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파리의 헬기 운전사

2021 블라디미르

made in heaven by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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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좌 사정보다 지갑 사정이 두둑한 블라디미르의 인생에는 그럴듯한 풍파가 없었다. 시꺼먼 정장을 입은 사내들에게 둘러싸여서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에게 있어서는 모든 게 벽 한 장을 사이에 두고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가 갖고 있는 천부적인 재능에는 자신이 초래하는 일에 태생 관심이 없는 무심함 또한 포함이었다.

블라디미르는 그늘로는 절대 걷지 않았다. 작품을 비추는 조명이 있다면 그 옆에 서서 이 작품이 얼마나 큰 값어치를 갖게 될지, 혹은 얼마나 큰 돌풍을 부를지 소개하는 게 전부였고 그 이상의 일에서는 철저히 관심을 껐다. 복잡한 일에는 무조건 얽히지 말자는 게 블라디미르의 신조였다. 그가 벌어들인 돈의 절반은 신변 보호 비용으로 빠져나갔다.

시체를 보는 건 처음이었지만, 바람 빠지듯 맥없는 총성 몇 번 정도에도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블라디미르는 생각했다. 예술에는 영 관심이 없는 사람 같아 보였어.

*

외계 생명체(블라디미르의 상식으로는 최선의 표현이었다)와 조우한 것치고는 헬기가 붐볐지만 기적이라기에는 죽은 사람이 태반이다. 사람들은 방금 막 장례를 치른 것처럼 멀거니 발치나 창 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블라디미르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새파란 남극의 하늘은 불덩이가 쏟아지던 지난 밤과는 너무도 달라 보여서 그는 아직 비현실에 갇혀있었다. 의식이 붕 뜬 것처럼 영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굳이 받아들이려고 하는 것보다 이렇게라도 스스로를 보호하는 게 나을 때가 있다. 그가 나름대로 익혀온 처세술이다.

아직 코 끝에서 매캐한 비린내가 가시지 않았기에 헬기가 조금만 기우뚱거려도 속이 울렁거렸다. 그래도 파일럿의 운전 실력은 뛰어난 편이었다. 블라디미르는 잠시 눈을 감았다.

굳이 알 필요 없는 것을 알게 될 때마다 그는 자신의 뛰어난 눈썰미를 탓했다. 분주히 움직이는 대원들 사이에서 목소리 한 번 높이지 않고 제 할 일에 열중하던 파일럿에게서 익숙한 모습을 찾아낸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블라디미르는 심지어 그 손에 붙잡히면 좀처럼 빠져나오기 힘들다는 사실도 기억해냈다.

친근하게 말을 붙여오는 그에게 분명 악연도 인연이라고 대답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사사로운 대화보다도 더 중요한 일이 있으니 악연이든 인연이든, 세 번이 아니라 열 번이라도 나타날 용의가 있었을 것이다. 반면 블라디미르는 대의보다도 자신의 기분이 우선인 사람이었다. 그게 문제였다. 블라디미르는 처음으로 자신의 태평한 사고방식에 약간의 수치심을 느끼며 품을 더듬어보았다. 구조용 헬기의 좌석은 생각보다 비좁았기에 안주머니에 있던 지갑과 만년필을 꺼내는 게 전부였다.

힐끔거리는 시선을 무시하고 가지런한 무릎 위에서 명함 뒷면에 휘갈겼다.

'폭행 상해. 합의 필요. 번호로 연락'

P.S. 언제든 받음.

창문으로 들이치는 바람이 명함이 날아가지 않게 붙잡고 있어야 할 정도라, 잉크는 종이에 닿자마자 말랐다. 꼼꼼히 온점까지 찍고 뚜껑을 닫은 블라디미르는 무심코 목을 더듬었다. 아직도 침을 삼킬 때마다 목 안쪽이 욱신거렸다. 다시 만나면…… 뭐라고 했더라. 하여간 그렇게 말해놓고선 아무 말이 없는 만큼 블라디미르도 부산스럽게 그의 생존을 알릴 생각은 없었다. 사실 그가 살아 돌아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특히 냉혹한 세상 사정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비상식적인 일들을 쉽게 믿지 않았다. 블라디미르와 달리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지도 않을 것이다.

손바닥만한 명함에 집중하는 그 잠깐 사이 호흡이 제법 흐트러져 있었다. 가슴이 시릴 정도로 차가운 공기를 천천히 들이마시며 블라디미르는 다시 창 밖을 내다보았다.

사람들은 그 승강장을 세계의 끝이라고 불렀다. 들뜬 마음으로 도착했던 항구가 차츰 가까워져 오는 기분이 영 무상했다. 손해에 아주 예민한 고객들이 주로 사용하던 만큼 이 항구는 한동안은 쓰일 일이 없을 것이다.

헬기는 비슷한 외양의 선박들을 지나치고도 한참을 날아 착륙하기 적합한 공터를 찾아냈다. 구조 작업이 끝나고 나면 보통 헬기는 다음 구조자들을 위해 있어야 할 곳으로 최대한 빨리 돌아가야 했다. 미리 나와있던 구조대원들이 아직 참극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생존자들을 한 명씩 인도했다. 이윽고 찾아온 블라디미르의 차례에 그는 바로 내리는 대신 불쑥 운전석으로 손을 뻗었다. 당황한 것처럼 몸을 트는 그의 제복 앞주머니에 손에 쥐고 있던 명함을 꽂아넣자 한결 홀가분한 기분이 되었다. 잘못 봤더라도 상관은 없다. 전화가 오면 사람을 잘못 본 모양이라 둘러대면 그만이었다.

자신보다 조금 작은 구조대원의 손에서 담요를 가져와 두르며 블라디미르는 천천히 걸었다. 하기야 노바에 탑승한 것만으로도 그에게는 충분한 도박이었다. 고객 유치는 명백한 실패로 돌아갔지만 블라디미르는 사사로운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싫어하지 않았다. 그처럼 입으로 먹고 사는 사람은 인맥 관리도 업무의 일환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앞서 걷고 있는 동승자들의 걸음을 바라보면 유독 비틀거리는 앤지의 조그마한 발이 눈에 밟혔다.

이런 일을 겪고도 그 때를 상기하며 서로 연락을 주고받을 사람이 있다면 말이다. 그에 비해 다니엘과 신도의 걸음은 멀쩡하기만 했다. 아무래도 가능성이 있는 쪽은 이쪽이었다. 기껏 얻어낸 번호가 무용지물이 된 건 아쉬운 일이지만.

이제는 각자의 거처로 돌아갈 일만 남았다. 헬리콥터의 프로펠러가 다시 박차를 가해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 즈음 블라디미르의 사고는 지금 이 순간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무언가에 홀린 듯 과거의 일을 되짚어보고 있었다. 굳이 지금처럼 목적을 갖고 연락처를 뿌리고 다니는 경우를 제외하고 생각해보면, 그를 직접 만나보고도 연락을 다시 주지 않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외려 번호를 얻어가는 사람도 종종 있을 정도였다.

그러면 블라디미르는 상대에 따라 개인 번호를 건네주거나 융통성 있게 거절하고는 했는데, 개중에는 블라디미르가 고민할 여지를 아예 뺏어버린 사람도 있었다. 자신의 기억에 없는데도 어디서 만난 적이 있다며 명함을 내미는 것이다. 업무용 명함을 들고 있는 것을 봐서는 분명 잊어버릴 인연은 아니었을 텐데…….

블라디미르는 돌연 자신을 부축하는 구조대원의 팔을 뿌리치고 몸을 돌려 달려가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당황스러운 목소리는 모터 소리에 금세 묻혔다. 아직 껍질이 덮인 것처럼 불투명한 정신과 달리 그간의 수난을 고스란히 받아들인 다리가 돌풍에 쉽게 휘청거렸다. 간신히 쓰러지지 않을 거리에서 블라디미르는 땅을 딛고 멈춰섰다.

"라일리!"

헬기의 소음이 여간한 게 아니라 일행은 물론이고 그에게조차 들렸을지 의문이었다. 검게 코팅된 바이저에 가로막혀 그의 표정을 살피는 것으로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개의치 않고 블라디미르는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 만난 적 있죠?"

산뜻하게 마음이 설레기에는 지나치게 거센 바람이었다. 블라디미르는 정신없이 헝클어지는 머리카락에도 개의치 않고 양쪽 귀를 손으로 막은 채 악을 쓰듯 소리를 질렀다. 한 번 상한 성대가 입을 열기가 무섭게 다시금 건조하게 쩍쩍 갈라져 연신 기침을 터뜨리면서도.

"당신 나한테 명함을 줬잖아요! 나는 준 적도 없는데, 나한테 소개 받았다면서……!"

그가 내밀었던 명함의 뒷면에 적힌 문구는 부정할 수 없는 자신의 필체였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몰라도 라일리는 이미 자신에게 답을 돌려주었다. 그것도 최악의 방법으로.

눈이 마주쳤다고 확신이 드는 순간 블라디미르는 반쯤 흘러내린 선글라스 너머로 눈을 부릅떴다. 이미 허공에 떠오른 헬기는 방향을 틀지도 다시 내려앉지도 않고 그 자리에서 부드럽게 기우뚱거리기만 했다. 위험하니 물러나라고 소리치는 대원들의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져 왔다.

그리고 끝내 그들이 블라디미르의 어깨를 붙잡고 끌어당길 때쯤에야,

그 파일럿의 굳게 다물린 입매가 매끄럽게 올라갔던 것이다.

라일리가 떠날 때 붙잡을 수 있는 사람은 대체로 없다. 그와 생판 초면이라고 해도 그의 지시에 군말 없이 따르게 되는 것은 눈빛에서마저 묻어나는 확신과 초연함 탓이다. 하지만 블라디미르는 달랐다. 오늘부로 그는 라일리를 알고 있었던 사람이 된다. 라일리의 생은 블라디미르에게 있어 완전히 미지수인데, 더욱이 그가 이 삶을 수십 번씩 반복하고 있다면 블라디미르는 스쳐지나가는 한 이름일 뿐이어야 하는데도!

블라디미르는 처음으로 남 앞에서 복잡한 감정을 느끼며 얼굴을 붉혔다. 지금 이 순간 그를 붙잡아 따질 수 없는 게 분했고 그의 농담에 아무것도 모르고 진심으로 상대했던 것이 부끄러웠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영역 밖에서 나타난 라일리와, 노바 호를 덮쳤던 재앙이 두려웠고, 복잡해질 걸 알면서도 순간의 감정에 휩쓸려 명함을 건넨 자신이 원망스러웠고, 또…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일말의 기대를 품게 된 것이…….

*

구조대원들에게 끌려가면서도 멀어지는 헬기를 힐끔힐끔 바라보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신도는 블라디미르의 돌발행동이 의아하면서도 별개의 용건이 있는 모양이었다.

"명함을 달라고 했네."

보기보다 참을성이 있는 건지, 불현듯 집착적으로 보이기 시작한 관심이 아직 꺼지지 않은 것인지 신도는 재차 부드럽게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군데군데 험하게 구른 흔적이 보이는 그 손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차츰 현실감이 돌아왔다. 망쳐버린 크루즈 여행을 그나마 만회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블라디미르는 코트 주머니에 손을 꽂아넣었다가 문득 불길한 직감에 뻣뻣하게 굳었다.

없다. 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서는 허전하기만 한 주머니를 하염없이 더듬다 고개를 든 블라디미르는 애매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명함 케이스를 잃어버렸네요. 방금 마지막 명함을 다른 분한테 드렸거든요."

번호를 찍어드리면 안 될까요? 형편없이 갈라진 목소리가 조금은 우습게 들렸다. 블라디미르는 최선을 다해 온순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구조대원한테까지 수작을 부리는 난봉꾼 취급만 면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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