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몽
week3 / 박박디라라
괴몽 1 怪夢 괴상한 꿈.
아는 사람이 죽는 꿈은 그 사람의 소망이 이루지려는 징조래. 그렇다면 당신의 죽음은, 끝없이 반복되는 죽음은, 당신의 소망이 이루어진다는 확신일까.
단속이란 말에 벌벌 떨며 도망가던 조춘자는 이제 없다. 애초에 진짜 단속도 아니었고. 춘자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혼자 남겨진 양장점을 둘러보았다. 아무리 급해도 이 비싼 모피코트를 던지고 가면 어뜨케 정말-. 춘자는 곧 있으면 망가질 머리를 괜히 한번 정리하고선 이리 치인 모피코트와 저리 치인 목도리를 툭툭 털어 정리했다. 마지막으로 가죽 가방까지 캐리어에 잘 정리해서 넣고 있다 보면 등 뒤로 낯선 기척이 느껴졌다. 그리고 찾아온 어둠. 제한된 공기. 케케묵은 먼지 같은 것들. 아우. 이 천 언제 빤 거야!
온통 검정으로 물들었던 시야에 빛이 들어왔다. 목 위로 씌워져 있던 천을 거칠게 벗겨내자 예쁘게 정리한 머리가 헝클어졌다. 이러니 물건이 별로라는 말이 나오지. 사람 대하는 꼴만 봐도 어떻게 물건을 다뤘는지가 보였다. 그러면서 텃세는... 흥, 하여튼 예나 지금이나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다. 조춘자는 짜증스러운 마음을 담아 삐딱한 눈으로 자신을 끌고 와 의자에 묶은 명동 바닥 장사꾼들을 노려보았다.
"야. 내가 우리 동네에서 보따리 풀지 말라고 몇 번을 말했어."
보는 앞에서 단골들 빼돌리는 건 어디 상도덕이냐? 건들건들, 사람 묶어놓고 우루루 몰려와서 한다는 말이 겨우 자기들 나와바리에서 꺼지란 얘기다. 별 볼 일 없는 잔챙이 하나 잡자고, 아니지. 내가 그냥 잔챙이는 아니지. 적어도 잔챙이 앞에 귀엽고 섹시한- 정도는 붙여줘야 하지 않겠는가. 조춘자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입으론 녹음된 테이프를 틀어놓은 것처럼 저번 생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말들을 주절주절 내뱉었다. 품목 레베루가 다르잖아, 레베루가! 그런 춘자의 뻔뻔한 대꾸에 여자 옆으로 머리가 희끗희끗한 남자가 다가와 칼을 빼내 들며 손모가지 하나 잘라 병신으로 만들어 버리자며 협박했다. 물론 춘자에겐 협박의 히읗로도 안 들렸다. 언제까지 이 바보 같은 짓거리를 해야 하는 거야?
어차피 이 남자는 제게 손가락 하나도 못 댄다. 곧 조춘자가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남자가 오면 한마디도 못 하고 꽁지 빠지게 떠날 테니. 아니나 다를까 대거리 좀 하면서 시간을 끌고 있으니 다급하게 문 열리는 소리가 나고 그 사이로 멍청해 보이는 남자가 뛰어 들어왔다. 그 남자는 제 패거리를 불러 모아 바깥 상황을 알렸다. 조춘자는 듣지 않아도 무슨 얘기가 오가는지 알 것 같았다. 얼른 가라, 가. 어? 태연한 춘자와 달리 오합지졸 어중이떠중이들은 허둥대다 이내 조졌다는 얼굴을 하고, 순식간에 꼬리를 만 채 후다닥 도망갔다.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리고 밑창이 딱딱한 구두 소리가 울렸다. 쥐 죽은 듯 조용한 복도 끝에서 남자가 걸어왔다. 이제 몇 번째인지 기억도 안 나는 똑같은 장면이, 너무 많이 봐서 늘어진 테이프처럼 천천히 흘러갔다.
너무 많이 봐서- 틀린 말은 아니다. 당신은 모르겠지만, 난 이 장면을 벌써 수도 없이 반복했어.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수없이 반복했음에도 불구하고,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남자가 다가와 입에 담배를 물려주더니 불만 붙이고선 다시 제 입술로 가져가 립스틱이 묻은 필터를 아무렇지 않게 문다. 또다시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춘자는 남자의 입이 열리기 전, 늘어진 테이프의 구멍 속으로 긴 새끼손톱을 넣고 늘어진 반대 방향으로 테이프를 감아 원래대로 돌렸다.
찰칵. 때마침 늘어진 테이프가 끝까지 당겨지고,
"나 누군지 알지."
남자의 말이 선명히 들렸다.
조춘자는 이번에도 같은 말을 할지 고민했다. 남자와 뭐라도 엮어, 곁에 있으려면 그냥 원래 하던 대로 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지만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당신을 만나면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으니까. 당신의 식구가 되지 못하더라도 어차피 난 당신을 살릴 거니까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어. 칼 맞은덴 괜찮냐고, 폼이란 폼은 다 잡더니 왜 장도리 놈을 한 번도 못 이기냐고, 아니아니, 이런 게 아니다. 이런 게 아니라...
"보고 싶었어요."
그래. 보고 싶었다. 당신이.
"그쪽이 날 왜?"
쌔끈하게 넘긴 머리를 하고 남자는 삐딱하게 물었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걸 보면 딱히 심기를 거스른 것 같진 않았다. 애꾸가 의자를 가져오고 남자는 자연스럽게 춘자 앞에 앉아 말했다. 이 바닥에 일하면서 나 보고 싶다는 인간은 처음인데.
알고말고. 독대만 했다 하면 남은 선택지가 딸랑 죽거나, 병신 되거나, 한식구 되는 것밖에 없는데 누가 만나고 싶어 하겠는가. 춘자가 아무런 대답 없이 쳐다만 보고 있자 애꾸에게서 장부를 건네받은 남자는 제 할 일을 했다. 이것저것 떼어먹은 물건값 합치면 천팔백 정도 되던데. 언제 들어도 터무니없고 어이없는 금액이다. 하지만 예쁜 두상 찢기고 싶지 않으니 조용히 듣고 있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남자의 말을 끊지 않으면 면도칼을 마주할 일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떻게 하면 피할 수 있을까 아양도 떨어보고, 짜증도 내보고, 울어도 봤던 지난날이 어찌나 허무한지.
"생각보다 조용하네."
혹시 우리 언제 본 적 있나? 정말 눈치 하나는 귀신같은 남자다. 본 적이야 많지. 그냥 보기만 했나. 눈도 맞추고, 입도 맞추고, 배도 맞췄다. 하지만 아직은.
"본 적은 무슨... 그냥 큰일 한번 해보고 싶어서 그르죠-."
우리 권 사장님. 군천항이라고 아나 몰라.
권 사장은 바로 확답을 주지 않았다. 가서 보고-. 의심 많은 남자는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그냥 권 사장 대신 믿을만한 사람을 보내라 말해도 자기 자신 말곤 믿는 사람이 없다며 굳이 본인이 직접 내려가야겠단다. 조춘자는 그게 너무 싫었다. 남자가 자꾸 스스로 묫자리를 찾아 눕는 것 같아서 두려웠다. 아, 진짜 별 거 없다니까? 짜증스레 던져진 말에 매끄러운 얼굴이 구겨졌다. 이상하다? 춘자 씨는 내가 편한가 봐.
"나는 춘자 씨가 하나도 안 편한데."
말 깔 시간 있으면 일이나 제대로 해. 군천 물길 트려면... 일분일초가 아깝지 않아? 차갑게 돌아서는 남자의 뒷모습에 춘자는 어쩐지 울컥했다. 지금 내가 개고생하는 게 누구 때문인데. 아무것도 모르면서.
원래라면 돌아선 권 사장을 붙잡고 남자들이 듣기 좋아하는 콧소리를 내며 무슨 그런 섭섭한 말을 하냐고 비위를 맞춰야 할 것이다. 원래의 조춘자라면, 권 사장이 알고 있는 조춘자라면 그렇게 하는 게 응당 당연했다. 하지만...
서운해. 나에게 차가운 당신이, 안아주지 않는 당신이, 입 맞춰주지 않는 당신이, 한 번을 돌아봐 주지 않는 당신이. 모조리 서운하다.
조춘자는 이 서운함의 근원이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았다. 그래서 남자를 탓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서운함은 모두 저에게만 있는 과거의 기억들 때문이었으니까. 조춘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남자의 뒷모습만 눈에 담았다. 아마 남자는 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춘자는 돌아봐 주길 원하면서, 돌아보지 않길 바랬다. 그저 앞만 보고, 그렇게 나는 안중에도 없어서, 장도리 놈이 쳐들어왔을 때, 그때 나를 쉽게 버려주길.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첫 번째보단, 두 번째가. 두 번째보단, 세 번째가. 그리고 또 몇 번을 더 반복한 지금이 나은 건 당연한 얘기다. 장도리 놈이 좋아할 만한 미끼를 던지고, 놈을 끌어들였다. 이거 잘하면 부산보다 판이 커져. 멍청하고 욕심 많은 놈은 제 주제도 모르고 이 건만 잘 물면 자기가 권 사장을 제끼고 전국구 밀수 오야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부산을 들먹이자 금방 엉덩이를 들썩였다. 뷰웅신. 저건 지 사이즈도 제대로 못 재는 게 뭘 하겠다고. 장도리는 자기 발로 상어 아가리에 걸어들어가는 줄도 모르고 미끼를 덥 물었다.
"군천 오야붕하고 텄어-. 예전에 내가 부리던 애가 여기를 잡고 있네."
전화로 조건을 들은 권 사장은 곧바로 애꾸를 불러 군천으로 내려왔다. 그사이 춘자는 진숙에게 뺨도 맞고, 해녀 친구들 사이에서 욕도 먹고. 이것도 참 못 해 먹을 짓이야. 돌아올 때마다 어긋나있는 진숙과의 관계는 춘자를 괴롭게 했다. 권 사장의 죽음만큼이나.
군천 땅을 밟은 권 사장은 동네를 다 둘러보고 나서야 춘자를 불렀다. 처음 이 호텔 복도를 걸을 땐 마냥 신났었는데. 오늘은 죽을 만큼 가기 싫었다. 남자의 죽음이, 잊히지않는 피비린내가 자꾸만 춘자의 발목을 붙잡았다. 아, 왜 또 여기야.
"권 사장님은 호텔 보는 센스가 없는 것 같아."
"손바닥만한 군천 바닥에 그럴듯한 호텔이라곤 여기 하나던데, 센스는 무슨."
센스 없다는 말에도 권 사장은 딱히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위스키가 담긴 잔을 춘자에게 건네고, 춘자가 건넨 항구 사진과 외항선 자료들을 살폈다. 별거 없네. 원래 권 사장의 나와바리인 부산항에 비하면 군천항은 작디작았다. 크기만 봐서는 제 물건을 다 소화시킬 수 없을 것 같은데, 여자는 무슨 생각인지, 아니면 따로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지 자신만만했다. 나만 믿어봐아-. 그냥 권 사장님이 내 편만 쪼오끔. 쪼오끔만 들어주면 돼.
거절이란 선택지는 아예 없는 것처럼 구는 여자가 웃겼다. 필삼은 그래서 괜히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다. 춘자씨. 우리가 이렇게 다이다이 마주 앉아있지만... 검지손가락을 피고, 수직으로 쭉 그었다. 여자에겐 갑을관계를 제대로 알려주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이 여자가 또 은근슬쩍 말이나 놓고 말이야.
여자는 쫄으라고 한 말에 쫄기는커녕, 새끼손가락을 이어 세로선을 만들더니, 요거는 깊자나-. 뭐 꼭, 우리가 살을 섞어야만 깊은 관계가 되고 그러는 건 아니잖아요? 하며 능청을 떨었다. 그니까 내일 꼭 내 편 들어줘야 해. 알았지? 응? 그렇게 말하고 떠나려는 여자를, 필삼은 충동적으로 붙잡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냥 지금은 여자를 잡고, 입을 맞추고, 살을 섞고 싶었다. 권필삼은 제 손에 들어온 말랑한 팔뚝을 다시 한번 힘을 주어 붙잡고 물었다. 하룻밤 정도는 센스 없는 호텔에서 해보는 것도 괜찮지 않나?
어젯밤의 정사 덕일까. 장도리와의 일은 권 사장이 적절한 때에 편을 들어줘 어려운 일 없이 조춘자가 짜둔 판 그대로 흘러갔다. 춘자는 순식간에 장도리에게서 해녀들의 권한을 빼앗았다. 권 사장의 의심스러운 눈초리와 장도리의 상스러운 욕에도 조춘자가 기를 쓰고 해녀들 처분에 대한 조건을 가져온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억척이 다리. 그거 지켜줘야지. 춘자는 조건을 따내자마자 진숙과의 오해를 풀려고 했다. 나의 또 다른 미련. 진숙아.
"너 정말 소문 듣고 나한테 이러는 거냐?"
"나 괴롭히지 말고 그냥 꺼져줘라. 너 같은 놈 죽여서 깜빵 가게 만들지 말고."
물론, 오해는 풀리지 않았다.
결국 억척이 상어에 물려 병원에 실려 갔다는 얘기를 옥분에게서 전해 들었다. 사람은 참 이기적이어서, 억척이의 일도 일이지만 권 사장의 죽음이 한 발짝 더 다가온 것 같아 두려움이 덜컥 밀려왔다. 많이 바뀐 것 같지만 사실 아무것도 바뀐 건 없었다. 조춘자는 답지 않게 불도 켜지 않은 작은 방 한켠에 무릎을 모아 앉아 고개를 파묻었다. 내가 바꿀 수 있을까. 억척이 일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조춘자를 흔들고, 화장실 앞에서 쓰러지던 남자의 환상이 숨을 조였다.
불안했고, 불안정했다. 마치 끝나지 않는 나쁜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 자꾸만 술렁이는 마음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남자는 그런 조춘자를 혼자 두지 않았다. 요즘 피곤해? 눈 밑을 쓸어내는 엄지가 다정했다. 다정이라곤 한 자락도 없는 남자가 제게 가끔, 아주 가끔 다정을 넘어 애정을 보일 때면 조춘자는 또 다시 숨이 턱 막혔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 애정의 무게가 가볍디 가볍다는 것. 집에서 키우는 개와, 한낱 술집 여자에게 주는 정의 무게와 같다는 것. ... 아마도. 아마도 그럴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게 되려고 했는데, 자꾸만 아무것도 아닌게 싫어져.
조춘자는 모순적인 마음을 숨기려 어리광을 부리듯 남자의 품을 찾아 몸을 웅크리고 숨었다. 남자의 심장 소리가 쿵쿵- 귓가를 울렸다. 살아있다. 아직은. 이 소리를 위해 내 욕심은 접어야지. 역시 나는 당신에게 가장 먼저 버려질 사람이 될 것이다. 그게 내가 당신을...
남자의 심장 소리를 듣고 있다 보면 어느새 안정이 됐다. 그래. 이 반복되는 시간은 당신을 살리기 위함이 분명하다. 잠든 남자의 얼굴을 한참 쳐다보다 눈을 감았다. 당신은 지금 무슨 꿈을 꾸고 있어? 나는 아주 슬프고 외로운 꿈을 꿔. 당신이 눈을 뜨는 아침까지.
곧 물건을 실을 배가 바다 위에 떴다. 세관의 눈을 피해 원래 약속된 시간보다 3시간이나 빨리 바다로 나갔다. 이 일에서 가장 중요한 해녀들을 태운 배가 유유히 바다를 가르고 포말을 만들어내며 지나갔다. 물건이 떨어진 곳에 배를 세우고, 해녀들은 익숙하게 물에 들어가 상자를 건져냈다. 그러는 와중에도 조춘자는 권 사장이 따로 부탁한 일을 해내야 했다. 젠장. 이 물비린내를 내가 또 맡을 줄이야.
조춘자는 권필삼이 따로 부탁한 가방을 그 다음 날 혼자 물에 들어가 건져내어 넘겼다. 남자의 만족스러운 박수와 웃음이 보상으로 따랐다. 이야-. 춘자씨가 내 생각보다 훨씬 야무지네. 남자는 물건이 빠지지 않았는지 살피고선 작은 상자 하나를 꺼내 춘자에게 건넸다. 춘자는 저 안에 든 게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푸르디푸른 사파이어 목걸이.
저건 내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또 한편으론 절대 받고 싶지 않았다. 이건 저를 식구라고 인증하는 증표니까. 이 목걸이가 조춘자 목에 걸린 순간부터 권 사장은 이제 여자를 그냥 가볍게 안은 여자가 아니라 식구라는 테두리 안에 넣어줄 것이다. 남자는 누가 전직 군인 아니랄까 봐 이런 데에 있어선 꽤 고지식한 면이 있었다. 조춘자는 입술을 감춰 물고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거절했다. 사파이어 목걸이를 거절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거절하면서도 아쉬움에 쉽게 눈을 떼지 못했다. 그 모습을 모두 지켜본 남자의 눈썹이 삐딱하게 올라갔다가 이내 제자리를 찾았다.
"춘자 씨가 이게 무슨 뜻인지 모르진 않을 텐데."
그러니까. 그래서 거절하는 거다. 당신의 식구에 내가 들어가선 안 되니까. 이번에도 날 살리겠다고 당신 목숨 버리는 일은 없어야 하니까. 조춘자는 코를 찡긋하고 웃어 보이며 말했다.
"아직은 좀 이르지 않아-? 권 사장님 그렇게 사람을 금방 믿으면 어떡해. 응?"
물론 내가 못 믿을 사람이라는 건 아닌데에. 어쨌든. 지금은 좀 성급하다고 할까나? 아니... 뭐. 그렇다고 나를 의심하라는 얘긴 아니고. 무슨 말인지 알지?
이랬다저랬다, 정말 어쩌라는 건지. 믿지 말라면서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어필하는 조춘자를- 권 사장은 어이없어하며 쳐다봤다.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돌려말하는 건 딱 질색인 남자가 여자에게 물었다.
"나중에 줘요. 나중에. 일 다 끝나면."
당신이 죽지 않으면, 그때 받아 갈게. 뒷말은 속으로 삼키고 목걸이에 늦은 잔금을 걸었다.
그 여자는 무슨 생각으로 거절했을까. 큰일 한번 해보자며 첫 만남에 대뜸 보고 싶었다고 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선 제가 너무 성급하단다. 성급? 내가 성급했나? 아닌데. 솔직하게 말하자면 권필삼은 춘자의 일하는 방식이나 행동력이 꽤 마음에 들었다. 아니.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방식이나 행동력과 더해서 얼굴이나 몸매, 성격까지도 아주 마음에 들었다. 특히나 빠른 눈치가 가장 마음에 들었는데... 불친절한 설명에도 곧 잘 일을 해내는 것 보면 마치 이미 제가 무슨 말을 할지 아는 사람 같아 보였다.
권필삼은 거짓말을 잡아내는 능력만큼이나 제 뒤통수칠 연놈 잡아내는 감 하나는 기가 막혔다. 그런 저의 직감이 단언컨대, 조춘자는 절대 저를 배신하지 않는다. 이상하고, 수상한 것 투성이인 여자지만, 권필삼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근데... 그러면 왜 거절했을까. 거절할 이유가 없잖아. 혹시 사파이어 안 좋아하나? 권필삼은 마시던 위스키를 창가에 그대로 내려놓고 테이블 위에 놓인 푸른색 사파이어 목걸이로 시선을 돌렸다. 주인을 잃은 보석이 힘없이 반짝였다.
이쪽으로 좀 와. 남자가 아닌 밤중 갑작스럽게 춘자를 호출했다. 으응, 권 사장님. 지금 몇시인 줄 알아? 춘자는 채 뜨지도 못한 눈을 비비며 시계를 확인했다. 시침은 한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미친 거 아니야 진짜?
"왜 그러는데... 내일 말하면 안 돼?"
오라면 오지? 심기 불편한 목소리에 머리칼이 쭈뼛 섰다. 대답도 듣지 않고 끊긴 전화는 다시 울리는 법이 없었다. 에효 내 팔자야. 까라면 까야 하는 인생. 권 사장이 가라면 가고, 오라면 와야지. 결국 춘자는 새벽 한 시에 잘 빗어놓은 가발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권 사장이 묵고 있는 호텔로 걸음을 옮겨야 했다. 아니 근데 새벽 한 시는 진짜 어디 상도덕이야?!
"춘자씨. 장도리에 대해서 어디까지 알고 있어?"
방에 들어서자마자 권 사장 입에서 나온 놈의 이름이, 허술하게 풀어져 있던 춘자를 긴장시켰다. 권 사장은 그런 춘자의 허리를 야릇한 손길로 쓸어내리고 테이블 앞에 있는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선 춘자가 보기 편하도록 사진 몇 장을 직접 손에 쥐어주었다. 봐봐, 여기 장도리랑 같이 있는 놈. 누군지 알겠어?
춘자는 아무 말도 못 했다. 권 사장은 돌아오는 대답이 없어도 말을 이었다. 장도리가 쥐새끼야. 난 내 뒤통수 노리는 놈이랑은 일 안 해. 알지? 춘자는 고개만 위아래로 끄덕여 답했다. 그러면, 그러면 어떻게 할 건데? 춘자의 다급한 물음에 권 사장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춘자씨. 죽은 사람이 배에 타는 거 봤어?"
걘 다음 작전 전에 죽어.
"... 죽일 수 있어?"
"이미 밑에 있는 놈들 모두 군천으로 불렀어."
조춘자는 그 밑에 있는 놈들이 얼마나 쓸모없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춘자가 쓰게 웃었다. 그 웃음의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모를 권 사장이 춘자의 말랑한 볼을 검지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참 속상하네. 푼돈 먹자고 내 뒤통수나 노리고 말이야. 그치? 그러니까 춘자씨는 나 속상하게 하지 마. 말 속에 숨겨진 뜻을, 조춘자는 금방 알아챘다. 응. 당연하지.
"내가 권 사장님을 배신할 리 없잖아."
해녀들한테는 내가 장도리 놈 말고 권 사장 말 들으라고 잘 얘기해 놓을게. 걱정하지 마. 진숙이한테 잘 설명하면 다 알아서 해줄 거야. 빈말이라도 좋은지 한껏 무서운 기운을 내뿜던 권 사장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리고선 기꺼이 제 목을 내어주어 춘자의 팔을 걸었다. 그럼 됐어. 재미없는 얘기는 그만하고 이리 와.
제 침대를 기꺼이 내준 권필삼은 오늘따라 자꾸만 엉겨오는 춘자의 얼굴 여기저기에 입을 맞췄다. 졸려서 그래? 오늘따라 안 부리던 어리광을 부리네. 으응. 그러니까 왜 새벽에 깨우고 그래애. 또다시 얼굴을 보여주지 않고 품에 안겨 오는 여자를 끌어안은 권필삼은 가발 밑에 있는 결 좋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여자의 목에 입을 맞췄다. 알았어. 다음부턴 새벽에 안 깨울게.
떨림을 졸음으로 가장한 조춘자는, 사실 제정신이 아니었다. 저도 장도리와 함께 배신자로 몰릴까봐서는 아니고-, 그저 남자의 죽음이 너무나 가까워졌기 때문에. 남자의 죽음의 냄새가 바로 코 밑까지 차올라서. 조춘자는 떨고 있단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더더욱 남자에게 매달려야 했다. 그럼에도 자꾸 눈치 없이 떨리는 손끝은 남자의 등에 상처를 냈다. 닿은 살갗이 뜨겁고 축축했다.
이제 곧 기나긴 꿈에서 깨어나야지. 조춘자는 저번 생과 달리 곧 다가올 미래에 대비해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다. 남자에게 직접 알리지도, 장도리와 따로 거래를 하지도 않았다. 그저 남자가 언제든 버리고 가도 되는 여자로, 그저 그런 여자로 남아있을 뿐이었다. 받지 않은 사파이어 목걸이, 적게 나눈 몸정, 있는지도 모를 티끌만한 의리, 그리고 언제든 대용품이 넘쳐나는 조춘자. 그러니까 겨우 그저 그런 것들. 조춘자가 아주 오랜 시간 준비하지 않으면서 준비한 모든 것이었다.
긴장감이 넘치는 방안. 싸한 분위기가 자꾸만 이야기의 흐름을 끊었다. 춘자씨, 오늘따라 집중을 못하네. 조춘자는 자꾸만 바싹 마르는 입술을 혀로 훑고 마른침을 꿀꺽 삼켜 넘겼다. 어딘가 부산스러운 여자의 모습에 권 사장이 결국 참지 못하고 지적했다. 어어. 미안미안. 이상하게 오늘따라 집중이 잘 안되네-.
"와아아아-!"
왔다. 춘자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바깥에서 듣기 싫은 함성이 들렸다. 눈치 하나는 귀신 같은 권 사장은 저 목소리의 주인이 장도리라는 것을 알아챘는지 벌떡 일어나 얼음을 깨기 위해 구비된 송곳을 손에 쥐고 문 앞으로 조용히 다가갔다. 그래. 그대로 나가서 도망쳐. 지금이면 당신은 충분히 나갈 수 있어. 애꾸도 시간을 벌어줄 거고, 나도 그럴 거야.
춘자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남자의 곁으로 다가갔다. 어젯밤 필사적으로 매달렸던 등을 이번엔 제 손으로 떠밀었다. 권 사장님.
"쉿."
"도망쳐요."
춘자의 말에 권 사장은 방을 쓱 훑어보고 말했다. 지도 챙겨. 저기 침대 옆에 있는 가방, 저번에 춘자씨가 건져 온 거. 그것도 챙기고. 뭐, 또 중요한 거 있으면 얼른 챙겨서 나가자. 당연하게 저도 포함하는 말에 춘자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얼굴로 인상을 썼다. 여기서 도망치는 건 당신뿐이야. 지금을 위해 나는 아주 오랜시간 공을 들였어. 그러니까,
나는 오늘 여기서 당신에게 버려져야 한다.
"나는 괜찮아. 내가 부리던 애라고 했잖아."
있는 허세 없는 허세를 모두 끌어모아 큰소리를 쳤다.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권 사장 앞에선 작은 거짓말조차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꿋꿋하게 거짓을 입에 담았다. 장도리 놈이 날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쟨 나한테 손가락 하나도 못 대. 내가 누군데. 춘자의 말을 인내심 있게 들어준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렇겠지. 저런 새끼는 당신의 머리카락 하나도 스치지 못하겠지.
여자의 말에 남자가 긍정을 하며 문고리를 잡았다. 됐다. 그대로 나가서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치면 모든 게 끝, 이라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철컥, 걸쇠 걸리는 소리가 들리고 문이 잠기기 전까진.
필삼은 놀란 눈을 한 춘자를 끌고 침실 안에 집어넣었다. 그 눈을 보자 전혀 웃음이 나올 상황이 아닌데도, 웃음이 나왔다. 잠깐 여기 있어. 남자의 말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권필삼 미쳤어?! 빨리 도망치라고!"
"춘자씨. 내 이름 처음 불러줬네."
다음번엔 침대 위에서도 한번 해 봐. 겁나 꼴려.
미친 새끼. 이 와중에 농담이 하고 싶나? 상황의 심각성을 모르는 남자의 태도에 춘자는 눈앞이 아득했다. 이 남자는 왜 또 이런 선택을 하는 것일까.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바깥에선 약하디 약한 나무 문에 주먹질을 해댔다. 문이 힘을 버티지 못하고 자꾸만 흔들렸다. 저거 얼마 못 가겠지? 그니까 내가 됐다고 할 때까지 여기서 나오지 말고 기다려. 지도를 넘긴 권필삼이 작은 미소를 머금은 채로 사라졌다.
미닫이문 밖은 온갖 쌍욕과 비명으로 난무했다. 지금이라도 도망치라고 해야 해. 나 좀 버리라고. 제발 나 좀 버리고 가라고. 씨발 권필삼! 당신 원래 아무것도 아닌 여자도 목숨 걸고 지켜? 원래 그렇게 가벼운 남자야? 이래서 당신 식구 안 한다고. 안 한다고 했잖아!
오래전 말라버린 줄 알았는데. 아직도 나올 눈물이 남아 있었는지 자꾸만 주인 속도 모르고 눈물이 줄줄 새어 나왔다. 이제 이유도 모르겠다. 식구여서 그런 줄 알았는데 식구가 아닌 지금도 결과가 똑같다. 그냥 당신 마음인 거야? 도대체 나한테 왜 이래? 그런 조춘자를 현실로 끄집어낸 건 미닫이문이 제 기능을 못 하고 떨어져 나가 떨어진 그때였다. 소리도 없이 울고 있는 춘자와 눈이 마주친 남자는 낭패라는 얼굴을 했다. 처음 보는 남자의 얼굴이었다. 당신도 그런 얼굴을 할 줄 아는구나. 끝내 닦지 못하고 흘러내린 눈물이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권 사장에 의해 상처 하나씩 매단 놈들이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조춘자는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알았다. 남자가 팔목을 잡기 전에 제가 먼저 발을 옮겨 남자의 등을 떠밀었다. 가라고, 제발 가. 도망 좀 쳐. 제발.
그런 조춘자의 발버둥에도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춘자의 팔목을 잡았다. 버티는 여자를 화장실로 질질 끌고 간 권필삼은 여전히 눈물을 뚝뚝 흘리는 조춘자를 잠시 안타까운 눈으로 보다가 문을 닫았다. 미안해. 소리되어 나오지 못한 문장이 조춘자의 눈에 담겼다.
결국 이번에도 권필삼은 조춘자를 버리지 않았다.
억겁의 시간이 지나고 문이 열린다. 흐트러진 머리. 피에 젖은 상아색 반팔 니트. 텅 빈 눈동자. 가슴팍에 박힌 칼 한 자루. 남자가 천천히 쓰러지면, 남자의 생명 역시 천천히 스러진다. 차갑고 딱딱한 옥색 화장실 바닥 위로.
쓰러진 남자의 손을 찾아 잡고 감은 눈 위로 길게 입을 맞춘다. 나는 여전히 당신이 죽는 꿈을 꿔.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눈꺼풀과 이미 온기를 잃은 손. 맞잡지 못한 손이 춘자의 손에서 빠져나가고-. 현실과 꿈에 경계선을 흐린다.
괴상한 꿈을 꾸었다.
week3 <괴몽>
박박디라라 (@2_5DDD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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