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뜰의 그 나무

2022 리암이든

made in heaven by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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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스턴이 태어났을 때를 기억한다.

리암이 태어났을 때 에이든은 겨우 두 살이었기 때문에 에이든의 기억 속 살아서 처음으로 본 아기는 막내 프린스턴이었다.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빛을 본 그 애는 거짓말처럼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리암도 그럴 때가 있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던 시절의 리암은 에이든의 어린 눈에도 귀여운 얼굴을 하고 두 살 터울의 형을 졸졸 쫓아다녔다. 그러나 프린스턴의 생일을 기점으로 과묵한 아버지와 사라진 어머니, 놀라울 정도로 부족함 없이 자라는 막내 사이에서 에이든은 더 이상 리암을 챙겨줄 여유가 없게 되었고, 리암은 조용히 미쳐버렸다.

일레나가 죽은 이후로 모든 게 이상해졌지만 개중에서도 리암은 돌이킬 수 없게 망가진 것 중 하나였다. 리암은 뿌리가 끊어진 나무처럼 하루가 멀다 하고 시들어갔다. 방에서 나오지 않는 날에는 누구도 그의 상태를 알지 못했고, 나온다고 해서 그 머릿속을 알게 되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가 꽤나 빨리 자라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리암은 삶의 빈자리를 채우려는 것처럼 하루가 멀다 하고 우악스럽게 성장했다. 심지어 한쪽 무릎이 박살난 후에도 그는 족히 한 뼘을 더 컸다. 

에이든이 기숙학교를 졸업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리암은 제대로 걷지 못했다. 양쪽 다리의 길이가 달랐고 조금만 걸어도 진땀을 흘렸다. 성실하게 치료를 받았다면 조금 달라졌을까 싶지만 당시의 리암에게는 의미 없는 가정이었다. 닫혀 있는 문을 열어젖혔을 때는 덥고 건조한 공기가 얼굴을 덮쳤고, 에이든을 반갑게 맞으리라 생각했던 이는 정작 맞은편 침대에 앉아 하염없이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리암이 무엇을 보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순간 에이든은 어렴풋이 남아있던 그와의 추억마저 아무 쓸모 없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아직은 빛이 들던 커다란 눈망울과 젖살이 붙어있던 둥근 뺨, 그래도 돌봐줄 마음이 들던 조그마한 목소리 같은 것은 전부 빛바래 사라졌다. 그 때의 어린 리암 앵글로스는 어디로 갔을까? 어쩌면 나무에서 떨어졌을 때 다리만이 아니라 머리도 함께 다친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까지 형편없이 말라 비틀어질 수 있단 말인가?

"내일은 사람이 올 거야."

나지막한 목소리에 에이든은 눈을 느리게 뜬다. 장갑을 벗은 손이 이마에 흩어진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기고 있었다. 리암을 기다리던 사이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방은 어두웠다. 그가 늦지 않았다면 자정에 가까운 시각일 것이다. 가늘게 열린 문틈으로 새어나오는 따뜻한 빛은 종종 방 안의 정적을 잊게 만들곤 했지만, 오늘은 가느다란 숨소리마저 어색할 만큼 고요한 밤이다. 긴 꿈의 여독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제 숨소리만 유난히 뚜렷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식적으로 숨을 죽이면 자신의 몸 위로 드리운 그림자에서부터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정원을 봐달라고 불렀어. 정리를 좀 해야 할 것 같아서."

에이든이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린 말에 리암은 구태여 덧붙였다. 정원에 정리할 만한 게 있었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애초에 정원을 들여다보지 않은지도 꽤 되었다. 토마스와 일레나가 나란히 묻힌 이래 그 정원은 무덤에 불과한 신세로 전락했다. 조경물들은 빗물에 바스라졌고 잔디가 벗겨진 뜰 군데군데에는 억센 잡초가 났다. 가끔은 아무런 이유 없이 그 폐허를 밟고 토마스와 일레나가 돌아올 것 같기도 했지만 그런 일은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

"…정원은 왜?"

어쨌거나 여태껏 별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방치해둔 게 사실이다. 리암을 향해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채 몽롱한 목소리로 묻자 그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봄이 올 텐데, 정원도 그에 어울려야 하잖아."

그러나 십수 년간 찾아오지 않았던 저택의 봄이다. 에이든은 사실 그것이 그립다고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밤이 찾아오면 어김없이 암흑에 잠기는 저 바깥에 봄볕이 들어봐야 대단한 감흥이 들 것 같지도 않았다. 에이든은 느슨히 뜬 눈으로 리암의 표정을 살폈다. 리암의 무감정한 눈은 마치 죽은 것처럼 불투명하다. 그러나 그 혼탁한 무심함은 에이든의 손끝이 뺨에 닿는 순간 가냘픈 공예가 부서지듯 천천히 볼품없어진다. 드물게 세심한 손길 아래 그늘이 온전히 걷히고 나면 리암은 어째서인지 떠밀려 선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실은 그 어떤 것도 바라지 않았다는 것처럼. 

그 때에 에이든이 리암을 잡아당기게 만든 건 때로 그를 자멸의 충동으로 이끄는 목마름이나 습관적인 체념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저 그토록 불쌍하고 초라한 얼굴을 살아서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단순히 품으로 파고 들고 싶어했으나 에이든은 처음에는 그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곧 에이든의 은근한 기대를 알아차린 리암은 해명하는 대신 맨손으로 그의 잠옷을 헤치고 입술을 비볐다. 욕망의 아귀가 맞지 않을 때면 수치스럽기도 하지만 곧 축축한 입맞춤이 이어질 때 어렴풋한 수치심도 거짓말처럼 잊게 된다. 이윽고 다시 한 번 깜깜한 무의식 속으로 가라앉았다.


*


몇 년 만에 리암을 만났을 때 에이든은 어리숙한 동생의 모습을 곧바로 연결짓지 못했다. 처음에는 저택이 기어이 팔리는 줄로만 알았고, 그 후에 그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익숙한 흉터를 발견하고 나서야 떨떠름한 마음으로 그 남자가 완전한 타인이 아님을 확인하였을 뿐이다. 리암은 한계만큼 자란 것 같았다. 벌어진 어깨와 곧게 편 허리는 리암을 제대로 걷게 해주진 않았지만 그게 별 문제가 아닌 것처럼 보이게 해주었다. 에이든이 선물했던 지팡이는 아이가 쓰기에는 고상한 모양이었기 때문에 성인이 된 그는 늘 정장을 입고 다녔다.

집에서까지 복식을 챙기는 리암의 성정은 종종 그의 기분을 판단하는 척도가 됐다. 완벽하게 챙겨 입었을 때의 그는 대체로 기분이 좋았지만 흐트러진다고 해서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다. 어젯밤 리암은 자의로 제 장갑을 벗고 넥타이를 헐겁게 했다.

그렇다면 정장을 입고 있지 않은 날은?

"뭘 저렇게 보고 있는 거야?"

"기억 안 나니?"

메릴슨이 아연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러나 여전히 짐작이 가는 바가 없다. 에이든이 눈썹을 들썩이자 메릴슨은 한숨을 내쉬었는데, 그건 에이든을 향한 것이라기보다는 도무지 해소되지 않는 답답함이 바깥으로 흘러나온 듯했다. "그러고 보니 너는 모를 수도 있겠구나." 이윽고 그녀가 중얼거리며 다시 리암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저게 그 피칸 나무야, 리암이 떨어졌던. 그러고 나서 정원사가 뭘 잘못 쏟기라도 한 건지 뿌리가 완전히 썩어버렸단다. 그런데 저 애가 그 일을 무척이나 아쉬워했어. 아직도 기억이 나."

그제야 기억이 났다. 바로 떠올리지 못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한 때는 그게 리암의 전환점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는데.

"요즘 들어 매일 저렇게 쳐다보고 있길래 치우자고 이야기를 해봤는데, 오늘 그 사람들이 차질이 생겨서 못 온다고 하니 또……."

그 생각이 지금에 와서 바뀐 건 아니었다. 송두리째 달라졌다고 생각했던 그의 옷을 벗기고 나면 그는 실상 10년이 넘는 시간이 무색할 만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어릴 때는 늦은 걸음으로도 애써 에이든을 쫓아다니곤 했으나 두 번째 걸음마의 시기가 찾아왔을 때부터는 더 이상 무엇에도 애쓰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대신 그 어떤 것도 매정하지 않았던 시절을 향해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옛날을 떠올릴 때의 리암은 행복해 보였다. 그리고 현실과 철저히 분리되었다.

봄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건 정원만이 아니었다. 평소보다 많은 사용인들이 나와 부산스럽게 온 집안을 쓸고 닦고 있었다. 정원을 손보면서 저택 안도 함께 단장할 셈이었다. 그러나 원래 리암이 하는 일은 잘 되는 법이 없고, 결과적으로 제일 중요한 건 고이 내버려둔 채 애먼 홀만 손 보게 된 꼴이다. 잠옷 차림 그대로 숄을 한 장 두르고 창가에 달라붙어 있는 리암은 한 눈에 봐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사용인들은 리암을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화초 정도로 대했고, 리암 또한 무신경하게 주변을 스쳐 지나가는 하인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이어지는 메릴슨의 하소연을 멍하니 흘려보내며 에이든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구부정하게 몸을 숙인 리암이 느리게 눈을 깜빡일 때면 어제의 간지러운 기분은 온데간데 없고 형언할 수 없는 기분만이 어깨를 내리눌렀다. 이 기분이 지속되면 그와 최악의 방법으로 부딪히게 되리라는 것을 안다. 리암이 괜히 일을 복잡하게 만들지 않기를 바랐다.

며칠 지나지 않아 에이든은 프린스턴에게 전화를 했다.

기억 속 프린스턴은 여전히 돌봄을 필요로 하는 나이였지만 그게 자신의 역할이었던 적은 없다. 그럼에도 그가 손수 다이얼을 돌린 이유는 리암이 걸핏하면 전화를 해야 한다고 중얼거린 탓이다. 지난주 리암이 전화를 시도했다는 것, 그리고 프린스턴이 두어 번은 전화를 받지 않았으며 한 번은 하던 도중 끊어버렸다는 것까지 에이든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전화를 건 이유가 뭐지?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가? 곧 한 번 확인을 해서 나쁠 건 없다는 생각에까지 도달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큰 일이 벌어진 것은 아니었다.

"웬 일이야, 형이 전화를 다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를 바꿔 받은 프린스턴의 목소리는 기억하던 것보다 낮고 굵었다. 또 주변이 제법 시끄러웠기 때문에 에이든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린 채로 반대편 귀를 막았다. 

"그냥……."

리암이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자주 이야기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프린스턴이 전화를 끊은 게 다름이 아니라 그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에이든은 잠시 뜸을 들이다 적당히 둘러댔다.

"못 본 지 꽤 되지 않았나. 영영 얼굴 안 보고 살 건 아니니까."

물론 에이든에게는 진심으로 다시 보지 않으려고 했던 때도 있었지만, 그런 내밀한 이야기를 할 이유는 없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발랄한 웃음소리는 그 톤이 낮아도 여전히 어린아이의 것이니까.

"뭐 남으로 살 이유는 없지. 그런데 형도 알겠지만 우리 집이 그렇게 애틋한 장소는 아니잖아."

피차 자신이 했던 말도 마음에도 없는 말이었다. 에이든은 구태여 답하지 않았다.

"리암이 시켜서 전화한 거야?"

"아니."

"이상하네, 요 며칠 리암도 세 번이나 전화를 했거든. 두 번은 못 받았지만. 작은 형은 날이 갈수록 음침해지는 것 같아. 어릴 땐 안 그랬던 것 같은데……."

그리고 한 번은 끊었지. 그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전화선을 만지작거리며 잦아드는 혼잣말을 조용히 듣고만 있으면 나른한 한숨이 이어졌다. 

"그래도 형까지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야… 오는 봄 쯤에는 가볼게."

봄이라. 그냥 알겠다고 하고 끊으면 전화가 길어질 일은 없을 텐데, 그럼에도 에이든은 불쑥 내뱉었다.

"리암이 봄에 새 나무를 심겠대."

"웬 나무?"

"정원에 있는 피칸 나무. 죽었다던데, 알고 있었나?"

"거기 나무가 한두 그루인가. 거기다 나나 형이나 비슷한 신세인데 내가 어떻게 알겠어."

대단한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지만 새삼스럽게 무신경한 대답이다. 하기야 프린스턴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한 때 그늘을 만들기 위해 수없이 심겼던 나무를 일일이 기억할 이유도 없거니와, 세 형제 중 집 자체에 애착을 갖고 있는 인물은 사실상 리암 하나 뿐이었으니까.

"나보다는 네가 더 잘 알겠지. 내가 기숙학교에서 지낼 때 그랬다니까."

에이든은 간신히 그럴듯한 대답을 쥐어짜냈다. 그러나 합격점을 받진 못한 모양이었다. 너머에서부터 하품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어린 동생은 그에게는 가끔 지나치게 어려웠다.

"몰라, 잊어버린 걸지도. 형이 없을 땐 죽은 나무 같은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단 말이지."

"무슨 일?"

"왜, 기억 안 나? 리암이 다쳤던 거. 옛날에 내가 리암한테 나무에 걸린 공을 내려달라고 했는데, 리암이 그걸 꺼내려다 나무에서 떨어졌잖아."

늘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꺼내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엄마를 부를 때 홀로 천진하던 어릴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에이든은 꼭 치부를 찔린 사람처럼 뜨끔한 기분과 함께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프린스턴, 그게 그 나무야. 리암이 떨어져서 크게 다쳤던, 그리고 이제 와서 진심으로 파내기 애석해하는 뒤뜰의 그 나무가 바로 그 피칸 나무라고… 그러나 그런 말을 한다고 무슨 의미가 있을까? 에이든이 꿰뚫렸다 여긴 것은 사실 그 자신의 비밀이 아니고, 그마저도 파헤쳐봐야 죽은 나무 뿌리에 불과했다. 리암이 매일 시간을 들여 바라보고 있는 것은 고작 그 정도의 무게다. 말라 비틀어진 혼자만의 추억이다. 

이 몰이해의 저택 앞에서는 8년의 간극을 안고 있대도 에이든이나 프린스턴이나 거의 비슷한 신세였다. 제발로든 억지로든 오래간 저택을 떠나 있었던 두 형제는 남겨진 한 명의 신세를 평생 이해하지 못할 테다. 에이든이 약간의 피로감을 느끼는 동안 프린스턴은 방금 전의 짜증스러운 권태는 떨쳐내고 좋은 기억을 상기하는 듯 즐겁게 조잘거렸다. 내가 올라가서 가져오면 됐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어. 리암은 이상하게 나무를 타고 논 적이 없었거든. 그래서 난 형한테 나무 타는 재미를 알려주고 싶었던 것뿐이야. 알고 나면 좀 웃을까 해서…….


*


아침이었다. 커튼이 제대로 드리우지 않은 창가에서는 모처럼 겨울 같지 않은 햇빛이 쏟아졌고, 눈부신 빛과 함께 평소보다 일찍 깨었을 때는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실상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음에도 오랫동안 앓던 이가 뽑혀 나간 것처럼 기묘하게 몸이 들떴다. 그러나 매무새를 정돈하고 있노라면 당장의 기분은 단순히 평소보다 따뜻한 공기가 주는 일시적인 고양감에 불과함을 깨닫게 됐다. 봄은 생각보다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리암 또한 그렇게 생각했을까.

프린스턴이 찾아온다는 건 자신보다는 리암에게 좀 더 반가운 소식이다. 에이든에게는 저택에 행사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을 뿐 그에 선행하는 의무가 있는 건 아니었다. 리암의 계획이 어떻게 어그러졌든 그는 한 가지 경우를 더 끼워넣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에이든이 이른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 1층으로 내려갔을 무렵 리암은 정장을 갖춰 입고 예의 창가 앞에 서 있었다. 그게 모종의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복도는 어느 날의 아침과 달리 지독하게 고요했다. 그러나 에이든은 지난 밤에도 그가 불을 끄러 오지 않았다는 것, 그것 말고는 어떤 신호도 의미 없음을 알고 있다.

에이든은 리암이 짚고 있는 창가 쪽으로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메릴슨의 설명을 듣고 나서는 잔뜩 화가 나 그 관련한 이야기를 전부 외면하고 있었는데, 제법 큼직했을 그 나무는 에이든이 관심을 두지 않은 사이 어느샌가 밑동만 남긴 채 사라져 있었다. 쓰러지는 순간에도 비명 한 번 지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에이든은 리암이 그 나무에 무엇을 바랐던 건지 아직도 알 수가 없었다. 잘라버리고 싶었던 건지, 아니면 간직하고 싶었던 건지. 그것도 아니면 되살아나길 바랐던 건지.

"리암."

리암은 대답을 하지도 돌아보지도 않았다. 에이든은 어렴풋한 불안과 짜증이 뱃속에 도사리는 걸 느끼며 그의 팔에 조심스럽게 손을 얹었다. 

"리암, 나무 같은 건 문제가 안 돼."

평소에는 에이든의 발자국 소리만 나도 귀를 곤두세우고 숨을 죽이곤 했는데. 나무, 한 단어에야 리암이 비로소 고개를 돌려 에이든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튀어나오려는 모진 말을 억누른 건 아직 에이든의 기저에 남아있는 의사로서의 의식이었다. 벽을 앞에 두고 이야기하는 기분으로 에이든은 한 글자 한 글자 골라 내뱉었다.

"내일 쯤이면 사람들이 와서… 남은 밑동을 정리할 거야. 그러면 새로운 나무를 심으면 되지 않겠어."

당장 이 궁상맞은 꼴을 보지 않을 수 있다면 어느 모종이라도 뽑아다 박아놓고 싶은 심정이었다. 목을 바짝바짝 말라붙게 하는 역정에 이어 이번에는 차라리 적당한 사탕발림으로 그를 꾀어내는 게 나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네가 나를 이렇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고. 그것만큼은 정말로 괜히 하는 말이 아니었다. 정말로 에이든은 죽은 나무보다는 나은 대접을 받고 싶었다. 더 좋은 말을 해줄 수도 있었겠지만 거기까지는 생각이 닿지 않는다. 분명 에이든의 위로를 들었을 리암은 처음에는 그저 느리게 눈을 깜빡이기만 했다. 꼭 짧지 않은 문장이 전하는 바를 아예 이해하지 못한 얼굴을 했고, 그가 히스테릭하게 쏘아붙이길 바라는 것처럼 시간을 끌었다. 

그리고 정말로 에이든이 참지 못하게 되었을 때에 돌연 얇게 다물린 입술이 열렸다.

"……응."

실로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그렇게 대답하는 순간의 리암은 사실 아픈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에이든은 그 눈에서부터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어린 아이의 모습을 겹쳐 보았다. 형의 잘못을 뒤집어쓰고 꾸중을 들어도 쿠키 하나면 족했던 리암의 둔감함은 예민한 기질에 곧잘 성질을 불러 일으켰지만 가끔은 눈물 고인 눈이 어린 마음에 견딜 수 없이 애틋하기도 했었다. 

그 눈물이 내려앉은 뺨 위로 툭 떨어질 때에 에이든은 불현듯 깨닫는다. 그가 여태 자신을 위해 해온 것들, 대신 매를 맞거나 탓을 돌리거나 과거로 통하는 유일한 매개를 도려내는 등의 일들은 사실 그에게도 꽤 큰 결심이 필요한 일이라는 거. 그러나 리암이 하는 일은 원체 잘 되는 일이 없었고, 마음 먹은 것들이 너무나 쉽게 망가지는 게 견딜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면 리암은 가끔 불투명한 막을 깨고 울었다. 한계에 다다른 사람처럼.

그리고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 들끓던 짜증이 해소되는 것을 느꼈다.

손끝으로 어깨를 밀어내는 것만으로도 그는 고분고분히 몸을 돌렸다. 제대로 채우지 않은 옷깃을 채우고 넥타이를 다시 매주는 동안 리암은 줄곧 에이든을 내려다보았고, 에이든이 그를 완전히 평소의 모습으로 되돌려 놓았을 때 지나는 빗물처럼 몇 방울 떨어지던 눈물은 어느샌가 그쳐 있었다. 

"프린스턴이 오는 봄에는 들르겠다더군."

"학교는?"

목소리가 푹 잠겨있었다. 낯선 기분으로 기억을 더듬던 에이든은 결국 답을 내지 못하고 얼버무리며 리암의 재킷을 한 차례 털었다.

"…고등학교에는 봄방학이 있으니까."

"……이제 고등학교는 졸업했을 텐데."

먹먹한 목소리로도 꿋꿋이 대꾸한 리암은 눈을 마주치는 대신 비스듬히 고개를 숙인다. 어른의 태가 역력한 뺨을 천천히 문질러 닦는 손은 장갑이 없는 맨손이다. 에이든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문득 손을 뻗어 리암의 맞은편 뺨을 쓸어보았다. 축축하고 따뜻한 살갗. 보이는 것과 달리 온기를 띠고 있는. 그 때에 리암이 눈을 들어 슬그머니 시선을 마주했다. 철갑처럼 두르고 있던 무심함이 벗겨진 눈은 연약하고 볼품없으며 두려움이 가득하다. 마지막으로 불을 끄러 왔던 밤에도 리암은 이런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에이든은 리암의 눈 안에 자신이 비치는 것을 본다. 그리고 못 이기듯 그 뺨을 쓰다듬고 물기를 닦다 보면, 리암이 이렇게까지 애써서 얻으려 하는 게 무엇인지, 그 또한 돌연히 궁금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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