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저택

The gloomy house, 1995, oil painting

made in heaven by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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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지냈니? 오랜만에 집에 와보니 우편함에 편지가 가득 쌓여있더라. 놀란 마음은 이해하지만 비어있는 집에다 그렇게 편지를 보낸 너도 참 대단하다. 다 읽으려면 시간을 좀 들여야겠어.

그간 편지하지 못한 건 미안해. 그에게 편지지를 달라고 하기가 부담스러웠거든. 생각해보면 친구한테 편지 한 번 하는 게 뭐 그렇게 어렵다고 말이야. 그리우면 돌아가라는 소리를 할까봐 두려웠던 거지.

나 보스턴으로 돌아왔어. 내 생각만큼 낭만적이지 않았다거나 그런 이유로 저택에서 나온 건 아니야. 네가 들으면 코웃음치겠지만 난 정말로 사람 소리가 가득한 삶은 기대하지도 않았으니까. 말했잖아, 무척 조용한 사람이라고. 그런데도 무작정 따라갔던 걸 생각해보면 그 때의 나는 그를 한 번 더 놓치고 싶지는 않았나봐. 그래도 내가 아직 네 친구라면 부디 너무 비난하지는 말아줘. 누구라도 그의 다정한 목소리를 들으면 그 순간만큼은 스스로가 특별한 사람으로 느껴질 테니까. 함께 향할 저택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그의 목소리도 늘 그렇게 따뜻했거든. 도시의 소음이 들리지 않는, 앞뜰에 햇볕이 드는 그런 곳…….

말만 들으면 아름답겠지만 그 광경을 너무 깊게 상상할 필요 없어, 앤. 대신에 정문은 녹슬고 외벽에는 세월이 낀, 걸음소리 하나하나가 전부 들려오는 복도를 상상해봐. 단 한 순간도 온기를 머금지 못하는 창백한 대리석 기둥을. 으슥한 교외의 숲속에서 제대로 된 사람 한 명 만나지 못하고 그 저택을 자신의 전부 삼아 살아왔을 어린 아이의 인생을. 그가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남자를 사랑하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행복해질 수 있을까?

 

답이 없다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그의 표정이, 태도가, 목소리가 끊임없이 알려주었으니까. 그런데도 나는 그가 내비치는 찰나의 호의에 그 모든 것을 감내하고 그를 사랑하겠다 다짐하고 만 거야. 어쩌면 함께 방법을 찾을 수 있으리라 믿으면서…….

 

*

 

리암의 생가는 코네티컷 주, 교외에서도 한참 지나야 나오는 숲 속에 위치해 있었다. 그의 차에 조촐한 짐을 실을 때만 해도 한나는 삶의 변화점을 눈앞에 두고 막연한 기대감에 빠져있었으나 세 시간 정도가 지나 차가 으슥한 오솔길로 들어설 즈음에는 그 기묘한 고양감도 차츰 사그라들었다. 포장되지 않은 흙바닥과 나란하고 어둑한 상록수들, 침묵으로 일관하는 그의 태도가 어딘가 으스스한 기분을 주었던 것이다.

연락이 끊긴 지 거의 1년이 다 되어갈 때였다. 그가 떠난 이후 한나는 미술관에 가는 것을 의식적으로 피했기 때문에 한나가 그와 다른 곳이 아닌 미술관 홀에서 마주친 것은 대단한 우연이었다. 그 옆에 서있던 초라한 얼굴의 남자에게 듣기로 리암은 지금만이 아니라 그 1년간 꾸준히 업무 차 편지하거나 방문했다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한 달 정도 머물 요량이라는 이야기도 친절하게 덧붙여주었다. 리암의 무감정한 얼굴이 반가움을 표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한나는 내심 놀랐다.

언젠가 리암의 집에 모든 생활용품이 두 개씩 나와있는 게 당연하게 여겨질 때가 있었다. 한나에게서는 리암의 향수 냄새가 났고, 가끔은 엉망으로 구겨진 그의 셔츠를 깔고 잠에 들었다. 리암의 요리실력은 근사한 편이었다. 보스턴 박물관의 큐레이터 하나가 그녀의 뒤를 봐준다는 악의적인 소문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스캔들이 날 만큼 유명세를 떨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년 전 그 관계의 끝을 맺으며 리암이 꺼낸 것은 고작 후원금에 대한 이야기였다. 관계의 시작에 금전이 깊게 엮여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으나 한나는 모종의 수치심을 느꼈다. 앞으로 돈이 필요하다면 이곳으로 연락하라며 명함을 내미는 그의 표정이 감흥 없이 무상해 상처를 받은 것도 사실이었다.

그 날 밤 한나는 리암의 침대에 누워 그가 덤덤한 목소리로 이야기해주는 근황에 귀기울였다. 유산 문제는 원만히 해결되었으며 저택은 처분하는 일 없이 자신이 맡아 관리하기로 했고, 그래서 오래 자리를 비울 수 없다고. 등을 보인 채 걸터앉은 그의 얼굴을 보지는 못했지만 한나는 리암의 그 이야기가 그 때의 매정한 태도에 대한 변명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변명을 할 만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잠기운 탓이었는지 그 날은 말이 쉽게 나왔다. 한나는 몸을 일으켜 그가 쥐고 있던 술잔을 뺏어 한 모금 마셨다. 그럼 내가 저택에 가서 살면 당신을 오래 볼 수 있나요? 그 말이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 알았을 텐데도, 그는 한나의 손에서 잔을 다시 가져갈 뿐 이렇다 할 대답을 주지는 않았다. 다만 그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아 크고 값비싼 트렁크 하나를 가져다 주었다. 짐을 챙기라는 말에 무엇을 묻기보다도 그냥 시키는 대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보스턴에서 지내는 마지막 일주일 간 리암은 무척 바빴다. 뒤늦게 들은 이야기지만 그가 이번 방문에 한 달이라는 기간을 잡은 이유도 당분간 저택에서 나오고 싶지 않아서라는 것 같았다. 덕분에 한나는 혼자서 짐을 챙길 수 있었다. 그녀로서도 리암이 함께 짐을 챙겨주길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좁고 보잘것 없는 아파트 방이 어디 내보이기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물론 리암은 웬만한 일에는 눈썹 한 번 까딱 않는 사람이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다.

리암이 한나에게 명시한 것은 딱 두 가지였다.

당신이 가진 것 중 제일 비싼 것, 제일 아끼는 것.

리암은 일찍이 어머니를 잃고 최근에는 아버지의 장례까지 치렀다. 그렇다면 리암이 ‘좋은 것’을 골라가면서까지 한나를 내보이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의 형제들인 것일까. 그는 한나가 물어볼 때마다 어렵지 않게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무심한 아버지와 다정한 어머니, 두 살 터울의 형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동생……. 미국 도처에 널려있을 법한, 특별한 구석이 전혀 없는데도 그 이야기만큼은 꽤 열심히 했다. 금색 머리카락과 보랏빛 눈을 가진 형제들. 한나는 가끔 거울을 보며 자신의 눈이 보라색이라면 어땠을지, 키가 좀 더 크고 기골이 굵었다면 어땠을지 상상해보았다. 그와 함께 보스턴을 떠나는 날이 하루 앞으로 성큼 다가와도 그들의 이미지는 좀처럼 뚜렷해지지 않았다.

차가 비로소 저택에 가까워진 것은 늦은 저녁 때쯤이었다. 저택을 멀리서 바라보면 노을을 배경으로 우뚝 솟아있는 검은 첨탑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정문은 청동으로 되어있었는데, 관리로도 지우지 못한 녹의 흔적이 뚜렷해 본 건물만한 위용을 보이지는 못했지만 그 나름의 분위기가 있었다. 다만 오래 전에 지어진 탓에 저택은 방문객을 반기지 않았다. 느린 속도로 정문을 지나치고서도 조금 더 들어가야 차고가 나왔다. 리암은 차 문을 열고 한나가 내리는 동안 짐을 꺼내주었다. 트렁크는 애초부터 리암의 몫으로 들고 있었기에 한나가 들어야 하는 짐은 화구박스 하나가 고작이었다. 입지도 않는 옷을 꺼내가며 채워야 했던 큼직한 가방은 그의 손에 들리니 무척 가벼워 보였다.

못해도 백년은 족히 넘어보이는 그 저택은 분명 유산의 형태로 대에서 대를 거쳐왔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 시대에 산등성이에 박혀있는 오래된 저택을 물려받겠다고 굳이 도시 생활을 청산하는 청년은 드물었다. 그러한 점에서 리암은 더더욱 보기 드문 청년이었다. 칙칙한 색의 잔디가 발목을 간지럽히는 일 없이 단정하게 깎여있는 것이나, 깨진 구석 하나 없이 검고 반질반질한 반석 같은 것이 그가 얼마나 저택을 아끼는지 짐작케 했다. 그리고 돌계단 위에 있는 현관문은 리암과 한나가 앞뜰을 가로질러 그 앞에 다다를 때까지 먼저 열리는 일이 없었다. 나무로 된 문에는 여느 고택과 다를 바 없이 구불구불한 부조가 새겨져 있었다. 투박하게 깎아낸 조각은 완고했고, 그 묵중한 무게와 두께는 저택과 바깥을 완전히 분리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누가 문을 두드린대도 그 소리가 들리기나 할까 싶었다.

문을 열기 전 리암은 잠시 멈춰서서 고개를 들었다. 이유가 있겠거니 하고 리암을 따라 문을 올려다보았으나 이렇다 할 감상은 들지 않고 손끝에 힘이 빠져 박스가 자꾸만 미끄러지기만 했다. 가로등 하나 없는 비포장도로를 가로지르는 한 시간이 내심 고됐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지치고 초라한 얼굴로 저택의 사람들을 마주하고 싶지는 않았다. 분명 리암을 사랑했지만 자신도 모르는 어떤 이유로 한나는 리암과 관련한 일을 정면으로 마주하기를 피해왔으며, 그렇기에 이곳까지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떠밀려온 것이다. 그녀로서도 끝까지 회피할 생각은 없으며 문이 열리면 그 안에 무엇이 있든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괜찮은 첫 만남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그게 몰려드는 피곤함과 두려움을 계속해서 떨쳐내고 있는 이유였다. 한나가 애써 박스를 고쳐 안고 몸가짐을 바로하는 동안 리암의 시선은 어느덧 그녀에게로 옮겨왔다. 그는 눈이 마주칠 때까지 아무 말 없이 기다려주었다.

오래된 경첩은 기름칠로도 숨길 수 없는 소리를 냈다.

음산한 여음을 남기며 그 내부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었다. 새어나오는 불빛은 바깥보다 따뜻했으나 저택에서 밤을 완전히 몰아낼 정도로 밝지는 않았다. 그 흐릿한 빛에 눈이 익숙해지자 새하얀 대리석 기둥의 윤곽, 샹들리에의 첨예한 크리스탈 조각이 눈에 들어왔다.

리암이 직접 문을 열었던 것이 무색하게 저택에는 깨어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문턱을 넘어서자 홀에 서있던 사용인들이 일사불란하게 다가와 손에서 짐을 옮기고 문을 닫았다. 리암이 움직이기 전에는 먼저 움직이지 않는 그 모습이 한나가 알고 있는 예의와는 사뭇 달랐다. 그들은 지극히 공손했지만 동시에 이 상황을 피하려는 기색이 역력했고, 복도로 총총 사라지는 그 순간에야 외부인에 대한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힐끔거릴 뿐이었다. 사용인들의 발소리가 빠르게 멀어지고 홀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한나는 그 새 긴장으로 차갑게 식은 손끝을 주물렀다.

무엇을 피해 도망치는 것일까.

그리고 리암은 현관 앞에서 그랬듯 고개를 들었다. 먼 길을 쉬지 않고 걸어온 사람이 그러하듯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 이유를 찾아 다시금 고개를 들면 이번에는 적막 위로 반듯한 발걸음 소리가 내려앉았다. 리암의 시선 끝에 누군가가 계단의 난간을 짚고 멈춰서 있었다.

햇빛 한 번 보지 못한 난처럼 생긴 남자. 눈에 띄는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아니더라도 리암 못지 않은 장신에 고지식하게 닫아 잠근 셔츠 옷깃이 그의 신원을 증명했다. 그러나 눈꼬리는 날카롭게 치켜 올라갔으며 반반한 미간은 기분이 조금만 변해도 좁은 골이 패였다. 그리고 아주 예민하고 날 선, 그 시선이 닿자 한나는 돌연 서있는 자리가 거북해져 도망치고 싶어졌다. 저택에 있는 듯 없는 듯 존재하는 사용인들의 눈길과는 달랐다. 그는 단 한 번 눈길을 던지는 것만으로도 호기심과 무관심을 동시에 드러냈다. 요컨대 한나는 리암이 들고 온 짐이었고, 그는 리암이 스스로 설명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한나는 그 자리에 오도카니 서있었다.

리암은 조금 더 일찍 입을 열었어야 했다.

“에이든.”

그리고 그렇게 불린 남자는 변명에 앞선 부름이 퍽 기껍지 않은 눈치였다.

그 때에 에이든이 형식적인 미소라도 남겨주었다면 한나는 그 첫만남이 썩 괜찮았다 기억했을지도 모른다. 하물며 그가 조목조목 늘어놓는 신랄한 빈정거림 중 한 마디라도 한나를 겨냥했더라면, 그녀는 개의치 않고 웃으며 대답해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에이든은 한나의 머릿속에 맴도는 넉살 좋은 첫 마디 중 어떤 것도 입 밖으로 낼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래서 한나는 끝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 말끝에야 꽂히는 메마른 그의 시선에 그냥 웃어보였다. 리암이 데려온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처럼. 모욕적인 말을 못 들은 척 넘기는 것은 그녀의 특기였다.

첫만남이 전부가 아니니까.

머릿속에서 규칙적인 박자로 경종이 울리고 있었다.

 

*

 

“에이든은 내가 마음에 안 드나 봐요.”

어째서 돌연 그 이야기를 할 기분이 들었냐 하면 마땅한 이유는 없었다. 다만 그것이 딱히 갑작스러운 이야기는 아니었으며, 에이든은 늘 한나를 철저히 없는 사람처럼 대하거나 장소를 불문하고 망신을 주어 사용인들의 얼굴을 하얗게 만들곤 했다. 그 물음을 들은 리암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한나는 이 저택에 와서 세 장 째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이제 와서 묻는 게 새삼스러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잠깐의 침묵 끝에 그렇게 묻는 목소리가 아이를 타이르듯 부드러웠다. 그는 언제부턴가 에이든에 대한 이야기를 피하고 싶어했다. 한나는 대답 대신 입을 굳게 닫은 채 그림에 열중했다. 에이든이 한나를 못마땅해 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건 리암이다. 다만 리암은 똑같은 질문을 두 번 이상 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그녀가 다시 꺼내지 않는 한 이 주제가 다시 입에 오를 일은 없을 것이다.

저택에 머무르게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그 때에는 이 저택에 너무나 쉽게 발을 들인 것이 얼떨떨하면서도 은근히 기뻤다. 하루하루가 거짓말처럼 짧았다. 하루종일 누군가와 함께 있는다는 건 사랑에 목 매는 사람이나 꿈꾸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인정하기 싫지만 자신이 꼭 그 꼴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한나는 며칠간 리암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각 공간과 그 용도를 익혔다. 그는 모든 방의 설명을 몇 마디로 마쳤다. 손님이 없으니 응접실에서 쉬라든가, 주방에는 거의 늘 사용인이 있다든가 같은. 그녀가 사용할 화실은 1층 동편 맨 끝의 방이었는데, 조금 구석지긴 해도 그림을 그리고 도구를 관리하기에는 적격인 곳이었다. 그리고 나와서 계단을 오르면 바로 한나의 방이 나오는 것도 그 나름 편의를 봐준 듯했다.

한나가 머무르는 2층은 앵글로스 가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지금, 본래는 형제들을 위한 곳으로 빈 방을 굳이 채우지 않지만 리암이 예외적으로 가까운 방을 내주었다고 했다. 당연하게도 에이든의 방 또한 같은 층에 있었다. 다만 그 방은 서편의 끝에 있어 그 앞을 지나가기 위해서는 리암의 방에서 나와 복도를 끝까지 가로질러야 했다. 어릴 때부터 그 방을 사용해서 그렇다고는 하지만, 한나는 왠지 그가 자신만 아니라 리암에게도 썩 좋은 감정을 갖고 있는 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층에는 ‘이제는 쓰지 않는 것’이 많았다. 어릴 때 지냈던, 막냇동생이 자주 들르던, 옛날에는 가끔씩 올라가 보았던… 리암은 취미실이나 전망대는 원하면 사용해도 좋다고 이야기했지만, 한나는 자신이 3층 위로는 올라갈 일이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저택의 구조가 얼추 눈에 익고 나선 정말로 화실과 방을 오가느라 바빴다. 리암을 따라 서재에 앉아 있으면 리암은 상관 않고 제 할 일을 할 뿐이었지만,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꼭 화실 근처를 기웃거리다 들어와 구경하곤 했던 것이다. 물론 단순히 피아노를 치거나 책을 읽는 것보다 그림을 그리는 게 마음 편하기도 했다. 저택의 모든 것이 어색할 무렵에도 화실만큼은 온전한 한나의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로 한나는 꽤 부지런하게 그림을 그렸다.

자신이 에이든에게 눈엣가시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그 때쯤이었다.

모르고 있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영 떨떠름한 첫만남 이후 한나는 의식적으로 그에 대한 생각을 피해왔었다.

이곳은 밤이 되면 앞뜰도 볼 수 없을 만큼 캄캄해져, 그 내부는 평소의 냉기를 잊을 정도로 비교적 따뜻하고 아늑하게 느껴졌다. 서늘한 밤공기만이 주는 막연한 향수에 취해 그 날 처음으로 혼자 저택을 둘러볼 마음을 가졌다. 보통의 손님에게는 허용하지 않는 것들을 리암은 조금씩 허용해주었고, 저택이 잠든 지금 한나는 아무렇지 않게 그 안을 돌아다님으로써 그것을 만끽하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에이든의 못마땅한 시선을 떠올리면 입 안이 썼으나 달리 생각해보면 잠깐 묵고 떠날 손님을 그토록 미워할 이유도 없었다. 그는 한나가 오래 머물 것이라는 가정 아래 그녀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비약이더라도 그렇게 받아들이는 게 편했다. 그리하여 한나는 긴 복도를 산책하듯 걸어다녔다.

햇빛이 들지 않아 온기를 붙들 줄 모르는 대리석은 저택의 공기를 싸늘하게 만드는 데에 크게 일조했다. 군데군데 생활감이 묻어나긴 했지만 이 집안의 가족들이 여기저기 흔적을 남기고 다니는 성정도 아닌지라 그녀가 들여다보는 방은 죄다 공허한 밤공기가 들어차 있었다. 그 한기에 일찍이 지쳐 1층을 전부 둘러보고 나서는 그냥 방으로 돌아갈 마음이 생긴 것이다.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이 노곤하게 늘어졌다. 그렇게 한 발 한 발 오르는데 문득 어디선가 어렴풋이 말소리가 들려왔다.

저택을 돌아다니지 않았더라면 본래 침구를 정리하고 누워 잠에 빠져들 시각이었다. 계단 위 한 뼘 정도 열려있는 틈에서부터 따뜻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한나는 그 방이 누구의 방인지 알았다. 리암은 11시가 되면 늘 에이든의 방에 들렀다. 침대에 누워있으면 방 바깥을 지나가는 지팡이 소리로 시각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당시에는 에이든과 대화다운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 일렁이는 불빛과 함께 흘러나오는 작고 누그러진 목소리가 퍽 생소하게 느껴졌다. 에이든은 함께 있는 누군가에게 길고 느리게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대화라기엔 상대는 지나치게 말이 없었고, 에이든도 딱히 대답을 바라지 않는 듯했다. 다만 에이든이 한참 말이 없자 짧게 공백을 채우는 낮은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 그 부드러운 재촉에 에이든은 다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금방이라도 끊길 것처럼 가느다란 그 목소리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거리낌없이 굴면서도 결코 대놓고 꺼내지는 않았던 근본적인 책망. 한나를 왜 데려왔냐는 물음에 리암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의 침묵은 무슨 뜻을 담고 있는 것일까. 대답하지 않는 그에게 혹여 에이든이 짜증을 내지는 않을까, 그래서 그가 자신조차 알지 못했던 이야기를 하지는 않을까……. 답을 얻고 싶은 마음과 지금이라도 귀를 막고 지나치고 싶은 마음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혹여 자신의 발소리가 들릴까 그 자리에 못박힌 듯 한참을 서있었다. 그러나 방 안의 그림자가 움직일 뿐 그 이상의 대화는 들려오지 않았다. 간간이 웅얼거리는 말소리는 바깥에서 내용을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잦아들었다. 바닥에 드리운 빛줄기의 경계선은 부드럽게 뭉개져 있었으나 저택의 공기는 손이 시릴 정도로 싸늘했다.

한나가 반대편 계단으로 다시 올라왔을 때 리암은 막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려던 참이었다.

그는 이 늦은 밤에 어딜 다녀오는 것인지 궁금해 했으나 한나가 입을 굳게 다물자 다시 묻지 않았다. 대신 몸을 숙여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등을 돌렸다. 뒤돌아 보지 않는 그의 등이 막막하기만 했으나 한나는 우울한 생각들을 애써 밀어냈다. 단지 저택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또 자신이 그들을 아직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토록 멀게 느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물론 이제 와서까지 그런 낙천적인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그 상황을 피하고 싶었던 스스로가 필사적으로 만들어낸 변명에 불과함을 이제는 안다.

“…만나는 사람이 있다고 말한 적이 없거든.”

아마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을 거야. 한나의 침묵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진 것인지 지팡이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던 리암이 드물게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리암은 서른에 가까웠다. 어지간히 변변찮은 남자가 아닌 이상 결혼을 생각해볼 나이다. 그렇다고 두 사람이 일상을 공유하는 게 당연한 사이로도 보이지도 않았다. 아니, 애시당초 한동안 떨어져 살던 형제들이 사생활을 일일이 보고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지만……. 미묘한 기분을 떨치지 못한 채 한나는 캔버스 위에 물감을 건성으로 쌓았다. 리암은 단순하고 반복적인 행위에 쉽게 눈길을 뺏겼다. 그는 방금 전에 나눴던 대화를 금방 잊어버린 듯했다.

그늘 안에 또 그늘을 그려 넣고 제일 어두운 곳에 빛을 찍어 넣는 일. 어느덧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잊어버린 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손을 움직이고 있으면 눈과 어깨가 금방 피곤해졌다. 근육이 뻐근해 팔을 움직이는 게 불편해질 때쯤에야 불현듯 시간이 많이 지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나는 꼭 잠에서 깬 것처럼 참고 있던 숨을 내쉬며 등을 곧게 펴고 두어 걸음 물러났다. 오늘 작업하기로 계획했던 부분은 얼추 끝난 것 같았다.

고개를 돌리자 시선을 느낀 듯 리암이 눈을 마주쳤다. 이윽고 큼직한 손이 어깨를 가볍게 감쌌다가 떨어지는 느낌이 났다.

“수고했어. 식사가 준비되어 있을 텐데.”

리암은 한나를 대할 때 가끔 어린아이를 대하듯 굴었다. 그게 영 낯뜨거웠지만 말린다고 해서 알아들을 위인이 아닌데다가, 한나는 가끔 고작 그 정도 대접으로도 화가 풀리곤 했다. 스스로에 대한 불만과 마냥 싫지 않은 마음이 뒤섞여 영 알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한나는 짐짓 들으라는 듯 한숨을 내쉬며 리암을 흘겼다. 리암은 그 눈빛의 뜻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그녀가 눈치를 주면 반사적으로 어깨를 한 번 더 쓸어주었다. 한나에게는 그 정도면 충분했다.

한나는 입맛이 섬세한 편은 아니었지만 저택의 식사가 리암이 도시에서 찾아다니던 식당의 음식보다 가정적이라고 생각했다. 저택의 식사는 접시에 조금씩 담겨 나오지도 않았고, 플레이팅이 섬세하지도 않았다. 리암에게 어느 쪽이 어울리는지 꼽으라면 도시의 값비싼 레스토랑 쪽이었다. 그렇지만 리암은 저택에서의 식사가 더 마음에 드는 듯했다.

느린 걸음에 맞춰 식당에 들어서니 테이블에는 이미 누군가가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식사 시간에 리암과 같은 테이블에 앉는 사람은 한나를 제외하면 한 명 밖에 없다.

“일찍 와있었군.”

에이든은 고개를 들지도 않고 늦었군, 똑같은 말투로 그렇게 정정했다. 예전에는 그가 늦었다고 지적할 때마다 정해진 시간이라도 있는 것인가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 기준이 에이든의 일과일 뿐이라는 사실을 안다. 그림을 그리느라 늦었다고 이야기할까 고민하던 한나는 마음을 고쳐 먹고 입을 다물었다.

옆에 앉아봤자 둘 다 불편할 테고 일부러 멀리 떨어져 앉는 건 무례하다. 그래서 한나는 식사시간마다 늘 비스듬히 맞은 편에 앉았다. 그러면 가까운 모서리에 리암이 앉아 그 사이 공백을 채워주었다. 그가 아니었더라면 평생 만날 일 없는 부류의 사람이라지만, 그가 사이에 있어야만 하는 관계는 어딘가 이상하다. 한나는 눈을 내리깔고 고상하게 나이프를 움직이는 에이든을 잠시 바라보았다.

수요일에는 늘 붉은 고기 요리가 나왔다. 그게 리암의 취향이 반영된 결과임을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오랫동안 주방에서 일했다던 테일러는 까다로운 형제들의 입맛에도 곧잘 맞춰주는 듯했고, 그래서 저택에서 지내는 동안 메뉴가 겹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오늘 접시 위에 있는 요리는 또렷하게 기억에 남아있었다. 묘한 기시감은 고기를 한 점 더 입에 넣었을 때쯤 비로소 확실한 형체를 갖고 떠올랐다. 리암의 집에서 이 요리를 먹은 적이 있었다. 한나는 그 맛 뿐만 아니라 그것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이유까지도 기억했다.

한나가 리암의 집에 드나드는 게 익숙해졌을 무렵에도 그녀에게 허락된 공간은 그의 침실이 전부였다. 융통성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리암 앞에서 첫 코를 잘못 꿴 탓에 한나는 한동안 그의 집을 숙박업소마냥 사용했다. 리암은 괜찮은 곳에서 한나를 먹이고 집에 데려와서 재웠다. 가끔 잠드는 게 늦어질 때도 있었지만 침실 바깥에서 뭉갤 핑계를 주지 않는 건 비슷했다. 그리고 나갈 때가 다 되어서야 옷을 다 차려입은 채 벼락처럼 그녀를 깨웠다. 한나가 눈을 떴을 때 그는 늘 아침 식사나 커피 한 잔을 손에 들고 있었는데, 그의 침대에 앉은 채 그것을 해치우고 나면 거실이나 주방에 앉아있을 시간이 없었다. 리암이 아파트가 다닥다닥 붙어있는 골목 초입에 그녀를 내려주고서 바로 출근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괜한 어리광을 부리지는 않았다. 애초에 그 때에는 리암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래서 현관에서 침실까지 이어지는 아주 가느다란 선을 한나는 한 번도 넘지 않았다. 예외를 허락하지 않는 그의 태도가 내심 서운하기도 했지만 리암은 그때도 충분히 한나에게 잘해주고 있었다.

그를 제대로 '알게' 된 것은 우연한 계기에서였다. 불 꺼진 레스토랑의 유리문에 비친 그의 얼굴을 보았다. 약속한 듯 미술관에서 만나 시간을 보내다 함께 식사를 하고 들어오는 그들의 일과에 지금까지 단 한 번의 변화도 없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건 리암의 의지가 아니라 선을 넘지 않겠다고 결심한 자신의 의지가 빚어낸 결과였다.

생각해보면 그는 한나에게 그 무엇도 안 된다고 말한 적 없었다. 검은 유리창 속 리암은 평소와 다르지 않은 무감한 얼굴로 집에 가서 식사를 해야겠다고 말했다. 오히려 그 날은 식탁에 앉은 한나에게 ‘꼭 그래야 한다’고까지 했다. 원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그의 식탁에 앉아 한나는 그 고집스러운 목소리를 들었다. 속을 썩이던 걱정거리가 실은 자신의 착각에 불과했음을 깨닫는 순간은 허무하면서도 달콤했다. 그 순간에 스쳐지나간 그녀의 오묘한 표정을 리암은 평생 이해하지 못할 테다. 몇 주간 이어졌던 한나의 고민을 알아차리지 못했듯이.

여하간, 구운 고기에 얹어낸 소스는 무척이나 달짝지근했다.

앵글로스의 식탁 위에서는 말이 별로 오가지 않는 편이었지만 한나는 방금 자신이 떠올린 이야기를 꼭 하고 싶어졌다. 잠시 입 안에 남은 단맛을 음미하며 무의식적으로 에이든의 표정을 살폈다. 곧바로 스스로의 행동을 의식하고 부끄러워졌으나 평소 그의 태도를 생각하면 눈치를 보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는 한나가 쳐다보든 말든 여전히 접시에 시선을 고정한 채 제 몫을 입에 밀어넣고 있었다. 그만 보면 꼭 식탁에 혼자 앉아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표정을 살펴야 할 사람은 따로 있는 것이다. 한나는 리암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당신이 처음으로 해줬던 요리네요.”

막 고기를 한 점 입에 넣으려던 리암이 잠시 멈췄다. 이윽고 그대로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한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이 꼭 커다란 동물 같아 마음이 편해졌다.

“왜, 식사하러 가자고 했던 레스토랑이 수리중이라. 기억 안 나요?”

“아…… 스티글리츠전을 이야기하는 거로군.”

제법 시간이 지난 일이라 잊어버렸어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골똘히 생각하던 그가 용케 날까지 기억해냈다. 날짜를 기억하는 기준이 전시회 이름인 게 황당하면서도 그다웠다. 정작 자신은 전시회 이름까지는 기억나지 않았기 때문에 한나는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글쎄, 그 때 당신이 굳이 마트에 들러야겠다고 해서 해가 지고 나서야 집에 들어왔잖아요.”

집으로 직행한 것도 아니었다. 식료품점의 철 진열장과 그보다 조금 더 큰 리암은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는데, 그의 세련된 지팡이가 카트 안에 아무렇게나 들어 있는 모습이 특히 그랬다. 한나가 괴리감을 느끼든 말든 리암은 익숙하게 물건을 카트에 담았다. 계산대 앞에 설 때쯤에는 익숙해진 한나도 이것저것 함께 집어 담았기에 제법 함께 장을 보는 기분이 났다.

리암이 그 날을 기억하는 건 조금 다른 이유인 것 같았지만, 그도 그 때를 떠올리고 있는지 한참 말이 없었다.

“작품을 본 날에는 좋은 식사를 해야 돼. 저녁을 대충 먹으면 하루를 망치는 거나 다름 없지.”

고집스러운 목소리. 리암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한나는 조금 웃었다. 식기 부딪히는 소리에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섞여들었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식탁에서의 대화는 끊기지 않고 이어졌다. 리암은 식사에 집중하고 있었지만 한나의 말을 대충 흘려 듣지는 않았다.

“집에서 배운 게 아니라더니… 맛이 똑같아요. 어깨 너머로 배웠다든가?”

“흠, 좋아하는 요리니까. 테일러의 어깨 너머를 훔쳐본 적은 없어.”

어릴 때는 조용하고 소심한 성격이었다고 했다. 지금도 과묵한 그가 조용하다고 말할 정도면 얼마나 얌전했던 걸까. 주방에 발도 못 들여봤을 어린 리암을 상상하자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 웃음소리가 신경쓰였는지 리암은 식사를 하다 말고 곁눈질했지만 결코 직접 이유를 물어보지는 않았다. 한나는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튼… 만든 게 대단한 거죠. 오히려 안 보고 만들었다는 게 더 대단한데?”

좋은 말을 해주고 싶었다. 좋은 기억이었으니까.

말꼬리를 흐리며 어영부영 시선을 돌린 곳에는 에이든이 있었다. 평소라면 리암과 한나 사이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가든 묵묵히 제 몫의 식사를 끝내고 먼저 자리를 뜨곤 했는데, 왜인지 지금에는 기다렸다는 듯 눈이 마주쳤다. 서로가 불편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의도치 않게 그와 마주하는 순간은 늘 겸연쩍다. 무안할 정도로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무슨 뜻이 담겼는지도 알 수 없다. 다만 한나는 그의 나이프 끝이 장난을 치듯 와인잔의 손잡이를 당기는 것을 보았다.

부드럽게 미끄러지던 와인잔이 머리부터 곤두박질쳤다.

잔과 잔끼리 부딪힐 때조차 조심스럽던 얇은 크리스탈은 대리석 바닥에 부딪히자마자 말 그대로 박살이 났다. 붉은 와인이 사방으로 튀고 파열음이 귓전을 날카롭게 후려쳤다. 리암은 눈을 크게 뜬 채 고개를 들었고, 한나는 들이쉬었던 숨을 내뱉지 못하고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저택의 불문율을 어긴 누군가의 억누른 신음을 끝으로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숨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에이든은 놀라거나 당황한 기색 없이 한나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다.

리암이 정적을 깼다. 머뭇거리고 있는 사용인을 가볍게 질책한 그가 에이든 쪽으로 몸을 조금 기울였다.

“괜찮아? 어디 베인 곳은…….”

에이든이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손을 내젓는 것만으로도 리암은 입을 다물었다. 더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사용인들에게 눈짓하는 게 꼭 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안달이 난 사람처럼 보였다. 비단 그만이 아니라 사용인들도 그랬다.

여태껏 에이든과 부딪힌 적은 여러 번 있었지만 그가 한나로 하여금 비난할 여지를 준 적은 없었다. 그녀가 실수할 때까지 기다리다 꼬투리를 잡아 한껏 빈정대는 게 여태껏 그가 선택해온 수단 아니던가. 그러나 한나는 지금에 와서야 그 선택은 순전히 에이든의 기분에 달린 문제라는 것을 깨달았다. 마음만 먹으면 그보다 더한 짓도 할 수 있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에이든이 설령 잔을 집어서 던졌더라도 모두가 그것을 실수라고 이야기할 것이다.

그 이유는 짐작할 수 없었지만 그녀가 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도 없다. 한나는 모욕감을 느끼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썼다. 눈을 내리깐 채 분주히 움직이는 사용인들처럼 단지 실수일 뿐이라 생각해주기로 마음먹었다. 에이든이 기어코 한 마디를 더 던지기 전까지는 그럴 생각이었다.

“저택에 유리잔이 차고 넘쳐서 다행이지 않은가?”

“당신, 정말이지……!”

대놓고 빈정거리는 그 목소리에 끝내 무시하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주먹을 꾹 쥐고 자기도 모르게 몸을 일으키자 리암이 재빨리 팔을 잡았다.

"한나."

부드럽게 타이르는 목소리에 한나가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에이든은 그녀를 힐끗 바라보았다가 입맛이 떨어졌다며 먼저 자리를 떴다. 식사도 마치지 않은 그의 접시와 식기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그마저도 바닥 청소를 마친 사용인들이 그 접시를 부엌으로 도로 가져가자 원래 사람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깔끔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거품처럼 끓어올랐던 분노 또한 맥없이 가라앉았다. 그러나 타이밍 좋게 머리가 식은 것 뿐 화가 풀린 것은 아니었다.

한나는 리암이 어르고 달래야 하는 어린애가 아니었다. 누군가가 악의를 내비친다면 그것에 맞설 권리가 있었다. 그러나 한나는 리암이 이 상황을 뭐라고 설명할지 도저히 가늠할 수가 없었다. 당장 몇 시간 전만 해도 에이든에 대한 이야기를 물흐르듯 넘기려 했던 그다. 하지만 모두가 보는 자리에서는 그러지 말아야 했다. 리암은 인정해야 했다. 그리고 왜 자신을 붙잡았는지 설명해야 했다.

에이든이 떠난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던 한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가 제일 먼저 내뱉을 말이 무엇일지 상상했다. 변명을 할지, 사과를 할지, 그도 아니면 늘 그랬듯 많은 뜻을 담은 침묵으로 대화를 끝내고자 할지.

그리고 비로소 그와 눈을 마주쳤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그 얼굴.

그 모습이 왜인지 에이든을 떠올리게 했다.

 

*

 

한나는 응접실 문을 열자마자 시간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자신을 원망하며 멈춰섰다. 소파에 한 손에는 책을, 한 손에는 찻잔을 든 에이든이 앉아있었던 것이다. 에이든에게 정해진 일과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다만 지금까지는 자주 마주치지도 않았던 데다가 피할 마음이 없으니 크게 신경써본 적이 없었는데…… 극적으로 마주친 게 하필 오늘이다. 문이 열리는데도 눈을 한 번 들지 않는 그 성격이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에이든을 피해 다니기엔 한나도 자존심이 있었고, 그의 유치하기 그지없는 행동에 기분이 상했다는 걸 보여주기도 싫었다. 한나는 태연한 체 문턱을 넘었다. 여전히 반응이 없는 걸 보아하니 그도 한나를 완전히 무시하기로 마음 먹은 모양이었다.

당연히 한나는 리암에게도 화가 난 상태였다. 그녀가 화난 이유를 모르는 것도 황당했지만, 화났다는 걸 알면서도 끝내 먼저 물어보는 일이 없는 답답한 성격에 완전히 이골이 났다. 그렇다고 사과를 빌어서 받아내면 그게 사과란 말인가. 식사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건 그녀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그마저도 조금도 개의치 않는 듯한 리암에게 눈치는 그림이랑 같이 내다 팔기라도 했냐고 소리지르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써야 했다.

그렇게 화를 참느라 음식이 어디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식사를 마치고 나니 영 속이 좋지 않았다.

먼저 식당에서 나와 무작정 복도를 서성이다 보니 불현듯 커피 생각이 났다. 만성적인 편두통이나 피로 같은 것은 원래 커피를 한 잔 들이키고 나면 한결 나아졌다. 저택에서도 종종 마셨는데, 어땠더라. 커피를 여유롭게 즐기는 버릇이 없어서, 보통은 한나가 그림에 집중하고 있을 때 리암이 내려줄 때가 많았고, 그게 아니더라도 한나가 음식이나 차가 어디 있는지 알아둘 필요는 없었다. 직접 요리를 하거나 마실 것을 챙겨야 하는 경우가 없었던 탓이다.

리암의 그런 헌신적인 태도만큼은 몇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았다. 그 생각을 하니 줄곧 가슴속에서 들끓던 짜증이 별 수 없이 누그러졌다. 배알 없는 제 태도에 속으로 자조하며 한나는 색색의 찻잎통이 가지런히 놓인 선반 앞에서 잠시 서성거렸다. 응접실에서 찻잎이나 다과를 본 것을 기억해내긴 왔는데 커피는 보이지 않았다. 통에 적힌 이름을 하나하나 확인하고 있으면 어깨 뒤에서 냉랭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커피는 그 아래 선반에 있어. 리암이 그런 것도 안 알려주던가?”

기대하지 않았던 충고였다. 안 해도 될 말을 굳이 붙이는 게 얄미웠지만. 한나는 아랫입술을 삐죽거리다 퉁명스럽게 답하며 장식장의 문을 열었다.

“식당에서 한 소리 한 것만으로는 부족했나 보죠?”

“그렇게 새로운 모습을 계속해서 보여주는 것도 재능이지.”

그의 말대로 장 안에는 몇 가지 원두 봉투와 이미 갈린 원두가루가 들어있는 유리병들이 보기 좋게 차곡차곡 늘어서있었다. 찻잎과 비슷하게 여러 종류가 있었지만 믹스커피는 없었다. 한 번 더 대꾸하려던 한나는 곧 한숨을 내쉬며 아무 유리병이나 집어들었다. 그래도 알려준 게 어딘가 싶었다. 한나가 보기에 에이든은 늘 빈정거리기는 해도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대답 대신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다시금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바람과 달리 짜증스러운 대화를 몇 마디 나누긴 했지만 차라리 그 편이 마음이 편했다. 사람을 무시하거나 말싸움을 하는 데에는 영 재능이 없어서일까.

에이든은 놀랍도록 조용히 책을 읽었기 때문에 한나는 잠시나마 오후의 고요한 온기를 만끽하며 커피를 내릴 수 있었다. 리암의 모습을 떠올리며 원두가루 위로 가느다란 물줄기를 어색하게 두르다 보면 머지 않아 응접실에 퍼져있던 차향 위로 짙은 커피 향이 내려앉았다. 역시 계속 짜증을 내서 좋을 게 없다고, 한나는 그렇게 되뇌이며 물이 방울방울 컵 안으로 떨어져 내리는 소리에 멍하니 귀기울였다. 저택에서는 커피를 한 잔 마시는 데에도 손이 많이 갔다. 적응하기 힘든 곳이었지만 이것만큼은 리암의 집에서 지낼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축축한 원두가루가 거름종이 안쪽으로 폭 내려앉을 때쯤 한나는 필터를 치우고 컵에 물을 채웠다. 딱 몸을 녹일 만한 온도가 되었다.

리암이 없을 때는 에이든과 한 테이블에 앉지 않았다. 한나는 낮은 서랍장에 걸터앉듯 몸을 기댄 채 커피를 홀짝이며 에이든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겹쳐 꼰 무릎 위에 책을 올려놓은 에이든은 자신이 골랐을 게 분명한 그 책이 지루해 견딜 수 없다는 얼굴로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그 옆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한나는 문득 지금 이 고요한 순간이 그와 대화를 나눌 몇 안 되는 기회라는 것을 깨달았다.

말라가는 입술을 한 번 축이고 차분히 입을 열었다.

“내가 저택에 막 왔을 때.”

에이든은 처음에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당신이 리암에게 내 이야기를 하는 걸 들었어요.”

그 이야기를 하고 나서야 그가 고개를 들었다. 다만 생전 처음 듣는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기에 한나는 떨떠름한 기분이 되었다. 그녀가 잠시 말을 멈추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밤에 말이에요. 왜 데려왔냐고 물어봤잖아요.”

그 날의 일이 우연이었음은 가슴에 손을 얹고 맹세할 수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몰래 들은 게 아니냐 묻는다면 할 말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반듯하게 다물려있던 입술 사이에서 한껏 날 세운 빈정거림이 흘러나왔다.

“들었다니 놀랍군. 엿듣는 취미까지 있는 줄은 몰랐거든.”

한나는 굳이 변명하는 대신 입을 다물고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시답잖은 말싸움을 하며 대화를 끝맺는 일이 부지기수였으나 오늘은 대답을 듣고 싶었다. 바라보기만 해도 베일 것 같던 그 눈을 그렇게 오래 바라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에이든이 먼저 손을 들었다. 다시 입을 연 그의 목소리가 한층 낮았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왜 리암한테 그런 말을 했냐고요. 여태까지 내가 이 저택에 있는 걸 보면 내쫓을 생각도 아니었던 것 같고,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으면 나한테 직접…….”

“물론 네 면전에다 못할 말도 아니야. 다만 내가 그러지 않은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

하나같이 모호한 대답이었으나 그라고 해서 모든 걸 철저히 숨길 수는 없었다. 한나는 마지막 한 마디를 덥석 물었다. 설령 또 한 번 모욕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적어도 둘 중 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대답을 들을 생각이었다.

“무슨 이유인데요?”

“이해하지 못할 테니 말하지 않았어.”

“…왜요? 내가 못 올 데라도 왔다고 말하고 싶은 거예요?”

“마음대로 생각해.”

“당신 생각을 물어본 거지 내 마음대로 생각하고 싶어서 물어본 게 아니잖아요.”

“스스로가 저택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잖아.”

에이든은 명확한 대답 없이 그저 계속해서 말을 돌리고만 있었다. 저택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 이 상황을 적당히 무마하기 핑계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녀가 진실로 이해하지 못할 이유라는 건 대체 뭐란 말인가.

한나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거짓말.”

에이든이 소리가 나게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 소리를 기점으로 살얼음 같던 평화가 깨지고 익숙한 오한이 뒷덜미를 덮었다. 방금 전까지 대수롭지 않게 나누던 대화가 전부 꿈이었던 것처럼 머릿속이 삽시간에 엉망진창으로 뒤섞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거짓말이라면.

도대체 무엇이 그 이유가 될 수 있단 말인가?

힐끔 바라본 응접실의 문은 여전히 닫혀있었다. 한나는 돌연 갇혀 있는 진실이 두려워졌다.

에이든에게 한나는 거짓말을 지어내는 수고를 들일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에게 자신은 거슬리는 눈엣가시지만 결코 그 이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기분 나쁠 정도로 통감해왔다. 평소라면 유려하게 대답을 피하는 대신 한나가 상처 입을지라도 기어이 내뱉었을 텐데. 그런 그가 한나에게 좋을대로 생각하길 바라는 것은 왜일까. 한나는 문득 이방인은 결코 익숙해질 수 없었던 한밤의 냉기를 떠올렸다.

그는 무언가를 숨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결코 들켜서는 안 되는 사실을 그 밤에 묻어둔 채 나를 속이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난 저택에 몰래 들어온 게 아니에요. 있어선 안 될 곳에 있는 것도 아니에요.”

자신의 귀에 들리는 목소리가 예상했던 것과는 달랐다. 한나는 침묵 속에서 하고 싶지 않은 말을 억지로 쥐어짜내고 있었다. 오로지 방금 전 느꼈던 불쾌감을 잊고 대화를 이어나가기 위해서. 에이든의 얼굴에서는 평소와 달리 싫증난 기색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그녀가 에이든을 제대로 바라보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의 표정도 보지 못했다. 한나는 일부러 얼굴을 찌푸리고 새까만 커피의 수면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난 리암의 애인이에요. 그가 둔하고 어리숙해서 말로 옮기지 못했을 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잖아요.”

에이든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가 날 데리고 온 이유도 당신은 알겠죠.”

이어지는 침묵은 긍정이었다. 한나는 목소리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무슨 일이 생기지 않는 이상 우리는 앞으로도 쭉 같이 살게 될 거예요.”

그리고 고개를 돌려 에이든을 보았다. 묻고 싶었다.

그걸 알면서 왜 그런 말을 했어요?

“그게 싫으면 내쫓으라고 말해보는 건 어때요?”

에이든은 한나가 아닌 찻잔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래로 기울어진 옆얼굴을 보아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기 힘들었다. 다만 그는 아주 가벼운 고민을 하듯 눈을 천천히 깜빡이다 입을 벌렸다.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을 거야.”

정적이 짧게 이어지고, 그 끝에 건조한 목소리로 그가 덧붙였다.

“그러면 리암은 결국 너와 결혼하겠지.”

반드시 그러리라고.

한나는 자신이 굳이 참을 필요는 없었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에이든이 그녀를 스쳐지나갈 때, 그녀와 같은 자리에서 먹고 마실 때, 사용인이 있는 자리에서 몇 번이나 그녀를 무시하고 홀대한 것을 생각하면 이보다 더 맹렬하게 따지고 들어도 부족했다. 그러나 한나는 천성부터 남에게 매정한 사람이 아니라 그럴 수가 없었다. 에이든에게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이 후회스러웠고, 그가 조금이라도 자신의 기분을 느껴보았으면 하는 작은 바람마저 좌절된 것이 억울했다. 단지 리암을 따라왔기 때문에 이런 소리까지 들어야 하는지. 그리고 이 모든 수모를 참아넘긴다 해도 왜 영원히 불청객 신세를 면치 못할 것만 같은지.

에이든은 한나를 잠시 바라보다 읽던 책을 덮고 응접실에서 나가버렸다. 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힐 때까지 한나는 머그잔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 안에서 몇 모금 마시지도 않은 커피가 차츰 미지근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입술 안쪽에 맴도는 끝맛은 커피 향이 남아 씁쓸했고, 또 눈물이 흘러들어 짰다.

그녀는 오랫동안 응접실을 떠나지 못했다.

 

*

 

한나가 그림에 손을 대지 않은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리암이 화실에 방문할 때마다 한나는 매번 커피를 마시고 있거나 화실을 청소하는 둥 딴청을 피웠다. 처음에는 그도 묵묵히 함께 시간을 보냈지만 언제부턴가 조금 지루해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결국에는 걸음을 끊었다. 그가 아니면 한나가 있는 화실의 문은 열릴 일이 없었으므로 한나는 매일 그곳에 혼자 남겨졌다. 고요한 화실에서 한나는 가끔 붓이나 파스텔을 들어 그림을 그려보려고 했다. 그러나 실제로 그림을 이어 그리는 일은 없었고, 그냥 붓을 휘적거리는 시늉을 하다 리암이 자주 앉던 의자에 맥없이 주저앉을 뿐이었다.

리암이 처음부터 그의 몫으로 장만한 자리라 한나는 앉아본 적이 없었는데, 그 자리는 꽤 아늑하고 편안했다. 앉아서 등받이에 몸을 묻으면 이젤에 놓인 캔버스도, 돌출 창 너머 해가 뜨고 지는 것도 보였다. 그 중 제일 가깝고 선명한 것은 자신의 옆모습이었을 것이다. 그가 여기 앉아 몇 시간이고 내 그림을 봤겠지. 그리고 내 옆모습을 보았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한나는 해가 빨갛게 저물 때까지 화실에 박혀 있고는 했다.

그 날 응접실에서 대화를 나눈 이후 에이든과 한나는 단 한 마디도 말을 나누지 않았다. 몇 달이 다 되어가도록 제대로 된 대화를 해본 적이 없었으니 고작 일주일 동안 그를 피하는 것은 훨씬 쉬웠다. 이제는 한나도 체면을 차리는 대신 그가 있으면 그대로 돌아서 나왔고, 에이든도 굳이 그 태도에 시비를 걸지 않았다. 그러나 그 날의 대화가 서로에게 똑같은 심상으로 남았냐 하면 그것은 아니었다. 에이든에게는 그 날의 모든 대화가 가볍게 스쳐 지나간 것 같았다. 한나의 기척을 느껴도 아무렇지 않게 책장을 넘기고 찻잔을 들었다. 종이 낱장의 무게, 다 마셔가는 찻잔의 무게. 그에겐 고작 그 정도의 것인데 한나는 오래도록 고심했다.

에이든의 말이 맞았다. 리암은 한나를 저택으로 데려왔다. 한나에게 방을 내어주고 그림을 그리게 했다. 그리고 별다른 일이 생기지 않는 이상 그는 한나에게 청혼할 것이다. 저택에 들어와보니 확신할 수 있었다. 잠시 머물렀다 훌쩍 떠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하지만 한나가 궁금한 건 리암의 속마음만이 아니었다. 그날 밤 기억 속 리암에게 속삭이던 에이든의 혼곤한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리암은 나를 데려오지 말았어야 했나? 에이든을 위해서?

그는 왜 나를 이곳에 데려왔을까? 일탈 아닌 일탈의 끝이 다가올 무렵, 그늘 아래 방치되어 있는 캔버스를 바라보던 한나는 문득 보다 가까운 곳에서 답을 찾고자 했다.

두 번이나 노크를 했는데도 문이 열리지 않자 너머에서 낮은 목소리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한나.”

리암이 한나의 방에 찾아올 때는 중요한 용건을 들고 올 때가 다수였다. 결국 못 이기는 척 문을 열어주자 리암의 손에 들려있는 서편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언제 재촉을 했냐는 듯 리암은 한 걸음 들어와 아무런 내색 없이 문을 닫았다.

안경을 한 번 바르게 쓰고 차분한 목소리로 읽어준 서편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그림이 리암이 제시했던 가격 그대로 팔렸으며, 한나의 이름을 함께 걸어 한동안 전시될 예정이라는 것이다. 저택에 들어오기 전 내놓았던 그림 몇 점과 저택에서 완성한 두어 점에 대한 소식이 여태껏 이런 식으로 전해져왔으나 내용은 거의 동일했다. 그렇게 형식적인 통보를 마치고 나면 리암은 중개료조차 받지 않고 그 돈을 고스란히 한나의 이름으로 된 계좌에 넣어두었다.

이제는 아주 옛날 일이 되었지만, 한 때 한나는 그에게 왜 이렇게까지 해주는지 기대를 품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 때 돌아온 답 너무나 건조해 여태 다시 물어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고마워요, 리암.”

“음.”

“지금만 아니고 늘 말이에요. 무료로 중개해주는 것도 그렇고.”

그러자 리암이 비로소 고개를 들어 한나를 보았다. 깨끗한 안경알 너머로 짙은 눈동자가 보였다. 그 눈만 보아서는 그가 무슨 말을 내뱉을지 예측할 수가 없었으므로 그가 운을 떼기 직전 한나는 늘 긴장했다.

그와의 관계에는 불문율이 하나 있다. 행위에 이유를 묻지 말 것. 물론 리암은 한 번도 그렇게 말한 적 없었지만 한나는 쓸데없는 호기심은 자학에 불과함을 잘 알고 있었다. 한나는 리암에게 무언가를 통보받는 것이 싫었다. 그의 통보는 늘 일방적이었고 한나에게는 선택권이 없었으므로. 1년이 더 지난 일이지만 아직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와의 마지막 대화였다. 만약 리암이 인사치레 삼아 한 마디라도 건넸더라면 그 순간이 그렇게 깊은 상처로는 남지 않았을 텐데. 돈이 필요하면 연락하라는 그 말이 왜 그렇게까지 싫었을까. 리암의 의도와 달리 한나는 지금까지도 그의 앞에서 절대 돈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 이야기를 하는 순간 서로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진전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다시 말해 한나에게는 지금 이 순간이 갈림길과도 같았다. 리암과 관련된 일들을 제쳐두고 마주하지 않았던 이유는 실은 두려웠기 때문이고, 그 두려움은 한나가 정면으로 파헤치지 않는 한 가슴 한 구석을 짓누르며 결코 바래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 등을 떠미는 것처럼 한나는 억지로 첫 마디를 내뱉었다.

“당신을 만나기 전에는 좀 가난했으니까.”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당신 같은 사람이 날 도와주는 건 꿈도 못 꿀 일이었거든요.”

리암이 눈을 조금 크게 떴다. 가슴에 서늘한 칼날이 꽂힌 듯했다. 스스로를 낱낱이 해부해 널어놓는 기분을 지우고 싶었다. 한나는 억지 웃음을 지으며 조금 빠르게 말을 이었다.

“뭐, 솔직히 과분한 기회라고 생각했지만 거절하고 싶진 않았어요. 그땐 내가 좀 초라한 꼴이었어서. 너덜너덜한 티셔츠 입는 신세는 좀 면하고 싶었고…….”

“당신이 가난한 것에 대해 신경을 써본 적은 없어. 거기다….”

“알아요, 나도! 당신이 아무것도 신경쓰지 않는 건 이제 안다고요.”

아무 예고 없이 히스테릭한 외침이 터져나왔다. 말이 끊겨 입을 다문 그의 얼굴에는 의아함과 당황이 혼재했다. 침묵 끝에 한나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당신 형이 신경쓰잖아요.”

가난만이 아니었다. 한나의 말투, 걸음걸이, 웃음소리 그 모든 게 저택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에이든이 그렇게 이야기했다. 그로 인해 저택에 있어도 있는 게 아닌 것 같은 기분을 느껴야 하는 게 싫었다. 줄곧 속으로만 담아두던 말을 내놓은 것에 죄의식을 느끼는 것도 잠시 한나는 곧 가슴 아래서 들썩이는 감정을 억눌러야 했다. 목소리가 애처롭게 떨리는 걸 몇 번이나 바로잡았으나 쉽지 않았다.

“이제 모르겠다는 말은 하지 말아요. 아니, 여태 몰랐다면 이젠 당신도 알아야 돼요. 그가 얼마나 나를 싫어하는지… 당신 앞에서 날 망신 주려고 얼마나 안달이 나있는지.”

“한나.”

“당신은 가족이니까, 그러니까 에이든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나보다도 잘 알 거 아녜요. 당신도 알고 있었죠? 그가 나를 싫어할 거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나를 데려왔잖아요.”

“나는 당신이… 그한테 신경을 쓸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의 목소리는 늘 메말라 있었으나 지금 이 순간에까지 아무런 감정 없는 것은 혹독했다. 절망적인 기분이 되어 소리쳤다.

“리암, 내가 신경쓰는 건 당신이에요!”

그는 여전히 목석처럼 서있었다. 무슨 짓을 해도 동요하지 않고 이해하지 않는 그 태도가 참을 수 없이 미워졌다. 이를 악물고 리암의 어깨를 밀치자 그는 평소와 달리 비틀거리며 걸음을 물렸다. 그의 등이 문에 부딪히는 것도 신경쓰지 않고 한나는 주먹을 쥔 채 그의 가슴께를 퍽퍽 두드렸다. 리암을 때리는 한나의 주먹도, 그것을 말리는 그의 손아귀에도 힘이 없었다.

“아무도 당신만큼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아요.”

울음이 북받쳤다. 그 한 마디에 리암의 손아귀에 살짝 힘이 실리는 것을 느꼈다. 개의치 않고 맞서 팔에 힘을 주었다.

“내가 그 사람한테 왜 잘 보이려고 했는지 모르겠어요? 생전 처음 보는데다가, 나한테 관심도 없고 무례하기만 한 그 남자한테, 내가 왜 그렇게 한 마디 못하고 쩔쩔매면서 기분을 맞춰줬는지 정말 모르겠냐고요!”

가득 고여 시야를 우그러뜨리던 눈물이 한나가 울부짖는 순간 끝내 뺨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자신이 듣기에도 처절하고 볼품없는 목소리였다. 분명 복도에까지 울려퍼졌을 것이다. 그리고 한순간 선명해진 시야 속에서 한나는 깊고 혼탁한 그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굳은 몸과 목소리, 이상할 정도로 무감한 표정 속 눈만이 그랬다. 그리고 한나는 갑자기 아주 기이한 것을 깨달았다.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게 아니라 너무 당황한 나머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당혹스럽고 놀라운 사실이었단 말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리암은 단지 자신이 너무 복잡한 사람으로 느껴지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에게 내가 너무 많은 것을 요구했던 것일까…….

그러나 좌절 뒤에는 초라한 환희가 찾아왔다. 그의 견고한 침묵과 무감한 표정이 무심함을 의미하진 않는다는 사실에 한나는 그저 안도했다. 날카롭던 호흡이 차츰 힘없이 무너지고 뺨의 젖은 자국을 따라 다시금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한나는 리암에게 손목을 붙잡힌 채 흐느꼈다. 그 끝에 신음처럼 가느다란 고백이 흘러나왔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니까…….”

“…….”

“…이럴 거면 나를 왜 데려왔어요?”

한 번 입 밖으로 내고 나니 그토록 어려웠던 질문은 칭얼거림처럼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리암의 손에 힘이 풀리자마자 한나는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제발 말하라며 재킷의 깃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무거운 침묵 끝에 머리 위에서 낮은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한나,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어. 그야 나는…….”

그러나 안쓰럽게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한나는 돌연 대답을 듣기가 두려워졌다. 충동적으로 발꿈치를 들고 그의 양 뺨을 손으로 감싸쥐었다.

눈을 질끈 감고 입술을 부딪치자 지팡이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목석에 입술을 비비는 듯한 기분도 잠시, 리암은 말을 잇는 것을 포기하고 한나의 허리를 끌어안고 고개를 숙였다. 입 안은 자신의 눈물로 얼룩져 온통 짠 맛이 났다. 몸이 뒤로 기울자 가늘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쏟아져 한나의 뺨과 어깨를 간지럽혔다. 손끝에 닿는 머리카락을 빗어내리자 리암의 몸이 반사적으로 뻣뻣하게 굳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 리암은 문에 기대있지 않았다. 한나가 다리를 뒤로 무르며 끌어당길 때마다 온순히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그를 안은 채 비틀거리다 다리가 매트리스에 닿자 한나는 자연스럽게 침대로 몸을 기울였다. 보스턴에서도 그들은 종종 이런 식으로 몸을 겹쳐 눕고는 했었다. 그녀가 이끄는 대로 차츰 몸을 숙이다 결국 한쪽 무릎으로 시트 위에 올라 앉은 리암이 그제야 입술을 뗐다.

간신히 트인 숨을 들이쉬며 한나는 훌쩍였다. 뒷머리가 시트에 닿아 헝클어졌다. 얼굴은 축축했고 몸은 더웠다. 격앙된 감정이 쉽게 가라앉지 않는 까닭이었다. 손을 올려 리암의 뒷덜미를 더듬어보면 그 또한 다르지 않았다. 늘 열이 많은 그의 살결은 따뜻했다.

그러나 한나와 리암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숨을 고르기만 했다.

섣불리 말을 떼기 힘든 분위기가 이어졌다.

“……더 안 해요?”

실은 도무지 그럴 기분이 아니었는데도 한나는 넌지시 물었다. 그녀가 그렇게 종용하면 리암은 대체로 거절하지 않았다. 여태껏 한나는 그것이 자신을 향한 애정의 증거라 믿어왔다. 그러나 리암은 행위를 진전시키는 대신 제 아랫입술을 한 번 물며 미미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그의 망설임이 길어질수록 차츰 휘몰아치던 감정이 가라앉고 그 빈자리로 허탈함이 밀려들었다. 한나는 결국 어정쩡하게 얼굴 근처에서 맴도는 그의 손을 밀어냈다.

“됐어요, 그만해요.”

그리고 입가에 번진 립스틱 자국을 지워주려 무심코 손을 뻗었다가 도로 거뒀다. 그를 노려보며 한나는 손등으로 젖은 얼굴을 문질러 닦았다.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잖아요. 억지로 시킨 것도 아닌데.”

그럼에도 리암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한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끝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으면서 그저 그녀가 화난 표정을 짓고 있기 때문에 자리를 뜨지 못했다. 한나는 심란한 기분을 이기지 못하고 그를 발로 밀어내며 침대로 기어들었다. 아예 모른 척 등을 돌리고 이불 속에서 몸을 웅크렸다.

“제발… 아무것도 못 할 거면 그냥 나가요. 당신이 날 너무 괴롭게 만들어요.”

그러자 한참이나 우두커니 서 있던 인기척은 곧 조금 급하게 방향을 돌렸다. 그가 지팡이를 주워들고 불규칙한 걸음소리로 서두르더니 조심스럽게 문을 걸어 잠갔다. 그러고서도 그의 걸음소리는 한참 동안이나 방문 앞에서 서성이다가, 곧 그의 방으로 차츰 멀어져갔다.

그를 사랑하기에 여태껏 외면해왔던 사실이 하나 있다. 이 저택을 견디기 힘드게 만드는 것은 에이든이 아니었다. 에이든이 자신을 외면할 때, 혹은 돌아보고 비난할 때, 한나가 홀로 있을 때, 햇빛이 들지 않는 복도의 끝으로 걸어 들어갈 때에 그녀를 끊임없이 괴롭히던 것은… 리암이었다. 한나는 눈을 내리깔고 아무 말도 하지않는 그가 미웠다. 자신을 혼자 두는 그가 원망스러웠으며 눈에 띄지 않는 곳에 화실을 처박아둔 그가 모질게 느껴졌다.

비스듬히 쏟아지는 햇빛을 맞으며 한나가 기다렸던 것은 규칙적인 지팡이 소리였다. 매일 밤 자신의 방문 앞을 지나치던 그 소리가 오늘은 그치기를, 그리고 문을 열고 들어와 불을 낮춰주기를…….

 

*

 

리암의 무뚝뚝한 얼굴에 가끔 나타나는 표정은 한정적이었다. 당혹감이나 슬픔, 불쾌감 같은 것은 얼굴만으로는 도무지 알 수 없고 가끔 기쁜 소식을 받아볼 때에나 그의 기분이 느껴지곤 했다. 일전에 당황한 그를 처음으로 보게 되었지만 그리 유쾌한 기억은 아니었으므로, 한나는 처음부터 그런 일이 없었다는 것처럼 그 얼굴을 빠르게 기억 속에서 지워나갔다.

며칠 전에 다시 붓을 들었다. 막 저택에 머물 때부터 작업했던 그림 하나가 완성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캔버스가 크다 보니 함께 그리던 그림들이 차례차례 완성되어 나갈 때도 이 그림만큼은 화실 한 구석에 남아 천천히 건조되고 있었던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물감을 덧바를 때 조금 더 정성을 쏟아 건조하자마자 내걸 수 있게 했을 테지만 한나는 일부러 손봐야 할 곳을 몇 군데 남겨두었다. 그리고 건조가 다 되어갈 무렵 리암에게 오늘 그림을 완성할 것이라고 말했다. 리암은 여태까지의 그림과 달리 그 그림에만큼은 은근한 기대를 품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럴 때가 됐다고 중얼거리는 그의 얼굴에서 한나는 일말의 기쁨을 읽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날 화실에 들어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실로 오래간만에 지팡이 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문을 열어젖히는 리암과 눈이 마주쳤다. 그 눈 안에 오로지 그림에 대한 기대감만이 가득한지라 한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어린아이처럼 순진하고 솔직한 눈에 그녀 자신의 모습은 한 톨도 비치지 않아서, 웃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리암은 한나가 왜 웃는지 통 모르겠는 눈치였다.

한나는 손이 느린 편이었다. 지금만 아니더라도 종종 한 자리에 꼼짝 않고 앉아있어야 하는 리암이 걱정될 때가 있었다. 가끔씩 뒤를 돌아보면 리암은 처음 앉아있던 그 자세에서 조금도 자세를 고치지 않은 채 팔짱을 끼고 캔버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감고 있을 때도 있었지만 잠든 기색은 아니었다. 한나는 리암이 그렇게 맹목적인 모습을 보일 때마다 종종 그와의 첫만남을 겹쳐 보았다. 하루하루 먹고 살기가 힘들어 그림을 팔아 저녁을 먹던 시기였다. 오로지 값어치 있는 그림이라는 이유만으로 길거리의 아마추어에게도 웃돈을 얹어주는 사람. 리암이 고르는 단어 하나하나에서도 그가 이 분야에 얼마나 애정을 갖고 있는지가 느껴졌다. 그 이전에는 누구도 그녀의 그림이 가치있다고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리암을 만난 이후로 그림을 그릴 때마다 좋은 일이 잇따랐다. 다른 게 아니라 리암이 한나의 삶에 끼어들어 그렇게 만들었다. 그는 한나가 스스로를 대단한 사람으로 느끼게끔 해주었다. 잠자리에서 걱정이 아닌 기대를 담아 내일을 상상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리고 한나는 자신이 그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되기를 바랐다.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림은 완성된지 오래였다. 눈을 감은 리암의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으니 기척을 느낀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완성했어요.”

바람 소리조차 들려오지 않는 고요한 순간이었다. 리암은 한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림의 크기가 제법 큰 편이라 한 눈에 보려면 거리를 두고 보아야 했다. 리암과 한나는 캔버스와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나란히 서서 그림을 응시했다.

온도가 다른 두 숨소리가 엇갈리다, 한참 뒤에야 리암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 그림은… 탐이 나는군.”

기이하게도 한나는 그제야 비로소 그림을 완성한 환희를 느낄 수 있었다. 지금까지 그려왔던 모든 그림과 쏟았던 모든 시간에 오늘에서야 종지부가 찍히는 것 같았다. 그의 서재 벽에 걸려있는 그림은 한 때 졸작이었지만 지금은 한나가 제일 아끼는 작품이었고, 리암이 가진 유일한 한나의 작품이었다. 그 이후로 리암은 단 한 번도 한나의 그림을 소장한 적 없었다. 그가 호의로 웃돈을 얹어주지 않아도 그림은 제 값을 받고 팔렸으나 그것이 액수가 아닌 흔적으로 남는 일은 없었다. 제 그림의 가치나 미를 논하는 유창한 호평보다도 리암의 갖고 싶다는 한 마디를 기다리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나.

한나는 형체를 갖지 못하고 떠돌던 바람을 불쑥 입 밖으로 내뱉었다.

“당신한테 줄게요.”

그 말을 하고 나니 박혀있던 못을 뽑아낸 것처럼 후련해졌다.

“……뭐?”

“주겠다고요, 이 그림. 당신 덕분에 그릴 수 있었던 그림이잖아요.”

틀린 말이 아니라, 물감, 붓, 화실, 한나의 의식주 하나하나 전부 리암의 손을 거친 것이었다. 보스턴의 좁고 곰팡내 나는 아파트 안에서 하염없이 시간을 흘려보내며 이런 그림을 그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의 표현대로 리암은 자신이 한나를 지원하는 데에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았으므로 그가 그 말을 받아들이는 데에 조금 시간이 걸렸다. 한나가 그렇게 말할 거라 예상치 못했는지 놀란 얼굴이 낯설었다. 마음 속에 어렴풋한 승리감을 느끼며 한나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싫어요?”

“그럴리가, 오히려…….”

그의 목소리가 아득히 멀어지는 듯했다.

“……할 말을 찾지 못했을 뿐이야.”

혼잣말에 가깝게 중얼거리며 그가 그림 앞으로 다가갔다. 물감이 마른 캔버스의 귀퉁이를 장갑 낀 손으로 쓸어보다가, 길이를 가늠하듯 한 걸음 물러서서 위아래로 훑어보기도 했다. 잠깐의 시간이 지난 후 그가 혼자 결론내렸다.

“홀에 걸어야겠어.”

이윽고 돌아와서 몸을 숙였다. 한나의 뺨에 마른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 한나는 그제야 자신이 넋을 놓고 리암을 바라보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자신의 그림을 바라보는 리암의 눈에 애정이 담겨 있어서.

리암이 장갑을 벗고 물감이 말라붙은 그녀의 손을 매만졌다. 여느 때처럼 따뜻한 손길에 차츰 손끝까지 피가 돌더니, 곧 이상하리만치 잠이 쏟아지며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당장 의자에라도 앉아 잠들고 싶을 정도로 몸이 고단했다. 입술을 움직이는 것조차 어려웠으나 한나는 애써 입을 열었다.

“저기, 그러면… 나 먼저 올라가볼게요. 계속 집중을 해서 그런가 좀 피곤하네요.”

“식사를 올려보낼까?”

“아니에요, 그냥 눈 좀 붙이고… 정 배고프면 알아서 챙겨먹을게요.”

리암은 잠시 한나의 눈을 들여다보다 굳이 말을 덧붙이지 않고 천천히 손을 놓아주었다. 이윽고 문이 열렸다. 화실을 나서기 전 그에게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누군가 억지로 막기라도 하는 것처럼 생각이 이어지지 않았다. 말들이 머릿속에서 토막토막 떨어져 나갔다.

꿈을 꾸는 것처럼 내딛는 걸음 하나하나가 현실감이 없었다. 한나는 기묘한 부유감에 휩싸여 천천히 계단을 걸어올랐다. 무언가 큰 일을 끝마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액수를 붙일 수 없는 그림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한편으로는 그 그림을 액수로 논하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그런 그림을 그가 아니면 누가 산단 말인가.

복도에 달린 창 너머로 어둑한 숲을 내다보면 빽빽한 상록수 너머로 노을이 지고 있다. 하늘은 눈이 아플 정도로 주홍빛이었다. 한나는 그 광경에 시선을 뺏겨 한참을 서있다가, 곧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방금 전까지 저녁의 햇빛을 가득 머금고 있었을 방 안의 공기는 따뜻하고 또 숨이 막혔다. 열린 창문에서부터 숲의 냄새가 흘러들어왔다. 부드러운 바람에 실크 커튼이 나부끼게 둔 채로 한나는 침대 위에 쓰러졌다. 갓 말려 덮어놓은 이불은 포근하고 부드러웠다.

겨울이 가까워 오면서 저택의 벽난로는 늘 타올랐으나, 홀로 남아 있을 때면 불로도 몰아내지 못한 한기가 목덜미를 훑고 지나가고는 했다. 그 서늘함만은 저택에서 결코 씻어낼 수 없을 것 같아 내심 꺼림칙하게 여겼다. 그러나 오늘은 다르다. 창턱을 타넘어 뺨을 간지럽히는 바람에는 냉기 한 점 없으며 달콤한 크림빛 벽지에는 샛노란 빛이 비스듬히 드리워져 있었다. 앞으로도 이 저택이 이렇게 따뜻하기만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한나는 몽롱한 의식 속에서 자신의 손바닥을 문지르던 리암의 손을 떠올렸다. 장갑 안에 숨죽인 따뜻한 체온, 그 온기로 덥혀두었던 침대, 보스턴에서의, 아침, 뺨을 덮던 햇빛…… 그리운 늦여름의 미술관처럼…….

 

*

 

늦은 아침이었다. 저녁을 올려보내지 않은 건지 치운지는 알 수 없지만 눈을 떠보니 미지근한 토마토 스튜가 머리 맡에 놓여있었다. 저녁을 걸러서 그런가 새콤한 냄새에 입맛이 확 돌았다. 한나는 힘이 빠진 몸을 헤드에 기댄 채 가벼운 아침식사를 끝냈다. 얼마나 오래 잤는지 숟가락을 드는 손에도 힘이 없었다. 스튜를 먹으며 창문을 힐끔 바라보면 어제와 달리 빈틈없이 닫혀 잠금까지 걸려있었다. 몸이 차지 않은 것을 보니 아마 지난 밤에 누가 닫아준 모양이었다. 사용인들이 제 방에 드나들지 않으니 리암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을 물어볼 겸 씻고 편한 옷을 걸친 뒤 1층으로 내려가 보았지만 그와 마주치지는 못했다. 다만 홀의 높은 벽에 리암의 말과 달리 허전함을 겨우 가리는 작은 태피스트리 하나가 걸려있는 것을 보았다. 아쉬움도 잠시 한나는 어제 저녁으로부터 겨우 반나절도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그의 성격상 아무리 서두른대도 물감의 겉이 마르기 전까지는 그림을 화실에서 꺼내지 않을 것이다.

오늘은 저택이 이상하리만치 평화롭고 온화했다. 늘 몸을 무겁게 짓누르던 침묵도 한결 가벼웠으며, 사용인들은 복도를 오가다 한나를 마주치면 공손하게 목례했다. 마치 이 넓은 저택이 갑자기 자신의 것이 되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들은 어디로 간 걸까? 손님을 혼자 두고 말없이 저택을 비우기라도 한 걸까? 말이 안 되는 일인 걸 알면서도 한나는 무심코 그것을 진심으로 바라게 되었다.

긴 작업을 하나 마쳤으니 이제 당분간은 화실에 걸음을 끊을 생각이었다. 당장은 그림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오직 자신만이 열고 닫는 그 문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금세 피곤해졌다. 대신 한나는 난간을 잡고 계단을 오르며 앞으로의 일에 대해 생각했다. 도시의 소음이 없는 이곳은 꼭 다른 세계 같다. 그의 삭막한 감정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도 알 것 같았다. 그래도 겨울이 지나고 나면 이 스산한 저택도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봄이 되면 저 말라붙은 정원도 별 수 없이 새순을 피울 테니까. 하지만 그건 꼭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 없는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또한 대리석 조각상들이 서있는 황량한 정원의 풀이 푸른 빛을 띠는 광경은 좀처럼 그려지지 않았다.

보스턴이 그리운 것은 아니었다. 늘 빈곤하고 숨 쉴 틈 없던 좁은 아파트에서의 삶을 생각해보면 저택에서의 나날은 늘 풍족했다. 좋은 걸 먹고 입으며 그림도 마음껏 그릴 수 있었다. 리암은 한나의 좋은 후원자가 되어주었다. 설령 혼자 살게 된다고 하더라도 금전적인 어려움 없이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에이든은…….

2층 복도에 들어섰을 때 맞은편에는 에이든이 서있었다. 이어가던 생각이 자연스럽게 잦아들었다. 서로의 방문 앞에 서있는 탓에 스쳐 지나가야 하는 떨떠름한 상황이었다. 한나는 멀찍이 선 에이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은연 중 저택이 비어있기를 바랐지만, 날카롭던 분위기가 오늘따라 누그러진 건 그 또한 마찬가지였다. 늘 리암처럼 목 끝까지 여미던 옷깃,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는 걸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고집스럽게 다물린 입술 같은 것은 남아있지 않다. 갓 깬 행색을 한 에이든은 한나를 보고 잠시 멈춰섰으나, 곧 피할 수 없음을 깨달았는지 천천히 걸어왔다. 지나쳐갈 생각인지 한나를 완전히 무시한 채 걷는 그를 보다, 가까이 다가온 순간에 한나는 물었다.

“거긴 리암의 방 아닌가요?”

에이든은 한나를 지나치지 못했다.

“…형이 동생 방에 들르는 게 이상한 일인가?”

“이상하네요. 당신이 그렇게 대답하는 것도 말이에요. 그야 당신은 리암을 탐탁치 않아 하잖아요.”

“용건이 있었고 네가 알 필요는 없어. 괜한 트집을 잡을 거라면 가보지.”

말을 빠르게 그친 에이든이 몸을 틀어 복도를 막고 있는 한나의 옆으로 지나쳤다. 한나는 자기도 모르게 손목을 잡아챘다가, 그것을 빌미 삼아 한동안 한나의 무례함에 대해 지적하고 다닐 에이든을 떠올렸다.

그래서 그에게서 손을 뗄 생각이었다.

에이든이 황급히 한나의 손을 뿌리치지만 않았더라면.

그가 내친 팔이 아파오기도 전 자신이 잡았던 손목을 쥐어 품에 당긴 에이든이 눈에 들어왔다. 방금 전까지 뺨에 어려 있던 생기와 노곤한 졸음은 온데간데 없고, 이제 그는 평소처럼 핏기 없는 얼굴로 입술을 다문 채 한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모든 구석이 낯설었다. 구겨진 셔츠와 흐트러진 옷깃, 유달리 고요하던 저택의 아침과 틀어진 에이든의 일과… 그리고 리암의 향수가……. 그의 눈에서 숨길 수 없는 두려움을 엿보며, 한나는 자신이 다시금 열어서는 안 될 문 앞에 서있음을 직감했다. 그러나 그때와는 달랐다. 문 틈을 들여다본 그녀는 차라리 그것을 다시 닫고 모든 걸 잊고 싶었다.

그 격정적인 감정에 떠밀려 한나는 바람과 달리 한 걸음 다가섰다. 그를 맹렬히 노려보다 주춤거리며 물러서는 손목을 다시 잡아채 당겼다.

“똑똑히 말해요, 에이든. 내가 오해하기 전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한나.”

“모르겠다니!”

높고 날카로운 외침이 복도를 가로질렀다. 헛웃음을 터뜨리던 한나가 다시 한 번 그에게 바짝 다가서며 손목을 공격적으로 잡아챘다.

“그래요, 당신이 알 턱이 없죠. 짚이는 구석이 너무 많을 테니까!”

“목소리 좀 낮춰. 그리고 이거 놔. 지금 누구 앞에서 행패를 부리고 있는지 아나?”

초조한 낯빛을 한 채 그가 이를 악물었다. 한나가 목소리를 높일 수록 에이든의 목소리는 낮아지고 있었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탓에 그의 보랏빛 눈동자는 유달리 서늘해 보였다. 그러나 그가 적개심을 드러낼 수록 한나의 의심과 망상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리고 어쩌면 그게 의심과 망상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정신을 뒤흔들었다.

“이번에도 내 마음대로 생각하라고요?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기나 해요?”

이성을 잃고 퍼붓는 으름장은 실은 애원에 가까웠다. 한나는 자신의 망상이 처참히 깨지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녀의 손을 떨쳐내려는 에이든의 손에는 충분한 힘이 없었다.

“리암이 방에 있는지 확인했을 뿐이야. 그러니까 그만 좀 해……!”

“비겁하게 굴지 마요! 거짓말도 성의가 있어야……!”

그 순간, 바닥을 매섭게 내리치는 소리가 한나의 말끝을 집어삼켰다.

누가 입을 틀어막기라도 한 듯 에이든과 한나는 동시에 멈췄다.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친 것도 잠시, 에이든이 먼저 고개를 돌려 계단을 바라보았다. 복도를 쪼개는 듯한 그 소리는 다시 들려오지 않았으나, 저 아래서 누군가가 계단에 첫 발을 내딛는 소리가 났다. 묵직하고 느린 발걸음 사이로 무언가가 규칙적으로 바닥을 두드리고 있었다.

밑에서부터 리암이 걸어 올라오고 있다.

그 순간 에이든은 한나에게 붙잡힌 것도 잊고 못 박힌 듯 그 자리에 서서 계단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이 왜 그렇게나 불안해 보이는지 한나는 비로소 짐작할 수 있었다. 목소리를 높여가며 싸우는 와중에도 둘 다 차마 입 밖으로 내놓을 수 없었던 그 답을 리암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도 내뱉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나도 실은 늘 리암이 두려웠다. 애써 묻어놓았던 것을 예고 없이 파헤치는 사람. 누군가에게는 들키는 게 두려운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아는 게 두려운 것이나, 그에게는…….

리암은 제법 오랜 시간을 들여 계단을 올라왔다. 바깥에서 들어온 건지 겨울 공기를 한아름 몰고 들어온 그에게서 싸늘한 냄새가 났다.

“에이든.”

그 이름을 부르는 리암의 목소리는 늘 부드러웠다.

“방으로 들어가.”

아이를 다루듯 다정한 명령조에 한나는 말을 잃었다. 에이든은 평소처럼 짜증을 내는 대신 넋이 나간 채 천천히 물러섰다. 한나의 손 안에서 그의 손목이 맥없이 빠져나갔다. 하얀 살갗에 남은 손자국이 선명했다. 리암은 처음으로 한숨을 쉬었고, 장갑을 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가 다시 눈을 들었을 때는 한나와 눈이 마주쳤다.

“저택에서는 큰 소리를 내지 말라고 했잖아.”

마치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 숨소리조차 나지 않는 아주 고요한 정적 속에서, 문득 그의 어깨 너머로 에이든과 눈이 마주쳤다. 리암이 느끼지 못한 수치심과 죄악감을 홀로 뒤집어쓴 그의 형제가 그곳에 서 있었다.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한 그를 보며 한나는 끝내 체념하고 말았다. 차라리 끝까지 속아 넘어갈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 날 밤 엿들었던 문 너머의 목소리를 잊고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지냈더라면 그 누구도 이 상황에 놓일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나는 그러지 못했다.

에이든은 결국 한나를 지나쳐갔다.

그의 방문이 부드럽게 닫히는 것을 신호로 한나와 리암은 걷기 시작했다.

“리암.”

“…….”

“내 편이 되어줄 수는 없는 거예요?”

“당신이 에이든에게 편을 가를 이유는 없어.”

평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목소리였다. 한나는 이 순간 자신의 머릿속을 지배한 생각을 뿌리째 뽑고 싶었다. 자신을 한없이 괴롭게 만드는 그 생각을 바닥까지 긁어내 리암에게 던져놓고 잊어버리고 싶었다. 느껴본 적 없는 이 혼란과 통증은 그의 몫이어야 했다. 어떻게 이렇게 태평할 수가 있지?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내게 비수를 꽂을 수가 있는 거지? 그러나 한나는 마땅한 자격이 있음에도 그 질문을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수가 없었다. 어떤 단어조차 입에 담을 수가 없었다. 가엾을 정도로 둔한 그가 마침내 그 질문을 이해하고, 아무런 죄악감 없이 고개를 끄덕일까봐 무서웠다.

“당신이, 에이든의 편이면… 안 되잖아요. 내 말은… 당신이 그와… 그 사람이랑…….”

숨을 조금 헐떡이자 리암이 걸음을 늦췄다. 차분히 숨을 고르는 동안 한나는 쥐어짜낸 일말의 용기를 완전히 잃고 입을 다물었다. 눈 앞은 하얗게 바랬고 귀에 들리는 것은 심장 박동 소리가 전부였다. 그러나 한나는 조금 더 걸어야 했다. 현기증을 참으며 내딛는 걸음이 무거웠다.

방 앞에 서자 그가 당연하다는 듯 문을 열어주었다. 정신을 간신히 붙든 채 문턱을 넘는 순간 등 뒤에서 무뚝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볼 기운이 없어 한나는 불 꺼진 방에 길게 드리운 하얀 빛을 바라보았다. 그의 그림자는 한나의 뒤에 미동 없이 서있었다.

“내가 그의 편이라고 해서 당신 편을 들지 않는 게 아니잖아.”

리암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한나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그가 싫었다.

“그렇지만 기억해. 아무리 당신이라도 두 번은 없어.”

그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채 내뱉는 것들은 늘 충분한 답이 되었으므로.

“저택에서는 소리 지르지 마.”

리암이 내뱉지 않은 대상이 누군지 한나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걸쇠가 걸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

 

해가 지고 있었다. 한나는 기계적으로 일어나 저녁 식사를 향하러 식당으로 향했다. 평소와 달리 목까지 꽁꽁 싸맨 리암이 에이든의 곁에 앉아 고기를 썰고 있었다. 다 익히지 않은 붉은 고기가 흰 접시 위에 맥없이 나뒹굴었다..

입을 벌려 고기를 한 점 밀어넣던 리암이 접시에 고정한 시선을 천천히 들었다. 한나는 리암을 바라보았다. 그 어둡고 두꺼운 옷감이 외려 그 아래 몸을 또렷하게 덧그렸다. 그러나 그 광경은 더이상 내밀하지도 달콤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녀의 소유가 아니었으므로.

저택의 한기가 기어올라 그녀의 속을 뒤흔들었다.

한나는 뻣뻣하게 굳은 채 서 있다가, 몸을 돌려 식당 바깥으로 걸어나갔다.

 

*

 

날이 좋으면 미술관은 그야말로 문전성시였다. 지금 미술관에 들어가면 물고기떼마냥 꾸역꾸역 사람들이 걷는대로 밀려다니며 물흐르듯 그림을 힐끔 보고 지나가야 한다. 그림을 느긋하게 보고 싶은 사람들, 혹은 우글거리는 인파에 일찍이 의욕을 잃은 사람들은 미술관 근처 그늘에 판을 벌려놓은 아마추어들의 그림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실 말이 좋아 아마추어지, 보스턴 미술관의 위용과 그 장엄한 코린트식 기둥 앞에서도 뻔뻔하게 그림 팔이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보통 호평을 좀 받아본 사람들이다. 방문객들은 자못 기껍게 그림을 구경했다. 가끔 선심 쓰듯 그림을 사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미술관으로 거의 출퇴근을 반복하고 있는 한나 로페즈는 가끔 미술품을 보러 들어갈 때도 있었지만 방문객에게 그림을 팔 때가 더 많았다. 20대의 마지막 1년을 보내고 있는 그녀의 인생에서 돈은 제일 큰 지분을 차지했다. 그녀가 손꼽히는 수전노거나 세속적인 인간인 것은 아니다. 하루 쉬면 하루 굶어야 할 정도로 가난할 뿐이다. 혈기왕성한 20대 초반 잠깐 머물 요량으로 입주했던 스테판 스트리트의 아파트 한 칸은 9년의 시간이 지나며 한나가 숨 돌릴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되어있었다.

며칠을 내걸어도 좀처럼 팔리지 않던 작품 한 장은 이미 한나의 마음속에서 졸작이라 낙인 찍힌 이후였다. 이젤 맨 위에 붙여놓은 골판지 가격표는 이미 두 번이나 조잡하게 줄을 그어가며 고친 흔적이 있었다. 이미 충분히 손본 가격이라는 느낌을 주기 위해 그대로 두었다. 실제로도 상당히 내려간 가격이기도 했으니까. 그늘이 움직일 때마다 번거롭게 이젤과 캔버스를 한 걸음씩 옆으로 옮겨가며 한나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에 연거푸 손부채질을 했다. 바람이 쌀쌀해질 무렵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해가 중천을 지나고 나면 광장의 돌바닥에서부터 잔열이 푹푹 올라왔다.

온종일 바깥에 서있는 게 힘들어질 때마다 한나는 얼려온 물을 홀짝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관리가 잘 된 정원과 그 날의 전시를 알리는 현수막, 바람이 불 때마다 휘날리는 성조기. 관람이 끝나고 우르르 나오는 사람들과 꼭 그만큼 밀려 들어가는 사람들. 그 사이에는 미술관을 제 집처럼 들락거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친숙해진 얼굴들이 있었다. 가령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온종일 주차장을 배회하는 주차요원이나 늘 웃는 얼굴을 한 신입 로비 매니저, 제법 오래 연명하며 똑같은 곳에서 그림을 파는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도.

그렇게 한 걸음 물러서 숨을 돌리는 시간만큼은 그림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가끔 멈춰서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들이 그림을 사겠다며 말을 걸어온 적이 없으니 대담하게 무시하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젤 앞에 서있는 그림자를 못 본 척 했다. 그러다 그가 생각보다 오랫동안 떠나지 않자 힐끗 바라보았고, 직후 입 안에 남은 차가운 물을 간신히 삼키며 급하게 뚜껑을 닫았다. 한나가 앞에서 난리를 피우든 말든 그 남자는 양 손을 지팡이의 손잡이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은 채 그림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녀가 아는 얼굴이었다. 이 젊은 큐레이터가 연 전시회에는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고가의 미술품들이 꼭 몇 개씩 끼어 있었는데, 근 몇 달 미술관이 한적해질 일이 없었던 것 또한 그 때문이다. 사실 그녀에게는 그의 얼굴보다 뒷모습이 더 익숙했다. 그는 가끔씩 전시회장에 나타나 직접 배치를 지시했을 미술품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고는 했던 것이다. 그러나 액자 가격마저 판이한 미술품들을 보다 왔을 텐데 무엇이 그의 걸음을 잡아끌었을까. 무례한 걸 알면서도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응시하던 그가 한참 후에 한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설마 그가 길거리에서 아마추어의 그림을 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기대를 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아니나 다를까 그는 기대와는 다른 말을 내뱉었다.

“50달러에 팔 건가? 이 그림은 더 비싸게 팔 수 있어.”

좀 배웠다는 사람들이 하는 소리란 고작 그런 것이었다. 그래도 붓질이 싸구려라느니 가격이 높다느니 괜히 한 마디씩 던지는 방문객들보다야 전문가의 건조한 호평 한 마디가 나았다. 한나는 맑은 웃음을 터뜨리며 뒷덜미로 손을 밀어넣어 목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냈다. 그리고 여전히 웃음을 띤 얼굴로 팔짱을 끼고 그를 올려다 보았다. 키가 얼마나 큰지 우스꽝스러운 자세가 되지 않으려면 두어 걸음 물러나야 했다.

“그거 고맙네요, 덕분에 웃었어요. 그렇지만 길거리에서 이런 그림을 50달러 넘게 주고 사겠다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을걸요?”

“지나치게 저평가하는군.”

“그럼요, 그래야 사람들이 사가니까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처지라 아무도 안 사면 곤란해요. 살 거 아니면 슬슬 비켜주지 그래요?”

마지막 말은 기분 나쁘라고 한 말이 아니었다. 한나는 정말로 이 그림을 팔아야 오늘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다만 한 손을 들어 살랑살랑 흔들자 고집스러워보이는 눈이 가늘어졌다가 도로 돌아왔다. 의도치 않게 자존심을 건드린 걸까, 기우였는지 모르겠지만 그의 표정은 그녀가 틀렸다고 말하는 듯했다.

한나는 입을 꾹 다문 채 모른 척 어깨를 으쓱였다. 고작 그 정도로 기분이 상할 위인은 아닌 것 같았으나 어째선지 떠나지 않고 계속 서있는 것이다. 이상하리만치 긴 침묵이 사람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참고 참다 안 가냐며 한층 퉁명스럽게 쏘아붙이려던 찰나, 그가 품에서 지갑을 꺼내들었다.

“사지. 마지막 작품인가?”

결벽이 있는 것처럼 하얀 면 장갑을 낀 그의 손가락이 지갑을 벌리고 지폐를 셌다. 손가락 사이에 빳빳한 지폐가 세 장 집히는 것을 보며 한나는 그러면 그렇지, 성급히 넘겨짚었다. 자존심은 있지만 정작 자신이 사자니 제 값 내긴 아까운 심정이겠거니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 내민 지폐를 받아들자마자 한나는 진심으로 경악하고 말았다. 그가 꺼낸 것은 정말 한 번도 손 탄 적 없는 새 지폐였으며, 생소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100달러짜리 지폐를 뽑아 들고 다니는 사람이 실재했던 것이다.

한나가 지폐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만지작거리든 말든 그 남자는 그림에만 관심을 둔 채로 기웃거렸다. 그대로 두면 그가 액자를 맨손으로 들고 갈 참이라, 퍼뜩 정신을 차리고 허겁지겁 남은 종이 가방에다 액자를 넣어주었다. 인사 한 마디 없이 가방을 들고 돌아선 그가 잔디밭을 천천히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한나는 그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가 주차장에 발을 들일 때쯤이었다.

“잠깐만요! 들어다 줄게요.”

비록 남자가 지팡이를 짚고 있으며 한쪽 다리를 절뚝이긴 했지만 그는 객관적으로도 전혀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 상태였다.

뒤를 돌아보는 그의 눈썹이 들썩이는 것을 무시하고 한나는 이젤을 내버려둔 채 서둘러 뛰어왔다. 가까이 다가가자 묵직한 향수 냄새가 훅 끼쳤다.

“방금 전에는 미안했어요. 덕분에 돈을 벌었으니까 식사 한 번 살게요. 그래도 되죠?”

가볍게 목소리를 띄우며 한나는 그의 손을 아무렇지 않게 겹쳐 잡았다. 얇은 면장갑 아래 단단한 손등과 손가락이 느껴졌다. 결벽이 있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그는 한나의 손을 쳐내지 않았다.

그리고 해가 저문 저녁, 그의 차 조수석에 앉아 키스했을 때도 그는 얌전히 받아들였다. 가끔씩 가지런한 치열이 맞부딪혔지만 그것도 꽤 기분이 좋았다. 한나는 부드러운 손끝으로 그의 눈가를 매만지며 표정을 살폈다. 이름은 리암 앵글로스, 여자를 아주 모르는 사람은 아니다. 그의 눈동자에 깃든 우울함은 비단 금욕적이게까지 비쳐졌지만 리암은 욕망을 피해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다. 순순히 꺾여준 그를 보며 기회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만약 이대로 그와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다면 더할나위 없이 좋을 것 같다.

그렇지만 그를 붙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한나는 객관적으로 매력적인 여자였다. 그녀의 눈과 뺨에서 엿보이는 생기는 사람들의 이목을 잡아끄는 힘이 있었다. 그러나 리암에게는 딱히 효과가 없을 것 같기도 했다. 이마에 크게 박힌 이질적인 흉터를 엄지로 문지르자 그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 눈이 자신 너머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는 것 같아 한나는 확신이 없어졌다.

어쨌든 그 때의 리암은 자신에게 맞춰줄 용의가 있었으므로 한나는 기꺼이 목적지를 틀었다. 데려다준다고 했던 리암도 별 말 없이 자신의 집으로 차를 몰았다.

리암의 침구는 명백히 고급이었다. 맨살에 닿는 이불은 부드러웠고 매트리스는 몸을 단단히 받쳐주었다. 모처럼 비싼 침대 위에 모로 누운 한나는 턱을 괴고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박물관 근처에서는 정장 차림이 아닌 리암을 본 적이 없었기에 그의 편안한 차림이 어색했다. 오늘 처음 만난 사람에게 아무런 허물없이 내보이기에는 내밀하게 느껴졌다. 그런 감상에 취해 그 날의 한나는 말이 많았다.

“정말로 300달러 씩이나 되는 그림이었어요?”

“그림을 오래 그린 것 같던데. 그 정도는 받아야지.”

“큐레이터죠? 이 앞 박물관에서 일하는.”

리암은 대답하지 않았다. 한나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어나갔다.

“유명한 박물관이잖아요. 거기서 일하면 작품도 많이 보고 좋겠어요. 몇 살이에요?”

“스물 여덟.”

“젊네. 나보다 나이가 많을 줄 알았는데.”

그리고 침묵이 이어졌다. 정적 속에서 한나는 여전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검은 새틴 가운 위로 드리워진 길고 가느다란 머리카락은 창백한 금색이었다. 살갗도 그랬다. 빛을 받지 못해 희멀건 살갗 아래로는 푸른 핏줄이 비쳐보였다. 그의 껍데기를 벗겨 속을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 과분한 즐거움으로 느껴졌다. 그 시기의 한나는 리암을 잘 알지 못했지만 그 광경이 모두에게 허락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만은 알 수 있었다.

왜 고단한 삶을 살아온 사람들은 짧고 달콤한 유혹에 너무도 쉽게 넘어가는 걸까. 쉽게 주어지는 것은 결코 없다는 현실을 알면서도 자꾸만 가느다란 희망에 걸어보게 되는 걸까. 어쩌면 한나는 먼저 말하지 않고 기다릴 수도 있었다. 그에게 여지만을 남겨둔 채 다시 스테판 거리의 좁다란 아파트로 돌아가 그림을 팔 수도 있었다. 그리하여 그가 다시 자신을 찾아오는지 시험하며 안전을 기해도 됐을 것이다.

분명.

“내 그림이 마음에 들면 다음에 한 번 더 만날래요? 한 장 더 팔 테니까, 당신은 돈을 내는 대신 저녁을 사고 날 재워주는 거예요. 집에 들어가기도 싫고 지갑 사정도 변변찮거든요.”

그러자 리암이 고개를 돌려 한나를 바라보았다. 그 침묵은 여전히 긍정의 뜻을 내비치고 있었는데, 뒤늦게 생각해보면 리암은 평소에도 소리를 내어 대답하는 일이 드물었다.

몇 번의 만남이 이어지자 한나는 더이상 자신의 집에 들어가지 않게 되었으며, 리암은 어떠한 날을 계기로 밖이 아닌 안에서 식사를 대접하게 되었고, 그림은 리암의 말대로 조금 더 비싼 값에 팔려나갔다. 모든 것이 흠 없이 정리되어 있는 그의 집에 한나는 단 하나의 오점이 되었다. 그녀가 바라던 대로 리암은 한나에게 각별한 호의를 베풀었다. 모든 게 이상할 정도로 쉬웠다. 밤이 되면 어둠과 함께 묻어두었던 현실과 불안이 뒤섞여 몰려왔지만, 한나는 눈을 감고 안주했다.

그리고 여전히 그림을 그렸다. 한나가 묻기 전에는 아무 말 없는 리암이지만 그림을 받는 날만큼은 매번 앞서서 그림에 대해 논평을 해주었다. 그 말미마다 리암은 종종 자신이 없어도 스스로를 가치 있게 평가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는 남에게 도통 흥미가 없어 보였으므로 당시에는 그의 입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게 신기하게만 느껴졌었다.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단순한 격려가 아니라, 리암이 없는 순간을 끊임없이 전제하고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자신의 부재를 예고하고 있었다. 리암은 만난 이래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한나는 그에게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간과한 대가로 한나는 벼랑 끝까지 몰렸다. 어디에 서있는지 알아버린 이상 그 아래로 떨어질 수는 없었다. 좌절과 슬픔에 휩싸인 채 까마득한 안개 속을 내려다보면, 암녹색 침엽수가 둘러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 그림 같은 저택이 하나 서있었다.

 

*

 

며칠간 숲 부근은 습하고 볕 들지 않는 날이 이어졌으나 비가 내리지는 않았다. 그동안 한나는 방에 틀어박혀있다가 늦은 시각에 식사만 대충 마치고 다시 올라오는 하루를 반복했다. 이른 저녁에는 화실에 들러 아무렇게나 펼쳐놓은 화구들, 캔버스들을 차곡차곡 정리하고는 했으나 그 짓도 몇 번 하다 그만두었다. 리암 때문이었다. 그는 가끔 화실에 들르는 듯했으나 한나에게 언질을 주지 않았으며, 그가 지나다닐 수 없는 좁은 틈이 조금 더 벌어져있는 것으로나 그의 방문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화실의 열쇠는 리암에게도 있었으므로 한나는 문을 잠그는 대신 화실을 내버려두는 쪽을 택했다.

식사를 거른 그녀를 위해 사용인이 덥힌 와인을 한 병 가져왔을 때 한나는 울고 있었다. 리암이 전하라 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한나는 자기도 모르게 뾰족한 목소리로 받지 않겠다고 소리쳤다가, 곤란해하는 모습을 보고 목소리를 누그러뜨려 마시겠다고 말을 고쳤다. 그 와인은 향이 정말 좋았다. 그러나 가끔씩 주어지는 달콤한 보상에 만족하며 영원히 이방인으로 살고 싶지는 않았다. 따뜻한 와인을 두어 잔 마시고 나니 금방 잠이 올 것 같아, 한나는 몽롱한 기분으로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리암의 옆얼굴을 떠올려보았다.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온기를 품은 얼굴도 아니었다.

떠나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니 모든 게 쉬웠다. 머지 않아 한나는 짐을 싸기 시작했다. 오래 걸리진 않았지만 설령 그녀가 한나절 동안 짐을 챙긴대도 리암은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리암이 준 걸 모두 뺀 짐은 초라해보일 정도로 작았다. 리암이 선물한 트렁크가 자신의 신세에 맞지 않게 크고 무거웠던 것을 기억했다. 화구가 들어있던 천가방을 비우고 얼마 안 되는 옷가지들을 쑤셔넣었다. 물감과 붓을 다시 마련하려면 당분간은 허리를 졸라매고 살아야겠지만 차라리 며칠 굶을지언정 그에게 어떤 빚도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 늘 그랬다. 자신에게 간절한 것은 누군가에게는 발에 채일 정도로 널린 것이고, 자신이 받은 호의가 그에게는 스쳐지나가는 눈길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그에게는 이 모든 게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있었다.

복도 끝의 방문을 열어젖힌 것은 반쯤은 충동적이었다.

“사람 하나 살리는 셈 치고 말해주는 건데, 여기서 살아서 좋을 거 없을 거예요.”

에이든과의 대화는 늘 그런 식으로 시작되었다. 한나가 먼저 입을 열지 않으면 에이든은 끝까지 그녀를 쳐다보지조차 않았다.

“리암이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요. 날 여기 데려온 이유도 딱히 없다는 것도요. 그런데 당신은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애라도 되는 것처럼 하루종일 트집을 잡기 바빴죠.”

“…….”

“그런데도 내가 당신한테 말대꾸 하지 않은 이유는 당신이 멀쩡한 척 하면서 살고 싶어하는 게 눈에 보여서예요. 난… 당신이랑 잘 지내보고 싶었던 거라고요. 친해질 수 없다면 손님으로라도 대접해주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기다렸어요. 그런데 내 착각일 뿐이었네요.”

덧붙이는 마음이 가벼웠다. 에이든은 한나의 눈을 피하지 않았지만, 그 말에 대답하지도 않았다. 이제는 그 침묵이 넘어선 안 될 벽이라는 사실을 안다. 안 될 뿐 아니라 불가능했다. 그 사실을 깨닫고서야 한나는 비로소 견고한 저택의 울타리를 들여다보기를 포기할 수 있었다.

“리암은 영원히 당신의 편이겠죠. 그게 뭘 의미하는지 한 번 잘 생각해봐요. 어쩌면 당신도 이미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척 하고 있는 거겠죠…….”

저택에서 지내는 몇 달 간 한나는 단 한 번도 에이든의 방을 들여다본 적 없었다. 특히 어느 날 밤 새어나오던 저택과 어울리지 않는 온기가 한나로 하여금 그 안을 터부시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오늘에서야 들여다본 그 방에는 단지 하얀 햇빛과 오래된 가족의 흔적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 앉아있는 에이든은 그 자체가 저택의 일부인 것처럼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 광경은 상상하던 어떤 모습보다도 한나를 슬프게 만들었다. 한나는 문을 닫았다.

외출복을 껴입고 가방을 맨 채 빠르게 걸음을 옮기는 한나를 사용인들이 힐끔거렸다. 그러나 에이든이 한나를 붙잡으라 명령할 리 없었고, 리암은 외출 중이었다. 예상대로 누군가 그녀를 붙잡기는커녕 어디 가시냐는 물음 한 마디 없었다. 그들은 저택의 주인을 따라 움직이는 그림자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더 이상 남길 말도 없으니 미련 없이 저택을 나갈 예정이었다. 침엽수림 사이로 좁게 난 비포장 도로를 떠올리면 조금은 망설여졌지만 어차피 한나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저녁까지 리암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고, 열심히 걸으면 해가 지기 전에는 분명 시내에 도착할 것이었다. 그러나 시각을 가늠하며 마침내 홀에 들어섰을 때에 한나는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췄다. 못 보던 흑단 액자가 벽에 걸려 있었다. 기름을 듬뿍 먹인 나무 틀은 화려하지 않으나 묵직하고 위엄있었으며, 새겨진 부조물 곳곳에는 저택을 장식하던 굵은 넝쿨 음각이 눈에 띄었다. 그 액자가 품고 있는 것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한나가 그린 저택의 전신이 그곳에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기억하는 자신의 그림은 이렇지 않았다. 부분부분이 어우러지지 않고 각기 다른 모습을 해 꼭 캔버스가 조각이라도 난 것 같았다. 고민, 분노, 망설임과 혼란스러움이 전부 물감에 엉겨붙어 자국은 거칠었다. 겹겹이 쌓인 색은 전부 짙고 불투명했으며 저택은 노랗게 빛나는 창으로조차 그 안을 들여다볼 수 없을 것 같았다. 사람이 살고 있는 저택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보는 것만으로도 불쾌하고 엉망인 그림. 스스로가 그렸다는 사실조차 믿을 수 없어 한나는 충격에 휩싸인 채 멈췄다. 동시에 리암의 표정을 떠올렸다. 오로지 기쁨과 환희에 휩싸여 있던…….

잠자코 그 그림을 올려다보다 한나는 걸음을 돌렸다. 이제는 눈을 감고도 걸어갈 수 있는 화실로 향해 문을 열어젖혔다. 너저분한 바닥을 다리로 헤치고 들어가 집은 것은 커다란 양철통이었다. 뚜껑이 반쯤 열려있는 그 페인트 통은 쓸 일이 없어 한 번 연 이후로 엉성하게 닫아 방치해두었던 것이다. 그것을 쥐고 복도를 성큼성큼 가로지르자 이상한 낌새를 느낀 사용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제 와 멈출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누구보다 앞서 도달한 한나는 그림 앞에 바로 섰다.

누군가 다급하게 팔을 붙잡는 것을 뿌리치고 페인트통을 힘껏 휘둘렀다. 언젠가를 떠올리게 만드는 비명소리와 함께 검은 페인트가 그림 위로 쏟아졌다. 캔버스에 부딪힌 물감이 산산히 부서지며 사방에 검은 얼룩이 튀었다. 한나는 옷이 더러워지는 것도 개의치 않고 그렇게 몇 번을 더 끼얹었다. 두 번, 세 번… 양철통이 더는 아무것도 뱉어내지 않게 될 때까지. 마지막으로 대리석 바닥에 양철통을 내던졌다. 귀가 찢어질 듯 요란한 소리가 높은 천장까지 웅웅 울렸다. 그리고 천천히 잦아들었다.

그 때에는 소란과 비명도 차츰 잦아들어 종내에 홀을 채우는 것이라고는 경악에 젖은 이들의 침묵과 자신의 거친 숨소리가 전부였다. 한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정적 속에서 그림 속 저택을 올려다보았다.

어둠에 뒤덮인 바커스의 저택을.

“내 그림이에요.”

분노와 슬픔으로 떨리는 목소리를 억누르며 눈물을 참았다. 눈가에 붉게 열이 오르고 억울한 흐느낌이 목구멍에 꽉 차올랐지만, 울지 않았다. 돌아선 한나는 사용인들을 바라보았다.

“내가 그에게 준 그림이라고요.”

그들은 모두 똑같은 옷차림을 한 채로 옹기종기 서서 한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러 쌍의 눈은 전부 똑같은 빛을 띠고 있다. 한나가 저택을 거역했다고 입을 모아 외치는 듯했다.

“주는 것도 뺏는 것도 내 마음이에요.”

그러나 한나는 그들이 자신을 내쫓게 두지 않을 것이다. 저택이 먼저 자신을 내치도록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 누구도 그녀에게 그럴 자격은 없었다.

한나는 가방을 고쳐 들고 그 광경에서 몸을 돌렸다. 성큼성큼 걸어나가 그대로 무거운 현관문을 힘껏 열고 계단 아래로 뛰어내렸다. 앞마당에 발을 딛자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가던 현관문이 마침내 맞물려 닫히자 거짓말처럼 사위가 조용해졌다. 새벽 이슬이 내려앉은 앞마당은 축축하고 싸늘했다.

비로소 모든 걸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택 부지를 완전히 나오기 전, 고개를 돌려 멀리서 바라본 저택은 한나가 그린 그대로였다. 그러나 삶은 그림이 아니라 부족한 부분을 채워넣을 수는 없는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종착하는 것은 곧 삶을 포기한다는 뜻이다. 한나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리암의 삶에 남는 것을 포기함으로써.

한나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숨을 고르며 메마른 뺨에 떨어지기 시작한 눈물이 새벽 공기에 식게 두었다. 이내 가방을 끌어안고 분주히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군데군데 구멍이 나고 허물어진 리암의 삶은,

견고한 외벽으로 그 모습을 숨긴 채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고 서있었다.

 

*

 

현관문을 열자마자 채 씻어내지 못한 페인트 냄새가 진동했다. 리암은 그 냄새의 근원을 찾아내지 못하고 멍하니 서있다, 불현듯 에이든이 기름 냄새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그가 들어왔음에도 부산스러운 홀은 좀처럼 잠잠해지지 않았다. 각자 손에 청소도구를 하나씩 든 채 분주하게 오가는 사용인들을 바라보던 리암은 이윽고 벽에 선연히 남아있는 검은 자국을 발견했다. 그 자국을 되짚어 오르면 나가기 전 사람을 시켜 걸어두었던 한나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그림은 지시한 대로 기울어진 곳 없이 가지런하게 걸려 있었으나, 아침과는 달리 완전히 검은 페인트에 뒤덮여 처참한 꼴이었다. 고작 밤하늘이나 창문 두어 개가 운 좋게 페인트 세례를 피해 그림의 정체를 짐작케 할 뿐이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이다.

리암이 에이든을 발견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저택이 영 소란스러울 때에도 홀의 계단에서 내다보는 게 고작이던 그가 오늘은 웬일로 자리를 피하지 않고 서있었다. 얇은 입술을 다문 채 그림을 올려다보는 표정이 묘했다. 리암이 천천히 다가가자 사용인들이 어쩔 줄 모르고 눈치를 살폈다. 계속 하라 가볍게 손짓하고는 에이든 옆에 나란히 서자 에이든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 여자가 도망쳤어.”

“도망쳤다니?”

“떠났다고. 내가 언젠가 이렇게 될 거라고 처음부터 말하지 않았나?”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 한나를 막 저택에 들였을 무렵, 그는 어차피 적응하지도 못할 여자를 왜 여기까지 데려왔냐는 이야기를 했었다. 그 때의 공기를 기억했다. 나이트 스탠드의 노란 불빛, 눈 앞에서 졸음에 취해 천천히 입술을 달싹이는 에이든.

그리고 고작 계단 몇 개 아래서 그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그녀는 남을 미워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그 이야기만큼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을 것이다.

그리고 리암은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다. 한나는 정말로 도망친 것이다. 리암에게 있어 에이든은 늘 옳았으므로, 그녀가 떠난 건 분명 에이든이 말한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리암은 왜인지 불쑥 얄궂은 생각이 들었다. 그 여자가 끝내 도망친 건 이 저택 때문만은 아닐 거라고. 당신이 그 여자의 마음을 뒤흔들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영원히 눈을 감고 살지언정 이 저택에서 결코 떠나지 않았을 거라고…….

그러나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이미 새까맣게 뒤덮인 그림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에이든이 툭 내뱉었다.

“아까워. 마음에 드는 그림이었는데.”

저 또한 그랬다. 그와 비슷한 감상을 공유하는 건 기쁜 일이었다. 리암은 고개를 조금 숙여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듯 속삭였다.

“다음에는 전시회를 보러 갈까. 더 괜찮은 그림이 많아.”

그제야 에이든은 시선을 돌려 리암을 보았다.

그리고 선선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한나 로페즈, 당신이 미처 챙기지 못한 그림을 보냅니다.

부디 건강하시오.

 

진심을 담아, 리암 앵글로스

립스틱에서는 화학약품의 맛이 났다.

얇은 안경알에는 살갗 자국이 남아있었다. 리암은 드물게 감정적으로 흥분한 상태였다. 바라지 않았던 고양감이었다. 도망치듯 문을 닫고 나오는데 익숙한 구둣발 소리가 들렸다.

에이든이었다. 그가 그 자리에 서서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 보고 있다. 리암은 변명하고 싶었다. 결코 바르지 않는 립스틱에 대해, 천박 하고 달콤한 향수 냄새가 진동하는 이유에 대해.

그러나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리암이 에이든을 사랑한다는 말은 옳다. 그러나 그녀가 스스로를 에이든과 비교하며 불안해 할 이유는 없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리암은 도무지 알수 없었다.

그는, 이렇게나 다른데…….

죄를 지은 것처럼 숨이 턱 막히고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를 끌어안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붉고 미끌거리는 흔적이 아무리 문질러도 장갑에 묻어나왔다. 이 꼴로는 입을 맞추는 것조차 할 수 없다. 그의 입술에 자신의 것이 아닌 다른 게 묻는다는 사실이 끔찍하게 싫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리암은 도망쳤다.

그리고 그가 자신을 보지 못하도록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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