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미카] 잠시도 눈을 뗄 수 없는

※허구와 날조 100%, 공식 설정과 다른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는 도무지 내키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해 두겠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카게히라의 의사를 존중해서 동의하는 것일 뿐, 사에구사의 설득에 넘어간 게 아니라는 사실을 확실히 해 두겠다는 것이야." 

"아이 아이, 물론이지요! 그 어떤 형태로든 허락이 떨어졌다는 것만으로도 저희는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시다시피 그 감독님이 꼭 카게히라 씨를 쓰고 싶다고 끈질기게 요청하시지 않았습니까? 이번에 빚… 아니, 돈독한 관계를 맺어 두면 추후 다른 아티스트들 역시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코즈프로 사무실, 미카에게 새로 들어온 드라마의 오퍼를 검토하던 슈가 험악한 표정으로 말했지만 어쨌거나 승낙을 받아낸 이바라는 환한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응아, 스승님이 정 싫다카믄 내도 굳이 할 생각은 없는데에…." 

 

난처한 얼굴로 미카가 말했다. 슈는 옆을 돌아보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카게히라는 하고 싶은 것이지? 이 드라마를." 

"마, 글킨 한데…." 

 

처음 이야기가 들어왔을 때 여름의 2시간 특집 호러 드라마라는 말을 듣고 미카가 무척 들뜨는 모습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 슈로서는 솔직히 무턱대고 반대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시놉시스를 본 순간, 기묘하게도 목구멍에 무언가가 턱 걸리는 기분이었다. 

미신과 인습이 아직 생생하게 남아 있는 깊은 산골의 어느 마을, 그곳에서는 매년 산신에게 사람을 산 제물로 바치며 가뭄과 홍수를 막는 제사를 지낸다. 처음에는 워낙 먹을 것이 없고 척박한 지역이기에 과잉된 인구를 솎아내는 기능을 하던 행사였지만, 어느 순간부터 마을에서는 부모 없는 고아들을 모아 의도적으로 희생제물을 키워내기 시작하는데…. 

 

"이런… 아무런 예술성도 없고 오로지 자극적이기만 한, 인간의 추악한 본성만을 전면에 내세우는 내용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지?" 

 

슈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미카가 그 내용에 끌린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미카는 실제로 고아원 출신이었고, 자신의 입으로 굳이 나서서 말하고 싶은 이야기는 아니지만 작년의 사건에서 거의 자신에게 희생제물로 바쳐졌던 것이나 다름없다는 자각이 슈에게는 있었다. 

하나같이 미카에게는 고통스러운 기억뿐이리라. 그런데 그것을 다시 떠오르게 하는 내용의 드라마에 굳이 출연해야 할까? 

 

"응아… 내는 마 상관없는데. 그카고 그 감독님 드라마는 기회만 된다믄야 꼭 한 번 나가 보고 싶었데이. 내 나오는 족족 다 봤다 안카나." 

"아니, 나로서도 네 일을 방해할 생각은 없다만…." 

 

당사자인 미카가 괜찮다니, 게다가 자신의 찜찜한 기분을 제외하면 고사할 이유도 없으니 이 이상 슈가 미카의 개인 활동에 끼어드는 것은 월권이다. 결국 슈는 최종적으로 동의하면서도 도통 석연찮은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 

 

 

"대본 연습 상대를 해 달라고?" 

"응아아… 스승님이 이 드라마 싫어하는 기는 아는데, 그래두 역시 혼자 읽기만 하믄 통 몰입이 안 된데이…." 

"분명 나는 그 일을 썩 달가워하는 입장이 아니다만, 한 번 하기로 정한 일이라면 최선을 다해 완벽하게 해내야겠지. 어디 보여 다오." 

 

미카에게서 대본을 받아들고, 미카가 체크해 놓은 부분을 훑어보던 슈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 부분은… 네 모놀로그인데?" 

 

아니나다를까 제물 역할을 맡게 된 미카는 어린 시절부터 다른 고아들과 함께 자라, 어느덧 그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아 제물로 바쳐질 차례가 된 아이였다. 평소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더운물로 깨끗이 목욕을 하고, 마찬가지로 한 번도 입어 본 적 없는 화려한 옷을 입고, 맛있는 음식으로 식사를 한 후 홀로 어두운 숲속으로 걸어들어온 아이의 귀에 마치 산신의 음성 같은 희미한 소리가 들려오는 장면. 

 

[저는… 이것을 위해 살아왔어요.] 

[…. ---…. ….] 

[네, 산신님이 저를 보시고, 제물이 마음에 들었노라 하시면… 올 한 해 마을은 평화롭고, 굶주리는 사람이 없을 거예요. 저는 그것을 위해 태어났고, 지금까지 살아왔어요.] 

[…. ……. …-…--….] 

[부디 어여삐 봐 주시고, 저희 마을을 올해도 지켜 주세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 …-… …-… …-…] 

 

"카게히라, 상대의 대사가 없다만." 

"응, 그니까 스승님은 거기 가만히 앉아만 있어 주믄 된데이! 앞에서 누가 존재감을 뿜어내 주믄 내도 훨씬 대사 치기 쉬워질끼다." 

 

미카가 자신을 무슨 신 같은 존재로 여긴다는 사실은 슈도 잘 알았지만, 그리고 자신에게 대본 상대를 부탁하는 데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란 것도 알았지만, 아무래도 제물을 기다리는 산신의 역할이라는 것이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슈가 소파에 앉아 노려보다시피 응시하는 가운데 미카가 두 손을 모으고 눈을 내리깔았다. 순식간에 역할에 몰입하는 모습을 보며 슈는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정말이지, 그 형사 영화인지 뭔지를 찍을 때는 눈 뜨고 봐줄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인 연기를 하던 아이가 어느 샌가 이렇게 늘었다. 아마 자신이 좋아하는 호러 장르의 역할을 맡은 덕분에 더 쉽게 몰입할 수도 있는 것이겠지. 

또는… 처지가 비슷한 극 속 인물에게 더욱 쉽게 공감했을 수도 있고. 

 

"제발 부탁드립니다. 저는, 이 역할을 완수하지 않으면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지 알 수 없을 거예요. 어차피 마을에 흉년이 들면 굶주림으로 모두 함께 허무하게 끝나버릴 인생, 이렇게라도 마무리짓고 싶어요. 제가 살아온 데에 무슨 의미라도 있었으면 해서." 

 

대사를 말하는 미카의 두 눈동자에는 빛이 없었다. 그러나 마치 희열을 느끼는 듯 두 볼은 희미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십 수 년 간 제물이 되는 일이 얼마나 명예로운 일인지, 왜 자신이 그 일을 반드시 해내야만 하는지 끊임없이 세뇌를 당해 온 어린아이의 얼굴이었다. 

참지 못한 슈는 그만 "농!"하고 버럭 외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응아? 스승님?" 

 

미카가 눈을 깜박거리며 슈를 쳐다보았다. 슈는 미간을 짚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아무래도 내 연기가 안즉 미숙허제? 그럴 것 같았구마. 캐도 부족하지만 열심히 연습해가, 스승님 앞에 부끄럽지 않게 잘 해볼…." 

"네 연기를 책잡으려는 것이 아니야. 아아, 하지만 카게히라, 이 부분을 촬영할 때는 내게 꼭 말해 다오. 무슨 일이 있어도 참관하러 갈 테니." 

 

슈의 심각한 표정에 미카는 다소 당황했다. 

 

"응아? 스승님 곧 프랑스 돌아가야 하지 않나?" 

"필요에 의해 일본 체류를 늘리든지, 아니면 긴급히 귀국하든지 할 테니… 잊지 말아야 한다. 반드시, 내가 있는 곳에서, 내 눈앞에서 이 장면을 촬영할 것. 알겠지?" 

"여가 중요한 파트기는 한데, 내 연기가 그래 불안하나… 알았데이. 내 꼭 연락하꾸마." 

 

아무 것도 모르는 미카는 그저 "마 스승님 와 준다믄 내는 용기백배제~!"하면서 기분이 좋아진 눈치였지만, 대사를 읊으며 황홀경에 빠진 미카의 얼굴을 보고 만 슈로서는 역시 처음부터 드라마 출연을 가로막았어야 한다는 후회가 자꾸 느껴질 뿐이었다. 

만일 슈 자신이 없는 곳에서 이 아이가 누군가에게─설령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산신이라 할지언정─홀려서 그대로 넘어가 버린다면, 돌이킬 수 없는 끔찍한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예감만이 슈의 전신을 지배하고 있었다. 

 

 

***

 

 

"컷! 좋아, 흐름 좋은데?" 

 

한밤의 암흑 가운데, 어느 산 속 깊은 숲에서 딱 한 군데 대낮처럼 환하게 조명이 켜진 곳이 있었다. 드라마 <어둠 속의 너> 촬영이 한창인 야외 세트장이었다. 

 

"카게히라 군, 좋아, 역시 아주 좋아!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 

"가, 감사합니더…." 

 

고개를 꾸벅꾸벅 숙이면서도 미카는 사실 무척이나 불안한 심경이었다. 

하필 감독이 바로 어제 지정한 야외 촬영일이 슈의 출국일과 겹쳐 버렸던 것이다. 슈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자신이 이 부분을 촬영할 때 참관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미카의 입장에서는 도대체 슈가 왜 그렇게 완고하게 나오는지 이해도 되지 않았을뿐더러 슈가 스케줄을 망치면서까지 이 자리에 와야 할 이유도 알 수 없었다. 

물론 와 주면 기쁘기야 하겠지. 자신이 열심히 최선을 다해 연기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슈도 호러 드라마에 대한 인식을 조금은 바꿔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도 있었다. 그러나 슈도 프랑스에 돌아가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사실을 미카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슈가 그렇게 신신당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촬영을 나서면서 굳이 연락하지 않았다. 

 

'나중에 알믄 스승님이 화를 내기는 하겠지만, 머 드라마 흥행만 잘 되믄… 아무 문제 없을끼니께. 결과적으로 성과를 내가 Valkyrie의 활동에 도움만 되믄 되는 기 아이가.' 

 

미카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헤실헤실 웃었다. 감독은 그것이 자신의 칭찬을 받고 기뻐하는 얼굴이라고 생각했는지 미카에게 엄지를 척 들어 보였다. 

 

"끝까지 잘 해 보자고, 응? 카게히라 군! 난 그저 카게히라 군만 믿어!" 

"응아, 열심히 해 보겠심더." 

"사실 나 이츠키 군이 좀 부담스럽거든… 아니, 정확히 말하면 좀 무섭다고나 할까… 그래서 처음에 오퍼 넣으면서 혹시 이츠키 군 때문에 안 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흔쾌히 받아 줘서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 

"하, 하하…." 

 

사실은 야외 촬영에 슈가 동행할 예정이었다는 이야기를 하면 이 소심해 보이는 감독이 얼마나 깜짝 놀랄까. 미카는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다음 컷 갑시다! #87!" 

 

제물이 숲 속으로 걸어 들어가며 산신님의 환청을 듣는 장면. 

미카는 코디가 옷매무새를 고쳐 주는 가운데 멍하니 대본 연습 때의 슈를 떠올렸다. 마치 잡아먹을 듯이 자신을 쳐다보다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나던 그 모습은, 단순히 자신의 서투른 연기 때문에 화가 난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었다. 

왜였을까. 왜─무엇 때문에─그렇게 절박했을까. 

역시 야외 촬영이 있다고 연락을 하는 편이 좋았을까. 하지만…. 

 

"미카 군, 미카 군!" 

 

잠시 상념이 스쳤으나 앞에서 스태프가 부르는 바람에 미카는 허둥지둥 카메라 앞으로 나섰다. 

화려한 제물의 옷을 입은 미카의 뒤통수가 카메라에 비치고 금세 무언가에 홀린 듯 앞으로 걸어나서는 모습이 그대로 찍혔다. 

 

"좋아, 그대로 쭈욱… 다리에 힘을 조금 더 빼고." 

 

최소한의 조명만을 켠 어둠 속으로 미카가 터덜터덜 걸어갔다. 

 

"저를 보시고, 제물이 마음에 들었노라 하시면… 올 한 해 마을은 평화롭고, 굶주리는 사람이 없을 거예요." 

 

대사를 읊으며 차츰 제물의 역할 속으로 걸어들어가다 보니 눈앞에 뿌옇고 흐릿한 무언가가 왔다 갔다 하는 느낌이 들었다. 산신님일까, 드디어 나를 맞으러 와 주셨을까. 서늘한 바람이 한 줄기 휙 불자 얇은 옷자락 밑으로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저는 그것을 위해 태어났고, 지금까지 살아왔어요." 

 

그랬다, 내게는 주어진 사명이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었던 삶의 이유, 이루어야 할 목적. 

 

"부디 어여삐 봐 주시고, 저희 마을을 올해도 지켜 주세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마음이 편안해진다. 

매년, 그렇게 사람을 보냈다. 한 명, 또 한 명. 친하게 지내며 예뻐해 주던 누나들, 툭하면 쥐어박으면서도 가끔은 쓰다듬어 주던 형들. 

모두 얼굴을 발그레하게 물들이며 기쁨에 들떠서 숲으로 들어갔다. 드디어 산신님의 제물이 되는 거야, 그간 오로지 그것만을 생각하며 살아 왔잖아. 아무 쓸모도 없는 우리 같은 고아들이 유일하게 마을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길, 유일하게 모든 사람들에게서 칭찬과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미래. 

태어난 의미, 유일한 목표. 

주위에서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사각사각 마른 잎을 밟는 소리, 음울하게 들려오던 새 울음소리마저도 귓가에서 지워졌다. 오로지 앞을 향해, 어둠 속을 더듬으며 멍하니 다리를 움직여 어디 있을지 모를 산신님이 계신 곳만을 향해 계속해서 걸어간다. 

산신님은, 외롭지 않을까?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1년에 한 번 누군가가 찾아올 뿐, 그 외에는 이 어두운 숲 속에서 늘 고독하게 살고 있는 게 아닐까? 세상이 두려워 이불을 뒤집어쓰고 혼자 바들바들 떨며 지내고 있지는 않을까? 손 내밀어 주고 곁에서 지켜 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지는─ 

 

"카게히라!" 

 

그때 뒤에서 두 개의 새하얀 불빛이 길게 뻗어오고, 요란하게 끼익 소리를 내며 차가 급정거하는 소리가 들렸다. 문짝이 쾅 열렸다 쾅 닫히고 우당탕탕 뛰어오는 소리와 함께 어둠으로 차단되었던 모든 감각들이 단숨에 돌아오고, 

 

"으, 응아아아아!" 

 

미카는 어둠 속에서 발이 미끄러지며 허공에 몸이 붕 뜨는 것을 느꼈다. 가파르게 경사진 발 밑으로 돌과 모래가 꽤 한참이나 아래까지 와르르 굴러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으면서 팔을 허우적거리다 보니 무언가가 손에 덥석 잡혔다. 

 

"꼭 붙잡고 있거라! 절대로 놓아서는 안 돼!" 

"응에에?!" 

 

왼손을 붙잡은 커다란 손이 미카를 순식간에 끌어올렸다. 그리고 애초에도 밤눈이 어두워 앞이 잘 보이지 않았던 미카의 시야가 무언가 따스한 것으로 완전히 가로막혔다. 

아니, 전신이 무언가에 둘러싸였다. 

 

"하아, 하아…." 

 

미카의 얼굴을 파묻은 그것은 정신없이 쿵쿵 뛰고 있었다. 미카가 손을 뻗어 더듬으니 동그란 무언가가 만져졌다. 늘 밀리미터 단위로 깔끔하게 다듬고 관리하는, 매끄러운 누군가의 머리카락. 낯익은 감촉. 

 

"스, 스승님?" 

"하아, 하… 무사한 것이지? 어디, 얼굴을 좀 보여다오." 

"응아아아아, 무신 일이고? 우예 된 기고? 스승님이 와 여 있나? 내는 촬영 중이었는데…." 

 

뒤늦게 뒤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뛰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카를 품에 안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가쁜 숨을 몰아쉬던 슈가 고개를 뒤로 돌려 "찾았으니 걱정 말라는 것이야!"하고 고함쳤다. 

그러고는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불같이 분노를 내뿜었다. 

 

"이 장면을 촬영할 때 반드시 내게 알리라고 말하지 않았더냐?! 왜 말을 듣지 않아!" 

"스, 스승님 와 프랑스 안 갔나? 지금쯤 비행기 타고 있어야 할 시간 아이가? 스승님이야말로 와 여기 있는 긴데?!" 

"내 말에 먼저 대답을…!" 

"자, 자. 이츠키 씨. 일단 카게히라 씨가 많이 놀랐을 테니 진정시키는 게 먼저가 아닐까 싶군요! 스태프들에게는 제가 잘 말해 놓겠습니다!" 

 

뒤에서 또 다른,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응아아, 부소장은 와 또 왔는데에?!" 

"그 점은 저도 궁금합니다! 제가 왜 이곳에 왔을까요! 그저 공항에 볼일이 있어, ES빌딩 앞에서 우연히 이츠키 씨와 함께 택시를 탔을 뿐인데! 문득 스케줄의 변경사항이 없는지 확인해 보다 지금 카게히라 씨의 야외 촬영이 있군요, 라고 말했을 뿐인데 말이죠! 갑자기 눈에 핏발이 서면서 이쪽으로 차를 돌리라고 하는 겁니다, 글쎄! 그때 한참이나 먼 이 산까지 오는 택시비는 경비로 처리해 드릴 수 없다고 말씀드렸는데, 이거 이거 상황 여하에 따라 어떻게 될지 모르겠군요!" 

 

놀란 미카가 슈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조명이 환한 촬영장 근처까지 와서인지 어느 정도 희미하게나마 이목구비가 보였다.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험악한 얼굴로 감독 쪽을 노려보는 슈의 팔은 마치 바이스처럼 단단하게 미카의 몸을 옥죄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심야라는 위험한 시각에 연기자의 안전을 신경 쓰지 않는 현장이라니, 이런 곳에 카게히라를 놓아둘 수는 없다는 것이야. 당장 데리고 돌아가겠다." 

"잠깐만요, 잠깐만요!" 

 

슈를 말린 이바라가 다급히 감독 쪽으로 뛰어가 무어라 옥신각신 이야기를 나누었다. 스태프들도 꽤나 당황했는지 우왕좌왕 정신이 없었고, 슈가 미카를 데리고 빠르게 자리를 뜰까 걱정이 되었는지 이바라는 금세 이쪽으로 뛰어왔다. 

 

"네, 네! 오늘은 여기서 정리하는 것이 좋겠답니다! 뭐니 뭐니 해도 카게히라 씨가 사라진 지 벌써 3시간이라, 다들 카게히라 씨를 찾는 데에만 정신이 없었어서 촬영을 이어갈 상황이 아니라는군요! 여하간 빨리 찾아서 다행입니다!" 

"3시간?!" 

 

미카는 깜짝 놀랐다. 자신의 기분으로는 고작 5, 6분밖에 걷지 않았던 것 같은데 어둠 속에 그렇게나 오래 있었다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게다가 아까의 기억으로는, 분명 뒤에서 슈와 이바라가 타고 온 것으로 여겨지는 택시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자신을 비출 수 있는 정도의 거리에서 쏘아져 나왔다. 아무리 느린 걸음이어도 3시간이나 걸어서 이동했다면 고작 그 정도 위치에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카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슈를 쳐다보았지만 슈는 묘하게 뭔가 납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뒷정리를 부탁한다는 것이야. 나는 이 아이를 데리고 그만 가 볼 테니." 

"아이 아이, 맡겨 주십시오!" 

 

아마 방금 전 미카가 절벽에 떨어질 뻔했던 것까지 전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던 이바라라면 감독에게 안전관리 책임 소홀을 물어 이런저런 유리한 교섭을 이끌어낼 것이다. 하지만 슈 입장에서 그것은 알 바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하마터면 미카를 잃을 뻔했고, 그것을 간신히 되찾았다는 사실이었다. 

 

"…스승님, 아직도 심장이 엄청 뛴데이." 

 

품에 안긴 미카가 조그맣게 말했다. 

 

"살아 있으니까. 살아 있는 내가, 널 데리러 왔으니까." 

"응…."

 

하지만 미카는 아직 아무 것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어둠 속을 3시간이나 헤매다, 길을 잃고 절벽으로 떨어질 뻔했다? 이바라의 이야기를 믿는다면 결국 벌어진 일은 그것이리라. 하지만 자신은 아직 촬영하던 도중이었다. 열심히 연습한 대사를 읊으며 숲 속으로 잠시 들어가는 뒷모습까지 촬영하고 나면 금세 숲에서 나올 예정이었다.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진 거지? 

 

"…스승님, 내… 죽을 뻔했나?" 

 

미카가 여전히 조그만 목소리로 물었다. 

택시를 향해 성큼성큼 걷던 슈가 긴 한숨을 내쉬며 미카를 바라보더니 다시 한 번 꽉 껴안았다. 

 

"흥. 죽음조차도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는데, 하물며 이런 영험하지도 않은 산에 사는 잡귀 따위가 너를 카미카쿠시하려 하다니. 어림도 없다는 줄 알라는 것이다." 

"응에에? 카미카쿠시?" 

"…가자." 

 

세게 껴안는 팔의 힘은 늘 그렇듯 단단했지만, 미카는 슈의 손가락 끝이 희미하게 떨리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산신님이 진짜 내를 데꾸 갈라꼬 했던 기가? 근데 스승님이 와서 몬했던기고?" 

"…그건… 알 수 없지."

 

하지만 스태프 전원이 총출동해서 3시간이나 수색했는데도 미카를 찾지 못했는데, 슈는 거의 도착하자마자 한달음에 미카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최소한 그것까지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제발, 카게히라. 모든 스케줄에서 너를 속박하겠다는 것이 아니야. 다만 내가 부탁한 것만은, 들어 다오. 나를 위해서." 

"응아." 

"이렇게 말하면 너도 알아듣겠지. …지금의 나는 내 생각밖에 할 수 없다. 나는, 네가 없으면 도저히 살아갈 수 없고, 네가 죽으면 저 오르페우스처럼 리라를 들고 지옥의 계단 끝까지 달려가 온 힘을 다해 하데스를 구슬릴 것이다. 미안하다, 카게히라. 나는 이기적인 자여서 내 안위, 내 보신에만 벅차 네 행복까지 고려해줄 수가 없고 그저 네가 내 옆에 존재할 것밖에 생각할 수가 없다는 것이야. 네가 곁에 없으면, 나는 영원히 살아도 산 것이 아닐 테니." 

 

미카는 숨이 멎는 것만 같았다. 간신히 온 힘을 쥐어짜 고개만 겨우 끄덕이자, 슈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미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금의 내 목숨을, 네가 쥐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 다오. 제발 나를 위해 살아가 다오." 

 

사람 하나를 카미카쿠시할 수 있을 정도의 산신조차 기로 눌러 버릴 수 있는 남자가 애원하고 있었다. 

 

 

*** 

 

 

그 후 드라마 <어둠 속의 너> 나머지 촬영분은 전부 실내 세트장으로 돌려 어찌어찌 전부 끝냈고, 그 과정에서 프랑스 출국을 한참 미뤄버린 이츠키 슈가 촬영 때마다 매번 달려와서 감독 옆에 버티고 앉아 노려보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Valkyrie의 팬들 사이로 알음알음 퍼져나가다 마지막 촬영 날 미카의 개인 SNS 계정에 슈와 함께 촬영장에서 찍은 사진이 업로드됨으로써 소문은 오피셜이 되었다. 

하지만 팬들을 기절하게 만든 것은 그 사진과 함께 올라온 미카의 한 마디였다. 

 

-촬영 내내 스승님이 한시도 내한테서 눈을 못 뗐다 아이가. 진짜 스승님은 내 없으믄 몬산데이!- 

 

도대체 몇 명이 그 말에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을지,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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