건물들이 몇 채 더 눈에 띄었다. 요새 안을 둘러볼까 싶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입장료가 있었다. 오래된 건물의 유지보수를 위해서라면 당연히 입장료가 있어야 할 테지만 한때 자신이 살았던 곳에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야 한다니 기분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묘했다. 거기 더해 지금 카림의 지갑엔 달러와 유로뿐이었다. 은행이라도 다녀와야 하나. 애매한 얼굴로 턱을 매만지고 있을 때였다.

 

“바킬?”

 

이제 다시 불릴 리 없다고 생각한 호칭이 옆에서 들려왔다. 기억에 있는 목소리였다. 고갤 돌리니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낯익은 얼굴을 한 사내가 서 있었다. 시린이었다. 아니, 다시 남성체의 몸을 하고 있으니 남성의 이름으로 불러야 하나. 카림은 잠시 그가 남성체일 적 썼던 이름을 기억 속에서 뒤적거렸다.

 

“…아르민.”

 

반가움을 감추지 않는 얼굴에 웃음이 한 가득이었다. 저렇게 잘 웃는 인상이 아니었는데. 시간이 흘러 성격이 변하기라도 한 모양인가. 카림은 가까이 다가와 멈추는 그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다시 남성체의 몸을 하고 있군.”

“이란은 히잡을 쓰지 않으면 벌금을 물리거나 감옥에 보냈어서 말입니다.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간략히 예를 갖추어 보이는 모습에 카림이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그는 카림이 죽음을 가장하고 왕위에서 물러날 때 카림의 곁을 떠났다. 여전히 카림의 권속이긴 했으나 더 이상 왕으로 모시지 않게 되었다는 뜻이다. 오랜 권속 가운데선 그런 경우가 종종 있었다. 카림 역시 권속이 된 그들이 평생을 제게 바쳐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자유를 찾아 떠나는 것을 막은 적은 없었다.

 

“줄곧 이곳에 살았나?”

“여기저기 많이 다녀봤습니다만, 이곳이 역시 제일 편해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킬께선…”

“이젠 바킬이 아니지.”

“하지만 폐하라고 부를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름을 막 부르는 건 제가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좋을 대로.”

“그래서 이곳엔 어쩐 일이십니까?”

“음. 문득 생각이 나서 방문 차. 남은 건물들이 있을 줄은 몰랐군.”

 

아르민의 시선이 카림의 얼굴에서 요새로 옮겨갔다. 카림의 시선 역시 그를 따라갔다. 요새는 기울어가는 햇볕을 받아 불그스름하게 빛났다. 주요 건축물들을 건설할 당시 카림은 직접 설계에도 참여할 정도로 요새와 바자르에 특히 더 공을 들였는데, 그랬던 건축물이 이백 년을 넘도록 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카림으로 하여금 아주 약간의 자부심을 갖게 했다.

 

“당시에도 느꼈지만 정말 견고하게 건축이 잘 됐습니다. 그간 이곳에서 강진이 몇 번 있었는데, 타워가 조금 기울었을 뿐이고 나머진 멀쩡합니다. 물론 내부는 사람들이 여러 번 손을 대는 바람에 남은 것이 많지는 않습니다만…. 둘러보셨습니까?”

“아니. 아무래도 시간이 오래 흘렀으니 원형을 보존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겠지.”

“한번 둘러보시겠습니까? 인공호수와 정원은 거의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사람들이 이전처럼 오렌지 나무를 가득 심어두었거든요. 바쁘신 게 아니라면 다른 건물들도 둘러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곧 저녁인데 식사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막 드시고 온 게 아니라면 저희 집이 근처에 있는데 함께 드시겠습니까? 오랜만에 뵈니 반가워 그렇습니다.”

 

길게 이어지는 아르민의 말을 듣던 카림이 문득 무엇인가 떠오른 사람처럼 그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이곳에 자주 들리나?”

“…사실 이곳을 관리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아르민이 머쓱하게 웃었고 카림이 어이없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자신이 쉬라즈를 떠날 때 함께 떠나놓고서는 어느 틈엔가 다시 돌아와서 건물을 관리하고 있단다. 아르민이 변명조로 말을 내뱉었다.

 

“저는 이 건물이 참 좋습니다. 그런 곳이 세월의 힘에 삭아가는 게 아까워 돌보기 시작한 겁니다.”

 

뭘 하든 그의 자유이니 카림이 무어라 말을 덧댈 자격은 없었지만, 아무리 공을 들여 만들었다 한들 겨우 한 때의 영광만을 간직한 성이었다. 결국은 지나간 시간 속에서 퇴색하는 게 당연한 것인데 무어 그리 좋다고. 흘긋 카림의 기색을 살핀 아르민이 요새의 입구 쪽으로 카림을 안내하듯 먼저 걷기 시작했다.

 

“그러지 마시고 내부도 둘러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오늘은 관람시간이 단축되긴 했습니다만 저와 함께면 프리패스입니다.”

 

농담이랍시고 덧붙이는 말에 픽 웃은 카림이 말 대신 그를 따라 걸음을 뗐다. 입구 안으로 걸어 들어간 아르민은 매표소의 직원과 경비원에게 살갑게 인사를 건네고 테헤란에서 변호사로 일하는 귀한 손님이 오셨으니 좀 모시고 들어가겠다며 밉지 않게 너스레를 떨었다. 카림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바킬이라는 말이 요즘에는 변호사라는 의미로 쓰이는 것을 염두에 두고 꺼낸 말인 듯 싶었다. 진짜 변호사는 지금 뉴욕에서 오전 업무를 열심히 하고 있을 텐데 말이다. 카림은 핸드폰을 꺼내 디디에게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 [I'm pretending to be a lawyer in Iran.] 답장은 곧바로 오지 않았다. 잠시 핸드폰 화면을 내려다보던 카림은 저를 안내하는 아르민의 손짓을 따라 정원으로 들어섰다.

 

관람시간이 단축되었다는 것은 사실이었던지, 남은 관광객은 드물었고 그나마도 모두 출구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카림은 성벽의 그늘이 드리운 정원을 눈에 담았다. 기억에 어렴풋하게 남아있던 정원의 활기 있는 모습이 덧그려지듯 겹쳐지다 흩어졌다. 그때와 거의 흡사했지만 달랐다. 어스름한데다 오가는 사람마저 없으니 확실히 죽은 공간처럼 느껴졌다. 한 자리에 가만히 서있던 카림의 걸음이 정원의 가장자리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요새는 가운데에 정원과 직사각형의 인공호수를 두고 사각의 형태로 각 공간들이 빙 둘러싼 형태였다. 여전히 단단하게 서 있는 벽 위로 카림이 손을 얹었다.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 공간 특유의 냉기가 손바닥으로 전해져왔다.

 

세계 각지, 전국 각지에서 모은 당시의 귀한 자재들로 지어올린 곳이었다. 나무를 섬세하게 조각하여 짜 넣은 거대한 창과 네 가지 색으로만 만들어낸 스테인드글라스, 천장을 빼곡히 매운 세밀한 도안들로 제법 봐줄만했던 과거의 모습을 뒤로하고 이제는 세월감을 잔뜩 입고 나름의 고풍스러움을 드러내고 있거나 오랜 시간에 닳아 흐릿해져 있는 게 다였다. 새삼스러운 눈으로 커다란 창을 올려다보는 카림의 곁으로 아르민이 조용히 다가왔다.

 

“아무리 저라 해도 과거와 완벽히 일치하게 복원할 수는 없었습니다. 설령 할 수 있었어도 그랬다간 역사학자들이 두 눈을 시뻘겋게 하고 덤벼들 것 같았고요.”

“흘러가는 대로 둬야하는 것도 있는 법이지. 하지만 이정도면 정말 잘 지켜냈다고 보는데 말이야.”

“감사합니다.”

 

딱히 칭찬을 한 것은 아니었으나 카림은 굳이 정정해주지 않기로 했다. 그 편이 그에게도 좋을 것 같았고. 뒷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핸드폰이 짧게 울었다. [Illegal.] 디디로부터의 답장은 짧았으나 의미는 명확했다. 점심에도 스케줄이 있다더니 아무래도 바쁘긴 한가보군. 카림이 짤막한 웃음을 터트리며 답을 전송했다. [I know but I was vakil. It’s not so wrong.] 유치한 말장난에 장난기를 담은 답장이었다. 한결 부드럽게 풀어진 카림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아르민이 넌지시 말을 건넸다.

 

“애인이십니까?”

 

마치 잘 알고 있는 듯한 말투에 의문을 품은 카림의 시선이 흘긋 닿았다.

 

“아, 반년쯤 전에 지옥에 갔다가 히다야트를 만났습니다. 그가 전해주더군요. 바킬께 진짜 연인이 생기셨다고 말입니다.”

 

진짜 연인인가. 표현이 웃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동안 만나온 모든 관계들은 그저 잠시간의 유흥에 불과했으니까. 카림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진짜 연인’의 존재를 긍정했다. 과거의 위엄을 생각해 디디의 사랑스러움에 대해 털어놓는 팔불출 같은 짓은 하지 않았다. 그가 사랑스러운 존재라는 것은 저만 알아도 되는 사실이었다. 어느덧 해가 다 떨어진 모양인지 하늘조차 어둑하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요새 내부는 이제 카림과 아르민 단 두 사람뿐이었지만 하나 둘 조명이 켜지며 건물을 밝혔다. 횃불을 이용해 밝혀야 했던 그 옛날과는 또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 잠시 그 광경을 쳐다보던 카림은 내부를 더 둘러보는 대신 밖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건물이 여전히 건재한 것은 반가운 일이긴 했으나 굳이 과거의 모습들을 대조하며 추억을 더 곱씹어야 할까 싶어진 탓이다. 아르민에게 말한 대로, 흘러가는 대로 둬야하는 것도 있는 법이니 말이다.

 

“더 안 보십니까?”

“음. 히다야트와는 꾸준히 만났나?”

“백 년에 한 번쯤 봤습니다.”

 

히다야트라면 여전히 카림을 모시며 지옥의 성을 관리하는 데에 주축이 되고 있었다. 거의 성을 비우는 일이 없는 자였는데, 비교적 최근부터 카림의 명령에 따라 주기적으로 휴가기간을 갖기 시작했다. 그것이 오십 년이었던가 백 년이었던가. 휴가를 떠날 때마다 미련이 가득한 눈으로 떠나기에 저 혼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어디 처박혀 있다 오는 건 아닌가 싶었더니 그래도 주변 인물들을 만나고 다니긴 하는 모양이었다. 충직한 것은 높게 사줄 부분이었다. 그 스스로에게 시간을 너무 할애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일 정도로.

 

“시간이 늦어 다른 곳은 입장이 어려울 것 같으니… 바자르라도 가보시겠습니까? 요즘은 바킬 바자르라 불립니다. 여전히 사람들이 활발히 이용하고 있고요.”

 

그리 오래 고민할 것도 못 되었다. 디디는 어차피 점심 스케줄이 있어 만나지 못할 테고, 이왕 왔으니 바자르 정도는 더 들려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카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요새에서 벗어난 두 악마는 나란히 바자르가 있는 방향을 향해 걸었다. 하나 둘 거리의 조명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걸음을 옮기는 길에 카림은 나자르 가든이라 쓰인 표지판을 지나쳤다. 잠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아르민은 마치 여행 가이드라도 되는 것처럼 나자르 가든이 있는 방향을 슬쩍 가리켜 보였다.

 

“요즘은 파르스 박물관이라고도 불립니다. 카림 칸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어서 사람들이 자주 찾습니다. 그 자 기억하십니까? 스스로 바킬의 라이벌이라고 칭하고 다녔던 아가 모하마드 칸 카자르 말입니다. 바킬께서 이곳에 카림 칸의 시신을 두고 떠나신 다음에 그가 묘를 훼손하고 함께 묻혀있던 유물을 가져갔다고 전해지더군요. 괘씸하게도 말입니다.”

“…아아. 그러고 보면 하이에나 같은 구석이 있는 자였지. 뭐, 아무래도 상관없지 않나. 내 진짜 무덤도 아니고 말이야.”

“그야 그렇습니다만… 그 자는 바킬을 욕보였다고 좋아했을 것 아닙니까. 저는 그게 싫은 겁니다.”

 

아르민이 조금 분개하는 어조로 말했다. 카림은 그저 입매를 한 번 끌어올릴 뿐이었다. 설령 그랬다 한들 정말 제가 욕보인 것도 아닐진대. 카림으로선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었다. 죽음을 가장하고 왕위에서 물러날 때 카림은 지옥으로 가져갔던 인간 카림 칸의 시신을 관에 넣었고 오래도록 죽은 육신에 잠들어있던 영혼을 취했다. 얼굴이 약간 달랐겠지만 근육의 힘이 완전히 풀어진 얼굴이란 건 원래 늘어지게 마련인데다, 시신의 얼굴을 그렇게 자세히 들여다보려는 이는 없었을 테니 카림은 제법 뻔뻔하게 바꿔치기를 하고 장례식에도 참석했다. 잠시 얼굴을 바꾸고 참석한 장례식에서 카림은 눈물을 흘리는 이름뿐인 가족들을 조금쯤 신기한 눈으로 관찰했다. 딱히 이렇다 할 단란한 정을 주고받은 적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럼에도 이 죽음에 슬퍼할 수 있다는 게 의외라면 의외였다. 그들이 슬픔을 가장한 것이라면 대단한 연기력이라고 칭찬이라도 해주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오래 걷지 않아 기억에 남아있는 낯익은 입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녁을 맞이했음에도 바자르 입구는 오가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요새와 나자르 가든, 가든과 바자르 사이의 거리는 애초에 그렇게 멀지 않았다. 카림은 계획 당시 주요 건물들을 그리 멀리 떨어뜨려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이용하고 살피기에 편하고자 했던 것도 있었지만 당시의 상황을 생각한다면 멀리 분산시켜 두는 것보다 한 곳에 모아두는 것이 혹시 모를 공격을 대비한 방어에도 효율적이었다. 잠시 턱을 매만지며 부산스러운 바자르의 입구를 쳐다보던 카림이 다시 발을 움직였다. 아르민이 곁에서 가만히 뒤를 따랐다.

 

“일부 고고학자들은 이곳을 바킬께서 직접 설계했다고 믿습니다.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건축 형태만을 보고 말입니다. 틀린 말은 아니니…제법 똑똑하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당시 이 지역에서 유행하던 건축 형태는 아니었지.”

 

석고와 벽돌로 지어올린 건물은 천장이 높았다. 아치가 돔 형태의 천장을 가로지르며 서로 만나는 형태를 띄고 있는데 아치의 완벽한 비율에서부터, 기온이 높은 여름이면 내부만큼은 시원하도록 만들기 위해 카림도 나름대로 신경을 쓴 곳이었다. 자신이 설계에 참여했다는 기록은 따로 남기지 않았음에도 그렇게 유추해낸다는 것이 재미있다면 재미있는 점이었다. 내부는 전기설비 등을 위해 약간의 개보수를 거친 것처럼 보였지만 기억 속 원형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카림은 주르륵 늘어선 상가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모래 산처럼 작게 쌓아놓은 향신료들과 전통 문양을 담은 카펫을 포함한 직물들, 각종 수공예품에서 생활용품은 물론 잡화까지 주르륵 늘어 서있었다. 물건들의 형태와 모습만 조금 현대적으로 바뀌었다 뿐이지 시장의 기능은 여전히 활발해 보였다.

 

“쉬라즈에서 몇 년째 지내고 있는 건가?”

“올해로… 74년쯤 됩니다.”

“이곳이 그렇게나 좋은 모양이군.”

“제2의 고향처럼 느껴지는 곳이랄까, 그렇습니다.”

“너를 처음 여기로 불러들일 때만 해도 네게 그렇게 특별한 곳이 될 줄은 몰랐는데.”

 

길게 쭉 뻗은 바자르 내부의 길을 나란히 걸으며 카림은 아르민과 이런저런 대화를 주고받았다. 현재의 이야기, 과거의 이야기가 순서 없이 오갔다. 반대편에서 수레에 물건을 한가득 싣고 오는 인간을 마주쳐 옆으로 나란히 비켜서던 카림의 시선이 아르민의 얼굴에 닿았다. 때마침 아르민의 입에서 내뱉어진 말 때문이었다.

 

“그럼 네 부인은 인간이면서 네 정체를 알고 있다는 소리군.”

“그렇습니다. 첫 만남에서부터 들켰으니 올해로 12년이네요.”

 

악마와 인간이 서로의 정체를 알고도 함께 살아가는 경우는 흔치 않지만 종종 있는 일이긴 했다. 함께 이 일대를 정복했을 적의 그를 생각하면 낯선 일이었다. 카림은 아르민의 성격이 옛날에 비해 많이 변했음을 새삼 느꼈다. 그것이 오랜 시간을 살아온 탓인지, 곁에 있어줄 사람을 찾아 변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이 나쁜 변화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자연스럽게 디디의 존재가 떠올랐다. 카림은 딱히 자신의 성격이 변했다 생각해본 적은 없었으나 디디로 인해 행동이나 생각의 변화를 맞이하고 있는 중이긴 했다. 그 정도는 스스로 자각하고 있었다. 물론 디디가 이 이야기를 듣는다면 동의의 뜻보다 코웃음을 치며 그건 무슨 자신감이냐 되물을 것 같다는 생각이 뒤이어 떠오르긴 했지만 말이다.

 

“바킬의 연인 되시는 분은 악마입니까, 인간입니까?”

“히다야트에게 듣지 못했나?.”

“그는 입이 가벼운 자는 아니니까요.”

 

카림이 동의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히다야트의 성격을 생각하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법 했다. 아무리 같은 권속이라 하여도 아르민은 이제 카림 자신을 모시는 이가 아니었으니, 굳이 말을 옮기지 않은 것일 터였다. 아르민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딱히 섭섭한 기색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인간이었지. 지금은 악마가 되었지만.”

“인간을 악마로 만드는 방법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역시 더 오래 함께 하시려고…?”

“아니. 처음엔 단순히 구두계약의 이행일 뿐이었는데… 인간의 앞일은 모르는 거라더니 그게 악마에게도 적용될 줄은 몰랐지.”

“살아보니 그렇더군요. 앞일은 아무도 모릅니다.”

“지금 물고기에게 수영하는 법을 가르치는 건가?”

 

카림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살아온 햇수가 인생 속 깨달음의 양과 질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제 오백 해 정도를 살아온 아르민에게 살아보니 그렇다는 말을 듣는 것은 어딘가 묘하게 우스운 구석이 없잖아 있었다. 아르민이 따라 웃듯 머쓱하게 웃어 보이며 몸을 돌렸다. 어느새 시장의 반대편 끝까지 다다른 탓이었다. 마찬가지로 돌아선 카림의 시선이 바자르 내부를 훑었다. 막 도착했을 때보다 인파가 줄어들긴 했으나 여전히 물건을 흥정하고, 오가는 이들이 있었다. 이백 년도 더 된 건물은 지어졌을 당시부터 지금까지 그 기능을 꾸준히 해오고 있었다. 언젠가 디디가 우스갯소리로 말했던, 악마가 악행을 해야 한다는 법이라도 있었다면 가장 태만한 건 카림 자신일 것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잔드 왕조를 일으킨 것은 순전히 잔드 가문 인간들이 버거운 짐에 짓눌려가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호기심에서였지만 왕위에 오른 뒤 카림이 행한 일들은 솔직하게 말해 ‘흔히 생각되는 악마의 행동’은 아니었다. 각종 제도 등을 구축하며 나라를 돌보았고 내부 행정의 내실을 다짐과 동시에 외부와의 경제 관계를 통해 재정을 안정시키고자 하였으며 백성이 된 인간들을 살폈다. 침략해오는 적국의 무력으로부터 땅을 지켜냈다. 마치 정말 왕이라도 된 양 말하고 행동하고 힘썼다. 삼십 년이 채 안 되는 그 짧디 짧은 시간동안 정말 단 한 순간도 왕으로서의 책임감을 가진 적이 없느냐 카림은 단칼에 ‘없다’라고 대답할 수 없음을 스스로 잘 알았다.

 

이후 카림은 인간사에 깊게 관여하는 일을 딱히 하지 않았다. 서로에게 마냥 좋은 일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인간사에 손을 깊이 담그면 담글수록 카림 또한 그 영향력에서 빗겨나가는 일이 어려워졌다. 그래서 카림은 인간들 사이에 숨어있되 항상 한 걸음 떨어져 있는 존재인 것처럼 굴었다. 더는 누구와도 깊게 엮이려 들지 않았고 지금껏 인간다워지는 일을 경계했다. 하지만 과거로 남은 기억 속 어느 교수의 말처럼 천사든 악마든 결국은 자신의 의지를 갖고 사고하며 움직이는 존재라는 본질은 인간과 같았다. 이쯤 되니 인간과 악마의 차이점을 꼽으라면 능력과 날개의 유무 정도를 제외하고는 크게 다른 점이 있나 싶은 것이다. 악마도 인간처럼 희로애락을 느낄 줄 알았다. 삶을 가꾸고 관계를 쌓아올릴 수 있었다. 그러니 그 사실들을 꼽다보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다움과 악마다움은 무엇이며 그들을 나누는 경계는 무엇인가?

 

오래도록 그 문제를 고민했지만 여전히 확실한 답을 내릴 수 없었다. 그리고 아마도, 어쩌면 여전히. 확답을 찾는 일은 요원하게 느껴졌다. 카림의 시선이 나란히 걷고 있는 아르민에게 문득 가 닿았다. 이전에 비하면 그는 확실히 인간다워졌다. 그것이 단지 인간들 틈에 섞여 살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곁에 선 존재가 그를 그렇게 변화시켰으리라. 인간과의 깊은 감정적 교류는 인간다움을 옮겼다. 카림은 디디의 존재로 인해 제게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작은 변화들이 보다 인간적인 행동양식에 가깝다고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인간다워졌다고 자신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특별히 인간다워지기를 욕심 하는 것도 아니었고. 한때 인간이었던 디디에게 자신은 여전히 악마에 가까울 테니까. 그저 한결 인간다워진 아르민을 보고 있자니 저 역시 그렇게 변해가고 있는 건가 싶은 의문이 조금 들 뿐이었다.

 

“그런데 너는 묻지 않는군.”

“무엇을 말입니까?”

“인간이 악마가 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바자르의 반대쪽 끝에서 되돌린 걸음이 첫 출발지점에 다다랐을 즈음 카림이 소소한 의문을 꺼냈다. 부인이 인간이라면 방법을 찾으려 할 수도 있을 텐데 별다른 말이 없는 이유가 궁금했다. 몇 개의 예상 답안을 쥐고 카림은 아르민의 얼굴을 마주했다. 그가 조금은 씁쓸한 얼굴을 했다.

 

“사실 이전에 벌써 찾으려 해봤는데… 싫다고 했습니다. 저를 사랑하는 마음과는 별개로, 인간으로 태어났으니 인간으로 죽고 싶다고 하더군요.”

“그랬군.”

“그 앞에서는 티내지 않으려 했습니다만 솔직히 조금은 서운했습니다. 물론 쉬운 결정이 아니라는 거 압니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저를 사랑하지 않는 건가 싶은 생각을 떨치기 힘들더군요.”

 

그 대답은 예상 답안 내에 있긴 했으나 조금은 의외였다. 카림이 마주쳐 온 인간들은 인간 이외의 존재가 되고 싶어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므로. 하지만 스스로에게 충분한 애착과 안정감을 갖고 있다면 인간으로 남는 선택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디디의 경우라면 인외가 되고 싶었다기보다 인간인 스스로에 대한 애착이 없었기에 카림의 손을 그리도 쉽게 덜컥 잡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카림과 디디에게 애정은 그 다음의 일이었다.

 

“애정을 속삭이기에도 아까운 시간에 의심을 품는 미련한 짓은 말도록. 그녀가 인간의 삶을 선택했다면 그 애정은 네가 가진 시간보다 빠르게 떠나갈 테니까.”

 

그 애정과 삶이 끝나는 지점의 거리 차가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은 굳이 상기시키지 않기로 했다. 애초에 모든 애정이 불멸을 약속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설령 불멸을 약속한다 해도 어쩌면 유한한 것이 차라리 나을지도 몰랐다. 오랜 시간을 버텨온 것은 종류를 막론하고 으레 비틀린 구석이 하나쯤 생기게 마련이니 말이다. 카림은 디디와 자신 사이에 자란 애정을 떠올렸다. 끝을 정해두고 시작하는 사랑은 없으니 그 끝이 언제일지는 예상하지 못한다. 그러나 알 수 없는 불확실한 미래에 기대 미리 불안을 씹는 짓을 굳이 사서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둘 중 누군가가 소멸할 쯤에나 끝을 맞이하길 막연히 바라는 게 다였다. 가만히 서서 늦은 저녁의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일별하던 아르민은 카림이 삼켜낸 의미까지 잡아낸 건지, ‘그래서 더욱 후회 없이 사랑하기로 했다’며 소탈하게 웃어 보일 따름이었다.

 

“여길 본 이후에 저녁을 대접하려 했는데 대화를 나누느라 적당한 때를 놓쳤네요.”

“어디 오늘만 날인가. 그나저나 네 부인이 널 기다리고 있을 텐데, 본의 아니게 실례를 했군.”

“전혀 아닙니다. 바자르로 오는 길에 늦을지도 모른다, 연락을 넣어두었거든요.”

 

나자르 가든을 지나칠 때 핸드폰을 만지작거린다 싶었더니 그 때 연락을 넣은 모양이었다. 두 악마는 자연스럽게 다시 요새 방향으로 걸음을 움직였다. 돌아가는 길에 카림은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쉬라즈에 도착해 한 번 껐다 켜는 것으로 자동 로밍이 된 핸드폰 화면에는 뉴욕과 쉬라즈의 시간이 나란히 떠 있었다. 이제 두 시 언저리를 나타내는 뉴욕의 시간을 보며 디디가 점심 식사를 마쳤겠거니 생각했다.

 

“이제 넌 네 집으로 돌아가야겠군.”

“조금 더 모실 수 있습니다. 바킬께서는 어디로 가십니까?”

“밤거리를 혼자 좀 더 걷다 돌아갈까 하니 먼저 들어가는 게 어떤가?”

 

카림이 만류하듯 고개를 저었고 아르민이 아쉬운 얼굴을 했다. 근 이삼백 년 만에 얼굴을 본 것이 그렇게나 반가운 모양이었다. 카림은 아쉬워하는 아르민에게 자신의 핸드폰을 내밀었다. 연락처와 메일, 몇 마디 말을 더 주고받은 다음에야 아르민은 나중에 연인 되시는 분과 함께 오시라는 인사를 남기고 그의 집이 있을 방향으로 발을 옮겼다. 그의 모습이 조금 멀어지길 기다린 다음에 카림은 제가 걸어오지 않았던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쉬라즈의 밤은 뉴욕의 밤과는 견줄만한 게 못 되었다. 이란에서 인구가 다섯 번째로 많은 도시라고는 하나 뉴욕만큼 높게 솟은 건물도 드물었고, 빼곡하지도 않았으므로 일견 초라해 보일 정도였지만 그래서 더욱 그 옛날을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드물게 모습을 드러내는 옛 건물들과 신식 건물들이 섞인 모습을 눈에 담으며 카림은 드물게 과거의 기억에 젖어 밤거리를 오래 걸었다. 인적조차 드물어진 시간이 되어서야 상념에서 깨어난 카림이 시간을 확인하고 짧게 혀를 찼다. 대충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오랜 시간동안 거리를 정처없이 거닌 탓이다. 곧 디디의 퇴근시간이었다. 못해도 서너 시간을 혼자 걸어 다녔다는 사실에 조금 아연해진 얼굴로 뺨을 긁적인 카림은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몇 걸음 걷지 않아 능력을 사용했고 이내 디디의 회사가 있는 건물 근처 골목에 서 있었다.

 

온도는 비슷해도 사뭇 다른 공기가 카림의 발목을 휘감고 스쳐지나간다. 바삐 오가는 사람들의 소란이 귓가로 스몄다. 길 건너편으로 보이는 빌딩의 고층부가 노을에 샛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잠시 그 반사되는 빛을 올려다보던 카림은 천연덕스럽게 골목 밖으로 걸어 나가 디디의 회사 앞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마실 것을 사갈까 하다가, 업무 중에 이미 커피를 많이 마셨을 것 같아 관뒀다. 대신 디디에게 회사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내용의 메시지를 보냈다. 오래 걷지 않아 다다른 빌딩 입구는 퇴근을 맞이한 이들로 쉴 새 없이 입을 열었다 닫고 있었다. 얼추 시간에 맞춘 것 같았다. 입구 좌우로 작게 마련된 허벅지 높이의 화단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은 카림이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쉬라즈에서 핸드폰을 꺼내든 적이 거의 없었기에 그 몇 시간 동안 쌓인 알림들을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금세 흘렀다.

 

문득 제 신발 앞에 멈춰 서는 익숙한 구두코를 시선에 담은 카림이 웃음기 밴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오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단단한 얼굴을 한 디디가 서 있었다. 그냥 본다면 아침과 별 다를 바 없게 보일 테지만 카림은 그 무표정함 아래에 감추어진 약간의 피로와 반가움 등의 감정을 잡아낼 수 있었다. 어쩐지 오늘따라 그 무던한 얼굴이 더 반가워 카림은 제 앞에 선 몸을 가벼이 끌어안았다 곧 놓아주었다. 황갈빛 눈이 카림을 잠시간 살폈다.

 

“낯선 냄새가 납니다.”

“쉬라즈에서 묻어 온 거겠지. 시장을 갔었거든.”

“근데 내가 아니면 어쩌려고 그렇게 웃으면서 고갤 듭니까?”

“신발부터가 너인데, 어떻게 헷갈릴 수 있겠나.”

 

카림이 디디와 나란히 걸음을 뗀다. 과거의 기억이 담긴 상자는 뚜껑을 닫은 채 다시 의식의 저편으로 밀어 보냈다. 아마도 한동안 다시 열릴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저녁 메뉴의 선택지를 몇 가지 입에 올리며 카림은 다음 언젠가의 쉬라즈 행엔 디디와 함께 가 그에게 남은 유적을 보여주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만약 디디가 원한다면 아르민과 만나 함께 식사 정도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남은 흔적들을 반드시 봐야 할 필요는 없었으므로 생각대로 이루어져도, 이루어지지 않아도 괜찮았다. 말했듯이 흘러가는 대로 흘려보내야 할 것도 있는 법이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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