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나 해협을 건너

2022 데시작

made in heaven by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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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작은 잠시라도 가만히 있으면 큰일이 나는 것처럼 내내 소리 없는 호들갑을 떨었다. 삐딱하게 선 자세를 간간히 반대쪽으로 기울이기도 하고, 주머니 안에서 양손을 쉴새없이 부스럭거리며 쥐었다 펴기도 했다. 시끄러운 건 늘 그랬지만 오늘은 그 정도가 남다르다. 눈을 한 번 흘기자 마주친 눈매가 뻔뻔하게 접혔다.

"추워서 그래, 추워서."

확실히 손 꼽게 추운 날이었다. 데시벨도 어떻게 해줄 도리가 없었다. 한숨을 내쉬며 도로 시선을 돌리자 이겨먹은 게 신나는지 아이작이 돌연 그를 보며 히죽거리기 시작했다. 황당한 꼴을 애써 모른 척하며 데시벨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래도 방금 전보다는 한결 조용해진 게 신경이 쓰이긴 하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산만하게 구는 데에도 지쳐버렸거나. 이른 시간이니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아이작은 아침에 약했다.

열차는 곧장 로마로 간다고 했다. 바다를 건너는 열차라니 꽤나 낭만적이다. 한겨울에 짐을 싸들고 여행을 가겠다는 사람은 별로 없었으므로 막 동이 터오기 시작한 승강장은 두 사람의 숨소리를 제외하면 고요했다. 데시벨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생각했다. 우연찮게 새벽에 눈을 뜨면 꼭 이런 기분이 든다고. 서로의 몸에 엉켜 곤히 잠들어 있다 깰 때면 심장 박동마저 서로에게 동화된 것처럼 박자를 맞춰 뛰었다.


*


둘이 사는 내내 발 디딜 틈 없이 꽉 채워가며 살았던 것 같은데 작정하고 짐을 정리해보니 남은 건 커다란 캐리어 하나였다. 그마저도 갈아입을 옷과 작은 앨범을 넣고 나니 더 채울 게 없었다. 남는 것 없는 삶을 산 걸까, 남길 필요 없는 삶을 산 걸까. 아이작은 도리어 데시벨이 들어갈 정도의 캐리어 하나 정도면 충분하다고 큰소리 쳤다. 들을 때에는 굉장히 질 나쁜 농담이었으나 다시 생각해보니 데시벨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디에 있든 아이작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령 돈 한 푼 없이 외지에 떨어지더라도.

데시벨은 여행을 간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끊어놓은 유럽행 티켓은 편도였고 여차하면 미국으로 뜨는 것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가 일찍이 쫓아냈어야 할 이와 아직도 살고 있다는 것,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걸 알면서도 보스는 허락해주었다. 그 앞에서 뒤돌아 나오는 순간까지도 데시벨은 자신이 자유를 얻게 될지 쫓기는 신세가 될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가 자신을 쫓는다면 최선을 다해 살 것이다. 그리고 아이작은,

'걔랑 그렇게 오붓한 사이 아니야.'

요지를 알면서도 그런 식으로 대답하며 보란 듯 하품까지 했다. 큰일을 대수롭지 않은 척 넘겨보려는 태도는 몇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았다. 데시벨은 그게 얄미워 예고 없이 아이작의 코끝을 꼬집었다. 그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빨개진 코끝을 문지르다 앉은 자세 그대로 곁에 기어와 속삭였다. 너무 겁 먹지 마.


*


그러므로 데시벨과 아이작은 모든 걸 버리고 도망쳤다. 수중에 남은 돈이 있으니 몇 년은 무리 없이 살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하지?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차도를 달리노라면 띄엄띄엄 서 있는 가로등의 불빛이 간헐적으로 차 안을 환하게 밝혔다가 그 뒤로 사라져갔다. 불이 들어왔다가 꺼질 때마다 데시벨은 마트 캐셔가 되었다가, 아이스크림 트럭을 몰았다가, 거렁뱅이 꼴로 아이작과 좁은 카시트에 구겨져 잠들기도 했고, 그리고… 평범한 회사원이 되기도 했다. 그의 상상력은 볼품없는 수준이라 평범한 회사 일 같은 건 조금도 떠올릴 수 없었고, 다만 자신의 넥타이를 매주는 아이작의 모습만이 눈 앞에 아른거렸다. 꼴에 익히 봐온 광경이라고 생생하게도 떠올랐다.

무슨 생각 해? 앞유리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아이작이 물었다. 네 생각. 우리가 방금 막 버리고 나온 집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어.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우리가 뭘 하면서 살았는지……. 언젠가 다시 그렇게 살 수 있을까. 네가 아늑한 집에서 나를 배웅하고 마중하는 광경을, 볼 수 있을까? 데시벨은 생각했고, 한 마디도 듣지 못한 아이작은 잠깐 따분한 얼굴로 밤하늘을 올려다보다 그에게로 힐끗 시선을 돌렸다. 

그러더니 식당을 하잔다. 이름은 이탈리안 퀴진으로 해서. 은근히 잘 먹힐 거라며 또 실없는 소리를 했다. 데시벨은 웃음이 새어나가게 둔 채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그를 보았다. 아이작의 볼 한 쪽이 깊게 패였다. 처음에는 웃는 것도 얄밉게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


길게 빼놓은 캐리어 손잡이가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어딘가 탐탁지 않은 얼굴로 손잡이를 만져보던 아이작이 구두 끝으로 실없이 휠을 건드리며 중얼거렸다.

"이것도 새로 사야겠어."

산 지 얼마나 됐다고 새로 산단 말인지, 저 낭비벽도 이제는 슬슬 고쳐야 할 것이다. 갈 길이 멀었다. 데시벨은 조금 무거워진 마음으로 캐리어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두덩이를, 코 끝과 꾹 다물어 오므린 입술을 살폈다. 그리고 빨갛게 얼어붙은 살갗도. 캐리어 안에 곱게 개어놓은 목도리가 제일 먼저 떠올랐다. 그러나 데시벨은 그것을 꺼내는 대신 대충 여몄던 코트 앞섶을 풀어헤쳤다.

"아이작."

인생의 절반이 넘는 시간을 스스로 입을 걸어닫은 채 살아왔다. 그리고 끝내 다시 말해도 될 것이라 확신한 지금, 자신의 목소리를 듣는 건 여전히 익숙하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이 이름만큼은 꼭 입 밖으로 소리 내 부르는 것이다. 눈을 동그랗게 뜬 아이작이 고개를 들었다가 곧 활짝 웃었다.

"이 생각을 못했네. 제일 따뜻한 난로가 옆에 있는데……."

"……."

"알겠으니까 그렇게 쳐다보지 마. 이렇게 추울 거라고는 예보에서 말 안 해줬거든. 그리고 이 코트가 예뻐서 꼭 입고 싶었다고."

그의 말대로 그 코트는 꼭 아이작에게 맞춰 만든 옷처럼 잘 어울렸다. 그러나 데시벨은 아이작이 그렇게 예쁜 옷을 입지 않아도 사랑해줄 용의가 충분히 있었다. 쓸데없는 소리를 한다는 듯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자 아이작이 엄살을 부리며 자세를 낮춰 은근슬쩍 허리 아래로 팔을 둘렀다. 데시벨은 아이작이 제 허리 위에서 꽁꽁 언 손을 녹이게 두었다. 


*


몇 분 남았어? 어깨에 턱을 얹은 아이작이 고개를 까딱거리며 물었다. 그의 어깨 너머 멀찍이 붙어있는 시계를 노려보던 데시벨은 고개 숙여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간지러운 속삭임에 귀 기울이다 아이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안 그런 줄 알았는데 은근히 서둘렀나 보다. 몸이 다 녹아버리고도 남겠다고. 그렇다고 열차를 재촉할 수는 없는 법이다. 또 서로의 박동이 호흡을 맞추기 시작했다. 데시벨은 아이작을 조금 더 품에 당겨 안으며 눈을 꼭 감았다.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고 싶다. 그리고 우리를 그곳으로 데려갈 첫 차가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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