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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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꿈 이야기가 불타고 있었다.
―사랑은 마지막에 반드시 승리한다.
―노력도 선의도 보답을 받는다.
―강하게 바란다면 이루어지지 못할 꿈같은 것은 없다.
그런, 어른이 되면 누구나 거짓말로 여겨버리는 넋두리를, 잠꼬대를 한결같이 믿었던 소년의 순정 그 자체인 종이 뭉치가 모닥불로 던져져 불타고 있었다.
꿈과 희망이 타고 남은 찌꺼기가 열기로 인해 생겨난 상승 기류에 휩쓸려―
재와 그을음이 높이 떠올라 아름다운 하늘을 참담하게 더럽히고 있었다.
「아아, 이건 너무하네요!」
히비키 와타루가 하늘을 우러러보며 그의 말과는 다르게, 오히려 기뻐하듯 몸부림쳤다.
아름다운 남자였다.
달빛이 드리운 듯한 은백색의 긴 머리카락. 완벽한 황금 비율의 타고난 육체.
세련된 디자인의 교복은 영문 모를 느낌으로 개조해 입고 있었다.
표정이나 몸짓도 세련되고 과분하게 매력적이라, 그가 움직일 때마다 나비 날개의 가루나 형광 물질이 흩날리는 것은 아닌지 신기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지나치게 아름답기에 더더욱, 어느 동네를 가든 눈에 띄는 존재였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마치 괴물을 마주친 것처럼 기이한 시선을 보내면서도 멀리서 그를 바라보거나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그것은 괴이한 것과 조우했을 때 가장 적절한 반응이지만―
최소한 비명이라도 질러줬으면 해.
욕을 하면서 침을 뱉고, 돌을 던져줬으면 해.
무시당하는 것이 제일 괴로워.
와타루는 그런 생각을 내세우기라도 하는 듯 일부러 유도하는 것처럼 움직였으나, 그런 그에게 다가온 것은 한 마리의 지저분한 비둘기뿐이었다.
「아아, 질! 가여운 질 드 레! 날개가 완전히 더러워졌네요!」
어깨에 앉은 그 비둘기에게 자신의 볼을 비비면서 와타루는 탄식했다.
「그을음투성이에 비둘기보다는 까마귀 같네요! 까마귀는 영리하니 훈련을 시키면 훌륭한 “재주꾼”이 될 것 같지만, 왠지 미움받기 십상인 것 같으니 그건 어려울까요?」
당연하다는 듯이 비둘기에게 말을 거는 와타루를 보고 주변 사람들은 더욱 멀어져 간다.
「··· ··· 지금의 제게는 오히려 그런 존재야말로 파트너로 어울린다는 생각도 듭니다만··· ···」
쓸쓸한 듯 투덜거리는 와타루의 머리카락을 그을음으로 범벅이 된 비둘기가 부리로 잡아당겼다.
「아야야얏!? 농답입니다, 질! 질투인가요? 알에 있을 때부터 키우면서 저와 함께 살았던 당신을 버리고 다른 파트너를 찾을 리가 없잖아요! 제발 부탁이니 기분 푸세요― 어라?」
비둘기가 난리를 피우는 탓에 벌어진 부리의 틈새 사이로 무언가가 흘러내렸다.
그것은 타고 남은 찌꺼기였다.
멀리서 바람을 타고 실려온 꿈의 잔해였다.
「대단하군요! 마침 잉크가 다 떨어져서 곤란하던 참이었답니다!」
와타루는 기뻐하면서 그 타고 남은 잔여물을 손가락 끝으로 비벼 뭉갰다.
그리고 그는 검게 물든 손가락으로 계속 품에 들고 있던 서류뭉치에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이걸로 완성입니다」
그런 서류뭉치를 보물처럼 꼭 끌어안고, 와타루는 또다시 몸부림을 쳤다.
「그도 기뻐해 주려나요?」
02
전쟁이 벌어졌었다.
소년들이 자신의 꿈과 이상, 그리고 사랑을 위해 서로 시험하고, 서로 상처 주던 슬프고 비참한 청춘 노래였다.
물론 그것은 이처럼 참담한 기억으로 회고되기는 하지만, 사람들이 정말로 총기나 칼을 들고 피로 피를 씻는 싸움을 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모두가 아이돌이었다.
무대에 서서 노래하고 춤추며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다.
하지만 당시 그들이 있던 사립 유메노사키 학원은 아이돌이 올바르게 아이돌로서 살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침체되고 부패했으며 정체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을 바꾸기 위해 일어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내세웠던 “혁명”이라는 두 글자에 소중한 것들을 난도질당해 분노하고 서러워하며 반격을 시도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누군가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 마련된 모든 것을 무기로 삼아 악용하고, 자기 자신이 안고 있던 울분과 불행을 서로에게 떠넘기고 말았다.
그 결과, 이 끝없이 넓고 큰 세상은 아주 조금 변했다.
하지만 이를 위해 치른 대가는 컸다.
―유메노사키 항쟁 시대.
―최초의 혁명.
―끝의 시작.
모두가 후회를 내비치며 당시의 비극을 추억했다.
03
병실이었다.
유메노사키 학원 근처에 새롭게 생긴 이 병원은 오직 단 한 사람의 몸 상태에 이상이 생겼을 때 바로 대처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다.
이곳에 모인 최신 의료기기와 최정상급 의료진들, 때로는 다른 환자들을 뒤로 미뤄서라도, 억지로라도 “그”를 연명시키기 위해 존재했다.
“그”는 세계적인 대부호인 텐쇼인 재벌의 후계자―텐쇼인 에이치를 말한다.
그는 유메노사키에서 벌어진 항쟁의 주인공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아이돌을 사랑했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재벌가의 가정교사를 통해 새겨진 제왕학이, 태생적으로 타고난 명석한 두뇌가, 메마른 감정이, 그 스스로의 손으로 그가 사랑하는 것들을 학살하게 했다.
그리고 그처럼 얄궂은 운명에 의해 스스로가 저지른 여러 악행들이 그를 갉아먹고 병들게 했다.
「··· ··· ··· ···」
텐쇼인 에이치는 널찍한 병실 바닥 위를 나뒹굴고 있었다.
그 또한 아름다운 남자이지만, 그 아름다움에는 균열이 생겨나고 있었다.
제대로 식사도 하지 않았는지 몸은 여위어 있고, 햇살이 내려앉은 듯한 금발도 흐트러져 착 가라앉아 있었다. 몸에 걸친 고급 소재의 환자복도 구겨지고 더러웠다.
둥지에서 떨어진 아기 새 같았다.
이런 그를 치료하고 살리기 위해 사용된 링거 등의 의료 기구들은 전부 그가 직접 잡아뽑고 마구잡이로 때려 부숴버린 상태였다.
에이치를 염려하거나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그를 치료하려던 의사들도 에이치의 심한 위협과 욕설로 인해 그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더는 살고 싶지 않아.
―부탁이니까 치료하지 말아줘.
―나는 살아 있으면 안 되는 인간이야.
「아뇨」
말라비틀어져 죽기 직전이었던 에이치의 아무도 알아듣지 못했을 혼잣말에 대답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병실 벽에 유일하게 달린 작은 창문으로, 아무리 애써서 몸을 접는다고 한들 그곳으로는 들어올 수 없을 텐데도, 큰 체구의 히비키 와타루가 소리도 없이 침입했다.
마치 꿈처럼.
마술이라도 쓴 것처럼 나타났다.
「―너구나. 『오기인』 히비키 와타루」
「이제 그 이야기는 막을 내렸으니, 그런 호칭은 그만둬주실래요?」
비몽사몽으로 이야기하는 에이치에게 스스럼없이 대답하며 와타루는 병실 내를 활보했다.
바닥에 흩어진 수많은 무언가의 잔해를 밟지 않고, 결코 망가뜨리지 않으면서.
「마음을 다잡도록 하죠! 지금은 서로 무대의 성공을 기뻐하며 휴식을 취하고 원기를 회복합시다! 그것이 저희의 의무랍니다, 텐쇼인 에이치 군!」
「대체 뭘 하러 온 거야, 넌?」
빛을 잃은 눈동자로 와타루를 올려다보며 에이치는 원망을 토로하듯 속삭인다.
「승리한 줄 알았지만 실제로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날 비웃으러 온 거야?」
볼품없는 모습을 보이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는지, 에이치는 휘청거리면서도 침대에 걸터앉으려 했다.
청소하는 사람마저 그를 멀리하다 보니 더러워진 그 침대가 지금 그의 옥좌였다.
「아니면. 친구들의, 『오기인』 모두의 원수라도 갚을 생각이야?」
「아뇨 아뇨? 조금은 시원찮긴 했지만 당신은 훌륭하게 무대를 끝까지 해냈습니다! 칭찬을 했으면 했지, 비웃는다니 말도 안 됩니다!」
와타루는 어디까지나 즐겁다는 듯 이야기했다. 바닥에 흩어진 꽃병 주위에서 형형색색의 꽃잎을 주워 그것을 움켜쥐고는 다시 손바닥을 펼치자 한 송이의 완벽한 꽃이 되었다.
「게다가. 제 친애하는 벗들, 『오기인』은 딱히 죽지는 않았어요. 그렇게 약하지도 않답니다. 너무 무시하진 않았으면 좋겠네요」
순간 두 눈에 적의를 가득 채우면서도, 와타루는 마치 가면을 쓰듯 그것을 숨겼다.
「슈는 그가 사랑하고 그를 사랑해 주는 인형들에게 위로받으며 천천히 기력을 회복하는 중입니다. 카나타도 그의 마음을 구원한 미숙한 영웅과 함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있죠. 물론 우리 마왕 폐하, 레이도―그 사람은 말이죠, 죽임을 당하더라도 죽지 않는답니다」
한 명 한 명, 『오기인』이라 불렸던 걸물들의 이름을 입에 올리며 와타루는 미소 지었다.
「그리고. 저희가 목숨을 걸고 끝까지 지켜낸 막내 나츠메 군에겐 상처 하나 없죠. 당신이 손 놓아버린 파랑새를 빨리도 찾아서는 『오기인』이 아닌, 한 명의 인간으로서의, 아이돌로서의 인생을 새로이 시작하고 있습니다」
「··· ··· 그들은 참 강하구나. 다들 나보다 강하고 훌륭한, 존경스러운 사람들이야. 히요리 군이랑 나기사 군도 벌써부터 다음 스테이지로 나아가고 있는 것 같고」
에이치는 왠지 망연한 얼굴로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는 미아처럼 고개를 숙였다.
「움직이지 못하는 건 나뿐인가. 『오기인』 정벌, 또는 유메노사키 항쟁이라 불려야 할 일련의 이야기에서 패배자는 나뿐이었을지도 모르겠네」
「아뇨 아뇨. 저도 말이죠. 실은 부끄럽지만 앞으로―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거든요」
에이치와 같이 망연자실한 얼굴을 하고, 와타루는 검은 얼룩이 살짝 남은 손가락 끝으로 꽃을 만지작거린다.
「최고의 무대를, 최선이 아니더라도 차선의 결과로 끝내서 꽤 만족스럽기는 하지만요. 앞으로의 계획이 없어져 버려서 조금 고민이에요」
「그렇구나. 그건 미안하다고 얘기해 둘까. 넌 악의를 한몸에 받는, 비웃음과 모멸의 대상이 되어야 할 악역을 연기했으니 말이야」
「네. 그 덕분에 제게 의뢰해 주는 사람도 없어져서 앞으로의 계획이 미정이 되었답니다. 직접 무대를 준비하고, 마음대로 대충 적당한 이야기를 상연해도 되겠지만··· ··· 혼자 하는 연극은 외롭잖아요?」
「넌 항상 혼자서도 즐겁게 무대에 섰던 것 같은데」
「어쩔 수 없이 그랬던 겁니다. 누군가를 즐겁게 만들기 때문에 엔터테이너인 겁니다. 저는 저를 위해서만 무대에 서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래서는 의욕이 나질 않잖아요」
와타루가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에이치에게 가만히 꽃을 내밀었다.
「그래서. 저를 가장 만족시켜 준 무대의 주최자에게 새로운 의뢰를 받을까 합니다. 그러려고 이렇게 온 거예요. 병문안도 할 겸 말이죠」
「그건 비꼬는 거야? 난 너와 네가 사랑하는 벗들을 깎아내리고 욕보인 데다, 내 욕망을 위해 짓밟아 죽였는데도」
「아무도 죽지 않았답니다, 에이치 군. 모든 것은 그저 이야기일 뿐입니다」
「자기들은 하나도 상처를 입지 않았다고 우기면서 억지를 부리고 싶은 거야?」
「아뇨. 제가 당신을 원망하고 화를 낸다면, 그것이야말로 고고하게 악역을 끝까지 연기했던 친구들에 대한 모욕이 되고 말죠. 그렇기에 저는 앙갚음 같은 건 하지 않을 겁니다」
「네 생각은 잘 모르겠어」
「저도 모르겠어요. 이런 식으로 살아 있다는 실감을 느끼면서 살아본 적은 태어나서 처음이라… 제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것이 뭔지 모르겠어요」
그렇게 말한 와타루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넘어진 어린아이처럼 순진무구하게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04
「이런. 아무 생각 없이 되는대로 얘기해 버렸습니다만, 그전에 병문안 선물부터 드려야겠죠」
갑자기 정신을 차린 와타루는 에이치에게 손에 들고 있던 꽃을 살며시 건넨다.
그리고 그 꽃은 에이치의 손가락에 닿은 순간 서류뭉치로 변했다.
마치 마법처럼.
「··· ··· 놀랐어. 여전히 마술을 잘하는구나, 히비키 군」
「그런 식으로 다 안다는 듯이 얘기할 만큼 당신과 친하지는 않습니다만」
「쭉 지켜보고 있었어, 너를」
에이치는 허세를 부릴 기운도 없는지 솔직하게 말하고는 서류뭉치를 넘기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표정에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이건―」
「후후후. 저희 『오기인』의 사랑스러운 막냇동생이자 유일한 자식인 나츠메 군이 필사적으로―적어낸 꿈 이야기입니다」
에이치의 놀란 얼굴을 보고 와타루는 만족스러워하며 이야기한다.
「거기에는 지난번에 벌어진 저와 당신들 간의 최종 결전에서, 저희 『오기인』측이 승리하기 위한 시나리오가 적혀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넌 결전 전에 『오기인』들이랑 뭔가 이야기를 주고받았었지. 나도 신경을 쓸 상황이 아니라서 그쪽엔 관여하려고도 하지 않았지만 말이야」
서류뭉치를 조심스레 넘기면서 읽던 에이치는 생긋 미소 지었다.
「후후. 귀엽네, 말 그대로 꿈 이야기야. 사랑하는 『오기인』이 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구 하나 잃지 않고 해피 엔딩에 다다르고 싶다―」
「네. 그런 말도 안 되는 공상이, 비현실적인 망상이 적혀 있죠」
「··· ··· 그 무대에서 우리가 너를 쓰러뜨렸으니 이래저래 결말이 났지. 거기서 너희가 이겼다면,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흙탕물 튀기는 항쟁을 계속하고 있었겠지」
「네. 그건 예상할 수 있었기에, 저는 귀여운 그 아이의―나츠메 군의 꿈과 기대와 사랑이 가득 담긴 이걸 받을 수 없었답니다」
「그리고 예정대로 모든 것은 마무리됐어」
「네. 그래도, 역시 저희가 사랑한 그 아이가 필사적으로 적은 이야기예요, 꽤 재밌죠? 못 본 척 버려버리기엔 너무나도 아까워요」
와타루는 그야말로 갓난아기라도 돌보는 것처럼 서류뭉치의 표면을 어루만졌다.
「그래서 순식간에 내용을 자세하게 살펴본 다음 이를 기억해서 몰래 복제해뒀답니다. 원본은 나츠메 군이 이미 스스로 불태워 버렸으니―그 아이가 그린 꿈 이야기는 더 이상 이 땅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을 테지만요」
장난을 치는 데 성공한 장난꾸러기의 얼굴로 와타루는 웃었다.
「모두가 그렇게 믿고 있겠죠. 하지만 여기에 모조품이지만 한없이 원본에 가까운 물건이 남아 있습니다. 아니, 제가 스스로의 욕망을 위해 되살려내서 남겨놨답니다」
「흐음. 하지만, 이건 쓸 수 없잖아? 현실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망상의 집적물, 요컨대 아무 가치도 없는 잡동사니야. 잔혹한 현실에서 눈을 돌린 어리석은 독자가 자기 입맛에 맞는 전개를 날조해서 쓴 2차 창작 같은 것에 불과해」
서류뭉치를 더러운 침대에 내던지고 에이치는 이를 비웃었다.
「그건, 이 세상과는 무관해. 그런 이야기는 공상을 즐겨 하는 필자의 머릿속에서 밖에 존재하지 않아. 진짜가 아니야. 현실이 아니라고」
「네. 그러니 이 현실이 똑바로 보이는 당신이 이걸 재구축해주세요」
「··· ··· ···?」
「어차피 입원 중에는 심심하잖아요?」
에이치가 내던진 서류를 한 장 한 장 조심스럽게 쓸어모으며 와타루는 미소 지었다.
「당신은 그 한가한 시간을 이용해서 이 서류를 밑바탕으로 생각해 주세요. 새로운 이야기를. 『오기인』이, 당신의 적이 승리하는 이야기를요」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는데?」
「그럴 가능성은 한없이 낮을지도 모르지만, 의도한 것과 다른 미래가 찾아왔을 때를 대비해 둬야만 하겠죠. 당신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겠지만, 당신은 선천적으로 병약해서―언제 죽을지 모르잖아요」
「··· ··· 그러네. 지금은 살아갈 기력을 잃고 치료마저 거부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이야기의 주인공이었던 당신이 죽고 갑작스레 불합리하게 빠져 버린다면, 이야기 자체가 파탄 나고 말 것입니다」
「··· ··· ··· ···」
「제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알겠죠, 에이치 군」
「잘 알고 있어, 히비키 군」
시체처럼 탁했던 에이치의 두 눈동자에 빛이 돌기 시작했다.
「나한텐 책임이 있어. 주인공으로서의, 저자로서의 책임이. 나는 나라는 등장인물이 죽고 이 세상에서, 이야기에서 사라져 버릴 때를 대비해야만 해」
「네. 다만 당신은 이야기를 만드는 프로가 아닌 모양이니, 뭔가 이야기의 밑바탕―원안이 될 만한 것이 있으면 좋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나츠메 군의 이 꿈 이야기가 내용 면에서도 퀄리티 면에서도 딱 알맞겠죠」
「그러네. 천재이자 최연소 『오기인』이 수명이 줄어들 만큼 고생해서 지은 이야기잖아」
에이치는 이번에야말로 비웃음을 멈추고 그의 앙숙을 순순히 칭찬하며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히비키 군. 아무리 그래도 내 죽음을 전제로 한 이야기를, 누구보다도 내가 죽지 않기를 바라는 케이토에게 쓰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에이치는 애정을 담아 그렇게 얘기하고 나서는 자신이 한 말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모든 것을 잃었을 자기 자신에게도 아직 사랑하는 것이 있다는 사실이 떠오른 걸까.
「내가 쓸게. 내가 죽은 뒤에도 이야기는 이어질 테니까」
활기찬 모습으로 에이치는 침대에 튀었던 얼룩을 손가락에 묻히고는 서류뭉치의 뒤쪽에 글자를 적기 시작했다. 그 글자는 힘없고 비뚤비뚤해서 지금은 오직 그 자신 말고는 읽을 수 없었다.
「일단은 살아있는 동안에 내가 지는 걸로 하자. 『오기인』을 쓰러뜨리고 모든 것을 손에 넣어서 미치고 폭군으로 변한 나를 신세대의 영웅이 무찌르는 거야. 그건 『오기인』의 생존자인 나츠메 군이든, 아니면 다른 누군가든 상관없어」
「네♪ 그리고요? 거기서 이야기는 어떻게 되죠?」
「단순히 내가 교체되는 것만으로는 의미가 없어. 사회 구성원들 스스로가 훨씬 자발적으로, 세상을 더 좋게 만들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해야 해. 그래, 다음 목표는 모두가 자발적으로 움직이게 만드는 거야. 그러니까, 음, 아아아―」
에이치는 본인의 기세에 못 이겨 서류를 엉망으로 구겨버리고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생각이 정리가 안 돼! 난 천재가 아니니까 말이야! 아아, 한심한 데다 너한테 부탁할 처지도 못 되지만―구상하는 걸 도와주지 않을래, 히비키 군?」
「네, 기꺼이요♪ 어차피 저도 한가하거든요!」
침대에 걸터앉은 와타루는 열중해서 이야기를 짓기 시작한 에이치를 행복하게 바라본다.
「다음에 제가 설 무대가 어떻게 될지 저도 기대하고 있답니다. 아아, 예나 지금이나 그것만이 제게는 삶의 모든 낙이랍니다」
「종이가 부족해! 그리고 필기도구도 필요해! 히비키 군, 근처에서 되는대로 좀 사다 줄 수 있을까?」
「네네. 당신, 제 팬이 아니었던가요? 사람을 막 부려먹네요?」
“뭐 상관없지만요” 하고 미소를 지은 와타루는 마치 새가 날아가는 것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 칭송하세요, 자아내세요, 창조하세요―이야기를! 비극은 두 번째에는 희극이 된답니다. 차기작은 분명 아주 즐거운 이야기가 되겠죠!」
「됐으니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내 수명이 다하기 전에!」
「네네. 사람을 험하게 다루시는군요, 저자 님께선··· ···♪」
··· ··· ··· ···
그렇게 히비키 와타루는 텐쇼인 에이치가 이야기를 만드는 것을 도와주게 되었다.
그들은 서로 의지하고 격한 논쟁을 주고받으면서 미래를 구상했다.
그런 그들이 유메노사키 학원의 지배자인 『fine』로서 혁명아인 『Trickstar』에게 패배한 것은, 음울한 겨울이 끝난 뒤의 일이었다.
꾀죄죄한 몰골로 지칠 대로 지친 새가 옮겨온 씨앗이 꽃을 피워내는 계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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