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베라

✶2 꽃구경 (22.05.10 재업)

내가 그대에게 해주고 싶어서, 함께 있을 때의 우리는| 야크슈리/연교

ESAVIR by Riva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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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사로운 햇빛이 세상을 공평하게 비추는 한가운데, 나뭇잎 사이사이로 비치는 볕뉘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슈리는 턱을 괴며 곁에 있는 연인을 바라보았다. 평상시 어린 모습을 즐겨 취하는 이이지만, 드물게도 성인의 모습을 취한 것이 살짝 의아스러웠다. …뭐, 아무래도 상관 없으려나. 어느 모습이든 좋고…. 슈리는 가만히 야크샤의 섬세한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기다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고 고이 감긴 눈가를 조심스레 짚었다. 자는 것일까? 그는 딱히 잘 필요가 없는 존재인데도 가끔가다 이렇게 잠에 드는 것을 즐겼다. 평소에는 대화하고 애정을 표현하는 시간이 줄어서 못내 아쉬워했던 취미지만, 개인적으로 꽤나 심각한 고민이 있는 지금은 진심으로 그 존재에 안도할 수밖에 없었다.


“…야크샤, 자?”

“…”


가벼이 물어 깊게 잠든 것을 확인하고, 슈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안고 있다가 잠시 내려둔 꽃다발에선 너무도 좋은 향기가 나고 있었다. 언제나 하고 다니는 반지는 새하얗기도, 푸르기도 한 것이 누가 보아도 연인을 연상시켰다. 기억은 야크샤와의 추억으로 가득했고, 지금도 바로 곁에 있는 모습이 계속 시선 끝에 머물렀다. 문제랄 것이 없는 상황이고 만족스러운 모습이지만, 딱 한가지가 불만이고 불안이었다.


“…내가 준 게 거의 없어.”


단어로 표현하자면 '부채감'에 가까운 것, 가깝다 뿐이지 그렇게 단어 하나로는 표현할 수 없는 심리. 그것이 바로, 슈리가 차마 말로 내지 못하고 속으로 삼켜내고 있는 고민의 정체였다.



기실 걱정, 불안, 불만이라 표현하기는 했지만 다른 누군가가 보면 배부른 소리하지 말라고 외칠 가능성이 다분한 고민이었다. 그를 잘 알기에 슈리는 누군가에게 상담하지도 않고 혼자서만 생각을 거듭하고 있었다. 어지간한 이들은 공감해주지 못할 테니 말이다. 무엇보다도 야크샤같은 연인을 가진 이는 저밖에 없을테고.

고민을 자각한 것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한순간이었다. 언제나와 같이 그에게 꽃다발을 받은 순간, 그에게서 받은 반지를 만족스럽게 바라보던 순간. 자신도 연인에게 무언가를 주고 싶었고, 제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처음엔 그뿐이었지만 나중엔 승부욕이 되었으며, 그보다 더 시간이 지나서는 저가 표현하는 애정의 양이 야크샤에 비해 너무 적다는 걱정에까지 이르렀다. 내가 야크샤에게 진심이 아닌 걸까, 라는 생각에 닿기 전에 생각을 끊어낼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본래 사고라는 것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니. 그나마 다행인 점은 주위에 연인인 수라는 별로 없어서 다른 이들에 비하면 자신이 진심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무튼 그런 사고의 연쇄에서 벗어나기 위해 슈리가 내린 결론은, '나도 뭔가를 해주자' 라는 지극히 정석이고 보편적인 답이었다. 물론 내린 결론이 정석이라 해서 그 적용이 쉽다는 것은 아닌 만큼, 결론을 내린 것이 고민의 끝을 의미하진 않았다. 야크샤가 좋아하는 것은 평화, 자연 만물, 인간, 슈리 자신, …등의, 슈리가 구하기엔 어려운 것이었고―슈리 자신은, 이미 가지고 있지 않은가? 슈리는 제가 인정한 단 한 명의 연인에게 자신의 소유권이 있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할 수 있었다. 물론 본인 역시 야크샤의 소유권을 가지고 있었고―, 그가 자신에게 해준 것처럼 처음 해보는 즐거운 경험을 준다는 것은 그가 저보다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을 것이 분명해서 어려웠다. 슈리는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이미 습관이 된 것이 분명한 한숨을 다시 한 번 내쉬었다.


“슈리야, 무슨 일 있느냐?”

“으응… 아냐~ 아무것도.”

“그러냐… 혹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면, 꼭 내게 말해다오. 걱정 된다.”

“응, 그럴게.”


그때 한 번 한숨을 들켜서 그 이후로는 확인해보고 하고 있다는 것은 비밀. 당연한 말이지만 고민의 주체에게 고민을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이번 경우엔 스스로의 힘과 혼자서 고민한 결과로 그가 웃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마음이 더 강했던 것 뿐이지만, 일단 대체적으로도 그럴 터였다. 그건 그에게 바라는 것이 있느냐 묻지 않는 자신에 대해 상당히 훌륭한 변명거리였다.

스스로도 답답하다는 것을 부정할 엄두는 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슈리는 고민을 시작한 이후 매일같이 하던 고민을 잠시 접어두고 잠든 야크샤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무엇을 받으면 행복해할 거야? 어떻게 내가 행복해할 것을 알았어? 차마 본인에겐 묻지 못하고 속에다 묻어내면서, 슈리는 몇 번이고 반복했던 생각을 다시 시작했다. 당신은 무슨 생각으로 선물들을 골랐을까, 난 당신이 주는 것들을 다 좋아하고 어떤 때에도 행복해했던 것 같은데…. …어라, 평소랑은 조금 다른데. 슈리는 느릿하게 깊은 눈을 깜빡였다. 나는, 당신이 나를 생각해서 골라준 것이 너무 기뻐서. 당신과 함께 있는 순간이 너무 좋아서. 당신이 좋아하는 것을, 내가 함께….


아.


슈리는 곁에 있는 꽃다발에 시선을 옮겼다. 야크샤 또한 언제나 다른 선물만 준 것은 아니었다. 종종 같은 종류의 선물도 있었고, 가장 많았던 것은 꽃. 야크샤는 만물을 아꼈고, 꽃을 보며 즐거워했었다…. 슈리의 얼굴에 햇살이 비치기 시작했다. 야크샤는 분명 기뻐해주겠지, 드디어 그의 기억에 자신이 건네는 추억이 자리한다. 들뜬 마음을 굳이 억누르지 않으며 슈리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즐거운 고민을 시작했다. 어떤 종류를 줄까, 주기보다는 많이 있는 장소로 가는 것이 좋겠지. 어디로 갈까? 그러고보니 최근에 들은 곳이 있었는데. 인간도 없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무나 들어가지 못하는 곳. 아름다운 풍경이 흐드러지듯 펼쳐져있는 곳…. 아무도 들어가지 못한다지만, 슈리에겐 자신이 있었다. 자신과 야크샤는 들어갈 수 있다는, 이유 모를 확신. 슈리는 잠들어있는 야크사의 어께를 잡고 살짝 흔들었다. 막 깨어나서 졸음이 묻어나는 푸른 눈이 슈리의 분홍빛을 담아내기 시작했다.


“야크샤, 일어나봐. 야크샤.”

“…으음… 왜 그러느냐?”

“같이 가고 싶은 곳이 있어.”

“지금?”

“지금.”


느릿한 물음에 돌아온 한치의 망설임도 없는 단호한 대답에, 야크샤는 나른한 눈을 두어 번 깜빡이고 몸을 일으켰다. 근래 꽤 긴 시간 동안, 고민이 있는 것이 분명한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던 연인이 기대와 즐거움으로 저리 반짝이는 얼굴을 하고 있는데, 어느 누가 그 말을 들어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설령 다른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 뜻을 따라야지. 야크샤는 일어남과 동시에 소년의 모습을 취하며 슈리에게 손을 건넸다. 제 손을 잡은 슈리가 일어나는 것을 도우면서, 야크샤는 부드러이 웃었다.


“오래간만에 웃는 얼굴 보니 좋구나.”

“…아 그게,”

“괜찮아. 무슨 고민이었는지, 무슨 상황이었는지 대강은 짐작하고 있었다. 무슨 답을 내렸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네가 고민의 답을 내린 듯 하여 다행이야.”

“…걱정시켜서 미안해.”

“별것 아니었으니 그리 시무룩한 얼굴하지 말거라. 네 결론을 기다리며 기대하고 있었으니… 자, 이끌어 주겠느냐?”

“…후훗, 응. 기대해도 좋아.”

자신만만한 얼굴에 야크샤는 가벼운 너털웃음을 흘렸다. 그래, 이리 자신 넘치는 얼굴이 어울리지. 야크샤의 손을 잡은 슈리의 발 밑에서 너울대는 불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피워낸 이의 색을 닮은 분홍빛 불꽃이 초록의 들판과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하던 시야를 가렸다.

시야를 가린 불꽃이 걷히고, 야크샤는 조금 뒤늦게 눈을 떠서 뒤바뀐 풍경을 바라보았다. 아니, 크게 보면 방금과는 그리 바뀌지는 않았다. 이곳은 온갖 꽃들로 가득한 자연 속의 풍경을 하고 있었고, 이전에 있던 곳 역시 푸른 잎의 풀들과 하얀 들꽃, 선명하니 청량한 잎사귀가 가득한 나무들로 이루어진 자연 속의 풍경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다만 이곳은 분명히 누군가의 손이 탄 것을 그대로 드러내듯 분홍빛의 꽃들이 화사하니 널찍이 온 시야에 펼쳐져 있었고, 그곳은 인위적인 조작을 받지 않은 듯 여러 빛깔의 이파리와 꽃잎들이 피어나 있었다는 것이 사소한―이라기엔 꽤 큰― 차이였다. 드문드문 어색하게까지 보이는 다른 색의 풀잎과 여린 꽃들이 피어 있는 부분들을 시선으로 좇으며 야크샤는 큰 눈을 조금 더 크게 뜨고 휘휘 주위를 둘러보았다. 세상에, 꽤 오랫동안 안 온 느낌은 있었지만 이렇게 처음 보는 것들이 많다니. 야크샤는 생경한 즐거움이 가득한 웃음을 짓다가 와, 하는 탄성에 슈리를 올려다보았다. 잠시 다른 곳을 보고 있었던 분홍빛 눈이 야크샤의 푸른 눈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여기 예쁜 곳이다, 야크샤.”

“…그렇구나. 오늘 처음 와보는 것이냐?”

“응. 누구도 들어오지 못했는데, 우주에서 봤을 때 굉장히 아름다운 풍경을 가진 곳이 있다고 들었던 게 떠올랐거든.”

“그런가… 확실히, 널 연상시켜서 여전히 아름다운 곳이다. …헌데… 확실히 뭔가 걸려있긴 하구나. 분명 저런 건 없었을 터인데…”

야크샤는 저 멀리 높은 곳을 바라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마치 반가운 것을 본 사람처럼 들떴던 얼굴은 한순간에 걱정, 혹은 경계심으로 물들었다. 그와 이유는 다르겠지만, 예쁜 곳이라는 감상과는 달리 그 순간 말고는 야크샤만 바라보고 있던 슈리 역시 미약한 걱정을 얼굴에 드러냈다. 아, 기대하라 했으니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싶어 했을텐데. 슈리의 얼굴을 확인한 야크샤는 얼른 어두운 기색을 거두었다. 아무래도 걱정을 시킨 모양인데… 이를 어찌 해야 할지. 야크샤는 잠시 고민하는 듯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손을 들어 슈리의 볼을 가볍게 건드렸다. 그 작은 행동으로 슈리의 눈을 살짝 크게 띄우곤, 야크샤는 맑게 웃어 보였다.

“걱정 말거라, 위험한 기색은 느껴지지 않아. 나 역시 네가 날 이곳으로 데려와 준 것이 너무나 좋다. 혹 저것 때문에 네게 안 좋은 일이 있을까 걱정한 것 뿐이니, 기뻐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아주었으면 해.”

“…별로… 그런 걸로 걱정은 안 했는걸. 그전에 네가 웃는 얼굴 봤어. 그냥 네가 너무 심각해서 나도 걱정한 것 뿐이니까 그렇게 걱정 안 해도 돼, 야크샤.”

“…그렇다기엔 아직 안색이 어둡지 않으냐. 웃는 것으로는 가려지지 않았다. 무슨 다른 이유가 있는 것 아니냐? …제발 대답해다오.”

야크샤의 어조는 조심스러웠고, 올려다보는 푸른 눈은 슈리가 잘 숨겼다 생각한 마음을 꿰뚫어보듯 선명했다. …진짜 아닌데, 슈리는 나긋이 웃던 얼굴 그대로 고개를 저었다. 설령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이렇게 걱정하는 연인에게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자신이 데려온 곳에 둘만 있는 지금, 안색이 안 좋은 다른 이유가 있다는 것은 연인에게 그 이유가 있다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으니까. 알 수 없는 기분에 대한 이유를 굳이 찾기보다는 야크샤의 웃는 얼굴을 보는 것이 더 이로웠다. 슈리는 그렇기에 굳이 말을 덧붙이기보다는 걱정하는 얼굴의 연인에게 웃는 얼굴을 보이는 것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래. 생각은 한 번 해보자. 표정이 어두운 이유는 무엇일까? 뭐가 이리 마음에 걸리는 걸까? 야크샤가 걱정하는 '어두운 얼굴'의 이유는 슈리 본인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문제였다. 야크샤가 자신보다 다닌 곳이 많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던 객관적인 사실이고, 자신이 나서서 데려오긴 했지만 그 장소를 야크샤가 이미 알고 있었을 경우도 이미 가정했던 바다. 그런데 도대체 왜, 무엇이 걱정되는 걸까? 단순히 알고 있던 장소라기엔 주위를 둘러보는 야크샤의 얼굴이 그리워 보여서? 분홍빛으로 가득한 이곳의 모습이 누가 보아도 자신을 연상시켜서? 그 두 가지가 도출해내는 결론이 하나 있기는 했지만, 고작 그런 것이 이렇게 우울해지게 만드는 걸까? 자신의 마음이지만 알 수 없었다. 부디 어서 평소대로 야크샤의 웃는 얼굴에 녹아내리길, 그의 다정한 마음씨 하나하나에 설레는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어 애타길. 슈리는 잔잔한 미소 아래 특정하지 않은 누군가에게 기도했다.

야크샤는 걱정으로 다급해진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슈리의 얼굴을 살폈다. 다시 보니 말하지 않는다기보다는 본인조차 몰라서 대답하지 못하는 것에 가까운 듯 했다. 오래 살면서 많은 인연을 맺고 들여다 본 경험상, 이런 감정을 그냥 내버려두면 나중에 훨씬 심하게 터지기 마련이라― 야크샤는 짤막한 한숨과 함께 다시금 신체의 나이를 올렸다. 갑작스레 진 그림자에 당황한 기색이 고운 얼굴로부터 엿보였다. 다행이다, 너조차 모르는 네 불안의 근원을 내가 아는 듯 하여. 혹시나 우리의 불화의 근원이 될지도 모르는 것을 간과하지 않을 수 있어서. 쓴 웃음을 입가에 머금고, 야크샤는 슈리의 얼굴을 곧게 바라보았다.

“슈리야.”

“…응.”

“이건 줄곧 가지고 있던 내 짐작이기는 하다만… 지금 이 상황을 그대로 넘기고 싶지 않으니, 확인해보도록 하마. 혹, 지금까지 고민하던 것이 네 사랑이 부족한 것 같아서였느냐.”

“…!”

“그렇다면 아무래도 내가 네게 건네는 선물들에 대해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시작이었을 듯 싶은데…. 네가 말해준 것이 아니니 내가 정확히 알 수는 없다만, 내 입장에서 그런 방식으로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내가 좋아할 것을 떠올려 이곳으로 온 것으로 생각하게 돼. 맞느냐?”

“…맞아.”

“…맞았구나. 그럼, 여기부터는 더욱 말하는 데 조심스러워진다만…”

야크샤는 조심스럽게 운을 띄웠다. 타인이 함부로 감정을 재단하는 것은 민감한 부분을 건드릴 수 있는 것이니, 상담하는 상황 정도를 제외하면 그걸 말해서 좋은 결과를 본 바가 없었다. 자신의 감정을 들은 대상이 다른 이가 무엇을 아느냐는 생각을 할 수도 있고, 정곡을 찔려 더한 상처를 받을 수도 있고, 재단한 타인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경우도 있고…. 불유쾌한 경우가 수두룩하니 당연한 일이다. 그렇기에 평소에는 그런 것을 의식적으로 자제하거나 입에 담지 않는 야크샤지만, 본인도 본인의 감정을 모르는 이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 다행인 점은 두 가지. 슈리가 야크샤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다는 것과, 야크샤가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오랜 세월 다른 이들을 지켜봐 온 존재라는 것. 야크샤 본인의 입장에선 평소 꺼리던 방식이었지만 조심스럽게 밝히는 이곳의 진실과 그에 이어진 감정에 대한 추론은 빗나가지 않았다.

“…이곳이 내가 널 떠올리며 가꾼 곳이었던 것을 알아차리고… 역시 네 사랑이 적다고 판단한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된다.”

“…아.”

슈리의 분홍빛 눈이 동그라니 커졌다. 아, 그거구나. 슈리는 큰 눈을 몇 번 깜박이다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사실이 아니길 바랐건만. "자신도 모르던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알았을까" 라는 마음이 선하도록 흔들리는 눈과 의아한 낯빛을 한 채로 저를 바라보는 슈리의 얼굴을 가볍게 쓸어주고, 야크샤는 슈리의 손을 들어 쥐었다. 작은 편은 아니더라도 야크샤의 손에는 한 손에 들어오는 크기의 손이지만, 야크샤는 양손으로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을 다루듯 조심히 잡아서 제게 가까이 끌었다. 갑작스럽게 가까워진 거리에 슈리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야크샤?”

“슈리야, 내가 네게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말하고 싶은 거?”

“난 네가 내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언제나 행복하고 이 삶에 감사하게 된다. 그 하나로도 너무나 고마워. 그래서 언제나 네게 더 못해줘서 안달이다. 너도 나 하나만 있으면 된다 여긴다고 내 멋대로 짐작하고 있기는 했다만 언제나 부족하게 여기게 되지. 흘려보낸 세월이 그만큼 긴데도, 너와 함께 보낸 세월이 오래 되었는데도 버리지 못한 걱정이다. 하지만, 넌 내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아도 된다 생각해. 네가 내게 뭔가를 해주려 하는 마음을 막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네가 내 곁에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내가 평생 동안 못 얻을지도 모르던 행복을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아. …주저없이 말해주다니, 이리 기쁠 데가 있나.”

“주저할 리가 없잖아. 나도 네가 내 곁에 있는 것만으로 기뻐. 언제나 네가 말해준 네 생각과 같은 생각을 했고, 너와 함께 있는 동안 만큼 행복한 적은 없었어. 그만큼 언제나 즐거웠는걸. 하지만 네가 기뻐할 때가 나도 더 기쁘고, 내 곁에 있는 것으로 네가 웃는 건 많이 봤지만 내가 직접 널 기쁘게 해주고 싶었어. 네가 내게 무언가를 줌으로써 내가 웃게 만들어줬던 것처럼, 나도 네게 무언가를 주고… 네 기억 속에 내가 직접 만들어 준 추억을 끼워넣고 싶었어. 그래서 데려온 거였는데…, …여기가 네가 가꿨던 곳인 줄은 몰랐어서.”

슈리는 시무룩하게 시선을 떨구었다. 머리 위에 쫑긋 오른 귀는 축 쳐졌고, 치맛자락 뒤로 늘어뜨린 꼬리도 바닥에 닿았다. 이유도 모르고 축 쳐지던 감정의 원인을 알자, 야크샤가 그 이유를 알고 있다는 것을 알자, 나긋이 웃던 얼굴 뒤로 애써 감추던 감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런, 이리 속상해하는 모습은 보고싶지 않은데. 야크샤는 잠시간의 고민 끝에 슈리에게 맞춰 한쪽 무릎을 꿇어 시야를 맞췄다. 물기어린 분홍빛 눈이 다정한 푸른 눈과 시선을 맞추었다. 붉게 달아오른 눈가를 상냥한 손길로 어루만져주며, 야크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차가운 손이 눈가에 높게 오른 열을 대신 받아갔다.

“슈리야, 울지 말아. 네가 울면 나도 서러워.”

“…응.”

“네 생각이 아직 닿지 않았을 사실이 있다. 이곳은… 우리가 그 옛날 떨어져 있던 그때, 널 그리며 가꿨던 곳이야. 우리가 함께 있어온 세월은 우리의 기준에서도 꽤나 오래되지 않았느냐. 난 그만큼의 기간을 이곳에 오지 않았어. 네 덕분에 오래간만에 이곳에 오게 되어 너무나 기뻤다. 정말 반갑고 좋았다. 그리고 그보다 더, 네가 내가 즐거워하며 좋아하는 것을 그리며 이곳을 떠올렸을 것 같다는 것이 너무나 행복하구나.”

나도 그랬기에, 우리가 같은 생각을 한 것이 너무나…. 야크샤는 막힘없이 유려하게 말하다가 문득 부끄러워졌는지 흠흠,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더 부끄러울 말들을 여지껏 막 늘어놓았으면서 이제야 부끄러움을 느끼다니, 슈리는 어처구니없다는 얼굴을 하고 야크샤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하얗고 큰 손 아래에 제대로 감추지 못한 붉은 기색이 엿보였다. 흰 피부에 오른 붉은 홍조, 자세히 들여다보려던 슈리 역시 문득 느낀 부끄러움에 손을 가린 옷자락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아 진짜, 뭘 했다고. 더한 것도 이미 한 사인데. 제 의지는 무시하고 뜨거워진 듯한 얼굴에 손부채질을 하며 슈리는 속으로 온갖 불평을 다 늘어놓았다. 아무튼, 야크샤는 결국 붉은 얼굴을 가다듬지는 못하고 다시 슈리를 곧게 바라보았다.

“내가 다시 이곳에 오게 해주어 고맙다, 슈리야.”

“…이걸로 괜찮아?”

“이런, 줄곧 말했는데. 내 진심은 닿지 않은 건가?”

“아냐! …충분한걸. 너무 충분해서 마음이 달기까지 해.”

“하하, 다행이구나.”

“…사랑해.”

슈리는 진심으로 안도한 듯 말갛게 웃어보이는 야크샤에게 기습적으로 말했다. 반쯤은 다시 여유를 되찾은 그의 당황한 모습을 보기 위해, 또 반쯤은 자신이 먼저 말한 적은 없는 것 같아서. 말해놓고 부끄러워서 잠시 시선을 피하긴 했지만 이번만큼은 그의 반응을 보기 위해 붉어졌을 얼굴을 뒤로 하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놀란 듯 크게 떠진 푸른 눈이, 부끄러움과는 다른 홍조 아래 너무나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며―

“나도.”

나도 정말 사랑한다, 슈리야.

이루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환한 얼굴을 하며, 황홀하다고까지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은 얼굴을 하며, 야크샤는 슈리의 손을 꼭 잡고 웃었다. …아. …두 번 보면 안되겠네. 농과 진심이 엇비슷하게 섞인 생각을 장난스레 떠올리고, 슈리도 결국 웃음을 참지 못했다. 저가 그렇게까지 먼저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이런 얼굴을 보았는데 이젠 뭐 어쩌냐는 생각도 들었다. 야크샤는 살짝 몸을 옆으로 돌려 슈리의 시선을 활짝 열었다. 자랑스러운 듯 애정이 묻어나는 시선을 떨어뜨리는 일 없이, 야크샤는 물었다.

“함께 이 행성을 돌아보지 않겠느냐?”

대답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으리라. 즐거운 기대감이 어린 대답이 떨어지고, 둘은 느릿하게 걸음을 안쪽으로 옮겼다. 함께 걷는 시간도 소중했고, 앞으로도 연인에게는 많은 시간이 남아있었다.

야크샤는 살랑이는 바람에 흔들려 톡, 톡 서로를 건드리는 풀잎의 소리에 슬며시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나른한 기색이 걷히지 않은 푸른 눈에 비친 것은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는 분홍빛 여인의 모습. 일어났어? 라고 느긋한 어조로 물으며 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는 연인에게, 야크샤는 그녀와 똑닮은 평온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오늘도 아름답구나, 슈리야.”

“오늘이라니, 잠든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걸. 아침에도 해줬잖아?”

“널 볼 때마다 해도 부족한 말이지 않으냐. 달리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한 것이니 봐주거라.”

“후후, 그럼 그냥 넘어갈게. 그리고 맞는 말이긴 하지만 야크샤가 할 말은 아닌걸. 이렇게 잘생긴 수라가 누구 연인일까.”

“우주에서 제일가는 미인이 그리 말해주다니, 이런 영광이 또 다 있나…. 너 말고 달리 누가 있겠어.”

“그렇지?”

“응, 너무나도.”


슈리는 나긋이 입술을 당겨 웃고는 몸을 숙여 지긋이 웃는 야크샤의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찍었다. 그럼 슬슬 일어나야지, 야크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장난스레 웃으며 하는 말에 야크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일어나야지. 보드라운 풀이 깔린 들판에 뉘이고 있던 몸을 일으켜 자리에서 일어나며, 야크샤는 슈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

“…아하핫, 난 그냥 몸만 일으키라는 뜻이었는데.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주변이 화사하니 눈이 즐겁지 않으냐. 너와 있는 하루하루를 즐기고 싶다.”

“굳이 안 일어나도 즐길 수 있지 않을까? 난 야크샤랑 있기만 하면 언제나 즐거운데.”

“나도 그렇긴 하다만, 부러 이곳에 자리를 잡았는데 한 곳에만 있는 것은 아깝지 않으냐. 그날 보여주지 못했던 것들도 아직 많다.”

“으음… 그럼 그럴까.”


슈리는 제게 내밀어진 야크샤의 손을 잡았다. 손을 맞잡은 팔에 살짝 힘을 주어 슈리를 일으키고, 야크샤는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팔랑팔랑 떨어지는 벚꽃 한 송이를 잡아서 슈리의 머리카락에 가져다 대었다. 어라, 선물이야? 슈리는 질문을 건네면서 꽃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톡톡 건드려보았고, 야크샤는 그 모습을 귀엽게 보는 것이 정말 티난다는 것을 모르는 듯 말근 얼굴로 대답했다. 오늘의 첫번째 선물이라 하마. 첫번째라 함은 두번째, 세번째도 있다는 것과 같았다. 그를 알아차린 슈리도 밝은 얼굴로 말했다. 그럼, 나도 첫번째 선물을 준비해야겠네.

이른바 어느 연인에게나 있다는 선물 경쟁의 날이 될 것을 예고하는 시작이었다.



경쟁이라 표현하고 의미심장한 느낌의 문장이기는 했지만, 그저 서로에게 더 많은 것을 주고 싶어할 뿐이기에 그 이후로도 평화로운 분위기는 유지되었다. 야크샤가 꽃 사이에서 놀기에는 평소의 어린 모습이 더 어울린다 주장하며 신체의 나이를 내리려다가 슈리에게 저지당하고 잠깐 당황한 일 정도만 제외하면 그랬다. 그것도 당황한 다음 못말린다는 듯이 웃으며 슈리를 꼭 안아서 딱히 사건 축에 낄 정도가 되지도 않았다. 둘만 있으니 왠지 조용한 느낌이구나. 얼마 전 하누만이 방문했어서 나온 자연스러운 감상이었고, 하누만과 함께 소란스럽다고 느낄 만한 상황을 만들었던 장본인인 슈리는 눈웃음을 지으며 태연하게 대답없이 넘어갔다. 야크샤는 은근히 다른 이를 놀리기를 좋아했다. 그런 점도 좋아한다는 점에서 슈리가 뭐라 할 수는 없겠지만.


“…아, 이거 괜찮다.”

“뭐가 말이냐?”

“음…~ 이걸 이렇게 하면…”

슈리는 손재주가 좋았다. 물론 못하는 건 없다고 봐야 하겠지만―다소 불같던 성격도 많이 사그라든지 오래이고―, 특히나 무언가를 만들고 다루는 데에 능했다. 슈리가 야크샤의 손에 대고 만지작거리는 것은 이 행성 전체를 덮은 분홍빛 꽃 중 하나였고, 한 송이의 꽃을 의아하게 보던 야크샤는 이내 형태를 잡아가는 모습을 보며 미소지었다. 아니, 사실 손가락에 댔을 때부터 짐작은 했다. 새삼스럽게 슈리의 왼손 약지에 남아있는 제 신체의 일부로 만든 반지를 보고 만족스레 웃느라 생각을 뒤로 미뤘을 뿐. 제 손을 보다가 슈리의 손으로 시선이 옮겨진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야크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속으로 뻔뻔하게 합리화하며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반지로구나.”

“응, 내 색의 반지. 반지는 야크샤만 줬었으니까.”

“그랬었지. 안 상하게 잘 두어야겠구나.”

“꽃이니까 어려울걸? 그냥 받았을 때 아껴줘.”

“그렇겠지… 영 아깝지만 알았다. 상하기 전까지만 잘 보관하마.”

“그거면 충분해. 나중엔 나도 내 신체 일부로 만들어서 줄게.”

“이런, 너무나 기대되는데. 언제쯤?”

“음… 언젠가~”

능청스레 대답하며 슈리는 야크샤의 손 위에 꼬고 있던 반지를 다 만들고는 완성~ 이라 즐겁게 말하며 양손을 들어 올렸다. …고맙구나, 나긋이 대답한 야크샤는 가만히 반지를 내려보다가 만지작거렸다. 분홍색 꽃을 가운데로 하고 어찌 했는지 하얗고 작은 들꽃을 군데군데 끼워서 복잡하게 엮은 반지―. 워낙에 섬세하게 만들어져서 자칫 잘못 건드리면 꽃 하나가 떨어지거나 풀릴지도 몰랐다. 망가지면 어쩌려고? 장난기 어린 물음에 그러게, 네가 다시 만들어주길 바라야 하려나? 라고 질문으로 답하며, 야크샤는 느릿하게 주변의 꽃들을 주섬주섬 꺾어올렸다.

“…으음, 뭐하려고?”

“선물을 받았으니, 나도 뭐 하나 줘야하지 않겠느냐. 내게 너만한 손재주는 없다만, 나도 못 만들지는 않는다.”

“아하~ 결국은 우리 오늘 선물 주는 걸로 경쟁인가.”

“경쟁이라기엔 하루종일 고맙고 만족스러운 마음만 들 것 같지 않으냐?”

“그건 그렇지만, 표현이 그렇다는 거지.”

“그리 말하면 할 말이 없는걸.”

야크샤는 피식 웃으며 금새 만들어낸 팔찌를 슈리의 팔 위에 엮었다. 손재주가 없다 했지만, 이렇게 말하는 짧은 시간에 만들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완성도 있는 팔찌. 뭐야, 손재주 없다며. 가벼운 실소와 함께 불평하듯 건넨 말에 네가 준 것만큼 예쁘지는 않지 않느냐.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확실히 하얀 꽃을 중심으로 녹빛 줄기를 두바퀴 돌려서 엮어낸 단순한 모양새긴 하지만, 단순한 것과 예쁜 것은 엄연히 다른 것. 예쁘다는 미적 감각도 사람마다 다른 것이니, 슈리는 예쁘지 않다니 어처구니가 없다는 마음을 가득 담아 미소지은 다음 하얀 꽃에 가볍게 입술을 대었다 땠다. 순간적으로 하얀 얼굴에 오른 분홍빛 홍조를 분명히 본 슈리는 크게 웃었다.



어느정도 시간이 지난 다음, 야크샤와 슈리는 둘 다 꽃무더기에 묻혔던 사람처럼 곳곳에 꽃을 달고 있었다. 직전에 마지막으로 주고받은 선물이자 화룡점정은 화관. 둘이 현재 있는 이곳은 야크샤가 슈리를 떠올리며 가꿨던 곳이니만큼 분홍빛 꽃들이 가장 많기는 했지만, 야크샤가 분홍색만 좋아하는 건 아니었기에 어느 한 구역에는 색색의 꽃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어지간해서는 자연적으로 볼 수 없는 색의 꽃을 발견했을 때 슈리가 야크샤를 빤히 바라보고 야크샤가 은근슬쩍 시선을 피하는 해프닝이 있었다는 사소한 일 정도를 제외하면 사이좋게 선물을 주고받은 결과였다. 야크샤가 하고 있는 화관은 분홍색, 슈리가 하고 있는 화관은 흰색을 베이스로 여러 빛깔의 꽃을 엮어서 만들어졌다는 것은… 뭐, 설명할 필요도 없는 당연한 일이었다.

야크샤는 슈리를 바라보는 데에 집중했다. 둘은 일어서서 발걸음을 몇 번 옮긴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장신구는 아닌 다른 것을 만드느라 손을 이리저리 바삐 움직이던 슈리는 야크샤의 시선을 느끼고 빙그레 미소지었다.

“무슨 생각해, 야크샤?”

“…글쎄, 네 생각이려나.”

“바로 앞에 있는데? 심심한거야?”

“널 보고있는 것만으로도 즐거우니 심심하진 않다만… 네가 날 보고있지 않지 않더냐.”

“후훗, 알겠어. 이것만 만들고 나도 야크샤만 보고 있어야겠네.”

1단계 라크샤사같아, 아니면 인간 아이. 슈리는 키득이며 야크샤를 놀리고는 다시 만들던 것에 집중했다. 집중하고 있다는 것의 증거라도 되는 듯, 말이 없어지고 시선이 만들던 것에서 떨어지지를 않았다. 만들다가 잠시 멈춰서 손을 입가에 가져다대고, 고개를 살짝 기웃거리다가 엮어넣은 꽃 한 송이를 빼고, 한 송이를 다시 엮고. 대충 일련의 과정을 반복할 뿐이기에 보고 있는 야크샤의 입장에선 만드는 결과물을 보는 게 아닌 이상 지루할 터였다. 절대 보지 말라고 신신당부―협박에 가까웠던―받았던 것을 기억하고 있는 야크샤는 만들어지고 있는 것을 보는 대신 슈리의 얼굴만을 빤히 바라볼 뿐이었지만 말이다.

'이것만 만들고'라고 들은 것 치고는 얼굴만 보고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하지만 스스로 말했던 대로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기에, 수라는 오랜 시간을 버틸 수 있는 종족이기에, 첫번째 이유를 가능하게 했던 자신의 사랑이 멎는 일은 없기에. 슈리가 자신만 보고 있으라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달리 할 것이 있는 것도 아니고 위에 나열한 이유들 덕분에 얼마나 길어지든 상관없으니 가장 즐거운 것을 선택했던 야크샤는 괜찮았다. 다 했어! 를 외치며 즐거운 얼굴로 자신을 돌아보는 슈리에게 야크샤 역시 웃어보였다. 역시, 슈리가 즐겁다면 저는 아무래도 좋았다.

“만족스럽게 되었느냐?”

“응, 너무나도! …그런데 야크샤, 계속 나만 보고 있었던 거야?”

“응, 그랬다만?”

“…시간이 꽤 지났는데, 괜찮았어? 만드는 거 보지 말라고도 했었는데…”

“우리에겐 시간은 별로 중요하지 않지 않느냐. 중간에 말했다시피, 난 널 보고있는 것만으로도 즐거우니 괜찮았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아니야. 내 말 들어줘서 언제나 고맙고, 무리시켜서 미안해. 이젠 봐도 되니까.”

“별 거 아닌 것을. 그래도, 그래… 그건 궁금했지. 어디 보자.”

야크샤는 슈리가 손을 내밀고 나서야 슈리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별로 그렇게 멀리 있던 것은 아니긴 하지만, 큰 걸음으로 빠르게 다가온 야크샤는  슈리를 꼭 끌어안고 완성품을 보았다. 이 한 자리에서 무슨 수로 이리 많은 색을 가져왔는지…. 보자마자 든 감상은 색에 대한 것이었다. 야크샤는 자연스레 받아들었다가 나무로 만든 지지대같은 것도 없는데 튼튼하게 잘 엮인 것에 우선 신기해하고, 꽃이 이루는 형태를 알아본 후에는 눈을 크게 뜨고 슈리를 바라보았다. 야크샤의 놀란 얼굴과는 대조되게도, 슈리는 후후 웃으며 태연하게 야크샤에게 기댔다.

“어때, 마음에 들어?”

“…내 호불호에 관계없이 네가 정성을 들인 것이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좋긴 했지만… 굉장하구나. 어떻게 이런 걸 만들 수 있는 것이냐?”

“야크샤도 손재주 좋으니까 만들 수 있을걸? 조금만 수고를 들였을 뿐이거든.”

“조금이라니, 네가 고민하던 걸 내 다 보았는데.”

“그거야 디자인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거지. 야크샤도 이렇게 만들어볼래?”

“네가 도와준다면 해보긴 하겠지만… 하나만 있어도 충분할 성 싶구나. 이런 것은 본디 하나만 있을 때 시선이 더 잘 가는 법이니.”

“음…~ 그런 건 딱히 상관 없지만, 야크샤가 그렇다면야.”

슈리의 짙은 미소를 본 야크샤는 피식 웃고는 슈리를 들어올렸다. 어머. 눈을 동그랗게 뜬 슈리를 바라보며, 야크샤는 장난스러운 미소와 함께 빙글 돌았다. 긴 머리카락이 움직임에 따라 크게 펼쳐졌다. 자, 이러면 그것과 비슷하지 않으냐? 능청스레 건넨 질문에 슈리는 즐거이 미소지었다.

슈리가 만든 것은 꽃과 열매, 이파리 등을 이용하여 그림처럼 엮어서 나타낸 것이었다. 딱히 뭐라고 부르기에 적당한 선례는 없을 정도로 독창적이었지만, 작품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는 없었다. 주황색, 노란색 꽃을 이용해 노을을, 흰색과 푸른색을 이용해 야크샤를. 분홍색과 붉은색, 치맛자락의 흰색을 이용해 슈리 자신을, 분홍색과 초록색을 이용해 그들이 앉아있는 이 자리를. 여기까지만 해도 대단한 것이겠지만, 무릎 아래에 팔을 넣어 그녀를 안아올린 야크샤를 뚜렷하게 표현해내고 있었다. 바로 그 모습을 따라한 야크샤를 비스듬하게 흘겨보며, 슈리는 야크샤의 목에 팔을 둘렀다. 이러면 더 비슷하지? 이건 장난친 것을 되돌려주는 것일까? 난처한지 즐거운지 모를 얼굴로 웃은 야크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웃은 의미를 짐작하기 어려운지, 슈리는 느릿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야크샤의 푸른 눈에 시선을 맞췄다.

“난처한 거야, 즐거운 거야?”

“무엇이 더 좋으냐?”

“나야 야크샤가 즐거운 게 더 좋긴 한데~”

“하하, 그럼 즐거운 것으로 하자꾸나.”

“그게 정하는 대로 정해지는 거였어?”

“네가 바라는 것이라면 아니라도 그리 해야지. 물론 나도 즐거운 마음이 더 컸다만.”

“뭐야, 난처한 것도 있었단 거네.”

“너무 귀여워서 난처했지.”

“…아니,”

슈리는 뭐라 말을 이으려는 듯 음절을 이루지 못한 소리를 내다가 얼굴을 감쌌다. 이런 말을 대체 어떻게 이리 바로 하는건지, 바로 옆의 야크샤가 부드럽게 미소짓고 있을 것이 선해서 더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얼굴을 가린 손가락 사이로 야크샤의 웃는 낯을 확인한 슈리는 얼굴을 찡그리고 야크샤의 얼굴을 확 잡았다. 입술 가까이에 부드럽고 따스한 것이 붙었다 멀어졌다. 야크샤의 푸른 눈이 크기를 키운 것을 본 슈리는 입술을 꾹 맞붙이다가 아슬아슬하게 입을 열었다.

“…복수야.”

“…이런 복수는, 언제나 환영이긴 하다만… 무엇의?”

“말문 막히게 했잖아.”

“아하… 그런 게 복수의 명분이 된다는 게로구나.”

“그렇…??!”

야크샤는 슈리의 등을 받치고 있던 팔에 힘을 주어 슈리의 얼굴이 더 가까워지도록 당겼다. 머리 뒤쪽에 손을 올려 받치는 자세를 한순간에 바꾸고는, 앞머리로 가려진 이마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1초, 2초, 3초. 아주 잠시 한 슈리와는 달리 비교적 긴 시간이 흐르고, 야크샤의 옷자락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슈리가 기어코 야크샤를 밀어냈다. 아고, 짤막한 반응을 보인 야크샤의 얼굴엔 장난스러운 웃음이 번졌고, 슈리의 얼굴엔 붉은 기색이 어렸다.

“언제까지 하는거야?!?”

“나도 복수니 말이다. 아까 넌 너무 일찍 뗐지?”

“아니, 아니…! 일찍이래! 아니, 뭐에 대한 복순데?”

“너무 아름다워서 내 마음을 계속 들뜨게 한 것?”

“너 진짜!”

“왜, 사실만 말한 것이다.”

“…!~~~”

다시 한 번 말문이 막힌 슈리는 입술을 꾹 눌러 닫았다. 오글거리는 말을 늘어놓았으면서 뻔뻔스럽게 웃으며 저를 보는 야크샤에게 가벼운 원망이 들 정도로 얼굴이 뜨거웠다. …제일 담백하고 설레는 건 내가 할 거거든,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면서도 야크샤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던 슈리가 눈을 꼭 감았다.

“…좋아해.”

“…”

“…진짜, 이런 남자를 사랑하는 내 잘못이지 그냥…”

깜빡, 깜빡. 슈리의 기준에서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고, 슈리는 야크샤가 아무 말도 없다는 것에 대해 의아함을 품으며 살며시 눈을 떴다. 야크샤의 입장에선 기습적이고 가장 투명한 애정 표현에 멍해져서 눈 몇 번 깜빡였을 뿐이지만 그건 슈리는 모르는 것이고, 슈리는 완전히 멈춰있는 야크샤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슈리의 눈을 본 야크샤는 그제서야 가볍고 맑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하, 하하! 그렇게 갑작스레 말하는 것이 어디에 있더냐. 순간 아예 멈춰버렸어.”

“그걸 노린 건데?”

“그럼 네 기대에 부응한 셈이니 잘 한 것이로구나. 나도 좋아해, 정말 사랑한다.”

“…후후, 나도.”

야크샤의 애정어린 웃음을 들은 슈리는 잠시 생각하다가 안정을 되찾은 얼굴로 웃었다. 자연스럽게 다시 야크샤의 목에 팔을 둘러서 몸을 가까이 하고, 하얀 볼에 입술을 콕 찍었다가 야크샤의 눈을 다시 보고 생긋 웃고. 야크샤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겹치고. 빈 손이 없어서 먼저 하지는 못하지만, 야크샤는 즐겁게 웃으며 슈리가 하려는 것에 제 얼굴을 맞춰 주었다. 아, 그러고보니. 한창 애정을 퍼붓다가 문득 떠오른 것을 슈리는 곧바로 물었다.

“처음엔 꽃보자고 한 거 아니었나?”

“꽃 위에 있으니 된 것 아니냐?”

“아, 그건 그렇네.”

“그렇지?”

응. 밝게 웃으며 대답한 슈리는 야크샤의 목을 감아 안았다. 눈을 감고 숨을 들이마시니 따사로운 햇빛과 맑은 물의 향이 느껴졌다. 슬슬 쉴까? 낮은 목소리가 작게 속삭이는 소리가 머리 뒤에서 들려오자, 슈리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평화로운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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