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대면진료
2022
표도르는 나쁘지 않은 동거인이지만 가끔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소리를 지를 때가 있었다. 물건을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던지거나 부수다가 부술 게 없어지면 대뜸 벽에 자기 머리를 박았다. 그는 본성이라느니 악질이라느니 온갖 공격적인 단어로 그것을 설명하려고 했지만 그건 단순한 발작에 불과했다. 아주 가벼운 전조증상조차 실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 표도르가 약간의 문제를 갖고 있다는 사실은 일찍이 알고 있었다. 애초에 같이 살지 않겠냐고 제안한 것도 치연의 쪽이었다. 당시에는 그게 그 자체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표도르는 종종 화를 내던 도중 심하게 헐떡였고 무엇으로라도 입을 막아주지 않으면 먹은 걸 다 토하기도 했다. 그마저도 먹은 게 있을 때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사람이 아프다는 이유만으로 비난해선 안 된다는 게 양치연의 지론이었다.
그가 좀 꼬인 심성을 갖고 있을 뿐 지극히 정상이라고 생각하던 시절도 있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면서 생글거리던 얼굴, 그 얼굴과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그 나름대로 그어놓는 선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오랜만에 만난 표도르의 얼굴이 꼭 그 때랑 다르지 않았다. 그가 발작을 일으킬 때마다 처참히 박살난 거실을 치우고 그를 끌어다 침대에 던져놓은 게 누군데, 표도르는 양치연한테 생판 처음 본다는 시늉을 했다. 웬만하면 별 소리 안 하는 양치연도 그 얼굴을 보고는 화를 안 낼 수가 없었다. 이건 병보다도 더 근본적인 문제였는데, 그게 뭐냐면, 씨발, 성격이 대체 왜 그래요? 언성을 높이자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끔거리는 게 느껴졌다. 그 앞에서 표도르는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뭐가요? 제가 뭐 잘못했나요? 며칠 전 오랜만에 그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양치연이 처음으로 번호를 알려줬을 때 표도르는 그것을 핸드폰에 저장하는 대신 외우고 있다가 매번 다른 번호로 전화를 걸고는 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누구세요라니.
분명 그 때도 전화를 붙잡고 물어봤다. 표도르 씨는 내가 등신으로 보여요? 글쎄요, 그렇게 대답하는 표도르의 목소리가 얼마나 담담한지 양치연은 그만 화를 낼 힘조차 빠져버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양치연도 나름 그를 대하는 요령이 생겼다는 것이다. 비록 당황하면 그 요령을 잊어버리기도 하고, 그 탓에 몇 달 전에는 천표도르가 집을 나가버리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전화를 받고 양치연을 만나러 왔다. 그리고 익숙한 현관에 다시 들어서자마자 표도르는 성질을 살살 긁던 태도를 버리고 냉장고부터 열어젖혔다. 그 쯤에는 다른 의미로 뒷골이 당겨오기 시작했다.
"에이, 이거 다 버리게 생겼네. 두부조림 갔고, 오징어 가기 직전이고, 이건 뭐… 락앤락이네요? 어머니가 올려다 주셨나보네. 치연 씨는 어머니한테 죄송하지도 않으세요?"
그가 팔을 대충 움직일 때마다 거슬리는 소리와 함께 재질이 다른 반찬통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불편한 마음으로 팔짱을 낀 채 뒤에 서 있던 양치연은 거칠게 뒷머리를 털었다.
"아 씨… 되게 뭐라 그러네. 그거 좀 더 둬도 돼요. 냉장고에 넣어뒀는데 왜요."
"그럼 음식이 완전 멀쩡하다가 하나 둘 셋 땡 하면 상해요? 제 때 드셔야지. 집밥 안 드세요?"
원래 안 먹는 편인데. 그렇게 말하려던 양치연은 도로 입을 다물었다. 분명 반찬을 썩힐 필요도 없이 집에서 갓 차려낸 밥상을 받던 기간이 있었다. 천표도르가 없던 요 몇 달은 그러지 못했고. 돌아오는 답이 없자 고개를 돌려 비스듬히 올려다보던 표도르의 입꼬리가 묘하게 뒤틀렸다. 대충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듣기 싫은 소리를 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눈도 깜빡이지 않고 빤히 바라보던 표도르는 곧 담백하게 내뱉었다.
"해주실 때 잘 하세요, 나중에 후회하지 마시고."
그리고 몸을 숙인 그가 냉장고 정리에 다시금 몰두했다. 멋쩍은 마음에 괜히 입맛을 다시던 양치연은 문득 천표도르의 뒷모습에 시선을 뺏겼다. 별 짐도 없이 빈손으로 돌아온 그는 입을 옷이 없어 양치연의 옷을 주워 입어야 했다. 표도르의 옷이 거의 대부분 목을 가리는 데에 비해 치연의 티셔츠는 목이 늘어난 것도 여럿 있었다. 그가 허리를 깊게 숙인 채 팔을 뻗어 뒤적거릴 때마다 체격에 맞지 않는 옷깃은 들썩거렸고, 그러다 머리카락이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순간에 드러난 시뻘건 딱지는 도무지 무시할 수 없는 크기였다.
오랫동안 열어둔 냉장고 문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표도르가 몸을 일으키며 냉장고 문을 성의 없이 닫았다. 양치연은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그의 걸음은 자연스럽게 서랍으로 향했다. 그가 음식물 쓰레기 봉투를 꺼내 상한 반찬들을 하나하나 쏟아붓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야 그런 상처가 나지?'
사실 목을 둥글게 두르고 있는 그 상처의 정체가 정말로 궁금한 건 아니었다. 치연의 마음속에서 어떤 결론이라도 났다가는 표도르가 눈치 빠르게 알아차리고 다시 도망쳐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원래 오래 생각해서 좋을 것 없는 것들은 대체로 그 잔상이 지나치게 길게 남는다. 양치연은 손끝으로 전기포트를 두드리며 자신이 보았던 것을 곱씹다, 이내 고개를 저어 떨쳐냈다. 한 차례 길게 숨을 내쉰 그가 목소리를 높였다.
"표도르 씨, 보리차 만들어 놓고 싶은데. 어떻게 해요?"
침실에서부터 가느다란 대답이 돌아왔다.
"아, 그거… 그냥 포트에다 티백 넣고 끓이세요. 원래 그러면 안 되는데 한두 번 정도는 상관 없어요."
대수롭지 않게 티백을 던져넣고 포트 안에 물을 채우고 있으면 머지 않아 등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곁으로 다가온 표도르는 목에 스카프를 두르고 있었다. 그 정도는 집을 나가기 전에도 종종 있었던 일이라 양치연은 크게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졸졸 흘러나오는 물이 은색 포트의 내부를 채워가는 동안 치연의 어깨 너머로 기웃거리던 표도르가 불쑥 물었다.
"왜요 갑자기? 안 드시잖아요."
"아, 그냥 먹고 싶어서… 더위에 좋다는데요."
"더위 많이 타시나봐요."
"표도르 씨가 유난히 강한 거죠. 안 더워요?"
표도르는 어깨를 으쓱이곤 의수와 팔이 연결된 부분을 툭툭 쳤다.
"여기만."
양치연은 멀뚱히 눈을 깜빡이다 고개를 돌렸다. 의수를 벗은 그의 팔을 자주 봤다. 여름이 되면 그 이음새가 보기 안 좋게 부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치연이 처음으로 그 자국을 봤을 때 표도르는 눈을 크게 뜨고 보기 흉하냐며 이유 없이 빈정거렸는데, 어느 날 그가 연고를 하나 던져준 이후로는 별 말을 하지 않았다. 거기다 가끔은 이런 식으로 먼저 이야기를 꺼낼 때도 있었다. 그 연고는 다 썼을까, 양치연은 잠시 생각하다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게요, 더우시겠네."
포트를 제자리에 돌려놓고 스위치를 누르자 금세 요란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궁금증을 해결했으니 다시 들어가리라고 생각했던 표도르는 아직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멀뚱히 서 있는 그의 옆모습을 흘끗 바라보면 그는 부엌 벽에 붙어있는 작은 쪽창을 바라보고 있었다.
늦은 오후였다. 표도르를 따라 시선을 옮긴 바깥은 온통 샛노란 색으로 물이 들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부셨다. 양치연은 하나 남은 눈을 살며시 찌푸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본 표도르가 킥킥거리다 걸음을 물렸다.
"이 시간에는 밥 먹고 설거지나 하고 있어야 하는데. 근데 누가 반찬을 다 썩혀놔서."
"시켜 먹으면 설거지도 안 하고 좋잖아요."
"배달음식 너무 많이 먹지 마세요, 치연 씨. 살 쪄요."
밥 해주는 것 가지고 그렇게 유난을 떨면서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는구나. 양치연은 포트에서 뿜어져나오는 수증기로부터 눈을 돌려 뒤통수를 흘겨보았다.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는 그 뒷모습은 시늉이 아니라 정말로 기분이 좋아 보여, 말로 설명하기 힘든 이상한 안도감이 들었다. 다행이라든가 기쁘다든가 썩 긍정적인 감정은 아니었다. 마른 몸이 좌우로 허위허위 흔들리는 것 같았다.
*
그날 밤 양치연은 감은 눈을 도로 뜨지 않기 위해 애쓰며 표도르가 이불 속에서 애처럼 엉엉 울던 날을 떠올렸다. 그건 표도르가 집을 나가게 된 결정적 계기나 다름 없었기 때문에 그가 돌아온 지금 그 일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건 어려운 일이다. 평소와는 다른 패턴에 양치연은 어김없이 당황했고 둥글게 말린 이불을 어떻게든 젖혀보려고 했다. 그를 어르고 달래 겨우 꺼내놓았을 때도 꼭 이렇게 어두웠는데. 표도르가 발작의 전조를 보인 날이면 양치연은 그를 꼭 침대 위에서 재웠다. 표도르야 눈을 감았다 뜨면 방금 전에 있었던 일도 잊어버릴 수 있는 뻔뻔한 위인이라지만 양치연은 자신과 같은 방을 쓰는 병자를 도무지 모르는 척할 수가 없었다. 설령 방금 전까지 목에 핏대를 세우고 자신에게 욕을 퍼부었다 해도.
그리고 그 날 표도르는 한밤중 내려와 양치연의 안대를 들춰보았다. 그 단순한 행동이 꼭 빈 눈구멍에서 무엇이라도 찾아내려는 것 같아 양치연은 한동안 꺼림칙함을 떨쳐내지 못했다. 호의를 음심으로 돌려받은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처음으로 표도르의 정신이 비틀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표도르는 매도당하기를 기대하는 사람처럼 남에게 매달리고 속을 긁는 주제에 이상하게도 그런 부분만은 견디지 못했다.
"표도르 씨, 자요?"
"아뇨."
꼭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답이 돌아왔다. 좀처럼 잠들지 못하는 치연과 달리 그는 막 잠에 들려던 참이었는지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저기 머리맡에 보온병이요. 보리차 넣어놨거든요."
"아… 네."
치연은 준비한 말을 내뱉기 전 침을 한 번 삼켰다.
"서랍에 약 있는데, 팔 아프면 물이랑 같이 먹어요."
그 순간에는 시간이 그대로 멈춰버린 것 같았다. 심장 소리는 컸고 표도르는 대답이 없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가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니 긴장할 수밖에 없다. 표도르가 여태껏 만나온 사람들 중에는 그에게 자신만큼 친절한 사람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양치연도 표도르의 낯빛이 가면을 바꿔 쓰듯 찰나에 변할 때면 솔직히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깍지를 껴 명치께 위에 올려놓은 손을 연신 쥐었다 펴며 양치연은 잠시 기다렸다.
"처방약이라 먹으면 낫대요."
그리고 애써 태연하게 덧붙였다.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정도의 시간이 영겁처럼 흐르고, 그 끝에 천표도르가 들릴 듯 말듯 되물었다.
"처방약을… 어떻게 받았어요?"
"눈 아프다고 해서 받아왔어요."
그리고 어둠에 걸맞는 침묵이 찾아온다. 감은 눈에 마지막으로 힘을 줬다가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슬그머니 떠보면 좁은 방에는 가로등 불빛이 어슴푸레 비쳐와 그리 어둡지만은 않다. 그 때에 침대 옆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 양치연은 잽싸게 도로 눈을 감았다. 이어지는 광경이 어떻든 직접 보고 싶지 않다. 그렇게 눈을 꼭 감고 있으면 이불 속에서 뒤척거리던 소리가 잠시 멎었다.
서랍이 열렸다. 양치연은 딱딱한 손끝을 손등 위로 누르며 입을 꾹 다물었다. 어둠 속에서 그가 서랍 안을 뒤지고 있었다. 제일 바깥에 가지런히 놓아둔 약봉투가 그의 손에 잡힐 때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천표도르는 그것을 바깥으로 꺼냈고, 이후 약포지가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 이후로는 직접 목격한 것처럼 모든 장면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스쳐지나갔다. 그가 고개를 젖히고 약을 입에 털어넣는다. 헐겁게 닫아놓은 보온병의 뚜껑이 열리면 따뜻한 수증기가 기다렸다는 듯 얼굴로 쏟아져 나온다. 표도르는 그것을 한 모금 머금고 약을 삼킨 뒤 보온병을 도로 닫아놓는다. 그리고 천천히 돌아누워 이불을 덮는다. 양치연은 눈을 떠 그가 어떻게 누웠는지 굳이 확인하지 않았다. 어떠한 소동도 고함도 없었다. 그게 다였다.
뒤늦은 하루의 끝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던 양치연은 잠깐 어렴풋한 두려움을 느꼈고, 이보다도 더 늦은 밤중 그의 흐느낌과 들썩임이 자신을 깨울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밤은 아무리 깊어도 고요하기만 하고 표도르는 조금도 뒤척거리지 않았다. 그제야 양치연은 안도했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긴장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그야 그의 룸메이트는 사람 속 썩이는 데에 재주가 있는 사람이니까. 병원에 가서 빈 자리가 아프다고 말하고 약을 받아오는 것, 그 간단한 게 뭐가 그렇게 어렵다고. 그러나 양치연은 천표도르를 갖고 이 이상의 모험은 하고 싶지 않다. 그러므로 그것을 영영 입밖에 내뱉지 않을 생각이다. 그렇게 결심하고 나자 미뤄뒀던 평온이 그제야 천천히 밀려오기 시작했다.
실로 오래간만의 무거운 졸음이었다. 양치연은 불현듯 그게 기껍다는 생각을 하고, 곧 의식을 미련없이 놓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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