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슬픔의 비 (22.04.22 재업)
슬픔에 빠진 왕을 깨운 방법은| 야크슈리+기타 몇몇 수라. 슈리 성격이 살짝 불여우 느낌
“언제까지 영감을 이 상태로 내버려둘거야!!”
검붉은 수라도의 어딘가. 어딘가 가라앉은 듯 목소리의 고조와는 별개로 무표정한 얼굴의 나스티카가 외쳤다. 하누만 쟤는 감정 동조화가 잘 먹히지 않나 봐, 3인자라서 그런가? 하지만 슈리도 표정 안 좋잖아. 그럼 단순해선가?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것을 무시하며, 방금 소리지른 수라― 하누만은 기분이 별로인 것을 숨기지도 않고 가만히 서있던 여인에게 다가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신조차 홀리는 미모는 동족인 그에게 있어 더욱 매력적이게 느껴지는 것이 평상시의 일이었지만, 지금같은 상태에선 그딴 건 어찌되든 좋았다. 여인은 덤덤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제게 다가온 하누만을 바라보았다.
“야… 벌써 몇 년 째냐고. 진짜 영감 이대로 냅둘거야? 이러다 확 자폭해버리면 어떡해.”
“…야크샤가 자폭할 리가 없잖아, 동족을 두고.”
“평소에 인간 죽이지 말라고, 어떤 감정을 느끼든 간에 인간 사랑하는 마음만 동조화시키는 미친 짓을 지속하면서도 감정 잘 다스리던 수라가 이렇게 큰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있는데. 평소의 모습이 잘도 답을 내리겠다.”
“……”
“…야, 슈리!”
“…하누만, 좀 닥쳐봐.”
여인, 슈리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하누만은 슈리의 눈이 붉게 물드는 것이 특수한 상황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힘으로는 슈리를 이기지 못하는 하누만은 순순히 입을 다물었다. 아니, 슈리 역시 답답하겠지. 종족의 3인자인 하누만 자신에게까지 깊은 영향을 미치는 동조화가 2인자인 여우에겐 영향을 미치지 못하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물론 그런 것까지 신경쓸 정도로 주변을 세심하게 챙기는 하누만은 아니었기에 그런 건 생각으로 그쳤고, 슈리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슈리 역시 그런 하누만의 성격은 알고 있었다.
“…아난타에게 찾아달라고 해뒀어.”
“뭐? …아, 그 녀석 영감이랑 친했으니까. 요새 막 영감 찾아 돌아다닌다는 게 네 부탁 때문이었구만.”
“그래…”
사색이 되어선, 곧장 사라지던 뱀의 왕을 떠올린 슈리는 고운 입술을 짖씹었다. 인간의 멸망은 거의 다 끝났다 하였다. 왕의 부탁을 무시하며 말살에 참여했던 동족의 나스티카들이 왕의 슬픔에 어색하게 돌아온 지 상당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끝나지 않던 일이 이제야 끝나가는데, 왕의 슬픔은 영 끝나지를 않았다. …야크샤, 슈리는 느릿하게 왕의 이름을 불렀다. 이런 상황에서, 마지막으로 만났던 때가 떠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 * * *
뭔가 확 밝아진 밤하늘이 멸망의 시작이었다. 슈리는 꼬리를 숨기고 함께 지내던 인간들을 다독여 집으로 돌려보내고 있었는데, 언제 왔는지 모를 왕이 어느 순간부터 곁에 있었다. 【왜 온 거야】, 수라의 언어로 계속하여 물었지만, 왕은 못 들은 척 슈리와 함께 인간들을 돌려보냈다. 평소 줄곧 어린 아이의 모습을 취하고 다니던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왕은 슈리보다도 훨씬 큰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인간들을 다 돌려보내고 나서야, 왕은 기나긴 침묵 끝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돌아가자꾸나, 슈리야.”
“…뭐?”
“하누만과 페투판… 그리고 몇명은 수라도로 보내두었다. 이제 너만 돌아가면 돼.”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저 하늘은 대체 뭐고, 네가 왜 여길 벗어나자고…!”
“…슈리야, 제발.”
너마저 잃고 싶지는 않구나, 왕은 힘없는 목소리로 들릴락말락 작게 말했다. 물론 야크샤 족인 슈리는 놓치지 않고 들었지만, 이해할 수 없는 말은 듣지 못한 것이나 다름이 없는 법. 알아듣게 설명해. 불만 가득한 얼굴에, 왕은 무겁게 침묵하다가 힘겨운 낯빛을 띄며 입을 열었다.
“…인간들의 멸망이 시작되었다.”
“…!!”
“…이 이상, 공격에 참여하지 않는데 이곳에 남아있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 없어. 모든 신과 수라가 함께 시행하는 시초신의 의지다. …제발, 슈리야. 돌아가자꾸나.”
“…시초신을 공경하라 말한 건 너였는데.”
“……”
“그 누구보다도 먼저 인간들을 아끼던 건 너였는데, 네가 그러면―”
…아, 슈리는 흐리게 가라앉은 왕의 푸른 눈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이런저런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도 많았고, 떨어져있던 적도 많았으나 긴 세월을 함께 해 온 사이였다. 당연히 마음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슈리는, 왕의 가라앉은 얼굴 아래 짙게 깔린 수심을 알아보고 나서도 왕을 탓할 수는 없었다. 슈리가 조용해지고, 왕은 느리게 초월기를 사용하며 슈리의 손을 잡았다. 한순간 시야를 가린 물이 걷히자, 붉은 하늘의 수라도가 시야를 가득 메꿨다. …진짜, 이젠 살릴 수 없구나. 슈리는 일말의 미련을 돌아보았다. 같은 미련을 보는지, 왕 역시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다.
“…이제 어쩔거야?”
“……최대한, 다른 녀석들이 죄를 짓지 않을 감정을 그려 봐야겠지. 시초신의 의지라 한들, 생명을 죽이는 것이 죄를 쌓는 행위라는 것은 변하지 않으니 말이다…”
“괜찮겠어?”
“…무엇이 말이냐?”
“그야, 너…”
“…걱정 말거라.”
난, 너희의 왕이니.
수심 깊은 얼굴을 풀지도 못했으면서, 누가 보아도 억지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하는 말이 그 모양이라니. 슈리는 왕을 걱정스레 바라보았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왕의 슬픔을 읽어냈다지만, 아끼던 이들을 포기할 것을 추천한 왕에겐 적잖이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수라도에 와서 슈리가 본 왕의 마지막 모습일 줄 알았다면, 안 그랬을 테지만.
* * * * *
슈리는 어느 순간부터 느껴지는 비린 향에 얼굴을 굳혔다. …하누만, 다른 애들 데리고 어디 가 있어. 비장하게 굳은 얼굴에서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하누만은 경계하며 주변을 둘러보다가 모여있던 다른 동족들을 데리고 자리를 비웠다. 동족들의 냄새도 나지 않을 만큼 떨어지고 난 후에야, 슈리는 짤막한 심호흡을 하곤 어색하게 등 뒤의 존재를 불러냈다.
“아난타.”
“…응.”
우주 최강의 이름을 지닌 존재가, 느릿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평소 온화하게 웃고 다니던 모습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무뚝뚝한 얼굴. 그는 본디 다정한 성품이지만, 상당히 예민해져 있는 지금 건드려서 득될 것은 없었기에 슈리는 행동과 말 하나하나를 신중하게 골랐다. 어떤 상황이든 자유롭게 그를 대해도 용서받는 것은 슈리의 왕이었지, 슈리가 아니었다.
“…별로 만나고 싶어하진 않을 것 같아서, 보냈어.”
“응, 신경써줘서 고마워.”
“그럼…. …야크샤는, 찾았어?”
“…응, 찾았어.”
대화는, 못했지만. 아난타가 힘없이 덧붙인 말에 슈리는 눈을 크게 떴다. 슈리는 물론이거니와, 많은 수라들이 아난타와 왕의 친분을 알고 있었다. 슈리의, 짐승들의 왕이 친우를 만나서 대화 없이 돌려보낼 인물이 아니라는 것은 아예 모든 이가 알고 있다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유명했다. …야크샤가, 널 그냥 돌려보냈다고? 떨리는 목소리는 누가 들어도 불신의 감정을 드러냈다. 잠시 의아하게 슈리를 바라본 아난타는, 이내 슈리가 짚은 가설을 눈치채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야, 그건… 아닌데. …대화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더라고.”
“…무슨 상태인데?”
“…음, 뭐라고 말하기 좀 까다로운데.”
직접 가보는 게 좋을 거야, 라고 말하며 아난타가 알려준 장소는 무법지대인 수라도의 유일한 꽃밭이었다. 슈리는 초월기를 사용하며 몇 번 발걸음을 옮겨 한순간에 꽃밭에 도착했다. 꽃밭 한가운데에, 익숙한 기운의 얼음동굴이 자리하고 있었다. …야크샤, 얼음의 정체를 곧바로 알아차린 슈리는 흔들리는 눈으로 얼음을 바라보며 왕의 이름을 불렀다. 수라도에서 오랜시간 초월기를 사용한다는 것은, 약해짐을 감수하는 것인데. 물론 동족들에게 피해입히는 것을 꺼려하는 왕이니만큼 무슨 수를 썼겠지만, 슈리의 속에서 무겁게 내리고 있는 빗물을 고려하면 과연 그랬을까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했다.
“…야크샤, 들어갈게.”
얼음에 손을 올리고 말을 걸자 얼음은 환히 열려 슈리를 환영했다. …이렇게 환영할 거면 왜 혼자 잠적한 거야. 아난타가 아니면 찾지도 못하게 감춰놓고선…. 불만 가득한 생각을 늘어놓다가, 무엇인가를 깨달은 슈리는 불만을 멈췄다. 빗줄기가 약해졌다―. …대체 무슨 생각인지. 이해가 가기도, 가지 않기도 하는 마음을 짐작하는 것은 포기하며, 슈리는 걸음을 옮겼다. 겉으로 보이던 것과는 달리, 얼음 안은 넓고 깊었고― 뒤를 돌아보자 들어온 통로가 지워지다가 다시 나타났다. 돌아갈 거라면 돌려보내주겠다는 건가? …악취미야. 미세하게 미간을 찌푸리곤, 슈리는 중앙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가까워지는 느낌이 확실히 있었다.
중앙에 다다른 듯 통로가 넓어진 시점에서, 슈리는 마음을 먹먹히 하며 강한 통제력을 과시하는 왕의 슬픔이 어느정도 잦아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고보면 일전에도 잠시 슬픔이 멎었던 적이 있는데, 아난타가 찾아왔을 때인가. 지금으로썬 진위여부를 알 수 없는 사실을 가정하며, 슈리는 짧은 심호흡을 하곤 넓은 공간에 들어갔다.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것은 얼음 속에 곤히 잠들어있는 왕의 모습, 정체를 알 수 없는 물건 하나. 아, 이래서. 아난타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까닭을 깨달은 슈리는 소매 아래에 숨긴 손을 힘을 주어 잡았다. 미약한 의지는 있는데, 다른 부분은 완전히 정지해 있다. 이걸 대화가 되는 상태라고 봐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말은 걸어볼까. 슈리는 느리게 한숨을 내쉬었다.
“…안녕, 야크샤. 오랜만이야.”
“…”
“아난타에게 널 찾아달라고 했었어…. 그 도중에 그에게서 꽤 많은 얘기를 듣기도 했지. 네 상태를 알고 있었으니, 아마 여기까지 들어왔을 것 같은데. 만났어?”
그렇다고 대답하듯, 얼음 벽 안이 잠시 밝아졌다. 목소리로 대답해주지, 그런 것까지 기대하면 안되나. 자신의 감정에 매몰된 이기적인 왕을 비뚜름하게 노려보다가, 슈리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아난타야 몰랐겠지만 '야크샤'라면 알아볼 수 있는 것들이 수많이 있었다. 분명히 뛰고 있는 심장의 박동이라던가, 감정에 따라 미묘하게 바뀌는 체향이라던가. …지금도 감정을 장악한 이 동조화라던가. …만났지. 많이 기분이 안 좋은 모양이던데, 걱정이더구나. 아마 하고싶은 말은 이런 것일 터이다.
“멸절이 끝난 모양이야. 다른 종족 수라들도 하나둘 들어오고 있더라고. 우리 쪽 녀석들은 다 돌아와 있었어서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꽤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까. 우리 기준으로도.”
“……”
“…알고 있어? 우리쪽 애들, 참여한 애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다들 일찍 돌아왔어. 네가 너무 슬퍼한대. 나까지…, …그러니까, 나스티카도 영향받을 정도면, 라크샤사 이하의 애들은 진짜 슬퍼서 미치거나 죽어버렸을거야. 한동안은 우리 쪽 세가 좀 약해지겠지. 뭐, 다른 우주에서 서로 치고박다가 뒤져버렸을 녀석들보다야 나으려나…. …저 흉포하고 사나운 것들이 전투 의지까지 꺾고 돌아오게 하다니. 얼마나 슬픈건데, 너.”
“…”
“…됐어, 대답을 기대한 게 아니니까. 그렇게 흐릿하게 의사 표현할 거면 그냥 일어나던가…. 나야 지금 느껴지니까, 네가 왜 그리 슬퍼하는지는 알지만. …이곳에서, 그렇게 계속 초월기를 사용하고 있는데… 안 약해지는 거지? 난 네가 나보다 약해지는 건 싫어.”
“……”
“이건 또 대답 안 하네. 말로 안 할 거면 대답은 똑바로 해주지 않을래? 아무리 내가 널 좋아한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알아차리는 데엔 한계가 있, ……!”
깜빡, 깜빡. 빛으로, 향으로, 맥박으로 나타나던 왕의 반응이 멎었다. 슈리 역시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소매로 확 가려버리며 대화를 중단했다. 아니야, 아니라고. 말실수라니까?! 슈리는 침묵을 깨고 빽하고 소리질렀지만, 이미 내뱉은 말은 주워담을 수 없는 법이다. 여전히 반응이 멎어있는 얼음을, 가만히 잠들어있는 왕의 본체를 원망스런 눈으로 바라보다가, 슈리는 몸을 홱 돌려버렸다. 갈거야. 대답없이 굳어버린 와중에도 일말의 정신은 있는지, 밖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열렸지만 슈리는 그걸 지적할 만한 정신이 아니었다. 슈리는 화끈하게 달아오른 얼굴을 넓은 소매로 가리며 다급하게 통로를 빠져나왔다. 이제까지 계속해서 마음 속에 내리던 슬픔의 빗물조차도 영향을 미칠 수 없을 만큼, 슈리의 감정은 격정적이었다. 물론 비가 잠시 그쳐있기는 했지만.
바깥에 다다라서야 마음 속 비가 그친 것을 확인한 슈리는 멍하니 자신이 걸어나온 얼음 안을 바라보았다. …아, 기분이 나아졌구나. 물론 나아지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상황이긴 했지만, 비록 그 의도로 온 것은 아니지만. 슈리는 만족스럽게 미소짓고는 다시 돌아섰다. 조만간, 아니, 방금의 실언이 잊혀질 때 즈음에 다시 와야겠다고 결심하며 자리를 피하려던 슈리는 발걸음을 멈췄다. 멈출 생각이었던 것은 아닌데, 멈출 수밖에 없었다. 입구 앞에서 복잡한 얼굴로 서있던 인물이 슈리를 보곤 반쯤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너.”
슈리에게 이곳을 알려준 이도 아니고, 슈리를 따라올 만한 이도 아니고, 도리어 왕을 이 상태로 만든 원흉 중 하나나 다름없는 인물. 올 이유가 없는 자,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이. 뜬금없이 나타난 연분홍빛이 은은하게 감도는 긴 머리카락을 바라보는 슈리의 분홍빛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뜬금없이 왜 나타난 거지, 인간계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말살에 참여하고 있던 자가 아닌가. 자기가 뭐라고, 이곳에 나타나. 슈리는 진실을 알고 있었다. 상대 역시 그 사실을 알아차린 듯, 무심하던 얼굴에 한줄기 금이 갔다. 다시금 마음 속에 척척한 빗줄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너, 뭐야.”
“…”
“네가 뭔데, 여기에 나타나?”
“…이 근처는 킨나라 족의 영역이다. 야크샤의 기척이 느껴지기에 와본 것 뿐이야.”
“헛소리 집어치워. 나조차도 느끼지 못한 야크샤의 기척을 네가 느꼈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 킨나라.”
아니, 아이라바타라고 불러주는 걸 바라나? 슈리는 냉소적인 얼굴로 상대를 노려보았다. 킨나라도, 아이라바타도 아니게 되었으니― 이전의 이름으로 불러야 하려나. 킨나라의 이름을 지녔던 발굽 있는 것들의 왕은 불편한 듯 슈리의 시선을 피했다. 진실을 아는 자가 불편한 것은 당연하나,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는 듯이. 차가워진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도, 여인은 시선을 내리깔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나, 슈리…. 이미 기억 개변은 일어났을 텐데.”
“글쎄, 어째서일까? 개변은 확실히 일어나긴 했는데… 뭐, 방법을 알려준다 해도 네가 믿을 것 같지는 않고. 야크샤 바로 앞에서 이렇게 대화하는 것도 참… 기분 잡치는 일이고. 내 질문에나 먼저 답해, 그리고 그냥 꺼져.”
“너, 나도 왕이라는 걸 잊은 모양인데.”
“너야말로, 내가 야크샤라는 걸 잊은 모양이야. 우리 야크샤의 노력을 생각해서 가만히 있으려니, 난 야크샤로 보이지 않는 모양이지? …네가 무슨 이름을 택할지는 궁금하긴 한데…, 그렇게 오락가락하는 상태로 뭘 어쩌겠다는 건지. 왕으로 대접받고 싶다면 왕의 이름부터 제대로 취하지 그래?”
그보다, 어서 대답하라니까. 슈리는 고압적으로 여인을 내려다 보았다. 여인 역시 큰 편이라고는 하지만, 여성형 나스티카 중에서는 손에 꼽힐 만큼 체격이 큰 슈리에게는 닿지 못했다. 날카로운 독설에 맞대응하듯, 팔짱을 낀 여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붉게 변한 슈리의 눈을 마주해서 노려보다가, 여인은 두어 번 숨을 들이마쉬고는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내게, 왜 그리 적대적인지 모르는 건 아니다만… 난 그냥 야크샤를 보러 왔을 뿐이야. 우리랑 적대해봤자 너희에게 가치는 없을 텐데, 이쯤에서 그만두지 않겠나.”
“…알고 있으면 말이 빠를텐데? 야크샤 앞에 있지 말고 꺼져. 네게 야크샤랑 마주할 권리가 있을 것 같아?
“…….”
“너 때문에 더 심각한 거나 마찬가지인데…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찾아온 건지.”
“…듣자듣자하니, 말이 심하지 않나.”
“내가 뭘, 이렇게 찾아온 네가 더 열받는데.”
여인은 매섭게 인상을 쓰고는 초월 수치를 올리기 시작했다. 나참…, 내 왕 앞에서 나랑 싸울 생각인가. 비뚜름하게 미간을 찌푸린 슈리 역시 싸울 준비를 취하듯 움직였다. 적당히 하고, 야크샤의 상태나 알려주지 그러냐. 하겠어? 못 본 새에 바보가 되기라도 한 거야? 한 차례 더 이어진 설전이 끝나자마자, 초월기를 통한 공격이 슈리가 있던 곳에 내리꽂혔다. 아차…, 조금 늦었네. 이정도는 맞아도 상관없는데, 튕겨낼까. 여유롭게 생각을 잇는 슈리의 시야가 한 그림자에 가려졌다.
“그만… 위력이 과하다.”
“!”
“…!”
“…내 얼굴을 보아, 적당히 싸워주면 안되겠느냐.”
푸른 코트, 새하얀 머리카락. 킨나라였던 자의 초월기를 여유롭게―보이기에만 그런 걸지도 모르겠으나― 맨손으로 막아버린 남자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주변을 감싸고 있던 얼음 덩어리들은 빛이 되어 사라지고, 얼음 안에 잠들어있던 남자만이 이 자리에 존재했다. …야크샤, 슈리는 힘없는 목소리로 남자의 이름을, 왕의 이름을 불렀다. 아까까지만 해도 감겨진 눈꺼풀 속에 숨어 보이지 않던 깊고 푸른 벽안이, 유려하게 슈리를 안에 담았다. …슈리야, 중후한 저음이 간지럽게 슈리의 이름을 불렀다.
“…야크,”
“미안하구나.”
“!”
“…미안해, 내가 겁이 많아 숨어 있었다.”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고, 됐어.”
“고맙다, 앞으로는 이런 일 없을 게야. …아이라바타, 이쯤 하고 물러가 주지 않겠어? 내 상태를 염려해준 것은 고맙지만, 너희가 싸우는 것은 보고 싶지 않구나.”
아이라바타. 왕이 부른 이름에, 여인은 입술을 꾹 물었다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며 사라졌다. 저가 욕심을 내서 취한 이름이거늘. 본래 그 이름의 주인의 성향…은 기억나지는 않지만, 조금만 기다렸으면 되었을 것을 못 기다리고 일을 일으킨 주제에, 그쪽으로 불렸다고 저런 반응이라니. 딱히 저 마음이 이해되지도 않고, 이해할 생각도 없는 슈리는 여인이 사라진 곳을 노려보다가 시선을 떼어 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살짝 수척해진 것 말고는 변화가 없나, 딱히 약해지진 않은 듯 했다.
“…슈리야?”
“몸은, 좀 괜찮아? 비는 멎었지만 아직 물기가 남아있는데, 어때?”
“아…. …미안하구나, 이제 정말 괜찮아. 잘 조절할 자신이 있어서 깨어났으니, 걱정 말아도 된다. 심려끼쳐서 정말 미안해.”
“…어쩐지 깨운 느낌인걸.”
“아니야. 네가 조금이라도 다치는 게 싫어 내 멋대로 일어난 게다. 그리 생각하지 마렴.”
“알았어… 뭐, 일어났으니까. …그걸로 됐어. 돌아가자, 야크샤.”
“그래.”
돌아갈 때는 여유롭게 땅을 걸었다. 본디 나무나 풀 따위는 극소수의 장소에서만 자라는 것이지만, 킨나라의 영역답게 꽤 여러가지의 생명이 싹틔운 상황이었다. 왕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풍경 하나는 괜찮다니까. 왕과 함께 걷는 수라도는 오랜만인데…. 여유롭게 딴생각에 빠진 슈리를,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왕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슈리야.”
“응, 왜?”
“…그―, …아까 했던 말이다만.”
“아까 했던 말? ……아,”
슈리의 얼굴이 미묘하게 찌그러졌다. 아니, 그런 식으로 말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정정할까, 언제 한 번 다음 기회를 잡을까. 좋아, 그러자. 슈리는 큰 마음먹고 왕을 바라보았으나, 하려던 말을 그만두었다. 한동안 보지 못했던 얼굴이 보였다. 언제나 먹먹히 내리던 비가 멎었다.
“…진심이냐?”
“……”
살짝 붉게 달아오른 볼은,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모든 동족의 마음에 비를 쏟아내리던 이의 얼굴이 맞는가 싶었지만― 말만 저리 하지, 조금 덜어진 정도의 마음 속을 고려하면, 저게 그만큼 그에게 있어서 가치있는 질문이라는 것일 터였다.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겠지. 슈리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왕은 슈리의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빙그레 호선을 그리는 눈썹이 부드러웠다.
“고맙다, 미안하고.”
“…뭘.”
“앞으로, 더 잘 부탁하마.”
“…그러던가…”
퉁명스레 대답했지만, 왕은 앞서 나아가는 슈리의 볼을 보곤 피식 웃었다. 왕과 거의 같을 정도로 붉게 물든 뺨이 참, 아름다웠다.
“사랑한다.”
“…나도.”
- 카테고리
-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