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아는가 이 마음

겁쟁이

week10 / 니야


조춘자는 미친년에 씨발년, 거짓말을 입에 달고 살며 근본도 모르는 년이었다. 그 누구도 조춘자를 겁쟁이로 보지 않았지만, 춘자 본인은 거울을 볼 때마다 겁쟁이를 보았다. 누군가를 죽일 수는 있지만, 정작 자신의 목숨을 끊을 용기는 없는. 군천에 오고 나서 몇 년간은 자신을 범하려고 했던 그 시발새끼의 악몽에 시달렸는데, 이제는 권필삼의 꿈을 꾼다.

 

 

 

옥색의 욕실타일, 퍼지는 따듯한 선명한 붉은색. 초점을 점차 잃어가는 권필삼. 분명 여름이라 푹푹 찌는 더위 한 중간에 있었는데도 한 겨울에 나체인 채로 눈밭에 있는 것 같았다. 둔한 몸을 이끌고 도망치려 욕실 문을 열어도 다시 그 욕실로 돌아가 권필삼이 문을 열고 쓰러지는 것을 아주 느리게, 그리고 반복해서 본다. 눈을 감으려 해도 반복되는 그 장면에서 도망치지 못한다. 조춘자는 저 권필삼의 가슴에 꽂혀있는 저 칼을 뽑아 제 가슴에 찔러넣고만 싶었다.

 

 

 

비디오를 되감기하듯 장면이 전환되고, 조춘자는 사람을 죽이고 있었다. 장도리였다. 이 돼지새끼를 죽이면 진숙이가 돌아버린다. 화난 진숙이가 문을 쾅쾅거리며 두드리고 제발 그러지 말아달라고 소리를 지르지만 그들에게는 소리가 닿지 않는다. 그들에게 가까이 가려해도 무형의 힘이 조춘자를 끌어 가만히 있게 하고 도망가려해도 그 자리를 계속 반복한다. 진숙이가 본인을 찌르고, 또 권필삼은 송곳도 없이 깡패들과 장도리 패거리네 애들과 맨손으로 싸운다. 명치에 주먹을 꽂기도 하고 목을 꺾어 버리고. 진숙이가 권필삼의 손에 목이 잡힌 모습도 본다. 손을 얼굴에 올려 눈을 가렸지만 잔인하게도 그 장면이 춘자의 손 안에서 눈꺼풀 안에서도 재생되어 결국 그 장면을 볼 수밖에 없었다. 춘자는 결국 권필삼이 진숙이의 손에 죽는 모습을 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진숙이에게 자신의 죄와, 장도리의 죄를 고백한다. 너 지금 큰 실수한 거라고 뭐라 그래도 엄진숙의 반응을 알지는 못한다. 엄진숙, 너 엄청나게 실수한 거야. 알아? 춘자가 킥킥거렸지만 결코 유쾌해서 흘린 웃음은 아니다.

 

 

 

또다시 비디오가 되감긴다. 조춘자는 사람을 또 죽이고 있었다. 첫 번째 살인, 그 새끼였다. 아까전의 죽이고 죽는 것은 또 영화 보여주듯이 보여주더니, 왜 갑자기 또 이건 자신이 직접 죽이고 있는 시점인건지. 자신의 마음대로 바꿀 수 없는 꿈은 강제로 자신이 그 새끼를 죽이는 모양을 보여줬다. 최대한 잊기 위해 자신의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에 박아두고 절대 꺼내지 않기로 마음먹었었는데. 도련님인 그 씹새끼가 본인 몸 위로 올라오고, 춘자는 몸이 딱딱하게 굳어 울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으나 곧 뻗은 손에 유리조각이 잡힌다. 첫 번째 살인이었다.

 

 

 

"허억!"

 

 

 

째깍……. 째깍……. 째깍……. 조춘자는 스프링이 반동을 일으키듯 침대에서 상체를 끌어올렸다. 악몽을 꿀 때마다 자신을 붙잡아주는 묵직한 팔이 없었다. 또, 였다. 달력을 볼 필요도 없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눈을 뜨지도 못했지만 자신을 진정시켜주고 늘 그렇듯이 자신의 등을 쓸어주는 그의 손길이 없다는 사실에 7월 23일 서울의 여름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죽었으니까. 달력을 볼 필요도 없었다. 권필삼은 언제나 자신을 본인에게 단단히 매어두고 싶어 했고, 이것은 몇 백번의 되돌아온 시간에서 모두 동일했다. 그 지긋지긋한 남자가 자신을 두고 어디 갈리가 없었다.

 

 

 

조춘자는 어지러운 머리로 침대를 더듬었다. 싸구려 시트가 춘자가 흘린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저 좆같은 시계를 내가 부숴버리든가 해야지……. 춘자가 이를 짓씹으며 말했다. 털털거리는 요란함 소리를 내는 선풍기와 칙칙한 색의 목이 다 늘어난 잠옷으로 쓰는 티셔츠. 명동의 여관방으로 돌아왔다. 춘자는 떨리는 숨을 갈무리하고 무릎을 꿇고 신이라는 존재에게 기도했다.

 

 

 

당신이 무슨 의도로, 또 무슨 마음으로 계속 돌리는지도 모르겠고, 또 자신의 기억을 지우지 않는지도 모르지만, 나에게 그를 구해야만 하는 사명이 있다면 그 사명대로 기꺼이 도구가 되겠다는 기도였다.

 

 

 

조춘자는 멍청했다. 본인도, 다른 이들도 다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조춘자는 가슴과 엉덩이가 큰 아무 생각 없는 대가리에 좆 박은 년이니까. 그러나 이 무수히 반복되는 윤회에서 무엇이 방아쇠가 되어 당겨지는 건지에 대한 것도 모를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다. 권필삼이 이 반복의 열쇠였다. 그를 보지 않으려 도망가 교도소에 가보기도 했고 군천에 내려가기도 했으나 운명이 무슨 장난질을 친 건지. 이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조춘자는 원래 내 길은 내 길이고, 내 선택에 따라 움직이는 거라고 굳게 믿어왔었으나 반복되는 만남과 파도치듯 몰려오는 그 감정들, 자신이 자신으로서 있을 수는 없지만 기꺼이 또 그렇게 보여줄 행동들. 그리고 죽음. 모든 것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렇게 필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느끼고, 겪다 보면 굳건하던 춘자의 믿음이 바뀌고 운명이 장난질을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정하면 수순대로 이어지는 길을 걷는 것이 정답이지만 아주 세세하고 미세한 오류가 발생해 그 오류를 고치기 위해 전지전능한 존재가 세계의 시곗바늘을 돌리는 것 같았다. 누군가에게는 짧은 단편일 시간이, 또 누군가에게는 평생일 시간이 또다시 돌려졌다.

 

 

 

조춘자는 누구에게 바치는지도 모를,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종교들의 신들일지 이 세계를 써내려가고 있을 누군가에게 기도를 마치고 일어나 털털거리며 회전으로 돌아가던 선풍기를 고정시켰다. 침대를 향하도록 고정시키고는 노트에 숫자를 다시 적었다. 이 기록은 자신이 지금 어디까지 왔는지, 그리고 권필삼이 몇 번이나 죽었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그리고는 버릇처럼 그 옆 장에 적혀 있는 로라 양장점의 주소를 흘겨보다 한숨을 푹 내쉬곤 다시 침대에 드러누웠다. 시간에 맞춰 출발하려면 지금 몸을 씻고 몸을 움직여야 하지만, 조춘자는 너무나도 지쳐있었다. 좁고 쿰쿰한 곰팡이 내가 나는 여관방을 눈을 돌리며 한번 훑었다. 촌스러운 꽃무늬가 튀는 이 여관방은 춘자를 닮았다. 곰팡이가 피고 벌레는 또 빌어먹게 많이 나오고, 가끔씩은 쥐가 뛰어가는 소리까지 들은 적 있는 이 여관은 정말 최악이었지만, 커다란 빨간색 벽지를 발라 나름 꾸민다고 꾸몄다. 그러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이 여관방에는 쥐가 나오고 벌레가 기어 다니며 곰팡이가 좀먹고 있지만, 처음 봤을 때는 그렇게 나쁘지 않은 모양새이다.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이 되지 않듯이. 겉을 얼마나 화려하게 꾸며 봤자, 조춘자는 조춘자였다. 멍청하고 몸매는 좋은데 성격 하나는 지랄 맞은 조춘자.

 

 

불을 키지 않아 커튼 사이로 비치는 햇빛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 햇빛이 닿는 곳을 더듬곤 따듯함을 느끼다 몸을 아예 돌려 햇빛 사이로 반짝이며 부서지는 먼지를 봤다. 그러길 잠시 춘자가 머리를 벅벅 긁고는 벌떡 일어나 잠옷으로 입은 짧은 반바지를 벗었다. 땀으로 축축해진 티셔츠를 잠시 펄럭이다 방에 딸린 아주 작은 욕실로 가며 허물을 벗듯 자신이 걸치고 있던 모든 옷을 벗었다.

 

 

 

정신 차리기 위해 찬물을 틀고 선 샤워기 아래서 몸을 웅크렸다. 얼굴에서 뜨거운 물이 흘러내렸다. 춘자는 눈물로 뿌연 시야를 깨끗하게 하기 위해 얼굴을 벅벅 닦았다. 정신 차려 조춘자, 운다고 해결 되는 일은 없어. 앞으로 나가야해. 심각한 일들은 내일 생각하자. 오늘 할 일은, 권상사를 만나는 것뿐이야. 그럼 준비하고 로라 양장점을 가야해. 화장도 하고 가발도 빗고, 준비된 옷으로 갈아입고 캐리어를 챙겨서 나가면, 그가 날 보러 올 거야. 뺨을 두 번 짝짝 때린 춘자가 일어서 다시 샤워를 시작했다. 잡생각은 사치라는 말을 되새기며 거칠고 정확한 손놀림으로 몸을 씻어냈다.

 

 

 

몸을 다 씻은 춘자는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고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으며 화장을 시작했다. 정해진 루틴을 모두 없애고 재정립했다. 다시 베개를 집어던지고 거울을 부수든가 하고 싶었고, 예의범절의 배우기 전처럼 맹렬히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그러나 차마 그러지 못했다. 그 통통한 입술에 립스틱을 바른 춘자는 자신의 립스틱이 입에 묻은 진숙이와 권필삼을 떠올렸다가 눈을 내리깔 곤 바르르 떠는 것으로 그 둘에 대한 생각을 떨쳐냈다. 조춘자, 잡생각 하지 마. 기하학적인 문양이 그려진 녹색의 양장은 춘자의 굴곡을 그대로 드러내 춘자의 매력을 더 끌어올렸다. 가슴 아래로 헐렁하게 떨어졌는데, 바지는 꼭 끼어서 춘자의 허벅지를 모두 드러냈더랬다.

 

 

 

조춘자는 여관방의 1층으로 내려가 빨리 움직이려 했었지만, 불쑥 마음속에서 올라온 충동을 참지 못하고 공중전화박스에 들어갔다. 무거운 캐리어 두 개를 내려두고 전화 앞에 서서 기억을 더듬었다. 관계가 끝나고 둘이서 담배를 필 때마다 알려주었던, 씻고 나온 자신을 두고 자신에게 재롱을 떨던 권상사. 그리고 그날 밤 관계가 끝나고 알려주었던, 자신이 외운 것이 맞는지 확인까지 여러 번 하던 권필삼이 무조건 외우게 했던 그의 집 번호를 기억을 더듬어 떨리는 손으로 눌렀다.

 

 

 

뚜르르……. 뚜르르…….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전해졌다. 받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아마 지금쯤 권상사는 일하고 있을 거니까. 아! 그를 곧 볼 사실을 알지만, 그래도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이어지는 신호를 들으며 조춘자는 수화기를 마치 그의 피부를 만지듯 따듯한 온기와 작은 마음을 담아 만지작거리다 수화기를 다시 내려두었다. 숨을 들이마시고 숨을 쉬고 또다시 심호흡. 마지막으로 크게 다시 숨을 삼킨 뒤에 또 크게 내쉰다. 다시 정신을 차린 춘자가 이번엔 정말로 목표를 향해 당당한 걸음으로 발을 내딛었다.

 

 

 

명동거리를 걷는 조춘자는 누가 봐도 난 년이었다. 또각거리는 구두소리와 출렁거리는 가슴, 걸을 때마다 양쪽으로 움직이는 엉덩이는 예술이었다. 모두가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미스 조가 떴다하면 명동 길거리에 있던 남자들이 튀어나와 미스 조를 바라봤고, 그런 멍청한 남자들의 여자친구도 미스 조에게 홀릴 수밖에 없었다. 예전에는 춘자도 시선들을 즐겼던 것 같은데, 지금의 조춘자는 거기에 신경을 쓸 겨를이 하나도 없었다. 손에서 땀이 스멀스멀 배어나왔다. 이걸 잡은 직원이 왜 이렇게 축축한지 대해서 생각하려나? 쩝, 알바야? 여름에 땀 안 나는 사람이 어디에 있다고……. 춘자는 입술이 삐죽이며 로라 양장점에 도착하곤 왜이리 늦었냐고 재촉하는 직원에게 캐리어를 넘겨줬다. 이제 곧이다.

 

 

 

진짜 단속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고, 권필삼이가 자신을 잡기 위해 쇼 한다는 사실도 알기에 조춘자는 그리 긴장하지 않았다. 그래도 기분은 진짜 존나 나빴다. 빌어먹을 남자, 여자를 이렇게 대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뭐, 그 이는 여자도 두들겨 팰 수 있는 남자이지만. 자신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생각을 한 남자가……. 웃음이 났다. 아니, 사실 나지 않았다.

 

 

 

이번에도 권필삼과 대화를 해야 하나? 내가 갖고 있는 내 모든 비밀과 내가 행동 했던 것들을 모두 고백해야 하나? 권필삼이 나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었는지 까지도? 조춘자는 멍청이가 아니다. 특히 사람들 사이에서의 감정, 주고받는 서로만의 예민한 비밀적인 언어들까지도 귀신 같이 알아채는 게 조춘자였다. 권필삼의 감정을 모른다 말할 수 있는가? 춘자는 마음속으로 본인에게 물었으나 답하지 못했다. 사람을 하나 사랑하는 것도 힘든데, 내가 둘이나 사랑할 수 있을까?

 

 

 

그와 함께 하며 정말로 남자를 배웠다. 그는 자신의 명예를 챙겼고, 주변 사람들을 아꼈다. 식구 그딴게 뭐라고, 죽으면 다 끝인데. 그 식구들이 자기 등에 칼을 꽂고 있는데, 공무원들은 권상사 잡는다고 혈안이 되어 있고 또 부산항은 막혔지, 나 같아도 권상사 등에다 칼 꽂고 배신한다……. 물론, 내가 배신 할 일은 없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손. 내가 마치 유리공예품이 된 것 같이 소중하게 다뤄주는 그 손길 말이다. 너무 소중해 견딜 수 없어 하는 것이 눈에 보일 때마다 조춘자는 참지 못했다. 차라리 권필삼 쟤가 내가 아니라 내 몸에 관심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제발 권필삼이 다른 남자들과 같았으면 했다. 그래서 그럴 때마다 가슴을 더 들이대고 몸을 더 끌어안았다. 그럴 때마다 권필삼은 밀어내지 않았고 자신은 바보처럼 굴었다. 관계가 끝나고 서로 담배를 피면서 자신의 가발을 벗어 퍼석하고 끝이 갈라지기도 한 까만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어 줄때면 권필삼의 까만 눈에서는 뜨거운 불꽃이 튀었다. 그 불꽃은 무엇이었나, 단순한 욕정으로 치부했었지만, 정말 그것이 간단한 욕정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 눈빛을 마주할 때마다 조춘자는 죽고 싶었다. 하지만 정말 죽지는 못했다. 죽기로 마음 먹었을 때 권필삼은 늘 자신보다 먼저 죽었다. 눈물이 나오려 했다. 정신 차려 조춘자. 울지 마. 그는 나를 처음 보는 거야. 처음 보는 사람에게 눈물을 쏟아내는 것보다 더 추한 것은 없어.

 

 

 

조명이 켜지고, 배우가 극에서 연기하듯이 조춘자는 자신을 연기했다. 권필삼이 자신을 알아본다면, 이 거짓을 알아본다면 얘기하자. 모두 고백하자. 굽이 낮고 무게가 잔뜩 실려 구두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입을 벌리고, 럭키 스트라이크를 입에 물었다. 춘자가 그 짧은 순간에 생각했다. 아, 약국에 먼저 들리지 말고 담뱃가게에 가서 이걸 살걸 그랬어. 권필삼의 담배를 워낙 피다보니 자신이 원래 피던 담배로는 만족이 되지 않던 참이었다. 그는 라이터로 춘자가 문 담배에 불을 붙였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맵고 뜨거운 담배연기가 제 폐를 가득 채웠다. 그 무거운 연기를 싫어하지 않았다. 그가 제 립스틱이 묻은 담배를 본인 입으로 옮긴다. 숨을 내뱉으며 춘자는 권필삼을 바라보았다. 그 집요한 시선에 권필삼은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얼굴 뚫어지겠다. 나 누군지 알지?”

“어, 어제 내려온 간첩도, 권상사……. 권 사장님은 알죠오…….”

 

 

 

애꾸가 의자를 챙겨와 춘자 앞, 권필삼의 뒤에 내려놓고 권상사는 자연스럽게 그 의자에 등을 느긋하게 기대고 앉는다. 그 모습은 조춘자 하나쯤은 쉽다는 느낌이었고, 실제로 그것은 사실이었다. 조춘자가 권상사에게 조금이라도 해되는 생동을 하면 순식간에 권필삼은 춘자 목을 꺾을 것이며, 춘자는 죽을 것이다.

 

 

 

권필삼의 심기는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는 춘자를 보며 이게 진실인지 거짓인지 계속 판단 질하고 있을 것이다. 짐승 같은 새끼……. 춘자가 생각했다. 춘자는 억지로 웃었으며 이것이 무서워 죽겠는데 도망가고 싶어서 발버둥치는 초식동물처럼 보이기를 간절히 바랬다.

 

 

 

“하…….”

“…….”

 

 

 

춘자가 죽던지, 병신되던지……. 아님 아예 한 식구 되는 거? 라는 대답을 하는 도중이었다. 춘자는 불편하다는 듯이 엉덩이를 움찔거리며 이 자리를 피하고 싶음을 연기하고 있었는데 그 사이에 권필삼이 턱을 괴곤 그 길쭉한 다리에 팔꿈치를 얹었다.

 

 

 

“그쪽은 내가 우습나? 왜 계속 거짓말을 해. 거짓말을. 뒤를 봐주는 새끼라도 있는가?”

“……하!”

 

 

 

권상사가 알아봤다. 권필삼이 알아봤어. 저 짐승 같은 새끼의 감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춘자는 너무 기쁜 나머지 짧은 웃음소리를 내었고, 권필삼은 미친년 보듯이 춘자를 봤다. 애꾸가 뒤에서 칼을 꺼내 권필삼에게 넘겼고, 벨트로 시늉도 안하고는 춘자의 목에 칼을 들이밀었다. 날카롭게 벼려진 칼에 살이 닿자 춘자는 더 기쁠 수밖에 없었다.

 

 

 

“당신은 월남에서 베트콩 잡을 때 말 하는 것 못 알아들어도 거짓말 하는 건 귀신같이 다 잡아냈고, 미군들도 신기하다고 당신을 불러다가 일도 시켰지. 다른 사람들이 말 끊는 것도 싫어하잖아. 그런 당신 앞에서 내가 무슨 거짓말을 하겠어~……. 지갑에 면도날 넣고 다니는 사람한테 나댔다가 또 이마 따일라. 권 사장님, 정말 그러는 거 아니야. 그거 때문에 내가 당신한테 일 받아서 군천 앞바다에서 물건 건지고 당신 호텔방으로 가서 머리 감을 때마다 딱지 건드려서 얼마나 따가워 죽을 뻔 했는지 모르지?”

 

 

 

춘자는 자신의 목에 칼을 들이 민다고 가까워진 필삼의 얼굴을 여유를 한껏 담아서 천천히 쓰다듬듯이 쳐다보았다. 쭉 뻗은 이마와 거기서부터 이어진 쭉 뻗은 날렵한 코, 얇은 쌍꺼풀이 잡힌 그의 반짝거리는 눈. 심지어 푸르게 올라온 수염도, 또 그의 아무것도 바르지 않았는데도 매끄러운 권필삼의 입술까지도. 권필삼은 춘자의 눈빛을 어떻게 읽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춘자를 바라보는 권필삼의 눈빛이 변했다. 정신 나간 여자처럼 보던 게 조금은 긍정적으로 바뀐 것을 알아채곤, 춘자는 말을 이었다.

 

 

 

“난 당신에 대해 아주 잘 알지. 모두 당신이 알려준 거잖아.”

“허, 이건 또 웃기는 일이네.”

 

 

 

춘자는 눈을 찌푸리며 서 있는 애꾸를 눈짓하며 권필삼에게 사인을 보냈고, 권필삼은 기꺼이 춘자의 청을 들어줘 애꾸를 밖으로 내보냈다. 권필삼이 춘자를 믿어서가 아니다, 권필삼 본인이 춘자를 언제든 수틀리면 죽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당신은 날 지금 미쳤다고 생각하지. 나도 내가 조금 미친 것 같아. 권 사장님, 당신이 이 미친년 때문에 얼마나 고생하고 얼마나 많이 죽었는데.”

 

 

 

저번과 같이 모든 것을 고백했다. 그를 속이려 하였지만 그는 속지 않았다. 조춘자는 모든 이야기를 하며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조춘자는 그가 나에게 외우게 했던 본인의 특징들과 좋아하는 것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강박적으로 기억했다. 자신의 기억들이 맞아 들어갔을 때에 이것이 단순 상상이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는 것을 증명해줬다. 조춘자가 미친 게 아니란 말이다!

 

 

 

권상사를 마주하고 나니 그의 호텔방, 그의 침대로 들어가는 건 아주 쉬운 일이었다. 조춘자에게 남자들이란 아주 쉬운 공식과 같았다. 1+1이 자연스럽게 2가 되는 것 같이, 조춘자가 마음잡고 남자를 꼬시면 안 넘어오는 놈들이 없었다. 조춘자가 본인은 무역업이라 칭하지만, 밀수품들을 구해 마진 엄청 떼먹으면서 연고도 뭐도 아무것도 없는 서울의 명동 한 복판에서 떵떵거리며 편하게 살 수 있는 이유는 조춘자의 머리가 나쁘지 않다는 것을 증명했다. 조춘자가 본인이 멍청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것은 그동안 춘자가 들어온 것들 모두가 조춘자 저 년은 가슴이 크니까 멍청할 거야. 하는 말들과 너는 멍청해서 좋다던 사람들의 말 때문이었다. 그리고 춘자가 생각하기에도 자신은 지혜롭지도 않고, 중요한 선택에서는 늘 이성적이지 않은 선택들을 해왔기에 자신이 멍청하다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멍청하게 구는 게 편하기도 했고, 그러나 일머리라던가 사람을 꼬여내고 유혹하는 일, 자신의 포로로 만드는 것을 조춘자는 어렵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진숙이 아버지가 자신을 거둬준것도, 바보에 등신 같던 진구까지. 마냥 날 세우거나, 어리숙하게 구는 것보다 멍청한 티도 좀 내고 순박한 척 하면서 뒤로는 머리 굴리면서 여시처럼 굴며 사람들 사이에 섞이는 것이 좋은 선택이란 걸 깨달은 이후로는 언제나 그랬다. 얼굴도 예쁘장하고 몸매도 좋겠다 그런 여자가 알랑거리는걸 싫어할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다.

 

 

 

이렇게 여시같이 굴어도 사람들은 춘자에 대한 떠돌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춘자가 군천을 고향처럼 여기던지 말던지, 그래도 다른 외부에서 떠돌다 들어왔다는 이유 하나로 군천 사람들끼리 탄탄하게 이어진 그 커뮤니티 안에 완벽하게 끼이지는 못했다. 그러니 발각되었을 때 죽지 않기 위해 도망쳤을 때……. 교도소에 가지 않기 위해 간절히 굴었던 그때에 모두 도망친 춘자를 의심했다. 범인은 장도리였는데, 장도리 걔는 과거에 일을 저지른 게 없다는 이유 하나로 그곳에 남아 조사를 받고 군천 사람이 되었다. 그 사실이 조춘자를 괴롭게 했다. 그 어리숙하던 새끼가 뒤에서 머리를 굴려 제물을 만들고 커뮤니티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 제물은 아버지, 진구. 그리고 여시같이 굴며 그 새끼 머리 위에서 놀던 조춘자였다.

 

 

 

그러나 진숙이만큼은 달랐다. 진숙이는 언제나 춘자에게 다정했다. 그 씨발새끼를 죽이고 흘러들어온 군천에서 떠돌다 진숙이를 만났고 자신이 생각해도 드릅게 재수 없을 때 먼저 다가와 손 내밀어주고 호의적인 태도로 먼저 말 붙여준 사람은 진숙이가 처음이었다. 따지고 보면 춘자는 진숙이 때문에 변화한 거였다. 아마 어리숙하던 장도리 새끼에게 다정하게 대해주고 진구를 대하듯이 해준 이유도 같을 것이다. 할 수 있으니까. 거의 친구라 할 정도의 관계가 진전되었을 때 춘자는 진숙이에게 질문을 던졌다. 손에서 땀이 비죽비죽 새나올 정도로 긴장해서는 바보같이 왜 나한테 잘 해주냐고 물었었는데, 진숙이는 ‘나랑 나이도 비슷한 것 같고, 할 수 있으니까.’ 대답했었다. 그 대답을 처음 들었을 때는 정말 할 말을 잃었었는데,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얼마나 고맙던지. 사람들은 단순히 할 수 있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에게 손 내밀고 친근하게 굴어주지 않는다. 이 빌어먹게 올곧고 바보 같은 여자가 다 있나. 진숙이는 춘자에게 언니이자 엄마이자, 연인이었다. 춘자는 이런 진숙이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한낮의 파도는 아주 단단해 보인다. 여름의 햇빛이 파도에 부서져 빛을 낼 때면, 거대한 유리 세공품이 되어 날 덮쳐온다. 그런데 정작 파도에 빠지고 나면 파도를 마주했을 때의 두려움은 모두 사라지고 기분 좋은 서늘함이 남아 여름의 열기에 한껏 달아오른 몸을 식혀준다. 그 파도는 소금기를 머금고 있어 따갑고, 눈에 들어가면 눈물이 절로 나지만. 그런데도 바다에 계속 빠지는 이유는, 조춘자는 바다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진숙이가 춘자의 바다였다.

 

 

 

그런 진숙이를 사랑하듯이 춘자가 권필삼을 사랑할 수 있을까? 그의 침대에 앉아 얇은 시트를 덮고 있는 이 순간에도 말하지 못했다. 권필삼이 춘자의 입에 담배를 물려줬고, 춘자는 자연스럽게 그의 담배를 쪼옥 빨았다. 화장기 하나 없는 말간 얼굴은 권필삼을 자극했다. 특히 춘자가 축 가라 앉아서 진지한 생각을 머릿속으로 데굴데굴 굴리고 있을 때에는 저 작은 머릿속을 열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휘저어 자신의 생각으로 가득 채우고 싶다는 욕망에 휩싸여 춘자의 옆을 알짱거렸다. 마치 동정딱지를 떼지도 못한 고삐리가 좋아하는 동네누나의 눈에 들기 위해 나대는 모양새였다. 권필삼 본인은 절대로 인정하지 않을 사실이었지만, 본인 또한 자기가 이상하게 군다는 것 즈음은 알고 있었다. 권필삼은 기꺼이 이 여자의 미친 말들을 믿어주었고, 조춘자를 품었다. 조춘자가 정말로 좀 미쳐있는건 사실이었지만, 본인이 그를 믿기로 했으니 춘자는 이제 권상사의 식구였고, 어쩌면 일생을 뒤흔들 여자가 될지도 몰랐다. 그리고 실제로도 다른 자신 또한 춘자에게 빠져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조춘자에게 빠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남자란 남자는 다 먹어보고 장난질이란 장난질은 다 했을 것 같은데, 춘자는 언제나 부끄러워했고 능숙하단 느낌은 아니었다.

 

 

 

팔짱을 끼고 담배를 태우다 나이트 스탠드 위에 준비된 크리스털 재떨이 위에 담배를 지져 껐다. 다 태운 꽁초가 두어 개 정도 크리스털 재떨이에 있었다. 춘자는 그 오동통한 입술로 하품을 했다. 눈물이 맺혔고 공기가 춘자의 입 안으로 들어가다 다시 나왔다. 춘자의 눈이 몰려오는 졸음으로 무거워졌다. 생리적으로 맺힌 눈물을 닦아낸 춘자를 권필삼이 빤히 보다 춘자를 끌어 제 품 안에 가두었다.

 

 

 

“자려고?”

“음……. 아마도. 잠은 자야지 사람이 힘을 내니까…….”

 

 

 

권필삼은 춘자의 머리에 코를 박고 숨을 들이쉬다 춘자의 이마에 입을 내렸다. 춘자가 뭐하는 짓이냐며 냄새를 갑자기 왜 맡냐며 신경질을 낼 법도 한데 잠이 몰려오는 춘자는 거기에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권필삼의 팔을 베고 자는 행위는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그의 팔은 너무 딱딱했다. 잠에서 개고나면 목이 결리기도 했지만, 춘자는 그런 불편함을 감수하고서 필삼의 살에 볼을 붙이고 잠을 청했다. 권필삼의 살에 어디 한곳을 붙이고 자는 행위는 춘자에게 기묘한 안정감을 줬다. 따듯하고 무거운 권필삼의 팔이 춘자의 허리를 감았고, 춘자 또한 권필삼의 허리에 손을 두고 잠을 청했다.

 

 

 

땀을 흘린 직후라 그런지 조춘자의 살 냄새가 더 잘 맡아졌다. 바다냄새와, 호텔 샴푸냄새. 시작하기 전에 뿌리던 춘자의 향수가 섞여있었는데, 춘자에게는 여자의 향이라기엔 애매한 버석한 내가 났다. 싸구려 비누냄새 같은 그 냄새는 이상하게 필삼의 코를 사로잡았고, 이젠 춘자의 향수냄새보다 그의 살에서 나는 향기에 더 중독되었다.

 

 

 

조춘자는 자신이 죽는 꿈을 꾼다고 말했다. 본인 대문에 권 사장이 죽는 것 같다는 말을 했는데, 권필삼은 우습게도 그 말에 조금 기뻐했던 것 같다. 조춘자 이 여자의 지금도 그리고 꿈에서도 권필삼이 나다닌다는 이야기 아닌가, 비록 그것이 본인이 죽는 꿈이라고 해도 권필삼은 자신이 변태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좋을 수밖에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죽는다라, 낭만적이지 않은가.

 

 

 

춘자가 잠에서 깨자마자 숨을 크게 들이마시곤 권필삼의 가슴을 확인했다. 다음엔 목, 등을 보기 위해선 권필삼이 몸을 움직여줘야하는데, 그러질 못해서 춘자는 입술을 깨물었다. 춘자가 결국 권필삼을 뒤집어 그의 상처가 없는 등을 확인 할 것이라 마음 먹었을 때에 권필삼이 잠에서 깨 조춘자를 향해 아침 인사를 했다. 그는 춘자의 등을 쓸어주었고, 식은땀이 나 축축한 피부 위에 입술을 내렸다. 볼에 닿는 입술의 온기와 자신을 안아주는 굳은살 박힌 권필삼이 춘자의 다급함과 불안함을 잠재워줬다. 권필삼은 춘자가 간절하게 자신을 찾는 것을 결코 싫어하지 않았다.

 

 

 

춘자는 매일 잠에서 깰 때마다 울었다. 여전히 과거의 군천에 갇혀 있었고, 기적을 바라며 언제나 돌아갔지만, 그 돌아감에서 느끼는 안정감은 오래가지 못했다. 조춘자는 권필삼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것이 조춘자의 삶을 망치고 있었다. 권필삼과 함께 한 그 짧은 시간으로 조춘자는 살았다. 조춘자가 권필삼에게 닿아있는 그 시간 동안 그들은 영원했다. 권필삼이 죽은 채로 시간이 돌아가지 않고 계속 이어져야 한다면 어떨까? 그때에 조춘자는 꼭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숨을 끊을 용기가 나기를 간절히 바랐다. 피범벅이 된 채로 그 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로 잠에서 깨 권필삼의 품 안에서 정신을 차렸다. 그 순간 동안은 천국의 맛을 보고 돌아왔고 곧 다시 권필삼이 죽을 것이라는 확신과 정해진 미래에 대해 고통 받았다. 조춘자는 자신에게 중얼거렸다. 춘자야 넌 할 수 있어. 해야만 해. 넌 그동안 좆같은 일들이 많이 있었지만, 결국 살아남았어. 할 수 있는 데까지 속이고 성공 할 때까지 내가 미쳤다는 사실을 들키지 마. 권필삼은 최대한 내 옆에 있어 줄 것이라 말하지만, 결국 그는 죽을 것이다. 권필삼이 죽지 않는 미래는 단 한 번도 없었고, 이 죽어라 돌아가는 윤회 아래에서 조춘자는 차라리 자신이 죽고 싶었다. 그가 내 곁에 영원히 있어 줄거라 늘 말했지만, 그의 영원은 꽤나 짧았다. 시간이 결국 되돌아갈 때마다 춘자의 모든 마음은 산산조각 났다. “한 번만 더!” 춘자가 애원했다.

 

 

 

춘자는 승리한 것처럼 웃었고, 춘자가 세운 목표를 하나씩 어떻게든 이어나갔다. 장도리 그 새끼를 마주하면서 웃어도 주었고, 장도리를 갖고 장난을 치기도 하였다. 이 등신 새끼는 언제나 멍청해서 춘자가 뒤에서 무슨 일을 꾸리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언제나 그랬다. 멍청한 새끼. 이 시발 새끼가 진숙이를 쳐다볼 때면 춘자는 장도리를 죽이는 장면을 머릿속에서 재생했다. 한 세 번쯤 죽이고 나면 기분이 괜찮아졌다. 세 번쯤 죽이고 나면 장도리 새끼가 자리에서 빠지거나 정말로 이 한낮에 상상처럼 장도리를 죽일까봐 춘자가 자리를 피해서였다.

 

 

 

춘자는 너무 우울해서 정신을 놓고 매일을 생일인척 방방 뛰었다. 자신이 자신을 속인 셈이다. 조춘자는 권필삼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신경을 곤두세웠고 자신이 권필삼의 행방을 알지 못하면 미칠 것만 같았다. 자신이 없는 동안 권필삼이 뭐하는지 강박적으로 알아내 툭 치면 튀어나오도록 외웠다. 그리고 이 집착은 진숙이에게도 향했는데, 자신이 너무나도 사랑하는 진숙이가 춘자를 마치 전염병인 것 마냥 취급하는 것은 안 그래도 산산 조각난 춘자의 마음에 망치질을 하는 것과 같았다. 춘자는 권필삼의 앞에서 틈만 나면 울었고, 밖에서는 일부러 더 괜찮은 척 억지로 목소리를 끌어올려 간드러지게 권상사에게 애교를 떨었다. 그러나 진숙이의 앞에서는 진실 되고 싶어서 최대한 부스러진 마음을 긁어모아 얼기설기 엮어 멀쩡한 모습을 보여줬다. 춘자는 이것을 일종의 예술 행위와 같다고 생각했다. 내가 배우를 했어야 했나? 춘자가 자조적으로 하루를 되돌아보며 생각했다. 옥분이의 다방은 장도리 놈들도 자주 오는 곳이었지만, 춘자가 머무를 곳이 되어주었다. 노트에 이리저리 자신의 일정을 쏟아내던 춘자는 가발을 벗고 테이블에 내려쳤다가 테이블 위에 엎드려 누웠다. 다시 권필삼의 호텔로 가고, 또 새벽에 나와서 일하는 진숙이도 보러가고……. 일이 한 가득이었다.

 

 

 

이번에는, 이번에는 살겠지. 춘자가 아주 작게 본인에게도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속삭였다. 춘자가 눈을 감고 다시 최면을 걸 듯 자신에게 말했다. 춘자야 넌 할 수 있어. 해야만 해. 넌 그동안 좆같은 일들이 많이 있었지만, 결국 살아남았어. 할 수 있는 데까지 속이고 성공 할 때까지 내가 미쳤다는 사실을 들키지 마. 벌떡 일어난 춘자가 벗어두었던 신발을 다시 신고 테이블에 널브러진 가발을 대충 갈무리하고 테이블에 어질러둔 짐들을 가방으로 대충 집어던졌다. 가발을 다시 손에 쥐고 다방 입구 앞 거울에 선 춘자가 자신의 뺨을 짝 때리곤 가발을 썼다. 힘 조절이 되지 않아 입안이 터졌다. 계단을 내려오며 스멀스멀 새어나오는 피를 혀 안에서 굴리다 전봇대에 피 섞인 침을 찍 뱉었다. 밤 10시 즈음이었다.

 

 

 

춘자는 보폭이 크고 다급한 몸짓으로 거의 뛰다시피 하며 권필삼이 머무는 호텔로 향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버튼을 연타했다. 뒤에 깔리는 엘리베이터 음악에 맞춰 춘자가 숨을 들이마시고 숨을 쉬고 또다시 심호흡. 마지막으로 크게 다시 숨을 삼킨 뒤에 또 크게 내쉰다. 엘리베이터의 거울을 또다시 보곤 자신이 쳐 부은 얼굴을 매만진다. 정신 차려 조춘자. 띵-. 경쾌한 엘리베이터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언제 그렇게 급하게 움직였는지 조차 모를 정도로 느긋하고 여유롭게 자신이 뛰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싫다는 듯 한 바퀴 돌아가며 향수를 뿌리곤 권필삼이 준 호텔방의 여분 열쇠로 그의 방에 들어간다.

 

 

 

권필삼 말로는 그가 호텔방에서 머물 예정이라 했었는데, 불이 꺼져 고요했다. 잠시 어디 마실이라도 나간 거겠지, 그의 운동이 길어지고 있는 거겠지. 춘자는 불 꺼진 호텔방을 넘지 못하고 혼란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다 결국 문을 넘어 그 어두컴컴한 방으로 들어갔다. 익숙하게 불을 탁탁 키곤 밝아진 텅 빈 호텔방을 보았다. 스위트룸이라 좋은 방이지만, 권필삼이 없어서 그런가 이 방이 그렇게 가득 차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춘자가 느끼기에, 너무 텅 비어 보였다.

 

 

 

그가 곧 올 거라는 믿음 하나만을 갖고 테이블에 앉아 그를 기다렸다. 안 그래도 짧은 손톱이 춘자의 이빨에 시달렸다. 손톱을 듣다 그 옆의 살을 뜯었고, 그러다 피가 나려하면 춘자는 다른 손가락을 물어뜯었다. 그렇게 춘자의 오른손부터 시작해서 왼손 약지를 뜯고 있었을 때에 뚜벅거리는 구두소리가 들렸다. 낮고 무게가 잔뜩 실린 구두소리의 주인이 권상사인 것을 단번에 알아챘다. 그럼, 내가 그 창고에서 권상사가 걸어 들어오는 것을 족해도 300번 넘게 봤고 들었는데, 그거 하나 모르겠는가? 춘자는 의자에서 일어나 권필삼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열쇠가 문고리를 통과해 절그럭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권필삼은 불이 켜진 호텔방을 보자 눈썹을 들어 올렸다가 춘자가 그의 시야에 들어오자 경계태세를 누그러뜨렸다.

 

 

 

춘자도 모르게 흐르고 있었던 눈물로 인해 마스카라가 흘러내려 엉망이 된 얼굴을 바라보다 권필삼이 느긋한 걸음으로 조춘자 앞에 섰다.

 

 

 

“……. 어디 다녀온 거야?”

 

 

 

춘자가 눈을 위로 뜨며 권필삼을 바라보았다. 권필삼은 울음이 많은 여자를 위해 난생 챙기지도 않던 손수건을 챙겨 다니기 시작했었고, 주머니에 넣어둔 흰 손수건을 꺼내 춘자의 얼굴을 닦아주기 시작했다. 춘자는 자신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자신의 얼굴을 벅벅 닦아주는 권필삼의 손길에 얼굴을 맡기다가 어떤 냄새를 맡고는 꽈악 얼어붙었다.

 

 

 

“어디 다녀온 건데, 당신? 왜 당신에게서…….”

“쥐새끼 좀 잡고 왔어.”

 

 

 

춘자는 저 권필삼이가 쥐새끼를 죽였다고 말했을 때 제발 제가 생각하는 동물인 쥐이길 간절히 바랬지만, 동시에 춘자는 권필삼이 기어코 장도리를 죽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제서야 춘자는 그의 소매에 피가 묻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의 검은 바지가 젖어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멀쩡히 걸어 들어왔으니 그의 피는 아닐 것이다. 아마 장도리이거나 장도리네 애들의 피겠거니 예상했다.

 

 

 

“…….”

“왜 이래, 춘자씨. 쥐새끼는 죽어야 하는 거 알잖아.”

 

 

 

춘자가 권필삼을 두고 뒷걸음질을 두어 번 했다. 권필삼은 아마 거칠게 움직여 세팅이 풀렸을 머리를 쓸어 올리며 춘자가 멀어진 만큼 더 다가왔다. 장도리가 죽으면, 엄진숙이 다시 그를 죽일 것이다. 차라리 자신이 죽고 말지 엄진숙이가 권필삼을 죽이는 꼬락서니를 또 볼까보냐. 춘자는 소리 지르고 싶었고, 또 울고 싶었고. 또 동시에 웃고 싶었다. 이렇게 비참 할 수가! 아, 너무 비참해. 아, 너무……. 너무 힘들어. 도저히 못 버티겠어. 춘자가 머리를 툭 떨구며 생각했다. 춘자야 넌 할 수 있어. 해야만 해. 넌 그동안 좆같은 일들이 많이 있었지만……. 아 시발 알 바야? 좆까 조춘자. 내가 여기서 대체 뭘 더 어떻게 해야 하는데? 난 최대한 노력했어. 맞잖아. 내가 뭘 더 할 수 있었는데? 네가 장도리를 죽이면 네가 내 여자 친구 손에 죽고 나도 죽고 결론 적으로는 엄진숙이는 살인자가 되고. 그딴 꼬락서니 못 보겠다는 말을 진짜로 했어야 해? 내가 권필삼한테 진짜로 엄진숙이는 내 애인이고 내 애인이 살인자가 되는 꼴은 보기 싫다고 말해줘야 하냐고. 물론 전에 장도리는 내가 죽이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생각이란 게 있으면 내가 말했던 대로 따라줘야 하는 거 아니야? 당신이 저지른 일 때문에 지금 이게 무슨 일이야? 춘자의 머리는 순식간에 어지러워져 토할 것 같았다. 멀미를 한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 생전 이랬던 적이 없었……. 아니, 아예 없지는 않았지. 권필삼의 시체나, 장도리 새끼의 시체. 그 씨발 새끼의 시체를 볼 때에 조춘자는 참을 수 없는 구역감이 올라오곤 했었다. 여기에는 시체가 없다. 그럼 춘자는 어디에 구역감을 느끼고 있는 것인가? 춘자는 진심으로 자신의 시체와 마주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저게 거울 속의 나인가 아님 내가 저 시체가 거울에 비치는 상인가. 조춘자는 구분 할 수 없었다.

 

 

 

춘자가 결심을 하고 고개를 들어 눈썹을 하나 들어 올리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티를 내는 권필삼의 얼굴을 보았다. 어떤 반응을 해야 하지? 춘자는 권필삼을 한참 바라보다가 결국 입을 떼고 말했다.

 

 

 

“당신, 피 냄새나. 씻고 나와. 난 당신 씻고 나서 들어갈게.”

 

 

 

권필삼은 그런 춘자를 한번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다 웃으며 춘자의 어깨를 끌어안고 토닥였다.

 

 

 

“으음, 우리 춘자씨가 피 냄새가 거슬렸구나. 난 또 내가 쥐새끼 잡은 거에 대해서 불만이라도 가진 줄 알았잖아. 춘자씨 알지? 내 등에 칼 꽂는 애들의 결론은 여기가 날아가는 거야. 그런 놈들이 연병장 열두 바퀴라니까.”

“네, 네~ 잘 아네요.”

 

 

 

권필삼이 여기, 라고 말하며 춘자의 뒷목을 쓸어주자 춘자의 몸에서 소름이 쫙 돋았다. 살들이 긴장해 털이 곤두서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주변의 온도가 차가워졌다. 꿈에서와 같이 춘자는 여름이라 푹푹 찌는 더위 한 중간에 있었는데도 한 겨울에 나체인 채로 눈밭에 있는 것 같았다. 에어컨의 온도를 보니 그렇게까지 추운 실내온도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춥게 느끼는 이유는 춘자가 권필삼을 죽일 각오를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춘자는 그 사실을 권필삼에게 들킬까 긴장하고 있었다. 진숙이가 사람을 죽이는 꼴을 또 볼 수는 없었다. 살인이 첫 번째, 두 번째나 어렵지. 세 번째는 쉬울 것이다.

 

 

 

권필삼이 욕실로 들어가고 춘자는 가방에서 늘 들고 다니던 쥐약을 꺼냈다. 액체형식의 쥐약을 꺼냈다. 받지 않는 그의 집으로 향한 전화를 끝내고, 춘자는 약국을 다녀왔었다. 거기서 액체식으로 이루어진 쥐약을 샀는데, 머무르는 집에 쥐가 너무 요란이라 산다하니 약사가 의심도 없이 약을 건네주었더랬다. 약사에게 밀수품을 건네줬던 전적이 있어 훨씬 더 쉽게 구매했다. 맛은 모르지만, 무색에 무향이었다. 춘자는 이 약을 가글통에 담아 마치 가글인 것 마냥 위장해 들고 다녔다. 누가 제 가방을 뒤지지는 않겠지만, 혹시 모른다는 이유에서였다. 춘자는 이 쥐약을 정말 자신이 권필삼을 죽이기 위해 쓰게 되었다는 사실에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참고 그가 즐겨 마시는 라벨인 양주에 쥐약을 모두 털어 넣었다. 전날에 먹다 만 술이 있어 다행이었다. 권필삼은 무슨 샤워를 그리 빨리하는지 고작 5분의 시간으로 모든 걸 해결했더랬다. 아침에는 면도한다고 조금 더 걸리기는 하지만, 그래봤자 7분이었다. 피 냄새를 빼는 거에 대해선 전문인 양반이니 똑같이 5분일 것이다. 춘자는 자신을 재촉하며 빠르게 움직였다. 권필삼이 욕실로 들어간 지 2분 되는 시간이었다. 물소리가 멎었다. 이제 그는 비누칠을 할 것이다.

 

 

 

춘자는 얼음 버킷 안에 있는 얼음송곳으로 얼음을 쾅쾅거리며 부쉈다. 그 행동은 권필삼이 춘자 위에 올라타 하는 짓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얼음이 부서지듯 춘자는 본인이 본인을 부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동안은 이 빌어먹을 윤회가, 권필삼이 자신을 부수고 있다 생각했었는데. 권필삼을 죽이기로 결정하자 이보다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그가 처음으로 죽고 나서부터 계속 그에게 매달렸는데,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남에게서 죽는 권필삼이 자신의 공포이자 악몽이 되었다면, 자신이 기꺼이 그 악몽의 일부가 되어 그를 죽일 수도 있는데. 내가 왜 이런 선택지를 생각하지 않았을까? 춘자는 겁쟁이라 본인의 목숨을 끊을 용기는 없었지만, 남을 죽일 수 있는 정도의 용기는 있었다. 그러나 본인 혼자 죽는 것이 아닌. 자신과 누군가가 함께 죽는 건 또 괜찮을 것 같았다. 춘자가 숨을 들이마시고 숨을 쉬고 또다시 심호흡. 마지막으로 크게 다시 숨을 삼킨 뒤에 또 크게 내쉰다. 얼음송곳에 의해 깊고 정확하게 박힌 큰 덩어리의 얼음은 버티지 못하고 부서졌고, 적당한 크기로 부서진 얼음을 담아 잔들을 차갑게 식혔다. 욕실 문이 열렸고, 수건을 어깨에 걸친 권필삼이 춘자에게 걸어왔다. 그는 가운을 대충 걸치고 있었고, 그의 판판한 가슴과 윤곽이 선명한 복근이 선명하게 보였다.

 

 

 

권필삼이 춘자의 뒤로 다가와 뒤에서 춘자의 손을 겹쳐 잡았다. 다른 손은 춘자의 얇은 허리를 잡고 춘자의 엉덩이를 끌었고, 당연스럽게 춘자의 몸이 권필삼과 겹쳐졌다. 권필삼은 춘자의 가발 위에 입술을 내렸다. 가발을 벗어 검은 토끼 같은 춘자도 좋았고, 가발을 쓴 갈색 토끼 같은 춘자도 좋아했다. 둘 다 새로운 맛이 있었다.

 

 

 

“당신도 마실 거지?”

“춘자씨가 따라주는거야?”

 

 

 

춘자가 엉덩이를 빼 권필삼과 더 닿게 한 뒤 고개를 젖혀 권필삼에게 물었다. 권필삼은 기분이 꽤 좋아 보이는 조춘자에 자신 또한 기분이 꽤 좋아졌다. 장도리인지 그 쥐새끼를 빨리 담구니 좋잖아 춘자씨도. 권필삼은 머릿속으로 생각하다 어떻게 죽였는지 춘자에게 말해주기로 했다. 그 새끼는 배를 몰드만 수영을 못한다는 게 참 우스웠다. 아, 손과 발이 묶여 두들겨 맞은 채로 빠졌으니 당연한 일인가. 물고기들이 밥을 잘 먹어 그 부근 물고기들은 통통하지 싶다. 권필삼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춘자가 전날 먹다 남은 술을 두 잔에 따르는 모습을 보았다.

 

 

 

조춘자는 두 잔을 모두 들고 몸을 돌려 권필삼을 바라보았다. 춘자는 잔 하나를 권필삼에게 건넸고, 권필삼은 춘자의 손에서 잔을 받아 그 큰손으로 올드 패션드 잔을 감쌌고, 춘자는 그의 핏줄이 선 손등을 바라보았다. 권필삼은 잔을 느긋하게 돌렸고, 춘자는 그런 그를 보다 춘자도 웃으며 권필삼을 따라하듯 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약이 잘 섞였을까? 잘 섞였기를 바란다. 일본에서 들여온 쥐약이라고, 미스 조라서 특별히 주는 거라고 보여주던 약사언니의 말이 스쳐지나간다. 조금만 먹어도 바로 픽픽 죽는다했던 약사언니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잔을 부딪치고 권필삼이 술을 단번에 털어 넣는다. 춘자는 그런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느릿하게, 하지만 멈추지 않고 술을 끝까지 비운다. 약이 섞인 술이 목을 타고 넘어가며 식도를 뜨겁게 데운다. 이렇게 뜨거운 게 조춘자가 긴장을 해 몸이 굳어 춥게 느껴져서인지, 아님 약 때문인지. 그저 술 때문인지 구분 할 수 없었다. 조춘자도 그렇고 권필삼도 술을 테이블에 내려놓는다.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만 같았다. 권필삼이 기침을 참을 수 없어 기침을 했더니, 피가 울컥 쏟아져 나왔다. 그것은 춘자의 옷까지 붉게 물들였다. 춘자도 올라오는 피를 울컥 쏟았다.

 

 

 

“하! 하하하…….”

“…….”

 

 

춘자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조춘자는 미친년에 씨발년, 거짓말을 입에 달고 살며 근본도 모르는 년이었다. 그 누구도 조춘자를 겁쟁이로 보지 않았지만, 춘자 본인은 거울을 볼 때마다 겁쟁이를 보았다. 누군가를 죽일 수는 있지만, 정작 자신의 목숨을 끊을 용기는 없는. 그러나 조춘자는 권필삼을 죽였다. 자신 또한 죽였다. 장도리 또한 죽인 적 있고, 자신을 범하려던 그 새끼도 죽였다. 이제 누가 겁쟁이인가? 혼자 죽는 것은 여전히 무서웠다. 함께 죽는 것은 또 괜찮은 것 같았다.

 

 

 

권필삼이 춘자 위로 쓰러지고 춘자 또한 다리에 힘이 풀려 권필삼의 밑에 깔린 채 누웠다. 권필삼은 춘자의 가슴을 베고서 춘자를 당장이라도 죽일 것처럼 쳐다보았다. 춘자는 권필삼이 자신의 위로 쓰러지며 폐가 눌려 몇 번 더 쿨럭 거렸다. 춘자의 입에서 쏟아지는 피를 권필삼이 뒤집어썼다. 그의 눈에 비친 춘자는 웃고 있었다. 정말로 다시 돌아오고 나서 이보다 더 가벼웠던 적은 없었다. 춘자의 어깨는 걱정과 절대로 어길 수 없는 운명으로 향하며 무거워져 있었는데, 그런 걱정을 모두 다 내려놓고 진심으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행복해했다. 내가 왜 함께 죽는다는 생각을 못했을까? 그건 내가 겁쟁이기 때문이겠지. 춘자는 자신의 피를 뒤집어 쓴 권필삼의 뺨을 피가 빠져나가 점차 차가워지는 손가락으로 마치 사랑하고 아주 아끼는 사람의 얼굴을 어루만지듯이 쓸었다. 그의 집으로 받지 않을 전화를 걸었을 때 공중전화 수화기를 쓸었듯이 말이다. 그의 얼굴이 따듯한 것이 자기 피 때문일지 아니면 그의 눈빛이 뜨거워서 그런지, 온기가 전해진다는 사실이 좋았다. 잘생기기는 더럽게 잘생겼네. 피로 젖은 옷이 축축했다.

 

 

 

춘자는 어지러운 머리로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눈꺼풀이 무거워졌고, 지구가 돌아가는 것 같은 웅웅거리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전복죽, 또 못 먹었네…….

Time present and time past

현재의 시간과 과거의 시간은

Are both perhaps present in time future

아마 모두 미래의 시간에 속한다

And time future contained in time past

그리고 미래의 시간은 과거의 시간에 포함된다

If all time is eternally present

만약 모든 시간이 영원한 현재라면

All time is unredeemable

모든 시간은 구제 불가능한 것이다.

What might have been is an abstraction

있을 수 있던 일은 하나의 추상으로

Remaining a perpetual possibility

추측의 세계에서만

Only in a world of speculation

영원한 가능성으로 남는다

What might have been and what has been

있을 수 있던 일과 있었던 일은

Point to one end, which is always present

한 점을 향하고, 그 점은 항상 존재한다.

Footfalls echo in the memory

발자국 소리는 기억속에서 울려퍼진다

Down the passage which we did not take

우리가 가지 않은 통로 아래로

Towards the door we never opened

우리가 한번도 열지 않았던 문으로 향해

Into the rose-garden

장미정원으로

 

_T.S. Eliot, Burnt Norton


week10 <겁쟁이>

니야 (@xiangrikui_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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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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