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없으면 망하는 게임 02.
원부 / 퇴고x
와. 진짜 너무 힘들다.
원우는 쿵, 하고 거센 소리와 함께 닫힌 문은 안중에도 없이 집에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감격스러워져 한참을 그대로 서 있었다. 걸치고 있었던 겉옷이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지거나 말거나, 센서등이 켜졌다 꺼진 탓에 어두컴컴해진 현관에서 멍하니 바닥을 바라보는 것만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저녁도 못 먹고 떠넘겨진 일을 터지지 않을 정도로만 조치해 놓고서는 헐레벌떡 집에 돌아온 것이 지금. 회사에 숙직실이 있었다면 꼼짝없이 거기에서 잤겠지… 싶어져 기운이 쭉 빠졌다. 손목의 시계를 확인하니 11시가 다 되어가는 때였다. 그제서야 뒤늦게 허기진 배가 고통을 호소했다.
이 회사는 왜 자꾸 쓸데없는 일을 만들어서 전달해주는지 모르겠다. 마케팅과는 전혀 무관한 옆 부서 일에서부터, 부장의 가족여행을 위한 휴양지 서치(이걸 대체 왜? 자신이 해야 된다는 말인가???)까지. 성격이 더러운 것으로 소문이 자자한 사람이라 안 했다간 찍히는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하긴 했으나…….
하아아아아. 하루 온종일 참아낸 깊은 한숨이 이제서야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갑작스레 왜 이러고 살지, 하는 현타 비슷한 생각이 든 것은 덤이었다. 덕분에 우울하게 가라앉은 기분은 무얼 해도 쉬이 되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내일의 해는 뜰 것이고, 아직 평일이니 결국 출근은 하고… 아,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퇴사할까. 다소 충동에 가까운 생각들을 애써 꾹꾹 눌러담는다. 몸에 힘이 빠져 걸음을 옮길 기력조차 없었으나, 배에서 자꾸만 밥 달라는 소리가 나 비척비척 안으로 들어선다.
씻고, 밥 먹고. …게임이나 해야지. 아, 운동도 해야 하는데. 입속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다 보니 자연스레 현실적인 고민이 툭툭 튀어나왔다. 사실 입사 초반, 그러니까 스무 살이 좀 넘었던 나름 열심히 했으나 그만둔지 제법 되었다. 게임 할 시간도 모자라는데 어떻게 운동까지 해. 뭐 그런 이유로 말이다. 다소 게임 중독이나 다름없는 이유였지만, 반쯤은 진심이었다. 실제로 밥먹듯이 하는 야근에, 퇴근하는 데 한시간 정도 걸리니… 그 이후에 집에 도착해서 씻고 밥만 챙겨도 하루는 다 간다.
그래서 취직에 성공하고 얼마 안 되었을 시점에는 수면시간을 줄여서까지 게임을 했었으나 나이를 먹은 건지, 그냥 운동을 안 해서 체력이 간당간당해진 것인지. 어느 순간부터인가 원래도 지옥이나 다름없었던 회사가 그냥 거대한 고문실이나 다름없이 느껴져서… 아무튼, 스물 다섯쯤인가? 그 때부터는 최소한 일곱 시간은 자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래. 비교적 최근까지는 그랬다.
최근까지는.
원우는 뜨거운 물을 부은 컵라면을 키보드 앞쪽 좁은 공간에 아슬하게 내려놓았다. 목에 둘렀던 수건은 대충 의자 팔걸이에 걸어두기도 했다. 게임을 하다 보면 밀려 떨어트릴 것이 분명했지만, 그건 그 때 가서 다시 줍거나 하면 된다는 안일한 생각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 자신을 환영한다는 듯 삐걱이는 의자 소리에 그제서야 완전히 집에 돌아왔다는 실감이 난 원우가 느릿하게 컴퓨터 전원을 켰다. 모니터에 불이 들어오기 무섭게 바로 게임을 실행시키곤, 대충 컵라면을 해치우기 시작했다. 빨리 먹지 않으면 접속 이후부터는 완전히 까먹어서 국물이라곤 하나도 남지 않은 퉁퉁 불어버린 면발을 씹게 될 테니까.
[게임에 접속 중입니다. . .]
[일루네아 사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모험가님!]
[화합의 신 아마릴리스가 당신을 수호합니다.]
[불꽃의 신 비비아나가 당신을 축복합니다.]
[아웬의 꽃밭에서 희미한 백합향이 감돕니다.]
[현재 비전투 지역입니다.]
[길드] 전원 님이 접속하셨습니다.
[길드] 길드 단체톡방, 디코 공지 확인 / 현생으로 접속 못할시 길마 갠톡
[길드] 현재 아웬의 축복을 받은 상태입니다.
[길드] 전원 : 대타 및 급한 연락은 단톡방 오픈프로필 통해 개인 연락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길드] 룡 : 할 게 없는게 문제
[길드] 코코 : 이게 누구야
[길드] 코코 : 퇴근한 직장인 등장하십니다!!
[길드] 룡 : 오
[길드] 아지 : 또 야근햇나바 지금온거보면ㅠ
[길드] I : 회식한거아님?
[길드] 체리 : 야근이다에 내 15강 무기방패 건다ㅇ
[길드] I : 오 검방쥔놈 ㄷㄷ
[길드] 레오 : wow 검방쥔놈
[길드] 룡 : 안녕하세요 형~ 오늘도 늦으셨네여
[길드] 냥냥냐냥냐 : 쫀밤~~
순식간에 우르르 올라오는 환영 채팅에 원우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내어 웃었다. 급하게 먹은 라면에 더부룩해지는 것만 같았던 속이 순식간에 괜찮아지는 기분이었다. 익숙하게 인사하려던 원우는 문득 근래 자신이 가장 신경쓰는 닉네임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아 눈을 끔뻑였다. 왜 없지. 없을 수가 없는 시간대인데….
뉴비를 길드에 초대한 이래 지난 2주간 원우는 하루도 빠짐없이 접속하며 그를 챙기고 있었다. 장비 세팅도 하나하나 직접 설명해주고, 레벨업을 위한 던전도 함께 한두시간씩 돌아주고. 당장 챙겨줄 수 있는, 자신이 던전을 돌며 주웠던 쓸만한 악세사리도 쥐여주곤 했다. 그렇게 꼭 둘이서 하나인 것처럼 몇 주를 보냈으니, 당장 자리에 없는 그를 찾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마도. 원우는 단축키를 눌러 길드 접속 인원을 하나하나 확인하고선 잠시 망설이다 손을 움직여 채팅을 보냈다.
[길드] 전원 : 좋은 저녁입니다.
[길드] 전원 : 혹시 뉴비님은 안 계세요?
[길드] 냥냥냐냥냐 : 킨지 2시간 지났는데 못봤어ㅠ
[길드] 레서 님이 접속하셨습니다.
[길드] 레서 : 많이 미숙해요 플레이 조언 감사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길드] 룡 : 오늘 아직 안 오신 것 같은데요??
[길드] 체리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타이밍
[길드] 냥냥냐냥냐 : 헉
[길드] 룡 : 오셨네
[길드] I : 뉴비님 호랑이시네
[길드] 레서 : 저 왜요?!
[길드] 호랑이의시선 : 어흥
[길드] 레서 : 일단 안녕하세요~! 좋은 밤입니다!!
[길드] 레오 : 호랑이 우는중
[길드] 아지 : 어서오세ㅇ려~~
[길드] 코코 : ㅋㅋㅋㅋㅋㅋㅋ어서오세요~~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짧은 채팅과 거의 동시에 채팅을 보낸 목적이 달성된 탓에 잠시 멍해진 원우는 순식간에 접속 인원이 한 명 늘어난 길드원 목록을 빤히 바라보았다.
레서. 레서판다라는 동물에서 가져온 두 글자 닉네임.
반년쯤 전, 일루네아 사가는 서버 오픈 이래 한 번도 해준 적이 없었던 장기 미접속 유저들의 닉네임을 싹 정리하여 풀어주는 이벤트를 실시했었고, 이에 한 글자 내지 뜻이 있는 특별한 닉네임을 갖고자 대부분의 유저들 모두가 득달같이 달려들었던 적이 있었다. 원우 자신이야 탐나는 이름이 있거나 한 것은 아니었으니 심심풀이 용으로만 닉네임 얻기 쟁탈전에 참가했었는데… 이 레서라는 닉네임은 적당히, 아무거나, 생각나는 대로 적어 가져온 이름들 중 하나였었다.
길드에 그를 데려온 이후 가장 먼저 한 일은 닉네임 변경권을 쥐여주며 이 이름으로 바꾸게 한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 외치기와 귓속말이 잠잠해지고, 자꾸 난리치던 이들 또한 접속을 종료한 시점에 원우는 발 빠르게 캐시샵에서 변경권을 구매해 왔다.
선물하기로 바로 줬다가는 부담스러워할 수 있으니 자신의 인벤토리로 가져온 뒤 직접 거래를 통해 넘겨주면서, 무어라 반응하기 전에 남아돌던 닉네임 세이브용으로 삭제 대기를 걸어둔 캐릭터 한명의 닉을 알려주며 그것으로 바꾸지 않겠냐고 제안했었다. 뭔닉이다잇대, 라는 이름은 누가 봐도 어지간한 이름은 다 있으니 이것저것 넣어보다 존재하는 닉네임입니다, 를 몇 번이고 겪은 사람이나 지을 수 있는 이름이었으니까. 대충 아무거나 눈에 띄인 닉네임을 말해준 것 치고는, 이상한 유저들에 열심히 대항하던 게 인터넷에 짤로 도는 위협하는 레서 판다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 잘 어울린다는 생각도 했고.
아무튼, 과거에 이벤트로 뿌렸던, 자신이 쓰지 않는 남는 아이템이라는 원우의 변명을 순진하게 받아들인 뭔닉은 그렇게 레서가 되었다. 게임 회사들은 무언가를 보상으로 줄 때 어지간하면 아이템 시세에 영향을 주지 않기 위해 거래가 불가능한 것들로 준다는 사실을 모르는 탓에 벌어진 뉴비 이슈였다. 비슷한 논리로 재판매를 하지 않아 지금 구하려면 기존 판매가의 20배쯤 되는 하얀 사제복 의상과 헤일로, 망토 악세서리 세트 또한 넘기는 데 성공했던 원우는 길드 아지트에 나타난 레서를 흘긋 바라보았다. 깔끔하고 성스러운 외형의 레서를 보니, 이전의 기괴한 악세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던 그가 생각나 절로 웃음이 나왔다. 내가 바꾼 거라고 생각하니 제법 뿌듯하기도 하고. 옷의 가격은, 음, 진실이야 언젠가 알게 되겠지…. 뉴비는 원래 다 그렇게 크는 거다.
자기한테 팔라고 했을 땐 안 팔아줬으면서 진짜 섭섭하다는 체리의 투정 섞인 귓속말 테러야 조금 힘들었지만 뭐, 알아서 잘 매물 구해다 입지 않았던가? 그마저도 금방 질려서 옷장행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아무튼. 이후로 다른 길드원들 또한 레서에게 관심을 가졌고, 다행히도 그는 길드에 원래부터 있던 사람인 것처럼 잘 녹아들었다. 그러니 뭐. 원우 자신도 그를 챙기고, 다른 길드원들도 그를 챙기고. 길드에서 할 수 있는 컨텐츠들부터 가볍게 알려주고, 일반 던전도 가고, 스킬 설명을 해준 뒤 레이드도 가서, 버프창에 켜지는 홀슈의 물공뻥 스킬 아이콘에 감동하고…. 잠시 근래의 생활을 되짚던 원우는 금새 상념에서 깨어나 무수히 많은 ㅋ을 치며 은근히 자신을 놀리는 중인 길드원들의 채팅을 가볍게 흘러넘기며 레서를 파티에 초대했다.
[레서 님을(를) 파티에 초대하였습니다.]
[레서 님이 파티에 가입하였습니다.]
[파티] 전원 : 안녕하세요.
[파티] 레서 : 안녕하세요!! 죄송해요 오늘 제가 좀 늦게 왔죠ㅠ
[파티] 레서 : 기다리셨을 것 같은데 ㅜㅠ 죄송해요ㅜ
[파티] 전원 : 아니에요. 저도 방금 막 왔습니다.
[길드] 체리 : 아 뉴비님 데리고 일퀘갈랬더니
[길드] 체리 : 벌써 파티시네 어디 가셨어요?
[파티] 레서 : 오늘도 야근하셨어요?ㅠㅠ
[파티] 레서 : 요새 자주 하시네요ㅠㅠ
[길드] 전원 : 저랑 파티입니다.
[길드] 체리 : ?
[길드] 레서 : 네 저 전원님이랑 갈게요! 감사합니다!ㅠㅠ
[길드] I : 민첩한 하루 되세요ㅋㅋ
[길드] 체리 : 거참 빠르네
[길드] 체리 : 대신 너가 가자
[길드] I : 아ㄹ니 나는 이미 일퀘를 했는데 왜
[길드] 체리 : 괘씸죄 ㅎ
[길드] 코코 : ㅋㅋㅋㅋㅋㅋ우자형 말은 저렇게 하면서 같이 가주는 것도 웃겨
길드원들의 관심이 금새 옮겨가는 것을 보며 파티 채팅만 올라오는 것으로 전환한 원우는 오늘도 야근하셨어요? 라는 채팅에 자신도 모르게 순순히 대답하려다 멈칫했다. …내가 원래 이렇게 개인적인 질문에 스스럼없이 대답하는 사람이 아닌데. 너무 당연하다는 듯 네, 일 때문은 아니고 상사가 좀… 이라는, 살짝 고자질하는 어린애같은 대답을 할 뻔 했던 것이다. 괜히 머쓱해진 원우가 무어라 대답하지 못 하고 키보드만을 하염없이 문지르고 있자 레서의 채팅이 먼저 올라왔다.
[파티] 레서 : 아
[파티] 레서 : 그!!
[파티] 레서 : 제가 너무 사생활 캐묻는 것 같으면 ㅠㅠ
[파티] 레서 : 대답 안 하고 편하게 넘겨주셔도 돼요ㅠㅠ
[파티] 레서 : 저 그런거 신경안써요!!! ㅠㅠ 그냥 적당히
[파티] 레서 : 대답 안 하고 다른 거 해주시면 돼요 진짜루
너무 신경쓸 것 같은데. 반사적으로 그런 생각을 한 원우가 옅은 한숨을 뱉었다.
여기서 잠시 지난 몇 주간 겪은 레서에 대해서 얘기해 보자. 레서는… 눈치가 빨랐다. 사람의 기분을 굉장히 잘 캐치해낸다고나 할까. A처럼 말했다가도, 듣는 사람이 떨떠름한 기색을 은연중에 내비치면 금새 말을 바꾸어 B라는 전혀 다른 얘기를 한다는 느낌. 물론 그게 전부였다면 평범하게 눈치 빠른 사람이겠지 하고 끝냈겠지만… 온라인 세상인만큼 충분히 마가 뜰 수 있는 짧은 시간이나, 장난스러운 말에도 그렇게 반응한다는 게 문제이지 않을까.
문제라기엔 별 거 아닌 것 같아도 원우에겐 레서의 그 행동이 다소 강박적이지 않나 싶을 정도로 느껴졌기 때문에… 이건 제법 큰 문제였다. 적어도 전원우에게만큼은.
길드에 그가 들어오고 하루이틀 즈음 지났을 무렵 체리가 레서에게 직접 강화와 강화석에 대해서 설명을 해 주었었는데, 소위 말하는 일반인의 잔혹한 질문을-그럼 강화석 안 쓰고 직접 두들기는 건 너무 돈낭비 아닌가요?-레서가 고스란히 해 버렸고… 유독 운이 없어 이상할 정도로 강화가 망하는 체리가 장난스럽게 말끝을 흐리며 뭐, 그래도 금방 올라갈 수도 있고… 게임에 돈 쓰는 거 자체가 좀 그런 느낌이긴 하죠, 같은 말을 했었다. 그리고 이상하리만치 채팅이 없어진 레서가 순식간에 사죄의 채팅을 몇 개나 보냈는지를 생각하면, 좀 과하지 않나 싶은 건 어쩔 수 없지 않은가. 후에 체리 또한 직접 자신에게 그랬었으니까.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에 너무 미안해하셨던 것 같은데? 라고.
원우는 레서가 뭘 하는 사람인지, 성격이 어떤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잘 모르지만… 그렇게까지 이 게임에서의 인연을 어렵게 생각하지 않고, 얼굴 보지 않을 사람인 만큼 적당히 편하게 여겨주었으면 했다. 또한 자신이 요 근래 들어 그와 함께 있을 때 느끼는 즐거움과 편안함을, 그가 똑같이 느껴주면 좋을 것 같았다… …까지 생각했다가, 와, 전원우 엄청 오바하네 싶어졌지만… 적어도 그가 게임을 즐겁게 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은 진짜이니까. 거의 망해 가는 것이나 다름없는 게임에 뉴비는 소중했다. 암, 정말 소중했다. 알려준 대로 칼같이 물공 버프가 끝날 적마다 새로 갱신해주는 홀슈도 소중했고.
평소의 전원우였다면 여기서 사고를 멈추고 일상에 복귀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안타깝게도 회사 탓에 제법 피폐한 정신상태였고, 이는 다소 충동적인 선택을 하게 만들었다. 가령 당신이 편해졌으면 좋겠다, 라고… 당사자인 레서에게 구구절절 말하는 선택을. 원우는 잠시 머뭇거리던 게 거짓말이였다는 것처럼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렸다.
[파티] 전원 : 아니에요. 잠깐 생각하고 있었어요.
[파티] 전원 : 그리고 좀 갑자기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저야말로 편하게 말하셔도 괜찮아요.
[파티] 전원 : 저희 길드 채팅 계속 봐 오셨죠? 다들 편하게 장난치는 거.
[파티] 전원 : 단톡방 공지엔 길드원 어록 공개적으로 걸려 있기도 하잖아요.
[파티] 전원 : 레오가 한 말 보셨어요? 한번만에 성공했는데 원래 이러냐고 한 거요.
[파티] 전원 : 그거 강화 얘기에요. 그리고 그 때 레오가 뉴비였거든요.
[파티] 전원 : 절반 정도는 그렇게… 아무것도 모를 시절부터 있었어요.
[파티] 전원 : 그리고 서로 괜히 짓궂게 말하기도 하고 그러니까, 레서 님도 말하는 거에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파티] 전원 : 물론 길드도 사람들이 모인 곳이니 반쯤 사회생활이고 결국 말을 완전히 편하게 할 순 없다지만.
그래도 온라인이잖아요. 현실 살기도 힘든데 게임 속에서만큼은 편하게 있으시면 좋겠어요. 길드원들 다 레서 님이 거래 걸고 샘물 한 개 올려두고 값이 1억이라고 말해도 옳다구나 1억을 드리겠습니다 할 사람들이에요. 이건 다들 게임을 꽤 해온 사람들이고 레서 님이 뉴비여서인 것도 있지만… 구구절절 채팅을 쓰던 원우가 답장이 없는 레서의 캐릭터를 흘긋 바라보고 괜히 심호흡을 한 번 했다.
[파티] 전원 : 무엇보다도 다들 레서 님이 좋아서 그래요.
보면 알아요. 다들 레서 님 좋아해요. 저희 게임 같이 한 지 벌써 2주나 됐잖아요. 그간 레벨업도 많이 하셔서 동조율도 200이나 되셨고…. 아무튼, 이제 저희 게임 친구도 아니고 가족이에요. 일루사가 친구는 진짜 가족이나 다름없다구요…. 아, 이건 저희끼리 하는 농담인데… 한 번 13 길드원이 됐으면 평생 길드원이고 가족이라는… 부담을 느낄까 애써 농담조에 가까운 시덥잖은 채팅까지 덧붙여 보내던 원우는 문득 저도 레서 님 좋아하구요, 라는 말까지 덧붙이고 말았다. 별 생각 없이 써놓고서는 엔터를 치는 순간에 이건 너무 갔나, 싶어졌으나….
[시스템] 도배 경고 (채팅 제한 해제까지 남은 시간 : 30초)
그와 동시에 뜬 시스템 알림에 멈칫한 원우가 한참 모니터를 바라보다 저도 모르게 참고 있던 숨을 크게 내쉬었다. …도배가 걸린 것에 감사해야 되나. 아니, 갑자기 30초나 조용해지면 이상하게 생각하실지도… 도배에 대해서 설명드렸던 적이 있었나? 자의가 아닌 타의로 채팅이 막혀버린 원우는 레서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마른침을 삼키며 조용히 시간이 지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찰나, 도배가 풀리기 전에 레서의 채팅이 먼저 올라왔다.
[파티] 레서 : 음
이내 짧은 정적. 원우는 반사적으로 손을 움직여 ‘네‘ 한 글자를 보냈으나 돌아오는 것은 채팅 제한 해제까지 남은 시간 : 17초였다. 16, 15, 14…. 얼마 지나지 않아 레서는 꼭, 할 말을 고르는 것처럼 천천히 채팅을 보내기 시작했다.
[파티] 레서 : 일단… 감사합니다. 솔직히.
[파티] 레서 : 기뻐요. 뭐랄까…
[파티] 레서 : 그……… 이런 말 되게 오랜만에 듣는 것 같은데… 라는 기분이기도 하구.
[파티] 레서 : 현실에서도 듣기 힘든 말인데 게임에서 들으니까… 아 그렇다고 별로라는 건 아닙니다!!
[파티] 레서 : 되게… 진짜… 아니 기쁘다는 말밖에 안 나오네요. ㅎㅎ…
[파티] 레서 : 사실 무엇보다도 이렇게 많이 얘기하신 거 처음이지 않나 싶고… ㅋㅋㅋ
뒤늦게 뒷목이 뜨끈해진 기분이었지만 애써 참았다. 난 어른이다. 사회생활을 하는 어른이다. 전원우가 홀로 부끄러움을 삭히는 사이 레서의 다소 진중함을 띤 채팅은 느릿하게 이어 올라왔다. 아무튼 감사합니다. 저도 2주밖에 안 됐는데 이런 말 하는 것도 웃기지만 길드원 분들 덕분에 게임 재미있게 하고 있어요. 데려와 주셔서 감사해요. 훈훈한 분위기에 괜히 가슴팍 어드메가 간지러운 기분이라 헛기침을 한 원우는 느릿하게 손을 움직였다. 시간이 벌써 10분이나 지났던 탓이다.
[파티] 전원 : 넵. 아무튼 하고 싶은 얘기는 그게 다입니다.
[파티] 전원 : 일단… 오늘은 늦었으니까 빨리 일일 퀘스트만 하고 끌까요. 강화재료 보상만 받고 주무시러 가시죠.
[파티] 레서 : 저 가기 전에
[파티] 레서 : 뭐 하나만 여쭤봐도 될까요??
[파티] 전원 : 넵. 편하게 말씀하세요.
[파티] 레서 : 그
[파티] 레서 : 아까 다들… 길드원 분들이 절… 좋아한다고 하셨잖아요
[파티] 레서 : 전원 님도
아, 전원우는 자신도 모르게 또다시 숨을 참았다. 그의 질문을 한 박자 빠르게 지레짐작했던 탓이었다.
[파티] 레서 : 저 좋아하세요?
그리고… 불행하게도 그것은 어느 날의 전원우가 겪은 불행의 시작과 엇비슷해서,
원우는 잠시 드밀어진 과거의 편린에 눈을 감았다가 뜨고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다소 딱딱한 답장을 보냈다.
[파티] 전원 : 네.
[파티] 전원 : 그리고 이 대화 직전의 얘기로 돌아가자면 상사가 조금 괴롭혀서요…. 그래도 이제부턴 덜 바쁠 겁니다.
[파티] 전원 : 던전 들어가겠습니다. 공뻥물약 끼고 계시면 빼세요.
긍정하는 대답인 것치고 아까까지의 훈훈함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다소 급하게 끝난 채팅이었으나 레서는 순순히 던전 입장 준비창에 확인을 눌렀다. 둘은 일반 던전에 들어선 이후로도 별다른 채팅 없이 묵묵히 5판을 내리 돌았고, 원우는 먼저 들어가보겠습니다. 라 먼저 말했고 레서는 얌전히 넵 수고하셨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다만 그게 전부일 뻔했던 것에, 원우는 잠시 고민하다 채팅 하나를 덧붙였다.
[파티] 전원 : 아까는 죄송합니다. 조금 피곤해서 서둘렀어요.
[파티] 전원 : 좋아하는 거 맞아요. 억지로 대답한 건 아닙니다.
[파티] 전원 : 안녕히 주무세요.
미련 없이 길드 채팅에도 인삿말을 남기곤 컴을 껐다. 그래도 많이 컸네, 전원우. 도망치지도 않고…. 변명도 하고. 느릿하게 한숨을 푹 내쉰 원우가 시계를 확인했다. 12시를 막 넘은 것을 확인하고 꺼진 모니터 화면을 멍하니 들여다보고 있자니 머릿속에 하나씩 떠오르는 것들은 먼 과거보다는 당장 오늘의 자신에게 떠넘긴 회사 일들이었다. 다시 게임을 키고 싶은 충동을 누르며 출근을 위해 비척비척 침구로 가 드러눕자마자 뒤늦게 피로가 몰려오는 탓에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상처받으시진 않았겠지. 편하게 말해도 된다고 해 놓고, 눈치 볼만한 상황을 곧바로 만든 기분이라 좀 죄송했다.
그러나 제아무리 죄책감이 강하더래도 온종일 혹사당한 정신의 피로보단 덜했기에 눈을 감는다. 5시간 뒤 기상이니까 이젠 정말 자야만 한다. 새삼스럽게 자신의 출근이 1시간이나 걸린다는 사실을 저주하면서… 원우는 천천히 수마에 몸을 맡겼다.
* * *
“아… 가셨네.”
나지막한 탄식 비슷한 혼잣말이 튀어나온다. 방송을 하면서 생긴 입버릇은, 근 몇 달간 카메라의 ㅋ조차 만나지 못 해 쓸데없는 버릇이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그 사실은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혀와서, 이제는 익숙해지기까지 한 우울감이 어깨를 짓누르는 것을 애써 털어내며 모니터 화면에 집중했다. 갑작스러운 전원의 인사에 잠시 조용해졌던 길드 채팅이 느릿하게 올라오고 있었다.
[길드] 체리 : 엥? 나 말할 거 있었는데 벌써 갔네….
[길드] I : 바쁜가보지 요새 야근 많이 하니까
[길드] 냥냥냐냥냐 : ㅠㅠ
[길드] 레오 : 나도 저번에 빌려준 템 오늘 갚으려고 했는데 ㅠㅠ
[길드] 룡 : 우편 쏘면 되는거 아녀?
[길드] 레오 : ㄴㄴ 골드포함이라 거래로 주는게 수수료 덜떼임
[길드] 아지 : ㅇ대박 솔이 지금 되게 고인물같애
[길드] 레오 : 훗
[길드] 레오 : V
[길드] I : 강화 떨군거 복구하기 전까지 뉴비임ㅇㅇ
[길드] 룡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레오 : ㅠㅠ
[길드] 레오 : 중찬 너무 크게 웃음;;
[길드] 코코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도] 레오 : 형도 너무 큼;
솔이…. 중찬? 이름과 전혀 무관해보이는 애칭을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다들 친한 사이인 거겠지. 어쩌면 엄청 오래 봤을 수도. 나만 들어온지 이제 겨우 몇 주 된 사람이니까…. 다시금 활발해지기 시작한 채팅을 멍하니 바라보다 자신도 모르게 아까의 일을 회상했다. 네, 좋아하는 거 맞아요…. 좋아하는 게 맞다고 하면서 왜 그렇게 억지로 대답하는 것처럼 느껴졌지. 그새 찌뿌둥해진 허리를 쭈우욱, 피자 의자가 밀리며 끼익거리는 소리를 냈다. 무슨 일이 있었나? 근데 겨우 게임 같이 몇 주 한 사람한테 트라우마? 비슷한 걸 스스로 자극하면서까지 좋은 말을 할 필요가 있나…. 이상한 사람이야. 좋은데… 이상한 사람. 이리저리 옮겨가던 시선은 파티가 해제되어 길드 아지트 입구에서 혼자 남겨진 자신의 캐릭터에게로 향했다. 새하얗고 성스러워 보이는 동그란 캐릭터. 자신과 닮은 듯 만 듯 생겨서 만들었었는데….
띠링.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다 울린 메신저 알림에 한박자 늦게 시선을 돌렸다. 승관아 아직도 마음 못 정했니 회사도 너 봐주는 거에 한계가… 옆에 제멋대로 놓여져 있던 스마트폰에 뜬 창을 자신도 모르게 읽어버림과 동시에, 손을 뻗어 그걸 뒤집어 놓는다. 이렇게 가벼운 행동만으로도 현실에서 도망칠 수 있다니.
…그러나 언제까지고 도망칠 수 없음을 안다. 승관은 다시금 멍하니 화면을 들여다보고는, 키보드 위로 손을 움직여 자신 또한 가 보겠다는 길드 채팅을 보냈다. 모두가 대화를 끊고 자신에게 잘 자라는 인사를 전하는 것을 보다가 데스크탑을 강종해 버린다. 또다시 생각이 복잡해진 탓에 괜히 부리는 심술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다 무거운 몸에 반사적으로 아랫배를 문지르며 살이 쪘나 생각해본다. …이제는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곤 웃는다. 아, 몰라…. 일단 자고 생각해야지. 익숙한 침구에 몸을 파묻는다. 머지않아 익숙한 밤이 찾아왔으나 승관은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래서 전원이라는 사람은 대체 뭐 하는 사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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