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의 밀랍

https://www.youtube.com/watch?v=zo-x4PU8S6g

 바야흐로 생존 앞에 거의 대부분의 가치가 빛을 잃고 퇴색되어 의미가 사라진 시대였다.

 신뢰가 죽었다. 의심과 협잡이 판을 친다. 선의를 찾아보기 힘든 때였다. 사람들을 미덕이라고 부르는 것을 잃었다. 그리고 졸업을 앞둔 어느 날, 그의 누나는 턱을 괴고 이렇게 말했다. 호그와트의 정원에도 장미꽃이 만개한 어느 오월의 하루였다.

 "그래도 우리는 감사해야 해. 엄마가 살던 때보다는 더 나은 시대니까."

 나무에 기대 앉아 책을 읽던 최현우가 쭉 읽어나가던 활자의 나열에서 시선을 떼어내고, 책을 덮어 옆에 놓은 다음 안경을 벗어 그 위에 가지런히 올려두었다. 바로 옆에 앉아 무릎 위에 턱을 올리고 있던 최윤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빙그레 웃는다. 훅, 잔잔하던 공기 사이로 돌연 바람이 분다. 새까만 머리칼이나 교복 자락 따위가 흔들리고, 끝내는 책 위에 올라가 있던 안경이 흐트러졌다. 그 탓인지 언뜻 최현우가 읽던 책의 제목이 드러난다.

 《고대 저주 및 해주의 총론》

 "그러니까 우리도 아마 괜찮을 거야."

 하지만 누나, 그래서 엄마는 죽었잖아. 최현우가 차마 뱉지 못한 말을 속으로 삼킨다.

 그들 남매의 부모가 청춘을 보낸 시절은 지금보다 두 배는 더 어지러웠다고 했다. 머글 사회와 마법사 사회가 모두 안팎으로 시끄러웠을 시대이니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유럽은 그린델왈드와 그를 추종하는 어둠의 마법사들이 장악한지 오래였고, 2차 세계대전이 겹쳐 런던에는 시도때도 없이 공습이 떨어지곤 했다. 엄마는, 그런 시대를 살아내고 죽었다. 최현우가 두 살 때의 일이었다.

 어디선가 짙은 장미향이 바람에 실려왔다.

 최현우가 가만히 손깍지 낀 양손을 무릎 언저리 위에 올렸다. 최윤이 곁에서 노래하듯 말을 이었다.

 "엄마도 분명히 우리에게 그때보다 나은 미래를 물려주고 싶었던 거였을 테니까."

 티 한 점 없이 맑은 그 얼굴을 물끄러미 본다. 그리고 최현우는, 그 순간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매커니즘에 의해 우연히 읽게 되었던 아빠의 일기장 속 내용을 떠올리고야 만다. 결코 그 상대에겐 더이상 가 닿을 수 없는 편지로 된 기록들을. 

 '연우씨, 나는 가끔 우리 아이들이 너무 연우씨를 닮은 것 같아서 두려울 때가 있어요.'

 그리고 동시에 최현우는 깨닫는다. 그는 결코 그의 누나를 말릴 수 없음을. 그리하여 허공에 대고 답이 돌아올 리 없는 질문을 던져볼 뿐이다.

 아빠, 아빠가 두려워한 건 이런 결말이었을까?


 비보가 들려온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 정확히는 최윤의 졸업식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학기도, O.W.L도 끝난 만큼 도서관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 최현우를 래번클로의 누군가가 불러냈다. 네 누나가 도서관 앞에서 널 찾고 있다고. 책을 덮고 나갈때까지만 해도 상상조차 못한 일이었다. 최윤은 무언가를 꾹 눌러참는 듯한 얼굴을 하고 종종거리며 서 있다가, 최현우가 나오자마자 와락 제 동생을 끌어안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런 누나의 등 위에 말없이 손을 얹으며 최현우는 직감했다. 그리고 그 예상에서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최윤이 흐느낀다. 아빠가 돌아가셨대.

 이것은 예상했던 결말이었으나 동시에 지금 벌어질 것이라곤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최윤의 졸업식은 고작 내일이다. 최현우는 아직 5학년에 불과하다. 사실상 경고임이 분명한, 부고 편지의 새하얀 서간에서 묻어나오는 것은 그들 남매를 압박하고 있는 적의 조급함이었다. 전혀 웃을 상황이 아님에도 최현우는 웃었다. 빌어먹게도 그 사실만이, 조금쯤은, 유일하게 유쾌했다.

 최윤의 졸업식조차 치르지 못하고 남매는 급하게 호그와트를 떠났다. 조문의 의미를 담은 편지가 산더미같이 날아왔으나 하나같이 그 이면에 담긴 경고는 종류가 같았다. 지금은 기껏해야 포기해야 하는 것이 졸업식 정도겠지만, 이대로 쭉 경고를 무시하다간 무엇을 더 포기하게 될 지 모른다는.

 병원에서는 아빠의 죽음을 두고 자살이라고 했다. 기적적으로 의식을 되찾은 사이에 그런 선택을 한 듯 하다고. 최현에게 걸려 있던 저주가 워낙 고통스럽던 종류였던데다, 평소에도 크게 삶에 대한 의지가 보인 인물은 아니었으니 충분히 그럴 만도 하다고 덧붙였다. 웃기지도 않는 소리였다. 엄마의 사후 아빠가 마음 한구석의 어딘가가 완전히 죽어버린 사람처럼 굴고 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섣불리 자살을 택할 사람은 아니었다. 최현우가 채 성인조차 되지 않은 나이인 것을 감안하면 더욱. 타살이거나 최소한 타의적 자살임이 분명한 이 상황에서 유일하게 위안거리로 삼을 만한 사실이 있다면 기어코 유언장을 남기지 않는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장례는 조촐하게 치러졌다. 그리고 장례식의 마지막 밤, 둘만 남게 되자 최현우가 먼저 돌연 입을 열었다. 새까만 빗줄기가 창문을 연신 때리던 밤이었다.

 "가주 승계 같은 거 받을 생각이면 당장 집어치워."

 "…현우야."

 "문 닫고, 집안 걸어잠그고, 내가 졸업할 때까지 틀어박혀서 칩거하란 소리야.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동생 졸업할 때 까진 집안일 함부로 결정 못 한다고 해."

 이 악물고 내뱉어지는 말은 한치의 흔들림이 없었다. 최윤은 그저 애매하게 웃는다. 대답 없이. 최현우의 언성이 조금 더 높아졌다.

 "이러라고 아빠가 일부러 유언장도 안 남긴 거야. 몰라? 빌어먹을. 아빠 노력 헛고생으로 만들지 말고 내 말 좀 들어!"

 "우리 현우, 가주가 하고 싶었어? 그럼 말을 하지."

 장난스런 얼굴로 샐샐 웃으며 어물쩍 넘어가려는 제 누나를 최현우가 잠시 노려본다. 그 시선에 주춤거린 최윤이 입을 비죽이며 투정을 부렸다.

 "알았어. 진지하게 이야기하면 되잖아."

 "…무슨 이야기인지 알잖아. 시간을 벌자고. 누나 지금 아빠 자리에서 혼자 버틸 수 있어? 안 될 거잖아."

 가문의 마지막 남은 막내딸이자 직계 혈족이었던 엄마가 죽은 이후로, 수많은 세력들이 주인 없이 텅 빈 가문을 탐내 벌떼처럼 몰려들었다. 집안에 남은 것은 성조차 갖지 못했던 가주의 남편, 각각 갓 네 살과 두 살이 된 어린 아이들. 최현은 최소한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가문을 지키기 위해 섰다. 

 "아빠는 수완 좋은 슬리데린이었지. 생존을 위한 줄타기 같은 건 곧잘 해낼 수 있고, 가장 중요한 걸 위해서라면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뭐든 이용할 수 있는. 그러니까 여기까지 버틴 거야. 누나는 그거 할 수 있어? 아니, 못 할걸. 뒤도 안 돌아보고 옳은 길로 갈 거잖아."

 최현우는 냉랭했다. 날카로운 어조가 새벽의 차가운 공기를 가르고 꽂힌다.

 "누나는 타협하지 않는 사람이니까."

 그리고 그들 가문을 노리는 세력의 선봉에, 어둠의 마왕이라고 불리는 사내가 있었다.

 죽음을 먹는 자들은 정연우의 사후 꾸준하게 자신들과 합류할 것을 요구해 왔다. 최현이 지난 십여년간 그들의 요구를 교묘하게 회피해 온 논리는 '가문을 물려받을 주체는 아이들이며 나는 대리에 불과하다, 결정권이 없다'따위였다. 그렇게 약 십여년의 시간을 벌었다. 최현우까지 성인이 되고도 영국 마법사 사회의 상황이나 방향이 여전히 나아지지 않았다면 적당히 가문의 이권 다툼이나 후계 자리 싸움을 두고 타협이 되지 않은 척 시간을 끌 요량이기도 했다. 변수가 생긴 것은, 그들의 압박이 점점 심해졌을 무렵의 일이었다. 정확히는 2년 전, 갓 최현우가 4학년에 올랐을 때다.

 아버지가 고서를 읽던 도중 그곳에 걸려 있던 정체모를 고대 저주에 당했단 소식이 날아들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들 남매의 아버지는 저주가 걸린 책을 읽다가 아무렇게나 저주에 걸릴 허술한 인간은 아니었다. 사고로 위장할 일말의 의지조차 보이지 않는 사건의 의도는 누가 봐도 명백했다. 뻣뻣하기 그지없는 거슬리는 가주 대리를 치우고, 말랑한─그래, 그들이 예상하기에─아이들 쪽을 구슬려 보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네 말대로 시간을 벌고 나면?"

 보기 드물게 표정 없는 낯을 한 최윤이 가라앉은 어조로 되묻는다.

 "2년 후에 아무것도 바뀌지 않으면 어떡할건데?"

 그리고 잠시 동안 흐르는 침묵. 

 "현우야, 나도 네 말의 의미 정돈 알아. 그게 대외적으로 네가 가주가 될 거라고 선언하는 거나 다를 바 없다는 건 누나도─."

 입술을 달싹인다.

 "2년 뒤에도 상황이 그대로면, 그때의 부담은 죄다 너한테 떠넘기라고?"

 "─차라리 그렇게 해."

 최현우가 싸늘하게 답한다. 한치의 망설임 없이 떨어진 답이었다.

 "그냥, 제발 누나는 하던 거 해. 후드 뒤집어쓰고 지팡이 들고 뛰쳐 나가서 직접 싸우던지 하라고. 그것까진 안 말릴 테니까─빌어먹을, 그거 제일 잘 하잖아!"

 그러더니 씨근덕댄다.

 "이런 건 그냥 나한테 맡기라고."

 "…현우야, 어떻게 그래."

 최윤이 쓰게 웃었다. 젠장, 최현우가 작게 욕을 중얼거렸다. 그는 저런 미소게 지나치게 약했다.

 "내가 네 누나인데." 

 그의 누나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힘겨운건 저 혼자 다 짊어지겠다는 태도로 군다. 지나치게 희생적인 그 미소를 보고 있자면 아빠에게 다시금 묻고 싶어지곤 했다. 엄마도 이랬던 거야? 그래서 걱정했던 거야? 배려받는 타인의 심정 같은 건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가장 무자비한 방식의 희생. 타협하지 않고 나아가는 걸음들이.

 그냥 둘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럴 일 없게 2년간 어떻게든 할 수 테니까, 내 말대로 해."

 최현우가 한 발짝 물러났다. 그러나 그것은 물러나는 척만 했을 뿐 근본적인 제안에는 차이가 없다. 원점으로의 복귀인 것이다. 최윤 역시 그것을 알고 있으므로, 다시 묻는다.

 "네가 졸업할 때까지, 해결 안 되면?"

 "…도망이라도 가. 어디 외국으로 뜨던지 해. 2년 내로 준비해둘 테니까."

 최윤이 한참을 그 말에 침묵한다. 아주 무언가 할 말이 많은 사람의 태도로, 입술을 달싹인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묵직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현우야, 그건 도피에 불과해."

 최윤이 담담한 어조로 지적한다.

 "외국이든, 2년간의 유예든. 둘 다 문제의 본질적인 부분을 해결해 주지는 못하잖아."

 최현우가 단박에 코웃음을 쳤다.

 "도망치는 건 해결법이 아닐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적어도 시간은 벌어다 줄 테고,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건 시간이야."

 그러더니 대답조차 듣지 않고 말을 계속한다. 빠른 어조였다.

 "도망치는게 뭐 어때서? 도망치면 죽기라도 해? 아니, 오히려 그 반대야. 도망치지 않으면 죽겠지. 겁 좀 먹는 게 그렇게 큰 죄악이라도 돼? 구차하게 살아남는 거랑 당당하게 죽는 거랑 고르자면 나는 당연히 전자야. 일단 살고 봐야 후일도 도모할 수 있는 법이니까."

 그것은 그들 남매 사이에 존재하는, 가장 근본적인 영역에서의 차이다.

 남매를 아는 사람이라면 하나같이 입을 모아 두 사람이 얼핏 보기엔 완전히 딴판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똑같고, 계속해서 한참을 더 보고 있자면 근본적인 영역에서 어긋나 있다고 말하곤 했다.

 그의 누나가 낙관적 현실주의자라면 그는 비관적인 이상주의자다. 최윤이 현실 안에서 최선의 시나리오를 가정하고 나아갈 때 최현우는 최악을 상정하면서도 미래에 있을 이상을 향한 길을 계산한다. 남매의 아빠가 쓰러졌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최윤이 현실적으로 버틸 수 있는 최대한의 기간을 상상하고 행동했다면 최현우는 당장이라도 아빠가 죽을 수 있다는 최악의 가정 아래 저주의 해결책을 찾았다. 둘 사이의 근본적 차이는 그곳에서 오는 것이다. 그 정도의 차이였다. 그러므로.

 그의 누나는, 눈앞의 현실에 절망하지 않기 때문에 타협하지 않는 인물인 것이다. 현실에 절망할 수 있기에, 이상을 위해 타협할 수 있는 그와는 또 다르게.

 최현우가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웃었다.

 너무 올곧은 이는 부러진다. 휘어지느니 스스로 부러질 것을 택하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아마 엄마도, 그렇게 부러졌을 것이다. 아빠는 그렇게 엄마를 잃었을 것이다.

 빌어먹을 그리핀도르들이란.

 타 죽을 것을 알면서도 달려드는 불나방. 밀랍이 녹아내려도 웃으며 도약하는 이카로스. 그 끝이 파멸임을 알면서도 결코 뒷걸음질치는 법이 없다. 최현우가 탄식했다. 왜 그가 지켜야 하는 것들, 지키고 싶은 것들은 죄다 언제나 가장 위험한 곳에 스스로 몸을 내던지는가. 무너질 것을 알면서도 올곧은 죽음으로 나아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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