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신 / 탐카베

[ 탐카베 ] be mixed -1화-

최초 발행 2023.04.30 / 카베TS / 아카데미아 시절 날조 / 연재물


1

“차라리 나와 만나는 게 어때.”

카베는 포켓 피타를 먹고 있었다. 아카데미아를 졸업하려면 과제는 물론 여러 사람과 협업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해야 했다. 오늘은 자신이 좋아하는 과제에 몰두하다가 오후 세 시가 지나서야 겨우 식사를 하던 참이었다. 그는 입안 가득 야채와 빵을 담고 있어서 바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차라리, 라는 말은 어떤 것보다 그 뒤에 이어지는 선택이 낫다는 의미였다. 물론 상대는 후배 중에서도 굉장한 녀석이었지만…. 생각이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동안에도 알하이탐은 자신의 앞에서 잠자코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표정이나 태도 모두 평소와 비슷해서 음식을 전부 목으로 넘기기 전에 어떤 낌새를 읽어내는 건 가볍게 실패했다.

“……. 잠, 잠깐만! 나 이것 좀 마저 먹고.”

“편할 대로 해. 급한 건 아니니까.”

마치 빌려준 책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태평한 어조였다. 그가 자신에게 푸스파 커피숍에서 사 온 커피를 내밀었다. 카베는 작게 고맙다고 말하고 차가운 금속 재질로 만들어진 컵을 받았다. 그리고 포켓 피타를 천천히 먹으면서 그가 차라리, 라고 말한 이유를 추측해보았다.

아카데미아에 입학했을 때부터 카베는 인기가 많았다. 훗날 묘론파의 빛이라는 별칭을 얻을 만큼 뛰어난 인재기도 했지만 다정다감하고 남을 도와주길 좋아하는 성격이다 보니 자연스레 곁에 사람이 머물렀다. 아카데미아에서 학문을 쌓고 관계를 맺다 보면 동성조차 끈끈하게 이어지곤 했는데 하물며 이성끼리는 말할 것도 없었다. 카베 역시 몇몇과 마음과 몸을 나눈 적이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오래 가지 않았고, 길게 이어지더라도 끝을 내는 건 언제나 상대였다. 카베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람을 거절하지 못했다. 어쨌든 호감을 가져주는 건 기쁜 일이고, 또 사양할 이유도 없었으니까. 그러다 보니 지금도 본의 아니게 세 사람을 동시에 상대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중 누구와도 사귀는 건 아니라서 서로에게 알릴 필요는 없었다. 물론 고된 하루 도중에 갑자기 불러내서 섹스를 요구해서 피곤한 적도 있었지만 카베 자신의 욕구가 없는 것도 아니었고 딱히 서로 손해를 보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카베는 커피를 절반쯤 마셨다. 탁 트인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했다. 한낮의 수메르 성을 소중한 씨앗처럼 품은 삼림은 짙은 초록빛이었고 지상의 소음이 공기를 타고 두 사람이 서 있는 곳까지 올라왔다. 이런 명확한 것들에 비하면 알하이탐의 속마음은 좀처럼 알기 어려웠다. 맛조차 제대로 음미하지 못한 채 포켓 피타는 전부 사라졌다. 카베는 조심스럽게 잔을 양손으로 만지작거리면서 할 말을 정리했다.

“…네가 날 그렇게 여겨주는 건 물론 기쁘긴 한데.”

그와의 대화는 즐겁고, 함께 있는 것도 좋았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지금까지 쌓아왔던 관계를 바꾸자니 망설여졌다. 카베는 한번 만났던 상대와 연락을 지속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상대가 원하지 않았다고 하면 좋을까….

“그럼 만나면 되겠군.”

고집스럽다고 생각하는 한편 그가 의견을 굽히지 않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 같아서 카베는 뺨을 살짝 붉혔다. 알하이탐이 스스로의 감정을 확신한다면 자신도 괜찮을 것 같았다. 카베가 고개를 떨어트리며 흰색 튜닉 아래로 드러난 얕은 신의 코끝에 시선을 주었다. 그는 한쪽 발을 다른 발의 뒤축으로 숨겼다.

“…좋아.”

“그래.”

그게 전부였다. 카베는 조심스레 알하이탐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 나름대로 카베의 대답이 중요했는지 내내 들고만 있던 커피를 그제야 마시고 있었다. 바람이 불자 청록빛 모자가 누르고 있는 머리카락이 흩날려서 그의 뺨이 드러났다. 흰색 반창고…. 어디 다쳤나? 카베가 무심코 팔을 뻗었다가 그에게 닿기 전에 손을 움츠렸다. 하지만 알하이탐이 모를 리 없었다.

“책을 읽으면서 걷다가 벽에 부딪혔어.”

“조심해야지. 괜찮은 거야?”

“약간 멍이 든 게 다야. 어쩔 수 없어, 무척 재밌는 책이었거든.”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면서도 알하이탐은 이 상처를 남긴 상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애초에 부끄러운 짓을 하고 다닌 건 상대였고, 자신에게 고작 희미한 멍 자국 하나 남겼을 뿐이니까. 상대는 오늘 출석조차 하지 못했다. 그는 묘론파 학자 중 하나였는데 며칠째 동료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조만간 카베와 사귈 것이라고 떠들고 다녔다. 카베에 대해 떠도는 어떠한 소문이 바로 근거였다.

‘말만 섞어도 넘어온다니까. 좋아한다고 하면 몸이고 마음이고 뭐 금방 내주는 애라고.’

그는 카베의 장점을 그렇게 일축하고 판단했다. 묘론파 학자들만 모였었기에 알하이탐은 그 장소에 없었지만, 그런 소릴 전해 들은 이상 찾아가 조용히 처리하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사실 몇 개월 전부터 카베에 대한 뒷소문은 무척이나 좋지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 소문의 주인공이 나쁜 게 아니라, 그간 만났던 상대가 잘못이었는데 카베는 한 명이고 그들은 여럿이다 보니 초점은 카베에게 맞춰지고 만다. 카베의 사람 보는 눈이 없다고도 할 수 있었지만, 알하이탐은 딱히 그것조차 카베의 탓이라고 여기진 않았다. 지금 사이좋은 상대가 언제 돌변해서 질 나쁜 소문을 퍼트릴지, 아닐지 한눈에 알아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심지어 카베가 현재 셋과 섹스 파트너를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공공연히 퍼져있었다. 그 셋은 카베를 두고 누가 먼저 임신시킬지 내기하자며 우스갯소리를 나누었다. 누구도 정말 아이를 원하는 건 아니었다. 

소문의 당사자는 가장 나중에 알게 되는 법이었다. 알하이탐은 카베가 그 얘기를 직접 듣기 전에 셋이 더 이상 그러한 말을 화제에 올리지 못하도록 처리했다. 신중하고, 문제없는 방법으로 그들을 곤란에 빠트린 다음 이제 자신과 카베가 사귀는 사이가 되었으니 상황은 완전히 정리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성실한 카베는 아마 셋에게 서신을 보내 연인이 생겼으니 앞으로 섹스 파트너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고 알릴 것이다. 겨우 일단락되었다는 생각이 들자 가볍게 한숨이 나왔다. 하지만 소문이 잠식될 때까지 알하이탐은 상황을 살필 예정이었다. 그는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따져보는 성격이었다.

“오늘 과제는 언제 끝나지?”

“으응? 아, 글쎄. 저녁 이후로도 계속 남아서 할 것 같은데.”

약간 어색하게 굳어있던 카베는 화제가 학자들의 공통 주제로 돌아오자 아까보다 편하게 대답했다. 그들에게는 끝나지 않는 일상이었다. 하지만 알하이탐이 일정을 물은 건 평소와 같은 이유가 아니었다.

“네 집에 초대해. 저녁을 함께 먹고 싶어. 나도 할 일을 가져갈 테니까 방해될 걱정은 말고.”

“응? 집, 집에?”

사귀자마자 자신의 집에 오겠다고? 그러니까, 둘이 있으면 결국…. 식사를 대접하는 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단둘인 공간에서 과제가 잘 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방문을 위한 구실에 가까울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알하이탐이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게 놀랍기만 했다. 카베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지만 거절할 도리가 없었다. 어차피 지금이건 아니건 언제든 알하이탐은 카베의 집에 올 수 있었다. 알하이탐이 그러고 싶다면 얼마든지…. 카베가 붉어진 뺨을 감추려고 옆 머리카락을 쓸어내린 다음 초조하게 양 손바닥을 맞대고 꾹 눌렀다. 긍정 외에 달리 할만한 말도 찾기 어려웠다. 알하이탐은 대답을 들은 즉시 고개를 끄덕이고 카베의 손에 들린 빈 잔을 가져갔다. 푸스파 커피숍에 직접 돌려줄 모양이었다. 그가 커피숍으로 향하는 둥글게 꼬인 길목을 따라 내려가면서 카베를 돌아보았다.

“6시 반에 아카데미아 정문에서 봐.”

“…그, 그래! 이따 봐….”

시야에서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카베는 그대로 서 있었지만, 알하이탐은 다시 돌아보지 않았다. 거센 바람이 결국 카베의 청록빛 모자를 날려버렸다. 그는 모자가 아래로 떨어지기 직전 간신히 낚아챘다.

알하이탐은 약속한 시각을 정확하게 지켰다. 하지만 카베는 늦느니 차라리 미리 나와서 기다리는 편이었다. 덕분에 카베가 둘둘 말린 설계도와 도구를 챙겨 들고 통행에 방해되지 않도록 정문에서 약간 비켜선 모습을 관찰할 수 있었다. 이 시간이면 아카데미아 정문은 휴식 혹은 저녁 식사를 챙기느라 드나드는 학자들로 붐볐다. 내일이면 충분히 의도대로 새로운 소문이 퍼지겠군. 알하이탐이 확신하면서 카베에게 다가가 다분히 의도적으로 그의 어깨를 감쌌다. 자신이 오리라는 걸 알았을 텐데도 카베는 흠칫 놀랐다.

“저녁은 사서 들어가도록 하지.”

“뭐 먹고 싶은데? 번거롭지 않은 건 직접 만드는 게 맛있지 않아?”

“그럼 우림 샐러드만.”

카베가 자신보다 20cm는 작았으므로 알하이탐은 의식해서 보폭을 조절했다. 둘은 바자르로 향했다. 탄두리 치킨과 미트볼, 파디사라 푸딩을 구입하고 카베의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사방이 온통 아름다운 감청색으로 물든 뒤였다. 불 꺼진 집에 귀가하는 게 싫어서 아카데미아에서 밤을 새울 때도 많은 카베였지만 이 순간엔 긴장한 탓에 그것조차 잊었다. 카베가 열쇠로 잠금장치를 풀고 안으로 들어섰다. 

“들어와….”

그가 평소처럼 주홍색의 스탠드를 켰다가 허둥지둥 천장 조명까지 밝혔다. 그러자 난장판인 거실이 약간의 꾸밈도 없이 전부 드러났다. 한입 먹다가 바닥에 내려놓은 샤와르마의 종이 포장지부터 먼지를 뒤집어쓴 채 쌓여있는 접시의 산과 동그랗게 말리거나 소파 위에 겹겹이 걸쳐진 의복까지…. 온갖 잡동사니가 나뒹구는 탓에 카펫이 깔린 바닥에는 발 디딜 틈조차 거의 없었다. 카베는 요령 있게도 그것들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거실 테이블로 다가가 적당히 물건을 한쪽으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홀로 사는 학자의 집이란 대부분 이런 모양새가 되리라는 것을 알하이탐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대부분은 식사가 제공되고 방 정리를 해주는 하숙을 선택한다. 집이란 건 편히 휴식을 취하는 공간이었으니까. 침대 방의 문도 열어둔 채 오랫동안 닫지 않은 듯 물건이 입구를 막은 데다 안이 훤히 들여다보였는데, 응접실에 비하면 그나마 나았지만 큰 차이는 없었다. 그는 방의 혼란보다 여기서 생활하는 카베의 상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잠은 제대로 자고 있는 건가? 식사는?

알하이탐이 생각에 잠긴 사이 카베는 테이블 위에 포장한 음식들을 올려놓았다. 왜 계속 현관에 서 있는 거지? 의아하게 알하이탐을 보던 카베의 뺨이 순식간에 화끈 달아올랐다. 혹시…. 더러워서? 오랫동안 방치한 탓에 자신에겐 익숙한 풍경이었지만 사실 집안은 손도 댈 수 없이 엉망이라는 것을 그때야 퍼뜩 인식했다. 당황한 카베가 손을 내저으며 서둘러 알하이탐을 향해 다가서다가 궤짝을 걷어찼다. 아픈 건 물론이고 궤짝 위에 쌓아둔 물건까지 쏟아졌다. 카베는 손으로 무릎을 문질렀다.

“미, 미안…. 저기, 그러니까. 과제가 너무 바빠서, 치울 시간이 도저히 없더라. 밖으로 나가는 게 좋겠어.”

왜 잊어버렸을까?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은 한 번도 집으로 데려온 적이 없었다. 그들도 궁금해하지 않긴 했지만…. 아카데미아에 출석하거나 외출할 때, 카베는 언제나 의복과 겉모습을 깔끔하게 단장했다. 그러나 집은……. 벌써 몇 개월 동안 방치된 이 공간은 자신의 비밀이었다. 도저히 보이고 싶지 않았고 감추고 싶었는데. 계속해서 뺨이 화끈거렸고, 수치와 부끄러움이 섞여 카베는 애매하게 웃어 보였다. 그게, 연구와 과제 탓에……. 아니다. 사실 멀쩡한 이들은 얼마든지 아카데미아의 학업과 일상을 조화롭게 유지했다. 알하이탐에게만은 알리고 싶지 않았는데, 하필이면.

“나가자, 응?”

알하이탐은 여전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카베가 시선조차 맞추지 못하고 그의 옷깃을 끌며 재촉했다. 그러자 커다란 손이 카베의 뺨을 쥐면서 고개를 들게 했다. 차분한 청록빛 눈동자에 비난의 기색은 없었다. 알하이탐은 말보다는 행동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판단했다. 부드러운 무엇이 입술에 스치듯 닿았다. 그에게서 전해지는 체온이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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