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희무현] 신께서 보살펴주는 ▢▢ 中
인간 재희x신 무현
-조선시대. 고증x
-재희 형 이름 날조.
무현이라 이름을 밝힌 사내는 재희를 업고 노랗게 변한 강물을 건너 진창이 된 산길을 내려갔다. 저 멀리 보이는 마을 입구에서 횃불을 든 사람들이 비가 그쳤으니 이제라도 사당에 가자는 사람과 폭우 직후에 산에 가는 것은 위험하다며 반대하는 사람들이 옥신각신 다투는 것이 보였다. 사내는 사람들이 몰려 있는 것을 보고 발걸음을 멈추더니 재희를 곧장 내려놓을 것처럼 팔에 힘을 풀었다. 허벅지를 받쳐주던 힘이 한순간에 사라지자 놀란 재희가 무현의 목에 걸고 있던 제 팔을 더 단단히 죄었다.
“절 진흙탕 바닥에 내려놓을 생각이신가요?!”
“…마을 사람들이 있으니 이제 괜찮잖아요.”
“안 돼요. 집까지 데려다주세요! 그리고 선비님도 다 젖었는데 저희 집에서 쉬고 가세요.”
“저는…돌아가야 해요.”
“안 돼요…!”
재희는 힘껏 매달렸다. 이대로 그를 보내면 얼굴도 기억 안 나는 그날의 행상인처럼 다시는 보지 못할 듯한 직감이 들었다. 이 남자가 만약 진짜 신이 맞다면 재희는 그에게 물어볼 것이 많았다. 이대로 보낼 수 없었다.
재희는 저를 떼어 놓고 뒤도 보지 않고 돌아갈 것처럼 구는 그의 등에 찰싹 달라붙었다. 사내는 곤란한 듯 옅은 신음을 내더니 꽤 오랜 침묵이 흐른 후에야 다시 재희의 허벅지 밑으로 제 손을 넣어 올렸다.
“…알았어요. 당신 집으로 가요.”
체념섞인 사내의 목소리에 재희는 안심했다. 마을 어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양반 행색의 남자와 뒤에 매달려오는 소년을 경계했다가, 곧 소년이 재희인 것을 알아보고 우르르 몰려 들었다. 재희는 멀쩡히 살아 있는 마을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확인하는듯 싶더니 기절해버렸다.
짹짹거리는 소리에 재희가 눈을 떴다. 창호지가 하얗게 빛나는 문을 멍하니 보던 재희는 해가 중천에 떴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급히 방문을 열어 젖혔다.
“아, 일어났어요?”
툇마루에 앉아 차를 음미하던 무현이 태연하게 인사를 건넸다. 무현은 재희의 아버지가 혼례식처럼 큰 경삿날에나 입는 제일 아끼던 귀한 옷을 입고 있었는데 비단옷은 아니었지만 꽤나 어울렸다. 아니, 애초에 제 옷 마냥 편하게 입고 있는 모습이 너무 잘 어울려서 평소에 무명옷을 즐겨입나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재희가 덜 깬 얼굴로 무현을 빤히 쳐다보다 그가 문 옆을 가리키는 것을 보고 시선을 옮겼다. 세숫물이 떠져 있었다. 그의 가족들은 이 시간에 일하느라 바빴을테니, 아마 무현이 떠놓은 걸테지. 재희는 얼른 마루로 나와 대야에 담긴 물에 두 손을 담갔다가 눈을 크게 떴다. 차가운 물 때문이 아니라 물에 비친 모습이 너무 생경했다.
“뭐…”
충격에 빠진 재희가 땋여 있던 머리를 풀어 손바닥에 흩뜨렸다. 노인마냥 새하얗게 변한 머리에 재희가 멍하니 머리카락을 쳐다보다가 무현을 돌아봤다. 그는 방 밖으로 나온 제가 이런 상태임을 봤을텐데도 놀라지 않았다.
재희와 눈이 마주친 무현은 그가 제 머리카락을 쥐고 충격 받은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자 어색하게 웃었다. 그 웃음에 재희는 침착하게 숨을 골랐다.
머리카락에서 눈을 떼고 가까스로 세수를 마친 재희는 예비로 비치해뒀던 의족을 끼고 물을 마당 구석에 버렸다. 비에 젖은 도포가 어디로 갔나 했더니 마당의 빨랫줄에 널려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젖은 비단은 이런 소리가 나는구나. 실없는 생각을 하던 재희는 무현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어제 다리에 끼고 있던 거랑은 색이 다르네요.”
“아, 이거요.”
재희가 제 무릎 밑을 내려봤다. 평소에 사용하던 것은 옻칠을 해 튼튼하게 만든 의족이었지만 산길과 강물로 혹사당해 망가져버렸다. 모양을 맞춰 깎아두기만 한 예비용 의족은 나무색 그대로라 하얗게 보였다. 의족을 가만히 보던 재희의 눈에 하얗게 센 머리카락 끝이 들어왔다.
“…색이 다른 게 지금 의족만이 아닌데요.”
“….”
눈을 가늘게 뜬 재희가 성큼성큼 걸어가 마루에 반쯤 걸터앉더니 무현을 돌아봤다. 무현은 그의 눈을 피했다가 한 바퀴 시선을 굴리더니 어렵게 맞춰왔다.
“제 머리 왜…아니 왜인지는 알 것 같고, 어떡해요? 다시 돌아갈 수 있어요?”
재희는 생생하게 겪은 지난 며칠을 머리 속에서 털어내려는 듯 거칠게 흔들었다. 몇 번이나 죽었는지 손가락을 접어 세다가 열 손가락을 전부 접은 후부터는 굳이 헤아리지 않았다. 심적으로 아주 힘든 일을 겪으면 새치가 많아진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재희처럼 몇 십번이나 죽거나 시체를 봤다면 하루만에 머리가 전부 하얗게 되는 것도 당연했다.
재희는 일부러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아침해가 떴고, 도적들은 강에 떠내려갔으며, 마을은 무사했다. 천천히 심호흡을 마친 재희는 눈 앞의 상대를 가만히 응시했다. 무현은 곤란한 표정으로 눈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글쎄요….”
“저 아직 스무 살도 안 됐는데 호호백발이 됐잖아요. 책임져요.”
“왜, 왜 저한테 그…래요?”
발뺌하는 무현을 보는 재희의 눈이 사나워졌다. 하지만 모른 척하는 상대를 몰아 붙였다가 도망갈까봐 재희는 일단 한 걸음 물러나기로 했다.
“…아까 의족 말인데요, 안 그래도 공방에 가려고 했는데 같이 가실래요?”
“공방이요?”
“색이 왜 다른지 궁금하다면서요. 따라와요.”
언제든 쉽게 사라질 수 있는 그를 혼자 두고 집을 떠날 생각은 없었다. 재희는 일단 풀었던 머리를 다시 땋고, 모시 두건을 머리에 둘러 머리카락을 숨겼다. 무현의 손목을 잡아 끌자, 호기심을 숨기지 못한 얼굴로 순순히 따라왔다.
재희는 몇 년 전에 목공 장인의 제자로 들어갔다. 제가 쓸 의족과 바퀴의자 정도는 스스로 수리하고 싶어서 목장木匠에게 배움을 청했는데, 목장은 재희의 재능을 눈여겨보고 그를 정식 제자로 받아주었다. 울퉁불퉁한 길에서 돌아다니지 못하는 재희가 농사일을 하기는 힘들었으므로 가족들도 소식을 반겼었다.
무현의 손을 잡고 마을을 가로지르자 지나가던 사람들이 아는 체를 했다. 어제 밤에 비오는 날 산에 들어갔다가 이방인에게 업혀 돌아와 기절까지 한 재희의 이야기가 하룻밤 사이에 소문이 쫙 돌았던 모양이다. 만나는 사람마다 몸은 괜찮냐, 이 분은 아는 분이냐 물어왔다. 재희는 웃으면서 대답해주다가 공방에 가 봐야 한다며 자리를 빠져나왔다.
“재희 씨, 사랑받고 있네요.”
“네? 아, 마을 사람들이요? 그런 편이죠.”
제 이름을 알려줬던가. 재희가 미간을 찌푸렸다가 금방 풀었다. 제 집에서 묵은 것을 보니 가족들이랑 인사를 한 모양인데, 그럼 가족들이 말해줬을테지.
“저 하나 때문에 온 마을 사람들이 길을 다 골라줬어요. 저희 집에서 저희 논밭가는 길이랑, 시장가는 길이랑, 목공소 다닌 후로는 목공소 가는 길까지.”
“아 어쩐지. 길에 돌부리 하나 없길래 신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무현이 왜인지 즐거운 기색으로 말했다. 목공소에 들어가자 발로 목재를 밟고 톱질하던 수염 난 남성이 재희와 무현을 쳐다봤다.
“어, 왔냐? 몸이 아파서 못 올 거 같다고 재현이가 언질해주고 갔던데.”
“안녕하세요, 사형. 스승님은요?”
“외양간 보수하러 나갔다. 나도 목재 보충하러 온 거야. 아, 그쪽 분이십니까? 우리 재희 업고 온 분이.”
“안녕하세요.”
재희 뒤에 따라온 말간 얼굴의 사내를 본 남자가 호탕하게 웃으며 가볍게 목례하더니 방금 썰어낸 목재를 척척 들고 밖으로 나섰다.
“양반이라 들었는데 말 편히 하쇼. 난 나갔다 올테니까 은인님이랑 조심히 있다 가라?”
무현에게 재희를 데려와 줘서 고맙다며 감사 인사를 남긴 남자는 수레에 목재를 싣고 바로 떠났다. 조용해진 공방 안에서 잠시 서 있던 그들은 머쓱하게 시선을 주고 받았다. 곧 재희가 무현에게 의자를 가져다 주었다. 차 대신 대접에 맹물이나마 떠다 준 재희는 그늘에서 건조 중이던 의족을 들고 돌아왔다. 어제 쓰던 것처럼 까맣지는 않았지만 아주 하얗지도 않았다.
“옻칠을 한 번 더 해주려고요. 방수도 되고 불에도 잘 안…아무튼 튼튼해지거든요.”
궁금한 눈으로 쳐다보는 무현에게 재희가 대답해주더니 한쪽에 마련된 작은 통에 담긴 액체를 그릇에 붓고 붓으로 액체를 묻혀 의족에 발랐다. 가까이 다가오려는 무현에게 두드러기가 날 수 있다고 말리려던 재희는 ‘신이 옻 두드러기도 나나?’ 싶어 입을 다물었다.
재희의 키가 큰 탓에 의족의 길이도 상당해서, 겨우 옻칠이 끝난 의족을 다시 그늘에 널어두려 일어났을 땐 무현은 다른 곳을 얼쩡거리고 있었다. 공방 구석구석을 구경 중인 무현의 뒤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재희는 작은 나무토막을 하나 꺼냈다. 완성되지 않은 목조각품들과 반짝거리는 자개장에 한참 정신이 뺏겼던 무현이 뒤늦게 재희에게 돌아오자 재희는 무현의 손가락에 방금 완성한 반지를 끼웠다.
평균적인 남성 손가락 크기에 맞춰 잘라뒀던 반지의 겉엔 뱀 같아 보이는 것이 음각으로 조각되어 있었다.
“이게 뭐죠? 뱀?”
“…뱀인걸로 해요.”
재희가 조금 언짢게 대답했다. 사실 용을 생각하고 만들었는데 작은 반지에 짧은 시간 동안 새기려 하니 세부적인 묘사가 생략되어버린 탓에 뱀으로 보여도 할 말이 없었다.
“고마워요. 귀여워요.”
무현이 반지 낀 손을 얼굴 가까이에 놓고 기쁜 듯이 손을 이리저리 돌려봤다.
“선물 많이 받으시잖아요.”
“이건 재희 씨가 절 위해 준 거잖아요.”
반대편 손으로 소중하게 반지를 쓰다듬는 모습을 지켜보던 재희는 무현이 무심코 흘린 말에 대꾸했다.
“역시 뒷산 사당의 주인 맞죠?”
“….”
무현이 반지를 보려 올리고 있던 손을 내렸다. 한참동안 대답이 없던 그는 재희를 보고 슬며시 웃었다. 그리고 검지를 세워 제 입술 사이로 눌렀다.
“이만 가봐야겠어요.”
“자, 잠깐만요.”
자리에서 일어나는 무현의 옷자락을 재희가 급하게 붙잡았다.
“그, 제가 자꾸 신이냐고 물어봐서 그래요? 더 안 물어볼테니까 더 있다 가요.”
“몰래 나온거라 돌아가야 해요.”
“가면 다시 안 올거잖아요.”
재희의 목소리가 떨리자 무현이 허리를 숙였다. 앉아 있는데다 고개까지 숙인 재희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자 무현은 한쪽 무릎을 꿇어 재희를 올려 봤다.
“…돌아올게요.”
무현이 나무로 만들어진 반지를 쓰다듬다가 품 속으로 손을 넣었다. 품에서 꺼낸 주먹을 재희에게 내밀자 재희가 망설이다가 그 아래에 제 손바닥을 폈다. 옥반지였다. 이 옥반지는 재희도 봤었다. 재작년 감사제에서 바친 선물 중 하나였다. 생각지 못한 물건에 재희가 잠시 정신이 팔렸다가 고개를 들었을 땐, 무현이 사라진 후였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