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뉴패치] Interview on Christmas

기자 매뉴얼×배우 패치

아무 지식 없이 선동과 날조로 이루어진 연예계 언론계...

...이게 뭐지? 크리스마스에 올리고 싶다는 일념으로 의식의 흐름대로 썼읍니다 어 이거 이상한데? 싶으면 아마 당신이 옳을 겁니다

봐주세용

! 애들이존대함


12,24

잔잔하게 흐르는 음악, 사람들의 웃음소리, 작게 속삭이고 또 크게 외치는 소리, 유리잔이 부딪치는 소리, 함께 축하하는 소리.

창밖의 하늘에는 별이 떴다. 오늘 밤에는 눈이 내리지 않을 모양이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따위는 물 건너갔군, 하며 매뉴얼이 샴페인을 홀짝였다. 비싼 술이라지만 혀에 감기는 단맛과 청량감이 매뉴얼에게는 텁텁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아무래도 그에게는 이런 것보다야 회사 앞의 싸구려 술집이 맞았다.

“정신 똑바로 차려라, 괜히 추태 부리지 말고.”

“어련하려구요, 선배님. 제가 취하는 건 못 보셨잖습니까.”

“술잔만 붙잡고 있으니 믿음이 안 가서 하는 말이다, 엉?”


제 사수의 말에 매뉴얼은 보이지 않게 입을 삐죽였다. 몸에 맞지도 않는 옷을 억지로 껴입고 있는 기분이니 당연하지. 여기에 아는 사람이 있길 하나, 연줄이 있길 하나. 뒷배도 뭣도 없는 말단 기자일 뿐인데 누굴 붙잡고 수다라도 떨려고. 매뉴얼은 목을 갑갑하게 조여오는 넥타이를 매만지다 살짝 풀어냈다. 이곳으로 나오기 전부터도 몇 번이고 당부하던 그의 사수는 누군가 아는 사람을 만났는지 매뉴얼을 두고 홀랑 사라져 버렸다. 제게 오는 시선이 없다는 걸 확인한 매뉴얼이 넥타이를 조금 더 풀고, 내친김에 셔츠의 단추 하나도 풀어 버렸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여길 박차고 나가며 벗어던지고 싶었으나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최선이었다.

하늘에는 잘 보이지도 않는 별이 뜨고, 매뉴얼이 서 있는 이곳에도 별이 가득 떴다.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의 주연으로 이름 날린 배우, 작품에 이름만 올렸다 하면 흥행을 만들어 버리는 영화배우, 잔뜩 거느린 팬들이 만들어준 유명 웹드라마의 주연이던 어느 아이돌. 그리고 그가 데려온 듯한, 잘 나간다는 아이돌 그룹의 멤버들. 그리고 그들의 매니저들과, 여기저기서 회장을 감시하는 경호원들과, 황송하게도 이곳까지 초대된 기자들. 넓은 파티장은 사람과 사람과 사람으로 가득했다. 연말을 맞아 열린 연예인들의 파티에는 그 소식을 지면으로 실어 나르려는 기자들이 잔뜩 몰려들었고, 그들 중 몇몇은 화려한 무대 뒤의 더 화려한 파티에 초대받았다. 올바른 행동과 수줍은 웃음을 기다리는 대중의 시선은 벗어던져 버리고, 이해관계가 맞는 자들끼리 모여 서로의 앞날을 해치지 않을 것을 약속하는 자리. 매뉴얼의 사수는 이곳에서 주기적으로 인터뷰와 각종 소식을 물어다 줄 떡잎 커다란 신인을 잡으라며 그를 이곳에 데려와 주었다. 매뉴얼이 보기에는 이것도 그저 하나의 커다란 활극일 뿐이었지만.

지금 이 모습을 찍어다 내보내면 크게 한탕 칠 수는 있겠네. 세간에서는 서로 안면이 없어야 마땅한 인물들이 한데 모여 즐겁게 대화하는 모습을 보던 매뉴얼이 샴페인으로 입을 축였다. 원해서 들어온 업계라지만, 연예지 기자를 지망하던 건 아니었으니 큰 감흥이 없는 게 당연했다. 이곳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그의 사수가 들으면 땅을 치고 울 소리였다. 내가 이런 데에 발 들이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귀가 따갑도록 들었던 말을 떠올린 매뉴얼이 쓴웃음 지었다. 단지 입사 성적이 너무 좋았다는 이유로 내려주는 편애는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얼마나 더 성질을 죽이고 살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는데.

예의를 갖추느라 오랜만에 꺼내입은 정장이 답답했다. 파티장의 한구석, 사람들이 주의 깊게 바라보지 않을 만한 벽에 붙어 선 매뉴얼이 무감한 눈으로 주변을 훑었다. 저기는, 대형 소속사에 몸담으신 분이니 말 걸어봤자 별 소득도 없을 테고. 저 사람은 떠오르는 신인이지만 이미 다른 기자가 여럿 붙었다. 사수가 말한 대로 누구라도 잡아 보려면, 이미 성공 가도에 발을 올린 이로는 부족했다. 아직 어떤 빛도 받지 못한 사람이라야 다른 이들이 눈독 들이고 있지 않을 터였다. 조건에 맞는 이를 찾아 눈을 굴려보던 매뉴얼은 옅은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여기 분위기 정말 적응 못 해 먹겠네.

사회부 기자가 되려던 꿈을 몇 번이나 꺾어 먹고 도착한 곳이 여기였다. 대형 신문사의 면접을 몇 번이나 말아먹고, 높은 성적 덕에 입사했다가도 비윤리적인 행태에 질려서 스스로 박차고 나온 적도 있었다. 돌고 돌아 도착한 곳은 신문사도 아닌 어느 잡지사였지만, 덩치가 작은 덕에 남의 치부를 가려준다거나 다른 이들의 기사를 생각 없이 베껴 쓰는 일만은 면할 수 있었다. 대신 흥미 없던 연예인들의 인터뷰를 따고 화보 촬영장에서 뒤치다꺼리도 종종 해 줘야 했지만, 일감 하나 없던 시기에 비하면 감사하지. 종종 답답한 마음이 가득 차오를 때마다 매뉴얼은 눈을 질끈 감고 그것을 털어냈다. 여기서마저 쫓겨나면 진짜 이 바닥 떠야 해.


“.......”


매뉴얼은 파티장을 둘러보던 눈을 살짝 찌푸렸다. 공기는 점점 달아오르고 있었다. 웃음소리는 점점 높아져 가고, 벌써 모습이 보이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자리를 일찍이 떠 버린 현명한 이들을 부러워하며, 이만 집으로 돌아가 쉬고 싶다는 생각에 돌아올 마음이 없어 보이는 사수의 뒤통수를 눈으로 좇던 그의 시선 속으로 어떤 빨강 머리가 들어왔다. 머리뿐만 아니라 귀도, 얼굴도 붉어지기 시작한 것이 위태로워 보이는 그 사내 역시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신인일지 매니저일지, 매니저라면 저렇게 방만해도 되는 것인지, 하릴없이 다른 생각만 하던 매뉴얼은 비틀거리는 그 사람의 모습에 놀라 손을 움찔거렸다.


“저기요.”

“네, 필요하신 게 있으십니까?”

“저분을 좀 도와드려야 할 것 같은데요.”

“어느 분을 말씀하시는지….”


그가 불러세운 웨이터는 도통 그 남자를 찾지 못하고 헤매었다. 그 사이 어느 여자에게 말을 건네고는 바깥으로 나서려는지 돌아서는 남자를 불안하게 바라보던 매뉴얼은, 그가 균형을 잡지 못하고 휘청이다 바닥으로 무너지려 하자 더 견디지 못하고 달려 나갔다.


“어머!”

“…하하, 이 사람이….”


겨우 허리를 다시 곧추세운 것이 무색하도록 남자를 끌어당겨 안아 든 매뉴얼은 제게 와닿는 시선에 머쓱하게 미소 지었다. 매뉴얼도, 그의 품 안에 쓰러진 남자도 모르는 이라는 걸 확인한 시선들이 하나둘 떨어져 나가자, 매뉴얼은 남자를 질질 끌고 제가 있던 구석으로 향했다. 이 사람의 일행을 찾아 주어야지 택시라도 태워 보낼 수 있을 성싶었다. 만에 하나 정말 매니저면 어떡하냐, 자기가 먼저 정신을 놓아 버리다니 업무 태만이구만, 하던 매뉴얼은 웨이터의 뒤늦은 안내를 받아 발코니로 남자를 끌고 나갔다.


“이봐요.”

“…….”

“이봐요, 정신 좀 차려 보슈.”

“…으음….”


살을 에는 칼바람에, 매뉴얼이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까지 더해지자 가물가물하던 남자의 눈이 조금 또렷하게 매뉴얼을 올려다봤다. 선명한 푸른 눈이 아까보다는 괜찮아 보인 덕에 매뉴얼은 내심 안도하며 말을 걸었다.


“일행이 누구예요? 데려와 드리려고.”

“일행… 왜요?”

“주무셔도 집에 가서 발 뻗고 주무셔야 할 거 아니유. 누구 데려왔어요?”

“우리 누나….”


발코니에 마련된 벤치에 늘어지듯 걸터앉은 남자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 행복해 보이는 미소에 매뉴얼은 이 사람이 누군가의 숨겨진 애인일지, 아니면 정말 우애 깊은 형제일지 따위를 고민해야 했다. 이 비밀이 터뜨려도 될 만한 것인지,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위험한 종류인지도. 말 한 마디만으로 매뉴얼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어 버린 남자는 그런 매뉴얼의 속내는 모른 채 실실 웃고만 있었다.


“우리 누나… 예쁘죠.”

“…그 누님이 누군데요.”


작게 묻는 매뉴얼의 목소리에 남자는 고민도 없이 이름 하나를 뱉었다. 거물이라면 이 사람 입이 돌아가든 말든 내버려 두고 튀어야지, 하던 매뉴얼은 상대의 이름을 듣고는 바짝 긴장하고 있던 마음을 내려놓았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재능있는 신인 여배우의 이름을 들으니 이 남자가 여기서 취해 쓰러질 뻔한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이런 곳이 처음이겠구나, 나처럼.


“기다리고 있어 봐요. 외투 가져다드려요?”

“불러오지 마요.”

“왜요?”

“누나가 오고 싶어 했으니까….”


매일같이 그랬는걸. 연말 시상식에서 상도 받아보고, 뒤풀이 파티에도 가 보고 싶고, 자기 얼굴 박힌 포스터 앞에서 사진도 찍고…. 지금이 가장 행복할 텐데. 누나한테 말했으니까 신경 쓰지 마요… 나 술 한 잔만 가져다줘. 이제는 찬바람에 발갛게 언 귀를 한 남자가 헤실헤실 웃었다. 매뉴얼은 그 천진한 말에 어이없이 웃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십쇼.


“샴페인… 맛있던데.”

“안 돼요.”

“그쪽은 왜 여기 있어요?”

“그쪽 추태 부리는 거 막는다고요.”

“그만 들어가요.”

“가 봤자 할 일 없수.”

“으음….”


남자가 매뉴얼을 올려다보며 눈을 살짝 찌푸렸다. 매뉴얼의 얼굴을 자세히 보려고 한 행동 같았지만, 그가 빛을 등지고 선 탓에 별 소득은 없어 보였다. 끄응 앓는 소리를 내는 남자의 찌푸려진 얼굴을 바라보며 매뉴얼은 문득 담배나 피우고 싶다는 생각이나 떠올렸다. 아쉽게도, 주머니에 든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가서 아는 얼굴 많이 만들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기자 아저씨.”

“…그건 어떻게 알았는데요?”

“내가 아는 사람이 아니라서.”


여기서 지내다 보면 웬만한 사람들은 모두 알게 된다고, 남자는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아주 낮지도, 가늘게 높지도 않은 목소리는 듣기 좋게 부드러웠다. 일어날 생각은 없어 보이는 모습으로, 붉어진 코를 찡긋거리며 웃다가, 다시 잔잔한 미소를 띠며 눈을 내리깔곤 하는 남자를 보던 매뉴얼은 짧은 고민 끝에 남자의 옆에 털썩 앉았다. 그가 빛을 가리고 서 있던 탓에 자리를 비켜서자 남자의 위로 조명이 쏟아졌다.


“…왜 안 가요?”

“그쪽 잠들면 누님 불러오려고요.”

“원래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많아요?”

“글쎄요, 후배들은 제발 관심 꺼 달라고는 하던데.”


매뉴얼은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했지만, 남자는 그 말에 작게 웃었다. 매뉴얼이 하는 말이 즐거워 견딜 수 없다는 듯이 남자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 사람 괜찮은 건가, 싶어 매뉴얼이 그를 돌아다볼 정도로. 반짝이는 파티장의 불빛을 보던 매뉴얼이 곁으로 시선을 돌리자, 언젠가부터 그를 보고 있던 남자의 푸른 시선이 마주쳤다.


“이름이 뭐예요?”

“…왜 물어봅니까?”

“기억해두게.”

“여기 남아 있으면 어련히 만나겠죠.”

“우리 누나, 잘 봐줘요.”

“누님을 되게 좋아하시네.”

“가족이니까.”

“동생 분이요?”

“패치에요.”

“…더이펙트 매뉴얼입니다.”

아, 하고 감탄할 때는 남자의 붉은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 잘 부탁드린다며 인사를 건네올 때는 날카롭게 그려진 눈매가 부드러이 휘었고, 어울리지 않을 것만 같은 따뜻한 미소가 매력적이게 그려졌다. 타고난 듯한 적발은 염색된 색보다도 더 짙고 아름답게 반짝였다. 남자는 제 남매를 닮지 않았으면서도 그에 못지않게 아름다웠다. 저도 모르게 남자를 바라보고 있던 매뉴얼은 그 사실을 깨닫고 고개를 돌렸다. 웬만한 미인에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초짜 티를 내 버렸다는 생각에 괜히 귓바퀴가 화끈거렸다.


“술 깼으면 들어갑시다.”

“갈 곳 없으면 여기 있죠, 그냥.”

“있을 테면 있으십쇼. 저는 집에나 가 봐야겠수.”


매뉴얼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남자도 따라 일어서는 소리가 들렸다. 매뉴얼은 그를 돌아보지 않고 발코니를 떠났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이만한 친절이면 되었지. 그런 마음에 파티장으로 들어와 사수를 찾으면서도, 눈에 밟히는 빨강 머리에게는 시선을 두지 않으려 노력했다. 양해를 구하고 파티장을 떠나며 본 그의 마지막 모습은 제 남매를 향해 미소 짓는 얼굴이었다. 발코니에서처럼, 어쩌면 그보다 더 부드러운 미소는 택시를 타고 돌아가는 내내 매뉴얼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12, 28


“선배. 패치라는 사람 아십니까?”

“패치?”



그의 사수는 그 이름을 처음 들어본다는 모양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패치, 패치… 하며 이름을 몇 번 되뇌는 모습을 보며 매뉴얼은 빠르게 기대를 버렸다.



“글쎄… 처음 들어보는데? 신인이야?”

“아뇨, 모릅니다.”

“왜?”

“신인인가 싶어서요.”



매뉴얼의 미적지근한 반응에 사수는 금방 관심을 거두고 모니터에 눈을 돌렸다. 전화 소리와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로 시끄러운 사무실에서, 파티션 사이에 숨은 매뉴얼이 포털 사이트의 창을 끄고 턱을 괴었다. 매뉴얼의 뇌리에 깊게 박힌 패치라는 남자는 인터넷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제 누이의 프로필에도 오르지 않은 이름을 되뇌던 매뉴얼은 아쉬운 마음으로 편집하던 기사 파일을 열었다. 디자인을 검수하며 겸사겸사 오탈자도 잡아내던 매뉴얼의 머릿속에는 문득 붉은 자취가 떠올랐다 사라지곤 했다.


그 사람, 모델이라도 했으면 인기 많았을 텐데.

아니지, 모델 일을 하기에는 키가 많이 작았던가.

그저 매니저로 남기에는 아쉬운데.











02, 27


매뉴얼이 몸담은 잡지사에서는 매달 한 권의 잡지를 펴냈다. 그 달 연예계를 휩쓸었던 각종 이슈들도 물론 담겨 있었지만, 그보다는 평론가에게 호평받은 영화를 소개하거나 스토리에 영감을 준 사건, 주연과 조연의 인터뷰 같은 것들에 더 무게를 두었다. 사건의 최전선에서 카메라와 녹음기를 들이밀며 뛰어다니던 언론사보다는 덜 숨 막히는 분위기가 처음에야 어색했다지만, 매뉴얼은 금세 그의 새 직장에 적응해 자리 잡은 편이었다. 



<배우 ○○○ 인터뷰 요청에 관한 건>



새해를 맞아 한 칸 옆, 제 사수가 있던 자리로 옮겨 간 매뉴얼은 버릇처럼 메일함을 정리하던 손을 우뚝 멈췄다. 메일 제목에 적힌 이름이 낯익은 탓이었다. 관심도 없던 연예인들의 얼굴과 이름을 이제는 슬쩍 보기만 해도 줄줄 외울 수 있게 된 것과는 조금 달랐다. 어디서 온 기시감인지 짚어 보던 매뉴얼은 곧 그 뿌리를 찾아냈다. 아, 이 사람.

그 사람의 누이?


메일 주소에는 낯설지만 낯익은 이름 다섯 자가 적혀 있었다. 달칵 눌러 열어본 메일에는 영화 개막에 앞선 홍보용 인터뷰를 청하는 내용이 정중한 어투로 적혀 있었다. 배우의 필모그래피와 영화의 내용까지 정리된 첨부파일을 열어본 매뉴얼이 턱을 괴고 메일 속 글자의 나열을 빤히 바라봤다. 파일의 주인공은 한창 인지도를 얻는 중이었다. 이런 작은 잡지사의 인터뷰 지면 하나에 목맬 사람이 아닐 텐데.











03, 15


“안녕하세요~”

“아, 반갑습니다. 매뉴얼입니다.”



사무실이 있는 건물의 카페에 앉아 있던 매뉴얼이 들어서는 이를 보고는 일어나 인사했다. 그가 청한 악수를 기꺼이 받아들인 상대는 환하게 웃으며 그에게 자리를 권했다. 상투적이지 않은 진심 어린 미소가 오랜만이라, 매뉴얼은 조금 놀라면서도 애써 티 내지 않고 인터뷰를 이었다.



“…마지막으로 해 주실 말씀이 있습니까?”

“음, 우선은 항상 지켜봐 주시는 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을 꼭 드리고 싶어요. 매번 드려서 질리셨을 수도 있는데. 저는 무명 생활이 되게 길었거든요. 그래서 지금 이 자리에 올 수 있게 해 주신 게 정말 감사하고, 음… 그리고 이 영화를 꼭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관객 분들께 전하려는 메시지가 정말 따뜻한 작품이거든요. 대본을 처음 받아볼 때부터 그렇게 느꼈어요. 지치고 힘드실 때도, 기쁘고 행복하실 때도, 위로와 즐거움을 얻어가실 수 있으실 거예요. 그리고 이 자리를 만들어 주신 더이펙트에게도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끝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음….”

“여쭤보실 게 또 있나요?”



그 말에 눈을 굴리던 매뉴얼이 흠칫 놀라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다른 게 아니라 그가 인터뷰 내내 집중하지 못했던 까닭이다. 잠시 어물거리던 매뉴얼은 제 앞의 상대와 근처에 앉은 매니저에게 눈길을 주고는 작게 말했다.



“…매니저분이 바뀌신 겁니까?”

“네? 아뇨, 원래부터 언니가 제 매니저였어요. 혹시 다른 분… 아.”



패치의 누이는 말하다 말고 이유를 알았다는 듯이 작게 웃었다. 그 웃음이 왠지 매뉴얼을 부끄럽게 만들어, 그는 입을 꾹 다물었다. 왜 이 작은 일로 이런 기분을 느껴야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인터뷰 요청은 제 동생이 했어요. 패치를 만나보셨어요?”

“예… 이전에 한 번이요.”

“크리스마스 때 맞죠? 다음날에 패치가 뭘 열심히 찾더라고요. 좋은 기자분 한 분 알았다고.”

“…그랬습니까?”



패치가 종종 제 일을 도와줘요. 그날도, 언니가 못 올 것 같대서 대신 따라온 거였어요. 덕분에 이렇게 연이 닿아서 다행이죠. 패치의 누이는 동생 이야기에 신이 나 밝게 웃었다. 그 웃음이 어딘지 낯익게 느껴져, 매뉴얼은 그들이 남매이긴 하구나, 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여 맞장구쳤다. 예에, 저희야말로 감사하죠, 하는 말이 이제 입에 붙어 다행이라고 생각할 때쯤 상대가 웃음을 갈무리하며 말했다.



“저희 동생 잘 부탁드려요.”

“예에, 제가 드릴 말이죠. 나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녜요. 발간되면 꼭 볼게요.”



상투적인 인사가 지나가고, 그들이 떠난 자리를 정리하던 매뉴얼은 문득 드는 의문에 고개를 갸웃했다. 고작 30분도 안 되는 시간을 마주하고 있었을 뿐인데, 누이에게 저를 소개할 만큼 신뢰하고 있었나.











05, 21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며 상영관의 불이 켜졌다. 짐을 챙기며 일어서서 떠나는 관객들로 부산스러운 상영관 속에서, 제일 뒷줄에 앉은 매뉴얼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음악과 함께 흘러가는 크레딧을 눈으로 훑었다. 익숙한 이름들 사이에서 찾던 이름을 발견한 매뉴얼은 눈을 내리깔고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확실히, 재능 있는 배우였다. 그의 무명 시절을 전부 알지는 못했으나, 그리 긴 시간을 묻혀 지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그는 영화에 잘 어우러졌다. 아마 한동안은 여기저기서 이름을 많이 보게 되겠지.


발간된 잡지를 보내주기 위해 연락하던 때가 떠올랐다. 연락을 받은 건 그 남자가 아닌 여성 매니저였다. 영화 잘 보았다고, 그 남자에게 연락해 볼까 생각하던 매뉴얼은 곧 마음을 접었다. 연락처라고는 메일 주소밖에 없었던 데다, 본인이 나온 것도 아닌 영화를 잘 보았다며 괜한 연락을 해 보는 것도 웃긴 일이었다.


매뉴얼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관객이 빠져나간 상영관은 조용했다.











05, 31


“어?”



무슨 일입니까, 하며 파티션을 넘어오려는 후임의 머리를 다시 집어넣은 매뉴얼이 다시 메일을 열었다. 메일의 내용을 훑어보던 그가 발신인의 주소를 다시 확인했다. 패치, 라는 다섯 자가 적힌 주소는 이전에 받았던 것과 똑같았다. 그런데, 제목이.



<배우 패치 인터뷰 요청에 관한 건>










06, 03


“선배, 혹시 패치라는 배우 아세요?”

“패치?”



그의 사수는 그런 이름을 처음 들어본다는 것처럼 미간을 찌푸렸다. 매뉴얼은 그런 그의 의자 뒤에 붙어서서 답을 기다렸다. 머릿속을 더듬어 보던 사수가 글쎄다, 하며 별다른 답을 주지는 않았지만.



“왜, 아는 사람이야?”

“인터뷰 제의가 왔는데요.”

“신인인가? 어디 나오는데?”

“영화인데 아직 개봉 안 했대요. 용사 주연에.”

“아, 그거.”



잠시 고민하던 사수는 이내 그에게 손사래 쳤다. 받지 마, 우리 지면 안 남아, 하는 말에 매뉴얼은 알겠다는 말을 남기고 제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혹시 몰라 다시 그의 이름 다섯 글자를 이곳저곳에 검색해 봤지만, 역시 나오는 건 없었다. 그는 아직 데뷔하지도 않은 신인이었다.

텅 빈 검색 결과를 보며 고민하던 매뉴얼은 이내 메일 창을 열었다.



<더이펙트 인터뷰 관련하여 답신 드립니다>










06, 17


“안녕하세요.”



패치가 제안한 곳은 시내의 한 프랜차이즈 카페였다. 어차피 지금은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도 없을 테니 괜찮을 것이라는 게 이유였다. 허락되지 않은 인터뷰였기에 사내 시설을 이용할 수 없던 매뉴얼도 제안에 선뜻 응했다. 회사에서 그리 멀지도 않고, 너무 시끄럽지도 않은 곳을 선택한 패치의 안목에 매뉴얼은 작게 감탄하며 주변을 눈으로 훑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 예, 실은 저를 기억하셔서 놀랐습니다.”

“사람을 외워야 할 일이 꽤 많더군요. 지난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아닙니다. 솔직히, 더 큰 곳에 가실 수 있었던 분이라 저희가 감사했죠.”



대화를 이어 나가던 매뉴얼이 맞은편에 앉은 이를 흘긋거렸다. 분명 붉은 머리에 날카로운 푸른 눈은 흐릿하던 기억 속의 남자가 맞는데, 그가 기억하던 것과는 다른 분위기에 고개가 자꾸만 모로 기울어졌다. 제 기억이 잘못됐나, 아니면 그날따라 기분이 너무 좋았던 걸까. 그러다 푸른 눈과 시선이 맞부딪치자 매뉴얼은 놀라 슬쩍 시선을 옆으로 비켰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뇨… 말투가 굉장히 사무적이시네요.”

“딱딱해 보인다는 말은 많이 듣습니다…. 그날은, 술을 마셔서 그런 겁니다.”

“기억하십니까?”



매뉴얼의 말에 패치가 하하, 멋쩍게 웃었다. 꽤나 창피했다는 듯이 그날은 죄송했다는 사과를 건네는 패치를 매뉴얼은 유심히 바라봤다. 작게 짓는 미소 한켠에 그가 눈에 담았던 부드러움이 서려 있는 게 보였다. 그날 만났던 사람이 맞구나.



“누나가 기사를 잘 써 줘서 고맙다고 하더군요.”

“아닙니다. 말씀을 잘 해주셨습니다. 준비해주신 것도 있고. 영화도 잘 보았고요.”

“보셨습니까?”

“조연인 게 아쉬웠습니다.”



짧은 대화가 이어졌다. 그의 누이가 출연한 영화의 이야기는 간단한 안부를 전하는 대화가 되었고, 매뉴얼이 그를 매니저로 착각했던 이야기로 흘러갔다. 매뉴얼이 패치에게 가벼운 사과를 건네고, 패치는 그런 일이 자주 있다는 말로 사과를 거절했다.



“그럼, 질문드리겠습니다.”

“예.”

“왜 인터뷰 요청을 하신 겁니까?”



매뉴얼이 인터뷰를 진행할 때면 늘 켜 놓는 휴대폰의 녹음 앱은 꺼진 채였다. 녹음 중이라는 화면이 없이 어두운 휴대폰에 슬쩍 눈길을 준 패치가 시선을 돌렸다. 옅은 침묵이 내려앉고, 그들의 대화를 가리기에 충분히 시끄러운 주변을 보던 패치가 입을 열었다.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06, 19


패치는 그날따라 입에 대지 않던 샴페인을 들었다고 했다.

사랑하는 누이는 계약을 착착 따내며 빛을 받고 있었고, 그의 형제들은 그런 누이를 스스럼없이 축하해 주었다고 했다. 패치도 그중 하나여서, 평소라면 거절했을 누이의 동행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했다. 화려한 조명과 반짝이는 장신구의 불빛들이 누이를 축하했고, 행복해 보이는 얼굴에 덩달아 들뜨는 것도 당연했다.



‘기억에 남은 게 그쪽의 이름 뿐이었습니다.’



참으로 친절한 사람이었다는 생각을 되풀이하며 집에 왔다고 했다. 그가 써낸 기사들을 찾아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했다. 누이의 이야기를 써줄 이가 그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메일을 보냈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매뉴얼에게 영화를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다음에 연락드리겠습니다.’



매뉴얼의 휴대폰에는 패치의 번호가 저장되어 있었다.

매뉴얼은 이마를 감싸 쥐었다. 물 흐르듯이 흘러가는 대화에는 딴죽을 걸 여지가 없었다. 패치가 배우로서 데뷔하는 것도 사실이었고, 비록 작은 역이지만, 그 능력을 인정받아 꽤 얼굴을 비출 수 있게 된 것도 사실이었다. 심지어 인터뷰도 제대로 진행했고, 패치는 제가 입소문을 타게 되면 언제든 실으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분명 때가 올 거라면서, 자신감을 내비치는 미소는 기억과는 달랐어도 매력적이었다.


매뉴얼은 연락처를 교환하자는 그를 거절하지 않았다.


공적인 일로 만난 이에게 사적인 영역을 허용해주면 안 된다는 걸 알았으면서도. 매뉴얼이 그 원칙을 잘 지켰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건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


매뉴얼은 푸우 한숨을 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내리감은 눈꺼풀 위로 패치의 얼굴이 스쳐 갔다.

거리를 잘 지키면 되겠지. 사수가 입 아프게 말하던 인맥이 되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자고, 매뉴얼은 다짐했다.











08, 30


매뉴얼은 상영관에 앉아 있었다. 그의 주변은 기대에 찬 목소리로 시끄러웠지만, 매뉴얼은 어떤 말도 없이 바른 자세로 앉아 스크린만을 응시했다.


패치는 그날 이후로 어떤 연락도 없었다. 사적인 관심이 있다는 것처럼 굴기에 매뉴얼도 정말 그가 연락할까 싶어 마음을 졸였건만, 그 혼자만 설레발친 꼴이었다. 그럴 거면, 만나고 싶었다는 말은 왜 한 건데. 내심 그의 연락을 기다렸다는 사실을 인정해버린 날에는 집에서 맥주도 깠다. 사회 물은 충분히 먹은 자식이 어린애처럼 설레했다고 놀림받을 게 뻔해 주변인에게는 말도 못 했다.


그렇게 청승 떨어 놓고는, 지금 이곳에 앉아 있는 것도 우스웠다. 그가 산 영화표는 패치가 나온다던 그 영화였고, 매번 제일 뒷줄을 짚던 손가락도 이번에는 객석 한가운데를 골랐다. 얼마나 잘 하는지 한번 보기나 하자는 마음은 솔직히, 핑계였다. 얼굴이나 보겠다고 영화관에 앉아 있는 제 모습이 한심했지만, 그렇다고 매뉴얼이 먼저 그에게 연락할 수는 없었다. 상대가 엄한 마음을 품은 게 아니라면, 괜히 시비 걸릴 여지를 만들어 주지는 말아야지. 이다음에 연락이 오면 영화 잘 봤다는 말은 할 수 있겠네, 생각하는 매뉴얼의 입꼬리에는 자조적인 미소가 걸렸다.


상영관에는 사람이 꽤 많았다. 아마 주연을 맡은 배우들이 쟁쟁한 덕일 터였다. 이만한 영화에, 단숨에 이름을 올린 그 실력이나 보자고. 그리 생각하며 앉아있다 보니 머리 위를 비추던 조명이 꺼졌다.


영화는 제법 괜찮았다. 한동안 갈피를 잡지 못한다는 평이 주류이던 감독의 연출도 상업 영화에 맞게 매끄러웠고, 줄거리도 조금은 뻔한 부분이 있었다지만 흥미로웠다. 직업병이라도 생긴 것마냥 영화를 뜯어보던 매뉴얼은 스크린이 붉은 빛으로 물드는 순간 숨을 멈췄다.


구석에 작게 등장하더라도 실망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처음 카메라 앞에 서는 배우에게 많은 컷을 할당해 주는 일은 드무니까. 그러나 지금, 장면을 휘어잡는 건 패치였다. 그의 단단한 목소리가 대사를 읊고, 푸른 눈초리가 예민한 예술가를 연기했다. 배역이 아닌 제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은 패치의 모습에 매뉴얼은 숨을 죽였다.


이 사람은 성공하겠구나.


패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저는 성공할 겁니다. 그 자신감 넘치던 말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성공할 테다. 수많은 배역을 소화해 내고, 모든 이들의 러브콜을 받으며 영화계의 혜성으로 오랫동안 이름을 떨칠 테다.

패치가 스크린에서 사라질 때까지, 매뉴얼은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08, 31


“예, 여보세요….”

“매뉴얼 씨?”

“…업무 연락은 사무실로 해 주십쇼….”

“업무차 연락 드린 건 아닙니다.”



아씨, 누구야…. 매뉴얼은 헛기침해 잠긴 목소리를 풀어내며 간신히 뜬 눈으로 발신인을 확인했다. 누군데 주말 아침부터 전화하는 건데. 친구놈들이었다면 당장 끊었을 텐데 존대하는 걸 보니 그것도 아니었고, 기억에도 남지 않은 친인척인가 싶어 부신 눈을 한껏 찌푸리던 매뉴얼이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패치 씨?”

“통화 괜찮으십니까?”

“어, 예, 음, 아까는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이른 시간에 전화 드렸는걸요.”



그으래… 다 들었구나. 누군지는 몰라도 잡아 족쳐 버리겠다며 꿍얼대던 것을 떠올린 매뉴얼이 화끈거리는 목덜미를 쓸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혹시 오늘 시간 되시나 싶어서요.”

“오늘이요?”



전화선을 타고 들려오는 패치의 목소리는 기억하던 것보다 조금 낮고, 차분했다. 괜찮으시다면, 이전에 드렸던 약속을 지키고 싶은데요. 그리 말하는 패치의 침착한 목소리를 듣는 매뉴얼은, 제발 수화기에는 소음이 들어가지 않길 바라며 이불을 걷어차고 있었다. 오늘 다른 일정이 있었던가? 가방을 뒤져 찾아낸 다이어리에도, 책상 위에 늘 놓여 있는 달력에도 별다른 표시는 없었다.



“그럼 오늘 오후에, 이전에 뵈었던 카페 앞에서 만날까요.”



전화가 끊어지고 고요해진 침실 한가운데에, 매뉴얼은 홀로 휴대폰을 든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건데?











“안녕하세요.”



혹시나 싶어 나가본 거리에는 정말, 패치가 기다리고 있었다. 눈에 띄는 적발은 검은 모자로 가린 채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던 패치는 매뉴얼을 발견하고는 먼저 인사해 왔다.



“…오랜만입니다.”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갑작스러웠어서. 일단 좀 걸을까요?”

“그… 잠시만요.”



검은 야구모자와는 어울리지 않는 셔츠에 슬랙스, 얼굴을 가리려는 용도인지 모를 도수 없는 안경까지 챙겨 쓴 패치를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보던 매뉴얼이 패치 뒤의 유리문을 가리켰다. 일단… 좀 앉죠. 이야기 좀 합시다.






“바빴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매뉴얼은 선수를 빼앗겼다. 커피 두 잔을 주문하고 돌아와 자리에 앉자마자 패치는 사과의 말을 꺼냈다. 연락 드리지 못해 죄송하다며, 매뉴얼을 바라보는 모습은 마치 매뉴얼이 그의 연락을 기다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듯했다. 그의 곧은 눈빛에 되려 할 말을 잃은 건 매뉴얼이었다.

패치는 말을 이었다. 그동안 오디션을 보러 다니느라 바빴다고 했다. 유명 감독의 영화에 떡하니 붙었던 것과는 별개로, 아무 노력도 없이 작품을 받기에 그의 경력은 짧다 못해 없다시피 했으니. 여러 번 오디션을 보고, 또 떨어지고, 그러다 운이 좋게도 어느 드라마의 작은 역을 맡을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패치는 진심으로 기쁜지 옅게 웃었다.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억지로 축하받을 생각은 없었는데.”

“아뇨, 축하할 일이 맞는데요.”



이제 매뉴얼이 물을 차례였다. 그러니까, 이렇게 저를 불러낸 이유가 뭐냐고, 물으려고 했는데.

매뉴얼은 지그시 혀를 물었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가 꺼낼 답변이 가늠이 되어서인지, 전혀 갈피를 잡지 못해서인지 알 수 없었다. 겨우 말 몇 마디만으로 제 속을 복잡하게 만들어 버린 당사자는 저렇게 태연히 앉아 있는데도.



“영화 보러 가시겠습니까?”

“…영화요?”



패치가 휴대폰을 꺼내 몇 번 두드리더니 매뉴얼에게 건넸다. 그의 화면에는 익숙한 포스터가 떠 있었다. 그를 본 매뉴얼이 어, 하며 외마디 소리를 내자 패치가 멋쩍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한 번은 영화관에서 보려 했는데, 같이 갈 사람이 없더군요.”

“…….”

“내키지 않으시면 거절하셔도 괜찮습니다.”

“그, 아니….”



차라리 거짓말을 할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매뉴얼이 늘 청렴함의 상징이라고 포장하던 솔직한 표정이 오늘만큼 야속할 수 없었다. 매뉴얼은 당장 어젯밤에도 마주했던 포스터를 앞에 두고서도 거짓말을 할 수 있을 만큼 능청스럽지 못해서.



“…이미 봤습니다.”

“어….”



매뉴얼의 말에 패치의 눈이 놀라 동그래졌다. 그 시선이 닿아 오는 게 느껴지자 매뉴얼은 괜한 부끄러움에 눈을 깜박였다. 관객의 기대가 높던 영화이니만큼, 비록 어제 개봉했다고 해도, 충분히 보았을 수 있는데.



“…잘 봤습니다.”

“…….”

“…….”

“…어떠셨습니까?”



살짝 떨리는 패치의 목소리에 매뉴얼이 다시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꾹 다문 패치의 입술이 그가 긴장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카메라 앞에서도 긴장한 티 하나 없던 패치가 숨죽이며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매뉴얼은 그런 그의 푸른 시선을 잠시 바라보다, 슬쩍 눈을 피하며 말했다.



“인상에 남는 연기던데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실 수 있습니까?”

“배역이 패치 씨와 잘 맞는다고 느꼈어요. 제가 뭐, 그쪽을 자주 만난 건 아니지만. 예민한 분위기나, 가족을 잃은 예술가라는 인물이 느끼는 감정이라든지, 그런 걸 잘 표현하시던데요. 그 인물이 패치 씨 본인인 것처럼, 어색한 것도 하나도 없고….”

“…….”

“그리고… 시선을 끄는 힘이 있었습니다.”



매뉴얼은 태연하기 위해 노력했다. 객관적으로 보아도 패치는 재능 있는 배우일 것이다. 누구인들, 그 상영관에 있던 이들 중 패치에게 시선을 빼앗기지 않은 이는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리 생각하며 패치를 마주 보자, 패치가 떨리는 눈을 내리감는 게 보였다.



“…다행이네요.”

“그쪽이 잘한 건데 다행일 건 뭡니까?”

“매뉴얼 씨라면 솔직하게 말씀해 주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제 가족들은 칭찬하기 바쁘거든요. 하하, 웃는 패치의 목소리에서는 무거운 짐을 하나 내려놓은 듯한 후련함이 서려 있었다. 수고하셨다는 상투적인 인사가 오가고, 음료가 바닥을 보일 때쯤 패치가 산책을 제안했다. 매뉴얼은 그의 빈 잔을 뺏어 일어서며 영화 티켓을 예매해 놓겠다고 했다.











09, 01


—조심히 들어가셨길 바랍니다.



매뉴얼의 마우스 커서는 같은 자리에서 깜박이기만 했다. 문장을 고치다 다시 지우고, 몇 번 건드려 보다 되돌리길 반복하고, 그러다 휴대폰을 켜서는 메시지를 들여다보다 한숨 쉬며 내려놓고. 겨우 한 문장만이 적힌, 건조하기까지 한 메시지가 무어라고 빤히 보고 있는지. 그 생각이 들 때면 한숨을 참을 수가 없었다.


계속해서 만나 뵐 수 있으면 좋겠다던, 패치가 남기고 간 한 마디. 그 한마디가 밧줄처럼 매뉴얼을 옭아매고 놓아주지 않았다. 패치의 연기에는 시선을 끄는 힘이 있었다면, 패치의 말에는 사람을 휘어잡는 무언가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제가 이렇게 신경 쓰다 못해 골머리를 앓고 있을 리 없었다.


매뉴얼은 멍청하게 깜박거리기만 하는 커서를 노려보다 창을 닫았다. 그러고는 인터넷을 열어 패치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이전에는 아무런 결과도 뜨지 않았던 포털 사이트의 화면에 패치의 프로필이 떴다. 사진도, 생일도, 아무것도 없이 이름과 직업만 적힌 프로필 아래에 그들이 함께 보았던 영화 포스터 하나만이 걸려 있었다.


그날, 영화관에 앉은 패치는 숨죽인 채 영화를 보았다. 스크린을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것처럼, 영화의 대사 하나하나를 씹어 삼킬 것처럼 집중했다. 매뉴얼은 그런 패치 곁에서 통 집중하지 못하고 자꾸만 시선을 돌렸다. 화면에 등장하는 패치와 그의 곁에 앉은 패치, 그 둘을 번갈아 보던 매뉴얼은 눈을 내리감아 버렸다. 눈을 감았어도 패치의 목소리는 그의 귀를 간질였다. 카메라를 향해 성내는 그의 높은 목소리와 저를 보며 웃던 낮고 잔잔한 목소리를 겹쳐 듣던 매뉴얼은 가슴 언저리까지 간지러워지는 탓에 터지려는 숨을 꾹꾹 눌러 삼켜야만 했다.


그 작은 포스터 하나에 덧칠해진 기억이 늘어서, 매뉴얼은 자세히 보이지도 않는 이미지를 보며 복잡한 마음을 정리해야 했다. 매뉴얼의 평에는 눈에 띄게 기뻐하면서, 정작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는 괜찮았더라는 말로 일축하고 마는 패치를 떠올리는 지금의 자신이,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리는 건지, 아닌지. 속절없이 끌려가는 저 자신을 알면서도 그저 눈을 감고 싶은 마음을 놓아두어도 되는지.



“선배!”



매뉴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사무실 건너편에서 부서장과 이야기를 나누던 그의 사수가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돌아봤다. 이야기를 방해하지 말라는 무언의 손짓도 상관 않으며 매뉴얼은 그들에게 걸어갔다. 한 손에는 이미 뽑아놓은 패치의 인터뷰 자료가 들려 있었다.



“이번에 지면 남아요?”

“없어. 안 남아. 돌아가 있어, 나중에 얘기해.”

“부서장님, 이번에 개봉한 영화 말입니다. 제가 인터뷰를 따 놓은 게 하나 있는데요….”

09, 07

"그래서 연락 드렸는데 아직 회신은 안 왔구요…."

"어엉."

"선배?"

"…어?"

바쁜 일 있으세요? 묻는 말에 매뉴얼은 톡톡 두드리고 있던 휴대폰을 슬쩍 숨겼다. 어어, 나도 연락해본 곳이 있어서. 애써 둘러대며 계속 이야기해 보라 손짓했지만, 다시 이야기가 이어지자 매뉴얼의 관심은 점점 그곳을 떠나 휴대폰으로 쏠렸다.

억지로 욱여넣었던 패치의 인터뷰는 다행히 통과되었고, 덕분에 글을 페이지에 눌러 담아야 한다며 사수가 성질을 냈다. 네 책임도 있다며 업무를 몇 개 넘겨받았어도 매뉴얼은 제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적어도 이것 만큼은 감정에 휘둘린 선택이 아니었으니까. 그건 반드시 실어야 했고, 그게 틀리지 않으리라는 걸 매뉴얼은 자신할 수 있었다.

이번 주말에 시간 되십니까?—

그러나 패치의 인터뷰를 싣는 게 합리적인 선택이었다면, 매뉴얼이 보내 버린 메시지 한 마디는 다분히도 충동적인 것이어서. 떨리는 손으로 전송 버튼을 누른 밤부터 매뉴얼은 몇 분에 한 번씩 휴대폰을 들여다보고는 했다. 아무래도 패치는 업무 외의 연락에는 자주 답하지 않는 모양인지, 그의 메시지는 답장은커녕 읽었다는 표시도 뜨지 않았다. 성급했을까, 보내지 말았어야 했나, 전전긍긍하는 마음이 너무 오랜만이라 매뉴얼은 긴장으로 울렁이는 속내까지 모조리 다시 겪어야만 했다.

"…이건 어떻게 답해 드리면 될까요?"

"야, 진짜 미안한데."

"담배 피우고 오시게요?"

"어… 어."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후배의 눈에는 다르게 비쳤는지, 그는 별 실망도 않으며 매뉴얼을 쫓아 보냈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며 담뱃갑을 들고 쫓겨난 매뉴얼은 어깨를 으쓱이며 옥상으로 향했다. 저 녀석이 제게 많이 익숙해졌나 보더라고, 그래도 나왔으니 조금 이따 들어가야지…. 아직은 더운 햇빛에 그늘을 찾아 서며 담배에 불을 붙인 그는, 습관처럼 휴대폰을 켜다 놀라 작게 비명 질렀다. 막 불을 붙인 담배가 바닥으로 떨어져 굴렀다.

—예, 괜찮습니다.

떨어진 담배를 아까워하며 지져 끈 매뉴얼이 쪼그려 앉은 채로 휴대폰을 꼭 붙들었다. 최대한 태연해 보이게, 아무 일 없는 것처럼… 그게 되나. 그게 되겠나, 둘이 만나자고 하는 마당에. 에라.

영화 보러 가실래요?—

—좋아요.











10, 11


“패치 씨.”



매뉴얼이 그를 부르자 인파를 피해 거리 한쪽을 지키고 서 있던 패치가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봤다. 매뉴얼이 한번 더 그를 부르며 손을 살짝 들자, 이내 그를 찾아낸 패치가 매뉴얼을 향해 종종 걸어왔다.



“많이 기다렸어요?”

“아뇨, 방금 도착했습니다.”



검은 모자에 짙은 뿔테 안경을 쓴 패치가 옅은 미소를 띠었다. 그를 보는 매뉴얼은 시선을 살짝 비켰다.



“안경이 잘 어울리네.”

“말만이라도 고맙습니다.”

“이전에 얇은 테는 쓰고 올 생각 없어요?”

“별로 얼굴이 가려지지도 않던데요.”



이만 말이나 편하게 하자는 매뉴얼의 제안에 패치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거절했다. 그깟 말 좀 편하게 한다고 뭐가 달라지냐는 투덜거림에 패치는 또 웃었다. 패치의 웃음소리에 슬그머니 따라 웃던 매뉴얼도, 예예, 패치 씨, 하며 그만 웃으라 외쳤다.


그들은 그들만의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몇 번이고 같은 길을 걸어도 지루하지 않은, 그들 마음에 꼭 맞는 길이었다. 느긋한 걸음으로 거리를 걸으면 그들을 방해하는 것 하나 없었고, 낮은 목소리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기에 이만큼 적당한 거리도 없었다. 길의 끝에 자리 잡은 영화관, 그 앞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향하며 그들은 계속해서 웃고 떠들었다. 



“이번 호도 잘 봤습니다.”

“제가 당신 인터뷰 싣겠다고 선배 책상을 엎을 뻔했습니다. 그걸 안 넣겠다고 해가지고.”

“다음 호에 실어도 됐을 텐데요?”

“그럼 늦잖아요, 이미 영화도 슬슬 내려가려는데.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었어요.”



패치의 고맙다는 말에 매뉴얼이 손사래 쳤다. 그들 잡지사가 마냥 손해 보는 선택을 한 것도 아니었다. 패치를 보려는 사람이든, 영화 기사를 찾아보는 사람이든, 누군가는 매뉴얼의 기사를 보기 위해 잡지를 샀으니까. 그 이야기를 들은 패치는 그저 고맙다는 인사만을 전했고, 매뉴얼은 그 짧은 인사로도 충분히 미소지을 수 있었다.


패치는 대본 리딩을 준비한다고 했다. 매뉴얼은 그가 새로이 준비하는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영화를 공부해 본다는 말에 패치는 괜찮은 고전 영화를 추천해 주었다. 당신이 나오는 영화를 낱낱이 평해 보겠다는 말에 패치는 한번 해 보라며 예의 자신감 넘치는 웃음을 보였다.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를 하고,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장식품을 구경하고, 서로의 일상을 묻는, 그 시간이 생각보다도 더 편하고 즐거워서.



“드라마 촬영은 오래 걸리는 편입니까?”

“작품마다 다르다고는 하는데, 전 비중이 그리 크지 않으니 조금 빨리 끝날 겁니다.”

“그럼 겨울 즈음에는 시간이 비어요?”

“그때면 한창 바쁠 텐데요.”

“크리스마스에는,”



매뉴얼이 잠시 숨을 멈췄다. 패치의 시선이 매뉴얼을 향해 날아들었다. 가을 하늘을 닮은 그 시선을, 매뉴얼은 피하지 않고 마주 보았다.



“크리스마스에는 시간이 될까요?”

“글쎄요….”



잠시 그를 바라보던 패치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났다. 겨울 어느 날의 부드러운 미소와 꼭 같은 미소가, 이번에는 매뉴얼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인터뷰가 필요하다면, 시간을 못 낼 것도 없겠죠.”











11, 03


“잘 지내요?”

–별다른 일은 없습니다.

“재미있는 일은 없어요?”

–야외 촬영은 힘드네요.

“이야기 하나만 해줘 봐요.”

“음, 촬영 도중에 새가 날아드는 일이 있었습니다.”



세상에, 새라니. 매뉴얼은 깜짝 놀랐을 패치의 표정을 상상하며 낄낄 웃었다. 매뉴얼에게 그때의 상황을 알리려던 패치도, 그가 웃고만 있자 이내 이야기하는 것을 포기하고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만 웃으세요. 그만하라고. 그를 말리던 패치가 그만 말꼬리를 잊어버리자 매뉴얼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붙들었다. 방금 말 놓은 거 맞죠? 그리 물으면 패치는 금방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능청을 떨었다.


얼굴을 보는 날보다 목소리를 듣는 날이 더 많아졌다. 사진을 주고받는 데 익숙해졌고, 저녁이 되면 상대의 전화를 기다리는 일이 잦아졌다. 매뉴얼은 특집으로 내걸 만한 기삿거리를 잘 가져왔다는 이유로 인센티브를 한번 받았고, 패치는 NG를 잘 내지 않는 배우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매뉴얼은 패치의 전화를 기다렸다. 퇴근하면서 패치에게 안부 문자를 남기면 곧바로 전화가 오기도, 오늘은 바쁘다는 문자가 되돌아오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느지막한 저녁이 되면 패치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고, 그들은 달이 뜰 때까지 이야기했다. 매뉴얼은 이제 패치의 기사를 쓸 수는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동시에, 패치의 이야기를 실어야 한다면 그건 자신이 하고 싶다고도 생각했다.


매뉴얼은 패치를 기다렸다. 내가 누군가를 이렇게나 기다려보는 건 처음인데, 라고 생각하며. 기다리던 그가 찾아오면 무슨 말을 건넬지 고민하고 또 고민하며.











12, 25


띵동, 벨이 울렸다.

소파에 앉아 불안하게 다리를 떨어 대던 매뉴얼이 벌떡 일어섰다. 집은 적당히 따뜻한 공기로 가득 차 있고, 거실 한구석에는 어울리지 않는 작은 트리가 반짝이고 있었으며, 주방에는 맛있는 냄새가 감돌고 있었다. 이만하면 완벽하겠지, 하면서도 매뉴얼은 문을 열기 전까지 자꾸만 뒤돌아보며 상태를 점검했다. 현관에 붙은 거울을 들여다보며 머리도 만져 보다, 기다리다 못한 상대가 다시 벨을 누르는 소리에 황급히 문을 열어젖혔다.



“오랜만이네요.”

“어서 와요.”



발개진 코를 감색 목도리에 묻고 있던 패치가 그의 집에 들어섰다. 현관에서부터 보이는 트리에 작게 탄성을 내뱉는 그를 보며 매뉴얼은 몰래 미소 지었다. 자, 어서 목도리랑 코트 이리 줘요. 그러며 패치의 겉옷을 방에 걸어놓고 나오려니 패치는 그의 키보다도 작은 트리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트리가 더 중요해요?”

“당신은 이런 걸 안 챙길 것 같았는데요.”

“맞아요, 올해는 한번 사 봤어요. 마음에 들어요?”

“괜찮네요.”



내년에는 우리 집에도 꾸며 놓아야겠군요, 하는 말에 매뉴얼은 천연덕스럽게 저도 보여 주나요, 하고 물었다. 그러자 패치가 짓궂은 미소를 띠며 그를 돌아봤다.



“우리 집에는 어떻게 들어오려고요?”

“안 들여줄 거예요?”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면 들여 주죠."

음, 뭐가 있을까. 매뉴얼의 얼굴에도 패치를 닮은 짓궂은 미소가 피어났다. 일단, 첫 번째로는.

"당신 마음에 쏙 들 만한 선물을 들고 가죠."

"어떤 거요?"

"케이크와 꽃다발?"

"제가 케이크를 안 좋아하면 어쩌려고요."

"그때는 필요할 걸요, 촬영이 끝났는데. 축하하지 않을 거예요?"

"그렇게 나오겠다면… 그리고요?"

"뭐, 깜박 잊은 목도리도 돌려 드리고요."

"목도리를 놔두고 가야 하나요? 너무 뻔한데."

"뻔해도 열어줄 수밖에 없을 걸요."

"다른 게 있나요?"

낮게 웃던 매뉴얼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자 패치가 웃는 낯으로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나, 하는 생각이 다 보이는 모습에 입꼬리를 꾸물대던 매뉴얼이 작게 숨을 골랐다.

"저녁을 준비해 놨어요."

"그리고요?"

"와인도 있고, 당신이 추천해 준 영화도 있어요."

"으음."

"저녁을 먹고 나면 정답을 가르쳐 줄게요."

"아…."

패치의 얼굴에 짙은 미소가 피어났다. 대답 없이 웃기만 하는 패치에 매뉴얼은 반대로 마음 한구석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잘못된 답인가? 싫어하지도,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는 패치의 모습에 매뉴얼의 얼굴이 조금씩 굳어 갈 때쯤,

패치의 얼굴이 훅 다가오더니, 그의 입술에 뜨거운 자욱을 남겼다.

갑자기 다가온 입술에 놀랄 틈도 없게 패치가 매뉴얼의 아랫입술을 쓸고 깨물었다. 발돋움한 자세가 불편한 듯이 어깨를 끌어내리는 손길에 매뉴얼은 허리를 숙이며 크게 떴던 눈을 내리감았다. 그가 순순히 입을 벌리자 패치는 망설임 없이 그의 입술을 비집고 들어왔다. 치열을 훑고 타액을 맛보는 대담한 움직임을 받아들이던 매뉴얼이 고개를 기울이며 그에 응했다. 숨이 섞이고, 혀가 섞이는 순간마다 다디단 기쁨이 찾아들었다.

"…저는 참을성이 그다지 많지 않아서요."

"…가끔은 기다리지 않는 것도 괜찮네요."

"이제는 더 자주 그렇게 생각하게 될 걸요."

끌어안은 팔을 타고 작게 웃는 떨림이 전해져 왔다. 패치는 매뉴얼의 어깨에 이마를 가져다 댔고, 매뉴얼은 패치의 머리에 턱을 괴었다. 잠시 그렇게, 콩닥이는 심장 소리와 떨리는 숨결을 나누던 그들이 다시 고개를 들어 눈을 맞췄다. 잠시 어긋났던 시선이 다시 마주치자 패치가 웃어 보였다. 그의 따뜻한 웃음을 눈에 담던 매뉴얼은 다시 맞닿아 오는 입술에 눈을 감았다.











12, 26


“처음 만났을 때부터 좋아했어요.”

“그때는 제정신 아니었잖아요.”

“...뭐, 그게 상관있나요.”


https://youtu.be/9x0bYZ0AyHg

소재가 되어준 캐롤!

개중 가장 분위기 비슷한 걸로 골라왔습니다

비록 캐롤에서는 제목과 가사 한 줄 정도만 남았지만요. 하하

Merry Christm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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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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