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보신

의사선생님... 초복엔 역시 닭인가요?

made in heaven by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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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박자 늦게 깊은 잠에서부터 의식이 끌려 나오는 것을 느끼며 이선일은 눈을 떴다. 새벽보다도 한밤중에 가까운 방 안에서는 완전한 어둠과 인영을 구분하는 게 쉽지 않다. 아직 초점이 맞지 않는 시야로 간신히 알아본 뒷모습은 익숙하면서도 당연한 이의 것이다. 견천락은 먼저 깨어 창문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선일은 그와 자신이 동시에 같은 이유로 잠을 방해받았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소란보다 침묵이 어울리는 이 마을에서 한잠을 깨울 만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면 대체 어떠한 이유란 말인가. 선일은 자기도 모르게 일어나 천락의 등에 조금 가까이 기대며 그가 바라보는 방향을 함께 내다보았다. 왜인지 자신이 느끼는 불안감이 그에게서는 느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해 뜨지 않은 밤은 술렁임을 부정하듯 그저 고요하고 서늘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울려 퍼진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지? 저 멀리서부터 아득히, 그러나 잠을 깨울 정도로 확실히, 밤중의 적막을 가르는 것은…….

 

*

 

"너무 귀엽죠?"

그렇다 아니다라고도 말을 못하겠는 게, 이선일은 살아있는 닭을 이렇게 가까이서 본 게 처음이었다. 거기다 사람의 팔에 안긴 닭은 더더욱 낯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체감상 온 동네 사람들을 깨울 만한 울음소리를 냈다고는 믿기지 않는 앙증맞은 수탉은 조그만 볏을 빳빳하게 세우고 보란 듯 의젓하게 안겨 있다. 견천락은 두 눈으로 본 걸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벌렸다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가, 가슴을 한 대 맞은 것처럼 턱 막히는 목소리를 냈다.

"뭐… 뭐야?"

"뭐긴 뭐예요, 닭이죠. 어린 애인데 벌써 이렇게 컸어요."

"주 쌤이 키우는 거야?"

"네, 털갈이 할 때부터 키웠는데 못 보셨나보다."

"주 쌤은 집을 좀 치우고라도 그런 이야기를 해봐. 아니, 근데 그럴 수가 있나… 거짓말 아냐?"

주영린은 못된 사람은 아니었지만 장난을 자주 쳤다. 이선일은 틱틱거리는 천락에게 굳이 주의를 주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영린은 역정을 내는 대신 그 특유의 의뭉스러운 웃음을 지을 뿐 대답하지 않고 여유롭게 닭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확히는 그러려고 했다.

"아악!"

영린이 확 주저앉으며 꼬고 있던 두 팔이 풀리자 닭이 날개를 퍼덕거리며 안정적으로 바닥에 착지했다. 그리고 방금 전의 얌전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부산스럽게 주위를 돌아다니며 영린의 피가 묻은 부리(확실치 않다)로 흙바닥을 쪼기 시작했다. 발끝을 쪼일 것 같은 불안감에 이선일은 자기도 모르게 헛기침을 하며 슬쩍 자세를 고쳤다. 그 누구도 영린의 손가락을 걱정하지 않는 와중 천락이 덧붙였다.

"벌 받은 거야."

"그런 말은 좀……."

그러나 틀린 말은 아니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면 분명 사람 말을 믿지 못한다며 억울한 티를 냈을 테니까. 선일은 쭈그려 앉아 새빨개진 손가락을 호호 불고 있는 영린을 내려다보며 약간의 현기증을 느꼈다. 어떻게 이렇게 한 마을에 온갖 유형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고개를 든 영린의 눈에는 눈물이 약간 고여 있었다.

"그래서 그건 어딨어?"

"아, 맞다... 뭐 갖고 가신다 하셨죠? 책장?"

"예… 안에 있습니까?"

"네, 꺼내 놓으려고 했는데 도저히. 애도 있다 보니까……."

"애는 뭔 애 핑계야, 주 쌤은 혼자 있어도 못 하잖아. 써니 씨 잠깐 있어, 내가 들고 나올게."

천락은 영린의 농담을 좋아하지 않았다. 투덜거리며 별 쓸모없는 문고리를 굳이 돌려 열고 구부정하게 걸어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선일은 다시 영린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렇다고는 해도 오늘 천락이 조금만 더 잘 수 있었더라면 영린도 이렇게 차가운 대접을 받지는 않았을 텐데. 그리고 이선일 또한 천락과 보다 마음 편히 돌아가 책장을 놓고 그 안에 뭘 채울지 고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뭐 그게 꼭 주영린의 탓이라는 게 아니라, 그런 말은 정말로 아니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게 애석할 뿐이다. 그리고 사실 일이 어떻게 됐든 천락과 선일은 돌아가 책장을 채울 예정이었다. 아무렇게나 던져 둘 수는 없으니까.

"영린 씨."

방금 전까지 너무 귀엽다느니 자기 애라느니 호들갑을 떨던 영린은 금세 제 등 뒤 어딘가를 헤매는 닭의 존재를 잊어버린 듯했다. 무릎을 털고 일어난 영린이 안경을 고쳐 썼다.

"그… 닭 소리를 좀 줄이는 방법은 없습니까? 아니면 좀, 아예 안 울게 한다거나."

"에이, 닭이 무슨 라디오예요 소리를 키웠다 줄였다 하게. 뭐 부리라도 붙여놓을까요?"

동물에 대해 무지한 선일이지만 그게 말도 안 된다는 것은 안다. 그렇다고 뾰족한 수가 없으니 계속 새벽에 깨라는 것 또한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자신도 이렇다 할 해답을 내놓지 못한 채로 선일은 웅얼거렸다.

"잠을 잘 못 자서요. 저 말고 쟤, 그러니까 견천락이."

"아… 지난 밤에 깨셨나 봐요?"

말을 채 맺기도 전 터져 나오는 애석한 목소리에 그는 무심코 안심했다가, 이거 어쩌지. 한동안 계속 울 텐데. 분명 걱정스러운 목소리인데도 이어지는 그 말에는 자기도 모르게 울컥 얄궂은 마음이 솟아났다. 이선일은 고작해야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낮은 주영린을 내려다본다. 한 때 여자라고 착각했을 만큼 가늘고 고운 입매는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가끔 주 선생을 입에 올리며 따분한 얼굴을 하던 천락의 마음을 알 것도 같다.

 

그 날 밤은 힘을 써서 그런가 평소보다 일찍 눕게 됐다. 이선일의 더블베드는 성인 남자 두 명이 누우면 좁은 감이 있어 천락과 선일의 팔은 늘 어떻게든 맞닿는다. 미묘하게 다른 체온이 점점 그 온도를 맞춰가면 자기 싫어도 기분 좋은 졸음이 발끝에서부터 몰려오곤 했다. 눈을 감은 채 가물가물한 의식을 완전히 놓아버리려던 찰나 옆에서 견천락이 크게 돌아누웠다. 눈을 게슴츠레 뜨고 그를 흘겨보면 어둠 속에서 예상치 못하게 눈이 마주쳤다.

"써니 씨."

"응?"

밤이 되면 잠에 취한 것처럼 느슨해지는 목소리는 넋을 놓고 듣기 좋았다. 이선일은 드물게 기분이 붕 뜨는 것을 느끼며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잠시 호흡을 고르던 천락이 나른하게 말을 이었다.

"닭이 나오려면 달걀이 있어야 하잖아."

"뭐 그렇지…."

"그럼 달걀은 어디서 났을까?"

"뭐…? 알아듣게 말을 해봐."

본격적으로 목소리를 가다듬는 소리는 듣기 좋았지만 그게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저 닭이 농장에서 태어난 건 아닐 거 아냐. 그럼 야생 닭이라는 건데, 세상이 망해도 달걀을 낳을 암컷 닭이랑 수컷 닭이 있을 수가 있어?"

이선일은 잠시 캄캄한 천장을 올려다보다 마른세수를 했다.

"안 될 거 있나… 멍멍이도 길에서 돌아다니고 있었다니까."

"아니, 개랑 닭은 다르지. 그럼 소나 돼지도 길에서 볼 수 있어야 하는 거잖아."

"이론상 그렇지… 여기 말고 어딘가 있겠지… 야, 그만 속닥거려. 간지러워."

선일은 몸을 돌려 손이 닿는 대로 견천락을 쥐어박았다. 팔뚝에 때린 딱밤은 사실상 아무 의미 없었지만 어쨌든 견천락은 조용해졌다.

 

*

 

"야 남천아, 너 그 닭 봤냐."

"뭔 닭이요?"

"주 선생이 키운다는 거."

"네? 쌤이 닭을 키워요?"

어릴 때부터 키웠다더니?

"아, 거 참…."

무의식 중 탄식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남천은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로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어 천락과 선일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왜요? 뭔 일인데요?"

"어제 새벽에 닭 우는 거 못 들었어?"

남천이 쩝 입맛을 다시다 뒤통수로 향하던 손을 흠칫 멈췄다. 아마 자신이 양손으로 샌드위치를 먹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으리라고 선일은 짐작했다. 많은 것이 가치를 잃은 세상에서 견천락은 음식으로 품삯을 대신하곤 했는데, 오늘은 좌우로 삐걱거리는 책장을 손봐준 대가로 감자샐러드와 올망졸망한 토마토가 들어간 샌드위치를 받았다.

"네, 저 잠귀가 좀."

"아니 무슨 한밤중에 닭이 울더라고. 근데 뭐 가지러 갈 게 있어서 주 선생 집에 갔는데 거기 웬 닭이 있잖아. 뭐 병아리부터 키웠다길래 네가 반찬 가져다주면서 본 적이 있나 했더니."

그러자 이번엔 깨달은 듯한 표정을 하고 눈을 깜빡거리더니 이내 입꼬리가 패도록 씩 웃는다. 구김 없는 얼굴이었다.

"에이, 뻥이죠. 쌤 원래 뻥 잘 쳐요."

그건 모두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선일이 마른세수를 했다. 주영린이 뭔가 이상한 소리를 한다 싶으면 절반 정도는 허풍이나 농담이었고 절반 정도는 믿기 싫지만 진실이었다. 그리고 개중에서도 특이한 게 이 경우였는데, 병아리 때부터 키운 게 아니라면 어디서 닭이 걸어들어왔다는 소리가 된다. 그거야말로 영린이나 칠 법한 허풍이다. 그런데 그게 사실이라니, 놀랍다고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근데 진짜 닭이에요?"

"가짜 닭도 있냐?"

"와, 신기하다. 달걀도 낳는대요? 후라이 먹고 싶다."

확실히 샌드위치에 계란이 들어가면 보다 풍부한 맛이 날 것 같다. 선일은 부드럽게 끼어들었다.

"수탉은 알 안 낳아."

"수탉인 건 어떻게 알아요?"

"새벽에 울었다니까……."

그래, 모를 수 있지. 선일은 그게 아무렇지 않은 일인 것처럼 급하게 말꼬리를 뭉갰다. 남천은 암탉은 안 울어요? 라고 물어보고 싶은 것 같았지만 눈치를 보더니 더 묻는 대신 나머지 샌드위치를 자기 입에 쑤셔 넣고 말았다. 잘 먹네, 맛있냐? 고개를 끄덕이는 남천의 빵빵한 볼은 곧 음식을 씹은 게 맞나 싶게 빠른 속도로 원상복구 되었다. 급하게 삼키느라 물까지 반 컵 정도 마시고 나서야 남천이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암탉은 안 울어요?"

"나야 모르지. 써니 씨, 안 울어?"

뭐지? 갑자기 머리가 아팠다.

"아니, 넌… 하… 안 울어. 원래 수탉만 울어."

"와, 그렇구나."

손가락에 묻은 빵가루까지 야무지게 처리하고 난 남천이 불쑥 몸을 일으켰다.

"다음에 갈 일 있으면 확인해볼게요."

"그래라. 다음에 또 들러. 오늘 고마웠다."

"뭘요~ 또 불러주세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너무 무거운 거 올려놓진 마시고요."

글쎄, 뭘 올려놓게 될까. 책이야 별 문제 없을 테고 기껏해야 주먹만 한 화분을 몇 개 올려놓을 것 같다. 좀처럼 자라지도 죽지도 않는 이상한 모양의 다육식물이 박혀있는 가벼운 화분.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텔레비전 위에 그걸 올려놓았을 무렵 천락은 그게 조금 자란 것 같다고 말했지만 선일이 보기엔 텔레비전이나 화분이나 비슷한 신세였다.

 

*

 

밤잠을 깨우는 소리의 정체를 알아낸지 거의 두 주가 되어가는 시점이었다.

"그 닭새끼를 죽여버려야 돼."

"무슨 말을 그렇게…."

그러나 이선일은 그 말끝에 눈을 흘겼을 뿐 천락을 더는 나무라지 않았다. 선일의 눈치를 살피던 천락은 그가 크게 혼을 내지 않자 짜증에서 하소연 쪽으로 작전을 바꿔 이어나갔다.

"요 며칠 몇 시간 잔 건지 모르겠어. 내 삶의 질이 떨어지고 있어, 써니 씨."

그렇게까지 말하지 않아도 실은 선일 또한 근 며칠 천락이 깰 때마다 얼결에 함께 깨느라 그 피곤함을 어렴풋하게나마 체감하고 있었다. 자신은 그나마 다시 잠들 수 있으니 몸이 좀 찌뿌둥한 정도로 끝나지만 한 번 깨면 별수 없이 뜬눈으로 밤을 지새야 하는 그는 꽤 피곤할 테다. 선일은 소파의 사용법을 잊어버린 듯 바닥에 앉아 소파에 반쯤 몸을 늘어뜨린 천락을 잠시 바라보았다. 늘어진 멍멍이의 옆구리를 기계적으로 쓰다듬는 팔에는 힘이 조금도 실려 있지 않다.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저께엔가 가봤는데 아직도 잘 살고 있더라고. 왜 키우는 거지?

"글쎄. 심심한가 보지. 주 선생님 혼자 살잖아."

"주 쌤이 외로움을 탄다 이거야? 설마,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오게 생겼구만."

빈정거리면서도 내심 확신을 잃고 진지해지는 얼굴에 선일은 자기도 모르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꾹 내리눌렀다. 그렇게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천락은 곧 가벼운 하품과 함께 그 진중한 표정을 흩어버리며 멍멍이의 배를 가볍게 툭툭 두드렸다.

"멍멍아, 너도 돌아다닐 때 새벽에 막 사람들 깨우고 그랬던 거 아니냐."

멍멍이는 얌전하고 순한 강아지다. 먼저 위협하지만 않는다면 늘 사람에게 꼬리를 흔들며 다가간다. 선일은 멍멍이를 사이에 두고 천락의 맞은편에 앉아 그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어보았다.

"그랬겠냐."

"그랬을 수도 있지. 다른 개 중에는 막 늑대처럼 울고 그러는 개도 있다던데."

"멍멍이는… 안 그래."

얌전히 바닥에 엎드린 채 꼬리만 흔드는 멍멍이를 쓰다듬던 두 손이 일순간 겹쳤다. 천락이 은근슬쩍 박자를 늦춰 선일의 손 위에 우연처럼 손바닥을 덮은 것이다.

"뭐해?"

당황한 선일이 곧장 손을 뺐다. 멍멍이가 멍멍이면 걔는 꼬꼬인가? 천락이 실없는 소리와 함께 웃으며 소파에 등을 도로 기댔다.

 

그 날 새벽 선일은 어김없이 낡아가는 매트리스 스프링의 신음과 함께 잠에서 깼다. 어둠 속에서 몸을 뒤척이던 천락은 곧 잠이 덜 깬 몸짓으로 이불 속에 도로 기어들어 가 머리를 감쌌다. 그러나 한 번 깬 잠은 다시 올 리가 없고, 잠깐의 뜸을 두고 저 멀리서부터 다시 한번 꼬끼오 소리가 쟁쟁하게 울려 퍼졌다. 정확하게 귀에 꽂히는 그 울음소리에서부터 일면 그 작은 동물의 자부심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남천이한테 귀마개 같은 걸 달라고 할 걸 그랬나. 아니, 그런 건 주 선생한테 있으려나. 나도 그 닭을 어떻게 한 번 더 보러 가봐야 하나. 저녁쯤 어렴풋이 스쳐 지나갔던 연민은 잠결에 보다 너그러워진 마음속에서는 도무지 떠날 줄을 몰랐다. 이불을 젖혀보면 졸음만 그득할 뿐 이미 깨어나기 시작한 천락의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선일은 어둠 속에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두 팔을 치우고 자신의 손으로 그의 귀를 감싸보았다. 천락의 눈이 조금 커졌다가 천천히 가늘어진다. 닭 소리는 두 번을 마지막으로 그쳤기 때문에 자신의 행위가 실상 별 쓸모없게 되었다는 것은 안다. 그러나 선일은 수치심을 무릅쓰고 손을 떼지 않았다. 천락이 방금 전보다도 크게 몸을 뒤척였다.

침대에서 일어나려는 것처럼 매트리스를 짚은 손은 선일의 위로 기울어지는 천락의 몸을 지탱했다. 머리 양쪽을 짚고 있던 손은 미끄러져 목덜미에 얹혔다. 선일은 그를 올려다보며 애써 태연하게 목소리를 내보려 했다.

"다시 못 자겠어?"

"늘 그랬잖아. 깨면 다시 못 자는 건."

"따뜻하게 하거나, 아니면 족욕이라도 좀 하면….…"

횡설수설 중얼거리는 선일을 내려다보던 천락이 말을 끊고 낮게 속삭였다.

"저번에 책장 옮긴 날 우리 일찍 잤는데. 힘 좀 쓰면 잠도 잘 오지 않나."

꼭 그렇게 말을 해야 하나. 선일은 그런 볼멘소리조차 민망해 도통 입 밖으로 내지 못하는 사람이다. 거기다 그 자신은 별일이 없어도 금방 도로 잠들 수 있다. 그러나 곤한 잠이 불러다 준 너그러움은 아직 유효했고, 선일은 잠을 설친 기색이 역력한 천락을 매몰차게 밀쳐내고 싶지 않다. 이윽고 가까이 다가오는 천락의 한쪽 눈은 마음을 숨길 생각이 없어 암흑 같으면서도 그 뜻만은 제법 선명하다. 그게 얼마나 노골적인지 불쑥 얄궂은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사실 이 상황이 그렇게까지 싫은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입술이 마주치기 직전, 잊고 있던 것을 상기시키듯 단말마와 같은 울음소리가 길게 울려 퍼진다.

 

"하, 저 새끼 진짜… 오늘은 엇박이네."

이번에는 선일도 다시 잠들 수 없을 만큼 완전히 잠에서 깨어버린 것 같다. 심장은 죄를 지은 것처럼 여느 때보다도 세차게 뛰고, 호흡은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가쁘다. 얼굴이 홧홧했다. 몸을 반쯤 일으킨 채 창밖을 돌아보는 천락의 굴곡진 옆선은 흐릿한 달빛을 받아 그 태가 선명했다. 이선일은 피가 날 정도로 입술 안쪽을 깨물다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이 상황에 책임이 있다면 누구의 책임인가. 모르긴 몰라도 닭 잘못은 분명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하… 이거는 당연히 주 선생님 잘못 아닌가? 도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서 닭을 키우겠다고…….

 

*

 

"아저씨!"

막 세수를 마치고 물기 어린 얼굴로 서성이던 천락과 소파에 느슨히 앉아있던 선일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채 어린 태를 벗지 못한 그 목소리는 강하게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 너머로 중간중간 섞여 들려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선일은 현관문을 열어주는 천락의 뒤편에 서서 바깥을 내다본다. 두 뺨이 상기된 채 거친 호흡을 가다듬던 남천이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고는, 가쁜 숨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어물어물 중얼거렸다.

"주 선생님이 당장 두 분 불러오라 하시는데요. 심각한 일이니까 어디다 말하지 말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주영린에 대해 전혀 다른 감상을 갖고 있는 두 사람의 머릿속에 떠오른 광경은 거의 동일했다. 영린의 살이 없는 반듯한 뺨이나 툭 치면 부러질 것 같은 팔다리가 주는 인상이 남천의 다급한 목소리와 겹쳐 두 건장한 성인 남성의 마음속에 영 안 좋은 심상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대문을 넘는 순간 천락이 돌연 길게 숨을 들이쉬었다. 처음엔 그 들숨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던 선일은 남천이 현관문을 당겨 여는 순간 천락이 한 발 일찍 느낀 위화감의 정체가 무엇인지 뒤늦게 알아차린다.

"천락 씨, 선일 씨~!"

사람을 반기는 발소리와 함께 부엌 쪽에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에 이어 영린이 튀어나왔다. 앞치마를 입은 그의 양손에는 디자인이 다른 국자와 집게가 들려 있다. 몇 주 전 천락이 불시에 들이닥쳐 강제로 치웠다던 거실은 웬일로 짐이 늘기보다도 더욱 줄어든 듯했고, 그로 인해 생긴 빈 자리에 떡하니 놓여있는 밥상, 바로 거기서부터 좀처럼 맡아볼 수 없었던 음식 냄새가 나고 있었다. 날고기의 잡내 위로 덮여 어우러지는 향신료의 냄새는 실로 오랜만에 맡아보는 것이다. 그리고 선일은 비로소 이 모든 일의 경위를 깨닫는다. 없으니만 못한 대문을 밀고 들어올 적의 마당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해서, 그 때는 선생에게 정말로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닌가 싶었다. 생각해보면 영린 혼자 살고 있는 집이 시끄러울 리가 없는데도.

앞장서 들어온 남천에게로 시선을 돌리면 그는 처음의 다급한 기색은 온데간데없이 멋쩍은 얼굴로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이고 있다. 대신 변명해주듯 주영린이 그 앞으로 끼어들어 몇 마디 덧붙였다.

"온 동네 사람들 먹이기엔 너무 적은 양이라……."

그랬겠지… 선일은 어디서 났는지 모를 하얀 도자기 그릇 안에 꽉 차 있는 먹음직스러운 닭 몸통을 바라보았다. 실은 영린이 요리를 할 줄 안다는 것조차 모르고 살았는데, 파와 후추가 섭섭지 않게 떠다니는 뽀얀 국물은 모양만이 아니라 냄새까지도 썩 그럴듯했다. 조금 찝찝하지만 그 냄새를 맡고 있으면 누구라도 배가 고파올 것이다.

"며칠 고생 많으셨죠? 천락 씨 잠도 제대로 못 주무셨다면서요."

"어어."

그러나 등 뒤에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는 썩 입맛이 돌지 않는 것 같다. 자기도 모르게 천락을 돌아보면 천락은 얼이 빠진 표정을 하고 밥상 중앙에 놓인 그 닭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 끝 네모난 밥상 사면에 놓인 수저와 앞접시는 그 모양까지 똑같아 흡사 평범한 가정집에 초대를 받은 느낌이 난다. 계속 서 있는 것도 예의가 아니었다. 남천은 일찍이 자리에 앉아 나머지 두 사람이 닭이 식기 전에 앉아주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선일은 천락의 팔을 슬쩍 끌어당기며 다 해져가는 방석 위에 엉거주춤하게 앉았다. 천락은 무언의 재촉을 이기지 못하고 자리에 앉았지만 이 뜻밖의 만찬을 도무지 반길 수 없는 얼굴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주영린이 막 국자로 그릇에 국물을 퍼담기 시작할 무렵 젓가락을 놓고 자리에서 부스스 일어났다.

"어디 가세요?"

"담배 피우러."

그로서는 몇 주 전 책장을 가져올 때 보았던 게 마지막이라 충격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선일은 맛을 보듯 숟가락에 조금 남은 국물을 입에 넣으며 천락의 뒷모습을 흘끔 바라보았다. 뭐라 그랬더라, 멍멍이가 멍멍이고 걔는 꼬꼬라고. 깊게 생각했다간 그 자신도 입맛이 떨어질 것 같아 선일은 금방 고개를 저어 생각을 흩어버렸다.

"그런데… 이럴 생각이었으면 왜 바로 안 잡은 겁니까?"

"아~ 그 때는 닭이 너무 말랐더라고요. 이것저것 먹여서 키웠죠."

그 말에는 이선일도 내심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무의식 속 아득한 곳에서부터 천락의 목소리가 리플레이된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오게 생겼구만… 영린이 외로울지도 모른다고 말한 건 선일 그 자신인데도 저 태연한 얼굴 앞에서는 차마 그런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영린은 라텍스 장갑을 낀 손으로 김이 폴폴 나는 닭을 서슴없이 뜯어 각자의 그릇에 담아주고 있었다.

"와, 맛있다. 근처에 닭장 같은 거 있는 거 아녜요?"

"에이, 그러면 아침마다 소리가 들렸겠죠.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찾아볼까요?"

천연덕스럽게 남천의 질문을 받아주는 영린의 목소리를 들으며 선일은 조용히 닭껍질 아래 하얀 살에 젓가락을 꽂아넣고 그 틈을 벌려본다. 결을 따라 곱게 갈라지는 살은 고소하고 담백하며, 소금 간을 조금만 더 했더라면 좋았을 듯싶다. 잡내가 없기를 기대하는 건 사치지만 어디를 갈라보아도 조금의 핏기도 없는 것으로 보아선 주영린은 닭을 잡아본 경험이 있는 것 같았다. 그것도 여러 번.

예정된 결말이었고, 그걸 몰랐던 건 두 사람 뿐이었던 것 같다.

 

*

어쨌거나 일복이잖아요. 뜨거운 걸 먹어야죠.

영린은 바쁘게 부딪히는 식기 소리 사이로 지나가듯 그런 말을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의사가 그렇게 말하니 오늘이 정말 초복인가 싶었다. 선일 씨, 다리를 좀 드세요. 하나는 남천 씨 드시고… 천락 씨는 무슨 밥상머리에서 담배를 피우러 가신다고. 가슴살이나 드시라고 하죠? 그러나 선일이 추측하기로 견천락은 다리살보다는 가슴살을 더 좋아할 것이며, 그마저도 입에 대지 못하고 식사가 끝날 때까지 밖에서 서성거리고 있을 것이다. 미워하다 못해 이름까지 붙여버린 그 닭의 퍽퍽한 가슴살이 제 접시에서 식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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