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의 연인

2021

made in heaven by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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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의 여름은 무더웠다. 햇빛이 닿는 곳마다 눈이 아플 정도로 강렬한 색채를 내뿜어댔다.

차가운 물줄기가 규칙적으로 솟구쳤다가 대리석에 곤두박질쳐 부서진다. 윈저는 얼굴을 얕게 찌푸린 채로 빛 알갱이 너머 일렁이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신기루처럼 시종 밝게 웃는 사람들 너머에 있는 푸른 나무의 그늘, 그곳에서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윈저를 마주 보고 서 있다.

 

 *

 

피렌체로의 출장이 마뜩잖은 이유는 한 손에 꼽기엔 모자랐지만 그 중 가장 주된 이유를 고르라면 역시 테세라 때문이었다. 미국 최대의 범죄 조직 테세라가 돌연 의뭉스러운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 게 지난달의 일로, 손만 까딱하면 범죄자들이 벌벌 떤다는 NYPD는 뭐가 아쉬운 건지 툭하면 루카스 윈저를 긁으며 협조를 요구했다. 아무리 다국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다지만 본국의 공권력에 대항하는 건 무모한 짓이다. 윈저는 최선을 다해 성질을 죽이고 바쁜 와중에도 짬짬이 자료를 보내 가며 십분 협조했다. 정부에게 있어 테세라는 갑이었으나 시날론은 을이었다. 시날론은 범죄와의 전쟁을 공공연히 선포한 이래 줄곧 이런 태도를 내보여왔다. 기업의 속내를 낱낱이 고해바치는 기분이 심히 좋지 않았으나 이렇게라도 썩은 곳을 최대한 긁어내야 한다는 윈저의 생각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래서 쉬는 시간을 줄여가며 버티고 있었던 것인데.

테세라가 움직이기 시작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갑자기 모든 연락망에 불이 나도록 연락이 쇄도했다. 여름 시즌을 맞아 콜라보레이션을 진행하자는 어느 대기업의 러브콜이었다. 평소라면 손해 볼 것 없으니 흔쾌히 수락할 정도의 네임밸류를 가진 기업이었는데, 본사가 피렌체에 있는 데다가 굳이 CEO가 직접 나서겠다는 바람에 윈저도 귀찮은 입장이 되었다. 귀찮은 수준이 아니라 이 일정에 해외 출장을 끼워 넣으려면 한 달 치 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재조정해야 했다. 그러나 개인의 편의로 기업의 이익을 내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은근한 거절 의사만 내비쳐둔 뒤 윈저는 한동안 그 일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문제는 그가 눈을 돌린 사이에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변명이 먹히지 않았는지 홍보팀의 보고 내용이 영 부진해지더니 경찰국의 이름을 빌리지 않고서는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윈저는 그즈음 결국 폭발했다. 감히 타국 기업 앞에서 경찰국이니 범죄 조직이니 하는 상소한 사정을 들먹일 수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평소보다 세 배는 날카로운 상사의 비위를 맞추느라 부하들은 대단히 고생했지만, 이러나저러나 그들에게는 잘된 일이었다. 다만 밝은 전망과 함께 만날 날을 고대하는 초고를 작성하던 윈저는 분명히 악에 받쳐있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난 지금, 윈저는 제 발로 피렌체 광장에 나와 외설스럽게 생긴 청동 분수나 구경하고 있는 것이다.

 

출국하기까지 이틀이 남았다. 뉴욕에서 연락을 이어갈 때도 막무가내였던 주최 측은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 것도 빨랐다. 줄곧 짜증만 유발하던 태도가 오늘만큼은 도움이 되었다. 예상보다 일찍 끝난 회의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윈저의 성질을 감당해야 하는 출장 인원들의 숨을 겨우 트여주었다.

원래대로라면 어떻게 해서든 계약 날짜를 당긴 뒤 도장을 받아내는 대로 귀국할 생각이었으나 일이 쉽게 풀리니 마음이 너그러워졌다. 윈저는 출국시간을 저녁에서 오전으로 변경하기만 하고 날짜는 그대로 두었다. 그 결정을 내린 데에는 윈저가 대단한 범법자라도 되는 양 거드럭거리던 NYPD의 태도도 한몫했다. 책임을 지겠다 공언한 건 어디까지나 시날론의 향후 발전 방향이지 가족의 허물이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윈저는 수행비서에게 반나절 정도의 자유시간을 통보하고 그의 얼굴이 내심 밝아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발탁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그 직원은 윈저의 성격을 감안하더라도 윈저를 유달리 어려워했다.

비서의 자유는 곧 윈저의 자유를 의미하기도 했다. 반쯤 충동적으로 내려준 찰나의 휴가가 자신의 이야기가 되니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일단 그를 보낸 뒤 윈저는 아무 곳에나 들어가 차가운 라떼를 한 잔 테이크아웃했다.

카페 주인은 관광객이 빠질 시간에 와서 대뜸 라떼를 시키는 외지인이 신기한 모양이었는지, 커피를 내어주며 지나가는 말로 관광 명소를 귀띔해주었다. 평소라면 들은 척도 하지 않았겠지만 오늘은 윈저도 시간을 때울 곳이 필요했다. 커피를 받는 대로 그가 알려준 길로 향했다. 관광을 오기라도 한 것처럼 핸드폰의 지도를 들여다보며 걷다 보니 비로소 탁 트인 광장과 함께 청록색 돔이 그 전신을 드러내었다. 그러나 정오의 잔열과 저녁노을이 겹쳐 광장은 후덥지근했다. 윈저의 눈길을 잡아끈 것은 성당보다도 그 커다란 분수대였다.

분수의 사면을 장식하는 청동 조각상은 광장 중앙에 두기엔 조금 민망하게 생겼다. 당시 사회 분위기에 항거하는 의미의 조각이라고는 하나 취향과는 거리가 멀어 어떻게 봐도 좋게 보이지 않았다―물론 그 조각이 남성이었어도 감흥이 없는 건 여전했을 것이다. 디자인에 있어서 윈저는 특히 고상한 쪽을 선호했다. 가령 시날론의 로고에 박혀있는 굵은 스트라이프 무늬 같은 것.

그러므로 이번 협업은 시날론에게 있어 새로운 도전이 될 것이다. 여태껏 고수해오던 세련된 이미지 속에 로마가 대표하는 정열과 낭만의 심상을 남김없이 쏟아붓는 것이다. 기업이 밀어오던 감성에 변화를 줄 때는 고객층의 확대를 기대하는 게 보통이지만 최고 책임자라면 그 변화가 기존 고객층의 수요에 타격이 있을지 또한 염두에 두어야 한다. 다행히 조금의 변화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고객들은 콜라보 제품을 쳐다보지도 않는 경향이 있었다.

윈저는 만약 자신이 시날론의 대표이사가 아니라 고객이었더라면 분명 예민한 고객 축에 속하리라고 생각했다. 과감한 도전은 좋지만 새로운 시작은 원치 않았고, 고쳐 쓸지언정 새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일각에서는 안일한 대처라 평하기도 했지만 그의 천성과 처한 현실을 생각해보면 어쩔 수 없었다. 승냥이들 사이에서 올가미를 느슨히 하는 게 더 안일한 태도 아니던가.

 

생각을 이어가며 손가락 사이에 끼운 빨대를 한 번 더 물 때쯤,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사람의 마음을 간지럽힐 정도로 기분 좋은 미풍에 광장을 서성거리던 사람들이 단체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들과 분리된 것처럼 멀리서 그들을 관찰하며 커피를 홀짝이던 윈저는 문득 그 사이에서 인영 하나를 찾아냈다. 꼭 자신과 같이 무리에 섞이지 않고 둥둥 떠다니는 이가 있었다. 흘러가는 사람들 사이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왁자지껄한 소음이 아득히 멀어지고 시간이 느리게 흘러갔다.

길게 이어지는 바람이 잎사귀를 뒤흔들자 그 틈새로 쏟아지는 햇빛이 남자의 얼굴 위로 일렁였다. 어두운 눈 안에 빛이 들자 언뜻 푸른빛이 비쳤다가 금세 사라졌다. 그 눈가에 찍힌 흉터가 천천히 우그러지는 것을 보았다. 윈저는 자기도 모르게 빨대를 물고 있던 입을 조금 벌렸다.

그 순간 밀어냈던 현실이 다시금 귓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깃발을 든 관광객 무리가 저마다 다른 주제로 떠들며 분수 앞으로 떼 지어 지나가고, 몇 초 남짓한 그 순간에 윈저는 남자를 시야에서 완전히 놓쳤다. 시끄러운 무리가 떠나고 난 그늘은 아무도 없이 텅 비어있었다. 젖은 입안에는 쌉싸름한 커피 향과 여름의 온기만이 허전하게 감돌았다.

 

*

 

곧장 택시를 잡았다. 매끄러운 발음으로 묵고 있는 호텔의 주소를 불러주며 윈저는 핸드폰 화면을 흘끗 내려다보았다. 유일하게 알림을 켜둔 핫라인이 잠잠했으므로 미련 없이 화면을 끄고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수행비서는 아마 늦은 저녁에나 연락을 해올 것이다. 멍청한 짓이라는 건 알지만 윈저가 고를 수 있는 최선의 선택지였다. 당장 발목 잡힐 곳을 피해 제일 안전한 곳으로 숨는 것.

로비로 들어서자마자 윈저는 한눈팔지 않고 성큼성큼 데스크로 직행했다. 프런트 직원을 재촉하는 데에는 그의 특징적인 인상으로도 충분했다. 복잡한 절차를 성의 없는 몇 마디로 마치고 카드키를 받아낸 윈저는 까마득한 위층에 멈춰 있는 승강기의 버튼을 인내심 없이 꾹꾹 눌러댔다. 기계를 재촉할 수는 없는 노릇인데도 왜인지 그는 그 정도로 조급해져 있었다.

아무도 없는 승강기는 오랫동안 올라갔다. 널찍한 내부는 한쪽 벽이 완전히 유리로 되어있어 올라갈수록 도시의 조망이 탁 트였다. 매일 봐오던 뉴욕과는 확연히 다른 그 풍경은 윈저에게 그가 익숙한 것 중 대다수는 이곳에 없다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창 밖을 내려다보며 윈저는 그새 조금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자신의 숨소리가 제일 큰 소음인 이곳은 광장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처럼 느껴졌다. 아무리 체크인 하기에는 이른 시간에다 향하는 곳이 VIP룸이라지만…….

모든 것이 지나치게 조용하다. 그 탓에 시간 가는 게 훨씬 더 빠르게 느껴졌다. 구두 끝으로 초조하게 승강기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먹먹하게 정적을 채웠다.

맨 꼭대기 층의 복도는 원래 사람을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다. 텅 빈 복도를 가로질러 맨 끝 문의 도어락에 카드를 대자마자 짧은 기계음과 함께 잠금이 풀렸다. 윈저는 곧장 문을 열고 객실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잠금쇠가 맞물리기 직전 미끄러지던 문이 턱 걸렸으나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재빨리 도어체인을 걸고 손에 쥔 손잡이를 힘껏 당겼다. 그러나 거짓말처럼 문은 걸린 그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침착하게 눈을 들어 보니 창백한 손가락이 문의 모서리를 우악스럽게 붙들고 있었다.

그 억세고 두꺼운 손가락은 윈저가 익히 아는 것이다.

 

그리고 문 틈새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손바닥까지도 들어오지 못하는 그 좁은 틈으로는 기껏해야 얼굴 반 쪽밖에 보이지 않았으나 그 정도로도 충분했다. 윈저는 호전적으로 눈썹을 까딱이며 문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여전히 손잡이를 꽉 쥔 채였다. 이럴 줄 알았다는 듯 놀란 기색은 조금도 없이 윈저가 빠르게 속삭였다. 입에 줄곧 붙이고 있던 이탈리아어가 튀어나왔다.

“들키면 어쩌려고 여기까지 얼굴을 들이밀어.”

“들켜? 누구한테?”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유창한 발음의 대답이 돌아왔다. 태평한 한 마디에 기이할 정도로 조용하던 호텔 복도가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윈저는 입속으로 이를 악물었다. 출국 전에 분명 이런 상황 또한 염두에 뒀던 것 같은데, 일정이 바빠 보안을 따로 강화하지 않았더니 결국은 이 사달이 났다. 호텔 이름 뒤에 붙은 별의 개수는 이 수준에까지 다다르면 실로 의미 없는 것이다.

실랑이를 이어가는 대신 화제를 돌렸다.

“소탕 작전이 있는 건 알아?”

또박또박 영어로 속삭였다. 당사자에게는 필히 비밀에 부쳐야 할 이야기지만 이제 와 숨길 것도 없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눈도 끔쩍하지 않았다.

“알지.”

“근데 당신이 왜 이탈리아에 있지?”

“네 작전은 내가 미국에 있는 걸 전제로 짜여있을 테니까.”

고작 그 정도 소란으로 잡히지 않을 거라는 건 예상했지만 실정은 허무한 수준이었다.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온갖 의문을 삼키며 윈저는 맹렬히 그를 노려보았다. 근 몇 달을 위해 윈저가 쏟아부은 인력을 전부 허사로 만들어놓은 주제에 뻔뻔하게도 그의 눈 앞에 버티고 서 있는 것이다. 그것도 고작 문 한 장을 사이에 두고.

이대로 문을 닫으면 테세라가 놓을까? 그라면 손가락이 으스러진대도 버틸지도 모른다. 아니, 애초에 그의 손은 그 정도로는 부러지지 않는다. 테세라의 손이 얼마나 단단한지는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윈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팽팽하게 당겨진 도어체인이 불안한 소리를 냈다. 단단한 이음새를 힐끗 바라본 윈저가 다시 문틈으로 눈을 돌렸다. 자신의 바람과 달리 그는 문을 놓을 생각이 조금도 없는 것 같았다.

그늘진 그의 눈동자는 몇 시간 전 광장에서와 달리 아무것도 비치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

“말로 할 때 열지.”

“…….”

“들어가고 싶은데.”

줄곧 고집스럽게 다물고 있던 입에 차츰 힘이 풀렸다. 무슨 말이라도 할 것처럼 벙긋거렸으나 사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은 없다. 윈저는 마른 입술을 축이다 결국 분에 못 이긴 사람처럼 미간을 좁히며 아랫입술을 물고 시선을 떨궜다. 실제로 화가 나기도 했다. 광장에서 스치듯 마주쳤을 때에도 고요하던 심장이 이제야 쿵쿵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잠시 열로 끈적끈적한 눈을 감았다 뜨며 윈저는 생각을 가다듬었다. 그러니까…….

이탈리아에…… 볼 일이 있었겠지.

설령 없었다고 해도 그가 합동 작전을 알고 있었다면 해외로 도피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오히려 그럴 리 없다고 단정지은 자신이 경솔했다. 거기다 윈저의 스케줄은 문서화되는 족족 윈저가 알지 못하는 경로로 그에게 전달되고 있으니 테세라가 자신을 미행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필 자신의 앞에, 그것도 그렇게 극적으로 등장할 필요가 있었는지가 최대의 의문이었다. 아니…… 다시 생각해보면 사실 의문까지 품을 필요는 없다. 그 광경이 극적…… 그래, 솔직히 로맨틱하다고…… 받아들인 것은 자신이지 테세라가 아니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굳이 여기까지 와서 얼굴을 비추는 그가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가져야 할 감정과 전혀 관계 없이 기분이 살살 풀리고 있는 자신을 경멸했다. 결국에는 희미하게 열이 오른 뺨과 대조적으로 꾹 물린 입술은 하얗게 질려있었다. 윈저는 한참을 고민하고, 스스로를 타이르고, 내면을 다스리다 최후의 보루를 내뱉었다.

“너랑 여기서까지 그러고 싶지는 않아.”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보는 눈은 어디에나 있어. 그걸 네가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되지.”

그리고 이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눈으로 윈저를 지켜본 테세라가 제일 잘 알고 있을 터였다. 바로 대답할 것 같던 테세라는 윈저가 덧붙인 말에 잠시 고민하는 듯했다. 그 동안 윈저는 심장소리를 억누르느라 몰래 숨을 참은 채 그의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반질반질한 구두 위에 제 얼굴이 일그러져 비쳐보이는 듯했다. 붉고 자욱하게 일렁거리는.

여기서 그가 납득하고 돌아가준다면 더할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테세라가 국외에 있다는 건 이미 작전이 실패했다는 의미인데, 이 마당에 대외적으로 봐도 테세라와 윈저가 이탈리아에서까지 만날 이유가 없었다. 물론 그가 돌아가고 나면 윈저는 몇 시간만에 기자회견에서도 발표할 수 있는 변명을 만들어낼 수 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도무지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차라리 쏟아지던 물방울이 빗방울이었고, 햇빛은 희미하고 바람이 거칠었더라면 조금 더 매몰차게 굴었을 텐데. 그리하여 윈저는 기자들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을 내밀어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장은 자신이 없었다. 테세라가 당장 열라며 한 마디 으름장만 던져도 문을 열어버릴 것 같았다. 그러한 생각을 마치고도 남을 정도로 침묵은 길었다. 아니면 형체 없이 맴돌던 속마음을 윈저가 스스로 머릿속에 쏟아버린 것일수도 있었다.

 

애써 마음을 가다듬고 고개를 들었을 때는 얼굴을 덥히던 열기가 가라앉은 상태였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비로소 테세라가 입을 열었다. 조금도 힘을 풀지 않은 손아귀와 다르게 곧은 눈매는 한층 부드럽게 누그러들어 있었다.

“그럼 입단속을 철저히 해야겠군. 이미 충분한 것 같지만, 네가 원한다면…….”

온점을 찍듯 차분한 목소리였다. 그 한 마디가 바람처럼 불어, 때늦은 피렌체의 오후를 몰고 들어오는 것이다.

 

끝의 끝까지 자존심을 세우는 데에는 그를 따라올 사람이 없었으나, 윈저는 가끔 단 한 사람 앞에서 단단히 붙잡고 있던 손잡이를 놓치고 속절없이 문을 열어젖힐 때가 있었다. 그 의미를 테세라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면 윈저는 쉽게 우울해졌다. 이미 어릴 때의 치기라 일축한 감정을 실은 아직도 온전히 품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꼭 어릴 적 불 꺼진 방으로 돌아간 기분이 되어 낡은 부분을 깁지 않으려면 과거와의 자신과는 다르다는 증거가 필요했다.

그래서 윈저는 또 한 번 자물쇠를 풀고 천천히 문을 열며 속내를 포장해줄 만한 변명거리를 생각해냈다. 알고 있다는 건 어디까지나 전제일 뿐이며 테세라는 과거의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고. 나이조차 제대로 가늠하지 못하던 그 아니던가. 그건 윈저가 그와 나란히 서는 순간을 얼마나 고대해 왔는지도 알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과거의 열등감과 불안함 같은 건 그가 잊어줄 때 따라 잊고 싶다.

새로운 시작 같은 건 원치도 않는 주제에, 윈저는 한때 애틋하게 간직하던 과거를 멀리 밀어놓고…….

 

아무리 당겨도 끊어지지 않던 체인은 손짓 한 번에 부드럽게 풀렸다.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윈저는 완전히 드러난 그를 바라보다, 몇 걸음 물러서 자리를 내주었다. 테세라가 아무렇지 않게 문턱을 넘어섰다.

피렌체의 햇빛에 묻어있던 낭만이 밀려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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