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lo Charlotte] 바다로
헬로 샤를로테 팬 창작글
베넷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있을 리 없고, 존재하지 않는 일.
헬로 샤를로테 시리즈 헤븐즈 게이트를 플레이 후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시체 안치소 안은 어둡다. 펠릭스 호니커는 오래 살지 못한다. 복제체의 죽음은 특별하지 않다. 단기간에 신체 내부 기능이 저하되어 호흡이 불안정해지고, 심박수가 느려지며, 뇌로 가는 혈류가 줄어 인지능력에 장애가 발생한다. 결국 장기에 산소가 전달되지 못해 생명 활동을 정지한다. 급속도로 일어날 뿐 자연사 과정과 다르지 않다. 숨이 끊어진 유기체는 폐기되고, 재생산된다. 베넷은 곧 관 같은 냉동고로 밀어 넣어질 펠릭스를 바라봤다. 이런 상황은 베넷에게 새롭지 않다. 수많은 펠릭스 호니커는 베넷의 눈앞에서, 눈 밖에서, 모르고 있을 때, 신경 쓸 겨를조차 없을 때 대체되었다. 새 호니커임을 알 때도, 모를 때도 있었지만 이번도, 지난번도, 다음에도 펠릭스 호니커가 복제품이라는 사실만은 알고 있다.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적어도 연구실 안에는 없다. 헉슬리의 알츠하이머가 기적적으로 완치되지 않는 한 이것은 기정사실이다.
펠릭스의 동공은 풀렸다가 다시 초점이 맞기를 반복한다. 초점이 맞을 때 눈동자만을 돌려 주변을 파악하는 듯하다. 다른 특별한 움직임은 없다. 본인의 상태를 자가진단하거나, 못다 한 업무를 마무리 지으려거나, 동료나 "가족"에게 인사를 건넨다거나 하지 않았다. 그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누워 있다. 사실 움직일 이유가 없었다. 본인이 후임으로 오는 한 인수인계는 필요 없고, 몇 안 되는 사회적인 관계를 새로 쌓을 필요도 없다. 연명해야 하는 이유가 없다. 그저 몇 시간 후면 평소의 생활로 돌아갈 것이다.
베넷은 특별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죽어가는 유기체는 익숙했으므로, 죽어가는 펠릭스라고 특별히 다를 것은 없었다. 하지만 다음 펠릭스는 달랐다. 유전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바뀌지 않지만 그래도 그는 펠릭스가 아니다. 고용주의 조카, 분홍빛 곱슬머리에 작은 키, 성격 나쁜 연구원이자 인부들과 나름대로 친분 있게 지내는 사람임은 같지만 친구가 아니라는 점만은 다르다. 베넷은 정말로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았지만 다음 펠릭스가 친구가 아니라는 것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베넷은 미지근하게 덥혀진 세라믹 바닥에서 일어났다. 아직 근무 시간이 끝나지 않았고, 곧 업무로 복귀해야 한다. 정량을 지킬 수 있을까 의문이지만 비누도 정량 섭취하고, 작업복을 채비하고, 일터로 돌아가 지시를 받고 따라야 한다. 하지만 베넷은 그 모든 것을 뒤로하고 호니커를 들쳐멨다. 이성적이지 못한 일이다. 바르지도 않고, 합리적이지도 않다. 이 결정이 틀린 것임은 자명하다. 펠릭스는 난데없이 몸이 번쩍 들리자 놀란 듯 고개를 획 돌렸다.
"...뭐 하는 거야?"
"그냥, 널 여기에 두고 싶지 않아."
"베넷, 어디로 가는 거야?"
베넷은 대답하지 않았다. 본인도 알지 못한다. 안치실의 문 앞에 서서 버튼에 손을 뻗은 순간 자동문이 활짝 열린다. 플로렌스가 앞에 서 있다. 플로렌스는 어딘가 조급한 얼굴로 여상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베넷."
"...안녕, 플로렌스."
짤막한 인사말 후 정적이 방 안을 감싼다. 플로렌스는 베넷의 어깨에 얹힌 펠릭스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벙긋거렸다. 입이 떨어지지 않는 듯 복잡한 표정으로 한참을 머뭇거리다, 입꼬리를 올리며 인사한다.
"안녕, 호니커."
"플로렌스, 이 바보 좀 멈춰 줄래?"
펠릭스는 대답 대신 작은 짜증을 내며 말한다. 플로렌스는 하하, 하고 웃더니 다시 조용해진다. 짧지만 긴 침묵 끝에 플로렌스는 펠릭스 대신 베넷에게 말한다.
"그렇게 드는 것 보단, 업는 게 나을 거야."
"아, 플로렌스. 다들 제정신이 아닌 거야?"
펠릭스는 기가 찬다는 듯 얼마 없는 기력을 끌어모아 버럭 소리쳤다.
"응, 그런가 봐."
플로렌스는 중얼거리듯 대답한다. 베넷은 조언을 듣고 펠릭스를 어깨에서 내렸다. 플로렌스가 옆에서 거든다. 펠릭스의 타박이 계속되지만 둘은 말없이 움직인다. 인간의 체구는 생각보다 무겁다. 스스로를 지탱할 힘이 없는 사람이라면 소년의 몸이라도 쉽게 다루기 힘들다. 다만 그 둘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무거운 것을 옮기고, 끌고, 찢고, 자르고, 나르는 것이 그들이 하는 일이다. 무기물부터 유기물 모두를 그렇게 다룬다. 자르라 하면 자르고, 옮기라 하면 옮겨야 했다. 비누의 도움을 받지만 매일 20시간 교대 근무를 이어간다면 싫더라도 익숙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들은 살아있는 것을 처음 다루는 것처럼 쩔쩔맸다. 우여곡절 끝에 펠릭스를 등에 바로 업혔는데, 당사자는 만류할 만큼의 정신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고마워."
"헉슬리가 곧 업무 지시하러 올 거야."
"알아."
"교대해 줄 사람이 없는 건 너도 알 거고, 헉슬리는 인부가 빠진 걸 모를 정도로 멍청하거나 관대하지 않아."
"알아, 플로렌스."
베넷은 개의치 않는다. 어느새 복도의 끝 앞에 섰다. 플로렌스는 저만치 멀리 있었다. 이 바보 같은 탈출에 동행할 수 없다.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고, 실감하고, 이해하고 있었다.
"잠깐만."
플로렌스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온다. 베넷의 어깨 위로 삐져나온 작은 손을 장갑을 낀 손으로 쥐었다. 두꺼운 장갑 너머로 미지근한 체온이 닿을까, 닿더라도 장갑 안의 손은 플로렌스의 것이 아니다. 바보 같은 짓이었지만 생각나는 대로 말하기 싫었다. 왜일까. 생각할 시간은 없다. 상념이 꼬리를 물기 시작하면 발도 같이 묶인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플로렌스는 베넷의 어깨를 툭 쳤다.
"잘 가."
플로렌스는 마지막처럼 인사를 내뱉었다. 베넷은 자신에게 하는 말이 아님을 깨달았다. 베넷은 움직인다.
어디로 갈까, 어디든 좋았다. 하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는 몰랐다. 언제였을까, 베넷은 첫 외출을 떠올린다. 지금보다 작은 샤를로테와 흙을 파헤쳤던 흐릿한 기억이다. 베넷은 TV에서 방영한 휘황찬란한 광고에 열광하여 끊임없이 떠들다가, 소재가 떨어지자 샤를로테는 자신이 본 자연 다큐멘터리에 대한 얘기를 해 주었다. 솔직히 지루하고 말주변도 없어 베넷은 거의 흘려들었다. 대략 그런 대화가 오갔고, 어떤 일을 했었다.
사소한 건 생각나지 않는다. 중요한 걸 잊어버린 걸지도 모른다. 떠오르는 것은 샤를로테의 체념과 우울이 섞인 얼굴뿐이다. 피곤한 듯 두려움이 섞인 낯빛은 자신이 우베리아에 있을 적과 퍽 닮았다고 생각했다. 평소라면 그런 감상이 들어도 넘어갔겠지만, 심신이 지쳐있던 베넷은 얼마 남지 않은 마음을 샤를로테에게 무심코 써 버리고 말았다. 동질감에서 발현한 동료애인지, 자신의 비참함을 투영한 동정심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런 마음을 한번 가져버린 탓에 지금이라면 하지 않을 생각이 종종 떠오르고 말았다. 자신을 도운 행동이 두려움에서 기인했는지, 아니면 특별한 이유가 있었는지 궁금했고, 더 나아가 이곳에 정착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막지 않은 연유도 궁금했다. 처음 이 집에 찾아왔을 때 지저분하고 수상한 차림의 헉슬리와 베넷을 퍽 경계했는데, 하룻밤 재워준 것도 모자라―강제적으로 침입했지만― 눌러앉은 그들을 막지 않았다. 무슨 생각으로 선뜻 받아준 걸까?
걘 너무 경계심이 없어. 저항하지도 거부하지도 않지. 베넷은 생각했다. 하지만 그 덕분에 베넷은 값싸고 얕은 안식을 얻었다. 생명의 은인은 헉슬리지만 샤를로테의 몫이 그보다 작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고마움을 느끼기에 마음의 여유는 없었지만 부채감을 느끼기는 충분했다. 말로 정의되지 않은 부채감은 명확한 형태를 이루지 못하고 베넷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지우고 싶은 과거의 기억과 언제 끝날지 모르는 노동만으로도 베넷은 피곤했다. 변하지 않을 사실은 자체로도 고통이다. 쉽게 변해버리는 감정과 생각을 더불어 떠올릴 여유는 없다. 그래서 비누를 마셨다. 알싸하고 미끌거리는 알칼리성의 액체는 뇌를 휘발시켜 어떠한 "생각"을 갖지 않게 해준다. 사실에 관한 생각, 어떤 관념에 관한 생각, 생각에 관한 생각 그 모두를 씻은 듯이 날렸다. 끔찍했던 기억은 단지 하나의 사실로, 어떠한 감정은 흔적조차 남기지 않도록 뇌를 깨끗이 씻겨 줬다. 단순해진 사고로는 무엇도 고통스럽지 않다. 하지만 무통에 익숙해지는 건 고통에 민감해지는 것과 같다. 약효가 떨어질 때마다 베넷은 실체가 없는 고통에 죽을 만큼 괴로워졌고, 비누를 더 많이 찾았다. 지금 등에 업혀 있는 사람은 그걸 반기지 않았다. 제대로 받아들인 적은 없었지만.
"이 바보들아."
펠릭스가 눈을 떴다. 타박하는 목소리에 힘이 없다. 베넷은 밖에 나와 겨우 열댓 걸음 걸었을 뿐이다. 생각보다 일찍 정신을 차린 걸까, 아니면 상념에 빠져 시간이 지난 걸까? 비누를 먹고 나올걸. 베넷은 후회한다.
"네, 똑똑한 호니커 씨."
"비꼬지 마, 베넷. 너도 알고 있잖아. 쓸모없는 일이었어."
"불평하지 마. 너는 분명 나보고 신경 써도 된다고 했어. 아니야?"
"그 얘기 끝난 거 아니었어?"
"맞아. 그래서 나왔잖아."
펠릭스는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짓더니 입을 닫아버렸다. 베넷은 드디어 멈췄던 걸음을 옮긴다. 헉슬리는 종종 다른 층으로 심부름을 보냈다. 전담 없이 당장 손이 비는 사람을 시켰으니 베넷도 포함되는 이야기다. 그렇기에 집 밖에 나와본 적은 있지만, 일로써 갔던 곳은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베넷은 스스로 목적지를 고르는 상황이 새로웠다. 밖에 나왔던 것은 업무의 일환이었지, 원한 일이 아니었다. 사실 예나 지금이나 자신이 무언가를 바란 적은 없다.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예전엔 아무것도 없었고, 지금은 비누를 한 펌프 더 마실 수 있다는 점 정도가 달랐다. 그러니까 지금 상황은 베넷에게 있어 과히 생소했다. 밖에 무엇이 있었는지, 무엇이 있을지 생각한 적 없었다. 어디로 가야 할까. 하지만 주위를 둘러봐도 이곳은 마땅히 샐 곳이 없다. 갈림길 없는 길의 끝엔 당연하게도 엘리베이터가 있다. 더 고민할 것도 없었다. 베넷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다.
"어디로 가시나요?"
"아무 데나."
"알겠어요."
엘리베이터는 그렇게 대답하고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아무 데나, 부탁해."
호니커가 등 뒤에서 소곤거린다. 삐친 줄 알았는데. 베넷이 놀리듯이 말을 걸었지만 펠릭스는 따로 대답하지 않았다.
"오, 착한 아이네요."
생각할 틈도 없이 문이 땡 하는 경쾌한 소리를 내며 열린다. 무슨 차이였을까? 구태여 묻진 않는다. 엘리베이터는 문이 닫히자마자 움직인다. 위로 올라가는 것인지, 아래로 내려가는 것인지 체감하기 어렵다. 옆으로 쏠리는 것도 같다. 짧은 시간이 지나고 도착을 알리는 벨이 울린다.
내린 곳은 긴 복도다. 등 뒤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덜컹거리며 닫힌다. 검고 흰 체커보드 바닥이 어지러웠다. 복도는 끝이 보이는 듯하면서도 무늬가 착시를 일으켜 공간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지, 보고 있는 것이 실제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양쪽으로 줄지어 놓인 TV만이 바닥과 벽을 구별할 수 있는 유일한 물체였다. TV는 제각기 지직거리고 있었고, 두세 명이 서야 화면이 겨우 가려질 정도로 컸다. 크기 외에는 금속질 프레임과 직육면체 모양을 가진 흔한 TV와 같았다. 구태여 꼽자면 아날로그식 TV처럼 보였음에도, 채널을 돌릴 버튼이나 안테나가 보이지 않았다. 불규칙한 노이즈는 기묘하게 일렁였는데, 베넷은 그 화면이 송출부가 아닌 입구 같다고 생각했다.
"다른 곳으로 이어지는 워프 게이트 같아 보이는데."
펠릭스는 새로운 상황에 당황하지 않고 눈만 굴리며 살폈다. 베넷은 자신의 직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에 미묘한 만족감을 느꼈다. 펠릭스가 아직 기능한다는 사실에 만족해야 할까?
"어디로 가야 해?"
"그건 모르지. 어디든 갈 순 있을 거야.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베넷은 불규칙한 노이즈를 쳐다본다. 어디로 가야 할지는 몰랐지만 멈춰 있을 수는 없다. 베넷은 노이즈 속으로 한 발 내디딘다. 무언가를 통과한다는 느낌이 든다. 불쾌하지도 좋지도 않은 생소한 감각이 얼굴부터 뒤통수를 훑었다.
환한 빛에 잠시 눈을 찌푸렸다가 뜨자 앞은 끝없는 서고가 나타났다. 계단과 책장이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늘어져 있다. 인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이상하다 싶을 만큼 깨끗한 책꽂이에 같은 책이 질서정연하게 꽂혀 있다. 천장까지 짜인 금속 책꽂이를 팔뚝으로 슬쩍 밀어봤다. 위아래로 고정이라도 됐는지 조금의 흔들림도 없다. 어지간한 힘으로는 밀리지 않을 듯하다. 책은 겉으로 보기에 검은 양장 표지에 약 400페이지가량의 두께였는데, 한 번도 꺼내보지 않은 듯했다.
"호니커."
베넷은 대신 확인해 달라고 할 생각으로 펠릭스를 넌지시 불렀다. 등 뒤의 무게는 조금 움찔거리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아직도 짜증이 안 풀렸나? 생각하기 무섭게 펠릭스의 손이 힘없이 허리 아래로 툭 떨어졌다. 아직 미지근한 등이 급격히 차가워지는 느낌이 든다.
"호니커?"
"...왜."
바라 마지않던 시니컬한 목소리다. 힘이 하나도 없는 목소리는 평소와 달랐지만 그것만으로도 얼어붙은 등골이 좀 녹는 기분이다. 베넷은 안도했다. 그리고 그 사실에 다시 뇌가 멈추는 듯했다. 늦건 빠르건 결말은 바뀌지 않는다. 무엇 때문에 나온 거지? 의미 없는 행동의 연속을 그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베넷."
펠릭스는 아까보다 목소리에 힘을 줘 부른다. 반대여도 모자랄 판에, 펠릭스는 베넷을 걱정하고 있다.
"...아무것도 아니야."
책을 펼쳐보는 것은 그만두기로 했다. 글에서 얻는 것은 당장 필요할 때 도움이 된 적이 없었다. 개인적인 경험에 따른 판단이다. 베넷은 책을 무시하고 반복되는 배경 사이를 헤쳐 나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선반 사이에 회색 계단이 보인다. 끝이 보이지 않던 복도에 비해 계단의 끝은 바로 보일 정도로 짧았다. 끝에는 검은색 문이 닫혀 있었는데, 베넷은 큰 고민 없이 두 단씩 계단을 올라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대여섯 명이 들어오면 꽉 찰 작은 방이다. 방은 바닥부터 천장까지 회색이었고, 얼룩 하나 없이 말끔했다. 가운데에는 들어올 때와 같은 TV가 놓여 있었는데, 방의 규모에 비해 과하게 컸다. 베넷은 프레임을 톡톡 두들기며 물었다.
"호니커, 어떻게 생각해?"
"아까와 같겠지."
베넷은 화면 안으로 몸을 밀어 넣는다. 아까의 복도로 되돌아가지 않을까? TV같이 생긴 워프 존이 여러 개 있었으니, 장소 하나당 TV 한 개씩 할당되었으리라 예상했다.
예상과는 달리, 눈앞에 나타난 것은 실험실이었다. 플라스크와 비커, 샬레, 피펫, 약품 선반, 현미경에 퓸 후드까지. 화학 약품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랩실이다. 비치된 물건들만 보자면 그랬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한 가지가 달랐는데, 벽과 바닥이 온통 알록달록한 타일로 장식되어 있었다. 보통의 실험실은 오염이나 변화를 확인하기 위해, 그리고 눈의 피로를 덜고 집중하기 쉽도록 희거나 밝은 회색 톤으로 통일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거창한 이유를 붙일 것도 없이, 원색의 알록달록한 방은 경제적으로 보나, 심리적으로 보나 효율적이지 않다.
"의도를 모르겠네."
펠릭스는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효율과 논리 하나만으로 세상이 돌아가지 않는다지만, 황당할 정도의 낭비를 마주하니 당황스럽기 그지없다.
"헉슬리가 좋아하겠는데."
"너 그걸 농담이라고 하는 거야?"
베넷은 웃어넘겼다.
짧은 감상도 잠시, 어찌 됐든 이곳을 나가야 한다. 조금 전의 적막한 도서관보다는 작았지만 규모가 꽤 되었다. 베넷은 책상들을 지나치며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구별하려고 했지만, 눈을 현혹하는 색들 사이에서 중요한 단서를 찾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펠릭스도 같이 관찰하고 있었지만 이래서야 돌파구를 찾기 힘들 것 같다. 베넷은 책상 사이를 가로지르는 것을 멈추고 화려한 벽에 붙는다. 한 손으로는 펠릭스를 지탱하면서 반대쪽 손으로 벽을 두들기며 걸었다. 단단한 감촉, 푹신한 곳, 다시 단단한 감촉. 불쾌하게 끈적거리거나, 금속질, 종이를 여러 겹 겹쳐 놓은 것 같은 질감도 느껴졌다. 순간 똑똑, 하고 안이 빈 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려 확인하자 문만 한 크기의 거울 벽이다. 아니, 거울처럼 보이지만 그 정도로 잘 닦인 어두운 유리 벽이었다. 살펴보니 유리 벽 옆에 붉은 타일 하나가 눈에 띈다. 타일은 특별한 것 없었지만, 가까이 서자 작게 솟아있는 붉은 버튼이 보인다.
눌러도 될까? 유리 벽이 문이 아닐 수도, 아예 다른 동작을 하는 버튼일 수도 있었다. 치명적인 위험을 초래할 가능성도 배재할 수 없다. 하지만 베넷은 버튼을 눌렀다. 정체보다는 변화가 낫다. 기왕이면 자동문 버튼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기대하던 것처럼 유리 벽은 출입구가 되지 않았다. 대신 환한 빛을 내더니, 흑백의 노이즈 화면으로 변했다. 베넷은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앞은 예상보다 나쁘다. 양상은 비슷했다. 새로운 장소고, 철근 콘크리트 건물의 내부다. 하지만 온전한 구석을 찾기 힘들 정도로 깨지고 부서져 더 이상 건물의 기능을 할 것 같지 않았다. 심한 파손보다 나쁜 것은 갈라진 틈 사이로 세포 덩어리들이 자라고 있다는 것이다. 자라는 중인지, 죽어가는 과정인지, 저 붉은 유기체를 세포라고 불러도 올바를지는 알 수 없다. 일부는 근육을 닮아 맥박이 뛰듯 요동쳤고, 일부는 영역을 넓히려 꿈틀댔으며, 일부는 죽었는지 미동조차 없었다. 통틀어 보자면 헉슬리의 실패한―그는 실패보다 예상과 다르다는 표현을 애용했지만―실험체와 비슷했다.
"여기 오래 있고 싶진 않네."
그치, 호니커? 베넷은 알 수 없는 불쾌감을 참으며 말을 붙인다. 하지만 대답이 없다. 펠릭스는 정신을 잃는 주기가 점점 짧아진다. 이상할 것은 없다. 이미 어딜 가기에 너무 늦었을 수도 있다. 최악의 상상으로 정체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근거 없는 희망만을 좇을 수도 없다. 어떻게 해야 할까. 처음부터 지금까지 생각해 온 질문이지만 답은 아직까지 나오지 않는다. 결국 베넷은 서재처럼 멈춰 펠릭스를 부르는 대신, 달린다.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베넷은 달린다. 잿빛 서재에서 걷던 것보다 빠르게 뛰었다. 아직 숨을 쉬는 유기체가 등에서 출렁거린다. 부서진 잔해들이 앞길을 막고, 파편에 발이 걸려 휘청거리지만 개의치 않고 달려 나간다. 너저분한 골목을 세 번쯤 꺾었을 때, 애타게 찾던 빛이 보인다. 잔해에 더럽혀지지 않은 TV 사이로 망설임 없이 몸을 던졌다.
앞은 무기물로 가득했다. 진흙과 쓰레기로 뒤덮인 길이다. 수분 함량이 많은 토양과 그 사이를 채우는 폐기물들이 발을 끌어들인다. 무기물로 이루어진 지면이지만 의지를 갖고 둘을 삼키려 드는 듯하다. 발이 빠지기 전 반대 발을 힘겹게 내딛으며 허우적댔다. 액체와 고체의 중간쯤 되는 지면에서 애쓰던 찰나, 멀지 않은 곳에 이제는 반가운 빛이 일렁인다. 베넷은 허벅지까지 빠지기 전, 겨우 프레임을 잡고 화면으로 몸을 밀어 넣는다.
앞은 황량하고 검붉은 대지다. 불에 전소되어 잔여물만 바닥에 남았다. 다 타 작은 흑연 덩어리가 되어버린 나무가 지면에 듬성듬성 꽂혀 있다. 지평선이 언뜻 보일 정도로 시야를 방해하는 물체가 없다. 하지만 베넷은 주변을 자세히 관찰할 여력이 없다. 흑연 조각에 스쳐 노란 작업복에 검댕이 묻는다. 바로 앞에 TV가 있다. 베넷은 들어간다.
새카만 어둠이 내린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광원이 하나도 없어 베넷은 잠시 멈출 수밖에 없었다. 헐떡이는 숨을 삼키며 발로 지반을 구른다. 펠릭스를 받치고 있던 한쪽 손을 풀어 자신의 허벅다리도 쳐 본다. 고무와 합성 섬유가 맞부딪힌 소리가 넓게 울린다. 텅 빈 터널인 것 같다. 하지만 시야가 차단된 상태로 무작정 뛸 수는 없었다. 베넷은 감각을 곤두세우며 서둘러 걷기 시작했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질 정도로 한참을 걸었지만, 특별히 무언가 보이지는 않는다. 눈병을 앓았다고 시력이 좋아지는 희한한 이점은 없다. 생겨서는 안 될 부위에 감각기관이 생성된다 해도 신경신호가 뇌까지 다다르지 않는다. 그저 병증이며 돌연변이다. 지금의 베넷은 완치되지 않았지만 많은 부위에서 안구를 적출했다. 상반신과 하반신, 두피, 내장까지 번진 악성 종양을 절제한 이후엔 끝없는 고통만이 남았다. 그럼에도 식사할 수조차 없던 과거보다 씹고 삼키고 소화할 수 있는 지금이 나았다. 고통은 비누가 해결했으므로. 아, 그래. 비누를 복용한 지 체감상 오랜 시간이 지났다. 잊고 있던 고통이 서서히 몰려온다.
피부의 작열감, 통증, 수술 부위의 쓰라림, 내장이 쥐어짜지는 듯한 고통. 해결할 수 없는 환상통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가장 힘든 것은 그런 외부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우울, 원망, 두려움, 그리고 비참함. 감정이 신체의 고통보다 버티기 어려웠다. 고통은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생각은 멈출 수 없다. 베넷은 그게 싫었다.
"베넷."
펠릭스가 깨어났다. 불린 이름 하나만으로 생각이 끊어진다.
"응."
"약속 기억하지?"
"그래."
펠릭스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베넷은 그와 약속했다. 다시 친구 관계를 맺지 않겠다는 절교 선언이었다. 펠릭스는 바보 같은 사고방식이라며 탐탁지 않아 했지만 거기서 내린 결론과는 합의했다. 베넷은 복제체 한 개체일 뿐인 펠릭스를 개인으로 받아들였다. 제작자의 의도와 달랐고, 가히 틀렸다고 할 만한 인식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또 한참을 걸었다. 천천히 걷자 잊고 있던 피로가 밀려온다. 발바닥이 쑤시고, 땀을 흘린 작업복 안이 찝찝했다. 출구는 보일 기미가 없다.
"호니커."
호니커는 대답이 없다. 베넷은 걸음을 멈춘다.
"호니커."
다시 부른다. 움직임은 없다.
"...호니커."
조용하다. 베넷은 뒤에 짊어진 것이 순간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앞은 여전히 캄캄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목적을 잃었다.
계속 가야 할까? 갈 이유는 없다.
돌아가야 할까? 돌아갈 이유는 많다.
하지만 베넷은 멈췄다.
죽음은 평범하다. 베넷에게는 질릴 정도로 평범한 것이었다. 고향에서 생명은 소모품이었고, 헉슬리라고 특별히 다르지 않았다. 자신은 죽을 목숨이었고, 지시를 받아 실험체를 죽음으로 내몰 때도 있었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죽는 생명체는 너무 많았다. 더군다나 펠릭스 호니커는 영영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내일이면, 아니 돌아가면 펠릭스가 있을 것이다. 완전히 똑같은 사람으로 죽음을 향해 살아가지만 절대 그 존재는 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등에 짊어진 시체덩이는 누구인가? 아무것도 아닌 유기물이며, 부패하여 무질서로 돌아가는 것을 저항하지 않는 원소의 집합체이다. 아무것도 아니라면 자신은 왜 시체덩이를 짊어지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일까? 베넷은 자신이 퍽 우스웠다.
신체는 고통을 호소하고, 전두엽은 기능하기 시작한다. 앞은 여전히 캄캄하고,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으나 베넷은 깊은 수렁으로 낙하하는 기분이 든다. 가슴 안이 답답하고 시큰하다. 다만 그것을 명확하게 느낄 수는 없다. 그런 찰나에 빛이 보인다. 길고 긴 터널의 출구일까. 베넷은 무거운 발을 질질 끌어가며 걸음을 옮긴다. 출구인 줄 알았던 빛은 TV 화면이다. 지금까지 거쳐 온 것들과 같은 모양이지만 화면은 노이즈가 아닌 옅은 회색 빛만을 내뿜고 있다. 흔들거리지도, 지직거리지도 않는다. 과연 이 채널을 넘는 것에 의미란 있을까?
등의 시체는 무겁고, 베넷은 지쳤다. 삐걱거리는 몸이 비누를 호소한다. 가슴 안이 죄이는 것 같다. 베넷은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다.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베넷은 앞으로 걸었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에 갑자기 빛이 들어온다. 눈부심에 눈이 확 감긴다. 눈을 천천히 열었을 때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물이다. 무색의 물이 흰 거품을 내며 발 앞까지 밀려왔다가 도로 빠진다. 물이 빠지면서 새로운 물결이 다시 밀려온다. 옅은 황갈색의 입자는 물이 들어차고 내린 곳만큼 짙은 색으로 젖어있었다. 물은 작은 알갱이들을 규칙적으로 쓸어내리며 자국을 남긴다. 미묘한 짠 내가 느껴진다. 주변은 아무것도 없다. 움직이는 물과 모래만이 존재한다. 베넷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문득 알아차렸다. 평생 볼 일 없다고 기억 저편에 치워둔 단어다.
바다다.
저 멀리 수평선이 보인다. 잿빛의 수면 위로 연회색 하늘이 보인다. 광원은 직접적으로 보이지 않지만 주위는 어둡지 않다. 베넷은 가만히 서 있는다. 파도는 어느새 장화 앞 코를 훑는다. 철썩이는 물이 지면을 타고 올라오며 부드럽게 발을 적시고, 내려간다. 밟고 있는 모래가 발 크기만큼 쓸려 내려가는 것이 느껴진다. 물이 지면에 밀리는 소리, 끌려 내려가는 소리, 같은 흐름에서도 불규칙하게 부딪히는 소리가 들린다. 얕은 바람이 귓가에 스친다. 입에 짭짤한 맛이 감돈다.
베넷은 멍하니 파도를 본다. 어떤 생각조차 없이, 흐름만을 구경한다. 발이 모래 사이로 천천히 빠진다. 한참 전 건너온 쓰레기장과는 달리 아주 서서히, 그리고 생각과 마음마저 포함해 빼앗아 버리는 듯하다. 베넷은 벗어나지 않는다. 어쩐지 여기가 여정의 끝일 것 같다. 마음이 그만두자고 하는 것이 아닌, 그저 그런 직감이 든다. 발은 점점 빠져 체중의 균형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더군다나 온전한 한 사람의 무게만 서 있는 것도 아니다.
시체는 무거웠다. 평소 일하며 들던 것에 비해 특출나게 무겁지 않았으나 그러했다. 유기물 덩어리가 등에서 흘러내린다. 베넷은 다시 추슬러 붙잡았다. 그리고 바다로 들어간다. 규칙적인 파도 소리에 첨벙거리는 소리가 섞인다. 이유는 없었다. 처음 본 풍경에 정신 착란을 일으킨 것도, 마음을 빼앗긴 것도 아니다. 베넷은 그런 이유를 가질 만큼 감수성이 짙지 않다. 뇌는 강렬한 화학 작용에 그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다. 반쯤 끊어진 전선에 전류를 흘려보내는 격이다. 그러나 베넷은 파도 속으로 한 걸음 걷는다. 바다는 영원할 것만 같았다.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호니커, 이거 봐."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차갑고 축축해. 그리고 아파."
눈병은 완치되지 않는다. 바닷물은 어느새 작업복의 틈새로 스며든다. 염분이 섞인 다소 무해한 물이지만 전신의 흉터와 상처가 쓰라림을 호소한다. 물은 점차 수위를 높여 물살이 허리를 쳐올린다. 파도는 밀어내다 도로 끌어당기며 베넷을 인도한다. 어느새 가슴까지 차오른다. 호흡이 약간 버거워진다. 대신 등허리가 가벼워졌다. 물이 무게를 받쳐준 탓이다. 가슴까지 차오른 바다는 베넷의 무게마저 나눠 든다. 잃어버릴 것만 같아 다리를 쥔 손을 꽉 붙들어 맨다. 갑자기 센 파도가 얼굴까지 덮친다. 그리고 같은 힘으로 물살이 빠져나가며, 등허리에 느껴져야 할 무게를 가져간다.
"호니커."
시체는 떠내려간다. 파도에 휩쓸려 가장 깊은 곳으로 간다. 잘 잡은 줄 알았는데. 손에 남은 것은 잡히지 않는 액체뿐이다. 가슴이 내려앉는다. 베넷은 첨벙거리며 더 깊이 들어간다. 어느새 해수면 높이는 목을 넘어 얼굴에 찰랑댄다. 이젠 발을 지면에 딛기 어렵다. 하지만 앞으로 간다. 염분에 눈이 따갑고, 피부가 쓰라리다. 바닷물도 두어 번 삼켜 목이 칼칼하고 코가 찡하다. 눈물이 날 것 같이 아프다. 하지만 앞에 흰 옷이 일렁대는 것만 같다. 베넷은 물에 완전히 잠기는 찰나 손을 뻗었다. 손가락에 걸리는 느낌이 난다.
파도가 베넷을 뒤로 민다. 발바닥이 닿는다. 베넷은 움켜쥔 손을 펴 보지만 남은 건 가운뿐이다. 바닷물 때문인지 눈이 시큰거린다. 맵기도 하고 뜨거운 것도 같다. 시간의 흐름은 돌이킬 수 없다. 물에 젖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듯 놓치기 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 생명은 언제나 시간의 흐름 안에 있다. 베넷은 볼을 쓰는 물살 속에 가만히 서 있다. 파도가 그를 밀어낸다. 호니커와는 반대로. 베넷은 겨우 붙잡은 흰 가운을 파도에 흘려보낸다.
"호니커..."
베넷은 흘러가는 가운을 바라본다. 마지막 인사를 건넬 차례다.
"너와... 친구가 되지 않을게."
여행은 끝났다. 베넷은 돌아간다.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간다. 귀가까지가 여행의 끝이다. 돌아갈 곳엔 일터가 있고, 동료가 있고, 펠릭스가 있다. 친구만이 없다. 베넷은 염분 섞인 거대한 물웅덩이에서 나온다. 옷과 머리카락은 푹 젖고, 장갑과 장화 안엔 물이 고여 철퍽거린다. 몸이 두 배는 무겁고, 피부는 쓰라리고, 근육은 피로를 호소한다. 물이 들어주던 무게를 온전히 본인이 다시 떠안았을 때, 이제는 반갑지 않은 TV가 베넷을 맞이한다.
베넷은 화면을 넘는다. 직전의 장소를 넘어, TV를 지나, TV를 지났다. 거쳐 온 수만큼의 화면을 되돌아갔다. 어느 하나 새롭지 않았다. 어느새 낯익은 문이 보인다. 베넷은 돌아왔다.
"베넷."
실험실 앞에서 헉슬리가 부른다. 화를 낼까? 아니면 규정을 어긴 것에 대해 어떤 처분을 내릴까? 베넷은 규정을 한 번도 어긴 적이 없다. 그건 헉슬리의 인부들이 갖는 공통 사항이었고, 그렇기에 어떤 반응일지 알 수 없었다.
"조금 늦었구나. 교대 시간이 10분 지났어."
돌아오는 것은 담담한 사실 고지였다. 그것만으로도 놀라웠지만 긴 여정에 비해 과히 짧은 시간은 귀를 의심하게 한다. 하지만 베넷은 놀라기에 너무 지쳐 고개만 힘없이 끄덕인다. 헉슬리는 좀 이상하다며 중얼거리고는 가운 호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비누를 섭취한 지 오래 지나 생긴 문제라고 빠르게 진단했지만, 주머니에서는 덕트 테이프와 가위뿐이다.
"비누가 없네. 올리브 향 비누가 캐비닛에 있던 것 같은데, 가서 확인해 볼래?"
"아니, 됐어."
"흠... 그래. 작업 들어오기 전에 뭐라도 섭취하는 거 잊지 마. 샤를로테네 화장실에라도 가 보던가."
헉슬리는 베넷의 상태가 신경 쓰이는 듯했지만, 실험실 내부에서 큰 소리가 나자 현장으로 가며 당부했다.
베넷은 캐비닛에 탑처럼 쌓인 고체 비누곽을 무시하고, 화장실로 들어간다. 라벤더 물비누가 비치되어 있다. 새것인지 통이 가득 차 있다. 펌프 뚜껑을 따고 입으로 들이붓는다. 알싸한 맛이 혀에 맴돈다. 풀 내가 섞인 깔끔한 라벤더 향이 느껴진다. 향긋하지만 코가 맵다. 미끈거리는 액체가 식도를 거쳐 위까지 내려간다. 비눗물이 닿은 모든 점막이 화하다가 곧 따뜻해진다. 명치 끝이 아리다. 그리고 저릿한 감각이 한 순간 흐르더니, 혈관을 타고 빠르게 퍼진다. 뇌는 화학 작용에 저항할 힘이 없다. 정신이 깨끗이 세척되는 듯, 머리가 말끔해진다. 단 하나도 고통스럽지 않고, 어떤 것도 아프지 않다. 뇌가 받아들이지 않는다. 감각기관의 자극이 단순화되고, 중요한 사실만이 뇌에 남는다. 상념 따윈 없다.
베넷은 작업에 복귀한다. 작업은 평소와 같다. 찢고, 자르고, 옮긴다. 찢고, 자르고, 옮기다가 어딘가 찢어진 것 같다. 아프지는 않다. 피곤과 피로를 잊어버리며 고통도 같이 잊었다. 작업에 지장이 갈 정도는 아니다.
"베넷."
"..."
"베넷!"
플로렌스다. 그녀의 청록빛 머리가 오늘따라 좀 더 초록빛이 돈다.
"정신 좀 차려."
"플로렌스! 좋은 아침."
"비누를 얼마나 마신 거야?"
플로렌스는 정량을 고집한다. 본인도 비누 없이 살 수 없을 텐데,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1회 적정량이 몇 시간마다 몇 ml였는지는 진작에 까먹었다. 베넷은 앞머리가 눈을 가리는 것 같아 위로 쓸어올린다. 머리카락은 쓸어 넘기기 무섭게 앞으로 다시 쏟아진다. 검붉은 액체도 눈앞으로 같이 쏟아졌다.
"아, 머리를 부딪혔나 봐."
"아니, 손가락이거든."
플로렌스는 질린다는 듯 큰 한숨을 쉬며 말한다. 손가락? 베넷은 오른손을 들어 본다. 검지와 중지, 약지까지 두 마디씩 사라졌다. 장갑째로 뜯겨 나갔다. 언제 다쳤는진 모르겠다. 반쯤 굳어 검게 변한 부스러기가 절단부에서 흐르는 새빨간 액체와 함께 떨어진다. 실험실 바닥은 군데군데 밟아 신발 자국으로 바뀐 핏자국이 즐비하다.
"호니커한테 가 볼래?"
"가 봐, 베넷. 플로렌스는 여기 좀 도와줄래?"
대답하기 전 헉슬리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말한다. 헉슬리는 평소답지 않게 눈 감아주는 일이 많다. 사실 아님을 알고 있다. 그저 밀린 시간만큼 뒤로 보충하겠지. 작은 문제가 큰 결과로 바뀌기 전에 미리 변인을 통제하는 것이다. 베넷은 고분고분 펠릭스의 개인 실험실로 직행했다. 노크 없이 문을 벌컥 열어젖히자 펠릭스는 잔뜩 찌푸리며 돌아본다. 새로운 호니커다.
"베넷. 노크 안 해?"
"안녕, 호니커!"
발랄한 인사에 펠릭스는 시선을 빠르게 훑는다. 누가 봐도 엉망인 행색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이리 오라며 손짓한다.
"장갑 벗어 봐."
"안 떨어지는데?"
"얼마나 그러고 있던 거야? 이 멍청아."
피가 굳은 거 아냐? 펠릭스는 베넷을 의자에 앉히고는 가위로 장갑을 죽 찢는다. 익숙한 펠릭스 호니커다. 베넷은 이 익숙함이 어딘가 위화감이 든다. 피는 아직 손가락 끝에서 떨어진다. 장갑 안에는 마른 혈액 대신, 버석거리는 소금과 덜 마른 짠물이 흘러나왔다.
"손가락 말고 피부도 엉망이잖아. 주방에서 굴렀다던가, 히말라야 소금 쓴 제품으로 목욕이라도 했어?"
펠릭스는 비꼬듯 웃는다. 이 기억은 취합되지 않는구나. 베넷은 위화감의 정체를 알아챈다. 펠릭스 호니커는 하나의 개체가 아닌, 개념의 일종이다. 헨리 헉슬리의 조카인 연구자. 자신이 직전까지 배웅한 "펠릭스 호니커"는 더 이상 그 개념에 포함되지 않았다. 숨을 멈추면 그렇게 존재할 수 없다. 결론적으로 자신은 없는 존재를 기억하는 것이다! 지금 당장 눈앞의 펠릭스만이 진실이며, 그 외는 거짓이다. 베넷은 그와 친구였던 것이 아닌, 친구였던 적이 없다. 신기한 일이다. 비누를 먹고도 이런 부조리한 생각을 할 수가 있다니. 하지만 그뿐이다. 무언가 느껴야 하는 걸까? 화를 내며 현실을 부정하거나, 그가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에 기뻐해야 했던 걸까? 지금으로서는 잘 모르겠다.
펠릭스는 웬일로 얌전한 베넷의 팔에 예고 없이 식염수를 들이붓는다. 약간의 통증이 베넷을 상념에서 꺼낸다. 펠릭스는 실험대로 돌아가 이것저것 꺼내며 덜그럭거린다. 큼직한 시험관에 액체를 가득 붓더니, 손가락뼈와 닮은 물체를 그 안에 빠뜨리고는 피펫으로 또 다른 물질을 떨어뜨린다. 그러자 부글거리며 형태가 부풀어 올라 손가락의 모양을 갖췄다.
"손 줘."
"내 손가락을 자를 거지, 너무하지 않아?"
"그래. 얼마나 다듬어야 하나 봐야 하니까 내놔. 비누 먹었지?"
베넷은 투덜대며 환부를 보인다. 불규칙하게 뜯긴 절단면이 의료용 가위로 다듬어진다. 아프진 않다. 펠릭스는 배양된 손가락을 맞붙이곤 실과 바늘로 사이를 꿰맨다. 실이 살 안팎을 오가며 스치는 느낌이 난다. 이건 좀 간지러웠다. 마무리까지 끝낸 펠릭스는 손을 앞뒤로 뒤집어 보더니 툭 놓으며 말한다.
"다음에는 잘린 손가락 들고 와. 줄기세포 배양보다 그게 더 편하니까."
"먹혀버렸는걸."
"그러니까 다음에 올 때... 아니, 이 건으로 올 생각 하지 마."
"안 고쳐줄 거야?"
"다치지 말라는 소리야."
펠릭스는 몸을 돌려 꺼낸 물품들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축객령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다치지 말라고 했을까? 소재가 아까운 걸까 싶지만 분명 정이 많은 탓이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서 느껴지는 것이 없다. 비누는 고통과 감정을 허락하지 않는다. 베넷은 작업으로 복귀한다. 눈 깜빡할 사이에 시간이 흐르고, 30분 정도의 잔업마저 마치고 나서 자유 시간이 생긴다. 곧 취침 시간이지만 욕실에 들린다.
샤를로테가 비누를 새로 채워 놨으려나, 욕실 문을 연다. 세면대에는 새 라벤더 물비누가 있다. 비누만이 원래대로 돌아간 것 같다. 샤를로테에게 나중에 비누에 대한 후기를 남겨야겠다 생각하며 뚜껑을 돌렸다. 하지만 어색한 손가락은 섬세한 작업을 수행하지 못했다. 힘을 잘못 들여 뚜껑은 열었지만 통을 엎어버리고 말았다. 액체가 팔과 장갑 사이로 흐른다. 아까워라. 베넷은 장갑을 벗고 손바닥까지 흐른 비눗기를 씻어낸다. 근래 들어 가장 정석적인 비누 사용이다. 음용하는 편이 더 좋았겠지만. 차가운 물살이 손 위로 쏟아지고, 비눗기를 가시려 문지르는 찰나 이물감이 느껴진다. 펠릭스가 기워준 손가락이다. 잘 붙어 덧날 구석은 없지만 툭 튀어나온 실밥이 거치적거린다. 베넷은 갑자기 기분이 나빠졌다.
효과가 벌써 가신 걸까? 베넷은 반쯤 남은 비누를 삼킨다. 속이 알싸해지더니 울렁거리기 시작한다. 아무리 익숙해졌다 한들 과복용은 과복용이다. 한도를 한참 넘은 몸은 새로운 물질을 흡수하지 못하고 거부한다. 명치 끝이 아리고, 참기 힘들 정도로 쑤신다. 목 끝이 시큰거리고 혀 밑에서 신물이 고였다. 저항할 수 없이 구역질이 올라왔다. 베넷은 변기에 도달하지 못하고 타일 바닥에 그대로 게워 냈다. 연보랏빛 액체에 붉은 기가 섞여 나온다. 알칼리성 물질이 분해한 점막이다. 작업 전 마신 분량까지 토해버린 것 같다.
토한 비누는 삼킬 수 없다. 위산이 섞여 중화되어 효과가 없다. 잔류하는 약효만으로 밤을 넘기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더군다나 평소 작업량보다 몇 배는 체력을 소모한 날이다. 남은 효과는 순식간에 소진되어 울렁거리는 내장뿐만 아닌 손끝부터 아려오기 시작했다. 조만간 버티기 힘든 고통이 덮칠 것이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 움직여야만 하지만 신체는 휴식을 요구한다. 작열통을 닮은 피부 통증과 찔린 듯한 근육통이 올라온다. 아픔으로 움직일 수 없는 신체를 움직여야만 아픔을 해결할 수 있다. 아이러니하다.
베넷은 아프고 싶지 않았다. 고통은 진절머리가 난다. 신체의 물리적인 고통도, 뇌에서 일어날 뿐인 자극도 체감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뇌를 가로막는 것은 없다. 눈가가 뜨겁고 시큰거린다. 잔인함과 폭력에는 울 수 없었는데 상실에는 속절없이 무너진다. 베넷은 감정이 싫었다. 경험했던 종류도 처음 겪는 것처럼 생소하다. 어떻게 해도 슬픔에는 익숙해질 수 없다. 도망쳐 봐도 더 큰 반동으로 돌아올 뿐이다.
틀어진 세면대 물에서 짠 내가 난다. 염소가 섞인 물이겠지만 어째선지 염화나트륨이 섞인 그때의 물소리와 닮았다. 입이 짭짤하다. 쓰거나 시큼할 테지만 어쩐지 짠 내가 난다. 다시 보지 못할 친구가 보고 싶다. 그럴 수는 없다. 세라믹 타일 바닥은 차갑다. 베넷은 타일 벽에 머리를 기댄다. 내일이 온다면 다시 비누를 마시고, 평소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잊을 수도 있을까? 베넷은 그러길 바란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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