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기적이 우네
week1 / omg
머무는 곳 그 어딜지 몰라도 -
예전의 기억과 똑같이 향수를 공중에 두 번 칙칙 뿌리고, 반바퀴 스텝을 밟고, 권상사가 있을 506호의 문을 두드렸다. 이제는 이 모든게 절대 꿈은 아니란 걸 받아들였다. 꿈이라기엔 꼬집힌 볼이 너무 아팠고, 상처난 제 이마에서는 검붉은 피가 소름끼치도록 생생히 흘렀다. 전생이든 뭐든 일단은 3억도 벌고, 이미 저를 한 번 살린 권 사장을 이번엔 꼭 저가 지켜줄 것이라.
창고에서의 일이 있고 난 뒤, 통화를 제하면 며칠 만에 다시 만나는 자리였다. 실은 저번서부터 조금 심장이 쫄렸다. 베트남에서 말은 못 알아들어도 거짓말 하는 건 귀신같이 잡아냈다는 그 권 상사가, 이미 일어날 일을 모두 꿰고 있는 저에게서 이상한 낌새를 느끼면 어쩌지 하고 말이다. 의심 많은 그 남자는 아직 저에게 신뢰를 주고 있지 않을 것이다. 밉보이면 안된다. 한숨을 푹 쉰 그녀는 권 사장이 좋아했던 향수 내음새를 풍기며 방안으로 들어갔다.
"춘자 씨, 우리가 이렇게 다이다이 마주 앉아 있지만 이 관계가 아니라 이- 관계란 거. 알지?"
"알죠~ 그래두 요거-는 퍼지구 요거는 깊잖아. 깊은 관계, 뭐 꼭 우리가 살을 섞어야만 깊은 관계가 되고 그런 건 아니잖아요?"
그래. 춘자의 기억대로 그날 밤 두 남녀는 정해진 수순이라는 듯 서로의 깊은 관계를 확인했다. 체력도 어찌나 좋은지, 오랜만에 잡생각이 들지 않던 몇 시간이었다. 그러면서도 땀에 젖어 풀린 머리칼이 제 위에서 흔들리는 걸 보고 있노라면, 기분이 좋아 조금 몰아쉬는 숨을 몇 센티 앞에서 여실히 듣고 있자면 ... 세팅이 다 풀린 머리로, 헉헉 대며 가슴팍에 시퍼런 칼을 꽂고는, 마지막까지 저와 눈을 마주하려 했던 그가 자꾸만 떠올라서. 눈을 감았다. 안구에 스멀스멀 물기가 차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주책맞게 왜 이래 조춘자. 남자는 눈을 뜨라며 제 볼을 만졌다. 내 마음도 모르고. 종용이 거세지자 어쩔 수 없이 눈을 뜨곤, 촉촉해진 제 눈동자를 보이지 않기 위해 입을 맞추려 매달렸다.
새벽까지 이어진 행위에, 지칠대로 지쳤지만 잠이 오지는 않았다. 아마 그건 제 옆에서 정자세로 누워 잠에 든 저 남자 때문일 것이다. 옆으로 몸을 돌려선 그 잘난 얼굴을 유심히 관찰했다. 삼각형의 오똑한 코에, 남자답지 않게 예쁜 속눈썹, 크고 긴 눈, 정말 이국적으로 생겼단 말이야. 그 이방인 같은 얼굴을 바라보는데 가슴이 점점 저릿해 왔다. 이토록 애틋한 감정이 드는 것은, 그래도 그가 한동안 저의 동료였던 사람이라서, 은혜를 갚아야 할 고마운 사람이라서, 뭐 그런 이유들 때문일 것이다. 조춘자가 언제부터 이렇게 정 많은 여자였나. 모르겠다. 그럼 권 사장님은 뭐 얼마나 애틋하길래, 목숨까지 걸며 날 지켰을까. 원래 한 번 제 식구로 들이면은 이렇게까지 하는 사람인가? 똑똑한 사람이 그럴리가. 그때 왜 그랬냐고, 아무것도 모르는 이 남자에게 묻고 싶었다.
***
배 위에서의 일을 떠올리며 양주 한 병을 깠다. 하는 짓이 귀여워 맞춰주기는 했는데, 이 여우같은 여편네가 말이지. 아직도 손등이 간지럽네. 애꾸에게서 받은 조춘자 사진 몇 장을 유심히 들여다 보았다. 세관에 신고해 포상금을 타먹고는 잠적했다는 소문이라...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갑자기 호텔방 문에서 똑똑-하고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 시간에 청소부도 아닐 것이고, 분명 그 여자일 것이다. 한참 마시고 있던 온더락 잔을 탁상에 내려놓고 문을 열어 주었다. 웬걸, 술에 취해 떡이 된 조춘자가 몸도 잘 가누지 못하며 방 안으로 들이닥쳤다. 어우 술냄새.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간 얼굴에는 엉망으로 번진 화장과 눈물 자국도 보인 듯 했다. 훌쩍대는 여자의 팔뚝을 잡고 돌려 세웠더니 제법 귀여운 듯한 눈망울로 쳐다보며 저에게 안겨왔다. 주사가 심하네 이 여자가. 이젠 아주 성희롱 하듯 제 가슴팍을 만져대다 고개를 파묻기까지... 난데 없는 상황에 어이가 좀 없다만, 잠자코 가만히 있어주기로.
"춘자 씨, 이젠 좀 진정이 됐나?"
기다리다 기다리다 한 마디 던지자, 대뜸 검은색 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풀러댔다. 물론 술에 취해 잘 푸르지는 못했다만. 별로 꽐라가 된 여자를 벗겨 먹고 싶진 않아 워워- 하며 말려대도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렇지만 아무 생각 안 하고 싶다고, 머릿속 좀 씻어버리고 싶다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만- 다 꼬인 혀로 한 번만 하자고 제 벨트를 열심히 풀어 바지춤에 손을 넣어오는 여자를 굳이 마다할 이유는 없겠지. 군천이라는 시골 바닥에 내려와 지내면서, 무엇보다 재밌는 것이 이 응큼하고 재밌는 여잘 지켜보는 행위였다. 이상하게 무슨 짓을 하든지 딱히 거슬리지 않는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생긴 것도 제 스타일이고.
그런데 좀 걸리는 건, 침대에만 가면 유독 전애인에게 미련 남은 여자의 얼굴을 하고서는 저를 바라본다는 것이다. 가끔씩 대화할 때도 그런 얼굴이 비치기는 한다만. 이딴 걸 따져 묻긴 그렇고. 설마 날 누군지도 모를 어떤 새끼라고 상상이나 하면서 딸감 정도로 쓰고 그런 건 아니지 춘자씨? 내가 추잡하게 우리 춘자씨 의심해서 뭐해. 근데 사실이면, 진짜 혼날 줄 알아 춘자씨.
***
잠에서 깼다. 아이씨... 넓찍-한 고급 호텔방, 욕실에서 들리는 명쾌한 샤워 소리, 알몸 위에 덮여있는 뜨뜻하고 푹신한 침구, 그놈의 506호였다.
머리가 쨍-하니 아프다. 속도 안 좋고. 어제 진숙이가 목에 칼을 들이밀고, 헛헛해 찾아간 포장마차에서 무리를 했나보다. 다시 돌아온 뒤부터 칼만 보면 몸이 굳고 어지러웠는데 아무리 그 상대가 진숙이라도 어쩔 수 없는지, 손이 사시나무처럼 파르르-하고 떨렸다. 애써 티는 내지 않았지만. 그리고... 저에겐 3억을 버는 것 만큼 진숙이와의 관계 회복도 중요했는데. 그러려면 억척이가 상어한테 물려야 했고, 진숙이가 저에게 스스로 찾아와야 했다. 억척이가 상어에 물릴 것을 아는데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저가 짜증이 났다. 비겁했다. 권 사장님 때문에 가뜩이나 머리가 어지러운데 미칠 노릇이었었다.
아무리 전날 밤 저가 그에게 무슨 말을 뱉었는지 기억해내 보려고 해도 떠오르는 게 없다. 설마 말실수라도 한 건 아니겠지? 저가 아는 권 상사는 절대 이런 말같지도 않은 소릴 믿어줄 리가 없다. 당신이 날 지키다 칼에 맞고 죽은 기억을 안고서, 다시 당신을 만났다고 말하면. 분명 미친년이라고 생각하겠지.
그것보다도, 이런 상황은 전에는 일어나지 않았었는데. 혹 미래가 변하면 어떡하나. 일단은 권 사장님이랑 마주치기 전에 얼른 나가 버리자. 다방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진숙이가 연락을 해오고, 밤쯤에 거래를 하러 찾아올 테니까.
***
모든 걸 알고 있는 춘자에게 그들의 첫 밀수는 누워서 떡 먹기 수준이었다. 말그대로 야무지게 일을 해냈다. 아직까지는 애로 사항이 전혀 없었다. 전부 기억과 똑같이 흘러가고 있었다.
"이야- 춘자 씨가 내 생각보다 훨씬 야무지네. 다음번에 이런 상황 있을 때도 수고 좀 해줘."
"권 사장님, 나..."
"춘자 씨도 이젠, 우리 식구니까-"
이 멘트가 아닌데. 당황했지만 티내지 않으려 표정을 꾸역꾸역 숨겼다. 눈웃음을 지으며 아양을 떨었다. 참나... 설마 하룻밤 더 지냈다고 벌써부터 식구 운운하는 거야? 권 사장님 보기보다 되게 가벼운 남자였구나?
다방에 들러 다홍빛 옷으로 갈아입고, 가발도 쓰고, 립스틱을 바른 뒤 군천관광호텔 나이트로 향했다. 예상대로 고마담이 저도 따라가고 싶다는 말을 던지길래 그러라고 했다.
"그나저나, 권 상사 그 놈이 혹 언니 맘에 들어하는 거 아니요? 내가 보기엔 딱- 고렇고만 뭘."
이미 들었던 물음이다. 전엔 뭐라고 답했더라. 설마 그렇겠냐며, 내 목에 칼까지 들이밀었던 남잔데 웃기고 있다며 답했었나. 그런데 이번엔 쉽게 답하기가 힘들었다. 그래, 사실 애써 모르는 척 했다. 물론 그 남자가 대놓고 속마음을 드러낸 적은 없었지만, 이따금씩 그의 애정이 느껴지긴 했다. 그치만 그건 그냥 식구로서- 인 줄 알았지, 여자로서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호텔 조식을 급히 먹다 입가에 소스를 묻히면 피식 웃으며 냅킨을 뽑아 건네준다거나, 몇 번의 정사가 끝난 후에는 꼭 낯간지러운 입맞춤을 해대는 것은 그저 그가 매너있는 남자이기 때문이라. 그런데 이제는 말이 다르지 않나, 자기 식구 지키려고 목숨까지 거는 놈이 어딨나. 생각할수록 자꾸만 더 복잡해졌다.
"어엉, 춘자 씨. 왔어?"
또, 또 저 보고 싶었다는 얼굴. 제 옆의 의자를 툭툭 친다.
아직 진숙이와 장도리는 오지 않았다. 춘자가 경련이 일어날 만큼 웃음을 지으며 보란 듯이 그 의자에 가 앉으니, 그가 얼굴만한 손으로 한 쪽 볼을 쓸어 내린다. 이에 턱을 내밀어 애교로 응해주니 응당 남자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
진숙이 세 잔의 양주를 졸졸 따라댄다. 그러고선 한 잔씩 들이키더니-
"이건 우리 아버지 거. 이건 우리 진구 거. 이건 다들 좋다고 깝쭉대는 꼴 앞에서 병신같이 앉아있는 내 거."
"아헤이 누님, 누님! 거 참- 거 자기밖에 몰러 어떻게~ 아니 신경 쓰지 마시구.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께. 우리끼리 한 잔 합시다. 아이 저 누나가 원래 사람들 하고 그렇게 잘 못 어울려~"
진숙이의 저 표정을 다시 보는 건 정말이지 고역이었다. 그런데 정말 고역은 따로 있었다. 장도리였다. 저 뻔뻔하고 염치없는 얼굴. 아부지랑 진구로도 모자라 권 사장까지 그렇게 만든 개새끼. 여태까지 잘 참아 왔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정말 못 참겠다.
쌍욕이 튀어나오려 하는데, 대뜸 권 사장이 제 허벅지에 손을 올렸다. 허벅지를 주물대는 손을 보다그와 눈을 마주하니, 연초를 물고 있는 입꼬리를 올려 미소 짓는다. 아차 싶었다. 제 얼굴이 읽혔나보다.
"거 장 사장님은 군대 다녀오셨나? 이 전쟁통에 제일 무서운 게- 이 총부리 까꾸로 드는거야."
"다리 푸셔, 주머니에서 손도 빼시고."
"자, 이다음 판 더 키울 거니까 밑에 애들 촌스럽게 돈이나 펑펑 쓰고 다니다가 꼬리 밟히지 않게- 단속이나 잘하고 계셔. 그 괜한 주접 떨지 마시고."
***
"권 사장님, 지금 나 의심하는 거야?"
"내가 춘자 씨 의심해서 뭐해- 대신에 계획을 좀 바꿀 거니까, 춘자 씨는 나 속상하게 하지 말고 해녀들 잘 챙겨서 따라오기만 하라고."
"그럼... 장도리는?"
"걔는 다음 작업 전에 죽어."
권 사장이 욕실로 들어갈 때까지 마치 처음 그 사실을 알게 된 냥, 놀란 척을 하려 애썼다. 다행히도 저가 연기를 좀 잘했는지 그때와 같은 반응이었다. 곧 가운을 걸치고 나와선, 답지 않게 뭘 그렇게 굳어 있냐며 콧망울을 툭 쳤고. 나중에는 제 귀를 잘근잘근 씹어대면서, 귓가에 대고는 자길 속상하게 하지 말라는 말을 여러번이고 또 뱉었다.
군인같은 정자세가 아니라, 팔뚝을 저에게 베개로 내어준 채 자고 있는 그를 보다 한숨을 푹 내쉰다. 정말이지 벌써, 필삼이 죽었던 날이 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그를 보는 것이다. 계획은 이제 거의 다 세워졌다. 꼭 당신이 살길 바란다. 이건 진심이야.
저번에 진숙이에게 가려고 새벽같이 호텔방을 나섰을 땐 그가 잠에서 깼던 걸 떠올리며, 더 조심조심 숨을 죽이고 품을 벗어나는 차였다. 왼쪽 손목이 한순간에 붙잡혔다. 헉. 소리가 절로 나왔다. 어딜 가려고. 그게... 좀 볼 일이 있어서. 이 시간에? 진숙이한테 가려구.
"자고 가지. 응?"
"아야, 사장님. 아파 손목..."
금세 빨개진 손목이 해방되고, 침대에 걸터앉아 브래지어를 차는데 남자가 뒤에서 후크를 잠궈준다. 어깨 위에 턱을 올리곤 내뱉는 말이 우습다. 아무래도 밤이 늦어 자기가 같이 가줘야 겠단다. 권 사장님, 내가 그렇게 못 미더우신가? 내가 춘자 씨 의심해서 뭐하냐니깐-
***
옥분이네 다방으로 가 화장을 지우고, 가발을 벗고, 수첩을 폈다. 그리곤 별로 푹신하지도 않은 의자에서 자세를 눕다시피 하며 눈을 꼭 감았다. 곱씹고 곱씹었다.
실패한다면, 권 사장을 지키지 못한다면, 그 남자는 내일, 피범벅이 되어선 또다시 제 눈 앞에서 죽어갈 것이다. 옥분이와 진숙이에게는 원래의 계획을 일러 놓았다. 혹시 모를 변수가 생길까 두려워, 장도리가 들이 닥치기 몇 시간 전에 모든 걸 바꿔버릴 거니까. 아침 일찍 506호에 찾아가, 장도리 패거리가 시골 깡패놈들이랑 들이닥칠 것을 권 사장님한테 먼저 일러줄 것이다. 밀수꾼들이 짭새를 부르기도 뭣하고, 어차피 서울하고 부산에서 식구들이 내려올 거라고도 했지. 그래. 피신해 있자. 그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쉽게 끝날 문제다. 모르고 당하는 것과 알고 치는 건 천지 차이니까. 이래 봬도 천하의 권 상사이지 않은가.
***
아침 일곱시부터 그 맹랑한 여자가 문을 두드렸다. 왜 이리 빨리 왔냐며 문을 열어주었더니, 왜인지 귀엽게 비장한 얼굴을 하고는 들어선 춘자가 급한 일이라며 제법 진지한 목소리로 운을 뗐다.
"장도리가 지역깡패 새끼들이랑 여기로 3시쯤에 쳐들어 올거야. 권 사장님 치려고. 우리 여기 있으면 안 돼. 빨리 나가자. 사장님 식구들 내려올 때까지 피해 있자. 응?"
"몇 마리나."
"사장님, 나가자구. 얼른 가야 된다니까- 얼른!"
"진정하고, 대답해요."
"이러지 말구. 빨리, 응? 제발."
춘자의 목소리가 떨렸다. 얼마나 불안해 하는지 그 통통한 입술을 이로 지그시 깨물면서. 분명 오기 전까지는 무슨 말을 할지 침착하게 다 생각했었는데. 죽을 지도 모르는 그 남자와 문 앞에서 마주하니 차분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얼른 나가자는 제 말은 들어주지도 않고. 마음이 급했다.
"춘자 씨, 어어. 괜찮아. 괜찮아요. 나 봐."
여자의 눈가와 코끝이 딸기마냥 벌겋게 물들었다. 그 사슴같이 투명한 눈망울에서는 금방이라도 물방울이 떨어져 나올 듯 했다. 창백한 손을 잡아 오니 떨림이 느껴졌고. 엄지로 천천히 매만져주니 호흡이 점점 돌아오는 듯 했다.
"몇 마리나 오는지, 알아?"
"열일곱 정도..."
대답을 들은 필삼이 여자를 들어 안아 침대에 앉혔다. 춘자 씨, 잠깐만 여기 있자. 애꾸랑 얘기하고 올 테니까. 알았지. 남자가 말로 애써 안심을 시키고 가려는데 찬기가 도는 조그만 손가락으로 옷자락을 잡아온다. 여기서 둘이 장도리 개새끼 상대하면 안 돼. 그럼 사장님 죽어. 이번만 내 말 들어 필삼 씨.
"춘자 씨한테 내가 그 쥐새끼한테 큰 일 당할 위인으로 보였다니 속상하네. 그래요. 말 들을게."
캐러멜 빛 가발 위로 입을 맞추더니 필삼이 방을 나간다. 곧이어 옆방으로 들어가 애꾸와 계획을 짠다. 부산에 연락을 했다. 일정을 앞당길 거라고. 그쪽 식구들은 연장 준비하고 풀악셀로 밟으면 2시 좀 지나서 군천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다들 서울에 올라가 있어 당장은 부산에서 여섯 명뿐이 못 오지만, 그 촌놈 새끼들 상대하기엔 충분하겠고. 놈들이 흩어지기 전에 모여있을 때, 한꺼번에 처리해야 한다. 안 그럼 피곤해지니까. 저가 호텔에 계속 있으면 그 여자가 졸도라도 해버릴 것 같으니 일단은 터미널 쪽 모텔에서 잠시 기다리다, 애들 올라오면 장 사장 사무실이라는 맹룡해운을 먼저 치자.
춘자 씨, 이따 식구 둘 붙여줄 테니까 엄진숙 씨 집에 가 있어. 끝나면 데리러 갈게. 싫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자기가 지켜볼 거란다. 이제는 좀 불안이 떨쳐졌는지 다시 그 톡톡 튀는 가짜 목소리가 돌아왔다. 도대체 저 조그만 머리통엔 뭐가 들었나.
"어허, 왜 이렇게 고집일까. 응?"
"봉고차 한 대 끌고 갈거지? 나도 거기 탈래. 차 밖으로 한 발자국도 안 나가고 착하게 거기에만 잘 숨어 있을게. 그렇게 해줘. 해주라 필삼 씨이-"
아- 이 여잔 정말 못 당해내겠다. 이대로면 실랑이가 끝나지 않을 것 같아 결국 오케이 했다. 어차피 별 문제 없을 테니. 지킬 게 있으면 이렇게 귀찮아진단 걸 이제야 알았네 내가.
***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서울 식구들이 내려올 때까지 기다렸으면 좋겠는데. 그러면 너무 늦는다고 했다. 아무리 베트남에서 날라다녔다지만, 그래도 열일곱은 쪽수의 두 배인데. 꼴랑 여덟 명밖에 안되면서 둘씩이나 내 옆에 두고 갈 건 뭐냐구 증말. 권 사장님이 남자들이랑 맹룡해운에 들이닥치고 나서 시간이 좀 지났다. 얼마나 흘렀는지는 잘 모르겠다. 일분이 한 시간으로 느껴지는 것 같다. 그저 차 창문 너머로 지켜보니 건물 유리창에는 핏자국이 연신 튀기고 있었고, 물건들이 깨지고 떨어지는 소리가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오른쪽 팔이 미치도록 떨려 왼쪽 팔로 겨우 붙들고 있으면서도, 걱정이 끝도 없이 밀려와 그 광경을 보고 있는 게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그러던 때였다. 저쪽에서 양아치 패거리가 족히 열댓명은 몰려왔다. 아, 이건 시나리오에 없던 건데. 불길했다. 분명 어떤 쥐새끼가 빠져나가 연락을 돌린 것이다. 저와 같이 차에 타고 있던 부하 둘이 급히 사시미를 챙겨 문을 열고 내렸다. 이제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하지. 내가 어떻게 해야 되는 거지. 차창 밖 가까이에서, 부하 둘이 열심히는 칼을 휘두르지만 깡패 열다섯에게 사족도 못 쓰는 게 보였다. 그래. 도망치자. 권 사장님 데리고 여길 떠야 돼. 이미 지칠 대로 지쳤을 텐데. 더 이상은 감당하지 못 할 것이다. 그러다가, 그러다 또 찔리기라도 하면.
반대쪽 문을 열고 내려 겁도 없이 맹룡해운으로 뛰어들어갔다. 다행이었다. 권 사장과 애꾸, 그리고 부하 하나는 피를 뒤집어 쓰고 있었지만 그래도 말짱한 두 다리로 칼을 쥐고 서있었다. 시골깡패 새끼들이랑 장도리 패거리는 어디 하나 병신된 채로 다 맛이 가 쓰려져 있었고.
춘자는 왜 나왔냐며 질책하는 듯한 얼굴의 남자에게 다가갔다. 기분 드럽게 미끈미끈한 피가 바닥에 흥건해 꼭 넘어질 것 같았다. 사장님, 빨리 뜨자 여기.
"권 상사 이 개새끼가, 씨발. 계집애 치마폭에서."
탕.
몸이 남자에 의해 휙 돌려졌다. 저보다 이십 센티는 더 큰 남자가 순식간에 제 몸을 감싸 안은채로 등을 돌렸다. 귀에서 웅웅- 대는 소리와 함께 장도리의 비명이 들렸다. 저 애꾸 새끼가 시이발. 아악! 내가 잘못했으니께. 잠깐만, 잠깐. 이 씨발 진짜!
몸에 무게가 점점 더 실렸다. 힘이 빠져가는 것 같았다. 사장님, 사장님. 어떡해. 사장님 똑바로 서 봐. 제 쪽으로 쓰러지려 하는 필삼의 등에 손을 올려 지탱했다. 부드러운 고급 니트가 미지근하고 미끈한 필삼의 피로 젖어들어가고 있는 게 손바닥에 생생했다. 제 손을 확인하니 지장에 손바닥을 마구 찍은 듯이, 검붉은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생경한 감각이 들었다.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벽 쪽에 거구의 남자를 기대 앉혔다. 비비드 톤의 립스틱만한 쇳덩이가 무자비하게 뚫어버린 곳은 등 뒤로 손을 넣어서 꾹 눌러 지혈했다.
"춘자 씨."
"말하지 마. 피 더 흐르잖아. 병원 가자, 병원."
"어떡하지. 몰랐는데, 쥐새끼한테 큰 일 당할 위인이었네 내가."
남자가 힘겹게 팔을 들어올려 투박한 손길로 그 딸기같이 촉촉해진 눈가를 닦아 낸다. 손을 조금 내려 차가운 볼도 쓸어주기도 하고. 춘자는 저가 울고 있는지도 몰랐다. 속눈썹은 푹 젖어 한 덩이로 뭉쳐지고, 지렁이같은 눈물 자국이 여럿이었는데도.
"지금 농담이 나와?"
왜 이렇게 가슴이 쿡쿡 쑤시는 건지, 너무 힘들다. 버거워. 저번엔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내가 금세 정이 더 쌓였나봐 필삼 씨.
"이제 나 쌔끈해 보이지도 않겠네, 응?"
새까만 눈동자는 분명, 당신 우는 모습이 속상하다고, 마음이 좋지 않다고 말하고 있는데. 입은 애써 미소를 띠고 있는 그 바보같은 얼굴이 너무 속상해서. 물먹은 빨랫감처럼 축 처져 힘이 다 빠진듯해 보이는 남자에게 안겼다.
품에 들어온 춘자를 안아주려 안간힘을 쓴 그의 팔에도 힘이 들어갔다. 괜찮아. 춘자씨, 괜찮아. 착하지. 뚝~
달래주고 싶은데. 이제는 손바닥을 움직여 토닥일 힘도 없었다. 아 정말이지. 험한 꼴 보이는 게 아니었는데, 고집부려도 져주지 말걸.
한참을 그의 어깨에 대고 넘치는 눈물을 쏟아대다 보니, 맞닿은 가슴팍에서 더 이상 심장 박동이 느껴지지 않았다. 거친 숨소리도 없었다. 그때처럼, 두 눈의 초점이 흐려진다. 저 끝 바닥 구석에 버려진 깡통마냥 떨어져 있는 장총이 야속하다. 시야가 온통 까맣게 물든다. 다음에는 제발 저를 지키려 들지 않았으면.
멀리 기적이 우네
나를 두고 멀리 간다네
이젠 잊어야 하네 잊지 못할 사랑이지만
언젠가는 또 만나겠지 헤어졌다 또 만난다네
기적소리 멀어져가네 내 님 실은 마지막 밤차
멀리 기적이 우네 그렇지만 외롭지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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