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소청명] 불시착

백 년 전 화산에 떨어진 장일소 x 청명(검존)

자급자족 1 by 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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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편의 프리퀄이 존재하나 읽지 않아도 본편 이해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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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 혹시 저희한테 숨겨둔 정인이라도 있습니까?”

“미쳤냐?”

청명은 한결같이 멍청한 말을 하는 청진을 봤다. 저 말이 그리운 적도 분명히 있었지. 두 번째 정마대전을 끝내고 다시 100년 전 화산에서 눈을 떴을 때, 그리운 이들을 보면서 눈물을 펑펑 쏟았다. 온종일 울다 탈진하고, 깨면 다시 울고. 소식을 듣고 사천에서 달려온 당보를 보면서 또다시 한참을 울고. 청명이 드디어 죽는 줄 알고 놀란 청문까지 실신하고 의약당주는 진작 기절한 탓에 한동안 화산이 아비규환이었다. 그날 밤 꿈에서 누군가가 나타나 조만간 찾으러 가겠다는 말을 듣고 긴장이 탁 풀려버린 게,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아무튼간에 청명은 화산파에서 사제들과 사형, 아우를 마음껏 예뻐하면서-물론 청명의 기준이었다. 그의 애정이란 단장애 1000번 왕복하기, 한 시진 안에 사천 찍고 돌아오기와 같은 기행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래도 제자 볼 체면은 남겨둬야 하니 일대 제자들이 모두 자러 간 사이에 시키는 중이었다. 청명은 나름 많이 착해졌다. 정말로!-행복한 생활을 보내는 중이었다.

장문 사형 몰래 꿍쳐둔 설매단으로 해장하고 구석진 전각에서 탱자탱자 놀고 있으니 사랑스러운 사제가 찾아와서 한다는 말이 저런 개소리 아닌가.

순식간에 청명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무인이 노망났다는 말을 들어본 적도 없거니와 그의 기억 속에서 청진이 저딴 헛소리를 한 적도 없기 때문이다. 숨겨둔 정인이라는 말에 떠오른 놈이 하나 있었으나 여기 있을 수가 없는 놈이었다. 있다면 끔찍하기도 했고.

“표정이 이상한데요?”

“뭐어가, 이, 상하다고 그래! 없어 그런 놈!”

“악! 없으면 그냥 없다고 하면 되는 걸 왜 절 때립니까!”

과거에서 한가하게 정인 놀음하며 노닥거렸던 상대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전생, 현생, 다시 전생을 따져도 언저리에 있을 만한 놈은 하나뿐이었다.

“아무튼 없으니까 좋은 말로 할 때 가라.”

훠이훠이. 하면서 놈을 쫓아내려 손을 휘적거리고 도로 자리에 누웠다. 끝내주는 날씨였다. 술은 맛있고, 안주로 챙겨온 고기엔 윤기가 자르르르 흐른다. 더 식기 전에 크게 한 젓가락 집어 입에 넣으니 무릉도원이 따로 없었다.

“아무튼 정말 없는 거죠?”

“넌 내가 아무리 막살아도 그런 짓까지 할 거 같냐?”

“그건 그렇죠.”

이제 한 절반 정도는 믿는다는 표정으로 그를 보던 사제가 몸을 돌렸다. 아무리 망나니로 사는 사형이라고 해도 색까지는 손대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가벼워 보이고, 별생각 없이 사는 인간처럼 보여도 선은 항상 지키는 사람이었다. 술과 고기를 즐긴다고는 하나 그뿐. 일 하나 부탁하면 툴툴거리지만 그래도 끝내 해주는 사람이었다. 그 사형이 아니라고 하면 아닌 거겠지.

그런데 왜 이렇게 불길한지 모르겠다.

“하긴. 사형이 만나도 뭐 많은 놈 중에 그런 육 척 장신의 사내를 만나겠어요?”

다시 술병에 손을 뻗던 청명의 움직임이 굳었다.

“뭐라고? 다시 말해봐.”

“그 산문 앞에 있는 이. 육 척 장신의 사내라니까요?”

청명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무림에 그만한 키를 가진 놈이 흔하던가. 흔하면 왜 팽가는 애들 키 조금이라도 키우겠다고 그 난리를 칠까.

“혹시 그놈 얼굴에 분칠도 허옇게 했냐? 연지도 바르고?”

설마. 설마 아닐 것이다. 그럴 리가 있나. 그놈이 여기 왜 있어?!

답을 채 듣기도 전에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청명이 냅다 산문으로 달려갔다.

“사형?! 사형! 어디 갑니까! 사형!”

아예 경공까지 써가며 산문 앞에 도착하니, 이미 수없이 많은 사람이 진을 치고 구경하는 중이었다. 산문 앞에 자리를 깔고 무릎까지 꿇은 채 읍소하고 있는 사내가 보였다. 거구였음에도 수수하게 입은 옷과 신발, 한쪽으로 땋아 내린 머리가 날카로운 인상을 중화시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청명은 눈을 감아버렸다.

도도도도도대체저놈이여기왜있어?!

“야! 장일소!”

여기가 화산 대문이라거나, 지금 저쪽에서 장문사형이 걸어 나오는 중이라거나, 주변에 구경꾼들이 잔뜩 있다는 그런 사실은 청명의 머리에서 깡그리 날아간 후였다. 음공을 쓴 게 아님에도 천지를 뒤흔드는 목소리에 사람들이 모두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 여기까지만 해도 청명은 저 망할 사파 놈이 일을 이렇게까지 꼬아버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대화산파의 장문인께 촌부가 꼭 아뢰고 싶은 일이 있어 무례를 무릅쓰고 이곳까지 오게 되었으니 부디 이 가여운 이의 면을 보아 내치지 말아주십시오.”

청명은 본 체도 하지 않고 청문을 향해 냅다 엎드려 눈물 흘리며 읍소하는 사내의 모습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심금을 울리게 했다.

“그래. 하고……싶은 말이 있다고.”

“이 장 모, 본디 강호와는 연이 없었으나 기연을 얻어 무공을 얻고 강호를 주유하던 중 청명이라는 한 사내와 만나 영원을 약조하였습니다.”

저게 무슨 개소리야.

청명의 입이 딱 벌어졌다. 누가? 강호와는 연이 없어? 저놈은 제가 화산에 돌아가기 전부터 이미 사파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놈으로 군림하던 새끼다.

“허나 상공되기로 약조한 이는 오 년이 넘도록 소식 하나 없었고, 제가 아는 건 약조한 이의 함자뿐인지라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고매하다는 검존의 용모를 찾아 확인해 보니 제 정인이었습니다.”

미친놈인가? 이제 청명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서 뒤로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그런 와중 장일소는 이제 옷소매까지 들어 눈가를 콕콕 찍는 중이었다. 밥 먹고 연기 연습만 했는지, 옷을 눈가에 한 번 찍을 때마다 눈물이 방울방울 묻어났다.

“비록 제 무공이 사이하다고는 하나 여즉 양민과 정파를 해친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검존께서는 저를 정파가 아니라는 이유로 버리시고 그 소식조차 없으니, 이 억울함을 풀어주실 분은 화산파의 장문인밖에 없다 생각되어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제가 아는 장일소라는 놈이 둘이었나? 누가 뭘 해친 적이 없어? 저놈이 죽인 천우맹의 문도만 족히 기백이요, 화마에 휩쓸린 양민은 수만이었다. 아니, 청명은 저놈과 혼인을 약조한 적도 없었고 애초에 정인 사이도 아니었다!

이걸 어디서부터 어떻게 지적하지?

아니. 이성적으로 생각을 해보자. 사실 저놈은 제가 아는 장일소가 아닌 것이다. 저놈이 찾는 청명이라는 놈은 사실 동명이인이고, 중원에서 제일 유명한 청명을 찾다 보니 여기까지 온……. 상황을 애써 부정하면서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려고 하는 데, 청명과 그놈의 눈이 마주쳤다. 순간 놈의 눈초리가 샐쭉 휘면서 소매에서 낡은 녹색 머리끈이 하나 나왔다.

“이것이 그 증거이니, 부디 현명한 판단을 내려주십시오.”

청명이 완전히 정신을 놓고 있는 사이 주변은 아비규환이 되었다.

“저자가 정말 매화검존의 정인이란 말이오?”

“이야기 다 듣지 않았나! 그것도 그냥 정인이 아니고 헌신짝처럼 버려진 정인일세!”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내자 될 이가 사공을 익혔다는 이유로 버리는 게 말이 되나?”

“매화검존쯤 되는 자면 그럴 수 있지!”

“이야기를 들어보니 악한 짓은 하지 않은 모양인데. 그러면 사파도 아니지 않은가!”

차라리 정신을 놓는 편이 낫지 않을까. 도대체 이 개판을 어떻게 수습한단 말인가. 숨겨진 정인이 있다? 이건 그럴 수 있다. 애초에 그쯤 되는 무림 고수면 원수가 드글드글 끓기 마련이라 친인은 최대한 숨기는 게 당연했다. 그 친인이 마찬가지로 고수가 아니라면. 하룻밤 가지고 놀고 버렸다. 이것도 솔직히 그럴 수 있다. 강호가 뭐고 중원이 뭔가. 강자존의 법칙 아래 어떤 불합리한 일이 일어나도 감싸주는 게 강호 아니었나. 저 세가 놈들의 하룻밤 연정 상대를 일렬로 세우면 장강보다 길 것이다.

그래, 세가였다면.

차라리 세가였다면 지금 상황은 아무것도 아닌 걸로 넘길 수 있을지 몰랐다. 헌데 자신은 도사가 아닌가. 이건 완전히 문파 망신이다. 아니, 문파 망신을 넘어 이건……. 그나마 화산이 혼인을 허하는 문파라 다행이지, 무당이었으면 바로 사지근맥 잘려서 뇌옥에 끌려갈 일이다. 어쩌지? 저 미친 사파 새끼는 어떻게 진정시킨다고 해도 몰려든 이들의 입은 어찌 막을 것이며, 그 뒤처리는 또.

청명이 청문의 얼굴을 보았다. 장문사형 옆에서 산 세월이 평생인데, 단언하건대 청명은 청문의 그렇게 화난 모습을 처음 보았다.

“그만!”

내력을 실어 외친 덕인지, 사위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모두가 청문을 보았다. 이 난리를 만든 장일소마저도.

“이 일의 시시비비는 내가 직접 다룰 것이니 제자들은 외인을 모두 물리거라!”

청문이 짧게 숨을 내쉬었다.

“따라오너라, 청명아. 소협도 오시겠소?”

장일소가 공손히 예를 표하면서 일어나는 사이 다른 문도들이 구경꾼들을 물렸다. 청문이 제일 앞에 서고 청진이 따르며 제일 뒤에 청명과 장일소가 따르는 모양새였다.

이제 청명은 마음을 편히 먹기로 다짐했다. 그냥 저놈을 어디 야산에 묻어버리는 거다. 지금 그의 힘이면 못 할 것도 없고. 살면서 매화검존의 명성을 노리고 나타났던 부모 주장자 47명과 기타 혈연 주장자 243명의 처리는 청문이 했다. 그러니까 이제는 청명이 해야 할 차례였다. 되지도 않는 말을 하면 씩씩거리는데 장일소는 태연했다. 평소라면 진작 청명의 속을 긁어야 하는데 입다물고 얌전히 따라오는 게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저놈이 화산 안으로 들어온다는 사실이 아니꼬워서 눈을 삐죽 세웠다가도 바로 내린다.

결국 장문인전에 들어 차까지 한 잔 대접받고 나서야 놈이 입을 열었다.

“소란을 피운 점, 사죄드립니다.”

“사형, 이건 제가 다 설명을…….”

“청명아.”

“예, 사형.”

장일소에 대한 살심이 무럭무럭 솟아올랐다. 이제는 급기야 꿈속에 나온 그 백발의 노인을 죽여버리고 말겠다는 의지가 무럭무럭 자란다. 사형이 뭐라뭐라 하는 것 같은데 귀에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당장 저 분노부터 어떻게 가라앉히기 위해 그가 바닥에 오체투지라도 하려는 순간.

“이 망둥이 녀석. 네가 갑자기 죽을 놈처럼 굴길래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느냐.”

“제가 다 잘못했, 엥?”

청문이 갑자기 빙그레 웃었다. 과거에 아주 가끔 청명이 칭찬받을 일을 하면 지어주던 그런 웃음이었다. 이상하다. 잔뜩 맞는 걸로도 부족해서 뇌옥이나 참회동에서 한 달은 족히 지내야 하는 게 맞는데. 혹시 사람이 바뀌었나 싶어서 확인해 봐도 제가 아는 장문사형이 맞았다. 심지어는 청명의 수련으로 기도도 살아난 게 앞으로 오십 년은 더 탱탱하게 살 관상이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장문인. 저 사실 요즘 사형이 어떻게 되나 하고 걱정하고 있었는데 이런 일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하다못해 진이 놈도 웃고 있었다.

“진짜 사형, 이런 일이 있었으면 저희에게 말을 해주셨어야죠.”

저게 뭔 개소리야.

사람이 너무 황당하면 말도 나오지 않는다더니, 지금의 청명이 딱 그 모습이었다. 혹시나 장일소는 뭔가 아는가 싶어 슬쩍 봐도, 여전히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눈만 깜박거리는 모양새니 뭘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예?”

“자세한 사정은 정인 간 회포를 풀고 듣는 게 좋겠지. 어서 들어가서 쉬거라. 화산은 외인이 함부로 오를 만한 높이가 아니니.”

“뭐라고요?”

“처소는 청명이와 같은 곳을 쓰면 되겠소?”

“말씀 낮추시지요. 그저 난동을 피운 객입니다. 당장 끌어내라 명하지 않은 것으로도 이미 큰 은혜임을 알고 있습니다.”

와. 저놈이 정말 제가 알던 장일소라고. 저놈이!

어처구니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 있나? 청명의 입이 딱 벌어졌다. 붕어마냥 입을 뻐끔거리고 있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장일소는 사형에게 덕담까지 듣고 있었고 그런 장일소를 청문은 대견하다는 눈으로 봤으며, 심지어는 청명을 향해 약간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는 게 아닌가. 이쯤 되면 세상이 저를 빼고 작당 모의라도 한 게 아닐까 싶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되는 상황인지.

기어코 찻잔을 다 비운 장일소가 자리에서 일어나 청명의 옆에 바짝 붙어서 나가는 순간까지 청문은 웃고 있었다.

 

**

 

 

“야.”

“…….”

“이 개자식아.”

“불렀니?”

청명의 처소를 신기하게 구경하던 장일소가 뒤돌며 방긋 웃었다. 이제는 저놈 웃음만 봐도 위장이 뒤틀릴 지경이었다. 도대체 장문 사형은 무슨 생각으로 저놈을 산문 안에 들여놓고 말까지 들어준단 말인가. 딱 봐도 사이비 관상에-사내 새끼가 예쁘장하긴 하다.- 사람 열은 잡아먹을 것 같은 뱀 아닌가.

“뭘 그렇게 보고 있어. 눈 안 깔아?”

콱 씨.

그가 주먹을 붕붕 휘두른다. 여차하면 패버리겠다는 의사가 아주 잘 느껴지는 손짓에 장일소가 눈을 슬쩍 돌렸다. 지금 상태로는 한 대만 맞아도 아주 곤죽이 된다는 걸 잘 아는 탓이리라.

“의외구나.”

“야. 내가 내 앞에서 선문답하면 그 혀 곱게 잘라준다고 했지.”

“정인한테 못 하는 소리가 없구나. 내 혀를 자르면 네가 더 손해지 않니.”

엄지와 검지를 붙여 둥근 원을 만들고 그 사이로 혀를 날름거린다. 저게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도사한테 해서는 안 될 행동이라는 사실은 잘 알겠다.

“뒤져. 뒤져, 새끼야. 응? 그냥 널 처음 본 그때 죽였어야 했어. 어?”

두툼한 주먹이 연신 바닥에 꽂혔다. 도대체 나려타곤은 언제 저렇게 극성으로 익힌 건지 피하는 솜씨가 수준급이었다. 그 사이에 저놈 무위가 이렇게 발전할 리가 없는데.

“정인한테 말이 너무 심한 것 아니니?”

“누가 정인이야, 누가!”

약 일각이 흐른 후, 먼저 지친 건 청명이었다.

“살초만 쓸 수 있었어도 내가 너 같은 건…….”

“그리 말하면 내가 화산에 더 붙어있어야겠다는 다짐을 하지 않을까.”

“하기만 해.”

미치겠다. 왜 제 인생은 뭐 하나 쉽게 풀리는 법이 없을까. 아무리 고찰을 해봐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저놈은 도대체 무슨 수를 쓴 건지 백년 전 이곳에 넘어왔고 상대할 사람은 자신뿐이라는 거다.

“이제 좀 머리가 돌아가는 모양이구나.”

청명의 눈빛이 바뀌는 걸 본 장일소가 히죽 웃었다.

“어떻게 온 거야?”

“그걸 이제 묻니?”

청명의 침상이 제 침상이라도 되는 듯 아예 드러누워서 이불을 툭툭 치다 돌아누운 사파 수괴 놈이 샐쭉 웃는다.

“가는 길에 잠깐 들렀지?”

“여기가 어디라고 와?”

당장 청명도 그가 왜 이곳에 왔는지 이유를 알지 못하는데, 저놈이 도대체 무슨 수로 여기를 왔고 그 방법은 어찌 알았단 말인가.

“어디긴 어디야. 화산의 첫 번째 전성기라고 부르던 그 시절이지.”

아예 잘 기세로 베개를 베고 이불을 꽁꽁 감싼 장일소가 이불 밖으로 고개만 빼꼼 빼놓고 청명을 보았다.

“그새 다 잊은 모양이구나. 그래. 네 기억력이 그럼 그렇지.”

역시나 그렇다는 듯 고개까지 끄덕이면서 중얼거리는 놈의 입에서 붕어나 멍청이 따위의 단어가 흘러나왔다. 이건 누가 봐도 대놓고 하는 욕이었다. 순간 욱하다가도 겨우 진정시키고 장일소를 옆으로 밀었다.

“비켜. 내 자리야.”

“객한테 너무하구나. 내가 온종일 가시밭길을 구르다 와서 삭신이 쑤시니 이 정도는 좀 양보해주렴.”

“알 바냐? 수상한 녀석한테 방 주는 것만 해도 감사해야지.”

“이곳에 오기 전에 뭘 하고 있었는지는 기억하니?”

뜬금없는 소리다. 이곳이라고 하면 과거의 화산을 말하는 것일 테고, 이곳에 오기 전에는……. 뭘 하고 있었더라? 장문사형에게 치매가 왔냐고 그렇게 따져 물었는데 사실 치매가 온건 자신이었나. 잠들기 전에는 분명히…….

그렇게 떠오른 기억 하나. 하필이면 저놈과 관련된 기억이었다. 그러니까 저놈은 제가 죽였는데.

“쯧. 그냥 붕어 친구 하렴. 청붕어 어떠니?”

“뒤진다, 진짜.”

하여간 시시각각 청명의 표정이 바뀌는 건 기가 막히게 알아챈다. 그런 놈이니 사랑했던 거지. 그 마지막 기억이 어째서 눈 덮인 설원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이를 득득 갈던 청명이 냅다 달려들어 장일소의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야! 이 뒤진 놈이 이제는 죽어서도 나한테 엿을 먹여? 이거 다 네 탓이지! 이 망할 새끼야!”

“검협, 그러다 나 죽, 아야, 아프대도!”

이 새끼는 자신을 너무 만만하게 봤다. 더군다나 지금은 어찌 됐든 과거의 몸이라는 말씀. 체구만 따지더라도 약 일할 반이 더 컸다. 그 힘으로 놈의 물미역 같은 머리카락을 쭉쭉 잡아당기니 그 입에서도 어처구니없을 정도의 웃긴 비명이 터져 나왔다. 만약 한창 사패련과 아웅다웅할 때 이런 소리를 들었다면 청명이 일 리정도는 봐주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뒤졌으면 성불이나 할 것이지! 왜 또 나타나고 지랄이야!”

“내가 어디 성불은 쉽게 할 관상이니?”

“오냐! 이참에 뒤진 놈 또 죽여보자! 그게 내 전문인데!”

씨근거리는 그가 장일소를 노려본다. 잘못을 알기는 아는지 눈을 슬쩍 피하는 게 더 얄미웠다.

“어쩔 거야.”

“난 그냥 네 흔적을 찾아서 온 것뿐이란다.”

“뒤진 놈이?”

도대체 무슨 억하심정으로 저를 이렇게 괴롭히는 걸까. 물론 좋다. 이제는 기억도 가물가물했던 이들을 다시 보고, 해후를 나눴으니. 이후의 일은 말 못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난 정말 무고하대도. 네 말마따나 뒤진 놈이 무슨 힘이 있다고 이런 술법을 쓰겠니?”

그렇게 말하는 장일소의 얼굴은 정말 고단해 보였다. 그제야 청명은 드러난 옷 사이로 보인 놈의 맨가슴이 온통 흉터투성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기억 속에는 없던 자국이었다. 그 시선을 느끼고 아예 청명을 제 품에 꽉 끌어안은 장일소가 중얼거렸다.

“뒤진 다음에도 제법 많은 일을 겪었거든.”

이번에는 분명히 제대로 왔다고 생각했는데. 또 불시착 했을 줄은 몰랐지만.

악의는 없었다.

이상한 일이다. 환생한 이후 청명의 생 절반은 저놈이 흘린 악의를 수습하고 다니지 않았던가. 나머지 절반은 마교였고. 하다못해 그 웃긴 상황에 사랑을 고백하는 순간조차 장일소는 악의로 가득 차 청명을 구렁텅이로 끌어내리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중원에 있는 모든 협과 의, 정을 비웃고 짓밟고. 그게 저놈의 삶이었다. 그런 놈이었기 때문에 청명이 놈의 목을 베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사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 저놈을 사랑했음에도 불구하고 저놈을 죽였다.

그러면 이건 제 망념인가 미련인가.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하고 나오려는 순간, 커다란 손이 그의 얼굴을 덮었다.

“잠이나 자렴. 이상한 고민 하지 말고.”

이상하게도 그 순간 망념이 잦아들었다. 이쯤 되면 진짜 사술 쓴 게 아닌가 싶을 지경이었다.

“잠이 오겠냐고.”

“일단 쉬고 생각하자는 거지.”

“네가 힘든데 왜 나까지 자야 하는데.”

“부부는 일심동체라고 하지 않니.”

“누가 부부야, 누가.”

변태처럼 그를 끌어안고 킁킁거리는 놈을 밀어낼까 싶다가 그냥 두기로 했다.

“그럼 혼인도 안 하려고? 내가 너 하나 보려다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아는가 모르겠구나.”

“그딴 걸 내가 왜 알아야 하는데.”

막상 놈의 품에 안겨있으니 잠이 솔솔 오긴 했다. 기시감이 느껴졌다. 이 비슷한 일을, 전에도 겪은 적 있는…….

“자고 일어나면 그때는 정말 제대로 만나겠구나.”

“제발 내 인생에서 꺼져, 좀.”

잠결에 그렇게 웅얼거린 거 같다. 도대체 제 인생은 왜 이 모양 이 꼴인지 모르겠다. 천마도 두 번쯤 죽이고 중원에 평화도 가져왔으면 하늘에서 큰 상 같은 거 받지 않나? 근데 왜 저한테는 이런 놈이나 찰싹 붙어있는 거지? 설마 이놈이 상은…… 아니지. 아닐 것이다. 저

저런 게 상일리 없다. 상이라고 하면 지고의 영약이나 보물이나…….

느릿하게 눈을 끔벅거리던 청명이 잠에 들었다. 장일소는 이미 그 품에서 잠든 지 오래였다.

그와 동시에 두 사람의 몸이 천천히 투명해졌다. 두 사람이 누워있던 침상, 침상이 놓여있던 방, 그리고 청명의 전각까지 천천히 투명해지고 사라지는 순간을 청문은 눈에 하나하나 담고 있었다.

“그렇게 보내도 괜찮으십니까? 매번 그리워하셔놓고.”

“언젠가는 다시 오지 않겠느냐. 이렇게 본 것으로 충분하다.”

전각이 사라지는 순간 주변의 풍경이 바뀌었다. 수천 개의 화려한 전각과 그 사이사이를 채우고 있는 신선들, 만개한 매화. 아직 인간인 청명에게는 허락되지 않을 풍경이었으니 그 기억 속 화산과 섞이는 것도 당연했다.

“그 옆에 있는 사특한 놈은 어떻게 치우시려고요.”

허허롭게 웃던 청문의 얼굴이 굳었다. 곧이어 식은땀까지 한 방울씩 삐질삐질 흘리는 게, 아무리 봐도 뒷일을 생각해 둔 사람은 아니었다.

“그건 청명이 녀석이 알아서 하지 않겠느냐.”

“……장문 사형?”

“아니지. 지금이라도 가서 그놈을 다시 지옥에 처박으면…….”

“사형 보겠다고 또 기어나오겠죠. 그 악귀 놈 성질머리에.”

 

**

 

청명은 눈을 떴다. 익숙한 천장……, 에라이 이것도 그만하고 싶다. 또 그놈 나오는 꿈을 꿨는데, 장문 사형은 왜 같이 나온 걸까. 아무리 봐도 요즘 꿈자리가 이상하다. 터를 옮겨야 하나?

실없는 고민을 하면서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는데 품속에서 작은 술병 하나가 굴러떨어졌다.

“뭐야, 이거?”

처음 보는 재질의 술병이다. 도자기라기엔 좀 더 단단하고 자체적으로 한기가 도는 게 아무래도 기물 아닌가 싶었다. 뚜껑을 열고 향을 맡으니 달달한 복숭아 향이 훅 풍겼다. 아무리 봐도 보통 술은 아닌 것 같아 남들이 보기 전에 한 모금 마시려는 순간, 조걸이 그의 방문을 열고 뛰어 들어와 소리를 지른다.

“청, 청명아아아악! 지금 산문에……!”

“장일소라도 있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지, 사형?”

“헐. 어떻게 알았냐?”

“그놈 아무 말 못하게 해. 알았어? 어? 한마디라도 하는 순간 사형도 죽고 그놈도 또 죽는 거야. 내 말 이해했어?”

진짜 인생에 지지리도 도움 안 되는 새끼다. 또 같은 꼴을 겪겠냐 싶어 재빠르게 산문으로 달려 나간다. 익숙한 뒤태가 보인다.

청명이 입을 열려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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