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어바등-재희무현

[재희무현] 환연 一.

무협 au

-2차에 맞춰 각색, 변형된 설정들이 많습니다. 주의.

“다 떨어지면 그 때 또 와요.”

“고맙다….”

죽바구니를 등에 지고 돌아오던 무현은 담 너머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발걸음을 잠시 멈췄다가 빨리 놀렸다. 담을 막 돌자 대문 삼아 얼기설기 나뭇가지로 얽은 문 앞에 그의 동생 무진이 무현의 반대편 방향으로 느리게 걸어가는 여성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무현이 헛기침으로 인기척을 내자 무진이 여성에게서 시선을 떼고 무현 쪽을 돌아 봤다.

“아, 형. 왔어?”

“응. 누구 오셨어?”

“왜 그…얼마 전에 사고로 아들 잃으신 황 부인….”

“아….”

황씨 부부는 금슬은 나쁘지 않았으나 아이가 계속 생기지 않다가 늦게나마 겨우 외동아들을 얻었다. 열 살 생일이 머지 않은 시점에 친구들과 놀러 나갔다가 계곡에 빠져 익사한 후로 부군은 모든 기력을 잃었고 부인은 두문불출했었는데….

무현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멀어지는 부인의 뒷모습을 보다가 무진에게 시선을 돌리자 동생이 어깨를 으쓱였다.

“부군이 밥도 안 먹고 일을 하다가 쓰러지셨대. 남편마저 쓰러지니까 부인이 정신을 차리고 약을 얻으러 나오셨나봐. 외상으로 드리긴 했는데…못 받을 가능성이 높겠지?”

“그래. 못 주신다고 하면 구태여 받으려 하지 마라.”

“응. 약초는 많이 캤어?”

“다음엔 좀 더 멀리 가봐야할 것 같아.”

마당으로 들어온 무현이 죽바구니를 내려 놓았다. 약초와 식용 풀이 뒤섞인 죽바구니는 겨우 반쯤 차는 듯 했다. 바구니를 들여다 본 무진이 다음엔 본인이 가겠다고 나서자 무현은 안 된다며 잠시 실랑이를 벌였다. 지학도 안 된 게 무슨 산을 타냐, 어머니나 모셔라. 그러는 형은 이립이 되서 장가도 안 가고 뭐하는거냐, 놀 시간이 없으니 연애도 못 하지! 아웅다웅 다투던 그들은 마루에서 바느질을 하던 어머니가 입씨름할 시간 있으면 밥하고 장작이나 패라는 일갈에 흩어졌다.

“수가 모자라는군.”

“주변을 다 돌아보았는데 찾지 못하여서요. 미안합니다.”

죽책에 먹을 묻힌 붓으로 표기를 하던 남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옆에 지게를 내려놓고 공손히 두 손을 모으고 있는 사내는 신씨세가에 줄을 댈 여력도 없어 보였고 신분이나 인맥이 좋아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몇 년간 꾸준히 거래를 끊지 않고 있었다.

“미안할 건 없고, 계약과는 다르니 돈을 드리기 어렵겠소.”

“예…. 다음 번엔 꼭 수에 맞춰서 가져오겠습니다.”

남자는 사내에게 들으란 듯이 혀를 찼다. 애초에 신씨세가에서 이런 비루한 사내와 개인적으로 거래할 이유가 없었다. 약초상을 아우르는 거대 상회와 이미 거래를 하고 있는데 왜 이런 하잘것 없어 보이는 평민과 굳이 따로 거래를 하는 건지. 물론 이 약초꾼이 가져오는 풀은 상회에서 취급하는 것보다 질이 좋다고는 들었다. 저 깊은 산에서 어찌 이리 좋은 품질의 풀만 찾아 오는 거냐며 약방의 허 씨가 감탄했노라고 하인들끼리 수군거렸으니까.

하지만, 뭐? 풀 따위의 품질이 좋든 안좋든 그건 신씨세가의 창고 관리장인 자신이 알 바가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거래를 좀 트게 해달라며 괴롭히는 지인들 사이에서 물어뜯기던 남자는 이 박 무현인지 박 무시깽인지 하는 사내가 영 거슬렸다. 전임자는 되도록 박 무현에게 잘 해주라 일렀지만 남자는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럼 도로 가져가쇼.”

“아. 혹시 가져온 만큼이라도 값을 쳐줄 수는 없습니까?”

“아니, 이런 뻔뻔한 사람을 봤나? 요구한 양의 절반도 채 못 가져와놓고 값을 쳐달라니? 거래 파기의 댓가로 무상으로 내놓고 꺼지라고 하는 수도 있-”

“와. 꺼지라고 해 봐. 어떻게 되나 진짜 궁금하다.”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지르던 창고 관리장의 옆에서 웃음이 섞인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남자가 잔뜩 찌푸린 얼굴을 홱 돌리자 처음에 눈에 보인 것은 넓은 가슴팍이었다. 잠시 시야에 들어온 정보를 파악하느라 반응이 늦은 남자가 다시 고개를 위로 들자 소가주의 직속 호위단장과 눈이 마주쳤다.

“서, 서 지혁 단장….”

“응? 나는 알아? 그럼 소가주도 알고 있단 소린데.”

지혁이 눈을 휘어 웃으며 허리를 굽혔다. 지혁보다 머리 두 개는 작은 남자가 힉 하는 소리를 내며 그 자리에 굳었다.

“전임자한테 못 들었어? 여기 박 선생님한테 잘 해드리라고? 아, 전임자랑 사이 안 좋았댔나? 그래서 대충 일러줬구나? 박 선생님한테 함부로 굴면 어떻게 되는지-”

지혁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이유 모를 한기가 느껴졌다. 남자가 새하얘진 안색으로 지혁을 올려보다가 침을 꿀꺽 삼키려는데, 옆에서 손바닥이 훅 들어와 지혁과 남자 사이를 가렸다.

“그만 하세요, 단장님.”

“존칭하지 마시라니까요.”

손바닥으로 남자와 호위단장의 시야를 가린 무현이 지혁의 눈을 바로 쳐다봤다.

“애초에 제가 먼저 약속을 어겼어요. 이 분은 할 일을 하신 것 뿐이니 위협하지 마세요.”

“절반을 가져왔으면 절반 값이라도 치러야죠. 이건 저희 창고지기가 무현 씨에게 무례한 겁니다. 그리고….”

지혁은 무현의 손목을 가볍게 잡아 내렸다. 손바닥 한 장으로 가려져 있던 남자가 지혁과 눈이 마주치자 하얘졌던 얼굴이 시퍼렇게 질리기 시작했다.

“신 해, 아니 소가주께서 이 광경을 봤으면 자네는 당장 모가지야. 알아?”

지혁이 웃는 낯을 지우고 남자를 차갑게 내려봤다. 지혁이 남자에게 손을 내밀자 처음엔 영문을 모르고 눈치를 보던 남자는 뒤늦게 아, 하는 소리를 내며 제 손에 있던 죽책과 붓을 지혁에게 건넸다. 지혁은 그 자리에서 죽책에 수령 표시를 하고 준비되어 있던 돈주머니를 무현에게 쥐여주었다.

“이건 제가 가져온 약초보다 값이 더 되는데요.”

“욕 보신 값입니다. 그걸로 저 밥이나 사주시죠?”

“…그러려고 더 주신거죠? 이거 횡령이에요.”

“네, 네. 저 배고파요. 얼렁 갑시다.”

가문의 돈을 이런 식으로 함부로 쓰면 안된다는 무현의 잔소리를 흘려 들으며 지혁은 무현의 등을 밀어 대문 밖으로 내보냈다. 지혁이 시야에서 사라지고나서야 창고 관리장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하인들이 ‘그러게 왜 박 선생을….’ 하며 안타깝게 혀를 차고 지나갔다.

지혁이 무현을 끌고 간 곳은 꽤 큰 객잔이었다. 처음엔 부부가 작게 시작한 가게였는데 맛이 좋기로 소문이 나 유명해지면서 장터에서 가장 큰 부지를 사서 건물을 올렸다고 한다. 과연 소문처럼 문전성시로 와글거리는 대문을 보며 무현이 질린 얼굴로 다른 데로 가자고 지혁을 이끌었지만 지혁은 요령 좋게 무현을 옆구리에 끼고 그 속을 뚫고 지나 바깥 자리에 간신히 앉았다.

선객이 자리를 비우자마자 귀신같이 자리를 차지한 지혁 때문에 근처에서 기회를 노리던 사람들이 아우성쳤지만 지혁이 차고 있는 칼을 발견하자 잠잠해졌다. 무현이 멋쩍게 지혁과 마주앉아 시선을 내리깔고 있는 사이, 누군가 탁자 옆에 와서 섰다.

“주문 도와드릴까요?”

“여기 소면 두 그릇이랑 동파육 하나 주게.”

“동파육은 준비한 양이 다 떨어져서 지금은 안 됩니다.”

“에엥…. 그럼 고기 뭐 되나? 백육은 돼?”

“다 안 됩니다. 지금 소면이랑 찐빵만 돼요. 아 술은 돼요.”

점소이의 단호한 응대에 지혁이 실망한 표정으로 무현을 보자, 무현은 줄곧 내리고 있던 시선을 들어 점소이를 쳐다봤다.

“그럼 그냥 소면만 주세요.”

“네에.”

붉은 머리. 가느다랗게 접히는 눈. 무현은 잠시 그가 남장한 여자인 줄 알고 눈을 깜빡이다가 주문을 받고 돌아선 그의 체격이 저보다 좋은 것을 확인하고서야 시선을 뗐다.

“머리가 붉은 색이라 신경 쓰여요?”

“예?”

무현은 그제야 자신이 점소이를 보다가 몸을 아예 돌리고 앉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랴부랴 바르게 앉은 무현에게 지혁이 웃으며 탁자 위로 팔을 올려 턱을 괴었다.

“듣기로는 객잔주의 어머니가 서방 지역 출신이라더군요. 적발을 가진 사람들이 산다고 하던데, 객잔주의 외가 친척이 일자리를 찾는다는 편지를 받았다고 들었어요. 아마 저 친구가 그 친척인가 싶네요.”

“그, 그렇군요. 그럼 멀리서 왔겠네요.”

무현은 티나지 않게 주의하며 점소이를 돌아봤다. 일에 방해되지 않도록 천으로 틀어 올린 머리 밑으로 짧은 끈이, 점소이가 움직일 때마다 가볍게 흔들렸다. 멋으로 일부러 흘린 듯한 잔머리가 햇빛을 받아 빨갛게 반짝거리는 것을 멍하니 보던 무현은 그가 탁자 위로 그릇을 내려놓으며 말을 걸자 화들짝 놀랐다.

“맛있게 드세요.”

저를 빤히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점소이는 그 말을 하며 살짝 웃어보이고 떠났다. 무현은 부끄러움과 무안함으로 홧홧해진 귀를 만지작거리며 젓가락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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