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병자 표도르

2021 사할린의 크리스마스

made in heaven by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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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의 해풍은 사람의 살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그 해 동사자는 50명이 넘었다.

 

 

표도르 니콜라예비치 쿠즈네초프가 처음으로 새 옷을 선물 받았을 때는 막 열 살을 넘겼을 때쯤이었다. 원래라면 표도르는 지금쯤 학교에 들어가 그의 아버지 되는 니콜라이가 물려주어야 마땅한 몇 안 되는 재산 중 하나인 훤칠한 신장을 뽐내고 있었을 테지만, 표도르의 부모라는 이들은 그들의 가슴께에도 미치지 못하는 조막만 한 짐덩이에게 빵을 덜어줄 생각이 없었던 데다가 실상 그 둘의 사이도 별로 좋지 못하여 천선주 즉 아냐의 손에 떨어지는 동전 몇 푼은 남편의 적선에 가까운 것이었으므로, 니콜라이가 집에 얼굴만 비치고 밖으로 나도는 생활을 몇 년 반복하는 동안 표도르가 겨울바람이 숭숭 통하는 하숙집 구석에서 이룬 성장이라곤 고작 반 뼘에 불과하였다. 아냐는 한때 그녀가 그토록 사랑했던 남편이 말 한마디 없이 그들을 데리고 무언가에서부터 도망치는 동안 찬 바람을 너무 많이 맞아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가 표도르의 부진한 성장이 두꺼운 가죽 무스탕을 입히는 것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표도르는 뺨이 푹 패인 채 자신만큼 무거운 무스탕을 어깨에 지고 돌아다니며 텅 빈 속을 과시하듯 사람들에게 예쁘게 웃어 보이곤 했다. 그러므로 서른도 채 살지 않은 정신병자 표도르의 지나친 염세주의는 그 싸구려 가죽 냄새에서부터 비롯되었대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니콜라이는 그 당시 조직에서 취급하는 러시아산 마약류를 외부로 빼돌리는 데에 관심이 있었다. 그는 꼬리를 밟히지 않기 위해 한두 달에 한 번 꼴로나 집에 들러 생활비를 놓고 떠났으며, 그 집마저 1년을 채우지 않고 옮기기를 반복했다. 종래에는 여러 접경지에 변절자들이 모여들어 니콜라이를 모종의 소식통처럼 사용하였으니 모르긴 몰라도 이제 와 생각해보면 떨어지는 수익이 꽤 짭짤했을 것이다. 그러나 니코치카가 그 돈을 보며 집에 있는 병든 아내, 어린 아들을 떠올리지 않았던 것은 당연한 데다 그 돈을 아무 생각 없이 은신처에 처박아두는 한이 있어도 누군가와 나누겠다는 생각은 끝내 하지 못했고, 그렇게 정신 이상자와 후진 골방에 갇혀있던 표도르는 종래에 병이 들었다. 아냐의 정신이 썩어 문드러진 과실이라면 표도르의 정신은 황폐한 땅에서 간신히 자라난 말라비틀어진 나무둥치처럼 본래 어떤 모양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표도르는 언젠가 자신의 손이 니콜라이의 것만큼이나 크게 자라 아냐에게 편안한 끝을 가져다줄 수 있게 되기를 소망했으나 아무리 기다려도 그 순간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 기관지에 달라붙은 아냐의 살가죽과 마른 손뼈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표도르의 얇은 살가죽은 주름을 제외하고는 차이가 없었다.

어쨌든 표도르가 일찍 철이 들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고, 철이 들고 나서는 행동에 순수하지 않은 악의가 깃들었다. 어느 날에는 초췌한 어머니와 순진하게 웃는 어린 아이의 행색을 하는가 하면 어느 날에는 병든 어머니와 웃지 않는 아이의 행색을 했고, 어느 날에는 일어나지 못하는 어머니와 웃는 게 꺼림칙한 청년의 행색을 하고—먹지 않아도 몸이 억지로 훌쩍 컸던 것이다. 고작 두어 뼘 큰 주제에 성장통은 끔찍했다—다니는 동네마다 추문을 뿌리고 다녔다. 앓아누운 어머니와 바람이 난 아버지는 동네마다 두셋씩 있었으므로 큰 화제가 되지는 않았으나 표도르를 둘러싼 소문은 매번 새로웠다. 잦아들 줄 모르고 방향과 표현을 달리하여 기어이 사람들이 웃는 얼굴에 침을 뱉게 만들었다. 그러나 집에 들어오면 끔찍하게 고요했고 또 추웠기 때문에 언제부턴가 표도르는 그 소란을 내심 즐기곤 했던 것이다. 경멸 어린 시선이 꽂힐 때마다 머릿속에서 문드러진 뇌가 소리를 치는 듯했다. 침을 뱉어. 돌을 던져! 집을 불태워! 뇌관에 불을 지펴! 내 광증에 이유를 붙여라…….

표도르는 니콜라이와 아냐를 혐오하는 만큼 그들을 닮아가고 있었다. 그는 다 해진 이불 몇 겹을 두르고 폐병환자의 숨소리를 내는 아냐를 바라보며 니콜라이의 염세감을 배웠고, 애정 한 점 없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서늘한 니콜라이의 눈을 노려보며 아냐의 격렬한 애증을 배웠다. 비쩍 마른 얼굴에 베개를 눌러 죽여버리고 싶었고 악다문 턱 아래에 송곳을 쑤셔 입을 벌리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멈추지 않는 겨울이 그를 젖어도 녹지 않는 빙하로 만들었다. 애정은 필요 없으니 그냥 방관의 대가를 치르게 해주고 싶었다. 제대로 다듬어지지 않아 모난 구석을 그대로 간직한 표도르의 날 선 영혼은 시도 때도 없이 형태 없는 충동을 터뜨리며 스스로의 속을 갉아먹었다. 숨을 깊게 들이쉴 때마다 공허한 뱃속에 비린내 나는 눈발이 휘몰아쳤다. 구역질이 났다.

하얼빈에는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중국에서 마약 밀반입은 까딱하면 사형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겨왔을 무렵에, 짐을 맡아주기 위해 만나기로 약속한 전철역에서 니콜라이는 표도르를 알아보지 못하고 엇갈려 지나쳐서, 표도르에게 손목이 붙잡혔을 때에야 여전히 무감정한 얼굴을 한 채 그가 이제는 아버지 노릇도 할 수 있을 만큼 컸다고 말해주었다. 아니, 애비 없이 큰 자식이 어떻게 애비 노릇을 한다는 말씀이세요……. 표도르는 혹한과 어울리지 않는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그렇게 속삭이며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그의 두꺼운 모직 코트 안쪽에 들어있는 권총은 과연 장전이 되어있을까. 니콜라이의 꿈틀거리는 미간을 보며 그가 당장 품에서 권총을 꺼내 자신의 머리를 날려버리는 상상에 취했다. 그러나 니콜라이는 표도르가 원하는 대로 격분하여 실수를 저지르는 대신 장갑을 벗고 두꺼운 손으로 표도르의 뺨을 올려붙였을 뿐이다. 차갑게 식은 살갗에 불이 붙은 것처럼 화끈거렸다. 표도르는 어질어질한 머리로 생각했다. 왜 쏘지 않았지? 나라면 쐈을 텐데. 분명 쐈을 것이다. 당장 그 납작한 뒤통수를 날려버리고 싶어서 온몸을 덜덜 떨어야 마땅할 텐데.

그럼 도대체 이 썩어빠진 정신머리는 누구에게서 유전된 것이지?

얼어붙었던 뺨이 뒤늦게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

 

천선주의 기침이 심해졌을 무렵 표도르와 선주는 한국에 발을 들였다. 이혼이었나. 이별이었나. 어느 것도 정확하지 않았으나 표도르에게 선택권은 없었고, 천선주의 마른 손목을 쥐고 끌고 가는 내내 자신의 앞에서 또 다른 누군가가 자신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끌고 가는 기분을 느꼈다. 표도르는 낯선 땅의 온기에 식은땀이 났다. 지나가는 여자들 열 명 중 다섯 명은 천선주를 닮았다. 인생에서 제일 흉측하고 쓰라린 수포와 흉터가 실은 평범한 사람에 불과함을 깨닫는 과정은 고통스러웠다. 거기다 표도르를 괴롭히는 생각은 비단 그것만이 아니었다. 아버지를 다시 만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러니까—내가 만약 아버지를 죽일 수 없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지—어머니는 어떻게 죽여야 하지—사람이 폐병에 걸리거나 얼어 죽기에는 너무나 따뜻한 곳이다……. 나는 이제 아냐의 목을 한 손에 쥘 수도 있는데, 왜 아직도 목을 졸라 죽이지 못하고 끌려다니는 것인가…….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천선주는 지도를 볼 줄 몰랐기 때문에 그녀의 손을 잡은 채 표도르는 공항 로비에 서서 한참 지도를 뒤졌다. 손바닥 사이에 차츰 미끌미끌한 땀이 배어나는 게 비위가 상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든 시간은 끊임없이 흘러갔다. 죽지 못해 살아가는 데에 익숙했다. 몇 년 동안 귀동냥으로 주워들은 한국말은 유창했다. 늘 그랬듯 이번에도 자연스럽게 눈엣가시로서 사회에 녹아들었다. 다만 표도르가 여태껏 엽총을 든 남자들을 바라보는 역할이었다면 이곳에서의 표도르는 엽총을 들고 사람들을 쳐다보는 역할이었다. 사람들은 그와 말싸움을 하고 침을 뱉는 대신 피하는 것을 택했다. 그래서 그런가 웃음이 많아졌다. 눈이 마주치기만 해도 표도르는 히죽거렸다. 그야 그들이 절로 웃음이 나오는 얼굴을 하고 표도르를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저 말랑말랑하고 추레한 얼굴들. 그들을 보고 있으면 유년기를 갈기갈기 찢어두었던 혹한이 때로는 전부 자신만의 악몽이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인생이 부드럽고 행복한 것들……. 난 왜 인생이 행복한 사람들이 싫을까? 생각이 그즈음에 다다르면 표도르는 일부러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즈음의 표도르는 니콜라이와 아냐를 죽이는 것을 인생 유일한 목표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살이라는 유일무이한 해답을, 그들을 죽이기 전에는 떠올려서는 안 됐다.

그래서 그는 여전히 천주표가 아니라 표도르 니콜라예비치 쿠즈네초프였다. 집은 늘 혼자 사는 것처럼 싸늘했다. 사람이 있다고는 믿기가 힘들었다. 안방에 널브러진 그 뼈다귀가 사람이라고는 도무지 생각할 수 없었다. 표도르가 말을 걸 때마다 천선주의 녹아버린 혀에서는 러시아어와 한국어가 형펀없이 섞여 나왔다. 고장 난 라디오 같다. 언젠가 어머니를 치워버려야 할 텐데. 그 생각도 몇 년을 계속하다 보니 이제는 어느 요일 저녁에 음식물 쓰레기를 내다 놓아야겠다는 생각보다도 가볍게 느껴졌다. 표도르가 아냐를 죽이지 않는 이유는 니콜라이를 우선으로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아냐는 당장 표도르가 일주일만 집을 비워도 침대 위에 가지런히 죽어있겠지만 니콜라이는 다르다. 표도르가 만반의 준비를 하지 않는 한 또다시 예고 없이 현관을 어지럽혀 놓고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떠날 것이다. 그럼 아냐는 끔찍한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할 것이다. 그 전에 니콜라이를 죽이고 아냐를 죽여야겠다.

 

그리고 자살해야지.

한국에서는 방아쇠를 당기기 좋은 날씨가 계속되었다.

 

권총이 없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표도르는 늘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나면 부엌의 조그만 창으로 드는 햇빛을 받으며 평화로운 기분으로 칼을 갈았다. 그가 살았던 어느 곳도 이렇게 햇빛이 따뜻하지는 않았다. 가끔은 땀이 뻘뻘 나서 팔을 걷어야 할 때도 있었다. 그러고 나면 집에 박혀있기가 싫어서 옷을 갈아입고 동네를 걸어 다녔다. 눈만 마주치면 짖는 개들에게 웃어주고, 허겁지겁 뛰어가는 대학생을 귀찮게 불러대며 싸움을 일으키고, 술 냄새를 풍기며 돌아오는 추레한 회사원들을 비웃으며 금요일 밤 골목을 시끄럽게 만들었다. 그리고 가끔 얻어맞았고 유치장에 갇힌 채 밤을 지새고 집으로 돌아갔다. 한국에서만이 아니라 맹랑한 꼬맹이가 법 아래 보호받을 수 있는 곳이라면 표도르는 어디서든 그렇게 했다. 어차피 1년이 지나면 니콜라이를 죽이든 죽이지 않든 자신은 이곳에 없을 것이다. 전자라면 어디에도 없겠고 후자라면 얌전히 짐을 싸서 그가 가라는 대로 끌려가겠지. 조막만한 짐덩이처럼.

그러나 예상과 달리 니콜라이는 오랫동안 오지 않았다. 교통편이 비행기밖에 없으니 자주 오고 싶어도 오지 못하는 걸까, 아니면 아예 걸리적거리는 것 없이 살고 싶어서 우리를 이곳에 내버려 둔 걸까? 이혼은 왜 하지 않는 거지? 이유가 무엇이든 표도르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니콜라이 없이 미지근한 겨울을 보내게 되었다. 같은 곳에서 산 지 1년이 지나면 이사를 가야 한다는 법이라도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더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누덕누덕한 가죽 무스탕을 가방에 쑤셔 넣지 않아도 돼서 좋았다.

표도르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떠나지 않는다는 건 저 나무가 봄에 어떤 꽃을 피울지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이다. 저 나무에는 꽃 대신 커다랗고 새파란 이파리가 달릴 것이다.

그건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는 뜻 아닌가?

그런데 세상이 변했다. 사람들은 표도르가 다시 이사를 오기라도 한 것처럼, 서로 얼굴을 붉혀가며 싸운 적이 없는 것처럼 돌변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일들이 계속되었다. 오전 10시에 만나는 개들이 언제부턴가 꼬리를 흔들었고, 대학생이 바쁜 와중에도 멈춰서서 꼬박꼬박 말대꾸를 해댔고, 아내와 사이가 좋지 않다는 회사원과 나란히 서서 담배를 피게 됐고, 종종 만나던 양아치가 언제부턴가 뺨 대신 등을 때리며 웃었다. 아는 척 한 번 안 하던 경찰은 창살 너머의 표도르를 보며 혀를 차기 시작했다.

열심히 살아보려고 한국에 온 거 아니냐니, 이 아저씨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추문으로 동네를 뒤흔들던 천성이 마침내 시동을 걸었구나. 그렇게 생각하던 차에 철창 너머에서 작은 캔커피 하나가 사무실과 독방의 경계를 넘어왔다. 얼떨떨하게 받아든 그것은 미지근한 온기를 띠고 있어서 징그러웠다. 캔이 손에 닿을 때마다 따끔거렸다. 피가 통하는 물건을 손안에 쥐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집어던지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었던 것이, 손을 펼쳐 확인해보니 이미 그의 살갗이 끈적끈적하게 녹아 캔에 잔뜩 들러붙어 있었던 것이다.

표도르는 칼을 가는 것을 그만두었다.

 

봄이 빙하를 녹일 수 있을 리가 없다. 그것은 명백한 이상기후였다. 그러나 인생에 봄이 처음이었던 그는 그 둘을 제대로 구분해내지 못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봄은 원래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것이라고 믿었다. 견고한 벽은 녹고 정신은 말랑말랑해졌다. 돌이켜 보면 그 시절은 지나치게 행복했다. 표도르는 밤마다 침대에 누워 처음으로 살해 계획이 아닌 계획을 세웠다—아버지가 오시면 이곳에 계속 있어도 되냐고 여쭤봐야지. 어머니의 폐병도 슬슬 나아가고 있는 것 같다고 말씀드려야겠어. 역시 추위가 문제였구나. 아직 집이 답답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가족이니까 당분간은 나가지 말고 어머니 곁에 머물러야겠다. 날씨가 좀 풀리고 나면 아르바이트도 찾아보고. 그렇지만 역시 제일 중요한 건 꼭 셋이서 대화를 해보는 거야. 우리는 대화가 너무 적었으니까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절차야. 태어나서 아버지랑 나눈 대화는 손발에 꼽을 수도 있어. 어머니한테 먼저 여쭤보고 아버지를 부르는 게 순서가 맞겠지. 그 아저씨도 부인이랑 화해했다는 것 같은데 우리가 왜 못하겠어? 그리고 물어볼 거야. 나랑 하고 싶은 게 있냐고.

가만히 앉아있기만 해도 잠이 오는 계절이었다. 수마가 들린 듯 표도르는 점점 방에서 나오는 일이 적어졌다. 아냐처럼 간간히 기침을 터뜨리며 힘없이 누워있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망상에 지독하게 탐닉하여 침대에 누워있다가 벌떡 일어나 서성이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되기만 한다면 이 꿈에서 깨어나지 않고 살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의식은 촛불이 타오르듯 천천히 녹아내려 정해진 결말로 끌려가고 있었다. 어머니도 내심 못 먹이고 못 입힌 게 신경 쓰이실 텐데 옛날 일은 잊고 지금부터 여기서 새롭게 살면 돼. 나도 돈을 벌 수 있는 나이가 됐으니까…… 비록 그 시절은 추웠지만…… 젠장, 손가락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어, 그 해 겨울은 진짜 끔찍했는데…… 돌덩이 같은 빵을 내 머리에 던진 것만큼은 잊지 못할 거야…… 그래, 모든 걸 없던 일로 한대도 딱 그것만큼은 사과를 받아야겠어. 일은 확실히 하는 게 좋으니까…… 뒤늦게 생각났는데 풀 방법이 없으면 큰일이잖아…… 그래 그런 일이 없게 할 겸 조금만 더 떠올려보자…… 참, 내가 옆집 사람한테 받았던 빵을 뺏어먹은 것도…… 집 밖에 하루종일 세워뒀던 건 대체 언제였지…… 나는 그때 고작 12살, 아니 13살…… 창문이 깨져 있는 집에 살았었는데 그게 몇 번째 집이더라, 창문이 있는 집은 몇 개 안 되는데…… 그래, 13살이었겠어, 저 씹새끼가 그때 그 집에서—표도르는 이르쿠츠크의 겨울을 떠올렸다.

그리고 돌연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마음을 바꿔 죽일 수는 없었다. 칼은 갈아 놓은 지 오래되었고, 이가 빠진 식칼처럼 표도르는 너무 많이 허물어져 있었다.

깊은 밤 표도르는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났다. 부엌을 들르는 대신 굳게 닫힌 안방으로 곧장 쳐들어가 불을 켜고 그녀의 이불을 젖혔다. 이제는 한결 건강하게 살이 오른 아냐가 졸음 가득한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고 돌아누웠다. 그러나 지금 그녀에게서 대답을 듣지 못하면 정신을 잃고 영영 미치광이로 살아갈 것 같다는 불안감이 그의 이성을 뒤흔들었다. 표도르는 그녀의 가느다란 팔을 쥐고 미친 듯이 당겨댔다. 툭하면 꺾일 것 같은 가느다란 목이 머리를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로 어깨를 흔들었다. 일어나요, 아냐. 일어나요. 일어나요. 일어나요. 이제는 대답을 들어야겠어요. 그러니까……. 천주표는 말을 더듬었다.

"그럴 거면 저를 대체 왜 낳으셨어요?"

천선주는 막 잠이 깬 얼굴이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이던 그녀가 답했다.

"부부 사이에 애 하나는 있어야 되니까."

그리고 너 엄마한테 그게 무슨 말이니? 우리가 너를 얼마나 예뻐하는지 몰라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러나 아냐는 니콜라이와 더 부부라고도 할 수 없는 애매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음이 자명했다. 어느 동네를 가도 아냐는 소박맞은 부인이었고 표도르는 애비가 없는 자식이었다. 그런데 왜? 왜 부부 사이에 자식이 있어야 하지? 있으면 뭐가 달라지는데? 몸에 난 욕창이 낫기라도 해? 남편이 돌아오기라도 해? 당신들이 대체 언제 나를 예뻐했는데? 땅에 던져놓고 물을 주지도 않았잖아. 밥도 물도 무엇 하나 제대로 챙겨주지도 않았으면서 내가 제대로 크지 못한다고 이불 안에 들어가서 질질 짜는 것밖에 더했어? 현관에다 동전 몇 푼 흘리고 가는 주제에 가장 노릇 한답시고 보란 듯 한숨 쉬기밖에 더 했냐고. 그때 자신이 정말로 소리를 내서 이야기하고 있었는지, 아니면 그것이 그저 머릿속에서 누군가가 그를 대신해 퍼붓던 폭언이었는지 지금까지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어느 순간에 그 좁은 방 안에 꽉 차 있던 아우성이 멎고, 고요한 가운데 표도르는 돌연 깨달았다. 정신이 나갔구나. 처음부터 미쳐 있었구나.

옷을 두껍게 입히면 아이가 쑥쑥 클 거라고 믿었던 여자. 빵 한 조각으로 사람이 배부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남자. 고장난 테이프처럼 삶의 어느 순간만을 반복해 재생하고 있는 여자. 이제는 자신에게 아내와 아들이 있다는 것도 잊어버린 남자.

 

그리고 그들의 아들.

 

삶에서 제일 매서운 혹한이었다. 그 추위가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

 

*

 

천표도르는 가끔 눈을 까뒤집고 발작하는 것을 제외하면 좋은 조직원이었다. 몸을 사리지 않았으며 싸움 방식에는 청년답지 않은 노련미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가족이 없었다. 그가 죽는다면 무연고 사체로 분류될 것이다. 잃을 게 없는 사람은 어떤 목줄에도 걸리는 법이 없었으므로 표도르는 어디까지나 말단에 머물렀다. 목줄이 단단하지 않아도 윗사람들이 걱정할 필요 없는 자리에, 입바람에도 꺼지는 촛불처럼 위태위태하게 서 있었다. 그 상태에 누구보다도 만족한 것은 다름 아닌 표도르 본인이다.

표도르는 좋아하는 것이 없었다. 잘하는 것도 없었다. 가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먹고 싶은 것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가끔 불이 다 꺼진 집에 홀로 앉아 보드카를 홀짝거렸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지배하고 있는 시린 술 냄새만큼은 결코 열어선 안 될 과거의 궤짝 속에서도 넉살 좋게 새어 나오곤 했다. 술을 마시면 몸 안에 열기가 도는 게 좋았다. 어떤 것도 표도르를 춥게 만들지 못했다. 어떤 것도 시베리아를 가로지르는 그의 기억보다 차가울 수는 없었다. 그런데도 표도르는 가끔 서늘한 공기가 뒷덜미를 훑을 때면 그 시절의 살인적인 추위가 그의 삶에 다시금 찾아올 것 같은 막연한 두려움을 느꼈다.

죽을 생각으로 집을 나섰던 스무 살 봄에 초라한 짐을 버리지 못하고 들고 나왔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평생의 짐이었던 가죽 자켓을 던져버리고 나니 남은 것이 홀가분하고 소중해 보였던가. 그 짐 때문에 뛰어내리지 못한 주제에 표도르는 어느 날 그 짐을 전부 내다 버리고 말았다. 나약한 정신이 깃털 한 장의 무게도 견디지 못했으므로. 그리고 편안해졌다. 이제는 아무것도 없다.

어디에도 없다.

 

블라디보스토크를 둘러싼 해안이 얼어붙었다는 소문이 돌 때 표도르 니콜라예비치 쿠즈네초프는 스물 여덟이었다. 그리고 정신병자 표도르는 고국의 바다가 다시는 녹지 않기를, 그런 저주를 퍼붓다 결국 취기에 곯아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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