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미카] 그것은 시시껄렁한 러브코미디

※허구와 날조 100%, 공식 설정과 다른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벤트 '말하는 인형과 레종 데트르' 스토리가 포함되어 있음 

*보쿠×오레 요소 있지만 메인은 어디까지나 슈미카 

 

 

  

당신이, 좋아. 

내가 그렇게 말했을 때 당신이 지었던 표정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어서. 

 

 

***

 

 

식탁에 새로 꽂을 생화를 한아름 사들고 돌아오던 길, 자신이 세들어 사는 고풍스러운 오스만 양식 아파트의 창문을 흘끗 올려다보던 슈는 가슴이 철렁했다. 긴 머리에 우아한 원피스를 입은 여성이 수심을 띤 표정으로 창가에 앉아 있는 모습이 얼핏 보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자신과 미카가 단둘이 사는 그 집에 다른 여성이 들어올 리는 없다. 노년의 집주인도 아니고, 하물며 저렇게 젊은 여성은. 물론 슈는 알고 있었다. 그것은 얼마 전 집안 내에서 한바탕 난리를 치렀던 할아버지의 생전장례 콘테스트에 제출했던 작품, '레종 데트르'에서 사용했던 분장 세트이며 창가에 앉아 있는 사람은 당연히 카게히라 미카라는 사실을. 

하지만 슈가 움찔한 이유는 단순히 자신의 하숙집 창가에 웬 여자가 앉아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것이 처음이 아니며,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자신이 볼 광경은─이미 여러 번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익숙해질 수 없는 모습일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으흠, 어쩔 수가 없군." 

 

슈는 이마를 짚으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그만 역할에서 빠져나오라고 벌써 여러 차례 설득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미카는 툭하면 그 복장을 하고 있었다. 사실 미카가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원인을 찾아보면 슈 자신에게 있었기 때문에 그 이상 강하게 나갈 수도 없었다. 심지어 처음에는 그것을 기껍게 여겨 얼마든지 협력하겠다고 말한 것도 자신이었다. 그러나 이 상황이 벌써 몇 번째 되풀이되는지 모르고, 시간이 갈수록 슈의 가슴속에는 불안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이런 일을 전에 겪었던 듯한. 

 

 

*** 

 

 

『문을 열어 주시오, 사랑스러운 사람이여! 이다지도 나를 애타게 하다니, 그대는 정녕 장난꾸러기 요정의 현신인가 보오. 굳이 그런 심술을 부리지 않아도 나는 이미 당신의 포로인 것을! 허나 걱정 마시오, 포로로서 해야 할 강제노동이 아름다운 당신을 기다리는 일이라면 나는 영원히 즐겁게 일할 터이니!』 

 

노래하는 듯한 말투로 슈가 문을 두드리며 리드미컬하게 대사를 읊자 안에서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본래 그것은, 극중에서는 남자 모습으로 있던 미카가 다급히 가발을 쓰고 드레스를 걸치며 소란을 피우느라 내는 소리였지만 이미 인형 같은 모습으로 앉아 있는 방금 전의 상황으로 봐서는 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그저 극의 흐름을 따라가느라 하는 요식적 행위인 셈이었다. 

 

『아아, 성급한 사람! 어쩌면 그렇게나 나를 몰아붙이나요! 숙녀에게는 준비할 시간이 필요한 것을 이제 조금은 알아 주었으면 한답니다!』 

『설령 그대가 순박한 시골 처녀의 옷차림을 하고 있어도 그 눈부신 아름다움을 감출 수는 없소! 매력적인 아가씨, 나의 유일한 사랑! 어서 이 문을 열어 주시오!』 

 

그렇게 한바탕 대사가 끝나고 나서야 겨우 문이 열렸다. 밖에서 보았던 대로 가발을 쓰고 원피스를 입고 치장을 한 미카가 수줍음을 숨기고, 일부러 약간 화가 난 듯 뾰로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어쩌면 이토록 매일같이,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찾아오실 수가 있나요! 한가한 사람!』 

『당신이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내 마음을 사로잡아 버리는 바람에 나는 당신을 생각하는 것 외에 그 어떤 일도 할 수가 없소! 오오,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소! 필경 당신이라는 환상 속의 요정이 내게 무슨 마법의 가루를 뿌렸겠지!』 

 

여기서 슈가 미카를 품에 안고, 사랑이 가득한 눈빛으로 상대를 그윽하게 바라본다. 아니, 그것은 먼 이국에서 온 유학생과 홀로 고독하게 오랜 세월 살아온 인형사다. 

 

『입을 맞추어도 되겠소?』 

『Oui, monsieur. …Je t'aime.』 

 

상대가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다는 눈빛으로 품 안의 상대에게 조심스럽게 입을 맞춘다. 입술만 살짝 닿는 정도의 키스인데도 두 사람은 모두 수줍음과 행복에 파르르 떤 뒤, 살며시 서로를 바라본다. 

 

"…자, 카게히라. 이제 되었겠지?" 

"응아아… 응, 스승님." 

 

넉넉히 여유를 두고 눈맞춤을 한 후 슈가 헛기침을 하며 그렇게 말하자, 미카가 살짝 눈을 내리깔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슈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조금 구겨진 옷을 탁탁 펴고 나서 싱긋 웃었다. 

 

"학교는 잘 다녀왔나, 스승님?" 

"음. 우선 꽃병에 꽃 꽂을 시간을 좀 다오." 

 

문을 두드리기 전 옆에 내려놓았던 생화 꽃다발을 집어들며 슈가 말하자 미카가 후다닥 안으로 뛰어가 꽃병을 가져왔다. 

 

"응후후, 스승님처럼 새빨갛고 정열적인 장미구마. 내 장미 좋아한데이~. 향기도 좋구." 

"알겠으니 그만 옷을 갈아입거라. 곧 저녁식사 시간인데 그 차림으로 음식을 먹는 것은 곤란해." 

"응아~ 알았데이." 

 

다발을 풀고 병에 장미를 꽂자, 그것을 받아든 미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활짝 피어난 장미다발을 안아든 인형사 모습의 미카는 그야말로 동화책 속에 나오는 소녀처럼 사랑스러웠다. 너무나 동화 속 등장인물 같은 나머지 슈는 잠시 자신이 환각을 보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으나 다행히도 덧니를 드러내며 씩 웃는 표정이 늘 보던 미카의 그것이어서 조금이나마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래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곤란했다. 

몸을 돌려 다시 총총 안으로 돌아가려는 미카를 슈가 불러세웠다. 

 

"카게히라.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이 놀이는 이제 여기서 그만하라는 것이야. 우리는 더 이상 '레종 데트르'를 무대에 올릴 계획이 없고, 다음 작품으로 나아가야 해. 언제까지 그 역할에 발목이 잡혀 있어서는 곤란하다. 알겠지?" 

"으응…." 

 

미카의 두 어깨가 축 처지는 모습을 본 슈는 의아해졌다. 

슈는 미카를 가족이라 생각하니 이렇게 말하긴 뭣하지만 '레종 데트르'는 사실 이츠키 가문 깊은 곳의 치부와 관련된 이야기였고, 애당초 생전장례 콘테스트 때문에 불려왔을 때 미카는 가족회의에 끼지 못해 창고에서 대기하고 있었을 정도였다. 제반 사정으로 인해 슈가 미카를 끌어들여 작품을 만듦으로써 결국 내밀한 사정을 알게 된 미카를 더 이상 이츠키 가문의 외부인이라 말할 수는 없지만 어찌 보면 미카가 자기 의지로 이 집안의 문제에 끼어든 것은 아니다. 따라서 적극적으로 관여할 이유도 없고, 등장인물의 심경에 이렇게까지 공감하며 일심동체가 될 필요도 없다. 

그런데도 미카는 벌써 상연이 끝나고 몇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틈만 나면 사랑스러운 인형사 차림으로 슈를 맞이하곤 했다. 그리고 1부의 우당탕탕 러브코미디, 상대가 아름다운 아가씨라 믿어 의심치 않는 해맑은 청년이 문을 쾅쾅 두들기며 장미의 저택을 방문하는 그 장면을 자꾸만 재현하려 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 부분이 꽤나 마음에 들었나 보다, 하고 슈는 생각했고 이미 끝난 무대이긴 하나 나름의 연기 연습이 되리라는 생각에 미카의 이 '놀이'를 받아 주었다. 아름다운 인형처럼 꾸민 모습으로 자신을 맞아 주고, 가극 속 한 장면이긴 하나 사랑스럽게 입맞춤을 조르는 미카가 귀여워 사실 어느 정도는 즐기기도 했다. 이 점은 확실히,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촌극이 거듭될수록 슈는 조급해졌다. 여장을 하고, 평소에는 잘 보여주지 않는 무대 위에서의 다양한 표정으로 자신을 매료시키며 맞이하는 미카가 마치 다른 사람처럼 느껴져서였다. 

 

『나를 사랑해 주어서, 고마워요.』 

『외로운 내게 손 내밀어 준 당신. 당신이, 좋아요.』 

 

정열적인 러브레터 공세에 이기지 못하고 결국 얼굴을 내밀고 만 인형사 청년의 그 작은 연심은 사랑스러우면서도 애틋했지만, 아무리 미카가 연기한다 해도 그것은 카게히라 미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다. 슈 역시 그 인물을 사랑하는 또다른 인물을 연기하고 있지만 마찬가지로 그것은 이츠키 슈가 아니다. 물론 이츠키 슈의 할아버지도 아닌, 그 둘의 모습이 반영되어 있는 완전히 다른 인물이다. 

그런데 관객도 없는 썰렁한 복도에서 단둘이 연기를 하다 보면 마치─ 

 

"…아니, 너무 깊이 생각하는 것은 좋지 않겠어. 다음에 또 여장을 하고 있으면 당장 옷을 갈아입으라고 야단쳐야겠군." 

 

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저녁식사 준비를 하기 위해 주방으로 들어갔다. 

 

 

*** 

 

 

"응아아아~! 스승님, 오늘도 너무 멋있어서 내 진짜 심장 터지는 줄 알았데이…." 

 

가발을 벗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미카는 자기 방 침대에 누워 곰인형을 껴안은 채 몸부림치고 있었다. 

사실 미카 스스로도 어쩌다 이런 상황이 계속 벌어지게 되었는지, 그 시작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언제부터인가 인형사의 모습으로 창가에 앉아 있다가, 슈가 연기하는 유학생 청년이 문을 쾅쾅 두드리며 세레나데를 부르는 소리가 나면 다급히 뛰쳐나와 1막의 한 장면을 연기하는 것이 프랑스 체류 생활에서의 작은 즐거움이 되어 있는 것은 확실했다. 

유학생이 장미 저택의 문을 두드리는 장면은 극중에서 꽤 여러 번 등장하기 때문에 그날그날 어떤 장면이 선택될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가발을 쓰고 원피스를 입고 나오면 유학생이 달콤하게 사랑을 속삭여 주고, 이마나 뺨이나 입술에 가벼운 입맞춤을 하는 장면으로 마무리가 된다는 점이었다. 

 

"오, 오늘은, 입술, 이었제…." 

 

슈의 입술이 스쳤던 곳을 손가락으로 살짝 누르며 미카는 응후후, 하고 웃었다. 

나의 신. 나의 동경. 흠모하는 사람. 비록 가끔 귀찮을 때도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세상 끝 어디까지라도 따라갈 사람. 심지어 무대에서라고는 하나 연인으로서 연기도 했던 상대. 슈의 강력한 희망으로 프랑스까지 와서 함께 살게 된 후로 미카는 하루하루가 설레고 벅찼지만 동시에 가슴 속 어딘가에는 여전히 서늘한 바람이 부는 곳이 남아 있었다. 

입맞춤을 떠올리며 웃던 미카는 문득 그 텅 빈 공간을 느끼고 곰인형을 꽉 껴안았다. 그 공간의 모양은 곰인형처럼 생기지 않았기에, 결코 메워질 수 없었지만. 

 

"그치만, 스승님이 싫어하니께… 인자 내도 그만해야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데이, 그치만…." 

 

'레종 데트르' 연습을 처음 시작한 날, 미카는 그 서늘한 공간의 모양에 딱 맞는 열쇠를 찾은 기분이었다. 한껏 사랑에 빠진 얼굴, 발그레해진 채 자신을 향해 구애하는 상대의 모습. 

그토록 자신을 향하기를 원했던 슈의 얼굴. 

 

『오오, 사랑스러운 사람이여! 나의 연인이여! 부디 그 아름다운 얼굴을, 고운 목소리를 내게 아낌없이 베풀어 주시오! 나는 그것을 얻을 수 있다면 천금이라도, 만금이라도, 아니, 이 세상이라도 전부 당신에게 바치리다!』 

 

미카의 손을 잡고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달콤한 말을 한없이 늘어놓는 슈의 모습에 미카는 잠시 얼어붙어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자 슈가 금세 야단을 쳤다. 

 

"다음 대사! 뭘 그렇게 멍하니 앉아 있는 것이야, 설마 대본을 숙지하지 못한 것은 아니겠지?" 

"응아아, 아이다! 내 다 외웠데이!" 

 

『당신의 열렬한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얼마나 내 가슴을 뒤흔드는지, 당신은 모를 거예요. 마음씨 고운 당신… 저도, 당신이, 좋아요.』 

『아아! 아아! 저 하늘이 나를 향해 열렸구나! 새들이 우리를 위해 노래하는구나! 이토록 찬란한 햇살이 세상을 비춘 적이 또 있을까!』 

 

미카가 인형사의 역할이 되어, 인형사의 얼굴로 인형사의 대사를 읊는 순간 엄격했던 슈의 얼굴에 다시 사랑에 빠진 풋풋한 청년의 환한 웃음이 돌아왔다. 정말이지 표정 전환이 빠르고 감정 이입도 능숙한 천재 예술가 그 자체였다. 물론 직접 쓴 각본인데다 역할의 백그라운드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더 쉬울 수도 있었겠지만, 어쨌든 미카의 입장에서는─ 

한때 나즈나에게, 그리고 마드무아젤에게 쏟아지던 슈의 열에 달뜬 얼굴이 잠시라도 자신을 향한다는 기적을 미카는 믿을 수가 없었다. 

 

"응후후, 스승님…." 

 

이제 그만해야 한다는 슈의 말은 너무나도 옳았다. 슈도 미카도 곧 다른 작품을 만들고, 다른 무대에 올라야 했다. 심지어 일반공개도 되지 않은 기존의 작품에 언제까지나 얽매여 있을 수만은 없었다. 

하지만 미카에게 그것은 마치 전신을 잠식하며 차츰 스스로를 갉아먹는 달콤한 극약 같았다. 화사한 꽃의 시대. 거칠 것 없이 쏟아지는 청춘의 사랑.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인형사의 모습을 하고 있으면 유학생의 모습을 한 슈가 마음껏 속삭이는 사랑을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일 수가 있다. 타인의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거기에 완벽하게 몸을 맡기는 일이 이렇게 달콤한 줄 미카는 처음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무대에서만 허락된 일이라는 것도, 이제는 알아야 했다. 

 

"내도, 진짜, 인자 그만 해야제…." 

 

다시 한 번 곰인형을 껴안으며 미카는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 

 

 

"…! 더는 안 돼!" 

 

창가에 앉아 있는 긴 머리 여인의 그림자를 본 순간 슈는 결국 인내심이 끊어지고 말았다. 분명 그만하라고 했다. 그만하라고 그렇게나 말했다! 정말이지 예나 지금이나 자신의 말이라고는 손톱만큼도 듣지 않는, 실패작에 제멋대로인…. 

 

"농! 그 애는 인형이 아니야. 인형이 아니기 때문에 인형이어서는 안 돼!" 

 

정신없이 두 계단씩 뛰어올랐다. 이 기시감의 정체를 이제야 안 기분이었다. 

이것은 마치 지난 겨울 자신이 파리의 어느 수수께끼 같은 앤티크숍에서 선물로 희귀한 비스크돌을 사다 주었을 때, 그 인형에게 미카가 잡아먹혀 버렸던 일과 닮아 있었다. 이번에는 인형 등의 매개체가 되는 물건이 없었기 때문에 방심했지만 미카의 무시무시한 집중력을 생각하면 물건 자체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역할' 또한 얼마든지 미카를 잡아먹을 수 있었다. 

 

"카게히라! 카게히라!" 

 

슈는 문을 벌컥 열고 정신없이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더는 미카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미카가 원하는 일이었기에 작은 연극에 어울려 주고는 있었지만, 그리고 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것이 슈의 지론이었기에 무대 위에서와 똑같이 온 힘을 다해 연기했지만─어쩌면 자신이 너무나 진지하게 상대해 주었기에 미카가 그 역할 속에 더욱 빠져들었다면. 

 

"이제 그만하라고, 몇 번이나─!" 

"응아, 스승님?" 

 

창가에 앉아 있던 미카가 눈이 동그래져서 이쪽을 돌아보았다.

미카는 미카였다. 짧고 검은 머리, 호박과 유리의 눈동자, 늘 입는 어두운 빛깔의 실내복. 손에는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 대신 그 앞에 앉아 있는 긴 머리 여성은, 슈도 아주 잘 아는 인물이었다. 

 

"마담…."

"어머나, 슈. 이것 좀 보렴. 옛날 생각이 나서 한 번 입어 보았는데 어떠니?" 

 

탁자에 찻잔과 함께 놓여 있는 것은 프랑스어 초급 교본. 하숙집 주인이 가끔 미카에게 기초 회화를 가르쳐 준다는 사실은 슈도 이야기로 들어 알고 있었지만 실제 그 모습을 마주친 것은 처음이었지만 그보다도…. 

 

"그 아이가… 마담께 그 옷을 권했습니까?"

"응, 맞아. 작을까 싶었는데, 그래도 역시 남자아이 사이즈여서 그런지 어렵지 않게 입을 수 있었어. 후후, 꼭 숲 속에 혼자 살던 시절이 떠오르지 뭐니. 그때는 이런 옷, 참 많이 입었는데." 

 

슈가 창 밖에서 본 것은 미카가 맡은 역할의 '레종 데트르' 의상을 입은 하숙집 주인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슈는 하마터면 다리에서 힘이 풀릴 뻔했지만 일단은 마음이 놓였다. 

미카가 그 옷을 다른 누군가에게 주었다는 사실이, 슈는 참을 수 없이 기뻤다. 

 

"그럼 미카쨩,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까? 후후, 이 할머니한테 예쁜 옷을 입을 기회를 줘서 정말 고마워."

"응에에, 프랑스어로 그래 길게 얘기하시믄 내는 몬 알아듣는데이… 응아, 내도 메르시라예!" 

 

하숙집 주인이 미소를 지으며 방을 나가자 미카는 성실하게 허리를 꾸벅하며 배웅했다. 문이 닫히고 조용해진 방에는 아직도 계단을 뛰어오르느라 가쁜 숨이 덜 가라앉은 슈와, 그런 슈를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미카만이 남았다. 

 

"스승님, 근데 와 그래 정신없이 뛰 들어왔나? 머 급한 일이라도 있었나?" 

"아아, 카게히라." 

"응아, 내 카게히라다. 와 그라는데?" 

"너는, 정말, 나를, 얼마나 휘둘러야…!" 

"으응…?" 

 

슈는 비틀비틀 다가와 미카의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아직도 비쩍 마른 그 두 다리를 붙잡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카게히라. 나는, 이츠키 슈다." 

"그거는 내 아무리 멍충해도 안데이. 가, 갑자기 머선 자기소개고?" 

"그래, 자기소개를 하마. 나는 이츠키 슈, 일본에서 프랑스로 유학 온 유학생은 맞지만, 극중의 등장인물과는 다르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정확히 알고 있는 자라는 것이야." 

"…?" 

"나의 그 아이는 마치 낮잠에서 갓 깬 검은 고양이처럼 멍한 표정을 하고 있을 때가 많지만, 그런 주제에 홀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깊은 어둠 속에 침잠해 버리는 바람에 때로 나조차 그 속살을 건드릴 수도 없다는 두려움에 휩싸이게 만들곤 하지. 외부의 위험에서는 지켜줄 수 있어도, 내면에서 깊은 늪에 빠져들 때는 내가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다는 게 너무나 고통스러운… 아니, 내 곁에 있는데도 곁에 있지 않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의 무력감은, 이루 말로 다 설명할 수가 없어." 

"스승님…?" 

"제발, 카게히라. 내가, 네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사랑을 속삭이게 하지 말아 다오." 

 

미카의 두 다리에 거의 매달리다시피 하던 슈가 고개를 들고 위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미카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내뱉기 부끄러워 계속해서 피하던 말이었지만, 너는 말로 정확히 표현해 주지 않으면 알아듣지 못하는─ 아니, 어폐가 있군. 알아듣기를 거부하는 골치 아픈 녀석이니 부끄러움을 무릅쓰고서라도 너를 붙잡기 위해서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겠다. 나는, 이츠키 슈는, 다른 누구도 아닌 카게히라 미카의 사랑을 갈구한다고." 

"─!"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네가 그것을 원하기에 장단을 맞추어 주었다만 이제는 나도 한계다. 카게히라, 제발. 나를 맞이할 때 다른 사람의 모습을 하고 나오지 말아 다오. 있는 그대로의 네 모습으로,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 다오." 

 

두 눈썹이 축 처진 채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슈의 얼굴에 미카는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저 웃으면서 자신을 바라봐 주었으면 했다. 희열에 들뜬, 행복한 표정을 지어 주었으면 했다. 

경애하는 스승이 이렇게 괴로워하게 만들 생각은 없었다. 

 

"스승님이 인자 하지 말래서 내도 안 할 생각으로 아까 마담한테 옷 드린 거기는 한데… 미안했데이, 스승님. 내 스승님이 그래 싫어하는 줄도 모르고, 걍 혼자만 들떠서…." 

 

미카가 조심스럽게 제자리에 주저앉자 슈는 바닥에 앉은 채 미카의 야윈 몸을 마치 낡아빠져 부슬부슬 떨어질 것만 같은 테디베어 인형처럼 조심스럽게, 소중하게 껴안았다. 

 

"너는 자유로우니 어디든 갈 수 있고, 원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지. 그러니 나는 그 전부를 파트너로서 언제나 응원하고 지지해 줄 것이야. 하지만 카게히라, 단 하나 내가 어찌해볼 수 없는 것은…." 

 

미카의 코끝에 자신의 코끝을 살짝 닿았다 뗀 슈가 두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말했다. 

 

"네가, 너 자신을 소중히 하지 않고 함부로 대하는 일이다. 이번 일도 그래. 너 스스로는 사랑받을 가치가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기에, 극본 속에서 '사랑받는 역할'인 인형사가 되려 했겠지. 이 작은 머릿속에서 무슨 생각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제는 나도 조금 알 것 같거든." 

"응아아…." 

 

미카가 끙끙거리자 슈가 후, 하고 웃었다. 

 

"카게히라. 유학생과 인형사가 아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쥬뗌므'도, '당신이 좋아요'도 아니야. 우리의 말로, 우리의 사랑을 주고받는 일이지. 이젠 그 극본에서 나오도록 해." 

"아, 알았데이…." 

 

문득 미카가 슈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라믄, 스승님은 어떤 말로 내한테 사랑을 표현할 낀데?" 

"그건…." 

 

그 질문에는 당연히 한 가지 대답밖에 없다. 

 

"카게히라, 나는 네가 내 곁을 떠나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행복해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불행해지더라도, 괴롭더라도, 세상의 모든 부정적인 것들을 전부 내 옆에서 겪더라도 절대 내 곁을 떠나지 말아 다오. 그래, 설령─지옥까지라도." 

"응후후, 물론 지옥까지 함께해야제." 

 

그것은 제삼자가 보기에는 너무나 우스꽝스러운 한 편의 코미디 연극. 

그러나 당사자들에게는 그야말로 온 진심을 다한, 평생의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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