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
week4 / immersed
악몽을 꾼 듯했다.
이게 악몽이 아니라면, 대체 왜 이 윤회는 그의 죽음을 양분 삼아 흐르는지.
스스로의 의문에 답을 구하지 못한 춘자는 일어난 자리에서 마른 세수를 했다. 하나의 차원 속 그가 또 죽었다. 그리고 그 세계의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 사실이 오늘따라 온몸에 사무쳤다.
이제 그녀에게는 달리 계획이 없었다. 과부하가 오고 난 후, 모든 것이 연소된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것은 정해진 각본뿐이었다. 그러니 불가항력으로 이를 따를 수밖에. 가발을 쓰고, 미리 챙겨둔 옷을 입고, 트렁크를 챙긴 다음에 양장점으로 가는 거야. 춘자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예쁘게 웃고 있는 거지. 그가 올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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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관계가 아니라, 이 관계란 거 알지?”
남자의 저음이 기분 좋게 울렸다. 수평과 수직. 지랄맞은 칼이 그의 심장을 수직으로 도려내는 모습이 아직도 눈 앞에 생경하다. 춘자는 애써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알죠.”
이번엔 계획 같은 건 없었다.
“그래도 요거는 퍼지고,”
그저 살아 숨쉬는 당신의 모습으로 만족하려고 했다.
“요거는... 깊잖아.”
몇 마디 더 있었던 것 같은데. 춘자는 기억나지 않는 기억은 굳이 떠올리지 않기로 했다.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검정 셔츠의 단추를 툭툭 풀렀다. 공허했다. 심장이 뚫린 건 저 남자인데, 속이 텅 비어버린 건 저 자신이었다. 어쩌지, 살아 있는 당신만으로는 만족이 되지 않았다.
“춘자 씨.”
이전엔 늘 저를 내려다봤던 남자가 자신을 올려다보는 모습은 은은한 쾌감을 동반했다. 춘자는 그대로 허리를 숙여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췄다. 권 상사도 잠시 눈을 감고 뜨더니, 저보다 큰 키를 자랑하듯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목덜미를 물었다. 남자가 저에게 파묻히자 춘자는 그의 단추도 기다렸다는 듯이 하나하나 풀렀다. 그녀의 몸은 회귀한 적 없다는 듯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예민하게 반응했고, 권 상사는 그게 귀엽다는 듯 웃었다. 아직 입 안에 얼음의 냉기가 남아있는 듯 했다. 어쩌면 저를 껴안는 그의 체온이 너무 높아 입안의 미미한 흔적마저 냉기로 느껴졌을지도. 춘자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옷자락이 힘없이 나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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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로병사는 고통이다. 그리고 끝없는 윤회는 괴로움이다. 춘자는 한 종교인이 했던 말을 곱씹었다. 제 옆에 잠든 남자를 바라보고는 땀에 보기 좋게 젖은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당신과 내가 바뀌었다면 어땠을까. 춘자는 필삼이 자신의 위치에 있었다면 이런 걱정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라 추측했다. 당신은 나보다 훨씬 똑똑하고, 차분하니까. 나 같은 거 살리는 건 일도 아니었겠지. 그런데 왜 자꾸 멍청한 짓을 하는 거야.
처음에는 그저 그의 별난 성정 탓이라 생각했다. 두 번째로는 단순한 의리, 세 번째로는 식구라서. 라는 이유가 그의 희생에 동반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몇 번의 추정을 전부 비웃기라도 하는 듯 맥없이 제 숨통을 끊었다.
정말 쓸모없는 여자 하나를 위해서.
“춘자 씨.”
그가 기척에 반응한 듯 눈을 떴다.
“안 자?”
“으응... 자야지.”
춘자는 힘없이 웃었다. 권 상사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그녀를 응시했다.
“춘자 씨 눈 속에 맺힌 게 내가 아닌 것 같네.”
“뭐?”
“⋯⋯아니야.”
남자는 여자의 눈가의 이슬을 한 손으로 슥 쓸었다. 춘자는 그제서야 제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신화의 어떤 신은 눈물을 흘리다 못해 피가 눈물로 흘렀다는데, 아직 자신의 눈물은 그를 위해 마르지 않은 모양이다. 권 상사는 아무 말도 않고 그녀를 품 속으로 끌었다.
따뜻하다. 춘자는 판판한 그의 가슴팍에 머리를 대었다. 그저 이렇게 시간이 멈췄으면. 춘자는 어쩌면 이 윤회는 그를 살리기 위해서가 아닐 수도 있다는, 불결한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을 애써 무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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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동안 지어낸 얘기가 고작 그거냐?”
여러 번 들은 말이라 이제 아무렇지도 않다. 춘자는 자신이 진숙이었더라도 자신을 믿지 않았을 것이라며 스스로를 애써 달랬다. 권 상사가 비정상이었던 거지, 이게 정상인 거야.
“내가 사람 찌르고 도망 다니는 년인 거 알았으면 네가 나 같은 썅년 상대나 해 줬을 거 같애?”
전과 같은 질문인데 마치 청자가 달라진 것 같았다. 마치 누군가에게 겹쳐 말하는 것 같은⋯⋯. 이대로 계속 말하면 진숙이가 칼을 겨누겠지. 만악의 근원은 장도리였다. 장도리를 해결하려면 지금 진숙을 설득해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잿더미가 되어버린 머릿속에 한 줌의 빛이 스며들어오는 것 같았다.
“미안해.”
춘자가 속을 삼켰다. 내가 왜 미안해야 해, 라는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참아야 했다.
“내가 너 배신할 사람 아니라는 거 네가 제일 잘 알잖아.”
생선 내장을 퍼 나르던 진숙이 행동을 멈췄다. 진숙의 한숨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이 정도 말로 넘어오지 않겠지. 진숙이 삽을 내려놓고 춘자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진숙아.”
진숙은 말 없이 춘자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단추가 풀린 앞섶이 어쩔 줄 몰라 허둥댔다. 칼이 아니네. 춘자는 진숙의 눈을 바라봤다. 그렇다면 희망이 있는 걸까? 춘자는 한 발자국 더 뒤로 가기로 마음 먹었다.
“나한테 시간을 줘.”
지금은 하찮은 자존심보다는 그의 목숨을 살리는 것이 더 중요했다.
“내가 다 증명할게.”
진숙의 눈이 풀리는 것이 보였다. 장도리를 처리하려면 진숙의 신뢰를 받아야 했다. 하루만에 오해를 풀 순 없겠지만, 이 정도면 꽤 괜찮은 진보였다. 씁쓸한 말이지만 억척이가 상어에 물리고 나면 진숙은 자신에게 제 발로 다시 올 것이었다. 그러니 빨리 증거를 얻어내야 했다. 어떻게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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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빨간 선혈이 욕실 바닥을 가득 채운다.
피가 너무 많이 나, 피에 잠겨버릴 것만 같았다. 춘자는 여전히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로 덜덜 떨리는 손을 부여잡는다.
“권필삼.”
바닥에 쓰러진 남자를 향해 손을 뻗는다. 남자의 헐떡이는 숨조차 천천히 잦아들고 있었다.
“춘자, 씨.”
권 상사가 입을 연다. 그런 그의 말을 듣기 위해 그의 가까이로 다가간다.
“이제 나를 포기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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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자 씨, 괜찮아?”
꿈이었다.
권 상사가 식은땀에 젖은 그녀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춘자는 잠시 제 눈 앞의 남자를 보더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안아줘...”
이내 곧바로 그의 품 속으로 무너졌다.
단단하고 따뜻한 품. 안정감 있게 뛰는 맥박. 작게 들리는 그의 숨소리. 이 모든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권 상사는 예상 못했다는 듯 살짝 놀란 눈으로 그녀의 등을 어루만졌다. 아직 살아있어. 춘자는 스스로를 진정시키려는 듯 속으로 같은 말만 반복해 되뇌었다. 그러나 이전의 기억이 방해하려는 듯 자꾸만 밀려왔다.
‘춘자 씨, 괜찮아.’
마치 그 때처럼 이대로 내 품 속에서 죽어버릴 것만 같아서. 심장이 더 이상 뛰지 않고, 따뜻한 품은 차게 식어버리고, 당신의 눈이 더 이상 나를 향하지 않는, 그런 일이 일어나 버릴 것만 같아서. 춘자는 헉, 소리를 내며 그를 밀쳤다.
“내가 괜찮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
필삼은 그런 춘자를 보고는, 아무렇지 않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안 좋은 꿈을 꿨나 보네.”
필삼은 자리에서 일어나 라이터를 집었다. 담배를 입에 물고는 호텔 밖으로 나가려 하는 듯했다. 숨을 고르던 춘자는 그런 그를 따라 일어섰다. 나가는 그의 팔을 붙잡았다.
“잠깐, 바람만 좀 쐬고 올게.”
그녀를 달래는 그의 목소리에, 춘자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나가려는 듯한 그의 모습에 춘자는 무모하게 그의 등과 허리를 팔로 껴안아 붙잡았다.
“나가지 마.”
“...”
“그냥, 여기 있어...”
권 상사는 내가 졌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안아 들었고, 입술로 그녀를 옭아매었다.
“으응, 사장님.”
“이제 좀 괜찮아졌네.”
“장도리, 있잖아, 앗.”
필삼이 목덜미에 입을 맞추자 춘자가 간지럼을 타는 듯 웃었다. 자국 남겠네.
“장도리가 왜?”
“뭔가 좀 찝찝해. 걔가 예전에 내 뒤통수를 친 적도 있었거든.”
“그래?”
권 상사는 춘자를 그대로 침대 위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춘자는 영문을 몰라 눈을 깜빡였다.
“그럼, 정말 나가야겠네. 확인할 게 생겨서.”
“내 말 하나만 듣고 나가는 거야?”
권 상사가 웃었다.
“하나‘만’이 아니라 하나‘도’”
춘자는 놀란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고 있었어?”
권 상사는 말 없이 미소만 짓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 이번 생의 그는 퍽 다정한 것 같다는 생각을 흘려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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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일에 들어오기만 하면, 억척이네 수술비랑 병원비는 내가 권 사장한테 얘기해서 어떻게든 땡겨 볼 수 있어.”
진숙이 이전처럼 제 앞에 마주 앉아 있다. 윤회를 거듭할수록 춘자는 자신도 모르게 무언가를 하나씩 내어놓고 있었다. 처음엔 억척이의 다리, 그 다음엔 그녀의 자존심⋯⋯.
“장도리네 일하던 조건으로는 못 해.”
“당연하지.”
“들여오는 물건에 따라 거기에 맞게 받을 거야. 물건도 다 뜯어서 확인할 거고.”
진숙이의 말투가 이전보다 덜 퉁명스러워진 것 같은 건 기분 탓일 테다.
“전에 일할 때보다 훨씬 더 벌게 해 줄게.”
“일단 억척이네 병원비부터 준비해 주면 움직일 거야. 그전엔 절대 안 움직여. 그리고... 그 권 사장이라는 사람하고 장도리, 너 만날 때 나도 같이 만나.”
아니, 기분 탓이 아닌가. 춘자는 옅게 웃었다. 진숙은 그런 춘자의 눈을 바라봤다.
“아직은 너 못 믿어.”
진숙이 일어나 다방을 나갔다. 그래, 예전보단 나아졌잖아. 자존심은 원래 버려야 했던 거야. 결국 다 내가 문제였던 거지. 춘자는 뭔가 씁쓸한 기분을 억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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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녀 하나가 다쳤다고?”
“응.”
권 사장이 옷깃 단추를 여몄다. 춘자는 잠이 여전히 쏟아지는 듯, 비몽사몽한 상태로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돈이 필요하다는 거네. 얼마면 되는데.”
춘자가 권 상사의 손을 쥐고 그 위에 손가락으로 글씨를 썼다. 그 모습을 본 권 상사가 귀엽다는 듯 웃었다.
“춘자 씨.”
권 상사가 반쯤 잠든 춘자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너무 많이 요구하시는 거 아닌가? 사업하는 사람끼리.”
“우응...”
그래도 당신은 들어줄 거잖아, 춘자가 생각했다.
“알겠어요, 오늘 새벽에 물건 들어오니까, 푹 쉬고. 이 체력으로는 손가락 하나 까딱 못하겠네.”
“이게, 누구, 때문인데⋯⋯.”
옷을 다 챙겨 입은 권 상사가 나갈 채비를 했다. 춘자가 어딜 가냐는 듯 웅얼거렸다.
“춘자 씨 덕분에, 쥐새끼 하나 솎아내서.”
눈이 번쩍 뜨였다.
“장도리?”
그가 협탁 위에 사진 몇 장을 내려놓았다. 춘자는 보지도 않고 그게 무슨 사진인지 알았다. 이전보다 훨씬 빨리 사진을 얻었다. 좋은 일이었다.
“내일 시간은 바꾸고.”
이심전심이었다.
권 상사가 나가기 무섭게 춘자는 후들거리는 몸을 이끌고 사진을 손에 쥐었다. 이제 빨리, 진숙이한테 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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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이 시간에...”
춘자는 사진을 들어 보였다. 진숙은 사진을 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브로커 삼촌 본 건 배에서 빠져나와서 만난 게 마지막이었어. 브로커 삼촌이 직접 장도리 한 번 더 만나겠단 통화만 했었고.”
“그걸 왜 이제 얘기해?”
“너 이 사진 아니었으면 내 말 듣기라도 했겠어?”
진숙이 한숨을 내쉰다.
“장도리가 내 뒤통수까지 치고 저러고 사는 건 맞는데, 3년 전에 장도리가 어땠는진 너도 알고 나도 알아. 걔 내 앞에서 숨도 살살 쉬던 애야.”
3년 전의 장도리는 믿으면서 왜 3년 전의 나는 안 믿어줬는데?
턱 끝까지 차오른 말을 춘자는 애써 삼켰다. 지금 서운한 감정 따질 시간은 없었다. 이러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권 상사가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내 말이, 네 앞에서 숨도 살살 쉬던 애가 어떻게 이렇게까지 변할 수가 있었을 것 같냐?”
춘자가 심호흡했다.
“장도리랑 같이 있는 사람을 봐.”
이계장.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당신들만 아니었다면, 나도 진숙이도, 어쩌면 권 상사도, 그렇게 끔찍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때 사건 나고 세관에서 금 찾았단 얘기 못 들었지? 근데... 우리가 빠뜨린 자리에도 그때의 금은 없어. 세관까지 속이고 물건 빼돌릴 수 있는 사람. 누굴 거 같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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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가.
기다리고 있던 권 상사가 고무보트를 타고 들어온 춘자를 향해 박수를 쳤다. 춘자는 스카프가 묶인 가방을 그에게 내밀었다.
“춘자 씨가 내 생각보다 훨씬 야무지네.”
권 상사가 가죽 케이스를 집어 들었다. 안에 뭐가 들었는지는, 이미 알았다.
“다음 번에 이런 상황 있을 때도 수고 좀 해 줘.”
다음이 있다면야, 얼마든지. 춘자는 푸른 사파이어가 박힌 목걸이를 받아들었다. 나는 결국, 다시 이 목걸이를 받았구나.
“권 사장님.”
그의 눈을 마주했다.
“나 이제... 그쪽 식구인가?”
권 상사가 웃으면서 그녀를 바라봤다. 그가 성큼, 한 발자국 더 다가오더니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당연하다는 듯이 입술이 닿았다. 옆에, 사람 있는데, 라고 말하려던 춘자는 애써 먼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애꾸를 보고 웃음이 터졌다.
“노린 거지? 응? 사장님.”
“나 봐요.”
허리에 두르지 않은 손으로 바닷물에 젖은 춘자의 손을 움켜쥔 필삼이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나 피곤해서, 장 사장이랑 저녁에 못 만나겠어엉...”
“더 피곤해질 텐데.”
“농담도 참.”
“농담처럼 들리는구나, 춘자 씨는.”
무섭게 웃는 그의 모습에, 춘자는 못 이기겠다는 척, 말을 흘렸다.
“그럼 저녁에 클럽 가지 말자. 나중에 만나자구 해도 되잖아. 어차피 장도리 그 새끼 만나서 좋을 게, 뭐가, 있다고, 읏.”
장도리의 심기를 거스른 게 그 일이었다. 일차적으로 그 때만 피하면, 장도리가 권 상사를 치려는 결심을 한 것을 늦출 수 있다. 그럼 권 상사나 진숙 둘 중 하나가 장도리 새끼를 먼저 처리하겠지. 당신이 내 품 안에서 살아 숨 쉴 수만 있다면 뭐가 문제겠어, 안 그래? 권 사장님. 춘자가 그의 눈을 다시 한 번 응시했다.
“나 추워, 호텔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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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자 위에 놓인 돈 봉투를 응시했다.
억척이 수술비.
진숙이는 아마 저걸 전해주다가 이계장을 만났을 것이다. 그렇다면 제가 먼저 만나야 했다. 춘자가 돈을 집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자, 필삼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
“나가려고?”
언제 깼대. 잠귀 하나는 귀신같이 밝았다.
“응, 억척이 수술비 전해줘야지.”
“아직 저녁인데, 자고 가고 내일 아침에 전해줘도 되잖아.”
춘자는 가만히 잠에 취한 그를 바라보았다. 윤기 나는 검은색 머리카락, 야망이 가득한 눈, 아름다운 얼굴. 참 잘생겼단 말이지, 이렇게 많이 봤는데도. 춘자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이런 건 예상 못했다는 듯, 눈을 반쯤 감고 있던 권 상사가 놀란 듯 눈을 떴다. 춘자도 그제서야 자신이 여러 번의 회차 동안 이런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지금 나가야 해.”
“...”
“괜찮아, 사장님. 우린 앞으로도 계속 볼 거잖아. 안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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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천 의원 앞.
춘자는 억척이 남편에게 수술비를 쥐어준 뒤 한숨을 내쉬었다. 앞에 주차된 차는 필시 이계장의 것일 터.
“할 말 있으면 하시죠, 쥐새끼처럼 몰래 훔쳐보지 마시고.”
장도리 이 새끼가 시한폭탄이었다. 지금이야 권 상사가 장도리를 자극하지 않았으니 몰라도, 권 상사가 장도리를 처리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고, 장도리를 처리한다 해도 이계장이 어떻게 나설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니 지금 가장 깔끔한 건 이계장이 장도리를 처리하는 것이었다.
“알만큼 다 아시는 거 아니까, 허심탄회하게 얘기하세요.”
“너 때문에 물 대차게 먹은 거 알 텐데, 뭐 약이라도 올리려는 것이여?”
“장도리, 말이에요.”
“장도리?”
이계장이 미간을 찌푸렸다.
“갸는 왜.”
“그 새끼가, 계장님 뒤통수 치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건 아시나 모르겠네.”
춘자가 사람 좋은 미소를 띠었다.
“무슨 소리여, 그게.”
이계장이 시치미를 떼자 춘자는 흐흥, 하고 콧소리를 내며 웃었다. 계속 시치미를 뗄 작정이라면 떡밥을 던져야 했다.
“사실 밀수업에 가장 관심 많은 건 계장님 아닌가?”
춘자가 심호흡했다.
“곧 3억짜리 다이아가 들어온다는데, 장도리가 그거 혼자 꿀꺽하려고 계장님 뒤통수 칠 생각하고 있는 건 알고 있나 몰라.”
그건 내일이나 되어서야 알 수 있는 사실이었지만, 춘자는 이 사실을 이용하기로 했다. 장도리가 독식하려고 했단 사실을 알리면 이계장은 장도리를 잡는 데 혈안이 될 거고, 그때쯤에 둘을 엮어서 같이 골로 보내버리면 된다. 그럼 이제 권 상사를 위협할 만한 인물은 없을 것이다.
“뭐? 3억짜리 다이아?”
그의 언성이 높아졌다. 춘자는 자신은 모르겠다는 듯 손사래를 치는 시늉을 했다.
“조심하시라고, 말씀 드리는 거예요.”
달칵, 차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제대로 얘기허라. 빙빙 돌리지 말고.”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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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춘자 이 씨발 년이.”
다방에 있는 건 어떻게 알았는지 장도리가 들이닥쳤다.
“아가리를 어떻게 털었길래 엄진숙이 나한테 와서 난리를 치는 거냐고.”
“뭐? 진숙이가?”
“어쭈, 모르는 척 하네.”
장도리가 춘자의 팔을 붙잡았다. 눈이 회까닥 돌아버린 것을 보면 가벼운 일은 아니란 건데. 하, 진숙이 이 년은 또 무슨 짓을 한 거야. 흥분하지 말라고 얘기했어야 했나. 춘자는 눈을 도르륵 굴렸다.
“지금 내가 만만한 거잖여, 아니야?”
장도리가 춘자의 머리채를 잡았다. 고마담이 다가와 뭐 하는 짓이냐고 그를 말렸으나,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장도리가 그녀를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방 안의 손님들은 쑥덕대기 시작했다. 한 마디로 난장판이었다. 대체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건지. 춘자는 급히 머리를 굴렸으나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하필 지금 다방 문이 열렸다. 춘자는 눈을 크게 떴다. 권 상사였다. 여기 있는 건 또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오지 마. 당신이 장도리랑 같이 있으면 안 된다고. 춘자는 애써 눈으로 그에게 떠나라고 말했으나 그에게 닿지 못한 듯 했다.
“장 사장, 여자한테 이러는 건 좀 추하지 않나?”
장도리의 눈이 그녀에서 그로 옮겨갔다. 안 돼, 춘자가 중얼거렸다. 권 상사가 피식 웃으며 한 마디를 더 얹었다.
“응? 사내로서.”
장도리가 그제서야 춘자의 머리채를 놓았고,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이러다가 한 대 치겠어.”
필삼은 여유롭게 웃었다. 그게 오히려 장도리를 자극했는지, 장도리가 정말 그를 한 대 치려는 듯 팔을 들었고, 춘자는 그 순간부터 걱정이 될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몸이 달달 떨리는 것을 느꼈다. 기억이 대체 뭐라고, 이렇게 온 몸에 하나하나 사무치게 새겨져 있는 건지.
그 순간, 불행인지 다행인지 다방 문이 한 번 더 열렸다.
“저 자식 잡아.”
이계장이었다.
뒤에는 사내들이 여럿 더 서 있었고, 우르르 몰려와 장도리를 포박했다. 장도리는 이게 무슨 영문인지 몰라 이계장에게 눈짓을 했으나 이계장은 이를 외면했다. 그 모습을 본 춘자는 이계장이 드디어 어젯밤의 제 말을 듣고 판단이 선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뒤의 일은 예상 밖이었다.
“어랍쇼? 여기 다 있었네.”
이계장이 눈짓을 했고, 뒤에 더 몰려온 일행이 춘자를 붙잡았다. 그러자 권 상사가 그들을 떼어놓으려 했고, 이내 다른 일행들은 권 상사를 포박하려 했다. 왜 권 상사까지? 하지만 권 상사는 이계장이 데려온 일행에 쉽게 넘어갈 인물이 아니었다. 그 점이 춘자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안 돼, 하지 마. 춘자가 입 모양으로 속삭였고, 권 상사는 그 모습을 봤는지 못 봤는지, 저항 없이 순순히 포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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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한 곳은 맹룡해운이었다.
“너 다이아 들어오는 거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이계장이 장도리의 멱살을 잡고 캐묻기 시작했다. 장도리는 무슨 상황인지 간파하지 못해 병신처럼 눈만 끔뻑였다.
“뭐, 뭔 다이아.”
“이 와중에도 발뺌한다 이거지?”
춘자의 심장이 빨리 뛰었다. 권 상사까지 잡혀오는 건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빨리 그를 데리고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것밖에 남지 않았다. 장도리와 이계장은 한참을 옥신각신하더니, 이내 다이아를 챙기자는 쪽으로 돌아선 건지, 그들의 관심은 이제 춘자 쪽으로 향했다. 이계장이 춘자의 턱 끝을 손으로 붙잡고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다이아 위치 빨리 불어.”
“몰라.”
“이 년이고 저 놈이고 죄다 입만 열면 거짓말이여.”
이계장이 이마를 짚는 시늉을 하더니 금세 표정을 바꾸고 춘자의 다리를 걷어찼다. 춘자가 반응이 없자 한 번 더 종아리 쪽을 걷어찼다. 옆에 잠자코 있던 권 상사가 그 모습을 보고 자리에서 움직이려 했고, 춘자는 그런 그를 보자 온 힘을 다해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나서지 마. 하지만 이젠 그것도 소용이 없었다.
“얼씨구?”
권 상사가 몸을 움직이자 이계장은 제 몸을 춘자에서 권 상사 쪽으로 돌렸다.
“하긴, 다이아 위치는 우리 사장님께서도 알고 계시겠죠.”
“안 돼.”
춘자가 이계장에게 소리쳤고, 이계장은 권 상사를 추궁하려 했다. 춘자는 권 상사에게 관심이 쏠리는 일이라면 모든 것이 싫었다.
탕-
총소리가 들리자 춘자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주변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소리였다. 대체 왜. 그녀는 소리의 근원을 찾아 눈을 돌렸다.
포박을 언제 푼 건지, 이계장이 풀어준 건지, 의기양양하게 숨겨뒀던 엽총을 꺼내든 장도리가 보였다. 아, 엽총. 그 다음에 그녀의 옆에 보이는 건 놀란 이계장과 어깨 쪽에 피를 흘리고 있는 권 상사였다. 그가 다쳤다, 그리고 피를 흘린다. 그 모습을 보자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것 같았다.
“조춘자 이 년, 권 상사 일에 꼼짝도 못하네.”
장도리가 히죽거렸다. 이럴 때만 눈치가 귀신인 놈이었다. 춘자는 붉어진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씨발 새끼, 넌 내가 죽여버릴 거야.
“어쭈, 그렇게 봐서 어쩔 건데.”
장도리가 무어라 더 말을 하려 했으나, 이계장이 그를 저지했다.
“내가 언제 너 움직여도 된다고 했냐.”
“아이, 형님. 우리는 같은 배를 탄⋯⋯.”
이계장이 장도리의 뺨을 쳤다. 장도리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그 자리에서 그를 원망하듯 바라보았다.
“너 사람들 앞에서 형님 소리 한 번만 더 뱉으면 이 자리에서 찢어 죽여 버린다?”
난리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춘자는 옆에 있는 권 상사를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또 다치게 만들었어, 내가. 아직 숨을 헐떡이고 있는 것을 보아 치명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몸에 끔찍한 금속 덩어리가 박혀있다는 사실만으로 싫었다.
문이 다시 열렸다. 장도리 패거리가 진숙과 해녀들을 붙잡아 온 모양이었다. 진숙이는 왜? 춘자가 영문을 몰라 허둥대자 이계장이 설명이라도 하는 듯 말했다.
“여기 사람들 다 거기 가서 물건 건져오는 거야.”
욕심이 머리 끝까지 찬 새끼. 춘자는 이계장을 바라보면서도 권 상사가 걱정되어 미칠 노릇이었다. 온 신경이 그쪽에 쏠려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이계장도 이제 이를 눈치챘는지, 춘자를 바라보다가 다시 엽총을 집어 권 상사의 머리 쪽으로 겨누었다.
“안 돼.”
“다이아 위치 불어.”
“차라리, 나를 죽여. 나를 죽이라고.”
왜 다들 저 남자를 못 죽여서 안달인 건데. 죽일 년은 난데, 왜.
이계장은 춘자를 보며 처음엔 권 상사의 머리, 그 다음엔 심장 쪽으로 총구를 까딱였고, 춘자는 울먹였다.
“알았어, 다이아 위치 불게. 그러니까, 제발, 의사라도 불러 줘... 사람이 다쳤잖아.”
“하, 참 말 많네.”
이계장이 손짓하자 장도리 패거리 중 하나가 약상자를 들고 와 그의 어깨에 성의 없이 붕대를 감았다. 의식을 놓은 듯한 그가 아프다는 듯 미간을 찡그렸다. 미안해, 춘자는 턱 끝까지 올라온 그 말을 꾹 삼켰다.
권 상사는 아직 죽지 않았다. 그러니 더 심각해지기 전에 빨리 여기를 탈출해야 했다.
“근데, 권 상사가 정한 위치는 너무 위험해서 우린 못 들어가.”
“어딘데 못 들어가.”
“억척이가 상어 물린 곳.”
“아이씨, 밀수꾼 년들이 상어 따지고 자빠졌네.”
해녀들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수군거렸고, 춘자는 고개를 떨궜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다 들어가, 다. 여기 전부 배 타고 나가서 다 건져오는 거야.”
.
맹룡해운 안은 모두가 잠들어 있었다.
내일을 생각하면 자야 했지만, 춘자는 잠이 오지 않았다. 모두들 곤히 잠든 채 있었는데, 자신만이. 때마침 제 옆에서 벽에 기대어 잠들어 있던 권 상사가 앓는 소리를 냈다.
“사장님?”
권 상사가 천천히 눈을 떠 그녀 쪽을 바라보았다.
“춘자 씨.”
“정신이 들어?”
권 상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춘자는 당장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았으나, 꾹 삼켰다.
“미안해, 나 때문에.”
“이제, 날 제대로 봐주는 것 같네.”
“뭐?”
권 상사가 웃었다.
“춘자 씨 눈 속에 맺힌 게 내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계속 했는데. 이젠 춘자 씨 눈 속에 있는 거 같다고, 내가.”
“무슨 소리야 그게.”
난 항상 당신만을 바라봤는데. 그렇다면 다른 세계 속 권 상사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까? 내가 지금의 당신이 아니라 ‘그 때’의 당신을 바라봤다고? 하지만 결국 그것도 당신이잖아. 춘자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걱정 마, 춘자 씨. 이 정도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월남에 있을 때는⋯⋯.”
“알아, 훨씬 더 대단했겠지.”
춘자는 질린다는 듯 그의 말을 가로챘다.
“이제야 표정이 좀 낫네.”
“응?”
“방금 전까지 울 것 같았는데.”
권 상사는 한 번 웃어주고는, 움직이기 불편한 몸을 다시 뒤로 뉘여 눈을 붙였다. 춘자는 어쩐지 마음이 편안해져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번에는 뭔가 다를지도 몰라. 그런 막연한 희망만을 품게 되었다.
.
.
또, 꿈이다. 몇 번째 윤회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춘자와 필삼은 차를 타고 있었고, 장도리 패거리를 피해 멀리 달아나는 중이었던 것 같았다. 차는 위태롭게 덜컹였고, 권 상사는 운전에 몰두하고 있었다. 춘자는 당장이라도 토할 것 같았다. 지금 이건, 유난히 기억하고 싶지 않은 회차였다. 지랄맞은 악몽이다.
“필삼 씨, 우리 그냥⋯⋯.”
멈추라고 말해야 했다. 우리가 달리는 이 길 끝은 낭떠러지라고. 하지만 꿈 속의 그녀는 무슨 제약이라도 걸린 듯 팔 한쪽은커녕 입술조차 움직이지 못했고, 그저 권 상사의 모습만 바라보는 것 외엔 허용된 것이 없었다. 길의 끝이 나왔고, 필삼은 급히 핸들을 꺾었다. 춘자는 꿈에서야 그의 모습을 똑바로 볼 수 있었다. 권 상사는 방금 분명 핸들을 그의 쪽으로 꺾었다. 그랬기에 차는 운전자석 쪽으로 벽에 부딪혔고, 차도 그 쪽으로 찌그러졌다. 차가 멈췄다. 춘자가 힘없이 눈을 뜨자 옆에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게 피를 흘리는 그가 있었다.
“사장, 권 사장님. 권필삼⋯⋯.”
핸들을 자명하게 제 쪽으로 꺾었다. 왜 그랬어. 내 쪽으로 꺾어버리지. 왜, 대체 왜. 사람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반대쪽으로 꺾어야 하는 거 아닌가? 춘자의 시야가 닫혔다. 아마 그 당시에 충돌의 충격으로 춘자 스스로 정신을 잃었던 것이다.
정신을 차린 곳은 병원이었다. 마침 옆에 있던 간호사가 그녀에게 괜찮냐고 물었으나, 그 회차 속 춘자의 정신은 온전히 한 곳에 쏠려 있었다. 어쩌면 회차가 바뀌지 않은 것을 보고 작은 희망을 품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살았을 것이라고.
“환자분 이틀 동안 쓰러져 계셨어요.”
“저랑 같이 있던 사람은요?”
“우선 좀 쉬시고...”
“권필삼, 어디 있냐고.”
간호사가 춘자의 눈치를 보는 듯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춘자는 불안한 마음에 병상에서 일어났고, 간호사는 다시 안정을 취해야 한다며 그녀를 말렸다. 병원 곳곳을 뒤졌지만 그가 보이지 않았다. 아닌데, 필삼 씨는 항상 내 곁에 있었는데.
“아이고, 필삼아.”
익숙한 이름에 춘자는 고개를 돌렸다. 그 때까지도 그녀는 애써 되뇌이고 있었다. 그가 죽어야 회차가 바뀌잖아. 아직 여기인걸, 그러니까 그는 괜찮을 거야.
“이 어미를 놔두고 먼저 가면, 나는 어떡하라고.”
머리가 새하얗게 샌 여자가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통곡하고 있었다. 춘자는 그 순간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병상에 누워있는 환자 위에는 덮개가 씌워져 있었다. 보기 힘들 정도로 크게 통곡하고 있던 나이 든 여자 옆에는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몇 서서 그녀를 위로하고 있었다. 덮개 사이로 망자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익숙한 반지가 보였다. 그가 늘 끼고 다니던 초록빛 반지였다.
“나도 데려가세요, 나도 데려가⋯⋯.”
귀가 웅웅대며 여자의 통곡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다. 당신의 죽음을 나 말고도 슬퍼할 사람이 있었구나. 그것도 이렇게나 많이. 내가 죽는다고 슬퍼해 줄 사람은 당신 말고 없는데, 나 대신 당신이 죽음으로써 이것조차 무의미하게 되었구나. 나는 슬퍼할 자격도 없는 죽일 년이었구나. 춘자는 그제서야 시야가 까맣게 물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교훈은 더 있었다. 그가 죽었다고 무조건 회차가 바뀌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죽은 것은 그녀가 깨어나기 한참 전이었으므로. 그녀가 그의 죽음을 ‘인식’하는 순간 회차가 바뀌는 것이었다.
.
.
춘자는 천천히 꿈에서 깨어났다.
마침 다들 깨어나서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춘자는 허탈하게 웃었다.
패거리가 힘없이 잠들어 있는 권 상사까지 배에 태우려 하자, 춘자는 놀란 듯 따졌다.
“이 사람은 왜 데리고 가는데.”
“남아서 좋을 거 없잖아.”
“다쳤잖아. 의사를 봐야⋯⋯.”
“하, 붙잡힌 년이 따지는 것도 많네. 이 작자 신경쓰기 귀찮으니까 그냥 죽여버리는 수가 있어?”
춘자는 입을 다물었다. 미친 놈들. 죽여도 시원찮을 놈들.
진숙과 해녀들은 아무 말 없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결국 제대로 된 건 하나도 없었다. 춘자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 했다. 다이아만 건지고 뭍으로 돌아가는 거다. 돌아가서 권 사장을 치료해야지. 그러면 모든 게 다 괜찮을 거야, 그럼. 배 한쪽에 묶인 그를 보며 그렇게 다짐했다.
이계장은 포인트에 도착하자 엽총을 들고 들어가라고 해녀들을 협박했고, 춘자는 욕지거리를 참으며 물 속에 들어갔다. 아직 괜찮아, 괜찮을 거야. 아직 그가 살아 있는걸.
하지만 문제는 물 속에 들어간 후였다. 줄을 끊을 도구가 없어 허우적댄 건 둘째치고, 뭔가 이상했다.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장도리 패거리가 따라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고, 그들이 해녀들을 공격했다. 끔찍했다.
하, 씨발. 이계장은 상상 이상으로 미친 놈이었다. 어떻게 해녀들을 다 죽일 생각을 하지? 숨 쉬러 올라가면 총을 쏴댔다. 모두를 입막음시킬 작정인가? 이대로라면 권 상사도 위험했다. 이계장은 엽총을 들고 해녀들을 향해 조준했다. 춘자는 권 상사보다 자신이 먼저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그게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그때였다.
그 사이에 매듭은 어떻게 푼 건지 권 상사가 이계장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이계장은 놀라서 총을 떨어뜨렸고, 권 상사는 능숙하게 그 총을 집어 살짝 살피더니 그대로 장전했다. 그 모습에 해녀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권 상사가 총구를 이계장 쪽으로 겨누었다. 당장이라도 총을 쏘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곧 권 상사가 들고 있던 그 총조차 다시 바닥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아직 바닷속으로 들어오지 않은 장도리가 밧줄로 그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춘자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안 돼, 안 돼, 안 돼, 제발, 이러지 마.”
그녀가 소리쳤다.
밧줄이 사내의 숨통을 막았다. 춘자는 당장이라도 헤엄쳐서 배 위로 올라가려 했다. 때마침 자리에서 일어난 이계장이 다시 총을 집었다. 그 모습을 본 진숙이 뒤에서 그녀를 붙잡았다.
“지금 올라가면, 너도 죽어.”
춘자는 원망하듯 저를 붙잡은 진숙을 바라보았다. 진숙아, 그때 너도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춘자는 그녀를 뿌리치려 했으나 진숙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그가 죽는 걸 바라보고만 있어야 한다고? 춘자는 포기할 수 없었다. 정확히는 포기할 자신이 없었다.
권 상사는 처음엔 저항했으나, 춘자와 눈이 마주치자 빠져나오려 움직이던 팔을 밑으로 떨구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살아야지. 어떻게든 살려고 발버둥쳐야지. 나도 이렇게 당신이 포기가 안 되는데, 당신 자신이 당신을 포기할 리가 없어. 춘자가 울먹였다. 권 상사가 그녀의 눈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미안해요.’
그의 입이 그 네 글자를 말하고 있었다. 안 돼, 이렇게 보낼 순 없어. 한 번 그가 죽은 세계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자신에게 유난히 다정했던 이번 회차의 권 상사도 그냥 영영 죽어버리는 것이었다. 모든 차원은 같지 않았다. 춘자는 진숙의 팔을 겨우 밀어내고 갑판 쪽으로 다가갔지만, 이미 그는 장도리가 사슬로 묶어버린 지 오래였다.
예전에 권 상사가 얘기해준 동화가 있다. 바닷속에 빠진 왕자님을 구한 인어 공주 이야기. 인어 공주도 왕자님을 구했는데, 그를 내가 구할 수 없는 걸까?
장도리가 그를 꽁꽁 묶은 채 물 속으로 빠뜨렸다. 춘자는 그쪽을 향해 안간힘을 다해 헤엄쳤다. 아직 살아있을 수도 있어. 어쩌면 다시 눈을 뜨고, 예전처럼 말할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럼 우린 다시 뭍으로 가는 거야. 윤회는 더 이상 없고, 내 괴로움도, 당신의 괴로움도 멈추는 거지. 그렇게 우리는 이제 행복할 수 있을 거야⋯⋯.
그를 붙잡아 수면 위로 건져 올렸다.
“사장님.”
“...”
“권 사장님.”
“...”
“권필삼.”
이상하게도 그가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말을 걸면 항상 답을 해줬는데. 이제 내가 미운 거야? 내가 당신을 이렇게 만들어서. 매번 당신을 구하지 못해서. 나랑 이제 대화하기도 싫은 거야? 그의 맥박을 살피지 않았다. 심장이 뛰지 않는다는 건 정말 그가 죽었다는 걸 확인하는 것이라서. 그 뒤엔 다시 시야가 까맣게 물들고 다른 회차가 되겠지, 그럼 이번 회차의 그는 영영 못 본다는 의미였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를 붙잡고 있고 싶었다. 더 이상 흐를 눈물도 남지 않았다.
차라리 내가 이번 생의 당신에게 개입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이렇게까지 끔찍하게 죽을 일도 없었는데. 이런 방식으로, 이렇게까지 괴로워할 필요도 없었는데. 어차피 이번에도 미결이 될 일이었다면 차라리 그 과정이 아름다웠음에 만족했다면 되었을 텐데, 다 내 욕심 때문에, 또 이렇게 그를 보내야 했다. 차가운 바다 위에서.
인어 공주가 왕자님을 너무 늦게 구해버렸다.
그는 이미 인어의 노래를 들을 수 없을 정도로 바닷속 깊은 곳으로 침전해버렸음을. 인어 공주는 그 사실을 너무 뒤늦게 알았다. 다만, 왕자의 허상인 그의 껍데기만을 쥐고 아무도 듣지 않을 노래를 불렀을 뿐이었다.
week4 <인식>
immersed (@immersed_to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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