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 진짜 가이드 맞아

근데 이런 시들시들한 아저씨가 뭐가 좋다고

made in heaven by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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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면 안 돼… 넌 이상군이고 난 가이드 협회원이야… 이만 돌아가……

싫어…

왜…

넌 나의 노예니까…… (이런 미친……)

파벨은 현기증에 큼직한 인쇄기를 짚었다가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리고 참지 못하고 그 인쇄물들을 한 움큼 들었다가, 태우지도 찢지도 못하고 책장 깊숙한 곳에 숨겨놓고 나왔다. 피해를 막으러 온 만큼 사적 감정에 치우쳐 누군가의 인쇄물만 파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다만 피에 불이 붙은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렸다. 어떻게… 어떻게 실제 사람으로 저런 상상을…….

*

5년이면 금수강산이 절반이나 변할 시간(절반밖에 안 변했어?), 자그마치 5년이나 가이드 일을 해온 파벨은 아직도 가이딩이 끝나고 나면 밤에 쉽게 잠들지 못한다. 그는 나이를 감안하더라도 고지식하고 순진하고 마음이 약했으며 가이드로 활동을 시작할 당시 사회생활을 하지 않은지 거의 10년에 가까웠다. 그를 서술하는 모든 단어가 서비스직에 부적합했다. 사무적으로 보았을 때 가이드는 현대 사회의 서비스직 중 최정점에 있지 않은가. 물론 모든 가이드가 친절하고 상냥한 것은 아닌데다가, 으레 통용되는 서비스라는 것을 제공하는 것도 아니지만…….

하여간 꽤 긴 시간 동안 휴지기를 가져온 파벨은 지금까지도 모든 것에 뒤쳐져 있었는데 그 예시 중 하나가 취미생활이다. 해가 지는 시간 고전 영화를 틀어놓고 잠기운에 취해 게슴츠레한 눈으로 화면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눅눅한 분위기에 눌려 어느 순간 잠들곤 했다. 거기다 최근 영화라고는 놀라울 정도로 아는 게 없고, 기껏 DVD 대여점에 들러서도 매번 비슷한 코너에서 휘적거리다 십 수 번은 돌려 본 쇼생크 탈출을 들고 돌아올 뿐이다. 그런 그에게 동인소설은 거의 금서에 가까운 자극과 충격을 안겨주는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미지에 대한 두려움보다 궁금증이 커졌을 무렵 파벨은 결국 정말 오랜만에 먼저 핸드폰을 꺼냈다. 친한 사람 중 제일 젊은(친하다고 부를 만한 사람이 한 명밖에 없었다) 사람이었다. 아, 그래서 요즘 젊은 애들이…… 뭐, 자비 출판을 한다고? 음, 자비 출판이 아니라…… 그냥 인쇄를 맡기는 건가? 그래서 그걸 누가 읽는데? 그렇지만 파벨은 거기까지는 알고 싶지 않았으므로 휴대전화의 자판을 톡톡 두드리다 여태껏 적은 문장들을 전부 지워버렸다. 두 시간 만에 답장을 독촉하는 문자가 날아왔다.

‘뭘 본 건데’

‘내가 등장하는 책’

‘가이딩 교본 같은 거 아니었을까’

‘ㅋㅋㅋ’

답을 촉구한 것과 달리 셴이 보낸 메시지는 그게 다였다. 파벨은 왠지 모를 수치심에 휩싸여 그가 조금이라도 조언을 해주지 않을지 초조한 마음으로 전화를 들여다보다 곧 포기하고 드러누웠다. 실은 답이 돌아오지 않는 이유는 뻔했다. 어떤 메타적인 이유로 나타난 찌라시는 어김없이 셴 앞에도 등장했고… 벽을 깨지 않는 선에서 셴이 가볍게 고민해본 결과, 결코 능숙하다고 할 수 없는 그의 가이딩 실력―파벨은 정말 많이 혼났다―이 교본으로 나올 리 없는데다가 이름 앞에 #복흑집착광공 같은 게 붙어서 돌아다니지 않는 걸 다행히 여기라는 이야기를 파벨이 알아들을 리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파벨은 현실이 너무 고되고 지친 나머지 이 일련의 해프닝을 금방 잊어버렸다.

사람은 책과 같아서 사람의 삶에도 발단과 절정을 오가는 굴곡이 수십 개는 존재한다. 물론 그 책에 등장한 절정이 앞서 이야기한 절정과 동일한 의미인지는 좀 생각을 해봐야 할 문제겠지만…… 아무튼 그게 적나라한 야설만 아니었다면 파벨은 내심 즐겁게 받아들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의 파벨으로선 실행할 일은 없겠지만 만약 이 책을 쓴 사람을 고소한다면 분명 본인이 승소할 것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Real person can sue you).

사람을 책으로 만든다면 단 한 권도 같은 첫 문장을 갖지 않을 것이다. 이 무례하고 노골적인 성인가 소설 또한 다음과 같이 명료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파벨 로스만은 센티넬을 증오한다.

이건 사실이 아니다. 파벨은 센티넬을 증오하지도 미워하지도 않는다. 애초에 정말 센티넬이 싫었다면 체질을 밝히지도 않았을 것이고, 설령 가이드로서의 일자리를 찾는다 해도 가이드 협회가 아닌 기드온에 지원했을 것이다. 사람을 미워하는 건 상당한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고, 비록 그런…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해도 그 사건에 고의성은 없다고 믿었다. 얼마나 많은 센티넬이 신인류의 구제책이라는 명목 하에 희생당했는가. 그들이 새로운 이상을 쫓는대도 이상할 건 없다. 그러니 파벨 로스만은 때로 그들을 원망하는 자신을 받아들이는 대신 자신의 이름 뒤에 붙일 서술로 다음의 선택지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파벨 로스만은 센티넬을 두려워한다.

사실 스스로가 매우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 날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자신을 가책한다.

그래서 가이드가 되었다.

적어도 그렇게 쓰여있었더라면 그 얄팍한 인쇄물들은 파벨에게 경멸당하는 일 없이 어쩌다 일부분 들어맞은 픽션 정도로 취급받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미 파벨은 그 책을 읽었고(생각보다 꼼꼼히) 가이드는 인권이란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그런 자기 연민에 빠져 돌아오는 길에 맥주를 몇 캔 사고 말았다. 물론 별다른 일이 없더라도 종종 술을 마시는 편이었지만 적당한 핑계가 있으면 마음이 편하다. 평소처럼 자학의 굴레에 빠져 손 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것보다야 나을 것이다.

*

오늘의 영화 역시 근 몇 년간 고전 명작으로 회자되던 작품이다. 이제는 옛날 일이지만 파벨은 이 영화가 개봉했을 당시 그녀와 영화관 의자에 나란히 앉아 손을 잡고 눈물 흘리며 본 기억이 있다. 돌이켜보면 꽤 즐거운 시간이었다.

맥주 두 캔 정도를 이미 비운 파벨 로스만은 멍한 눈으로 죽음을 앞둔 주인공을 바라본다. 그는 방금 막 자신의 목숨을 대가로 연인을 살리기로 결심했다. 혹독한 추위 앞에 희생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고, 끝내 눈감은 그가 천천히 어둠 속으로 잠겨 들어간다. 그리고 TV의 화면이 완전히 어두워진다. 파벨의 숨소리를 제외하고는 고요하기만 한 거실, 그 좁은 곳에서 어둠을 몰아내려는 듯 창 밖에서부터 인공조명들이 반짝거린다.

파벨은 다음 장면을 기다리며 세 번째 캔의 뚜껑을 손끝으로 긁었다. 틱, 틱 하는 소리 끝에 탄산이 새어나오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파벨은 아직까지도 이 장면을 맨정신으로 보지 못한다.

비극은 진부하고 고전적이다. 그런 불행은 지켜보는 이들에 의해 끊임없이 대상화되고 재해석된다. 그리고 파벨은 그 날 있었던 황당한 일을 전부 잊어버리고 비극적인 영화의 결말에 슬퍼하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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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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