汎濫, 汎爦
유 섹션 리부트(2024), 루드라
사람을 사회적 동물이라 이르는 데에는 여러 가지 사유가 있으나 개중 하나를 꼽자면 바로 동족과의 감정적 유대를 감각하고 꾸준히 증명받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은 알게 된 지 고작 십여 분밖에 되지 않은 상대에게도 그럴 수 있고, 본인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상대에게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점이었다. 우습지 않은가. 한 개인을 구성하는 조그만 조각 하나를 보고서도 그에게서 유대와 다정과 안정을 욕망한다는 게. 하여 타인의 갈구를 마주할 때면 으레 생각하곤 했다. 그들은 불빛을 보면 그것이 실제로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라 할지라도 달려드는 부나방과 다름이 없다고.
때때로 타인의 갈구는 윤태에게 손을 내밀었다. 대다수가 센티넬이었다. 전업 가이드의 길을 걷기 시작하며 가장 빈번하게 닿고 마주하는 이들이 센티넬이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리라. 그들의 대대수가 가이딩이 주는 안정감과 평온함에 상대적으로 쉽게 가이드를 간원할 수 있다는 사실관계를 수긍은 하고 있었다. 고작 얄팍한 얼마간의 온기와 파장을 안정시키는 힘에 취해 손을 내민다는 게 신기했을 뿐.
응당 사람이라면 바라는 것을 쥐여 줄 수 있지 않느냐 묻는 듯한 손길을 마주할 때면, 아주 솔직히, 사실은 이해할 수 없었다. 당신과 내가 그런 것을 주고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이인가요. 당신이 원하는 건 내게 아무런 쓸모가 없는데 우리가 그걸 주고받아야 할까요. 주고받음의 기조는 등가교환일진대 당신은 내게 쓸모 있는 것 중 어떤 걸 건넬 수 있나요. 애초에 내게 쓸모 있는 걸 어떻게 알고?
무수하게 치미는 질문을 모조리 입안에서 바스라뜨려 다시 삼킨다. 이십 대 중반 무렵의 윤태는 말의 날카로움이 마음을 상처 입힐 수 있다는 점을 납득하고 있었다. 그러니 침묵으로 일관했고, 이해할 수 없으니 건네지 않았다. 제 선택이 최선의 방책이라는 생각은 애초에 없었으나 벼려낸 말로 상처를 입히고 거짓을 건네는 것보단 현명한 판단이리라 믿었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그 침묵에 상처를 받았다 말했다. 신기루 같은 허상이어도 좋으니 쥐여 달라 갈구했다. 당연하게도 모든 인간이 천편일률적일 수 없지만, 도무지 종잡을 수 없다는 생각뿐이었다. 윤태는 그들이 바라는 발화와 증여를 건넨다 한들 간구하는 이들을 충족시킬 수 없다는 점을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제게 향하는 요구들이 거북할 따름이었다.
요구, 갈구, 간원, 기대 ……. 그 어떤 이름과 형태를 하고 있어도 달갑지 않았다. 사람은 왜 사람에게 바라는 걸까. 사람은 무언가를 바라지 않아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데. 누군가는 반박할 게 불 보듯 뻔했으나 윤태는 그 명제에 대한 근거를 제시할 수 있었다. 제 온 삶이 곧 그 명제의 방증이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삶’이 존재할 수 없다 말하는 것은 인간 전윤태를 부정하고 지우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 그러니 흔들림 없이 물을 수 있다. 당신이 주장하는 명제를 무결한 참으로 만들고자 한 개인의 삶을 모조리 부정하고 지울 것인가?
당연하게도 윤태의 삶에 처음부터 모든 간원과 소망이 존재치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면 그가 거쳐 온 십 대의 삶에 눈길을 주어야 한다. 한때 가슴속에서 선명히 맥동하던 간원과 소망은 십 대 전반에 걸쳐 서서히 말살되었다. 어느 아침 눈을 뜨며 하나의 소실을 깨달으면 윤태는 막연히 생각했다. 가족을 삼켜버린 불길이 아직 저를 불사르는 중인 것 같다고. 꺼지지 않고 새하얗게 타오르는 불길은 육과 골, 혼까지 살라 먹은 뒤에야 자취를 감출 것 같았다.
지긋지긋하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제 안의 불길을 죽이겠답시고 깊디깊은 물에, 혹은 빠르게 달리는 열차 따위에 스스로를 던지려니 따져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반드시 발견될 것이고, 누군가에겐 연락이 갈 것이며 그 누군가는 이미 비어버린 껍데기를 처리하는 일에 돈을 써야 한다. 이는 죄스럽다거나 미안함에서 기인한 생각이 아니다. 단지 무가치한 소모에 대한 이야기일 뿐이었다. 하루의 끝에서 오롯한 암전을 꿈꾸며 눈을 감아도 어김없이 베일처럼 드리우는 햇빛이 눈꺼풀 위를 간질인다. 또다시, 반복되는 아침이다.
잊을라치면 반복되는 소실은 윤태의 삶을 기어이 관성의 영역에 다다르게 했다. 단지 숨이 멎지 않았으니 살아갈 뿐이다. 그동안 새로이 익힌 것이라곤 선의는 선의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점과 타인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는 일은 썩 유쾌하지 않다는 점 정도였다. 가이드로서의 전윤태를 갈구하는 이들은 차고 넘쳤다. 그 드물다는 S급으로 여러 차례 가이딩을 이어 해도 고갈되지 않는다 기뻐했다. 마치 고품질의 물건을 소개하는 듯한 어투였으니 딱히 저를 향한 칭찬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게라도 쓰이는 걸 기꺼이 받아들였다. 인간 전윤태는 가진 것도, 내밀 수 있는 것도 없었으므로. 일말의 불쾌함을 채 지우지 못할지라도 어떤 방식으로든 존재 가치를 인정받고 제 한 몸 건사하며 입에 풀칠을 할 수 있으면 되는 일이라 여겼다. 그렇게 스물이 되고, 야만과 혼돈의 시기를 거쳐 제정된 법에 따라 공식적으로 가이드로서의 족적을 남길 수 있게 되었을 때 처음으로 전담 파트너라는 게 생겼다.
제 등급과 파트너가 될 센티넬의 등급 등을 고려하여 두 명의 센티넬과 연결되었는데, 그들이 이미 자식을 둔 부부 관계라는 점이 신기하다면 신기했다. 막상 만나 보니 남편 되는 쪽의 인상이 썩 좋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그들은 이미 서로에게 깊은 유대를 갖고 있을 테니 제게 특별히 갈구하는 것이 없으리라. 그와 더불어 가이딩을 위해 매칭되는 상대가 고정되었다는 사실이 윤태로 하여금 희미한 안도를 갖게 했다.
실제로 그들의 전담 파트너로 활동하는 동안은 심리적 피로를 느끼지 않을 수 있어 편했다. 적어도 그들은 윤태를 같은 인간으로 대했으므로. 그 어디에도 기록으로 남지 않은 무수한 ‘업무’ 중에 마주했던 아귀들과 비교하면 부부는 아주 온건했고 때때로 친절했으며 안정적으로 보였다. 어쩌면 홀로서기를 시작한 이래 처음 안정감의 그림자를 발견했던 것도 같았다. 그러나 그마저도 오래지 않아 한쪽의 사망으로 처참하게 어그러졌지만 말이다.
함께하지 않은 게이트 내에서의 사망. 무미건조한 줄글로 정리된 부고와 전담 파트너 해지 공문을 받아 읽으며 과연 제가 함께했다면 그의 생존 가능성에 약간의 영향이라도 줄 수 있었을지 가벼이 가늠하다 관둔다. 실험해 볼 수 없는 일의 가능성을 점치는 건 무의미한 일이었으니까. 다 읽은 것을 봉투에 다시 넣으려다, 함께 딸려 나오지 못하고 귀퉁이만 비죽이 튀어나와있는 종이 한 장을 발견했다. 크리처 토벌 임무에 편성되었다는 고지.
당장 하루 뒤인 임무 시작 일자를 확인하자 흘러나오는 것은 실소뿐이다. 부부 양쪽이 모두 사망한 것도 아닌데 파트너 해지 공문이 날아온 이유를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유용하고 쉽게 망가지지 않는 도구를 하루라도 허투루 놀릴 수 없다는 뜻이리라. 애초에 기대한 바가 없으니 실망스럽지도 않았고, 딱히 화가 나지도 비참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제겐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품어봤자 무용한 감정인지라.
이후 두엇의 전담 파트너와 단기 매칭 파트너를 여럿 거치며 평범한 사람으로서의 전윤태는 점차 소거되고, 그 공백을 메우는 것은 가이드로서의 전윤태였다. 삶의 매 순간이 등속 운동의 결과값에 지나지 않았다. 관성에 잠긴 삶은 그저 평행선이다. 굴곡이 존재치 않으니 아무리 달려도 숨이 차기는커녕 부딪칠 곳도 없었다. 다만 그 무감한 삶에도 파동을 일으키는 특정한 순간이 있었고, 그럴 때면 삶을 향한 모든 감각이 첨예하게 곤두서 살아있음을 감각하게 했다.
이 세상의 것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이형異形의 날카로운 발톱이나 쩍 벌어진 아가리 앞에서 윤태의 욕망은 그 무엇보다 선연해졌다. 의심의 여지 없이 명징한 생존욕이 들끓는다. 살아남아 이 세상에 호흡을 새기고자 베고 부수어 짓밟았다. 그저 사용되다 망가져 폐기되는 부품과 동일하지 않다 증명하고자 했다. 죽음을 향해 포효했고 생을 위해 울부짖었다. 적어도 크리처를 마주하는 동안의 윤태는 그 무엇보다도 선명하게 살아있는 존재였다.
汎濫(범람) 큰 물이 흘러 넘침
爦(불 번질 람) 세찬 불길이 번져 나가다
루드라의 대략 서른 언저리까지의 삶에 대한 정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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