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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규언텔글 by 규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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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네 방에서 잠드는 일이 많아지자 너는 침대부터 새 것으로 바꾸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눕지 못할 만큼 작았던 매트리스. 너와 팔다리를 얽은 채 누워있자면 커버를 씌우지 않아 거칠거칠한 매트리스의 촉감이 고스란히 등으로 느껴졌고 어느 날 너는 말없이 천장만 보다 내일 침대 사러 가자. 했다.

내일 당장? 네 쪽으로 몸을 돌리자 삐걱대는 소리가 요란했다.

마음먹었을 때 가야지. 안 그랬다간 저 비명 소리랑 계속 같이 자야 할 걸.

그건 그렇긴 한데, 내일 시간이 나?

만들어 볼게. 그러고는 정말로 다음 날 새 침대를 고르러 갔다.

방이 좁아 큰 침대를 놓아도 괜찮을까 싶었지만 어차피 가구도 몇 없다며 너는 개의치 않아 했다. 각자 다리 뻗고 잘 수 있을 크기의 침대에 누울 수 있게 되었지만 나는 종종 예전 낡고 작은 매트리스에 엉켜 누웠을 때처럼 네 몸에 손을 뻗었고 너도 밀어내지 않았다. 뜨거운 손바닥에 차가운 뼈가 닿아 함께 미지근해진다. 내 품에서 네가 뒤척일 때면 귓가로 심장 뛰는 소리가 전해졌다. 어둠을 채우는 박동은 나의 것이었으나 네 것이기도 했다. 내 모든 것이 네 것인데 심장인들 아까우랴. 두 사람 분의 고동이 울리는 밤 네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잠이 들었다.

꿈을 꿨다. 우리의 삶이 송두리째 뒤집어지기 시작할 적의 꿈이었다.

 

인간은 아스고어를 만나러 가지 않았다. 리버퍼슨의 배를 타고 스노우딘으로 돌아온 인간은 자신의 집 앞에 서 있을 파피루스를 찾아갔다.

오, 인간. 내게 작별 인사를 하러 돌아왔구나.... 부디 그러지 말아줘. 이별을 실감하게 되니까...! 슬퍼하는 파피루스를 올려다보며 인간은 난 지상으로 가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함께 지상으로 나갈 수 있다면 내리쬐는 태양빛 아래에서 드라이브를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해 주지 못해서 미안해.

무슨 소릴! 물론 내 꿈도 소중하지만, 내 친구가 훨씬 소중한걸. 난 친구와 헤어지지 않아도 된다는 게 지금 무엇보다 기뻐! 순수한 기쁨으로 가득 찬 파피루스의 말에 뭐라 말을 잇지 못하고 파피루스를 와락 끌어안았다.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집에 돌아가지 못해서 슬프구나, 인간...... 하지만 괜찮아! 앞으로 여기가 네 집이 될 테니! 이 위대하신 파피루스님과 한 집에 사는 영광을 누리게 되는 걸 기뻐해라! 그러고는 인간을 마주 꼭 안아주었다. 언다인이 제 집으로 돌아간 지가 언제라고 이젠 인간이냐며 샌즈가 한두 마디 했지만 파피루스는 우리 집 소파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고 대꾸했다.

그날 저녁은 인간이 만든 스파게티였다. 함께 먹는 첫 저녁이니 마스터 셰프 파피루스가 실력을 발휘하겠다는 걸 인간이 한사코 사양했다. 잘 부탁한다는 의미로 내가 만들게 해 줘. 언다인의 특별 훈련으로 스파게티 만드는 법을 배운 파피루스는 재료를 던지거나 부수는 일 없이 칼질하고 물을 끓이는 인간을 신기한 듯 보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파는 것 같이 깔끔한 모양새는 아니지만 충분히 맛있어 보이는 토마토 스파게티 세 접시가 놓였다. 예쁘게 담는 재주는 없어서 부끄럽네. 입맛에 맞았으면 좋겠는데.

겉보기보단 맛이지. 어때, 파피루스? 파피루스가 스파게티를 입에 넣고 씹는 동안 잠깐의 정적이 흐른다. 긴장했나? 웃는 것이 영 어색하다.

대단해, 인간! 내게 스파게티를 잘 만든다고 어필했을 정도였으니, 자신은 있었겠지만 기대 이상인걸! 극찬이 쏟아지자 샌즈도 이어 한 입 먹는다. 오, 괜찮은데. 언다인 말고 인간한테 요리 수업을 받는 건 어때?

그, 그렇지만 그건 특훈이라고! 소란스러워진 분위기에 인간은 그제야 환히 웃는다.

인간이 이렇게 훌륭한 스파게티 요리사였다니 믿을 수 없군... 하지만 전무후무한 스파게티 요리사, 파피루스의 예술 작품에 비할 수 있을까? 다음 기회에 꼭 내 새로운 자신작을 맛보여 주도록 하지! 전부 비운 접시를 싱크대로 가져가던 파피루스의 말을 들은 인간의 입 꼬리가 파르르 떨린다. 형용할 수 없던 맛이 다시금 머릿속에 퍼졌다.

기대하라고. 파피루스의 스파게티는 정말... 끝내주니까. 전부 알면서 깐죽대는 샌즈에게 괜히 눈을 한번 흘기니 설거지에 몰두한 파피루스 몰래 윙크가 돌아온다. 정말이지.

뭐? 벌써 먹어 봤다고? 이런, 이미 알고 있다니 그거 유감인걸.

그래! 우리 데이트에서 내가 인간에게 스파게티를 선물했지.. 그 열정 넘치던 반응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흐음. 어떤 반응이었는지 궁금한데. 잘 먹었어. 샌즈가 자리에서 일어나 2층 제 방으로 들어가는 걸 곁눈질로 바라보다 파피루스의 뒤통수로 시선을 옮긴다. 물 흐르는 소리와 식기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다. 도와줄까 물으니 이제 다 했다며 명랑히 대답한다. 샌즈 형은 방에 들어갔나?

음. 인간.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사실 그 때 데이트를 할 정도로 내게 열정적인 건 아니었지? 설거지를 끝낸 파피루스가 돌아서서 나와 마주본다. 정곡이 찔려 뭐라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자 파피루스는 생긋 미소 지었다. 녜헤헤. 그럴 것 같았어! 왜냐하면... 인간은 이미 다른 누군가를 아주 좋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거든! 파란 마법에 걸린 듯 바닥으로 내리꽂힌 기분이었다. 등을 타고 오르는 죄악.

왠지 인간 네가 직접 말해줬던 것 같은 기분도 들어... 설마 인간이 내게 텔레파시를 보냈나! 언다인이 보던 애니처럼?! 세상에! 우린 정말 좋은 친구.. 아니야! 우린 이미 친구잖아! 그래, 좋은 가족이 될 수 있을 거야! 어느 새 턱 밑까지 오른 죄악이 목을 졸랐다.

오, 나 멋진 생각이 났어! 오늘 내 방에서 같이 자자! 우린 이제 가족이니까!

뭐라고? 갑자기 떨어진 파피루스의 폭탄 발언에 펄쩍 뛰었다. 거실에 소파 있잖아?

소파도 좋지만, 오늘은 안 돼. 우리가 가족이 되는 첫날을 기념해야지!

...꼭 같이 자야 기념할 수 있는 거야?

특별한 일을 해야 기억에 오래 남는다고! 기대감으로 반짝 빛나는 파피루스의 눈빛에 절로 앓는 소리가 나온다. 끙.

알았어. 정말 오늘만이다?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파피루스가 나를 이끌고 방으로 들어간다. 지금까지의 모든 데이트를 떠올리게 하는 방은 제 주인을 그대로 보여주는 마냥 한결같았다.

스포츠카 모양 침대에 엎드려 이런저런 수다(주로 스파게티 요리법에 대해서)를 떨던 와중 노크 소리가 들렸다. 파피루스, 들어간다? 샌즈였다. 오, 뭐야. 같이 있네.

오늘은 우리가 함께 지내게 되는 첫날이니까! 기념의 의미로 함께 자는 거야!

샌즈, 나는 분명 소파에서 잔다고 했다? 파피루스 실망시키기 싫어서 그런 거야. 진짜로.

알았어. 진정해. 누가 뭐랬냐?

형도 같이 잘래?

분명 비좁을걸. 사양할게. 오늘 읽을 책은 정했어?

복슬이 토끼와 숨바꼭질!

또?

인간한테도 이 감동을 전해줘야 하니까!

그럼 어쩔 수 없지. 책꽂이에서 한 권을 빼든 샌즈가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읽기 시작한다. 복슬이 토끼와 숨바꼭질.

파피루스에겐 미안하지만 책 내용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문장을 읊는 샌즈의 목소리만이 영혼을 죄었다. 동생을 위한 다정한 목소리를 내가 들어도 될까. 시선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모든 생각이 네게 들킬 것 같아 눈을 감았다. 시각이 차단되니 청각이 민감해진다. 숨을 곳이 없었다.

...그리고 모두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끝. 잘 자, 파피루스.

잘 자. 샌즈. 슬리퍼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 전등불 스위치 딸깍이는 소리와 방문 닫히는 소리를 전부 들은 후에야 눈을 떴다. 꽉 죄어들었던 영혼이 욱신거린다.

파피루스.

응?

내가 널 데이트 하고 싶은 의미가 아닌 쪽으로 정말 좋아한다는 거 알지? 그러니까... 플라토닉하게?

어둠 속에서 파피루스가 밝게 웃었다. 물론! 나도 인간을 좋아하는 걸! 플라토닉하게! 그리고 샌즈 형도 인간을 좋아해!

잠깐의 침묵. 하하. 그랬으면 좋겠네. 잘 자. 파피루스.

잘 자. 인간.

파피루스의 말은 때로 놀랍게 잔인했다. 그럴 의도는 없었겠지만.

 

우리의 앞날이 눈물로 흐려지고 있었다.

 

유달리 추웠다. 날씨가 바뀌지 않는 지하이니만큼 순전히 기분 탓이었다. 뽀드득 눈 밟는 걸음이 무겁고 느릿하다. 친구가 기다릴 것을 생각해도 발걸음을 재촉할 마음이 나지 않았다.

폐허로 통하는 거대한 문을 두드린다. 똑똑.

누구세요?

피자요.

무슨 피자?

오래 앉아 있었으니 다리 한번 피자요.

히히히. 무슨 일 있었어요? 평소보다 늦었네요.

군식구가 생겼거든요. 문에 등을 기대고 풀썩 주저앉았다.

지난번 그 사람인가요? 동생 친구라는?

아아뇨....... 어떻게 얘기해야 좋을지 몰라 말이 늘어진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문 너머도 조용하다.

인간이 지상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네요.

그러면, 그 애가...

숨을 길게 내쉬고 허공을 본다. 파피루스는 좋아하긴 해요. 친구랑 헤어지지 않아도 된다면서. 정작 인간이 무슨 생각인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그래요.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아이였죠. 굳게 닫힌 문에 토리엘이 몸을 기댄다.

문 바깥 친구는 인간이 돌아가지 않겠다고 했다지만 사실 그 앤 한 번도 돌아가고 싶다고 말한 적 없었다. 집에 가고 싶다는 말도 나와 함께 살고 싶다는 말도 하지 않았지. 그 아인 책을 읽던 내게 다가와서는, 엄마. 저는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요. 엄마를 슬프게 하려고 나가는 것도, 죽으려고 나가는 것도 아니에요. 엄마한테야 어린애로 보이겠지만 인간 나이로는 이미 다 컸는걸요. 전 괜찮아요. 믿어주세요. 저는 죽지 않을 거예요. 아주 오래 전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거리낌 없이 엄마라고 불렀지. 손이 떨리고 있었지만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내게 말했어. 사실 엄마랑 더 많은 걸 해 보고 싶었어요. 달팽이에 대한 책도 읽고, 엄마가 좋아하는 벌레잡이 장소도 구경하고 싶고.. 저도 엄마랑 더 있고 싶어요. 하지만 저는 가야 할 곳이 있어요. 절대 엄마를 사랑하지 않아서 가는 게 아니란 것만 알아주세요. 내 품에 안겨오던 따스한 체온. 네가 시나몬도 버터스카치도 좋아할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던 순간처럼, 우린 이미 오래 전부터 서로를 사랑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분명 그날 처음 만난 아이였을 텐데, 왜 그렇게 애틋했는지.. 바깥에서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앞으로도 약속 잘 지켜 주시기예요. 장난스레 말해 보니 그제야 힘 빠진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그 애가 만나야 한다고 한 사람이 어쩌면 당신이었을까요. 소리 내 말하지는 않았다.

 

지름길을 사용할 수 있었지만 부러 걸었다. 네 뒤를 밟은 곳. 너와 악수한 곳. 너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뒤를 돌아 내 손을 잡았지. 너는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나와 악수를 했을지.

입 꾹 닫고 있으면 내가 영원히 모를 줄 알았는가. 전부 새어나오고 있었다. 시간여행자임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던데. 내가 틀렸나? 그럴 수도 있겠고. 어쨌거나 나를 만난 적 있다면 너도 알았을 텐데 내가 어떤 괴물인지. 네 지난 삶에서 난 널 믿지 않았을 것이고 때론 불쾌히 굴었을 것이고 속없이 입에 발린 소리만 늘어놓았을 것인데.

물으려면 물을 수는 있었다. 그럼에도 왜 날 사랑하느냐고. 그러나 대답하지 않을 걸 알아 나는 네게 묻기보다 내 안 깊숙이 묻어놓기를 택했다. 장기라고는 회피 그리고 포기뿐이었으니 자리는 많았다.

 

멀리 위에서 햇빛이 가늘게 들어온다. 몸을 일으키면 훅 끼치는 꽃향기와 풀 냄새. 나를 받아낸 꽃줄기는 무자비하게 꺾이고 뭉개져 있다. 멍하니 손가락 끝을 맞대 비벼 본다. 뭉쳐 떨어지는 괴물의 유해는 없었다. 플라위는 어느 순간부터 다시 시작하는 내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자신과 비슷한 길을 걷는 내가 역겨워진 거라면 이해하고도 남았다. 나도 그렇거든.

어쩌다 샌즈를 사랑하게 되었을까 되새기다 보면 간혹 내가 사랑하는 것이 과연 네가 맞기는 한지 네가 아니라 내 머릿속에서 사랑에 사랑을 거듭하여 왜곡과 오류로 시커멓게 덧칠된 정체모를 망상을 너라 믿고 사랑하는 것은 아닐지 두려워질 때도 있었지만 하얀 눈밭을 걸어와 악수를 청하는 너와 마주하는 순간이 오면 아, 너를 사랑한다고. 네 세상에 다정한 널 사랑한다고 말라버린 울음을 고요히 울었다.

어쩌다 너를 사랑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회상으로 돌아가자. 네가 날 시간여행자라 추측했다 밝힌 그 때 너는 내게 웃기지도 않은 비밀 암호문을 속삭였고. 비밀의 비밀 암호문이니 뭐니 지저분한 문장 몇 가지를 주고받은 후 너는 네 방 열쇠를 건네고 사라졌다. 절대 만족하지 못하는 누군가들을 위해 네 사적인 공간마저 떼어 팔았음을 그땐 미처 몰랐다.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언제 가도 굳게 잠겨 있던 네 방을 보고 싶었다. 그 문을 연 것을 후회하나. 그럴지 모른다.

끝없는 어둠이었다. 비유 같은 것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였다. 전후좌우 어디로 걸어가도 방이라면 마땅히 있을 벽 비슷한 것은 있지도 않았고 바람 소리만 점점 거세지는데 바람 소리? 방 안에? 이내 주위가 밝아지고 파피루스가 왜 컴컴한 방 안에서 러닝머신을 하느냐 내게 물었지만 난 아직도 그곳이 어디였던지 러닝머신 위는 아니었으리라 믿는다. 진실은 내가 낚였다는 거라고? 글쎄.

뒤늦게 형태가 보인 네 방엔 별 것도 없었다. 초록색 커버인지 이불인지는 어떻게 구겨져 있는 건지 차마 모를 구 형태로 매트리스 위에 덩그러니 올라가 있었다. 지저분하게 널린 양말과 쓰레기가 토네이도를 이루고 있었고... 아니 정말로 토네이도였다. 양말과 쓰레기가 구석에서 회오리치며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다고! 그리고 서랍장과.. 서랍장 위에 올라가 있는 스탠드 조명.. 왜 안에 전구가 아니라 손전등이 달려 있는 거야?! 나중에 알았지만, 그 손전등도 전지가 나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보인 건 한 통의 편지였다. 파피루스가 산타에게 쓴 감사 편지. 파피루스 방의 액션 피규어 일곱 개는 산타에게 받았다지. 그래. 네 동생 사랑은 이걸로 더 잘 알겠고. 그래서 이게 끝인가? 잡동사니로 구색만 갖춘 더럽고 초라한 방? 볼 게 없진 않지만 너무 시시한데. 이게 네 비밀의 전부란 말인가. 그러고 보니 서랍장을 열어보지 않았다. 무언가 더 흥미로운 물건을 찾길 기대하며 손잡이를 잡았지. 그리하여 절망의 막이 올랐다.

서랍에서 찾은 은빛 열쇠가 들어맞는 곳을 찾아 온 집안을 기웃거렸다. 무례한 일이라는 건 잘 알고 있지만 그 순간 나는 탐구심으로 뭉쳐진 작은 재앙이었다. 아, 여긴가 보다. 집 뒤 숨겨진 문. 창고인가? 창고는 집 옆에도 있는데.

되풀이한다. 그 문을 연 것을 후회하나? 열지 말았어야 했다.

용도를 알 수 없는 커다란 기계와 청사진, 서랍, 서랍에 든 사진. 모든 것이 깨끗하게 정돈된 작은 공간에 내가 모르는 네가 있다. 어떤 옷을 입고 어떤 표정을 지었고 어떤 행동을 했는지 가늠할 수 없는 네 과거가 여기에 있었다. 어쩌면 평생 누군지 알 수 없을 것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 사진 속 너는 행복해 보였고. 내가 아직 모르는 네 일이 있다는 증거를 고스란히 목격한 나는 수백 수천 번 너와 다시 악수하더라도 네 모든 정보를 알고 싶다 욕망하였으나 어떤 비밀은 내게 허락되지 않았다는 걸 몇 번이고 삶을 되풀이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왔을 때였다.

더 이상 작은 재앙이 될 수 없었다. 나는 탐구심을 감히 사랑이라 이름 붙여 태어난 재앙. 너의 삶을 송두리째 삼킨 거대한 재앙이었다.

어딘가에서 비가 내리고 있다. 그러니 제발 나를 미워해.

 

어두운 연구실 커다란 모니터 빛만이 두 괴물을 비춘다. 꼭 이렇게 큰 걸로 봐야 해?

그냥 기분 내 보는 거지. 새 프로그램이니까. 모니터에서 메타톤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다음 방송이 곧 시작됩니다. 채널 고정하세요!

기분 내는 건 네 마음인데 나는 왜 불렀어?

에이, 인간도 나오잖아. 같이 봐 줘. 메타톤이 가득한 광고만 줄곧 이어지는 모니터를 떨떠름히 보던 샌즈에게 과자 봉지를 뜯어 내밀었다. 아직 인간이 불편해?

알피스의 물음에 대답하지 못한다. 샌즈는 이대로도 괜찮았다. 지상으로 나가 봤자 네 변덕에 모든 기억이 뜯겨나갈 것을. 그렇다면 차라리 언제든 보이는 곳에 두고 명이 다할 때까지 어영부영 시간을 끄는 것도 샌즈에겐 나쁘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너는 어떨까? 너는 절대 만족할 수 없는 부류의 인간이지. 너를 이 시간선에 붙잡아두려면.

대충 사랑한다고 말해 주면 어떻게든 될 것 같은데 그렇게 하기는 싫네. 거의 누운 채 비스듬히 앉아 감자 칩을 우겨넣는다.

방금 뭐라고 했어?

아니야. 방송 시작한다. 알피스는 더 묻지 않았다.

새 방송은 뮤지컬 스타일 음악 프로그램이었다. 하늘색 드레스를 입은 메타톤이 사뿐사뿐 계단을 내려오자 검은 정장 차림의 인간이 하얀 장갑 낀 손을 내민다. 배터리 문제를 개선해서 이제 저 모습으로 방송을 할 수 있게 됐다며 뿌듯해하는 알피스의 말을 샌즈는 귓등으로 듣고 흘렸다. 귀는 없지만. 연인을 향한 애끓는 마음을 노래하는 가늘고 높은 목소리가 몇 번을 들어도 낯설었다. 커다란 모니터에 가득 찬 인간의 검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친다. 내가 보이고 있을까. 샌즈는 눈을 한 번 깜박인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맥주 없어?

그냥 탄산음료 마셔. 알피스는 영리한 괴물이었다. 샌즈 역시 자신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모자라지는 않을 것을 알았다. 그럼에 알피스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메타톤은 인간이 지하에 계속 머물 것이라는 걸 알게 되자마자 자신과 정식으로 계약을 맺어 방송에 출연하길 권했다. 원한다면 호텔 공연도. 인간은 흔쾌히 수락했고 이후 퀴즈 쇼, 요리 프로그램, 뉴스 등의 여러 방송에서 인간은 ‘인간 역’으로 출연하기 시작했다. MTT 방송 모든 스프라이트는 스타 메타톤을 위한 것이므로 인간은 어디까지나 조연에 불과했지만 종종 메타톤보다 아주 약간밖에 모자라지 않은 정도의 찬사를 받기도 했는데 노래할 때가 그랬다. 호텔 공연 무대에 선 인간은 마이크를 두 손으로 잡고 간주가 흐르는 동안 천천히 관객들을 훑어본다. 이미 제 공연을 끝내고 사람들 틈에 섞인 한 괴물과 시선이 마주치면 눈을 한 번 깜박였다. 조명 빛을 받아 유리처럼 반짝이는 새까만 눈. 메타톤은 그런 눈을 전에 지겨우리만치 본 적 있었다. 그래요. 달링. 사랑에 빠졌을 확률 101%. 오차범위, 1%. 하지만 그건 달링이 알아서 할 일이고, 저는 제 일을 해야겠죠? 기회를 놓치지 않는 사람만이 스타가 된답니다! 분명 인기 쇼를 만들 수 있을 거예요.

 

인간은 자신이 노래하는 목소리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번에 노래를 부르기로 한 것은 아주 예전 어느 시간선 한 순간에서 그의 노래가 듣기 좋다 해 준 샌즈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더 이상 희망도 사랑도 영광도 없고, 해피 엔딩도 없겠죠... 인간은 그때 불렀던 노래를 기억한다.

해피 엔딩이 있었다. 지하 괴물 모두를 지상으로 돌려보내준 적이 분명 있었다. 함께 석양을 바라보며 미래를 말하고 엄마와 함께 살고 싶다 말했다. 토리엘의 손을 잡고 한 발 내딛었으나 순간 모든 것이 암전되었다. 엄마? 토리엘! 파피루스! 언다인! 불러 보았으나 아무도 오지 않았다. 어둠 속 멀리 의지만이 빛나고 있었다. 빛을 향해 달려가 손을 뻗으려는 순간 불쑥 땅 아래서 무언가 튀어나왔다.

안녕. 널 빼고 모두 행복해진 것 같네.

플라위?

이상하지. 이게 분명 최고의 해피 엔딩으로 가는 길이었을 텐데. 너만 남겨져 버리다니... 네가 한 일이 헛수고는 아니었어. 네 친구들은 지금 지상에서 행복해. 하지만.. 네 마음도 이해할 수 있어. 친구들을 다시 만나고 싶겠지. 플라위가 잠시 뜸을 들인다.

만약에, 리셋할 거라면.. 그땐 내 기억도 전부 지워 줘. 그냥, 이 말 하려고 왔어. 미안해. 그러고는 도로 사라진다. 의지 앞에 나를 남겨 둔 채.

바람 소리만이 울리는 공허 눈을 감으면 까무룩 잠이 들었고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는 지상의 괴물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빨간 스포츠카를 타고 드라이브를 즐기는 파피루스 교사의 꿈을 이룬 토리엘 해변에서 알피스 뺨에 입 맞추는 언다인 그들은 행복해 보였다 내가 행복할 수 없었던 지상에서. 누군가 나에게 산을 오른 이유를 물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그래 지상의 삶에서 도망쳐 지하에 닿았다. 의지. 살고자 하는 힘. 나를 되살아나게 하는 힘. 나의 의지론 지상에 닿을 수 없었다 지상에서 다시 살아갈 의지가 없었다. 그리하여 나 홀로 지하와 지상 사이 틈에 남겨졌다. 너희 모두 행복해졌다지만 나는 이기적이기 그지없게 내가 행복하고 싶었다 이 지하에서.

세계가 되돌아갔다. 오로지 나의 욕심으로.

반복되는 삶 속에서 나는 너를 사랑하고 네 세계를 사랑하고 너와 함께하고 싶어 우리가 모두 행복해질 수 있는 해피 엔딩을 찾으려 내가 갈 수 있는 모든 끝이란 끝은 전부 들쑤셨지만 그 어떤 곳에서도 우린 함께할 수 없었지 어떤 끝에서는 내가 어디에 있던 행복하길 바란다는 언다인의 메시지가 핸드폰에서 재생되었고 난 가증스런 죄책의 눈물 흘리며 문장 하나하나 가슴에 품은 채 영영 공허 안에 잠들기를 바랐다만 눈을 감으면 네가 보고 싶어서. 네가 이번엔 무슨 말을 할지 어떤 비밀을 보여줄지 알고 싶어서. 네 비밀 연구실 문을 열었던 순간 심어진 욕망의 싹이 손끝까지 덩굴을 뻗었고 세계는 또다시 되돌려진다.

처음부터 내가 없어야 너희가 행복할 수 있었는데. 아무것도 몰랐던 그 때, 너흴 처음 지상으로 올려 보냈던 그 순간에 모든 걸 포기하고 공허에 흩어져야 했는데. 이제 너무 많이 알아버렸고 나의 행복 나의 욕망 아무것도 포기할 수 없었다. 내가 포기한 건 이 세상을 위한 해피 엔딩과 너의 행복이었지.

난 이 지하의 재앙. 불시에 몰아닥칠 재해. 변치 않을 사실이었다.

과연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 네 행복을 담보로 내 행복을 움켜쥔 내게 널 사랑할 자격이 있냔 말이다.

 

고작 탄산음료 몇 모금 따위로 갈증이 가실 리 없었다. 그릴비즈에 오늘도 외상을 달아 두고 집으로 향한다. 술기운으로 뜨뜻한 얼굴에 찬 공기가 스쳤다.

현관에 들어서자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소파에 웅크려 자고 있는 인간이 보였다. 방금 전까지 알피스와 보았던 그 방송을 끝마치고 돌아와 잠시 쉬려다 그만 잠든 모양이었다. 안 좋은 꿈이라도 꾸는지 드문드문 찌푸려지는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너네 집 소파에서 자면 등 아프다고 파피루스에게 투덜대던 언다인이 문득 기억났다.

내가 사랑한다 말하면 넌 그런 말을 할 수 밖에 없도록 날 몰아갔다는 사실에 슬퍼하겠지. 너는 날 두려워한다. 혹여 심기를 거스를까 미움 받을까 안절부절 못한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해본들 소용없다. 네 눈에서 모든 게 보였다. 모든 색을 섞으면 검정이 되듯 네 눈도 모든 걸 담고 있었다.

얼마나 이 삶을 반복해 왔는지 넌 길 한 번 잃는 일이 없었고 지하 전체의 퍼즐 풀이에 막힘이 없었다. 심지어 누가 어디서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외워버린 듯했지만 내 앞에선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내뱉어지지 못한 말들이 네 붉은 핏줄을 타고 전신에 떠돌겠지 그 중 나를 향한 사랑 고백도 있었으리라. 나도 네게 묻지 않았다. 역시 음성이 될 수 없던 나의 말은 갈비뼈 사이로 드나드는 차가운 바람에 실려 날아갔겠지. 네게 들렸을까 듣지 못했을까.

그저 고요했다. 잠든 인간의 규칙적인 숨소리만이 작게 들렸다.

두려움 역시 사랑일까. 묻는다면 그럴 수도 있을 거라 하겠다. 깊은 뜻은 없다. 고민하기도 귀찮았다.

 

현관문이 열린 것 같았는데 이상하게 조용해 파피루스는 방문을 열고 나가 1층을 내려다봤다. 소파에서 잠든 인간 앞에 우두커니 선 샌즈의 하얀 정수리가 눈에 들어오자 파피루스는 조용히 도로 들어가 방문을 닫았다. 잠자기 전 책을 읽어 줄 시간이라는 걸 샌즈가 잊어버린 것 같았지만 오늘 하루는 위대한 파피루스님의 넓은 아량으로 전부 용서하기로 했다.

인간은 샌즈 형을 좋아하는 거지? 어떻게 알았냐고? 그거야 쉽지! 데이트를 끝마칠 때, 키스해주지 않아도 울지 말아달라는 내 말에 인간은 실망했지. 난 입술도 없는걸! 인간은 말했어. 해골에게 입술이 없어도 내가 입술이 있으니까 키스할 수 있지 않아?

오, 이건 새로운 발상의 전환인걸... 그러나 인간, 그게 내가 네게 키스해 줄 수 있는 이유가 되진 못해! 그건 네가 나한테 키스하는 거잖아! 다행히 인간은 납득해 줬지만, 난 생각에 잠겼지... 인간은 해골과 키스하고 싶은 건가? 그야 해골이 개보다는 좋은 결혼 상대긴 하지만, 나로선 이루어 줄 수 없는 소원이야.... 오, 가여운 인간! 그렇지만 곧 깨달았어. 인간이 키스받길 원했던 해골은 내가 아니었다는 걸. 해답은 우리의 아주 플라토닉했던 전화 통화에 있었지. 정말 몰랐어, 인간? 내가 샌즈 형 이야기를 할 때마다 웃었잖아. 알피스 박사 이야기를 하는 언다인과 똑같았어.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는 것마저 언다인과 똑같았지! 하지만 인간. 언다인과 알피스 박사는 이제 대화를 나눴어. 그리고 서로 사랑한다는 걸 알았지. 사랑은 아주 어렵고 복잡한 퍼즐이야. 허나 모든 퍼즐엔 반드시 해답이 있노라! 답을 찾는 과정에 시행착오가 있는 건 당연해. 해피 엔딩으로 가는 첫 걸음은 바로 대화라는 걸 이 위대한 파피루스님이 보장하지!

 

잠든 인간의 미간을 아주 조심스레 툭 건드려 보았다. 널 사랑할 순 없어도 동정은 할 수 있겠지. 너 역시 앞으로도 아무 말 말아라. 나를 사랑한다고, 네가 지하의 시간을 되돌리고 또 되돌려온 것이 내 탓이라 인정하지 말거라. 이대로 내 심기에 맞춰주는 척 내게 고분고분 따르는 척 나를 두려워하는 척 하며 그저 너를 불쌍히 여길 수 있도록 노력해라. 아무것도 변하지 않도록. 진실을 외면한 채 내가 네 우위에 있다고 착각할 수 있는 삶을 미적지근히 살자. 소파 앞 붙박였던 다리가 이제야 움직였다. 왠지 네 머리카락을 만져 보고 싶어졌지만 샌즈는 등을 돌렸다.

샌즈의 방문이 닫히자 인간은 눈을 가늘게 떠 보았다. 꿈이었을까? 뭔들 어떠리. 아직 몽롱했다. 차가운 빗물처럼 닿아온 손끝을 되새기며 도로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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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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