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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구구

made in heaven by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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좆됐다. 시외버스가 고속도로 한복판에서 5분 정도 멈춰있었을 때쯤에 구찬형은 그런 생각을 했다. 이미 만원인 버스를 보고 설마 싶던 게 슬슬 밀려드는 차들을 보며 확신으로 바뀌었다. 저녁 시간을 기다리는 게 자신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수능 끝나는 시간이 언제더라, 나 때는 5시였는데. 아니 왜 구승호는 갑자기 제2외국어를 본다고 해서 사람 헷갈리게 만들어. 구찬형은 버스 봉손잡이를 잡은 채 초조하게 핸드폰을 켰다가, 카톡을 켰다가, 여전히 답이 없는 구승호와의 채팅방을 보고 다시 화면을 끄기를 반복했다.

오후 7시.

사실 제2외국어라고 해서 특별히 시험시간이 긴 것도 아니고, 결국은 거기서 거기라 아무리 늦어도 6시 전에는 끝이 났을 것이다. 그런데 구승호는 지금까지도 전화도 안 받고 카톡도 안 보고 연락이 없었다. 그럴 수 있지. 하지만 끝나고 같이 밥을 먹기로 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구찬형이 한 시간이나 늦었고, 구승호랑 밥을 먹어줄 가족이 구찬형밖에 없다면 더더욱.

 

1년 전 구찬형이 수능을 본 이유는 단 하나, 막 수능시험을 마친 고3의 수험표는 미성년자 탈출을 목전에 두고 누릴 수 있는 최대의 혜택이기 때문이었다. 용돈이 부족한 건 아니지만 수험표를 내밀며 전국에서 떠받들어주는 기분을 만끽하는 건 지옥 같은 교실 분위기에 지친 고3이라면 자연히 갖게 되는 로망이니까. 그렇게 단순한 이유로 가볍게 임하려는 수능을 굳이 응원하겠다며 올라온 부모님은 끔찍한 수도권 교통편에 질렸고 마침 손에 꼽게 너저분했던 자취방에 경악했다. 그래도 일단 수험생은 수험생이니 사준다마는—그런 의미의 진수성찬을 앞에 두고 쏟아지는 폭풍 같은 잔소리를 들으며 구찬형과 구승호는 드물게 음식 앞에서 속이 얹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구승호가 10월쯤 내렸던 결론은 이랬다.

엄마, 나 수능 볼 때는 안 올라와도 돼.

아무리 그래도 아들이 수능을 보는데……. 느이 형 볼 때는 아빠랑 가서 밥도 사줬는데……. 그렇게 말하는 어머니의 목소리는 말과 달리 어물쩍거렸고, 구승호는 핸드폰을 붙들고 목소리를 단호하게 했다가, 답잖게 어리광을 부리다가 했다. 아냐, 진짜 올라오지 마. 성적 보는 것도 아닌데 뭘 응원을 해. 아 진짜 안 섭섭하고 진짜 괜찮아. 내가 언제 그런 거 신경 썼어요. 형이랑 밥 먹을게. 괜찮지? 재차 확인을 거듭하던 어머니는 그제야 마음이 놓인 목소리로 알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구찬형은 눈썹을 들썩이고 ‘내가 같이 먹어준다’고 했다. 본 목적은 부모님을 안심시키는 데에 있었지만 어쨌든 그 대답에 구승호는 기뻐했다. 설마 거절당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웃는 얼굴을 보고 입꼬리가 삐죽 따라 올라간 것은 사실이었다. 구찬형은 구승호 앞에서 형 노릇 할 때가 좋았다.

분명 그랬었는데 세상일이 마음처럼 쉽지가 않았다.

달팽이마냥 기어가고 있는 걸 보니 고속도로가 아니었다면 당장 다음 정류장에서 내리는 게 차라리 나을 정도다. 콩나물시루마냥 빽빽이 서서 김이 서린 유리창과 핸드폰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손이 웅 울리며 핸드폰 화면이 켜졌다. 구승호. 지금 이 순간 누구보다 반갑지만 내심 받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그래도 매도 일찍 맞는 게 낫다고, 급하게 팔을 움직이느라 스포츠백이 주위 사람들을 툭툭 건드렸다. 주변에서 불편해하는 듯한 뒤척임이 들려왔다. 신경 쓰지 않고 전화 연결이 된 핸드폰을 귀에 바짝 가져다 댔다.

소리가 작은 건지 말을 안 하는 건지. 귓바퀴가 아플 정도로 힘을 주고 있으면 규칙적인 숨소리 끝에 평이한 목소리가 짧고 빠르게 읊조렸다.

"어딘데."

제대로 대답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끊어버릴 것 같았다. 구찬형은 참고 있던 말을 우다다 쏟아냈다.

"승호야 삐졌냐? 아, 버스가 존나 안 가네. 톨게이트 지났고 다다음 정류장에서 내려. 택시 타고 갈까? 아니, 걍 내리자마자 콜택시 부를게. 진짜 빨리……."

"뭘 삐져. 그냥 천천히 와."

나 집 왔어. 한숨과 함께 떨어진 이야기였다. 대답하기도 전에 전화가 끊겼다.

29초. 깜빡거리는 숫자를 보며 구찬형은 세 번째로 확신했다. 좆됐고, 구승호는 삐진 게 아니라 화가 났고, 집에 도착하면 8시는 될 거다. 버스는 한참을 기어 고속도로를 빠져나오자마자 한 번 멈췄다. 지나갈게요, 어머, 죄송해요 지나갈게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내리던 여자가 구찬형과 모르는 사람 사이에서 한참 고역을 겪었다. 구찬형은 화풀이를 하듯 눈을 부릅뜨고 속으로 욕을 뇌까리며 최대한 몸을 틀어주었다.

 

어쨌든 구찬형은 콜택시를 불렀다. 택시에 몸을 구겨넣고 털썩 앉자마자 승용차가 덜컹 흔들렸는데, 그 덕분인지 아니면 눈빛이 형형했던 탓인지 택시기사는 최대한 조용히, 빨리 그를 데려다주었다. 동수까지 불러주며 택시기사를 재촉하던 구찬형은 아파트 입구에 들어서기 직전 마음을 바꿨다. 변덕에 희생당해 급정거한 택시에서 뛰어내려 곧장 상가로 향했다. 그리고 품에 하겐다즈를 꽉꽉 채웠다. 돈이야…… 이런 데 아니면 어디다 쓰겠냐는 마음으로 긁었다.

최대한 빠르고 정확하게 도어락을 누르고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예상했던 광경과는 다르게 불이 꺼진 거실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다만 적당히 벗어놓은 스니커를 보아하니 집에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기세 좋게 들어온 데에 비해 한 풀 기가 꺾였다. 신발을 벗어던지고 들어서서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어보니 그토록 찾던 얼굴이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있었다. 다만 한쪽 무릎을 세우고 다리를 꼰 기묘한 자세로 쉴 새 없이 핸드폰 화면을 연타하는 구승호는 구찬형에게 조금도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구찬형은 뒤통수를 벅벅 문질렀다가 불퉁한 목소리로 툭 내뱉었다.

"화났냐?"

"아니. 오늘 나간다고 이야기했잖아."

"하겐다즈 사 왔다. 아니 서문환이 분명 좀 늦게 출발해도 된다고 했는데……."

"환이 형이 잘못 알았나 보지. 알겠으니까 하겐다즈 냉동실에 넣어놔."

서문환 이 씹새끼, 구찬형은 애먼 곳으로 화살을 돌렸다가 곧 부엌으로 허겁지겁 뛰어갔다. 냉동실에 하겐다즈 박스들을 꾸역꾸역 밀어 넣다가, 중간에 차곡차곡 안 넣으면 구승호가 지랄할 게 떠올라 투덜거리며 다시 쌓기까지 했다. 그리고 죄지은 사람처럼 발을 질질 끌며 방문으로 돌아왔는데도 구승호는 그 자세 그대로였다. 그리고 여전히 구찬형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잘못한 건 아는데, 그때는 조금 억하심정이 들었다.

구찬형은 구승호가 자주 하는 게임이 뭔지 안다. 출석체크까지 챙겨가면서 하는 게 있고, 질렸다고 몇 달째 켜지도 않는 게임이 있는데 저 게임은 후자였다. 마지막으로 켠 게 지난 여름방학이었던 것 같다. 근데 그걸 지금 이 상황에 갑자기 켜서 빡집중을 하겠다고? 아무리 지가 머리가 좋대도 거짓말을 하려면 성의는 보여야 하는 것 아닌가?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다는 걸 눈으로 확인하니 배알이 꼴리면서도 차마 따질 수가 없었다. 구찬형은 방향을 틀기로 했다.

"야, 구승호."

애써 과장된 목소리를 키우며 침대 옆자리에 몸을 던져 누웠다. 그리고 피하지 않는 어깨 위로 팔을 둘러 헤드락을 걸듯 가볍게 끌어당기자 그제야 반응이 왔다. 구승호가 씨발, 작게 욕하는 소리가 들렸다.

"미안하다고 새끼야. 형이 간식도 사 왔는데 진짜 화 안 풀어?"

팔에서 벗어나려고 버둥거리는 와중에도 구승호는 핸드폰을 든 손을 높게 들어 올렸다. 그것도 잠시 화면을 보고는 신경질적으로 팔을 떨어뜨렸다. 비로소 신경을 쓰는 듯해 약간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

"아, 씹… 죽었잖아."

그리고 손을 들어 구찬형의 팔뚝을 꽉 쥐었다. 떼어내지는 않았다. 그냥 그대로 잡고 가슴께에 머리를 기댈 뿐이었다.

종일 앉아서 문제를 풀다 왔을 구승호의 머리카락에서는 아직도 가시지 않은 샴푸 냄새와 싸구려 난방기 특유의 먼지 냄새가 났다. 그리고 아직 풀리지 않은 겨울 냄새. 무의식적으로 끌어안듯 팔에 힘을 주자 정말로 숨이 좀 막혔는지 살을 꼬집으며 자세를 고쳤다. 그리고 구찬형과 구승호는 엉성하게 끌어안은 채로 잠시간 가만히 있었다. 기분이 풀린 건가? 모르겠다. 구승호 뒤끝 장난 아닌데. 멍하니 오늘의 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노라면 생각은 한참 거슬러 올라가 같이 밥을 먹겠다 약속했던 그날에까지 닿았다.

구찬형의 허세 아닌 허세에 구승호는 웃음을 터뜨렸었다. 찬형은 잘 몰랐는데, 승호의 무심해 보이는 얼굴은 원래 그런 식으로는 웃지 않는다고들 했다. 웃는 것도 싸가지 없어 보인다고도 하고, 한 번 웃기기가 비싸다고도 하고. 구찬형은 누구보다 구승호를 잘 알았지만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에는 동시에 새롭게 알아가게 됐다. 이런 건 여태껏 나만 알아 왔던 거구나, 하고. 예를 들어서 구승호가 어릴 때부터 쭉 그렇게 웃었다는 거. 형이 부르기만 해도.

자기로서도 고작 교통상황 때문에 동생을 바람맞히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거기다 같이 먹자고 하니까 그렇게 좋아했는데 그 웃는 얼굴을 그냥 잊어버릴 리가. 구승호가 얼굴을 잘 쓰면 동생을 끔찍하게 아끼는 구찬형으로서는 도무지 거절할 수가 없는 것이다. 긴 머리카락이 입술과 코를 간지럽혀 반대쪽 손으로 좀 끌어내렸다. 구승호가 가만히 있다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죄지었냐? 왜 이렇게 심장이 빨리 뛰어?"

"죄… 지었지. 니 존나 화냈잖아."

"화 안 났다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을 건데."

그렇지만 구승호는 정말로 화가 났었다. 그리고 이제야 마음을 풀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구찬형은 더 말을 꺼내지 않고 조금 목이 타는 기분으로 턱을 당겨 구승호를 내려다보았다. 가슴팍에 모로 뺨을 댄 구승호가 올려다보았다. 너 그거 반성하는 표정이 아닌데. 형한테 너가 뭐냐 새끼야. 구승호를 따라 가볍게 던진 농담이었는데 목소리가 꼭 화난 것처럼 나왔다. 그러나 구승호는 개의치 않고 손까지 뻗었다. 구찬형은 가슴 속이 이상한 기분으로 부글거리는 걸 참지 못하고 몸을 반쯤 일으켰다.

구찬형의 앞머리를 가볍게 건드린 손이 툭 미끄러졌다.

 

"기다리느라 얼어 뒤지는 줄 알았다."

비로소 구승호의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구승호는 솔직하게 굴 줄 알면서도 꼭 자기 좋을 때에 말을 꺼내서 구찬형이 이기지 못하게 만들곤 했다. 서운해 보이기도 하고, 책망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 얼굴을 내려다보다 구찬형이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다고 했잖아. 누그러진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

 

"야, 근데 밥 못 먹어서 어떡하냐."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문을 열고 들어오자 엎어져 있던 구승호가 얼굴을 들었다.

"지금 먹을까? 해 먹긴 좀 귀찮고 뭐 시키든가."

"시간이 거의 밤인데, 이 시간에 하는 데가 중국집 말고 있나."

"밀가루 먹게?"

생각해보니 그랬다. 대답이 시원하게 나오지 않았다.

"뭐, 하루… 정도는……."

근데 중국집에 밀가루 안 들어가는 메뉴도 있지 않나? 그런 고민에 머뭇거리는 동안 구승호가 핸드폰으로 시선을 옮기며 태연하게 말을 돌렸다.

"아니면 굳이 그러지 말고 내일 고기 먹어. 서문환이 돈 보내줬어."

아주 얄미운 이름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그 새끼가 너한테 돈을 왜 보내? 얼마?"

"수능 끝났다고 보내준 거겠지. 10만원. 끝나는 시간에 딱 맞춰서 보내주던데."

이 새끼 시간 알고 있었다고?

아니, 그럼 구승호는 환이 형이 착각했겠지 이런 소리 왜 해?

"너네 짜고 쳤냐?"

"뭔 소리야? 내가 형……."

대번 찌푸린 얼굴을 보아하니 거짓말 같지는 않은데, 뭐라 더 말을 이으려던 구승호가 잠시 눈을 굴리더니 도로 입을 다물고 핸드폰으로 시선을 떨궜다. 그리고 화면을 대충 몇 번 스크롤하다 제풀에 웃기 시작했다. 구승호와 서문환 같은 머리 굴러가는 애들은 구찬형이 특히 약한 타입이었는데, 특히 저렇게 혼자 웃기 시작할 때가 제일 빡치는 것이다.

 

구찬형은 잠들기 전까지 불쑥불쑥 구승호에게 왜 웃었냐고 진짜 짜고 친 거 아니냐고 물었지만 끝내 대답을 듣지 못했다. 그리고 구승호가 다음엔 일찍 와, 하고 농담 아닌 농담을 뱉었을 때는 물어보는 것도 그만두고 말았다. 기껏 사 온 뇌물이 무용지물이 되는 건 바라지 않았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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