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의 늪
골든토피아(2022), 선우은산
隱刪. 수수께끼와 같이 숨은 것을 깎아내어 세상에 드러내라는 뜻을 담은 이름은 기자가 되었다면 대성할 운명이 아닌가 하고, 은산은 시시때때로 생각했다. 은산이라는 이름은 제가 태어나기도 전 조부께서 직접 옥편을 찾아가며 지어준 이름이라 들었다. 그러나 조부의 직업 아닌 직업을 생각하면 집안에서 기자가 나오길 바랐을 것 같지도 않았으므로 은산은 더더욱 미궁에 빠질 뿐이었다. 심지어 제 이름에는 쌍생 동생들이나 사촌형제들의 이름에 포함된 돌림자가 들어가지도 않는다. 그러니 이쯤되면 은산은 조부의 유골함 뚜껑이라도 열고서 물어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제 이름은 왜 돌림자도 안 넣은 것이며 뜻은 또 왜 그런 의미인지. 설마하니 조부도 저가 물 위의 기름처럼 가족들과 섞이지 못하고 동동 떠있을 걸 예상한 걸까.
이질감이라는 것은 은산이 자신의 의견을 또박또박 내세울 수 있을 무렵부터 곁을 맴돌았다. 뚜렷한 형체도, 이목구비도 존재치 않았으나 은산은 그것이 시커먼 동공을 열고 항상 저를 지켜보고 있다고 느꼈다. 호시탐탐 곁에 다가와 속삭이려 하는 것 같았다. 너는 이들과 같지 않다고, 결코 섞여들 수 없다고. 어린 마음에 은산은 그것이 곁에 다가올 틈을 주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속삭임을 듣지 않을 수 있는 소음 속에 숨어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은산은 많은 친구들과 어울렸다. 그림자처럼 따라붙어 다니는 그 이질감이라는 것이 곁에 다가올 틈을 주지 않으려 애썼고, 은산의 노력은 어느 정도 먹혀들었다.
그러니까, 그것은 달리 말하면 은산이 바깥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에만 유효한 노력이었다는 뜻이다. 해가 기울고 하늘이 주홍빛으로 불타오르면 그나마도 함께 놀던 대부분의 또래들은 하나둘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은산은 그 중에서도 가장 마지막까지 밖에 남아 발을 질질 끌며 달리 더 할 것은 없나 골몰하는 쪽이었다. 친구들이 모두 돌아가고 홀로 남게 될 즈음 발길 닿는 대로 거리를 걸었다. 사람들이 빚어내는 소음에 파묻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시간을 죽이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터덜터덜 집으로 향하면 가장 먼저 귀가를 반기는 현관의 다홍빛 센서등이, 은산에게는 눅눅한 녹빛으로 보일 때가 많았다.
으레 집은 따뜻하고, 포근하며, 다정한 곳이라고들 하던데. 왜 저에게 집은 눅눅하고, 불쾌하며, 숨막히는 곳인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집으로 들어설 때마다 은산은 집어삼켜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루내내 기회를 노리며 곁을 맴돌던 것이 어깨 위로 내려앉아 깊은 숨을 토해내는 것이 느껴졌다. 그 습하고 무거운 숨결이 뺨을 스칠 때면 은산은 제가 삶에서 내뱉을 수 있는 숨 한 자락을 빼앗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기이한 탈력감이 팔다리를 감싸고 뚝뚝 떨어져내린다.
방으로 들어가기 위해 거실을 가로지르다 보면, 거실 가운데 놓인 긴 식탁의 이쪽과 저쪽에서 저마다의 일거리를 펴든 부모님이 고갤 들어 은산에게 단정한 인사를 건넸다. 오늘도 늦었구나, 은산아. 얼른 씻고 쉬렴. 은산은 고갤 꾸벅 숙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복도를 가로지른다. 오늘도 어김없이 집안을 휘감는 것은 고요하고 낮게 바스락거리는 종이 소리가 다였다. 거실은 가족들의 식사 공간이자 부모님의 업무 공간이었다. 있는 것이라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키 큰 책장과 가운데 놓인 긴 식탁, 한 벽면에 서있는 값비싼 오디오와 턴테이블 같은 것들이 다였다.
집집마다 한 대씩 있다곤 하는 티비조차 은산의 집엔 없었다. 드물게 커다란 스피커에서 음악이 흘러나올 때가 있었는데, 은산은 저 스피커에서 낮고 음울한 음악이 속삭이듯 흘러나오는 것 외엔 들어본 일이 없었으므로. 스피커를 볼 때마다 덩치값을 못하는 스피커라고 생각하곤 했다. 각자의 일에 몰두하고 있는 부모님을 지나쳐 제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으면 은산의 얼굴 위로 방 안에 스며들어 있던 어둠이 기다렸다는 듯 드리웠다. 은산의 어깨에 올라타 있던 것은 그제야 느릿느릿 몸을 타고 내려와 익숙하게 방 한 구석에 똬리를 틀고 앉았다.
스위치를 내린 듯, 은산의 눈에 스민 빛이 스러진다. 집은 바깥과 단절되어 있는 다른 세상이었다. 고요하기 짝이 없어 숨을 쉬는 것조차 어려운. 단단한 땅이 아니라 발 디딘 것을 모조리 끌어당겨 집어삼키는 늪같은. 침대에 털썩 드러누운 은산은 베개 옆에 아무렇게나 내려두었던 헤드폰을 익숙하게 끌어당겨 귀를 덮었다. 닥치는 대로 이것저것 집어넣어 용량을 꽉꽉 채운 MP3를 조작하면 금세 적막은 사라지고, 은산은 눈을 내리감아 저를 집어삼키려는 늪에서 일시적으로 분리될 수 있었다. 쥐죽은 듯한 고요가 진저리나도록 싫었다.
귀를 덮은 헤드폰을 벗으면 신기루처럼 사라질 안정감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눈을 감고 있어도 방 한 구석에서 똬리를 틀고 이쪽을 빤히 주시하는 것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현재 재생 중인 파일에서 다음 파일로 넘어가는 그 짧은 적막을 뚫고 그것이 속삭였다. 넌 나를 볼 수 있어. 나를 벗어날 수 없어. 넌 날 들을 수 있어. 나는 집어삼킬거야. 그럴 때면 은산은 눈을 질끈 감았다. 들리지 않는다고 스스로에게 한참을 되뇌었다. 그것은 마치 그림자처럼 곁에 붙어있었다. 빛이 있는 곳에서는 뚜렷하게 형체를 갖추고 은산을 보았고, 어둠이 있는 곳에서는 무저갱 같은 어둠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며 끊임없이 속삭였다.
은산은 해가 지날수록 그것의 덩치가 커지고 있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했다. 그것은 마치 올려다보면 올려다볼수록 점점 덩치를 키워 종래엔 사람을 짓누른다는 어둑시니처럼 은산을 짓누를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오래 지나지 않은 어느 저녁, 그것의 어스름이 가족들의 어깨 위에도 내려앉아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은산은 직감했다. 가족들과 저는 아무리 죽었다 깨어나도 섞여들 수 없다는 것을. 하여 이 곳이 결국 자신을 잡아먹는 무덤이 되리라는 것을. 가족들이 함께 사는 이 장소는 은산의 나이가 열을 조금 웃돌 때부터 집이 아니었다. 늪이었고, 시구屍柩였으며, 종래엔 무덤이 되는 것이다.
죽고 싶지 않았다. 은산은 살고 싶었다. 그리고 살기 위해선 가족들의 곁을, 그들의 존재 자체나 다름없는 이 늪을 박차고 나가야만 했다. 살고자 함은 무릇 살아있는 인간의 사세고연한 본능이다. 어둑시니의 그늘 아래에서 늪에 잠겨 살아있되 산 상태가 아니었던 은산은 이제라도 제대로 호흡하며 살아나가고 싶었다. 사실 거리를 거닐며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소음에 스스로를 내던졌던 것은 뭇사람들의 활발한 생명력을 느끼고 싶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불빛을 향해 달려드는 부나방처럼 사람들의 활기, 생기, 소음 따위로 달려들어 잠시나마 숨통을 트고 싶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가족들의 곁에서 벗어나면 삶의 거의 모든 순간에 드리워있던 그것의 시선이며 속삭임을 벗어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은산은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의 학교에 진학하겠다는 의사를 강하게 피력했다. 유약한 성정의 부모님은 당신들의 별종이나 다름없는 자식이 밀어붙이는 뜻을 꺾지도, 이겨내지도 못할 사람들이었으니. 부모님의 허락 아래에서 은산은 혼자 살 집을 얻었고 가족들과는 제법 멀어진 곳에서의 생활을 준비하며 순조롭게 벗어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다면. 제아무리 발버둥해봤자 은산은 부모님의 피를 이어받은 자식이라는 점이었다. 홀로 생활을 시작한지 겨우 일주일, 늦은 저녁 집으로 돌아온 은산은 거실의 어둠 한 구석에 우두커니 버티고 서서는 예의 시커멓게 텅 빈 동공으로 저를 주시하는 그것을 마주했다. 나를 벗어날 수 없다고 했잖아. 입도 없는 그것이 입꼬리를 쭉 찢어 웃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독하리만치 익숙한 적막이 들이치는 파도처럼 일렁일렁 차올랐다. 굳어버린 은산의 머리 위 주홍빛 센서등이 꺼진다. 이어 그것이 다시 켜졌을 때. 좁은 현관은 온통 늪의 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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