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c.

단언의 붕괴 下

녹턴(2020), 카림 with 디디


대화를 주고받지 않는 날이 늘었다. 주고받는 대화라 해 봐야 아주 간단하고 일상적인 것 정도가 다였다. 그러나 딱히 서로를 미워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화를 내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같은 공간을 공유하며 사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가 서로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일은 삼가자 말했지만, 카림은 밖으로 나도는 일이 늘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차오르는 그에 대한 생각을 다른 인간들로 잊어보고자 했다. 늦은 시간이 다 되어서야 집에 돌아오곤 했다. 집에서 그와 얼굴을 맞대고 있는 것이 불편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카림의 태도에도 별다른 말을 덧대지 않았고 이전과는 달리 미적지근하게 반응하는 게 다였다. 마치 선을 그어놓고 더는 넘어오지 않으려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여러 날이 흘렀다. 카림은 우습게도 밤잠을 설치는 날이 늘었다. 머리가 복잡해 쉽게 잠에 들 수 없었다. 그의 존재가 자꾸만 벽을 흔들었다. 굳고 단단해 흔들릴 일은 영영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벽이 흔들리는 것을 카림은 그저 막지도 못한 채 지켜볼 뿐이었다. 자신이 직접 꽂았던 디디 로렌스의 깃대는 이제 제 의지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카림은 디디 로렌스의 존재를 제게서 지워낼 수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깨달았다. 그를 연인의 자리에 눌러 앉히고 싶다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가 선을 그어놓고 물러서버렸는데.

카림은 늦게 집에 들어와서도 자지 못하는 날이 생겼고, 그럴 때면 거실에 앉아 책을 보다가 혹은 티비를 보다가 겨우 잠에 들곤 했다. 오늘도 여지없이 그렇게 새벽녘이 다 되어서야 선잠에 들었다. 그러던 중 카림은 문득 인기척을 느끼고 잠에서 깼다. 무지근한 감각으로 미루어 보아 그리 오래 잠들어 있었던 게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몽롱한 정신이 완전히 돌아온 것은 아니어서, 눈을 감은 채 둔한 머리로 이 집의 유일한 동거인인 그가 출근을 위해 일어났다는 것을 뒤늦게 떠올렸다. 소리를 죽인 발걸음이 소파로 오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의식이 아주 조금 더 명료해졌다.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 입술 위로 부드러운 체온이 닿았다 멀어졌다. 카림이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 떴다. 이건 정신을 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소파 앞 티테이블에 엉덩이를 걸친 그가 보였다.

“……뭐한 거지?”

“그냥 궁금해서 해봤습니다.”

이게 말인가. 카림은 어이가 없어 남아있던 잠이 싹 달아났다. 누운 채 그를 올려다보다 일어나 앉았다.

“나도 궁금한데.”

카림이 그의 턱을 붙잡고 입술을 겹쳤다. 부드러운 입술을 핥고 가른 다음 가볍게 입안을 휘젓고야 떨어졌다. 지근거리에서 잠시 그의 엷은 황갈색 눈을 들여다보다 턱을 놓아주었다.

“궁금한 건 해결 됐습니까?”

돌아오는 반응이 시니컬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몸을 일으킨 그가 출근 준비를 위해 방으로 돌아갔다. 카림은 조금 짜증이 솟았다. 저럴 거면 입은 왜 맞췄느냔 말이다. 남아있던 어이마저 완전히 상실한 카림이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올렸다. 다시 잠에 들기는 그른 것 같았다. 얼마 뒤 출근 준비를 마친 그가 자신의 방에서 걸어 나와 주방으로 향할 때까지, 카림은 소파에 앉아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책을 펴들고 있었다. 머리가 복잡해 한 문장에서 좀체 다음으로 넘어가지지가 않았다. 카림이 책과 씨름을 하는 사이 그는 가방을 챙겨들고 현관으로 향하고 있었다. 카림은 마치 남을 보듯 짧게 그를 일별하고 시선을 거뒀다.

그가 빠져나간 집은 금세 고요해졌다. 지금까지 살아온 거의 대부분의 세월동안 이게 당연한 광경이었는데, 정적이 묘하게 적적했다. 읽히지도 않은 책을 들고 씨름하길 포기한 카림이 손에 쥐고 있던 책을 티테이블 위로 툭 떨구듯 내려놓았다. 물 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일으켜 실내용 슬리퍼에 발을 끼워 넣고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모처럼 약속이 잡히지 않은 날이었으나 더 잠을 자긴 글렀으니 가볍게 조깅이라도 하고 오는 게 생산적일 것 같았다.

그날 저녁, 카림은 그와 저녁식사를 함께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밤늦게 귀가했던 최근의 행적을 생각한다면 드문 일이었다. 때문에 그의 시선은 종종 확인하듯 카림의 얼굴에 머물렀다 떠나갔고 카림은 눈을 내리깐 채 묵묵히 식사에만 집중할 뿐이었다. 조그맣게 식기가 달그락거리며 둘 사이의 침묵을 메웠다.

“오늘은 안 나갔네요.”

“음.”

“…하지만 요즘 자주 나가는 것 같은데…… 누구 생겼습니까?”

카림이 눈을 들어올렸다. 찰나간 마주치는가 싶었던 시선이 어긋났다. 그가 눈을 내리깔았기 때문이다. 어딘지 모르게 질문한 것을 후회하는 눈빛 같았다. 카림은 궁금해졌다. 자신의 대답이 그에게 무슨 의미를 갖는지.

“그게 왜 궁금하지?”

“키우던 개도 집에 안 들어오면 당연히…….”

“이제 눈도 안 마주치기로 한 건가?”

그제야 눈이 마주쳤다. 짜증이 서린 얼굴을 향해 카림이 실소했다.

“디디 넌 대체 나랑 뭐가 하고 싶은 거지?”

뭐가 하고 싶기에 자꾸 사람을 헷갈리게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무 것도 안 하고 싶습니다. 당신만 좀 일찍일찍 들어오면 아무 문제없어요.”

“왜지?”

“내가 자꾸 잠에서 깹니다.”

거짓말이다. 카림의 방과 그의 방은 붙어있지 않았다. 애초에 방음이 허술한 집도 아니었다. 성의 없는 이유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작 그런 성의 없는 이유를 붙일 정도로 자신이 성가시다는 의미인 것 같아 카림이 짜증스러운 얼굴을 했다. 저런 상대를 연인의 자리에 앉히고 싶다고? 지나가던 개도 웃을 법한 황당한 이야기였다. 마침 식사를 끝마친 카림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짧게 따라붙는 시선을 무시했다.

시곗바늘이 자정을 가리킬 무렵 카림은 자신의 성으로 향했다. 그와 한 공간에 있다는 게 자꾸만 짜증이 났기 때문이다. 그에게 화가 났고, 실망스러웠다. 유치하게도 그가 자신으로 인해 골머리를 앓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카림은 일언반구도 없이 자신의 성에 틀어박혔다. 고서적과 자신의 기록물 그리고 최근의 책들을 한데 모아둔 커다란 서재에서 손에 집히는 대로 책을 집어 들고 책장을 넘겼다. 여전히 눈에 들어오는 문장은 없었다. 밤이면 억지로 잠을 청했으나 줄곧 피로했다. 꼬박 나흘의 시간을 그렇게 보낸 뒤에야 카림은 뉴욕의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저번에 했던 얘긴 어디로 흘려들었습니까?”

마찬가지로 피곤해 보이는 그의 얼굴을 보는 것이 어이없게도 만족스러웠다. 할 말이 가득한 그 눈을 바라보다 카림은 제 얼굴을 한 차례 쓸어내렸다. 사실 피곤한 것은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는데 너는 왜 올 생각을 안 하지?”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지난 나흘간 여러 번 곱씹은 의문이었다. 그가 사라질 때 메모를 끼워두었던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속 아브락사스의 구절을 말하는 거였다. 그는 제 손으로 만들어낸 악마이다. 신이 인간을 빚어냈듯이, 자신은 그를 악마로 빚어낸 셈이다. 제게서 벗어나는 것으로 알을 깼으면 당연히 다시 제게로 날아와야 하는 게 아닌가? 뻔뻔하고 거만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었지만 카림은 본디 거만과 뻔뻔함을 등에 업은 악마이다. 카림은 의문을 품은 얼굴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황갈색의 홍채가 시시각각으로 붉어졌다 돌아오길 반복하고 있었다. 질문을 듣고 무언가 복잡한 감정을 느끼긴 느끼는 모양이었다.

“신이 바쁘셔서요.”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카림이 듣고 싶었던 대답은 아니었다. 그렇게 자꾸 빠져나가겠다는 말인가. 다시 평정을 찾은 눈이 고요했다. 가만히 시선을 마주치던 카림이 자신의 방을 향해 돌아섰다. 그가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자신이 안 바빠지면 되는 일 아니겠는가. 그 길로 카림은 칩거 생활을 시작했다. 밖으로 나돌았던 것이 거짓말인 양 집 안에서만 생활했다. 시시때때로 그를 눈으로 좇았다.

“진짜 왜 그럽니까?”

닷새였다. 꼬박 닷새가 되던 날, 그가 참지 못하겠다는 듯 물었다. 식탁 의자에 앉아 느긋하게 잡지책이나 넘겨보던 카림은 맞은편 자리를 빼 앉는 그의 말에 고개를 들고 천연덕스럽게 되물었다.

“내가 뭘?”

“하나만 하지, 난봉꾼 노릇을 하던 한량 백수 노릇을 하던 하나만 해야 될 것 아닙니까?”

개구리가 올챙잇적 생각 못 한다더니 딱 그 짝이었다. 찾아오지 말라고 했다가 정말 안 찾아가니 무책임하다 했던 그의 타박이 떠올랐다. 저가 하면 괜찮고, 내가 하면 안 된다는 건가. 또? 자신의 행동이 정말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모르는 게 아닐 텐데 말이다. 카림이 왈칵 짜증을 냈다.

“아직도 입력이 안 되나? 오라고, 나한테.”

“무슨 소릴 하고 있는지 스스로 알고는 있습니까?”

“아주 잘 알고 있지. 네 세계에 나만 두길 원한다는 말이야. 언제까지고.”

모호한 표정의 그가 말했다. 알다마다. 카림은 자신이 하고 있는 말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아마 서로에게 남은 무한에 가까운 시간들이 걱정되는 것일 터였다. 일반적으로 만남의 종착지는 결국 이별이었으므로. 그러나 카림은 그를, 디디 로렌스를 손에 쥔다면 다시는 놓을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미래는 불확실한 것이다. 현재에 충실해도 모자랄 시간을 불확실성의 연속인 미래를 위해 쓰는 것이 의미가 있는가? 그것도 미래가 유한할 때나 먹히는 것이다. 무한한 미래를 가진 카림에게 미래를 고려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었다.

“다른 이들이 흔히 하는 사랑보다 훨씬 깊고 좋은 것을 이미 당신에게 주고 있습니다.”

“왜 그 흔한 사랑은 못 주지?”

카림은 그가 제게 훨씬 깊고 좋은 것은 주는 일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그에게 이미 많은 것을 주었으므로. 카림은 디디 로렌스의 모든 것이 욕심났다. 그가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하고 싶었다. 그의 사랑까지도, 오롯이 삼키고 싶은 것이다.

“아니, 그런 말을 이런 식으로 합니까? 최소한 뭐 작고 반짝이는 거라도 선물해주면서 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그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카림도 똑같이 웃었다.

“그동안 네가 받아간 작고 반짝이는 것들은 뭐라고 생각하지?”

그가 입을 꾹 다물었다. 카림은 한때 그의 믿음을 시험하길 즐겼다. 그가 수영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안 이후에, 발이 닿지 않는 깊은 물로 그를 이끌었다. 조금이라도 저어할 줄 알았던 그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 카림의 말만을 믿고 물속으로 뛰어들었고 그를 놀리려다 되레 당황한 것은 카림이었다. 그리고 그 믿음을 배신한 대가로 카림은 아끼던 반지를 몇 개고 그에게 주어야 했다. 지금도 가장 처음 주었던 반지는 체인에 꿰여 그의 목에 걸려 있었다.

카림의 시선이 옷깃 사이로 살짝씩 드러나는 반지에 가 닿았다. 언젠가 그는 우스갯소리로 사탄의 자식이라는 티를 내기 위해 걸고 다녀야겠다 말한 적이 있었다. 물론 웃기지도 않은 농담이었지만, 카림은 그가 반지를 목걸이로 만들어 걸고 있었다는 것이 새삼 만족스럽게 느껴졌다. 제 것이 되기도 전부터 제 것이라는 티를 내고 다녔다고 생각하니 묘하게 기분이 좋은 것이다. 카림이 한결 가벼워진 기분으로 그를 마주했다.

그가 선을 그어 놓고 물러선다면 그 선을 자신이 지워버리고 다가서면 되는 문제였다. 카림은 이제 제 안에 굳게 쌓여있던 벽이 조금씩 부서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누구도 들일 일 없다 여겼던 벽 너머의 영역이 바깥으로 드러날까 벽이 흔들리는 것을 불안해했지만 더는 그렇지 않았다. 쌓아올린 벽은 언젠가 무너지게 마련이다. 시간이 조금 더 걸릴 뿐 그는 결국 제게 올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그에게 누구도 딛지 않았던 영역까지 내어줄 의향이, 카림에게는 있었다. 그를 위해 스스로를 내던지는 일도 그리 불쾌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그는 제게 있어 유일무이한 존재였으니. 카림은 이제 안다. 자신의 단언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이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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