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아는가 이 마음

영원 회귀

week9 / 주 댄버스

352

또 죽었다.

지친 눈가를 문질러 보았다. 이번엔 송곳이 권 상사에 목에 꽂혀 있었다. 그걸 뽑아내자 분수처럼 핏줄기가 사방으로 터졌다. 비열하게 웃는 장도리가 혓바닥으로 피에 젖은 얼음송곳을 핥아 올렸다. 코를 찌르는 피 냄새도, 손에 묻어난 핏물도, 서서히 멎어가는 숨소리도, 머리채가 붙잡힌 손아귀도, 놀라울 정도로 평온했다.

어차피 되돌아간다. 남자의 죽음은 방아쇠였고, 정해진 루트처럼 늘 남자를 독대하기 직전으로 돌아갔다. 그러니 놀라지 않았다. 품에서 식어가는 남자를 보고도 동요하지 않는 자신에게 놀랐을 뿐이다. 다시 하면 되니까. 차츰 시야가 아득해졌다. 이번엔 또 무슨 수를 써야 하나. 이불을 뒤집어쓴 채 가만히, 고요히 사라지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눈을 뜨면 모든 게 제자리다. 싸구려 여관방, 잠옷으로 입던 헐렁한 티셔츠, 어젯밤 마시다 만 보리차 한 잔, 7월 23일 로라 양장점이 쓰인 노트.

가발을 쓰고 화장을 진하게 한 뒤 옷 몇 벌과 전 재산이 들어간 트렁크를 챙긴 춘자가 여관 전화를 썼다. “미안하다니까 그러네! 다음에 더 큰 걸로 가져갈게. 어, 암튼 오늘은 안 돼. 짭새 흉내 내면서 단속 도는 깡패들이나 조심하고.” 양장점에 가지 않은 건 처음이었다. 그 남자는 어떻게 나오려나? 김빠진 웃음을 뱉곤 차표를 끊었다. 군천행 어른 한 장. 버스에 올라탄 춘자는 오래도록 차표에 인쇄된 행선지를 내려다 봤다.

처음부터 이랬어야 했다. 권 상사는 주어진 인생을 살고, 자신 역시 오랜 방황의 마침표를 찍어야 했다. 그게 진숙에게 사죄를 하는 것이든, 오해를 푸는 것이든, 진실을 밝히는 것이든. 권 상사는……. 애초에 득이 될 게 없는 관계였다. 지난 2주를 반복하며 내린 결론이었다.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사업 파트너한테 목숨을 걸어, 등신같이. 거의 동시에 살갗에 입을 맞추던 체온과 남자가 자주 피던 담배 냄새가 떠올랐다.

다이아, 금괴 밀수에서 손 씻으면 돈은 어떻게 버나. 물질로 입에 풀칠은 할까. 엄진숙 표 전복죽 먹고 싶다.

춘자는 도심에서 멀어져 가는 풍경 너머를 응시했다.


현란한 기하학무늬가 수놓아져 몸에 달라붙는 초록빛 긴팔 긴바지를 입은 춘자가 진숙 앞에 섰다. 놀란 듯 눈을 크게 키운 진숙이 춘자의 머리끝부터 발끝을 훑었다. 값비싼 향수 냄새를 풍기며 제 앞에 선 춘자와 달리 우중충한 진녹색 작업복을 입고 다 썩은 해산물을 삽으로 퍼내던 진숙. 잠깐의 대치 후 진숙이 삽을 내던지며 물었다.

“정말 너였냐?”

“나 모르냐?”

다행히도 뺨은 멀쩡했다. 먼저 찾아와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도 낮게 한숨을 뇌까린 진숙의 기세가 사나웠다. 춘자는 진숙의 다음 말을 알았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 난리 겪고 깜방 갔다 오는 동안 니가 어디서 뭐 하다 왔는지도 모르는 사람한테 한다는 소리가 나 모르냐?”

“그럼 안부부터 물었어야지.”

한 번, 오해를 풀어보려고 한 적이 있다. 또 한 번, 사과를 해본 적이 있다. 그때 진숙은 조금 누그러졌지만 이번엔 달랐다.

“신수 좋아졌네? 어? 머리색도 바꾸고.”

공격적인 어투에 춘자가 방어적으로 팔짱을 꼈다. 몇 번을 겪어도 근거 없는 비난엔 내성이 생기지 않았다. 그것도 가족이자 연인이자 자신의 전부였던 반쪽의 지독한 힐난이었다. 그래서 기가 찬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어쨌든 다음 말을 끌어내야 했다.

“너 정말 사람들 소문만 믿고 나한테 이러는 거냐?”

“소문? 어쨌건 그때 도망친 건 너 혼자 아니야. 너 아니면 누가 세관에 찔렀는데?”

그간 춘자는 이 시점에서 자신의 사정을 토로했다. 강간당할 뻔했던 과거를 읊었고, 3년 전에 붙잡혔으면 자신은 살인범으로 재판에 넘어갔을 거라며 ‘연설’했다. 3년 동안 지어낸 얘기가 겨우 그거냐며 비웃음만 샀지만. 이번엔 방법을 바꾸기로 했다. 왜 처음부터 말하지 않았냐는 진숙의 물음에 응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아니라, 네 가까이 있는 다른 사람이 찔렀다면 어떡할 건데.”

증거는 없었다. 권 상사가 장도리의 뒤를 캐다 이계장과의 접점을 찍은 사진이었고, 이번 생에 권 상사는 이곳에 없다. 앞으로도 없어야 했다. 그런데, 증거가 없으면 내 말을 들어주기나 할까. 사진을 들이밀며 말하자 그걸 왜 이제 얘기하냐며 타박을 놓던 진숙이 말이다.

“3년 동안 지어낸 얘기가 고작 그거냐?”

불행히도 진숙은 믿지 않았다. 코웃음이 절로 나왔다. “웃어?” 진숙이 형형한 기세로 춘자를 노려봤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중얼거렸다.

“거봐, 내 말이 맞지.”

“뭐라고?”

“다른 사람이 씹어대는 내 소문은 철석같이 믿으면서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 진숙아.”

진숙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할 수 있으면 더 해보라는 듯 쏘아보는 눈초리에 춘자가 진숙에게 한발 다가섰다.

“니 아버지 배 가져가고, 해녀들 등골 빨아먹으면서 군천 오야붕 노릇하는 그 새끼가 3년 전에 세관에 찌른 범인이었으면 어떡할 거냐고.”

이름을 특정하진 않았다. 그러나 진숙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춘자가 지금 누굴 말하고 있는지. 진숙은 다시 삽을 든다. 춘자가 한 발 더 진숙에게 다가간다. 춘자 쪽은 보지도 않고 말한다.

“장도리가 내 뒤통수까지 치고 저러고 사는 건 맞는데-”

“3년 전에 장도리가 어땠는지 너도 알고 나도 안다고? 니 앞에서 숨도 살살 쉬던 애라고?”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놀란 낯을 한 진숙이 다시 이를 갈았다. 그가 식칼을 드는 걸 뻔히 보면서도 춘자는 빠르게 읊었다.

“내 말 못 믿겠으면 세관 신고서 확인해보든가. 거기에 누구 이름이 적혀있는지 확인해보고도 나한테 이러면-”

“아 씨발 진짜!”

결국 반전은 없었다. 제 목을 찌르지도 못할 거면서 식칼로 위협해대는 꼴을 가만히 보았다. 매번 똑같은 말, 똑같은 쌍욕을 늘어놓으면서 한다는 말이 “그 잘난 입에 장도리 한 번만 더 올려 봐. 니 아가릴 확 찢어 죽여 버릴 테니까.”였다. 뒷배 구린 장도리 새끼보다 저를 못 믿는 진숙을 보며 또 한 번 씁쓸함을 삼켰다. 옥분이네 다방에 있을게. 평소보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인사한 춘자가 발걸음을 돌렸다.

거뭇한 야시장을 걸으면서도 다음을 생각했다. 권 상사가 없으니 억척이 수술비는 물 건너갔다. 밀수 신고서까진 옥분의 도움으로 가져올 수 있으나, 그다음이 문제였다. 그 남자를 담보로 장도리와 거래를 틀었으니, 이번엔 춘자와 진숙이 장도리와 이 계장을 상대해야 하는데…….

그때였다. 순식간에 시야가 점멸하고, 낡고 퀴퀴한 먼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코와 입은 틀어 막히고, 결박당한 팔다리가 붕 떴다. 뒷덜미를 내려치는 둔탁한 통증과 함께 정신이 아득해졌다. 진숙아, 나 여기 있어…. 버둥거리던 팔다리가 축 늘어졌다.


망했다.

시야를 가리던 천이 벗겨지자 춘자는 그리 생각했다. 춘자가 이번 생에 로라 양장점을 가지 않은 이유는 자명했다. 거기 가면 권 상사와 독대하게 되니까. 그날을 기점으로 남자가 저와 얽혀 개죽음을 당하니, 처음부터 싹을 자른 것이다.

그런데도 남자는 꽤나 끈질겼던 모양이다. 도대체 어디서 꼬리가 밟힌 건지, 눈 감고도 그릴 수 있는 군천 관광호텔 그 스위트룸에 여자를 잡아 온 남자의 집요함에 혀를 내둘렀다.

장지문을 열고 느긋하게 걸어온 남자, 권 상사가 춘자의 입에 담배를 물렸다. 라이터로 담뱃불을 붙이고, 춘자의 루즈 자국이 묻은 연초를 가져가 깊게 들이켰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정해진 수순처럼.

“나 누군지 알지?”

춘자는 자신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이 정도면 악연이란 생각만이 스쳤다. 퍽 지친 음성이 권 상사의 귓전을 때렸다.

“징글징글해. 여긴 또 어떻게 알고 왔대.”

“이상하다? 그쪽은 우리 식구들 손님 뺏고 물건 값 떼먹고 편하게 댕기셨는데, 이 정도 각오도 안 하셨나 봐. 겁 대가리도 없이.”

남자는 호텔 의자 하나를 끌고 왔다. 여자를 옴짝달싹 못 하게 묶어둔 의자와 같은 것이었다. 여자가 시끄럽게 굴 때를 대비해 면도칼을 꺼내면서도 헛웃음이 났다.

“이래저래 계산하면 천팔백 정도 있어야 해결 가능하겠네.”

“꼴랑 천팔백 받아내겠다고 여기까지 내려와? 그깟 푼돈에 목숨을 걸어?”

참, 듣던 대로 시끄러운 여자야. 춘자의 이마를 면도칼로 푹 찍으면서도 자조했다. 완전히 틀린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놀라운 건 다음이었는데, 보통 사람 같았으면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는 핏줄기에 놀라 숨조차 멈추곤 했다. 그런데도 눈앞의 여자는 아니었다.

“왜 그러고 살아? 그쪽 살길 마련해줬으면, 내가 안 보이면 그냥 없는 년 취급하고 잘 먹고 잘살 것이지, 여길 왜 오냐고. 왜!!”

마지막은 흡사 절규에 가까웠다. 밭은 숨을 몰아쉬며 가슴을 들썩이는데, 필삼은 삐딱하게 한 번 웃고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턱을 타고 흐르는 핏방울을 성의 없이 닦아냈다.

“나랑 독대하고 나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영문 모를 힐난에 답할 의무 따윈 없었다. 그래서 제가 말하고 싶은 것만 취사선택한 필삼은 갑식을 흘겨보았다. 눈길 한 번에 한쪽 눈에 안대를 낀 남자가 날이 시퍼렇게 선 칼을 들이밀었다. 서걱대는 칼날을 대놓고 보여주는데도 여자는 겁먹는 기색 하나 없었다. 입에 문 담배를 다른 손에 빼 들고, 칼날로 묶인 손목을 슥슥 긁었다. 이젠 침묵하는 여자를 위해 필삼이 친절히, 칼로 여자의 손목을 톡톡 두드리며 답해주었다.

“죽거나, 병신 되거나.”

돌아다니는 소문에 민감하고, 일머리나 수완이 좋은 여자는 마지막 선택지가 무엇일지도 필히 알았을 것이다. ‘아예 한 식구가 되거나.’ 잠깐은 기대했다. 상황 파악할 줄 아는 눈치가 있으니 천팔백이나 빼돌린 사업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돌아온 건 피가 섞인 타액이었다.

“…….”

“좆까, 씨발.”

하. 얼굴에 묻은 침이 진짜인가 확인하는 사이, 갑식이 먼저 춘자의 멱살을 틀어잡았다. 저지했다. 괜찮아. 냅둬. 남의 피를 닦은 손수건으로 이번엔 여자가 뱉은 침도 닦아보고. 전국구 밀수왕이라는 게. 춘자는 사양 않고 이어 말했다.

“그쪽 식구 될 마음 눈꼽만큼도 없으니까 손목 발목 끊어 병신 만들 생각도 말고, 그냥 멱을 따.”

말하면서도 춘자는 주먹을 세게 쥐었다. 이 정도 했으면 있던 정도, 생길락 말락 한 정나미도 다 떨어지겠지. 제 얼굴을 깨끗이 닦아낸 남자가 손수건을 아무렇게나 내팽개쳤다.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로 싸늘한 표정이었다.

“간이 배 밖으로 나왔네.”

칼에 맞으면 아플까. 5년, 아니 3년 전만 해도 꿈도 못 꿨으리라. 제대로 알지도 못 하는 사람 목숨 하나 구하자고 제 목숨을 담보로 내놓는 조춘자라니.

그래도 이게 나았다. 어차피 남자는 저를 지키다 죽었고, 죽지 못해 사는 인생이었고, 반드시 한 사람이 죽어야 한다면 꼭 저 남자일 필요는 없었다. 도마 위에 오른 생선처럼 눈을 지그시 감고, 고통 없는 죽음만을 기다렸다.

“갑식아.”

미동도 않고 눈꺼풀만 질끈 감고 있었다. 여전히 굳은 얼굴을 한 남자는 깊은 한숨을 뇌까렸다.

“옆방 하나 더 잡자.”

“그냥 죽이라고!”

뺨을 맞겠지. 다음은 배를 맞을 거고, 좆팔년 씨발년 쌍년 별의별 욕을 다 들을 것이다. 10년 넘게 똑같은 2주를 반복하면서도 남자는 여자한테 손을 드는 법이 없었다. 그래도 모르는 법이다. 절대 라는 건 존재하지 않고, 영원하단 말도 믿지 않았다. 진숙이 그랬고 장도리가 그랬다. 사람이란 얼마든지 돌변할 수 있고, 말로든 주먹으로든 저에게 폭력적으로 굴 수 있는 존재였다.

“춘자씨.”

애꾸눈이 께름칙한 얼굴로 방을 나가기 무섭게 남자가 툭 내뱉었다. 옴짝달싹 못 하게 묶어둔 공간에서 남자는 제게 뭘 원할까. 호텔 방만 둘러봐도 옛 기억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남자는 잠자리에 능숙했고, 수백 수천 번 그와 몸을 섞었고, 저 눈깔은 제게 미쳐 돌았을 때 곧잘 보여주던 정욕 어린 시선이었다.

“난 여기 그냥 시골인 줄 알았는데, 극장도 있고 클럽도 있고 있을 건 다 있더라고.”

가발을 사락사락 긁던 칼날이 가슴께로 내려갔다. 가슴을 가리고 있던 얇은 천은 금세 넝마가 됐다.

“듣자 하니 군천 앞바다엔 물건 건지는 해녀들도 있다던데.”

남자가 일어섰다. 안 그래도 큰 남자가 선 채로 내려다보니 입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그리곤 태연한 얼굴로 허리띠를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담배는 입에 문 채, 칼은 한 손에 든 채. 사색이 되어가는 춘자를 내려다보며 필삼이 씩 웃어 보였다.

“어제 보니까, 춘자씨가 그, 해녀들 대가리하고 아는 사이더라구.”

“…….”

“춘자씨 말대로 내가 여기까지 왜 내려왔겠어. 잔챙이 밀수꾼 하나 잡아 죽이자고? 촌스럽게.”

그렇게 애를 썼는데, 결국은 남자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났구나. 아니, 운명이 점지한 손바닥 위였을지도. 얼빠진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걸 보던 남자도 마주 웃었다. 비웃음에 가까웠지만. 허탈해하는 도중에도 턱이 단단히 붙들렸다. 쏘아보는 눈빛에도 남자는 여유롭게 말했다.

“그리고 춘자씨. 우리가 이렇게 마주 보고 있지만은,”

똑바로 보라는 듯 날이 시퍼렇게 선 칼날이 춘자의 눈앞에서 좌우로 움직이다, 위아래로 움직였다.

“이 관계가 아니라, 이 관계란 거.”

“좆까랬더니 진짜 좆 까서는. 이젠 빨아달라고 시위해?”

“그러라고 여기 온 거 아니겠어?”

“미친 새끼.”

“이상하지. 원래는 이, 아랫놈들이 개기면 기분이 더러워야 하는데.”

그 이후로 춘자는 줄곧 고민했다. 마치 정해진 길을 걷는 것처럼 어떠한 변수를 입력해도 제자리로 돌아와 주어진 운명대로 움직이는 사람들.

“춘자씨가 하면 여기가 땡기네. 꼴렸나?”

뭘 어떻게 해야 권 상사가 저를 찾아내지 못할까. 그 ‘독대’를 없던 일로 만들 수 있을까. 제 품 속으로 파고드는 남자의 손아귀를 쳐내지도, 밀어내지도 못하면서 그런 고민에 빠졌다. 맨살을 어루만지고 목덜미와 어깨에 쉴 새 없이 입을 맞추는 남자를 두고, 하염없이 생각했다. 저를 대신해 차에 치여 피를 토하는 남자를 내려다보면서도 생각은 멈추지 않았다. 조춘자 이 씨이발년, 귀에 딱지가 붙은 멸칭이 차 안에서 터져 나왔다. 칼로 못 찌르면 목을 조르고 수장을 시키더니 이번엔 차를 끌고 와 남자를 갖다 박은 새끼를 무감하게 응시했다.

춘자는 이 무한 고리의 끝을 떠올렸다. 그 너머의 풍경은 그려지지 않았다.

353

눈을 뜨자마자 노트를 펼쳤다. 353. 지난번엔 적어두지 못했다. 노트를 넘기고 넘겨 깨끗해 보이는 종이를 펼쳤다. 빈 공간을 내려다보던 춘자가 곧 펜을 끄적이기 시작했다. ‘진숙이에게.’ 단정하게 적어 내린 글자는 10년 넘게 반복 중인 지난 2주를 담담하게 서술했다. 장도리에 대해 적었고, 이 계장에 대해 적었고, 마지막으론 자신의 과거에 대해, 그리고 앞으로 자신이 벌일 미래에 대해 적었다. 빽빽하게 적어둔 종이를 곱게 접어 백만불 양장점 앞에서 찍은 단체 사진, 도장과 함께 봉투에 넣었다. 여관에서 우체국까진 금방이었고, 우편 비용은 걱정했던 것만큼 비싸진 않았다.

낡은 운동화를 구겨 신은 채 트렁크를 질질 끌고 나왔다. 트렁크도 무거운데 그냥 처분할까 싶다가도, 안에 든 통장이 걸렸다. 이번에야말로 무한궤도가 끝날지 모르니 일종의 보험이었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살면서 이렇게 마음 편한 날이 얼마나 있었을까. 가발이나 화장을 하지 않고 외출하기도 오랜만이었다. 질질 끌다 갈라진 시멘트에 걸려 덜컹이는 트렁크를 한 손으로 번쩍 들었다. 춘자가 향한 곳은 경찰서였다.

마음먹기가 어렵지 그 이후는 일사천리였다. 범행을 자수하고, 살인을 순순히 시인하는 태도에 형사들이 오히려 곤란해 했다. 이렇게 쉬운 걸 죽기 살기로 도망 다닌 과거가 미련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춘자가 기다리는 건 단 하나였다. 죽기 직전까지 깜빵에 처박혀 남자, 권 상사와 영원히 만나지 않는 것.

그러나, 판사는 춘자의 기대보다 낮은 형량을 내렸다. 국선 변호사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입을 꾹 다물고 최고 형량만 기다리던 춘자는 낮은 형량에 실망을 감추지 않았다.

강간미수범을 죽여서? 초범이라서? 범행을 시인해서?

수감복으로 갈아입으니 실감이 났다. 독방이 아닌 건 때론 불행이었고, 때론 다행이었다. 해가 뜨고, 해가 지고, 밤이 되어 취침 시각이 다가올 때면 옆으로 누워 억지로 눈을 감았다.

처음엔 진숙이 떠올랐다. 그 애도 깜빵 안에서 내 생각을 했을까. 내 편지를 읽었을까. 이 개 같은 곳에 뼈를 묻기 전에 한 번쯤은 면회를 와줄까. 그러다 어깨를 감싸 안던 너른 손이 떠오르곤 했다. 춘자씨, 그런 부름은 처음이었다. 조곤조곤 제 할 말은 다 하면서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춘자씨라는 호칭은 바꾸지 않던 남자. 야릇하던 손길을 떠올리며 점점 간지러워 오는 다리 사이를 애써 무시하고 오지 않는 잠을 청했다.

춘자는 평생 면회 소식 따윈 없을 줄 알았다. 지은 죄가 있고, 자신을 보러 올 사람은 기껏해야 진숙 외엔 없을 거라 여겼다. 그래서 면회 소식을 전하는 교도관의 목소리에 얼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뺨 때리고 싶어 할 텐데. 수감자한텐 못 그러겠지. 그 대나무 같은 성정에, 그간 미안했다고 울면서 사과하려나. 면회실로 가는 발걸음은 자못 무거웠고, 춘자는 손가락만 꼼지락대며 유리창 건너 빈자리를 살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춘자가 반가운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는, 엄진숙도 장도리도 아닌 얼굴을 보곤 삽시간에 뻣뻣해졌다. 뚜벅뚜벅 가까워져 오는 발걸음에도 춘자는 의자에서 일어날 생각조차 못했다.

“나 누군지 알지?”

설마 여기까지 쫓아올 줄은 몰랐다. 여긴 교도소고, 춘자는 진숙에게만 자신의 미래를 예고했고, 죄목은 살인이었고, 조춘자의 남은 평생을 걸고 이 남자를 볼 일 따윈 없어야 했다. 그게 최후이자 최선의 선택지였다.

“권, 권 사장님….”

뒤늦게 정신을 차린 춘자가 혼비백산에 빠진 얼굴로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났다. 뒷걸음질을 치다가, 의자에 걸려 넘어졌다가, 면회실을 빠져나가려고 부랴부랴 발을 뗐다.

“면회 시간 아직 남았습니다.”

그를 막아선 교도관은 냉정했다. 아니, 냉정한가? 이상한 기척을 느낀 춘자가 남자와 교도관을 번갈아봤다. 교도관은 권 상사와 잠시 눈을 맞추고 다시 먼 산을 응시했다. 처음부터 한 패였다.

“할 얘기 남았으니까 앉으셔.”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간 것 같았다. 쓰러진 의자를 세우고 다시 앉으면서도 춘자는 교도관들 중 몇 명이 권 상사와 연결됐을까 따위를 생각했다. 그러다 포기했다. 전국구 밀수왕이 어떻게 경찰이나 깜빵으로 넘어가지 않을 수 있었을까. 답은 자명했다. 그 기색을 읽었는지 남자가 담배를 깊이 빨아들였다.

“나랑 독대하고 나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교도소 안 면회실에서까지 수백 번 들은 대사가 똑같이 울려 퍼졌다. 뻔한 말을 잠자코 들었다. 짧은 면회 후 형량이 한참 남은 그가 며칠 만에 출소를 하게 된 원인과 이유를 모를 정도로 순진하진 않았다. 어쩌면 진숙이 저를 데리고 왔을지도 모른다는 미약한 기대는 박수로 저를 환대하는 멀대같은 남자를 보며 산산이 부서졌다. 남자가 끌어안듯 감싸오는 어깨를 힐끗 내려다봤다. 출소자 마중 치곤 화려해 보이는 외제차를 올라타곤 빈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팡팡 두드리던 권 상사가 나직하게 말했다.

“물건 건지던 해녀였다며, 춘자씨.”

춘자는 그 자리에서 혀를 콱 깨물어 버리고 싶었다.


씻고 나와 침대를 훑고, 장지문 밖을 살폈다. 이번에도 창밖을 보며 담배를 뻑뻑 피고 있었다. 테이블 위엔 장도리와 이 계장이 연결된 사진이 놓여 있고, 그에 분을 참지 못한 남자는 얼음통을 쑤석이곤 했다. 춘자는 사진이 흩어진 테이블을 지나쳐 얼음통을, 얼음을 들쑤시던 송곳을 만지작거렸다.

“춘자씨 장도리에 대해서 어디까지 알고 있어?”

얇고 매끈하면서 날카로운 끄트머리. 남자는 고작 이 날붙이 하나로 깡패 새끼들의 숨통을 끊었다.

“권 사장님보단 많이 알지.”

흉내 삼아 얼음통을 푹푹 쑤셔보았다. 남자가 제게 허리를 놀리던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서걱서걱 얼음 부딪히는 소리에 집중하니 남자가 소리 없이 춘자의 뒤로 다가왔다. 자연스럽게 허리에 손을 감고 귓바퀴를 깨물었다.

“장도리가 쥐새끼인 것도?”

엉덩이 뒤로 바짝 붙은 남자의 골반이 외설스럽게 앞뒤로 흔들렸다. 사진이 있으니 진숙이와 화해할 기회도 주어졌다. 그러니 지금뿐이었다. 끝이 뾰족한 송곳을 높이 들어 올렸다. 처음엔 그에게서 등을 돌린 채 목덜미에 송곳을 갖다 댔고, 권 상사가 송곳의 존재를 인지하고 몸을 떼어낸 이후엔 느긋하게 고개를 돌렸다.

“가까이 오면 찌를 거야.”

웃긴 인질극이었다. 스스로 죽을 용기도 없으면서 허세를 부렸다. 송곳을 꽉 쥔 채 파르르 떨리는 손잡이에서 거짓말이 진실로 보이길 바랐다. 내 목을 찔러서라도 남자를 살리고 싶은, 도망가게 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으니까.

“이런다고 춘자씨가 득 볼 게 없는 것 같은데.”

깜빵도 갔다 온 사람이. 아니면 발악이라도 해보려는 건가. 조롱에 가까운 중얼거림은 뻔히 들으라고 한 말이었다. 덕분에 손이 조금 더 움직였다. 따끔따끔한 통증이 살갗을 파고들었다.

“권 사장님 속상하게 해서 미안해. 사실 안 미안해. 그러니까 나 뒤지는 꼴 보기 싫으면 여기서 나가.”

“뭐, 잠깐 옆방이라도 갔다 올까?”

피식 웃으면서 대답하는 꼴이 전혀 진지해 보이지 않았다. 손아귀에 힘을 줄수록 얇은 피부를 가린 통증이 아릿하게 퍼졌다. 잘 찌르면 피로 분수를 터뜨리면서 죽어가겠지. 그 모습을 볼 남자의 얼굴이 어떻게 변할지 궁금하긴 했다.

결국 송곳을 떨어뜨렸다. 그제야 가까이 다가와 춘자를 한 아름 안은 남자가 까진 목덜미 위로 입술을 내렸다. 쯧, 혀 차는 소리와 함께 물컹하면서도 너른 혓바닥이 방울방울 맺힌 피를 훔쳐냈다. 그런 행위마저 기껍다는 듯.

자살 시도마저 맥없이 실패한 마당에 남자는 평소보다 끈질기게 몸을 붙였다. 아예 하나의 몸뚱이가 되려는 것처럼 쉴 틈 없이 들이닥치는 행위가 그 어느 때보다 정력적이었다. 그래서 춘자는, 권 상사와 손을 잡고 몰래 빠져나가던 호텔 근방에서. 제 몸을 감싸 안고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남자의 모습이 어느 때보다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쓰러지는 남자의 인영 뒤로 비열한 웃음을 흘리는 장도리가 보였다. 기다란 엽총을 어깨에 둘러멘 채 조춘자 이 씨발년아, 하고 성큼성큼 다가오는 그림자가 그렇게나 끔찍했다. 장도리를 갈가리 찢어 죽여 버리고 싶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찰 만큼.

354

눈을 뜨고, 씻고, 펜을 들었다. 354라는 숫자가 적힌 노트의 앞에도, 뒤에도 연속되는 수는 없었다. 그저 표시하기 위함이었다. 지금이 어디고, 몇 번을 돌아왔고, 나는 나로서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존재한다는 미덥지 않은 증거였다.

가발의 구르프를 풀었다. 빨간 루즈를 입술에 덧발랐고, 십수 년째 같은 옷을 입었다. 어차피 남자는 춘자를 찾아낼 것이다. 말로 타이르던 때도 있었다. 정을 붙이지 않도록 쌀쌀맞게 굴기도 했다. 도망도 쳐봤고, 자수해서 깜빵까지 가봤다. 다 소용 없었다. 죽기라도 하면 시체까지 찾아내지 않을까. 자조하듯 웃었다. 그렇게까지 곁에 두고 얻는 게 고작 개죽음이어야 수지타산이 안 맞을 텐데.

양장점 직원에게 트렁크를 건네고 따라 들어가면서도 춘자는 발끝을 내려 봤다, 거울을 봤다, 부지런히 재봉틀을 만지는 여자들을 봤다. 모피 코트를 입고 이태리 얘길 해대는 사장을 보면서도 대거리 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저 년이 물건 팔기 싫나, 째려보는 눈에도 팔짱을 낀 채 발밑을 툭툭 차고 있으니 얼마 가지 않아 “사장님, 단속!” 반가운 외침이 들렸다.

또 다시 퀴퀴한 냄새를 풍기는 창고였다. 양아치 나부랭이의 위협은 또 얼마나 무감한가. 고장 난 테이프가 같은 장면만을 되감기 하듯 가까워지는 남자의 발소리도, 입에 물리는 담배도, “나 누군지 알지?” 물으며 담배 한 모금을 내뱉는 것도 잘 짜인 시나리오였다. 대번 권 상사를 알아보고 겁에 질린 조춘자는 없었다. 의자 등판에 비스듬히 기댄 채 남자와 지긋하게 시선을 맞췄다. 침묵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남자는 태연하게 말했다.

“나랑 독대하고 나면 어떻게 되는지도, 얘기 들었지?”

“천팔백 때문에 온 거 아니잖아.”

남자가 멈칫했다. 남자의 눈길과 손짓을 응시하던 춘자가 이어 말했다.

“내가 지갑에 면도칼 들고 다니는 남자는 처음 봤거든, 콘돔도 아니고. 근데 그걸로 여자 이마 까는 짓은 매너 없지 않아? 말 끊은 것도 아닌데.”

여자의 말대로 지갑에서 면도칼을 꺼내려던 권 상사였다. 거기다 여자의 이마를 찍으려고 했던 것도 맞았다. 제 행동을 어떻게 읽어냈는지 기시감을 느낀 직후였다. 갑식이 빠르게 속삭였다. “제가 처리할까요?” 권 상사는 잠깐 고민하고 선선히 턱을 내었다. 곧 칼을 건네받았다. 날이 선 칼날이 서걱서걱 거리는데도 여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했다.

“식구라면 목숨까지 맞바꿔가면서 지키는 권 사장님.”

“내가 그랬나?”

“월남에서 권 사장님 덕 본 식구가 옆에 버젓이 서 있는데, 어떻게 거짓말을 하겠어.”

말없이 칼로 여자의 손목을 슥슥 건드려봤다. 눈동자엔 일체의 흔들림도 없었다. 불안, 격정, 두려움, 공포가 아니라 덤덤함과 초연함까지 내비치는 모습에 여간 이상한 여자가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어차피 분풀이용이었으니 이쯤하고 손목이나 분지를까, 상념에 잠겨있을 때였다.

“어차피 화풀이용잖아. 그-렇게 아끼는 식구들이 뒤통수를 치고 포상금 타 먹고 있으니, 천 팔백은 핑계고 나 하나 잡아다 회치고 싶겠지. 근데 그쪽은 어차피 나 죽이지도 건드리지도 못해.”

웃기는 소리. 근거 없는 소리. 여기서 좀만 힘을 주면 손목 하나는 물론이고 저 모가지도 부러뜨릴 수 있었다. 여자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확신하면서도 칼을 거둔 자신이 기이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내가 월남에서 베트콩들 잡을 때-”

“말은 못 알아들어도 거짓말하는 건 다 잡아냈다고?”

날 선 칼이 곧장 허공을 갈랐다. 조춘자의 목덜미를 가르기 직전, 칼날이 멈췄다. 목숨이 날아갈 뻔한 상황에서도 춘자는 비명 한 번 내지르지 않았다.

“말 끊는 거 싫어한다고.”

“…이번엔 권 사장님이랑 대화란 걸 해보고 싶은데.”

“이번?”

“권 사장님이 나 같은 썅년 살리겠다고 몇 번을 죽은 줄 알아?”

그 뒤로 여자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도저히 믿기 어려운 것이었다. 차라리 지어낸 얘기가 더 재밌을 성싶었다. 그런데도 단순히 거짓말로 치부할 수 없었던 이유는, 거짓말 탐지기로 활약했던 과거가 무색해질 만큼 그 모든 게 진실이라는 직감 때문이었다.


필삼은 이 정체불명 여자가 신기했다. 신선했다. 재미도 있었다.

“나 피해서 도망갔어도 됐잖아. 춘자씨 같은 사람이. 알 거 다 알면서.”

춘자는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들었는지 필삼의 앞주머니에서 담배를 슥 가져가면서도 사납게 인상을 찡그렸다.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문 채 힐끗 턱짓하니 필삼이 피식 웃곤 라이터로 불을 붙여주었다.

“권 사장님은 자기가 얼-마나 끈질긴 사람인지 모르지. 모르지?”

그 뒤론 속사포 같은 푸념이었다. 급기야 자수해서 깜빵까지 갔는데 면회까지 온 그를 보곤 얼마나 치를 떨려 했는지. 춘자는 테이블에 아예 턱을 괴고, 상반신을 틀어가며 삐딱한 자세로 물었다.

“진짜 궁금한 거 하나만 묻자. 왜 그렇게 자기 식구를 챙겨? 등신 천치 하나 살리겠다고 그 지랄 지랄들을 대체 왜 하냐고. 내가 진짜, 권 사장님 하나 때문에 그지 같은 꼴들을 몇 번 본 줄 알아?”

전국구 밀수왕을 상대로 이렇게 예의 없는 여자가 또 어디 있을까. 연초 하나를 물면서도 뚫어질 듯한 시선은 끊어지지 않았다. 어찌나 노려보는지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그러게. 왜 그랬을까.”

“이번엔 그러지 마.”

“춘자씨 두고 도망가라고? 남자가 가오 빠지게.”

짓궂은 미소에 춘자가 싸늘하게 일갈했다. “권 사장님.” 속이 타는지 눈앞에 놓인 위스키 잔을 얼음 없이 들이켰다. 속이 놀랐을까 얼른 얼음 몇 개를 집어주는데 잔이 아니라, 입에 먹여주고 싶었다. 그런 충동조차 기이하다고 여겼다.

“나 장난하는 거 아니야. 내일 장도리 만나면, 아니, 그냥 가지 마.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권 사장님 그냥 여기 있어.”

“춘자씨, 여자가 싸고도는 남자는 매력 없어.”

“권 사장님이 그 새끼를 몰라서 그래. 내 뒤통수 친 걸로도 모자라서 진숙이도, 권 사장님도 몇 번을 죽였는데. 그냥 내가 갈게.”

“그 쥐새끼가 수틀려서 춘자씨 죽이기라도 하면. 그럼 나는 손 놓고 가만히 있나?”

“아 씨발, 왜 이렇게 사람 말을 안 들어!”

첫 독대부터 군천에 도착했다는 연락, 그리고 군천 관광호텔에서 재회하기까지 춘자는 흥분 한 번 하지 않았다. 뭔가에 쫓기듯 손톱을 깨물면서도 여유를 잃거나 목청을 높이는 일은 일체 없었다. 그러니 춘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화를 쏟아내는 건 권필삼으로선 처음 보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정 떨어지는 짓도 해봤고, 멀리도 했고, 도망도 쳤고, 다 포기하고 매달려도 봤고,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어. 이젠 나도 내가 뭘 더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고. 근데 왜 권 사장님까지 나 힘들게 해?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누굴 구하자고 이 짓거리를…….”

그러더니 손바닥으로 자기 얼굴을 감싼다. 옅은 흐느낌 소리가 들린다. 필삼은 위로하는 법을 몰랐다. 더군다나 우는 여자를 달래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살을 섞는 것 말곤 방법을 몰랐다. 우는 소리가 신음이 될 때까지 춘자를 실컷 괴롭히고, 짓무른 눈가에 입을 맞추면서 말했다.

“동업하는 사이에 섭섭하게 굴면 안 되는 거지.”

“이번에 죽으면 권 사장님 탓할 거야.”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데 왜 춘자씨가 화를 내.”

“나 권 사장님 식구도 아니야. 식구 같은 거 진즉에 때려 쳤어. 벌써 10년은 됐을 걸.”

“십 년 넘게 붙어먹고 빼는 게 웃긴데. 어떻게, 혼인신고부터 해야 춘자씨가 안심하려나?”

“누구 과부 만들 일 있어?! 그리고 손은 자꾸 어딜 만져! 한 번 더 하면 진짜 때릴 거야.”

필삼은 작게 웃으면서 하이얀 목덜미에 입술을 비볐다. 춘자는 살결을 어루만지는 손길을 온몸으로 느끼면서도 다른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 남자가 제 말을 안 듣는다면, 다른 쪽을 족치는 게 상책이었다.


뭐든 처음이 어렵다고들 한다. 두 번은 쉽고, 세 번은 더 쉽다고. 춘자에겐 살인이 그러했다.

불러내는 건 쉬웠다. 권 상사가 거래 수익 분배로 단 둘이서 따로 할 말이 있다고 밑밥을 까니 장도리는 예의 그 기분 나쁜 미소를 히죽댔다. “이젠 뭐, 권 상사 말이 누님 말인 그런 사이까지 간 거여? 씨이팔, 웃기는 연놈들일세.” 킬킬대는 남자의 숨통을 끊는 건 굽이진 뒷골목 언저리였다. 칼을 쓸까 하다가, 권 상사가 장도리 패거리와 싸울 때 얼음송곳을 휘둘렀던 걸 떠올렸다. 정확히 심장을 노린 송곳이 살갗을 파고드는데 ‘겨우 이까짓 발악으로 날 죽이겠다고?’ 같은 비웃음 섞인 표정에 머리끝까지 열이 뻗쳤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열을 넘어가고 부턴 세지도 않았다. 복수인지, 원망인지, 화풀이인지 솟구쳐 오르는 감정을 송곳 끝에 끌어모아 마구잡이로 찔러댔다. 목덜미를 찌르고 나선 용솟음치는 핏줄기와 메아리치는 발악이 춘자의 전신을 휘감았다. 넝마가 된 시체를 비닐에 감싸 질질 끌고 가 짙은 어둠이 깔린 항구에 내던졌다. 피 냄새로 후각이 마비된 채 제 몰골을 내려다봤다.

그러다 실소가 터졌다. 웃음이 났다. 핏물이 퍼져 나가는 바닷물을 더 볼 것도 없었다. 실성한 사람처럼 웃으며 부둣가를 걷다 점점 보폭이 넓어졌다. 차츰 뜀박질이 됐다. 발밑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그러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는데, 아픔 따윈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구두를 한 손에 들고, 뭔가에 뒤쫓기 듯 숨 가쁘게 내달렸다. 기이한 웃음소리에 뒤섞인 흐느낌이 바닷바람에 흩어졌다. 506호 앞에서 문을 쾅쾅 두드리며 춘자가 한 생각은 단 하나였다.

‘엄진숙이 알면 어떡하지?’

그 생각을 뿌리치듯 권 상사의 얼굴을 보자 목덜미로 팔을 뻗었다. 피를 뒤집어쓴 채 접질린 발목은 푸르뎅뎅하게 부어올라 절뚝거리는 와중에도 입술을 비비적댔다. 끈덕지게 입을 맞추다 귓가에 끊임없이 속살대는 말은 “내 손으로 끝냈어. 권 사장님도 못한 걸 내가 했다고.”였다.

필삼은 엉망이 된 춘자를 다그치지도, 나무라지도 않았다. 곁에서 떨어지기 싫다는 듯 계속해서 매달리는 춘자가 원하는 걸 선선히 내어주고, 퉁퉁 부은 발목이 무리하지 않도록 신경 쓰고, 울다 지쳐 쓰러진 춘자의 옷을 남김없이 벗겨내 수건으로 핏자국을 조심히 닦아냈을 뿐이다. 그 와중에도 춘자는 혼잣말처럼 중얼댔다. 이제 정말 끝인데, 진숙이 얼굴은 어떻게 보지, 내가 또 사람을 죽였어. 필삼은 그런 춘자의 등 뒤로 돌아가 덜덜 떨리고 있는 아랫배를 감싸 안았다.

“잘했어, 춘자씨. 다 괜찮을 거야.”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청했다. 며칠 후는 3억 다이아 밀수 날이었고, 권 상사가 죽어야 하는 날이었고, 물고기 밥이 되었을 장도리가 기적처럼 되살아나지 않는 이상 무탈하게 지나가야 할 하루였다.

엄진숙에게 어떤 원망을 들어도 좋다. 변명이라면, 그가 미처 몰랐던 진실이라면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러니 이번만은 권 상사가 살아남길 바랐다.


춘자는 제 귀를 의심했다. 506호 문을 부숴버릴 듯 사납게 두드리는 소리가 낯설지 않았다. 아니, 똑같았다. 대체 누가? 장도리의 남은 패거리들? 그새 복수하겠다고 칼을 갈았나? 짧은 시간 혼란에 빠져 있는데, 춘자의 팔을 질질 끌고 가는 손아귀가 보였다. 마치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장지문을 닫는 남자를 뒤늦게 알아챈 춘자가 사나워진 표정으로 문짝을 잡아챘다.

“저거 장도리 아니야.”

“아니겠지.”

“권 사장님 안 싸워도 돼.”

“그래도 위험하겠지.”

이러면 안 됐다. 또 뒈질 것이다. 그간 본 게 있었다. 춘자는 남자의 팔을 잡아 끌었다. 권 상사는 의외로, 순순히 끌려왔다. 어느 새 장지문 안에는 권 상사가, 장지문 밖에는 춘자가 있었다.

“나 같은 썅년 구하겠다고 등신 짓 하는 꼴 보는 것도 지겨워. 그쪽 시체 보는 것도 지긋지긋해. 오늘만큼은 죽게 안 해.”

“나와, 춘자씨. 두 발로 간신히 서 있으면서 뭘 하겠다고.”

“장도리 새끼 없는데도 사장님 죽어버리면? 그럼 내가 지금까지 한 게 뭐가 돼. 입 아프게 말했잖아. 다 얘기해줬잖아.”

“그러니까 비키라고.”

춘자는 제 손에 쥐어진 밀수 지도를 다시 권 상사에게 넘겼다. 으름장을 놓듯 낮게 일갈했다.

“거기서 나오기만 해봐. 살아남든 말든, 권 사장님 얼굴 두 번 다시 안 볼 거야.”

협박이 통했는지 장지문이 닫힐 때까지 필삼은 얌전하게 굴었다. 동시에 부서진 문손잡이에서 우지끈 소리가 나고, 춘자는 급한 대로 의자를 집어 들었다. 그가 내동댕이친 의자가 선두에 있던 인영을 퍽 맞추고 나동그라졌다. 죽은 장도리를 대신해 권 상사의 목을 노리고 온 인물. 춘자는 이마에서 주르륵 흘러내린 피를 손등으로 훔친 엄진숙을 멍청하게 바라봤다.

“너였냐? 조춘자.”

입안까지 터졌는지 피 섞인 가래를 퉤 뱉은 엄진숙이 뇌까렸다. 한 손에는 망치를, 다른 한 손엔 예의 그 식칼을 든 채, 뒤로 장도리네 패거리와 깡패 새끼들이 쏟아졌다. 팽팽하게 대치하고 있는 두 사람을 지나쳐 방 안을 둘러보다 곧장 장지문을 열어젖혔다. 기어코 난장판이 됐다.

진숙은 형형한 기세로 조춘자를 노려보다 권 상사를 둘러싼 아수라장 한 가운데로 성큼성큼 걸어간다. 뒤늦게 정신 차린 춘자가 “너 미쳤어?! 여기가 뭐 하는 곳인 줄 알고 와? 당장 돌아가. 나가라고!”라며 진숙의 팔을 잡아챈다. 그러자 힘 있게 춘자를 내친 진숙이 칼로 춘자의 명치와 옆구리 사이를 푹 찌른다. 그 칼 놀림엔 조금의 망설임도 없다. 방심한 춘자가 신음 섞인 통증을 호소하며 반 발자국 물러난다. 진숙은 자신이 누굴 찔렀는지 뻔히 보고 있으면서도 냉정한 눈이다. 뒷걸음질 치다 접질린 발목까지 말을 듣지 않는다. 옆으로 고꾸라지자 진숙이 내려다본다.

“내가 말했지. 니 아가릴 찢어 버리고 싶다고.”

“너 지금……. 나 찌른 거야?”

“넌 내가 좆같아 보인 거야. 군천도, 먹고 살겠다고 별의별 짓 다 하는 여기 식구들도 다 같잖고.”

“야, 씨발…. 엄진숙!”

춘자의 피가 뚝뚝 흘러내리는 칼을 든 채 다시 걸음을 옮긴다. 권 상사가 싸움판을 벌이고 있는 쪽이다.

“안 그랬으면 니가 장도리, 도리 죽인 새끼 옆에 붙어서 시시덕거리고 있진 않았겠지.”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옆구리가 화끈 거렸고, 손에서 계속 피가 흘러 나왔다. 진숙이 자신을 해쳤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먼저 우릴 배신한 건 너야, 조춘자 이 미친년아.”

냉정하게 돌아선 등을 보니 눈물이 터졌다. 고통 때문에 목소리는 제대로 나오지도 않았다. 환부를 감싸 쥐고 가까스로 몸을 일으키는데, 진숙이 살벌하게 소리쳤다.

“야, 씨팔 그 새끼 꽉 붙잡아둬! 내 손으로 죽여 버릴 거니까.”

그곳에서 권 상사는 홀로 싸우고 있었다. 송곳도 없이 맨손으로 남자를 둘러업고, 내던지고, 팔을 꺾고, 명치를 가격하고, 목을 비틀었다. 그를 향해 달려간 진숙이 망치를 높이 들었다. 등 뒤에도 눈이 달린 건지 필삼은 재빨리 몸을 틀었고, 그대로 진숙의 등을 발로 걷어찼다. 바닥에 나뒹군 진숙이 잔기침을 쿨럭대고, 이번엔 칼을 든 손을 뻗었다. 오른 가슴을 찌르려던 칼이 곧장 붙잡혔다. 다른 팔로 조무래기 하나의 목덜미를 비틀어버린 필삼이 제게 칼을 겨눈 자의 얼굴을 봤다.

“여기 있을 군번은 아니지 않나?”

“입 닥쳐.”

왜 진숙이 이 자리에 있는지 알 길이 없는 필삼이 당황하는 사이, 진숙은 여전히 형형한 눈빛으로 칼 손잡이를 꽉 쥐었다. 어찌나 힘을 줬는지 그 팔뚝을 잡아챈 필삼의 관자놀이에도 핏줄이 섰다. 진숙이 다른 손에 든 망치를 휘두르자 필삼은 기절한 조무래기 하나를 끌어왔다. 퍽! 소리와 함께 깨진 머리통에선 피가 줄줄 흘렀다. 축 처져 짐 덩이가 된 몸뚱이를 나머지 놈들에게 내던지고, 진숙을 힘으로 쓰러뜨렸다. 팔목을 가볍게 비틀자 식칼이 곧장 진숙의 목덜미로 향한다. 이제 칼날을 들이미는 건 권 상사고, 그 칼을 가로막는 쪽은 진숙이었다. 절뚝이며 장지문을 잡고 선 춘자가 희게 질린 얼굴로 뻣뻣하게 굳었다.

팽팽한 기 싸움에도 조금씩 밀리기 시작한 진숙이 악에 받친 듯 소리쳤다.

“이 새끼가 오고부터 되는 일이 없었어. 도리는 바다에서 뒈졌다 그러고, 조춘자 넌 씨발, 이딴 놈한테 정신 팔려서 나는 안중에도 없고! 이 새끼가 죽인 거 아니면 도리는 누가 죽였는데? 도리 억울하게 죽은 건 누가 풀어주는데? 죗값은 치러야지, 이 금수만도 못한 새끼야.”

누구를 말려야 하지.

권 상사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진숙을 말려야 하는 게 맞았다. 그런데 그다음은? 내가 장도리를 죽였다고 해야 하나? 그럼 진숙의 칼날은 어디로 향하겠는가?

그럼 권 상사를 말리면 어떻게 되는가? 엄진숙이 권 상사를 죽이고 마는가? 그게 가능한가? 이번엔 ‘진숙’이 권 상사를 죽이는 건가?

그러다 필삼의 정강이를 걷어찬 진숙이 순식간에 자세를 뒤바꿨다. 뒤바꾸려 했다. 꿈쩍도 하지 않던 권 상사가 망치를 멀리 내던진 걸로도 모자라 진숙의 목을 한 손으로 잡아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육식동물 흉내를 내보려고 발악하는 초식동물에게 코웃음 친 후 가뿐하게 목덜미를 낚아채는 맹수와 같았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을 전부 본 춘자가 빠르게 다가왔다. 서슬 퍼런 눈빛이 진숙에게서 춘자로 돌아갔다.

“두 번 말 안 해. 놔.”

“얘 건드리면 내가 당신 가만 안 둬.”

마주하는 눈빛도 피하지 않았다. 팔뚝을 잡아당기는 힘마저 보통이 아니었다. 이 여자는 진심이었다. 어이가 없어진 필삼은 춘자를 향해 살벌한 투로 말했다.

“목적과 행동이 다르잖아. 춘자씨, 나 살리겠다며.”

“이런 식으론 아니야.”

“나 뒈지는 꼴 보는 것도 지겹다며.”

“이 자리에 엄진숙은 없었어! 나도 처음이라고!”

기가 찼다. 엄진숙의 목을 쥔 손아귀에 힘이 실렸다. 기도가 막히자 진숙이 컥, 컥 숨도 제대로 쉬지 못 한 채 얼굴을 새빨갛게 일그러뜨렸다. 춘자의 손은 그보다 빨리 움직였다. 남자에게 손을 댄 건 처음이었다. 그것도 뺨을 친 건 아마도, 지난 일생을 통틀어 최초일 것이다. 살과 살이 맞부딪히는 소음에 일순 사방이 고요해졌다.

하, 탄식과 같은 한숨이 샜다. 권 상사의 손아귀에서 해방된 진숙이 옆으로 쓰러졌다. 벌겋게 손자국이 남은 목을 감싸 쥐며 기침을 해대는 동안 춘자가 성치 못한 몸을 끌고 가 진숙을 살폈다. 건드리지 마, 씨발. 그런 욕설만 없었어도 진숙의 등을 보듬었을 것이다.

그래도 춘자는 다시 섰다. 여전히 진숙에게 쑤셔진 뱃가죽에선 피가 흘렀고, 퉁퉁 부은 발목은 서 있는 것조차 어려웠으며 조금 전까지 진숙의 목을 조른 남자의 손아귀가 제 목을 조를 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잠깐 눈 뗐다고 또 다쳤네, 춘자씨. 내가 매일 옆에 붙어 있을 수도 없고.”

“쟤한테 손대면 당신 가만히 안 둔다고 했지. 구라 같았어?”

“춘자씨 다친 것도 저 여자가 그런 거 아니야? 저걸 왜 싸고돌지. 무슨 가치가 있다고.”

“말 그딴 식으로-”

실없는 대화는 아니었다. 그 난장판 한복판에서 태평하게 말을 주고받은 건 몇 번 없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권 상사는 나름대로 지쳐 있었고, 그를 막아선 사람은 조춘자고, 그는 죽어선 안 되지만 그를 죽이려 하는 진숙은 막아야 하는 개 같은 상황이었고, 그 와중에도 춘자가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사실에 신경이 곤두서 있었고, 그렇게 서 있는 게 고작인 여자가 제 뺨을 얼얼할 정도로 후려갈긴 것도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정신이 든 진숙이 칼을 고쳐 잡고 필삼에게 달려들었을 때, 필삼은 춘자에게서 한 순간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진숙은 건드리지 말라면서 저에겐 죽지 말라니, 모순된 부탁이었다. 한쪽이 죽어야 한다면 춘자는 누굴 골랐을까. 답은 뻔히 나와 있었다.

“권 상사 이 새끼가 도리를 죽인 거야.”

그러면서 진숙이-도리를 죽인 춘자처럼- 필삼의 왼 가슴을 두 번, 세 번, 네 번 푹푹 찔러댈 때 춘자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진숙에게 힘껏 몸을 부딪혀 바닥을 뒹굴었다. 흐느낌 섞인 통곡 소리와 주먹이 뒤섞이고, 얻어맞은 진숙의 코와 입가에선 피가 났다. 다시 진숙이 춘자의 위에 올라타 주먹을 날렸다. 눈물범벅으로 이미 흉해진 얼굴에 피 터지는 통증이 날아왔다. 그렇게 한참을 엎치락뒤치락하다 춘자가 진숙의 뺨을 날렸다. 어찌나 세게 때렸는지, 진숙의 몸뚱이가 반동으로 나가떨어질 정도였다. 춘자가 몇 발자국 옆에서 피바다가 된 필삼을 초점 없는 눈으로 응시했다.

부은 눈가를 타고 눈물이 주르륵 흘러 내렸다. 피가 맺히도록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다, 쩍쩍 갈라진 목소리로 읊었다.

“내가 그랬어.”

반쯤 상반신을 일으켜 피 섞인 가래를 토하던 진숙이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었다. 대답을 재촉하는 시선에 춘자가 이어 말했다.

“장도리 새끼. 권 상사가 아니라 내가 죽였다고.”

그 뒤로 몇 번 더 입을 움직였다. 장도리는 내가 죽였지만, 걔가 이 계장과 어떻게 붙어먹었고, 3년 전 밀수 신고한 놈이 그 새끼였고 등을 읊었다. 그런데도 진숙은 묵묵히 몸을 일으켰다. 남자의 선혈이 맺힌 칼날이 곧장 춘자를 향했다. 아마도 진숙은 춘자의 뒷말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엄진숙은 늘 변함없는 년이니까.

사랑하는 사람 손에 죽는 건 어떤 기분일까, 권 사장님.

춘자는 미처 묻지 못한 혼잣말을 되뇌며 눈을 감았다.

355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쓸어 보았다. 진숙에게 얻어맞은 부위의 통증이 생생했다. 거기다 칼까지 맞았다. 옷 아래를 매만졌다. 상처 하나 없이 멀끔했다. 통증이 올라오던 곳도, 다친 다리도, 얻어맞은 얼굴도 처음부터 없었던 일 같았다. 권 상사는 칼에 찔려 죽었는데, 자신은 멀쩡하게 살아 있었다. ‘또’ 살아 있었다.

양 팔로 눈두덩을 가렸다. 숨을 크게 들이 쉬고, 작게 흐느꼈다. 그러다 벌떡 일어나 화장대를 노려봤다. 베개를 던지고, 이불을 걷어찼으며 싸구려 화장품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여기저기 나뒹굴었다. 그러다 소리를 질렀다. 줄기차게 얻어맞은 것처럼 온몸이 아픔을 호소하는데 할 수 있는 거라곤 방음도 제대로 되지 않는 촌스러운 꽃무늬 벽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설움을 토하는 것뿐이었다. 왜 울음이 나오는지도 알 수 없었다. 진숙이 불쌍한 건지, 권 상사가 불쌍한 건지, 제 처지가 불쌍한 건지. 무릎을 세워 두 팔로 끌어안은 채 낮게 흐느꼈다. 한참 후에야 춘자는 이부자리에서 벗어났다.

벌게진 눈가를 꾹꾹 누르던 춘자는 다시 권 상사를 만난다. 밀수 얘길 하고, 군천에 내려가고, 호텔에서 재회한다. 죽지 않은 장도리를 보면서 역겨움을 억지로 가라앉힌다.

살인은 괜찮았다. 두 번도 해냈는데, 세 번이 어려울까 싶었다. 그런데 저걸 죽이면 진숙이가 돌아버린다. 어금니를 꽉 문다. 남은 진숙과 권 상사를 두고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안다’. 그러니 장도리는 죽지 않는 게 나았다. 뼈아픈 후회고, 두 번 겪고 싶지 않은 선택지였다. 자신의 위선이 역겨워 토기가 치민다.

다시 호텔이다. 씻고 나와서도 구태여 수건으로 머리를 감싸지 않는다. 가운도 다 풀어헤친 채 권 상사를 본다. 권 상사는 예정대로 장도리와 춘자의 관계를 의심하며 긴 다리를 움직인다. 사진이 놓인 테이블을 지나 권 상사의 등 뒤에 선다. 인기척을 느꼈음에도 권 상사는 얼음송곳으로 얼음통을 푹푹 찌르기만 한다.

춘자는 필삼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묻는다.

“만약에, 권 사장님 생각이 맞으면 어떡할 거야?”

얼음통을 뒤적이던 소리가 멎는다. 필삼은 제 등에 얼굴을 묻고 있는 여자를 슬쩍 돌아본다. 허리를 감싸 안은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친다.

“나 속상하게 하면 안 되지, 춘자씨는.”

“한 식구라서?”

“하고 싶으면 해 봐. 춘자씨가 내 등에 칼 꽂으면 어떻게 될지, 나도 내가 궁금하거든.”

손아귀 안쪽에 숨겨둔 면도칼은 권 상사가 춘자를 처음 만날 때마다 쓰던 것이다. 권 상사는 ‘이미’ 알고 있다. 춘자가 작게 한숨을 내쉰다.

“나라면 쥐새끼랑 붙어먹은 년한테 화낼 텐데. 배신감에 치가 떨릴 거야. 죽여 버리고 싶겠지.”

필삼이 허리에 감긴 팔을 풀고 뒤를 돌아본다. 물기를 머금은 짧은 머리카락, 가슴골부터 다리 사이까지 훤히 보이게끔 실컷 풀어헤친 가운. 지긋하게 내려다보는 시선에 춘자 역시 눈을 피하지 않는다.

“구라 같진 않은데.”

“다른 사람이 조지는 것보단 내가 하는 게 낫지 않나 싶어서.”

피식 웃더니 쪽 하고 입 맞추는 필삼에게선 희미한 담배 냄새가 난다. 춘자의 손 하나를 잡아 끌어 제 목덜미로 가져간다. 면도칼을 쥔 쪽이다. “이거 갖고 내 목은 긋겠어?” 비웃으며 칼날을 멀리 던져버리곤 얼음송곳을 쥐여 준다. “여길 찔러야 하는 거야. 깊게.” 송곳을 쥔 손이 다시 필삼의 목을 겨눈다. “아니면 여기나.” 그러면서 춘자의 손이 필삼의 왼쪽 가슴으로 내려간다. “여긴 한 번에 안 되니까 여러 번 찔러야 해. 알지?” 춘자가 마른침을 삼킨다. 송곳과 옷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진다. 날카로운 끄트머리가 눌리자 남자의 단단한 몸이 손끝에 생생하게 와닿는다.

한 발 늦게 춘자가 손에서 힘을 푼다. 놓친 얼음송곳이 두 사람 사이로 추락해 나뒹군다. 필삼은 겁에 질린 춘자에게 손을 뻗는다. 겁먹지 말라는 듯 촉촉하게 젖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시금 입을 맞춘다. 진득한 키스를 이어가면서 겨우 입술이 떨어지자 속삭이듯 말한다.

“뭐가 그렇게 무서워. 난 춘자씨한테 죽는 거면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할 수 있으면 해보셔. 그 말을 끝으로 필삼이 멀어진다. 얼어붙어 있던 몸이 뒤늦게 반응한다. 춘자는 따지듯 묻는다.

“어떻게 그래? 나 때문에 죽어도 괜찮다고?”

지포라이터 켜는 소리다. 익숙한 담배 냄새에, 다시 저를 감싸 안는 팔뚝이 보인다. 가운 사이로 손을 넣고 후, 담배 연기를 뱉는다.

“듣고 싶은 말을 해줄게. 무슨 말을 원해.”

“아냐.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마. 권 사장님 나한테도 이러지 말고. 식구도 됐고, 죽지도 말고.”

“난 내가 왜 이러는지 아는데.”

춘자가 입술을 꾹 다문다.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지니 급하게 버둥거리는데, 남자의 팔뚝 안에 갇힌 몸뚱이는 옴짝달싹도 하지 않는다.

“춘자씨, 정말 몰라? 내가 왜 이러는지.”

흩어지는 담배 연기에 춘자가 고개를 돌린다. 그것만 기다렸다는 듯 두 입술이 맞물리고, 밤은 깊어진다.

356

춘자는 권 상사를 생각한다.

‘이제 나 새끈해 보이지도 않겠네, 응?’

‘또 우네….’

‘춘자씨. 내 이름 처음 불러줬네. 다음번엔 침대 위에서도 한번 해 봐.’

‘이제야 표정이 좀 낫네. 방금 전까진 울 것 같았는데.’

‘내 시체를 보는 감상은 어떤데? …그래? 그럼 됐네.’

그리고 조금 전 죽어버린 남자의 말을 떠올린다.

‘춘자씨, 정말 몰라? 내가 왜 이러는지.’

그러니 권필삼 당신은 똑똑한 게 아니다. 멍청하고, 바보 같은 남자 하나가 저 때문에 죽었다는 걸 상기해본다. 등신같이, 그런 남자를 제 손으로 죽이려고 했던 자신도 똑똑하지 못하다. 똑같이 멍청하고, 바보 같다.

실로 오래간만에 춘자의 눈동자가 생기를 되찾았다. 다시 한번 권 상사를 구할 수 있는 기회가 돌아왔고, 춘자는 몇 번이고, 몇 십번이고, 몇백 번이고 그를 구하고자 할 것이다. 두 사람이 살아남고, 함께 웃을 내일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리라.

춘자는 권 상사가 자주 물던 럭키 스트라이크 한 갑을 샀다. 담배 가게 앞에서 곧장 불을 붙인 연초에선 권 상사의 달콤씁쓸한 향이 묻어났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 중 일부: 그런데 동일한 것의 영원 회귀라는 이 사상에 있어서 ‘동일한 것’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영원 회귀 사상은 밝기도 하고 어둡기도 하다. 곧 동일한 것의 영원한 회귀를 희망도 기쁨도 없는 무의미한 삶의 순환이라고 보면 영원 회귀 사상은 니힐리즘(허무주의)의 극단적 형식이 된다.

(중략)

삶의 한순간일망정 한없이 충실하게 사는 것, 이 삶의 영원 회귀를 바랄 수 있을 만큼 충실하게 사는 것, 여기에서 극단적인 허무주의를 초극하는 운명애가 생기고, 영원 회귀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삶이었던가, 그렇다면 다시 한 번!” 하고 참기 어려운 것을 참고 긍정하는 것, 이러한 결단에 의한 허무주의의 돌파, 자기 해방이야말로 영원 회귀 사상에서 귀결되는 참된 자유이다. 이렇게 해서 허무주의의 극단적 형식인 영원 회귀 사상은 ‘삶의 최고의 긍정 형식’이 된다.


week9 <영원 회귀>

주 댄버스 (@xxxowo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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