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아는가 이 마음

고백

week8 / 민샤

고백: ¹사랑을, ²죄를, ³비밀을 고백하다

눈을 뜨니 다시 명동의 싸구려 여관방이다. 충혈된 눈을 타고 흐르는 눈물 자욱을 쓱쓱 손으로 닦아냈다. 홀로 군천의 후덥지근한 여름에 갇힌 게 몇 달째인지, 3년을 지낸 서울 공기에 비릿한 바닷바람 냄새가 없다는 게 낯설어 춘자는 헛웃음을 내쉬었다.

  ‘당신이 살아나는 세계는 단 하나도 없었다.’

우리는 서로를 구하려 부단히 애썼지만,

당신은 매번 나를 살렸고,

나는 매번 당신을 죽였다.

아니, 애초에 그런 내가 당신을 ‘우리’라 칭할 자격이 있을까.

  - 나 누군지 알지.

조춘자는 대본대로 했다. 이번엔 그 어느 때보다 치밀한 계획이었다. 독대부터 첫 번째 밀수와 사파이어 목걸이, 진숙이와의 화해, 그리고 권 사장의 죽음까지 전부 적힌 수첩이 늘 춘자의 품 안에 있었다. 몇 번의 회귀를 거치면서 처음이 어땠는지 기억이 제대로 나질 않았지만, 그럼에도 이 계장까지 끌어들여 바다에서 죽어버린 권 사장을 마주한 춘자는, 대비할 수 없는 새로운 상황이 더 위험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 어제 내려온 간첩도... 권 사장님은 알죠-.

사실 확신은 없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여유로운 표정으로 담배를 천천히 빨아들이는 그의 새까만 눈동자를 마주하자 목이 메여 목소리가 떨렸다. 애초에 권필삼을 군천으로 데려가지 않는 게 맞는 건가, 그 선택에서도 내가 당신의 식구가 될 거라는 보장이 어딨는가, 장도리 패거리와의 싸움이 절대 막지 못하는 거라면 사람을 부르고 칼을 쥐어주는 게 최선인 건가. 머리가 복잡해 춘자는 눈 앞의 권 사장이 자신을 위협하고 있는 것도 잊었다.

시퍼런 칼등으로 춘자의 어깨를 툭툭 치는 권 사장의 말에 조춘자는 현실로 돌아왔다.

  “그 쪽은 내가 만만한가 봐? 집중 좀 하지?”

  “그럴 리가요, 담보 생각하느라... 권, 권 사장님은 군천이라고 들어보셨나 몰라?”

눈이 휘어지게 웃으며 춘자는 천팔백짜리 유일한 담보를 꺼내놓았다.

결국 또 춘자가 돌아갈 곳은 군천 뿐이었다.

  첫 번째 밀수를 앞두고

새벽 군천관광호텔 506호.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권 사장도, 장도리도, 진숙이도... 그리고 이 계장도, 이렇게 쉬운 사람이었나 불안할 정도로 모든 것이 춘자의 기억과 똑같았다. 한 때 춘자의 모든 것이었던 진숙은 춘자에게 칼을 겨누었고, 첫 만남에 춘자에게 칼을 들이밀던 필삼과는 몸을 섞었다.

그래서였을까,

왠지 금기의 말을 고백하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베트남에서 애꾸와 둘이 수백명을 상대했다는 그가 권필삼답지 않게 춘자를 걱정하는 나약한 모습을 보일 때면, 밝은 갈색 가발에 빨간 루즈를 바르고 억지웃음을 짓던 그녀도 조춘자답지 않게 온전히 솔직해지고 싶은,

그런 이유 모를 마음이 목 끝까지 차오르는 것이었다.

  “권 사장님, 자...?”

한참을 자신의 몸에 입을 맞추던 권 사장의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넘기며, 이번에는 춘자가 그의 이마에 옅게 입을 맞췄다. 정말 연인이라도 된 듯한 서로가 우스워 그의 뺨을 쓰다듬던 다정한 손길을 그만두었다.

권필삼은 눈꺼풀 하나 미동하지 않았다. 괜히 오싹해진 춘자는 그의 가슴팍에 기대어 심장소리를 듣고 난 후에야 안심하며 엷은 숨을 내쉬었다.

  “권 사장님... 나 조금 힘든가 봐......”

어디서 나온 용기인지 모르겠다. 그녀답지 않은 말이었다. 어쩌면 이번 세계에서의 춘자는 이미 단 한 순간도 그녀답지 못했을지 모른다. 한 번 물꼬가 트이자 진실을 고백하는 일은 쉬웠다.

  당신은 내가 당신을 살리기 위해 몇 번을 이 고생을 한 줄 모를 거야... 장도리 그 새끼 때문에 내가 권 사장님 죽는 걸 내 눈으로 몇 번이나 본 줄 알아? 권 사장님이 죽으면 난 또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피 냄새가 진동하는 군천으로 당신을 데려오구 후회하겠지. 내가 뭐라고... 나를 얼마나 안다고 매번 나를 식구로 받아줘? 월남에서도 살아 돌아왔다며... 왜 잔챙이 밀수꾼 하나 지키다가 죽는건데...

  “권 사장님한테 나는 뭐야?”

눈물에 촉촉이 젖어 떨리는 춘자의 목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권필삼의 눈꺼풀이 잠시 움찔하나 싶더니 다시 잠잠해졌다.

폭풍전야 같은 고요함이었다.

  첫 번째 밀수를 무사히 마친 후

클럽. 엄진숙이 떠나고-

  - 다리 푸셔, 주머니에서 손도 빼시고.

춘자는 권 사장이 장도리를 대하는 태도에 미묘하게 증오가 추가된 듯 느낀다.

  “허 참, 권 사장님은 우리가 다 아랫사람으로 보이나? 이 코딱지만 한 동네 오야붕은 뭐, 좆밥이다 이거야?”

이건 없던 일이다. 장도리 저 미친 새끼가 뻔뻔하게 자리를 박차고 권 사장에게 다가간다. 안 돼.

  “이야~ 드디어 다찌마리 뜨기로 결심한거야? 장 사장님은 여자 앞에서 이러고 싶나?“

  “아이 우리 좋은 자리에서 왜 이러실까들~ 으응?”

씨발, 왜 갑자기 발끈하고 지랄이야. 춘자는 당장이라도 주먹을 날릴 듯한 장도리와 자신을 은근히 감싸안는 권 사장 사이에서 초조해졌다.

  다시 506호.

겨우 싸움은 말렸지만 아무 말 없이 벨트를 풀며 흐트러진 머리를 매만지는 권 사장을 보니 그는 여전히 화가 많이 나 있는 듯하다.

  - 춘자 씨, 장도리에 대해 얼마나 알아?

조춘자가 대답을 주저하자 권 사장의 말이 이어졌다.

  “장도리, 조만간 처리해야겠어.“

  “권 사장님이 그 쪽 친다고...? 언제? 지금 둘 뿐이잖아.“

  ”다음 작업 전에. 둘이면 충분하지, 춘자 씨는 내가 그 쥐새끼들도 못 이길 것 같아?“

권필삼은 창가에서 담배를 문 채 춘자를 향해 뒤돌아본다.

  ”아니이- 내가 우리 권 사장님을 못 믿는 게 아니라-, 이번 판에는 다이아도 있구 판이 크니깐-”

달칵, 지포라이터를 열던 소리가 멈춘다.

  “난 춘자 씨한테 다이아 들어온단 얘긴 한 적 없는데.”

좆됐다, 실수였다. 회귀를 반복하다 보니 지난 회차와 기억이 꼬인 모양이다. 당장 장도리 패거리와 싸우러 가면 권필삼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실언을 해버렸다.

  “에이- 우리 권 사장님이 이번엔 판을 더 키울 거라며어, 이미 금이구 사파이어구 다 가지고 왔는데 더 큰 거면 다이아밖에 없지- 그래서 다이아라구 생각한 거지.“

순간 찡그린 미간과 싸늘한 눈빛이 춘자를 향한다.

  - ...권 사장님, 지금 나 의심하는 거야?

춘자는 마치 첫 독대의 기억처럼 예쁜 눈이 휘어지게 억지웃음을 지었다. 맞장구 치듯 필삼은 방금 막 불을 붙인 럭키 스트라이크를 춘자의 입술에 물린다.

립스틱 자국이 선명히 묻은 담배를 다시 제 입에 가져대고는 양볼이 움푹 패일 때까지 깊이 빨아들였다.

이 남자 무슨 생각인 거지.

필삼은 콜록대는 춘자의 말캉한 입술을 손으로 닦아내고는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제 엄지에 번진 빨간 립스틱을 바라본다.

  “내가 춘자 씨를 왜 의심하겠어, 야무진 우리 춘자 씨라면 내가 이렇게 말 안 해준 것도 알고 있을 만해.”

저가 무서워하는 것을 눈치챘는지 미간을 꾹꾹 눌러 표정을 풀며 필삼이 다가온다.

  “그런데 춘자 씨...”

순식간에 필삼은 춘자의 어깨를 움켜쥐고 엄지에 묻은 새빨간 립스틱을 스윽, 춘자의 목에 긋는다.

  “누가 춘자 씨 너무 아는 게 많다고 이렇게 만들까 봐 내가 겁나네? 춘자 씨가 아는 걸 나한테도 공유해줘야, 응? 내가 춘자 씨를 지킬 수 있지.”

  “아이, 그럼요-. 우리 깊은 관계잖아 사장님 그치 으응? 내가 우리 권 사장님 몰래 비밀 만들고 그럴 사람으로 보여? 나 서운해-.”

첫 독대에는 말 끊었다고 예쁜 두상에 피나 내더니, 이젠 누가 봐도 의심스러운데 저에게 상처 하나 못 내고 새빨간 립스틱으로 피 흉내나 내는 꼴이라니. 춘자는 죽거나, 병신 되는 게 아니라 아예 한 식구 되는 쪽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권 사장이 정말 자신을 사랑할까 두려웠다.

그를 살리려 남들이 보면 절절한 로맨스 소설 같은 짓을 벌이면서도, 정작 그를 사랑하냐 물으면 겁부터 났다. 그를 잃는 게 무서운 건지, 그를 사랑하게 되는 게 무서운 건지, 알 수 없었고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장도리에 대한 대화가 이어졌고, 춘자는 권 사장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밤새 그의 품에서 권 사장의 의견에 맞장구쳤다. 베트남어 한 마디를 몰라도 거짓말은 귀신 같이 알아채는 권필삼 앞에서는 결국 아무런 소용이 없었을 테지만.

  그 날 동이 틀 때 즈음,

장도리가 쥐새끼라며 권 사장이 건네준 사진을 들고 엄진숙을 찾아가려던 참이었다.

독해진 엄진숙에게 상처받는 이 짓거리도 그만두고 싶었다. 춘자는 평생 ‘사랑’의 의미를 엄진숙으로 알고 지냈으니 자신에게 칼을 들이밀어도 여전히 진숙은 이 혼란 속에서 숨 쉴 구멍이었고 집이었다.

  “춘자 씨, 어디 가?”

군인이랍시고 잠귀는 왜 이렇게 밝아서 한 번을 몰래 못 나가냐.

  “으응 나 잠깐 진숙이한테 말할 게 있어서, 얼른 다녀올게.”

  “가지 마.”

오늘따라 애처럼 왜 이래. 팔을 뻗어 춘자의 허리를 감싸안는 필삼의 모습이 당황스럽기만 하다. 한 치의 오차 없이 진행되기를 바랐던 계획이 어그러지기 시작하면서 춘자는 조급해졌다.

  “나 악몽 꿨어 춘자 씨.”

  “...무슨 꿈인데? 다시 자고 있으면 내가 금ㅂ,”

  “내가 죽는 꿈.”

거짓말. 잘못 들었나.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필삼이 누운 침대에 주저앉았다. 진짜 악몽을 꾼 건지, 뭘 알고 떠보는 건지 당최 눈빛을 읽을 수가 없었다.

  “내가 피 흘리면서 쓰러져있는데, 춘자 씨가 옆에서 날 끌어안고 울었어.“

권필삼 입으로 죽는다는 말을 들으니 의식하기도 전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왜 그런 말을 해! 죽는단 말 하지 마, 권 사장님이 왜 죽어 안 죽어!”

  “이상하게, 춘자 씨가 놀라지 않더라 그냥... 체념한 듯이 나를 봤어. 이상하지? 춘자 씨는 분명 내가 그런 일을 당하면 누구보다도 놀랄 텐데. 그리고 그렇게 쉽게 체념하지도 않을 거야 춘자 씨는 강인한 사람이니까.”

권필삼이야말로 체념한 듯 흐릿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잠귀 밝은 이 남자가 며칠 전 잠든 척 그녀의 고백을 엿듣고 있었던 걸까. 그렇다고 하기엔 새끈하던 머리칼은 식은땀으로 젖어있었고, 지난 밤 장도리에 대한 적의로 빛나던 여유로운 권 상사의 눈빛이 아니었다. 정말 악몽을 꾼 건가. 눈물을 겨우 삼켜낸 춘자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까스로 눌렀다.

  ”권 사장님-, 진정해, 괜찮아. 원래 꿈은 반대래, 응 알지? 권 사장님은 안 죽을 거야. 월남전에서도 연병장 열두 바퀴를 다 이기고 살아 돌아온 우리 권 상사님이 왜 죽어. 죽지 말고...

이번 밀수만 끝나면, 다이아 처리하러 갈 겸 나랑 서울 다녀오기로 약속해.”

기약 없는 약속을 했다. 이렇게 말하면 꼭 안 이루어지려나. 둘은 과거라든가 미래라든가 그런 무형의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권 사장님, 내가 아는 걸 공유해달라고 했지?

방에 무기 챙겨둬. 그리고... 배 말고 어깨나 다리를 찔러.”

춘자는 빠르게 다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 분위기라면 누가 먼저든 권 사장과 장도리가 곧 서로를 죽이겠다고 달려들 것이 뻔했다. 진숙이에게 당장 사실을 알리고 장도리와 이 계장이 서로 의심하게 만들어 시간을 벌어야 했다.

  - 너 진짜 나 모르냐?

몇 번을 반복해도 여전히 아픈 말을 꺼내고,

  - 장도리 새끼하고 이 계장, 우리가 잡는다. 그거만 생각해.

몇 번을 반복해도 여전히 이게 조춘자의 목표였다. 권필삼을 죽이려 혈안이 되어있는 두 사람을 권필삼 인생에서 없애는 것. 자신을 몇 번이고 살린 그에게도 앞으로의 날들을 살아갈 기회를 주는 것.

날이 밝고 엄진숙은 이 계장을 찾아갔다.

다방을 나선 조춘자는 다음 계획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하다 문득, 저가 늘 품 안에 가지고 다니던 수첩을 호텔에 두고 왔음을 깨닫는다. 아, 설마 권 사장이 그걸 봤을까. 춘자는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506호의 방문이 열리고, 조춘자가 주저하며 방으로 들어선다. 춘자의 커다란 눈망울은 공포로 가득 차 있다.

권 사장은 춘자가 애지중지하던 수첩을 손에 들고 그녀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춘자 씨, 우리 얘기 좀 해.”

마음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게...”

순간 춘자의 밝은 갈색 가발이 휙 벗겨진다.

이 계장과 장도리 사이를 갈라놓기 전에 장도리 쪽이 너무 빨리 움직인 탓이었다. 이번 회차에는 장도리와 이 계장이 이렇게 돈독할 줄이야. 조춘자는 자신이 계획할 수 없는 것들이 폭풍처럼 몰아치자 불안에 떨었다.

  “무슨 얘기? 나도 좀 껴주셔.”

춘자의 흑갈색 머리를 잡아챈 장도리가 뒤에서 음흉하게 웃으며 나타난다. 필삼의 절망 섞인 눈빛이 단숨에 변했다. 어쩌면 그 공포로 가득찬 춘자의 표정이 자신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서일까, 그의 눈빛에는 오히려 생기가 도는 듯 했다.

권필삼은 바로 경계 태세를 취했다. 늘 그의 유일한 무기였던 얼음송곳 대신에 춘자와의 독대에서 꺼내들었던 커다란 칼을 손에 쥐었다. 춘자에게는 또 그의 맹수 같은 눈빛을 마주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춘자 씨는 놔 줘. 추하게 굴지 말고.”

  “이야-, 아주 소설 주인공 납셨어? 어엉? 그 쪽이 조춘자 애인이라도 돼?”

위협적인 권 상사의 태도에 장도리는 팍 하고 춘자를 밀친다. 필삼은 다시 장도리가 춘자를 채가기 전에 빠르게 춘자를 민트색 타일로 도배된 화장실에 밀어넣었다. 오늘도, 꼭 다시 돌아오겠다는 확신에 찬 그 눈빛으로.

  “당신이 알려준 덕에 오늘은 칼도 있어.“

  ”춘자 씨, 나 누군지 알지.”

권 사장이 장도리와 싸우러 가면서 춘자에게 이런 말을 건넨 것은 처음이었다. 결국 장도리와의 싸움을 막지 못했지만, 이번엔 권 사장 쪽에서도 미리 준비한 싸움이니 다르지 않을까 기대하는 게 춘자가 영원 같던 시간동안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덜덜 떨리는 몸을 안정시키려 피가 날 정도로 주먹을 꽉 쥐고 춘자는 기다렸다.

날이 부딪히고 물건이 깨지는 소리가 차츰 잦아들고,

문이 열렸다.

이마에 선혈이 흐르는 필삼이 문고리를 잡은 채 춘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왼가슴은 칼날도 상처도 없이 깨끗했다. 권 사장의 뒤로, 나무판으로는 미처 막지 못한 어깨와 다리를 다친 장도리가 쓰러져있다. 둘은 그렇게 거친 숨을 몰아쉬며 불덩이처럼 타오르는 눈빛이 사그라들 때까지 서로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살아나는 세계가 단 하나는 있었다.

  권 사장님, 조금만 참아. 우리 병원 가자. 병원 가면 괜찮을 거야. 정신이 들어? 얼른 밖으로 나가자. 다 괜찮을 거야.

아니, 당신이 살아나는 세계가 단 하나는 있는 줄로 믿었다.

덫이었다.

  “이 밀수꾼 연놈들이 어디 갔나 했더니 여기서 따-악 작당을 하고 있었구만.”

이 계장이 권 사장을 부축하는 춘자 앞에 엽총을 겨누고 섰다. 미친 새끼. 이 동네 한 가운데 호텔 앞에서 총을 쏘겠다고.

  “빨랑 다이아 위치 불면 살려주고. 내가 느그들 여기서 죽이면 나만 깜빵 가지 안 그래? 난 밀수꾼 신고해서 잡아 처넣으면 그만이여, 죽일 마음까진 없은께 얼른 불어.”

되도 않는 소리. 지난 회차에서 바다에서 해녀들한테 총질하던 걸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죽일 생각이 없어?

당장 도망쳐야 한다. 밖에 있는 사람들의 주의를 끈다면 이 계장도 쉽게 총을 쏘지는 못할 것이다. 춘자는 온 몸을 가득 채운 상처로 축 늘어진 필삼을 끌어안고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권 상사 이 씨발 새끼가-”

언제 나타난 건지 장도리가 다리를 절뚝거리며 뒤쪽에서 달려들었다.

생각할 새도 없이 커다랗고 뜨거운 몸이 춘자를 순식간에 감싸 안았고, 그 다음 춘자가 본 광경은 날카로운 칼이 몸통을 관통하고 있는 권 상사였다.

우리는

함께

추락했다.

권 상사 등에 칼 꽂고 다닌다던 식구는 다름 아닌 저였나보다. 피가 울컥 울컥 쏟아지는 권필삼을 끌어안고 조춘자는 또 다시 울었다.

  “이번엔 정말 당신을 살린 줄 알았어... 나도 당신에게 매번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고 싶었어...”

  “춘자 씨가 겪은 미래에는..., 이런 결말은 없었나 봐. 이런 눈으로 우는 걸 보면...”

아, 다 알고 있었구나. 그 거짓말 같은 이야기를 믿고 또 나를 살린 거구나.

  “나한테, 춘자 씨는,”

고개를 숙여 얼굴을 가까이 댄 춘자에게 필삼은 꺼져가는 마지막 숨으로 지난 날의 고백에 대답했다. 춘자의 커다란 눈이 잠시 흔들리더니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너 이 새끼 누구 마음대로 죽이래, 당황한 이 계장이 다시 쓰러진 장도리의 멱살을 잡고 소리쳤고, 멀리선가 경찰차 소리가 들렸지만 소란 속에서도 춘자의 시야는 필삼과 함께 고요히 캄캄해져만 갔다.

그들은 수직 관계였다.

바닥으로 추락한 상황에서도 조춘자의 위에는 그녀를 마지막 순간까지 감싸안은 권필삼이 있었다. 그들의 관계는 아주 깊어서, 그들을 향해 위에서부터 꽂힌 칼날은 조춘자에게 닿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 칼날의 무게를 온전히 감당해야 하는 건 아래에 깔린 조춘자였다.

- 머무는 곳 그 어딜지 몰라도

나 외롭지 않다네

언젠가는 떠나야 할 그 날이

빨리 왔을 뿐이네

당신이 살아나는 세계는,

단 하나도 없었다.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렇게 쉽게 체념하지도 않을 거야 춘자 씨는 강인한 사람이니까.’

권필삼이 했던 그 고백이 마치 살려달라는 듯 조춘자의 가슴을 숨 막히도록 눌렀다.


week8 <고백>

민샤 (@twzerf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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