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 그 여자

2022 쥰치엔

made in heaven by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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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 미친 새끼라니까."

그 즈음 차가 멈춰섰다. 쥰시키가 안전벨트를 풀고 뒷좌석으로 팔을 뻗어, 치엔은 만지작거리고 있던 묵직한 검을 빠르게 건네주었다.

"귀에 딱지 앉겠군. 알겠대도."

"혼내줘, 알겠지? 원만하게 해결해주지 마."

"내리지 말고 있어."

고개를 끄덕인 쥰시키가 문을 열고 운전석에서 빠져나갔다. 그가 차 문을 닫고 뒤쪽으로 돌아, 골목 쪽문을 걷어차고 들어가는 것까지 치엔은 눈으로 맹렬히 쫓았다. 소리가 울릴 정도로 요란하게 들어간 것에 비해 그게 끝이었다. 아마 문제의 그 미친 새끼와 곧장 조우한 모양이었다. 치엔도 쥰시키를 맨 처음 봤을 때는 바로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압도당했기 때문에, 걸핏하면 목소리를 높여대던 그 새끼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쥰시키가 일주일만에 중국에 다시 입국한 데에는 치엔의 공이 컸다. 그는 치엔을 만나자마자 그가 어디다 처박아놓고 썩히던 채무 이행 각서들을 모조리 꺼내오게 했다. 아무리 제 얼굴이 철판이라지만 이런저런 서류들을 끼워 100장이 넘어갈 때쯤에는 쪽팔려서 갖다주기가 싫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쥰시키는 자기가 만나본 어떤 빚쟁이들보다도 다정한 얼굴로 치엔을 얼렀고, 그가 살살 기는 모습에 치엔은 다시 뻔뻔해졌다. 덕분에 쥰시키가 서류더미를 하나하나 넘겨가며 한숨을 참지 못하는 동안에도 치엔은 수치심 한 톨 없이 그 앞에 다리를 꼬고 앉아 그의 담배를 뺏어 피울 수 있었다.

어쨌거나 쥰시키가 중국에 남은 치엔의 빚을 모조리 탕감하려 아득바득 애를 쓰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그가 이렇다 할 말은 하지 않았지만 치엔은 눈치로는 둘째라면 서러운 위인이다. 맨 처음 일본으로 돌아갈 때에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떠났으나, 이번에 쥰시키가 돌아갈 때는 자신이 그의 옆좌석을 꿰차고 앉아있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쥰시키도 그것을 딱히 숨길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렇다고 죽이진 않겠지? 그래도 내가 빚을 진 건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죽이거나 반 불구로 만들어놓으면 오히려 고마울 따름이었다. 액수도 액수지만 특히 여러 문제로 지저분하게 엮여 있던 인간이라 살려둬봐야 뒷맛이 안 좋을 게 뻔했다.

오래된 빚이었고, 어린 시절 치엔은 지금보다도 값싼 몸이었다. 이제는 원금보다도 이자가 많은 빚이지만 그 한 줌 원금과 얼기설기 얽혀있는 사정이 곤란했다. 입 싼 새끼. 모르긴 몰라도 그 새끼를 시작으로 입소문을 탄 것만은 분명했다. 들어간 김에 쥰시키가 제대로 손봐놓고 나오면 좋겠다. 치엔은 슬슬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조수석을 툭툭 쳤다.

"그치?"

파리한 안색의 조직원은 말이 없었다.

"왜 대답 안 해? 너 내가 만만해?"

치엔은 자신보다 까마득히 큰 쥰시키를 말 한 마디로 등에 업었다. 그제야 앞에 시선을 고정한 각진 턱이 빠르게 삐걱거렸다.

"아닙니다."

"그럼 왜 안 하는데? 쥰이 시키던?"

농담으로 던진 말에 대답이 늦었다. 왜? 설마 진짜 시켰나? 그의 과보호 욕구는 익히 알고 있었으나 자기 몰래 뒤에서 작당했다고 생각하니 새삼스럽게 마음이 동했다. 최근에야 독점하게 된 쥰시키의 질투는 굉장히 달콤했으므로. 치엔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들썩이며 조수석을 붙들고 고개를 내밀었다. 선글라스 아래 눈이 한결 거무죽죽해보였다. 개의치 않고 눈을 부릅뜬 채 캐물었다.

"진짜 시켰어?"

피로가 덕지덕지 묻은 눈이었다. 치엔보다 열 살은 많아 보이는 조직원은 그가 오로지 보스의 총애를 받는다는 이유만으로 대답을 피하지 못하고 땀을 뻘뻘 흘리기 시작했다. 쥰시키가 오늘 데리고 온 게 미덥지 못한 인간이라 다행이었다.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니? 치엔은 막연히 발설한 뒤의 후폭풍이 두려워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망설이는 그의 등받이를 꽉 쥐자 뿌드득 하고 가죽이 밀리는 소리가 났다. 치엔은 짜증스럽게 윽박질렀다.

"뒤 봐줄 테니까 빨리 말해."

결국 기에 밀려 다소 조급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아니면 뒤를 봐준다는 말에 미련 없이 놓았거나.

"…형수님 계실 때 쓸데없는 대화를 하면 호되게 호통치셨습니다. 면목 없습니다."

예상과는 조금 빗나간 대답에 치엔은 눈을 깜빡였다.

형수랑 나랑 무슨 상관인데. 나는 그의 아내와 비슷한 위치인가? 하기야 그가 치엔을 내내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걸 보면 천치라도 쥰시키의 마음이 기울었다는 것을 깨달을 법했다. 기실 치엔이 눈치가 빨라 알아차린 게 아니었다. 사무실에 밥 먹듯 드나들다 그에게 직접 안겨 나온 게 몇 번, 치엔은 이미 공공연히 그의 정부 대접을 받고 있었다. 쥰시키가 꼴에 둘은 못 품는 천성이라 더욱 그랬다.

그러나 왜인지 기분이 언짢았다. 어렵게 내놓은 말일 텐데 해줄 말이 없어 치엔은 천천히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등받이에 몸을 깊게 묻은 채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형수님 계실 때라.

지금은 아니라는 소리지.

 

치엔은 자신이 한 때 아무렇지 않게 들춰보았던 지갑 속 사진을 떠올렸다. 걸핏하면 그것을 열어 구경하며 쥰시키의 곪은 상처를 들쑤시는 게 재미있었는데, 언제부터 그러지 않게 되었더라. 하도 본 지 오래 되어 이제는 흐릿한 여자의 얼굴을 다시 그려보았다. 모든 선이 흐릿하고 옅은 여자. 검고 긴 생머리와 수수한 색깔. 화려한 모피나 붉은 셔츠 같은 건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청순한…….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치엔은 거의 완성된 그 모습을 머릿속에서 갈기갈기 찢어버리곤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방금 전보다는 흐트러진 모습을 한 쥰시키가 성큼성큼 걸어나오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주먹을 문질러 닦는 모양새가 칼까지는 안 쓴 모양이었다. 이윽고 줄곧 골목을 틀어막고 있던 차 쪽으로 다가온 그가 문을 열었다. 큼직한 몸이 운전석에 털썩 들어앉자 차체가 흔들렸다.

"어떻게 됐어?"

"채권을 양도받았다. 마침 한 사람 더 있길래 증인으로 세웠어."

"돈은?"

"절반."

빚의 절반을 주먹질 몇 번으로 공중에 날려준 것이다. 물론 고작 몇 번은 아닌 것 같았지만. 여하간 웬만한 위인이 아니고서야 뒷감당이 두려워 차마 하지 못할 짓이다. 전문직 아니랄까봐 돈 받아내는 솜씨 하나는 기가 막혔다.

"그래?"

그러나 치엔은 그 한 마디를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빙글빙글 웃고는 있으나 평소와 달리 입발림 하나 튀어나오지 않았다. 잠시 상황을 파악하던 쥰시키의 시선이 바로 옆자리 조직원에게로 꽂혔다. 이런 데에서는 눈치가 귀신 같다. 그 냉랭한 눈빛을 받아내느라 조직원은 얼굴이 파래졌다.

"……쓸데없는 이야기를 했군."

"쓸데없기는, 자기가 말 안 하니까 얘네들이 수고스럽게 하나하나 이야기해주는 거 아니야."

감싸줄 생각은 아니었으나 결론적으로는 뒤를 봐준 셈이다. 그의 서슬 퍼런 시선이 다시 앞으로 향하는 걸 보며 치엔은 인내심이 닳는 기분으로 발끝을 까딱거렸다. 시동을 걸고 핸들을 돌리는 내내 쥰시키는 말이 없었다. 불편한 침묵 속에 차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대로로 들어섰고, 치엔이 입 다물고 있는 쥰시키를 참아주기 어려워졌을 때쯤 그가 입을 열었다.

"말해봐. 뭐가 불만이지?"

"불만 없는데? 그냥 생각 좀 했어."

그 말과 달리 쉴 틈이 없었다.

"내 말에 대답을 안 하길래, 왜 그러냐고 물어봤거든. 그러니까 당신이 와이프한테는 말 한 마디 걸지 말라고 아주 엄포를 놨다더라고."

이만 안 갈았지 단어 하나하나에 가시가 잔뜩 서 있었다. 그리고 쥰시키의 뒤통수를 맹렬히 노려보는 시선의 의미는 명백했다.

'근데 나한테는?'

쥰시키는 머리가 아픈 듯 한 손을 들어 잠시 관자놀이를 눌렀고, 잠시 말을 고르다 작게 중얼거렸다.

"하나노에가 있을 적에……."

치엔이 쾅 소리가 나게 운전석을 걷어찼다.

그 소리를 끝으로 정적은 1초도 견디기 힘들 만큼 무거워졌다. 쥰시키는 백미러로 치엔을 흘끔 쳐다봤을 뿐 반응도 하지 않았으나, 조수석에 앉은 조직원이 되레 놀라 움찔 어깨를 떨었다.

"그 여자."

"……."

"그 여자라고 부르라고."

여전히 대답 없는 침묵 가운데 그의 반반한 미간이 좁혀 들었다. 이번에는 말을 고르는 게 아닌 의도적인 침묵이었다. 치엔은 순식간에 기분이 상했다.

"차 세워."

널찍한 대로였다. 바깥쪽 차선까지 가려면 번거로울 것이다. 쥰시키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아, 이제는 무시하시겠다?"

"호텔까지 멀었으니까 오기 부리지 말고 가만히 있어."

"언제부터 그렇게 애지중지했어? 타도 당신 차는 안 탈 거니까 세우라고. 길가에만 서도 태워주겠다는 사람 천지야."

"남의 차를 타겠다고?"

"씨발, 야! 지금 그게 중요해?"

예상치도 못한 대답에 혈압이 오르는 걸 느끼며 치엔은 목소리를 높였다. 진짜 이럴 때는 골때리는 새끼가 따로 없었다. 왜 이혼했는지 안 봐도 알겠네, 신랄하게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턱 아래까지 차올랐으나 주도권을 잡고 뻐기려면 물불은 가려야 했으므로 간신히 삼켰다. 대신 다른 방법을 택했다.

치엔은 백미러에 시선을 둔 채 옆 도어의 잠금을 풀었다. 뛰어내릴 생각은 없었다. 정확히는 쥰시키의 행동 여하에 달려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반응이 없자 치엔은 이번에는 정말 사고라도 불사할 마음으로 문을 열었고, 그제야 쥰시키가 고함쳤다.

"진치엔!"

머리를 울리는 듯한 그 호통에 치엔은 자기도 모르게 문을 닫았다. 깜짝 놀란 게 처음엔 무안했고 뒤늦게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으나 쥰시키는 이제 그런 것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했다. 비로소 그와 눈이 마주쳤다. 운전 중이라는 사실을 잊은 사람처럼 시커먼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거울을 노려보던 그의 목소리가 음산하게 낮아졌다.

"가서 이야기해."

뒷덜미의 솜털이 쭈뼛 섰으나 치엔은 객기를 부렸다.

"무슨 이야기? 난 할 얘기 끝났어. 당신이……."

"가서 해줄 테니까 앉아 있으라고. 그 여자 이야기."

그 여자, 그렇게 발음하는 목소리에 특히 힘이 들어간 것을 느끼자 돌연 승리감이 방금 전까지 심장을 뛰게 하던 겁의를 눌렀다. 재차 문을 열어젖힐 것처럼 손잡이를 잡고 있던 치엔은 대답 대신 천천히 손을 떼고 등을 기댔다. 도어가 기다렸다는 듯 다시 잠겼다.

 

*

 

전부 웃기지도 않은 거짓말이었다.

나란히 엘리베이터에 서 있을 때까지만 해도 그런 조짐은 없었는데, 쥰시키는 조용한 복도에 들어서자마자 갑자기 치엔을 어깨 위로 들쳐 메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아무리 그래도 번쩍 들릴 만한 키는 아니다. 그러나 치엔이 버둥거리자 사정없이 오금에 손끝을 세워 틀어쥐는 통에 치엔으로서는 얌전히 들려서 비명을 지르는 수밖에 없었다. 지지 않고 양 주먹을 꽉 쥔 채 등을 퍽퍽 두드렸지만 쥰시키는 흔들리는 시늉조차 없이 덤덤했다. 그렇게 치엔을 들어올린 채 카드키를 찍고 문을 열어젖힌 그가 침대 위로 치엔을 내동댕이쳤다. 푹신한 이불 위에 떨어지자마자 치엔은 윗몸을 벌떡 일으키며 항변했다.

"당신 미쳤어?"

"그 남자랑 아직까지도 연락을 하고 있었어?"

나지막한 목소리가 치엔의 짜증을 묻었다. '씨발, 올 게 왔구나.' 찜찜한 구석을 결국 들켰다는 미약한 낙담에 이어 이번에는 정말로 기분이 상했다. 옛날 일이다. 설령 치엔이 자기만 한 게 아니라 그 남자랑 좀 더 깊은 관계였대도 쥰시키가 뭐라고 할 자격은 없다. 거기다 자기는… 자기는…….

분노에 이성을 잃어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쥰시키도 제정신이 아닌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당신은 아직도 그 여자가 더 좋아서 이래?"

침대에 집어던진 것도 모자라 그 위로 기어오르던 쥰시키가 우뚝 멈췄다. 막 한 쪽 무릎을 올린 채 손을 뻗던 차였다. 고개를 든 그의 검은 동공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평소에는 그가 그런 표정을 지을 때마다 이상한 가학심이 들끓었는데, 거기에 미운 마음이 뒤섞이니 목줄기가 뜨끈해질 정도로 짜증이 났다. 치엔은 숨을 고르며 쥰시키를 노려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도 하고 싶어서 한 거 아니야. 빚쟁이들이 내 번호 갖고 있는 게 이상해?"

"그 소리가 아니잖아."

"아니야? 그럼 내 말에 대답하면 될 거 아냐. 그냥 한 마디 해주면 될 걸, 하나 뭐 그 여자 이야기는 해주기 싫어서, 내 옛날 얘기까지 들먹이면서 이 지랄하는 거냐고."

손끝으로 이마를 꾹꾹 밀어낼 때마다 쥰시키의 자존심에 줄이 그이는 게 표정으로 느껴졌다. 기분 나쁘라고 한 짓이 맞았다. 그러면서도 눈을 맞추지 못하는 게 얼핏 보기에는 단순히 주눅이 든 것 같기도 했다.

"대답할 거 아니면 좀 놓고 떨어져, 진짜 기분 좆같으니까."

"안 돼."

그 모습도 잠시, 대번 표정이 원래대로 돌아오더니 쥰시키가 으르렁거리며 허리를 끌어안았다. 발버둥치며 그의 얼굴을 밀고 어깨를 때리다 치엔은 결국 머리채를 틀어쥐었다. 대번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팔에 힘은 조금도 풀지 않은 채, 쥰시키가 잠긴 목소리로 빠르게 내뱉었다.

"네가 그 남자랑 옛날에 뭘 했는지는 관심 없어. 네 말대로 지난 일이니까. 중요한 것도 아니고."

"아, 씨발 그럼 왜 이러냐고!"

결국 치엔은 소리를 질렀다.

넓은 스위트룸 안에 목소리가 귀가 아플 정도로 울려퍼졌다. 기어이 분노로 얼굴을 붉힌 채 씩씩대던 치엔은 곧바로 대답해줄 것 같던 쥰시키가 한참이나 조용하자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소리를 죽였다.

쥰시키는 끝내 치엔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은 채 고개를 숙이고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그게 무슨 조짐인지 알 수 없어 섣불리 부르지 못하고 그를 내려다보고 있으면 푹 잠긴 목소리가 바닥에서부터 기어나왔다.

"나한테는 네가 더 중요해."

방금 전의 맹렬한 기세는 온데간데 없이 초라한 목소리였다. 치엔은 그의 입으로 들은 사실이 생각보다 맥없어 힘이 빠졌다. 그가 어떻게 느끼든 쥰시키는 신경 쓸 겨를이 없는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그 여자한테는… 나도 빚을 졌다. 그래서 함부로 말하지 않으려고 하는 거야."

"…그래서?"

"그런데 네가…… 네가 갑자기 그 여자 이야기를 하니까, 나는."

"……."

"내가 마음 정리를 제대로 못해서, 네가 그 남자랑……."

누가 그의 목을 조르고 있는 것처럼 단어가 띄엄띄엄 흘러나왔다. 우습게도 결코 풀리지 않을 것처럼 옥죄던 팔이 천천히 흘러내렸다. 쥰시키가 내뱉지 못한 뒷말이 무엇인지는 어렵지 않게 생각해낼 수 있었다. 쥰시키는 치엔이 했던 이야기를 똑같이 하려던 것이다. 아직도 그 남자가 좋을까봐. 차이는 쥰시키가 탓을 그 스스로에게 돌렸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치엔은 애초부터 그 남자를 좋아한 적이 없었다. 쥰시키를 그렇게 생각하게 만든 건 단순히 그의 너스레에 불과했을 것이다. 치엔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자신이 잔뜩 헝클어뜨린 그의 머리를 내려다보다 턱을 잡아 들었다.

"……그래서 우는 거야?"

쥰시키의 눈가가 축축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감정으로 불타던 남자는 온데간데 없이, 다만 불안감을 주체하지 못한 남자가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눈을 가로지른 두 줄의 흉터를 따라 눈물이 번져 있었다. 가끔 쥰시키가 이럴 때 치엔은 짜증이 났다. 사나운 얼굴이 그렇게 멍청해 보일 때가 따로 없었다. 그렇지만 늘 그의 화를 푸는 것 역시 쥰시키의 놀라울 정도로 멍청하고 고지식한 면모였다.

스스로 감정이 격해진 것을 인지하지 못했는지, 쥰시키는 한 팔을 빼내 말없이 자신의 눈가를 짚어보았다. 그리고 눈물이 배어난 손끝을 바라보는 동안, 치엔은 그의 손에 난 생채기를 물끄러미 보았다. 가까이서 보니 상처가 심했다. 맨주먹으로 사람을 패면 으레 저런 상처가 남았다. 앞에 와서는 눈물이나 보이는 주제에 그 남자 앞에서는 화가 나 어쩔 줄 몰랐나보다. 헛웃음이 나왔다.

휘몰아치던 감정이 눈물 한 번 봤다고 쉽게 가라앉을 리가 없었다. 아직 짓궂은 마음이 동해 그게 비열한 허세일 뿐이라는 건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다만 치엔은 손끝으로 쥰시키의 뺨을 툭툭 두드렸다.

"그렇게 화가 났는데 왜 안 죽였어?"

"……."

뻔한 이유겠지. 만에 하나 진짜 그럴까봐 손 대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그 말을 입증하듯 끝내 입을 열지 못하는 쥰시키를 바라보던 치엔은 결국 짜증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 "쥰시키." 턱을 쥔 손에 힘을 준 채 그의 고개를 살살 흔들다 여전히 인상을 쓴 채 치엔은 사근사근히 그를 을렀다.

"정신 좀 차려, 제발. 속 터지게 하지 말고. 당신은 진짜……."

어떻게 결혼했는지 모르겠다니까. 중얼거릴 때쯤에는 쥰시키가 침대 위로 마저 기어오르고 있었다. 쥰시키는 자신이 용서를 목전에 두고 있다는 것을 본능으로 알았다. 뺨을 타고 한두 방울 떨어지던 눈물은 언제 그랬냐는 듯 멎은 채였다. 쥰시키가 입술을 겹쳐올 때 치엔은 방금 전처럼 밀쳐내지 않았다. 닿는 숨결과 입술은 뜨거웠으나 손등을 지그시 누르는 그의 손바닥은 평소보다도 차가웠다. 그가 이렇게까지 긴장했다는 게 황당하기만 했다.

누구 하나 눈을 감지 않아 가까이서 눈이 마주쳤다. 쥰시키의 검은 속눈썹만은 아직 눈물에 젖어있는 것을 보았다.

 

작은 숨소리와 함께 치엔은 입을 떼어냈다. 쥰시키는 그 입술을 쫓는 대신 고개 숙여 치엔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한 팔로 어깨를 끌어안으며 치엔이 속삭였다.

"그 여자가 좋았어?"

"그 때는."

"지금은?"

"……너밖에 없어."

그리고 쥰시키가 입술을 달싹였다.

내가 사랑하는 건 너야.

그 속삭임을 치엔은 분명히 들었다. 들릴 듯 말듯 덧붙인 고백이라 멋없어야 할 게 분명한데, 노고 끝에 주어진 보상이라 그런가 이상할 정도로 달다. 그 순간 치엔은 그 여자의 이야기가 제게 더는 필요가 없으며, 쥰시키가 과거에 얼마나 그 여자를 사랑했든 이제 그 흘러넘치는 감정이 전부 자신의 소유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도 심심해질 때면 그 여자를 들먹일 생각이다. 일단 쥰시키가 제대로 된 고백을 할 때까지 오늘 들은 이야기는 전부 무효였다. 그리고 누가 깎아놓은 동상처럼 미동이 없는 그 얼굴을 찌푸리거나 울게 만들고 싶다. 더하여 눈으로는 들여다볼 수 없는 그 탁한 머릿속에서 누가 제일 소중한지 끊임없이 확인해야겠다. 큰 몸을 구겨넣을 것처럼 치엔을 끌어안고 있는 등을 토닥이며 치엔은 정복욕과 우월감이 몸을 빠듯하게 채우는 것을 느꼈다. 스스로의 심정을 토해내며 사정없이 꺾인 쥰시키는 이제 유순하게 치엔의 손길 아래 웅크리고 있을 뿐이다.

그 생각에 이제야 좀 몸이 달았다. 한참 그를 달래던 치엔은 고개를 숙여 쥰시키의 귓가에 뭐라 속삭이며 귓바퀴 위로 입술을 꾹 눌렀다. 그 목소리를 들은 쥰시키가 순순히 고개를 들어 코끝을 비비다 느릿하게 몸을 기울였다.

 

매트리스의 용수철이 가느다란 소리를 내다가, 곧 숨소리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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