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아는가 이 마음

prologue

week0 / 칸

후덥지근한 대낮의 호텔방. 덜컥이는 미닫이 문. 문 너머에서 나는 소음에는 남자들의 고통스러운 신음이 뒤따른다. 쿵쾅대는 심장 소리가 제 귀에까지 들리고, 두려움과 긴장감은 지도를 말아 쥔 춘자의 손을 축축하게 적신다. 땀에 젖은 손으로 들고있다가는 지도마저 축축해질까봐, 그렇다면 문 너머에서 자발적으로 명을 단축하는 이 지도의 주인을 볼 낯이 없어질까봐. 고작 며칠 새에 눈에 익은 침실의 풍경이 춘자의 눈에 들어온다. 춘자는 지도를 침대 위에 내려놓는다. 지도 옆에는 남자의 트렁크가 놓여있다. 불과 며칠 전 춘자가 물에서 건져다 준, 권 상사가 조춘자를 제 식구로 받아들였음을 방증한 바로 그 트렁크가.

춘자는 생각한다. 무엇이 나를 이곳으로 데리고 왔을까. 몇 분 전 이 곳으로 자신을 밀어넣고 여유 있게 웃어주던 남자가 떠오른다. 그 표정을 상기하니 춘자는 제가 점차, 아주 느리게 안정을 찾아가는 것만 같다고 느낀다.

권 상사니까, 권 상사라면 괜찮겠지, 라 되뇌이며 조춘자는 권 상사를 기다린다.

중문이 우지끈 소리를 내며 넘어온다. 건장한 사내 둘이 넘어진 문과 함께 침실을 침범한다. 그 뒤로 우르르 몰려오는 낯선 남자들은 분명 장도리의 패거리들일테다. 춘자는 비명을 지르며 온갖 물건을 잡히는대로 마구 던진다. 바닥에 넘어진 사내 중 하나였던 권 상사는 그런 춘자의 손목을 붙잡고 어깨를 감싼 채 욕실로 향한다. 춘자는 뒤를 돌아보며 그에게 속절 없이 끌려간다. 욕실에는 타일 시공이 되어있어, 카펫이 깔려있던 침실과는 사뭇 다른 구둣소리를 낸다. 권 상사는 들어가지 않는다. 춘자를 안에 밀어넣은 권 상사는 문을 닫는다. 둘의 시선은 문이 완전히 닫힐 때까지 서로의 얼굴만을 바라본다.

아까보다 더 좁은 공간에서, 춘자는 권 상사를 기다린다.

춘자는 생각한다. 권 상사는 어쩌면 괜찮을거야. 쟤네야 이 시골 바닥에서나 알아주는 깡패들이지, 권 상사는 전국에서 알아주는 놈이잖아. 그래, 어딘지도 모르겠는 월남 어느 곳에서는 둘이서 백 명 남짓을 해치웠다며. 한 쪽 팔이 부러진 상태에서도 이긴 전투가 스무 개라며. 밖에는 애꾸도 있으니 둘이서 이 정도는 껌이겠지. 그러니까 둘이서만 온거랬잖아. 맞아, 괜찮을거야. 권 상사니까, 권 상사라면.

문 밖이 어느새 조용해진다. 욕조에 걸터앉은 춘자는 권 상사가 문을 열기만을 기다린다.

문이 열린다. 권 상사다.

춘자를 향하는 권 상사의 눈빛은 지쳐있으나 동시에 형형하다. 그의 왼쪽 가슴에 꽂힌 칼날의 칼자루마저 춘자만을 향한다. 춘자는 제 신세를 자조할 틈도 없이 차가운 타일 바닥에 쓰러진 권 상사를 내려다본다. 타일에 피가 번지는 모습이 선명하다. 춘자는 마음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만 같다고 생각한다. 그 구멍으로 숨이 들어갔다 나오는 감각이 생생하다.

“조춘자, 이 씨발년…”

“잠깐, 잠깐만!”

이제부턴 생존 본능의 싸움이다. 춘자는 저가 무슨 말을 하는 지도 모른 채 어찌저찌 목숨을 부지한 채로 욕실로부터 끌려나온다. 폭신한 카펫의 감각이 다시금 춘자의 구둣바닥을 타고 전해진다. 차갑고 딱딱한 타일 위에 누운 권 상사는 경련하며 울컥울컥 피를 토한다.

춘자는 권 상사를 바라본다. 춘자는 처음이자 아마 마지막이 될, 내 편, 내 식구라 부를 만한 이의 숨이 멎어가는 순간을 눈에 담고자 한다. 그것이 설령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욕실의 풍경일지라도.

초점이 흐려진다. 대낮의 호텔임에도 주변이 까맣게 물든다.

권 사장님, 나는 이제 어디로 가는 걸까?

*

시야가 다시 밝아진다. 춘자가 서울에서 지내던 여관방의 익숙한 천장이 눈에 들어온다. 굳은 채로 눈만 굴려 주위를 살핀 춘자가 벌떡 일어난다.

“뭐야…”

꿈인가? 생신가? 얇은 싸구려 여관방 이불부터 매번 잠옷으로 입던 헐렁한 티셔츠까지.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매일 맞이하던 아침과 같다. 바닥에 손을 짚으며 뒤로 물러난 춘자의 등에 탁자가 걸린다. 뒤를 돌아보니 필시 어젯밤 마시다 만 것이 분명한 보리차 한 잔과 펼쳐져있는 춘자의 노트가 눈에 들어온다. 노트는 분명 춘자의 것인데 무언가 기시감이 느껴진다. 양쪽 페이지가 다 적혀있어야 할 것이 한쪽 면 밖에 채워져있지 않다. 마지막 메모는 ‘07.22 대동 라듸오, 방보석’이다. 뒤로 넘겨 7월 달력을 펼친다. 23일의 ‘15:30 로라 양장점’이 마지막 일정이다. 라디오에선 오늘이 토요일, 7월 23일이라며 억지로 끼워맞춘 노래를 틀어준다.

춘자는 문득 기억을 되새김질 한다. 그리고 저가 군천에 간 적이 없음을 깨닫는다.

*

오후 3시, 익숙한 가발을 쓰고 화장을 진하게 한 춘자는 전날 밤에 다 정리해둔 트렁크를 들고 양장점으로 향한다. 무더운 날씨에도 굴하지 않고 찰랑거리는 소재의 긴팔 긴바지 투피스를 챙겨입었다. 지나가는 남자들의 시선이 모두 춘자에게 꽂힌다. 이를 아는듯 모르는듯 춘자는 또각거리는 구둣소리를 내며 도로를 가로질러 양장점의 문으로 향한다. 다 도착하기도 전에 나온 직원이 문을 열어준다.

“왜 이렇게 늦게 오셨어!”

별 말 없이 양장점에 따라들어간 춘자는 이미 정리된 대본대로 사장과 입을 맞춘다. 사모님들은 눈이 돌아가 물건을 뒤적거린다. 사장과 윙크를 주고 받은 춘자는 얼굴에 만연한 웃음을 숨기지 못했는데, 이는 허겁지겁 돌아온 직원이 말을 내뱉자마자 사라졌다.

“단속ー!!!”

춘자의 생각이 뒤엉킨다. 엉망진창이 된 머릿속을 억지로 정리하며 옷들을 주워담는다. 이내 양장점의 조명이 모두 꺼지고, 둔탁한 소리와 함께 춘자의 얼굴을 무언가가 덮는다.

*

춘자는 어딘가로 옮겨지는 중에도 생각을 멈추지 않는다. 이미 일어났던 일들이 모두 다시 일어나고 있다. 그동안의 기억은 선명하지만, 그것은 아직 이곳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분명히, 이 곰팡이 냄새가 나는 장소는 명동의 창고일 것이고, 요 잔챙이 놈들은 금방 물러갈 것이며, 그렇다면 분명히 이곳에서 나를 찾아올 사람은…

“나 누군지 알지.”

춘자의 루즈 자국이 남은 담배를 입에 문 남자의 볼이 움푹 들어간다. 춘자는 멍한 표정으로 남자를 올려다보다가, 이내 눈꼬리를 휘며 웃는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모르겠어, 라는 말을 꾹 삼킨 채.

“저어기 시골 마을 하룻강아지 깡패 놈들도 권 상사, 권 사장님은 알죠.”

춘자는 이것을 기회라 생각한다. 군천으로의 귀환을 성공적으로 만들 기회, 군천에서의 밀수를 보다 더 견고히 할 기회,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야~ 그런 동네가 다 있었어?”

“군천.”

“군천?”

“제가 군천 앞바다에서, 물건 건지던 해녀였거든요.”

당신을 살릴 수 있는 기회, 일 것이라고.


week0 <Prologue>

칸 (@KN_gPt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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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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