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어바등-재희무현

[재희무현] 공백

사고로 기억을 잃은 무현

-해피 아님.

지끈거리는 두통이 아득하게 느껴지다가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아파왔을 때, 나는 결국 눈을 떴다. 욱신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따끔거리는 것 같기도 한 것이 보통 두통이 아닌 모양이었다. 나는 손을 들어서 머리를 만지려다가 머리에 무언가 단단한것이 매어져 있는 것을 느끼고 눈을 깜빡였다. 잠에서 막 깬 상태라 깨닫지 못했는데 이제 보니 천장도 평범한 가정집 천장이 아니라 이십 년이 지났어도 종종 꿈에 나오곤 하는 병실 천장이었다.

내가 왜…. 어쩌다가, 입원을? 이라고 생각하자마자 머리가 찌릿했다. 분명 퇴근해서 재희랑 통화를 하면서 저녁밥을 사갈까 아니면 간단하게 장을 볼까 같은 이야기를 하다가, 뒤에서 머리에 충격을 받고 시야가 암전된 기억이 났다. 누군가한테 뒷통수를 맞을 정도로 원한을 산 기억은 없으니 퍽치기 같은 경범죄에 휘말린 모양이었다. 그럼 그렇게 정신을 잃고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지? 나는 핸드폰으로 달력을 보려다가 눈이 닿는 곳에 폰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누웠다. 보호자도 없는건가? 아니면 잠깐 나갔나? 정신을 잃은 자신이 병원에 실려왔다는 건 누군가 신고를 해줬다는 거고, 그럼 필연적으로 재희에게도 연락이 갔을 터였다. 왜냐면 내 단축번호 1번이 김재희니까. 우리는, 연인이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누워서 멀뚱하게 천장의 무늬를 세고 있는데 커튼이 걷혔다. 거의 동이 난 수액을 갈아주러 왔던 간호사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몇 번 눈을 깜빡거리더니 말을 걸었다.

“환자분, 정신이 드세요?”

“네.”

“성함은 기억나세요?”

“박 무현이요.”

“잠시만 계세요.”

의식이 안 돌아왔는데 눈만 뜨고 있었던 건지 확인한 모양이었다. 내가 멀쩡하게 이름을 대자 간호사는 의사를 데려왔다. 의사는 또 한 번 내게 이름을 묻더니 오늘 날짜를 물었다.

“10월 4일이요.”

“…몇 년도죠?”

“네? 그거야 20….”

나는 친절함을 가장했지만 놀란 게 분명해보이는 그들의 반응에 입을 다물었다가 느리게 대답했다. 오늘은 내가 말한 날짜에서 1년하고 362일이 흐른 후였다.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내가 의식을 잃은 날이 그만큼 되는 건 아니었고 의사의 소견으로는 머리에 충격이 가해져서 일시적으로 기억 장애가 온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기억이 2년 가까이 날아간 건 좀, 불안했다. 아주 길지는 않지만 충분히 많은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시간아닌가. 나는 대한도를 탈출한 후에 2년이 지나서 귀찮고 때론 성가시지만 미워할 수 없는 남자를 만났던 것을 떠올렸다. 간호사가 수액 팩을 갈고 나간 후에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 그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반쯤 열려있는 커튼 사이로 얼굴을 내민 그는 웃지도 울지도 않고 나를 빤히 내려봤다.

“음, 안녕하세요. 재희 씨.”

“무현 씨도 퍽이나 안녕해보이시네요.”

“비꼬지 마세요. 제가 원해서 이렇게 된 것도 아닌데.”

“흐응.”

내가 한껏 툴툴거리자 재희는 살짝 숙이고 있던 허리를 펴더니 주위를 휙 둘러봤다.

“퇴원은 언제래요?”

“글쎄요. 머리가 좀 찢어져서 꼬맸다는데 잘 아물었다고 하긴 하더라고요.”

내 대답에 재희는 탁한 눈으로 다시 주위를 살펴보더니 벽에 기대섰다. 탐탁치 않아하는 그의 태도는 나도 십분 이해했다. 병원에 오래 있을수록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르는건 내 일만은 아니었으니까. 내가 누운 채로 손가락을 꼼지락대다가 ‘오늘 퇴원할까요?’ 하고 묻자, 재희는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알아서 하세요.’ 하고는 사라져버렸다.

…묘하게 반응이 미적지근하다. 쫑알거리면서 내가 짜증날 때까지 옆에서 잔소리를 하거나 날 두고 가지 말라며 매달려 울거나 할 줄 알았는데. 나는 내가 잃어버린 기억 중에 재희와 관계가 소원해질만한 일이 있었나 떠올리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을 해보려해도 나의 마지막 기억은 퇴근 후에 전화로 재희에게 먹고 싶은 것을 물어보던 것 뿐이었다. …일단 퇴원이나 하자.

입원하기 전에 입고 있던 옷으로 갈아입고 퇴원 수속을 밟고 있는데 형! 하는 소리가 들렸다. 펜을 든 채로 고개를 돌리자 무진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어. 왔어?”

“당연히 오지. 하나뿐인 형이 머리가 찢어져서 입원했다는데.”

“하하. 괜찮아. 다섯바늘 정도 꼬맸는데 잘 꼬매졌대. 퇴원해도 된대서 가려고.”

“음…. 그치. 형은 병원 싫어하니까.”

무진이는 내 걱정을 꽤 오래 했다. 밥은 먹고 다니는지, 일이 힘들지는 않은지. 사실 최근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고백할까 했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괜히 걱정을 더 얹어주고 싶지도 않았고 기억이 좀 날아간 정도야 별 일 아니겠지 싶어서. 무진은 본가로 돌아오라고 권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재희가 집에 혼자 있어야 할 텐데, 아마 재희 걱정을 하느라 본가에서 내내 좌불안석일게 뻔했다. 무진은 다음에 반찬을 들고 들르겠다고 했다. 나는 거기에 손을 흔들어주며 택시를 잡아 탔다.

집에 도착해서 현관문을 열자 재희가 기다렸다는 듯이 튀어나왔다. 피가 살짝 묻은 상의를 지긋이 쳐다보던 재희가 그 옷은 버리는 게 좋겠다고 했다. 나는 최대한 지워서 입어보겠다고 했다. 이건 네가 사준거잖아. 내 말에 재희가 한숨을 쉬었지만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거실로 향하는 재희를 따라 집으로 들어가는데 왜인지 너무 어색했다. 사고를 당하고 집에 돌아온 게 겨우 이틀 남짓 걸렸을 뿐인데 왜 이렇게 이상하지. 나는 자꾸만 묘하게 뒷덜미를 잡아채는듯한 감각에 팔뚝을 문지르며 침실 문을 열었다. 커다랗지만 낮은 침대. 벽에 걸린 사진. 별로 다를 것은 없었다. 다를 것이…. 없나…?

“왜 거기 가만히 서 있어요?”

“어, 네?”

뒤에서 다가온 재희가 귀 바로 옆에서 말을 건 탓에 나는 놀라서 펄쩍 뛰었다가 귀를 감싸며 그를 돌아봤다.

“노, 놀랐잖아요.”

“무현 씨가 거기서 멍때린 탓이지.”

재희는 여전히 웃지 않았다. 어조의 높낮이없이 무현의 탓을 한 그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부엌으로 갔다. 나는 그런 그를 밉지 않게 쏘아보다가 방에 완전히 들어와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래. 이상할 게 뭐가 있어. 나는 여전히 이 집에 살고, 재희와 동거 중이고, 방도 같이 쓰는데. 나는 무릎으로 침대를 기어 올라가 오른쪽 베개를 베고 누웠다. 늘 보던 천장에 안심이 되었는지 의식이 흐려지더니 금방 잠에 빠져 들었다.

눈을 다시 떴을때는 온통 깜깜한 밤이었다. 나는 몽롱한 정신으로 커튼을 걷었다. 근교에 위치한 주택은 심야에 가로등이 꺼지면 반짝거리는 별을 볼 수가 있었다. 나는 새카만 하늘에 총총 박힌 별을 보다가 다시 커튼을 쳤다. 재희는 옆에 없었다. 이 밤에 어딜 간거지? 방문을 열고 나갔더니 소파에 인영이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재희 씨?”

“…네에 무현 씨.”

“여기서 뭐해요. 안 자고?”

“…그냥요.”

빛이 하나도 들지 않는 거실에 앉아 있는 재희는 그냥 새카만 덩어리 같았다. 표정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나는 더듬거리며 나아가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잠이 안 와요?”

“네…. 뭐어….”

답을 흐린 재희는 역으로 내게 물었다.

“무현 씨는 왜 자다말고 나왔어요?”

“그냥…깼어요.”

깼는데, 네가 옆에 없어서 나와 봤지. 나는 그렇게 대답하는 대신 귓바퀴를 만지작거렸다. 재희는 그냥 깼다는 내 대답에 나를 쳐다보는 듯 하더니 다시 고개를 돌렸다.

“왜요. 할 말 있어요?”

할 말은 있는데, 꺼내지 않는 듯한 재희의 기색에 내가 의아해하며 묻자 재희가 고개를 저었다. 가서 잠이나 더 자요. 축객령 같은 말에 나는 머뭇거리다가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기억하지 못하는 2년 사이에, 뭔가 있는게 분명하긴 했다.

며칠이 더 흘렀다. 여전히 재희는 웃지도 않고 데면데면하게 굴었다. 어느 순간 사라졌다가 불쑥 나타나는 그를 보며 나 또한 심란해졌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말을 해줘야 알지. 그렇게 투덜거리며 먼지가 뽀얗게 앉은 거실장을 닦고 있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재희 씨, 좀 나가봐요.”

나는 대체 언제 청소를 한 건지 모를 거실장을 노려 보며 닦다가 다시 한 번 그를 불렀다.

“재희 씨. 나가 봐달라구요!”

어휴. 또 언제 사라진거야. 말도 없이 자리를 비우는 그의 태도에 나는 한숨을 푹 쉬며 자리에서 일어나 인터폰으로 다가갔다. 대문 밖에 설치된 카메라에 보이는 것은 무진이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는 모습이었다. 내가 문열림 버튼을 눌러주자 무진이 화면 속에서 사라졌다.

“형! 잘 지냈어?”

“어. 반찬 가져온거야?”

“응. 또 안 먹고 버리지 말라고 엄마가 형이 좋아하는 것만 했어.”

“내가 언제 버렸다고 그래.”

“….”

내 대답에 무진은 웃더니 가져온 포장용기들을 냉장고에 차곡차곡 정리해 넣었다. 밥은 있냐는 무진의 질문에 나는 아마? 하고 밥솥을 열었다가 텅 빈 솥만 확인했다. 무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젓더니 쌀을 씻고 안쳤다. 온 김에 나도 밥을 먹고 가겠다며 소파에 앉는 무진을 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내가 먹나 안 먹나 감시하려고 그러는거냐 너?”

“어떻게 알았지? 형 요새 툭하면 굶으니까.”

“아니 내가 언제 굶었다고. 별 걱정을 다하네.”

“응~ 사실 엄마가 장조림 해서 전부 형한테 싸줘서 그거 먹고 가려고 그런다.”

“그럴 줄 알았어.”

내가 웃으며 거실장을 마저 닦는데 무진이 입을 달싹이더니 내게 물었다.

“곧 그 날인데 괜찮아?”

“뭐가?”

무슨 날? 네 생일? 아닌데. 내 생일?도 아니고. 엄마 생신?도 아니잖아. 내가 어리둥절하게 무진을 돌아보자 무진이는 어색하게 시선을 이쪽저쪽으로 굴리더니 다시 말했다.

“왜, 그….”

…동생의 입을 막고 싶었다. 어쩐지 무진이가, 내가 듣고 싶지 않은 말을 할 것만 같아서. 그래서 자리에서 일어나서 동생에게 다가가려 했는데 무진의 말이 완성되는 것이 더 빨랐다.

“…재희 형 기일 곧이잖아.”

“먹고 싶은거 있어요? 포장해갈까? 아니면 장을 좀 볼까요?”

[으음, 땡기는 게 딱히 없는데요. 밥 해먹기도 귀찮고….]

“그럼 밖에서 먹고 들어갈까요? 나올래요?”

[어쩔까요~그럼 또 외출 준비 해야하는데 그것도 귀찮아요~]

“이참에 데이트 분위기도 내보고 좋지 뭐.”

[흠. 그건 좀 구미가 당기네요.]

“하하.”

평범한 날이었다. 언제나처럼 출근했다가 환자들의 입 안을 보고 퇴근하면서 재희와 저녁에 대해 노닥거리는 평범한 날. 평소와 다른 점이 있었다면 하필 무현을 노린 퍽치기범이 있었다는 거고, 그날따라 재희가 무현을 치과 근처까지 데리러 나왔다는 점이었을까. 길 건너편에서 뒤통수를 가격당하고 쓰러지는 무현을 본 재희는 앞뒤 가리지 않고 무현을 향해 뛰었고, 그리고,….

이틀만에 정신을 차린 무현은 옆에서 침통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는 가족들과 함께 의사에게 이야기를 들었다. 무현에게 안치소에 들어가 있는 그의 모습까지 보여줬다. 진작 부모와 연을 끊었던 재희에게 가족은 무현 뿐이었다. 무현은 성치 않은 몸으로 상주석을 내내 지켰다. 무진이 쉬라고 해도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다 배터리가 방전된 것처럼 의식의 끊을 놓아버리자 무진은 그를 뒷방으로 끌고 가 눕혀주었다.

화장은, 하면 안되는데. 재희가 싫어할 텐데. 불 타는 관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나는 괜찮냐며 나를 부축하려는 무진의 손을 뿌리치고 침실 문을 열었다. 기억과 달랐던 점. 기분 나쁜 괴리감. 나는 재희가 늘 누웠던 자리의 베개를 만져봤다. 천이 닳고 솜이 죽어 생활감이 잔뜩 묻은 내 베개와 달리 재희의 베개는 금방 사온 것 같았다. 벽에 걸린 사진들도 2년 전에 꾸며놨던 그대로였다.

“아….”

아냐. 아냐…. 아냐…….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쓰러졌다. 시야가 온통 흐렸다.

한 번 떠오른 기억은 봇물처럼 터져 흘러내렸다. 출근도 하지 않고 며칠 내내 잠만 잤던 날이나, 밥 생각 없다는 내게 울며 소리지르던 무진의 모습, 작년 재희의 첫 기일에 쓰러졌던 일까지 쉴 새없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냐. 아냐…! 분명 재희가 문병을 왔단 말이야. 집에서 마중인사도 해줬고. 집에서 계속,”

계속 웃지 않았지. 나는 새삼 그의 미적지근한 태도를 떠올렸다. 웃지 않고, 가까이 오지도 않았다. 나의 무의식도 알고 있었던 거다. 그는 이미 떠난 사람이라는 걸. 그걸 깨달았을 때 나는 다시 한 번 의식을 놓았다.

재희의 명패가 걸린 나무 앞에서 나는 가만히 서 있었다. 무진이는 내가 또 쓰러질까 걱정되었는지 옆에서 자꾸 나를 훔쳐봤다. 재희의 장례를 치르고, 나무 밑에 묻는 걸 본 후로 처음 왔다. 그 동안은 그가 없는 현실을 외면하느라 여기에 올 생각도 하지 못했지. 2년간 내버려 둔 나무는 꽤 자라 있었다. 나는 바람이 나무들을 스치는 소리를 듣다가 나무에게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명패를 가만히 손가락으로 쓸어보다가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에 또 올게.”

하고 싶은 말들이 많았지만 무진이 앞에선 하고 싶지 않아 일단 삼키기로 했다. 어쩐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가 잘 가라고 손을 흔드는 것 같아서 나도 마주 흔들어줬다.

2
  • ..+ 7

댓글 2


  • 열정적인 뱁새

    무현씨가 만든 싱상이고 환각이지만... 밥도 안 먹고 보러 오지 않아서 화가 났던 거 아닐까라는 상상을 하게 되네요..... 재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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