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스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거짓말쟁이

23년 1월 29일 투비 업로드 연성 재업

카나치아 단문

즈! 시점

만우절 소재

대충 혁명 이후인 듯 한 시점과 날조


🌸



“치아키, 왜 오늘은 ‘나도.’라고 해주지 않아요?”

4월 2일이었다. 종처럼 올망졸망 매달린 벚꽃망울들이 하나 둘씩 톡, 톡 터지며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할 때다. 산발하는 벚꽃의 합창 속에서, 한창 흐드러진 계절감은 장소와 시간을 가리지 않고 어디서든 움트며 피어올랐다. 아스라이 먼 하늘에 흩어놓은 구름들의 행진에서부터, 유메노사키의 뒷담 아래 옹기종기 모인 봄들꽃에서부터, 바다로부터 불어온 소금기를 머금은 온화한 바람으로부터. 

더 범위를 넓히자면 이제 막 입학해 불타오르는 신입생들의 눈동자에서부터, 혁명 이후 감돌기 시작한 묘한 활기로부터, 이 분위기면 정말로 무언가 할 수 있겠다는 막연한 자신감으로부터도. 

그런 동시에, 오늘은 거짓말쟁이들의 날… 하루 뒤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그게 문제였던 것 같다고, 카나타의 불퉁한 얼굴을 바라보던 치아키는 생각했다. 


4월 1일은 평소와 같았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치아키는 평소처럼 농구부 아침 연습을 하고, 평소처럼 수업을 듣고, 레슨 커리큘럼을 짜고, 일을 모으고, 스케쥴을 관리했다. 정식으로 ‘리더’를 맡은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그 모든 일들이 물흐르듯 자연스러워, 치아키는 여기까지 적응해낸 스스로가 조금 대견스러웠다. 이제 5인 체제이니, 완벽한 전대 히어로가 아닌가! 열심히 하면 이대로 더더욱 발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니 우선은 후배 양성에 힘쓰자. 다들 재능있는 아이들이니 내가 잘 이끌기만 하면 세상에서, 아니, 우주에서 가장 빛나는 별이 될 것이다. 유성대의 퍼포먼스는 기본 체력을 요하는 커다랗고 격한 동작이 많으니 우선 거기서부터 다듬어서……. 

수많은 생각들이 이리저리 기틀을 짜며 움직이는 동안, 치아키의 걸음은 습관처럼 분수대 근처로 다다랐다. 요 근래의 유메노사키는 활기가 넘쳐서, 어디서든 무언가에 열심인 아이들이 심심찮게 보이는데도 분수대 주변은 물 속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누구 때문인지 너무 잘 알 것 같아 괜히 입가로 웃음이 튄다. 

최근 치아키에게 생긴 새로운 버릇이었다. 생각이 많아지면 이리로 다다르게 되는 걸음이. 봄인 주제에 눈꺼풀 위를 덮는 햇빛은 참으로 눈이 부셔서 치아키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한참 멈춰서서 하늘만 바라보고 있자니, 분수대 쪽에서 느릿하게 튀어나온 흰 손이 팔랑팔랑 흔들리는 게 보였다.

“치아키, 「또」 생각 중인가요?”

”아, 으응. 카나타는 또 푸카푸카 중이구나!“

헤헤, 그럼요. 저는 물이 없으면 살 수 「없」으니까요~ 능청스레 대답하는 얼굴은 봄의 햇살만큼이나 화사하다. 이미 하늘에서 시선을 떼었음에도, 치아키는 찌푸린 눈살을 펼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다. 그에게는 둘 다 똑같이 눈이 부셨다. 차마 피할래야 피할 수 없다는 점까지 합쳐서 더더욱. 

평소에 하던 것처럼 척척 다가가 분수대의 대리석에 걸터앉는 과정이 어쩐지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치아키가 그의 친우를 향해 품은 풋풋한 짝사랑을 알아차렸을 때에는 꽤 기한이 지나있었다. 자각한 순간, 저도 모르게 품은 감정이 너무 무거워서 땅에 제대로 서있는 것조차 어려웠을 정도로, 오래. 카나타만 보면 심해에 갇힌 것처럼 울렁거리고, 토할 것 같으면서도 발바닥이 물보라에 간질여지는 듯한, 한없이 고양되면서 정처없이 가라앉는 듯한, 심장이 한 떨기 꽃으로 화한 듯한, 그것을 똑 따 네게 바치고 싶어 안달이 나는 듯한 이 감정을 짝사랑이라 명명한 순간― 치아키는 그 꽃을 꺾어냈다. 

스스로 댄 이유는 수만 가지였는데, 결론은 하나였다. 치아키는 두려웠다. 가뜩이나 중요한 시기다. 같잖고도 이기적인 사랑고백으로 일을 망치고 싶지 않았고, 카나타와의 소중한 관계도 그것 하나로 어그러뜨리고 싶지 않았다. 친구여도 좋으니 카나타와 계속 함께하고 싶은 패배적 욕망이 있었다. 마음 한구석에서 ‘부딪혀 깨지더라도 네 진심을 전하는 것이 맞지 않느냐’고 히어로가 외쳤지만 결국 자기합리화가 이겼다. 카나타와는 앞으로도, 졸업하고서도 보고 싶으니 어색해질 껀덕지는 남기고 싶지 않다는, 뭐 그런. 

하지만 감정이라는 게 어떻게 그렇게 하루아침에 멸종되겠는가. 

게다가 카나타는 치아키에겐 특히나 치명적일 습관을 딱 하나, 가지고 있었다. 

“치아키, 오늘도 좋아해요~”

치아키를 바라보는 카나타의 유순한 눈꼬리가 마시멜로우처럼 달큰하게 녹아내렸다. 치아키는 쾌활하게 웃으면서도, 차마 그 미소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어 괜히 머리를 긁적였다. 슬쩍 손을 내리며 분명 화끈 달아올랐을 귀 끝을 가리는 건 치아키에겐 이제 일도 아니었다. 

그래, 카나타는 ‘좋아한다’는 말을 너무 많이 했다. 해양생물이 좋고, 물도 좋고, 푸카하기 좋은 날씨가 좋고, 스시를 먹는 게 좋고, 바다도 좋고……. 하여간 많이 했다. 그를 향한 말이 아니라는 건 치아키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는데도, 곁에서 그 나긋하고 부드러운 어조로 저런 말을 들어버리면 어쩔 수 없이 심장에서 설렘이 파도처럼 일어나 목울대까지 내달렸다. 그럴 때마다 짝사랑은 다시금 빼꼼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면 치아키는 하루에도 몇 번씩 새싹의 뿌리를 뽑아내야만 했다. 그것도, 치아키에겐 이제 일도 아니었다. 매사에 그럴 바에야 차라리 ’나도!‘하고 장난스럽게 넘기면 어떠려나, 하는 생각도 종종 들었지만……. 애초에 그게 가능하다면 모리사와 치아키가 아니다.

그래서 평소처럼 ‘그래, 고맙구나! 하지만 그런 말을 사람에게 할 때는 조심히 해야한다!’ 정도로 입을 열려고 했다. 그랬는데. 

“아.”

“왜요, 치아키?”

“오늘이 며칠이더라.”

오늘이요? 아마 4월의 「첫날」이던가요. 카나타의 말 한마디에 치아키는 마음이 두둥실 부풀어올랐다. 만우절이구나, 오늘. 치아키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거짓말을 해도, 짓궂은 장난을 쳐도 ‘만우절이니까!’ 정도로 넘어갈 수 있는 날이 아니던가. 만우절이니 장난인 척 진심을 전하는 순정만화 클리셰는 이제 클리셰조차 아닐 정도로. 자각하고나니 있는지도 몰랐던 욕망이 툭, 고개를 내밀었다. 빛의 강처럼 흐르는 실크 사이의 거슬리는 실밥처럼. 

그러면, 그렇다면. 

하루 정도는…… 괜찮지 않나? 

어차피 카나타는 신경쓰지 않을 것이다. 치아키는 주제를 아는 편이었다. 카나타는 인간보다 해양생물에 더 관심이 많았다. 평소와 다른 답에 조금 놀라더라도, 금방 후후~ 하고 말지 않을까. 그러면 그 무신경에 기대어 조금만 이기적으로 굴어보아도 괜찮지 않을까. 신경쓰지 않는 건 조금 아팠지만, 그 정도 아픔이야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을 정도로 치아키는 이 널을 뛰는 감정에 익숙해져 있었다. (라고 스스로는 생각했다.) 

그래서.

치아키는 한참 말을 고르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선선한 봄날씨에도 굴하지 않고 열이 잔뜩 오른 두 뺨에 세상이 다 어지러웠다. 곁에서 카나타의 의문 가득한 기척이 느껴졌다. 분명 향하는 시선은 한 사람 분인데도, 치아키는 순간 온 세상이 그를 집중하고 있는 것만 같아 아득해지고 만다.

그냥 내뱉어버리자. 하루만 솔직하면 오늘은 정말 행복할 거야. 치아키가 결심하듯, 눈을 꾹 감았다.

“나, 나도…….”

“네에?”

“나도… 좋아한다.”

카나타는 순간 말이 없었다. 치아키는 더더욱 고개를 숙였다. 죄를 시인하는 사람처럼 겨우겨우 쥐어짠, 볼품없는 고백에도 아랑곳않은 카나타는 휘둥그레 뜬 눈을 깜박이지도 않은 채 치아키를 쳐다보다가, 곧 만면에 꽃을 피우듯 웃었다. 은방울을 울리는 듯한 웃음소리에 치아키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제 고백에 저가 잡아먹혀 허둥거리는 사이, 문득 분수대를 짚은 손등 위로 열을 띤 하얀 손이 겹쳐지는 게 보였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든 순간, 치아키는 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카나타와 시선이 마주쳤다. 

아. 치아키는 비명을 지를 뻔한 입을 가까스로 다물었다. 

카나타는 마치, 치아키가 처음 그에게 소원을 빌었을 때처럼 웃고 있었다. 찬란한 햇살이 후광처럼 카나타의 실루엣을 휘감고, 발갛게 꽃이 핀 뺨을 어그러뜨리며 카나타는 처음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웃었다. 좋아서 스스로도 어쩔 줄 모르겠는 듯, 치아키의 손을 쥔 손가락이 분주하게 손등을 어루만진다. 그 애의 흰 손가락이 힘줄 사이를 쓰다듬을 때마다 치아키는 가슴에 열꽃이 피는 것만 같아 숨을 삼켰다. 카나타가 재차 입을 열었다.

“진짜로 「좋아」해요?”

“으, 으응.”

“진짜로요?”

“그렇다니까.”

정말이죠? …그래. 그러니까 그만 좀 물어봐라! 

그러면 치아키도 저랑 「같은」 거군요. 

같은 건 「기뻐」요. 

솜사탕을 베어문 듯 달달한 목소리와, 오롯이 저만을 눈에 담는 카나타 때문에 정신이 없던 치아키는 그 대화 중 가장 중요한 내용을 놓치고 말았다. 그래서 치아키는, 직후 용기를 내 (아무튼 나쁜 반응은 아니어서.) 카나타의 손을 깍지껴 쥐고 커다랗게 웃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한 번 더 나도! 라고 말하고, 그날 하루종일 달라붙는 카나타를 스스럼 없이 받아주면서 친구들이 흐린 눈으로 고개를 저을 정도로, 후배들이 ‘아니… 아무리 그래도 너무 친한 거 아니냐고요.’ 라고 할 정도로 좋아한다는 말을 남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만이니까, 오늘 감정을 다 털어내고 이제 아닐 사람처럼, 그럴 예행연습이라도 하듯 철저하고 어수선하게 진심을 담아 부케처럼 카나타에게 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쨋든 만우절은 하루 아닌가. 

그래서. 

그리하여 4월 2일이었다. 

치아키는 자정이 지나는 순간까지도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내린 거짓말쟁이 형에 취해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고백을 받아준다는 건 이런 기분이구나. 함께 애정을 나눈다는 건 이렇게나 기쁜 거구나…. 사실 하교하는 순간에는 이제 끝이라고 생각하니 막연하게 가라앉았었는데, 막상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자니 차라리 이 편이 낫다는 생각도 얼핏 들었다. 이 이후 닥치는 일들은 전부 치아키, 본인의 책임이겠으나 기한이 하루에 불과하더라도 고백이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했으니 이만하면 됐다, 싶었다. 

앞으로는 조금 덜 아플 것 같았다. 

카나타를 이용한 것 같아 양심이 찔렸지만, 으음……. 그 녀석은 워낙에 속을 알 수 없으니까. 당장 아침에 만나 답이 달라지더라도 조금 신경쓰다 말지 않을까. 그 즈음, 채 알아차리지 못했던 묘한 위화감이 치아키의 가슴께에 고였으나 치아키는 애써 그것을 외면했다. 아무래도 오늘 하루종일 고백을 하고 다닌 부작용으로 희망이 생긴 건가, 어림짐작하며 무의식의 한 켠으로 밀어넣었다. 후련해서 그런 것이라고 스스로를 세뇌하면서. 

4월 2일, 치아키가 처음으로 카나타를 마주친 건 늦은 점심시간이었다. 기획서를 작성하다 점심을 놓칠 뻔해서 먹는둥마는둥 쓸어넣고 왔더니 속이 다 더부룩해 조금 걸어야겠다, 싶어 정원으로 발을 들이자마자 옷을 축축하게 젖힌 카나타와 딱 마주친 것이다. 

치아키는 순간 어쩔 줄을 몰랐다. 잠깐 인사를 망설이는 사이, 카나타의 녹안이 찬란하게 휘어졌다. 잔뜩 볼을 붉힌 카나타가 이름을 부르며 제 품에 뛰어드는 순간까지도 치아키는 어쩔 줄을 모르고 서 있었다. 

“치아키이, 오늘따라 「멍」하네요. 무슨 일 있나요?”

“아니, 그런 것은 아니다만……. 이 녀석, 옷이 다 젖었구나! 아무리 봄 날씨가 따뜻해도 이러고 돌아다니면 감기에 걸릴지도 모른다!”

“에에, 신은 「감기」에 걸리지 않는다구요~”

“아직도 그런 소리를.”

우웅, 그보다, 치아키. 

애교를 부리는 동물처럼 카나타의 말꼬리가 사근사근하게 늘어졌다. 치아키는 순간 몸을 굳혔다. 그런 움직임마저 옭아맬 듯 치아키의 허리를 감싼 카나타가, 가슴에 턱을 대고서 치아키를 올려다본다. 늘 동그랗게 서서 하늘대는 더듬이가 치아키의 턱끝을 간지럽혔다. 숨이 막혔다. 

“오늘도, 좋아해요. 정말 「많이」요.”

순간, 치아키는 차라리 익사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것 또한 치아키의 책임이었다. 거짓말쟁이의 날이 끝났으니 치아키도 다시 카나타의 친우로 돌아가야 했다. 뻣뻣하게 굳은 입꼬리를 애써 끌어올리자니, 바라보던 카나타의 시선이 물음표에 점을 찍듯 기울어진다. 그 말간 눈동자를 마주하며 치아키는 속으로 역시 이게 맞다고 중얼거렸다. 카나타는 아무 것도 모를테니까. 겁을 먹는 게 일상이 되어 제대로 마주하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요 녀석, 고맙지만 말이지.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라고 했지 않나!”

네? 망연히 흩어지는 카나타의 말 끝을 붙잡기에 치아키는 이 순간 너무나도 위태로웠다. 카나타가 무턱대고 쥐어주는 애정이 치아키에게는 한없이 소중하고도, 가볍게 느껴져서. 그래도 저가 아니라면 누가 카나타에게 ‘친밀함과 특별함의 차이’ 같은 걸 일장연설 늘어놓겠는가. 어제 느꼈던 단 맛이 입 안에 뒤끝처럼 남은 기분이었다. 치아키는 늘 짓던 든든한 히어로같은 웃음으로 그것을 삼켜냈다. 

“하지만 보내주는 성원에 보답하는 것도 히어로의 일 중 하나! 카나타, 그런 의미에서 오늘 레슨 말이다……,”

“치아키.”

카나타의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치아키가 눈을 크게 떴다. 

“좋아한다구요.”

“으, 응. 방금 들었다.”

“……좋아한다니까요, 치아키.”

“음, 고맙다! 그치만, 그……,”

슬슬, 놔주었으면 좋겠는데. 

카나타가 젖었던 만큼, 붙어있던 치아키도 젖어있었다. 허리를 잡힌 탓에 상의는 이미 축축해져 차라리 새 걸로  갈아입는 게 나을 정도였다. 피부에 딱 달라붙은 홑겹을 사이에 두고 맞닿은 살갗의 감촉이 치아키에게는 지나치게 생경했다. 점차 커지는 심장소리가 카나타에게 들릴 것만 같아 자꾸만 조급해져 치아키는 몸을 뒤틀었다. 카나타는 어림도 없다는 듯 흥, 콧방귀를 뀌더니 그대로 치아키를 밀어 넘어뜨렸다. 

우왓, 카나타! 치아키가 짧게 소리치자마자, 하늘과 땅이 뒤집히더니 머리 뒤를 단단한 손이 받쳐주는 게 느껴졌다. 풀썩 쓰러지자 싱그러운 풀내음이 코 끝을 스쳤다. 당장 눈을 마주보고 사람을 함부로 밀면 안된다고 말해줘야 하는데, 어째서인지 치아키는 이대로 눈을 뜨는 게 너무나도 두려웠다. 애꿎은 잔디만 한 움큼 쥐며 꼼질대고 있으니 머리 위로 카나타의 웃음이 나지막이 흘러 치아키의 귓가로 떨어졌다. 

“치아키.”

“왜, 자꾸 부르나.”

“치아키는 「바보」에요.”

뭐? 순간, 치아키는 발치에서 물이 찰랑이는 소리를 들었다. 어젯밤 느꼈던 위화감이 순식간에 불어나 치아키와, 치아키를 두 팔 사이에 가둔 카나타를 전부 끌어안았다. 반사적으로 눈을 뜬 치아키의 시야 가득 카나타의 불만스런 얼굴이 들어찼다.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카나타는 왜인지 잔뜩 심통이 난 듯 했다. 

“치아키, 왜 오늘은 ‘나도.’라고 해주지 않아요?”

“그야…….”

어제는 만우절이었고, 나는 그걸 이용해 아무 것도 모르는 네게 알량한 고백을 전했을 뿐이니까. 진심을 숨기는 건 익숙하지만 가끔 힘이 들게 벅찼으니까. 그래서 어제라도 숨통 한 번 틔워보겠다고 밀어붙인 거라서. 하지만 오늘은 만우절이 아니니까 다시 우리가, 내가 정의한 관계로 돌아가야 해서.

어느 것도 꺼낼 수 없는 말들일 뿐이다. 

한참 망설이다 결국 입을 다물고 만 치아키를, 카나타는 답답하고 한심한 눈초리로 바라보다가 이내 몸을 숙여 끌어안았다. 하아, 귓가를 스치는 한숨에 치아키만 괜히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이번에는 꽤…… 「기대」했는데 말이에요.”

“뭐…를?”

“하지만 치아키는 정말이지, 겁쟁이에요. 「반성」하세요.”

“미, 미안하다.”

괜찮아요, 치아키. 카나타가 다 안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럼에도 치아키는 여전히, 헤어나올 수 없는 묘한 위화감에 허우적대고 있었다. 갈피를 잡을 듯 말 듯 헤메는 갈색 눈동자를 바라보는 카나타의 시선이 한없이 가라앉았다. 치아키가 아직은 가늠할 수 없는 깊이로. 

“저는 기다리는 건 「익숙」하거든요.”

그래도, 너무 기다리게 하면 안 돼요. 제가 「나쁜 아이」가 되어버리면 치아키도 곤란하죠? 조곤조곤 속삭이며 한껏 애정을 담아 웃으면, 치아키는 언제 그랬냐는 듯 굳어있던 얼굴을 무너뜨렸다. 잔뜩 붉힌 얼굴로 고개만 연신 끄덕이는 걸 보니 아무래도 헷갈리는 모양이라 카나타는 또 한숨만 푹푹 쉬었다. 

그치만 괜찮았다.

정말로, 기다리는 건 익숙할 뿐더러, 그 대상이 치아키라면 카나타에겐 일상이나 다름 없었다. 반응을 보아하니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될 것 같기도 하고.


남은 건 치아키가 스스로 깨닫고 품에 안길 때까지 두드리는 것 뿐이다. 

다시금 치아키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서, 카나타는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미소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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