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디미션 BOND

[체슬모쿠 / 체즈모쿠] 우리의 사이는

무엇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

  • 시점은 드라마 CD 3편 <홀리데이 배럴> 이후

체슬리와 모쿠마는 오랜만의 팀 BOND 재회를 마치고, 다시 다른 나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빈웨이에서 체슬리의 악행에 감명받은 부하들은 그의 말을 아주 잘 따랐고, 한바탕 일을 치르고 난 체슬리와 모쿠마의 사이도 아주 원만했다. 서로 숨김없이 말한 데다가 가장 큰 문제였던 사건도 지나왔으니 앞은 탄탄대로. 그야말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에 가까운 결말이었다.

그리고 사건은 그렇게 일어났다. 전용기에 탄 모쿠마가 화장실에 가려는 사이 아주 흥미로운 말을 듣게 된 것이다.

 

“자, 설명 끝. 궁금한 게 있나? 개인적으로 궁금한 거라도 말해줄 수 있는 선 안에선 대답해 주지.”

 

오호, 굉장한 자신감인걸. 저 녀석, 후배가 들어온 건 처음인가? 그럼 그럴 만도 하지. 처음으로 ‘선배’ 직함을 달게 된 거니까. 모쿠마는 귀를 쫑긋 세우며 가던 걸음을 멈추고 몰래 후배의 반응을 살폈다. 후배는 이때다 싶었는지 선배에게 묻기 시작했다. 슬쩍 손을 드는 것이, 어수룩한 후배의 면모다웠다.

 

“그럼, 한 가지 궁금한 걸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래. 내가 말해줄 수 있는 거라면 말이야.”

“그러니까 보스 두 분께선… 사귀시는 건가요?”

 

후배의 예상치 못한 질문에 선배도, 모쿠마도 얼어붙었다. 사귄다고? 사귀어? 체슬리와 내가? 아니, 남들 눈에 그렇게 보일만한 게… 모쿠마는 잠깐 생각을 되짚었다.

생각해 보면 매번 같은 방을 잡고, 일거수일투족을 함께 하긴 했다. 그리고 좀… 거리감이 없기도 했지. 늘 찰싹 붙어 있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최근엔 내 요리를 먹는 것에도 거리낌이 없어져서는, 요리할 때마다 뒤에서 껴안은 채 어깨에 머리를 얹어서 구경하기도 하고. …아, 사귄다고 오해할 만했네! 뭐, 그래도 사귀고 있지 않으니까! 처음 본 사람보단 비교적 오래 본 사람이 보면 좀 달라 보였겠지! 모쿠마는 전혀 신경 쓰이지 않은 체하며 선배의 답을 기다렸다.

“…그래. 두 분은 사귀고 계신다.”

“컼,”

“……? 방금 저기서 이상한 소리가…”

믿었던 선배 녀석마저 둘 사이를 단정 짓자, 모쿠마는 사레에 들러 기침했다. 소리가 더 나기 전에 황급히 입을 막았으나, 새어나간 소리는 이미 둘의 관심을 끌어버린 듯했다. 아, 어쩔 수 없나. 여차하면 눈이라도 찔러버려야지. 저벅, 저벅. 발걸음 소리가 조금씩 가까워지자, 모쿠마는 몸을 낮추며 언제든 기습하기 쉬운 자세를 유지했다. 앞으로 한 걸음만 더 오면…!

“이봐, 거기 둘! 전체 소집 방송이 울렸는데 뭐 하는 거야!”

“아! 죄송합니다!”

다행히도 부하 둘의 눈은 무사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방송 같은 건 들은 기억이 없었는데. 아마 둘의 충격 발언에 정신이 아득해졌을 때 방송이 나온 모양이었다. 정신 바짝 차려야지. 모쿠마는 다시금 화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 그냥 몸만 숨겨도 되는 거였네.’

…뭐, 안 저질렀으니까 됐지!

*

오랜 비행을 마치고 착륙을 앞둘 무렵, 모쿠마는 옆자리에서 평온하게 책을 읽는 체슬리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많은 자리를 두고 굳이 제 옆자리를 고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렇게 크게 외로움을 타는 편은 아니었던 거 같은데. 오히려… 남들이 보기에 귀찮게 구는 쪽은 제가 아니었던가?

“그렇게 보면 부담스러운데요, 모쿠마 씨.”

눈썹 하나 까딱이지 않은 채로 답하는 체슬리는 태연해 보였다.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하기는. 모쿠마는 눈을 게슴츠레 뜬 채 말했다.

“너야말로. 하나도 안 부담스러워하면서.”

“무슨 그런 서운한 말씀을. 너무 부담스러워서 눈이라도 마주치면 쓰러질 것 같다고요?”

팔락.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모쿠마의 가늘게 뜬 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너한테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네. 뭔가요?”

“…이 많은 자리 중에서 굳이 내 옆자리에 앉은 이유가 뭐야?”

“싫으신가요?”

“아니, 뭐, 싫진 않은데….”

그럼 된 거 아닌가요? 체슬리는 그런 표정으로 모쿠마를 뚫어지게 보더니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이 녀석 정말 얄밉고 기분 나쁘네. 모쿠마는 고민하다가 슬며시 말을 꺼냈다.

“아까 화장실 가다가 좀 웃긴 얘기를 들었는데, 부하들은 너랑 내가 사귀는 줄 알더라?”

자, 이제 돌아올 대답만 기다리자. 저쪽에서 저렇게 어중간한 태도를 고수한다면 이쪽에서도 슬며시 떠보면 된다. 솔직히 상대는 심리전에 강한 체슬리니까 금세 간파당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진 않지만… 그래도 이번 질문은 좀 세지 않았나? 모쿠마는 그렇게 생각하며 긴장감을 숨긴 채 최대한 능청스레 굴었다.

체슬리는 잠깐 침묵하더니 느릿하게 말을 뱉었다.

“아-하.”

“……반응은 그게 다야?”

“다른 반응이 더 있어야 할까요?”

“아니, 너랑 나 말이야. 사귀고 있다던가, 그런 건 아니었잖아?”

“음, 그렇죠.”

“그럼 저 말이 신경 쓰이지 않아?”

“신경 쓰이시나요?”

“당연하지!”

“그러시군요.”

저 미꾸라지 같은 녀석은 또 이렇게 모쿠마의 반응만 살피고 슬쩍 빠져나갔다. 하지만 모쿠마도 계속 당하고만 있을 생각은 없었다. 모쿠마는 마음을 한참 헤집고 지나가려는 미꾸라지의 꼬리를 덥석 잡고 물었다.

“너는 어떤데?”

“저는,”

“보스,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목적지에 도착하였습니다. 부디 착륙 준비를.”

“그렇다네요. 얘기는 나중에.”

…저거 최면 걸어서 저런 대사를 하게 만든 거 아냐? 모쿠마는 합리적인 의심을 하며 부하의 눈을 살폈다. 안타깝게도 부하는 선글라스를 쓴 채라 눈이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도착지인 이곳은 북반구였고, 직전에 머물던 곳은 남반구의 미카구라다 보니 기온 차가 심했다. 오죽하면 더위를 많이 타는 모쿠마 역시 살짝 쌀쌀하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체슬리는 괜찮을까? 모쿠마는 그리 생각하며 슬쩍 옆을 보았다.

“모쿠마 씨.”

“으응?”

“잠깐 손 좀 빌려주시겠어요?”

그리 말하는 체슬리는 손을 내민 채였다. 모쿠마는 의아해하며 체슬리의 손을 잡았다. 흰 장갑이 이상하게 유독 차게 느껴졌다. …아니, 이거 그냥 손이 차가운 거 같은데. 모쿠마가 의아해하자, 체슬리는 해답을 알려주듯 공손히 말했다.

“감사합니다. 좀 추워서요.”

“핫팩! 핫팩 가져올게!”

“아뇨, 이거면 됩니다.”

체슬리는 모쿠마의 손을 잡은 채 코트 주머니에 쏙 넣어버렸다. 어? 모쿠마는 지금 일어난 일련의 사태를 파악하고 있었다. 손을 빌려달라더니 잡고는 제 코트 주머니에 넣어버렸다고? 심지어 핫팩을 주겠다는 말도 무시하고? 왜 이런 짓을 하지? 아니, 상식적으로 핫팩이 인간보다 더 따뜻할 텐데? 이러니까 사람들이 오해하는 거 아냐!

모쿠마가 슬쩍 손을 빼려 하자, 체슬리는 깍지를 껴서 더욱 단단히 잡았다. 빠져나가지도 못하고… 모쿠마는 흘금 시선을 돌려 부하들의 눈치를 보았다. 오해는 더 커지겠는걸. 모쿠마는 머뭇거리다 체슬리에게 말했다.

“체슬리. 이러면 저 녀석들이 더 오해할 텐데.”

“아, 그렇군요. 모쿠마 씨는 그게 신경 쓰이신다고 했죠.”

“그래. 그러니까 이것 좀 놓고….”

“저는 추우니까 좀 더 잡고 있을게요.”

“아니이!”

답답한 마음에 모쿠마가 외쳤다. 순식간에 부하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렸다. 체슬리 역시 놀랐는지 눈이 휘둥그레졌다.

“갑자기 왜 이러시는 건지 모르겠는데요. 평소엔 손을 잡든, 머리를 기대든, 껴안든 별로 신경 안 쓰셨잖아요?”

“그건, 그러니까, 이런 얘기를 듣기 전이었으니까. …아무것도 아닌 사이에 이런 걸 하는 건 좀, 이상하지 않아?”

“왜죠? 설마 모쿠마 씨, 정말로 저를 좋아하시기라도 하시나요?”

이 문제에 대해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괜히 답을 내리면 제가 지는 것 같았고, 골치 아파질 것을 어렴풋이 알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체슬리가 이렇게 대놓고 제게 질문할 줄은 몰랐다. 어, 그건, 그게, 같은 얼빠진 말만 반복하다가 모쿠마는 정신을 차렸다.

“당연히 아니지!”

“그렇군요. 차이는 건 색다른 경험이네요.”

“고, 고백이었어, 방금 거?”

“…고백은 아니었죠. 따지고 보자면.”

“그러면 차인 건 아니지~ 하하, 그렇잖아? 그리고 내가 너를 좋아하진 않지만, 그래도 너는 정말 멋진 사람이고, 또, 너는 그 뭐냐, 대단한 사람이기도 하고! 일반적으로 힘든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뛰어넘기도 하니까.”

어느새 모쿠마는 열심히 체슬리의 변호를 하고 있었다. 체슬리의 표정은 점점 오묘하게 변해갔다. 마치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거죠?’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 변화를 알아차린 순간 모쿠마는 괜히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러게. 왜 본인이 이렇게까지 그를 신경 쓰는지 모를 일이었다.

의식하지 말자. 생각해 보면 병원에서 쉴 때도 몸이 으슬으슬하면 곁에 오라며 손을 잡기도 했고, 그 정도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거니까. 아주 친한 친구 사이에도 그 정도는 해주잖아. 응. 아무래도 내가 너무 과민했나 보다. 모쿠마는 애써 그렇게 생각하며 잡힌 손을 꼼지락거렸다. 의식하지 않기엔 너무 또렷한 존재감이었다.

차라리 다른 생각을 하자. 모쿠마는 그렇게 생각하며 그에게 물었다.

“그, 오늘의 계획은 뭐야?”

“기내에서 한 번 정리하였는데, 듣지 않으신 모양이군요.”

“아하하… 이해해 줘. 아저씨는 기억력이 그리 좋지 않으니까 말이야.”

체슬리는 별수 없다는 듯 한숨을 한 번 쉬고는 말했다.

“막 도착한 상태에서 잠입은 무리고, 몇 군데를 들러 정보를 수집하는 정도로 오늘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아, 그렇구나. 그럼 이제부터는 어디로 갈 생각이야?”

“우선 이 구역의 뒷조직 정보가 가장 잘 모인다는 곳으로 갈 예정입니다. 겉은 평범한 식당이지만 비밀 메뉴를 주문하면 정보가 나온다는,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 볼 법해서 아무도 쓸 것 같지 않은 방식으로 운영되는 식당이요.”

“여전히 신랄하구나.”

“그럼, 이동하죠.”

체슬리는 공항에 내리자마자 대기하던 리무진에 탑승했다. 리무진에 탄 이후에도 여전히 손을 잡은 채였다. 체슬리는 몇 번 엄지로 모쿠마의 손등을 쓸고 손을 고쳐 잡고 꼼질대더니 주머니에서 손을 빼 장갑을 벗기 시작했다.

“실례. 모쿠마 씨. 손이 많이 건조한 것 같은데요.”

“어어, 그런가…?”

“이것 보세요. 손등이 하얗게 텄어요. 자기 관리는 아주 중요하답니다. 특히나, 타인에게 저를 내비칠 때, 관리가 잘 되어 있는 사람은 어딜 가서 무시당하지도 않죠.”

그렇게 말하던 체슬리는 앞에 앉은 부하에게 손을 내밀었다. 체슬리의 소지품을 담당하는 부하였다. 그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바로 핸드크림을 내밀었다. 말도 안 하고 손만 내밀었는데 어떻게 알고 그걸 준 거야…. 모쿠마는 정말로 신기하다고 생각했지만, 굳이 말하지 않았다.

핸드크림을 받아 든 체슬리는 모쿠마의 손등에 적당량을 짜주었다.

“아, 고마…”

모쿠마가 고맙다는 인사를 끝맺기도 전에, 체슬리는 반대쪽의 장갑을 벗고 정성껏 모쿠마의 손을 문질렀다.

“핸드크림은 골고루, 꼼꼼히 발라야 합니다. 제가 도와드리죠.”

“어어? 아니, 그럴 필요는 없는데…!”

슥, 스윽, 꼼꼼히 발라야 한다면서 체슬리가 양손의 엄지로 제 손등을 쭉쭉 펴는 것이 보였다. 손가락 사이사이에 그의 손가락이 들락거렸다. 별거 아닌 행위임에도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뭔가, 간질간질하면서도 위험한 느낌.

이번엔 모쿠마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야?’라는 표정으로 체슬리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체슬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모쿠마의 손을 만졌다. 그렇게 한참을 주물거리고, 모쿠마의 손이 핸드크림으로 번들거릴 지경이 되어서야 놓아주었다.

“자, 이제 반대쪽 손을 바르도록 할까요.”

“그, 아니, 굳이? 발라줄 필요까진 없어. 그냥 짜주기만 해도 돼. 내가 알아서 바를게.”

“하지만 모쿠마 씨가 바른다면 꼼꼼하게 바르지 않을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제가 하는 편이 마음 편합니다.”

“어, 으음….”

모쿠마는 마지못해 반대쪽 손을 내밀었다. 체슬리는 이번에도 정성껏 모쿠마의 손을 문질렀다. 손등과 손가락, 손바닥에 핸드크림을 펴 바르며 계속 손을 놀렸다. 터서 거칠어진 손이 핸드크림의 수분으로 부드러워졌다. 체슬리의 손 역시 번들거리고 있었다. 정작 본인은 바르려고 하지도 않았음에도.

기분이 울렁거렸다. 두근거리는 걸까? 이건 좀 과하지 않았나? 사귀지도 않는데. 사귀어줄 것도 아니면서. …사귀어줄 것도 아니면서? 모쿠마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체슬리를 바라보았다. 계속 묻어두었던 감정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체슬리를 좋아하나? 체슬리는 여전히 태연한 표정으로 지그시 저를 보고 있었다.

“도착했습니다, 보스.”

운전하던 녀석이 도착했음을 알리자, 자연스레 문이 열렸다. 체슬리는 이 모든 호의가 익숙하다는 듯 내려서 안에 앉은 모쿠마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시죠.”

“…응.”

모쿠마는 살포시 손을 잡았다.

리무진에 내리자마자 보인 풍경은 거대한 건물의 입구였다. 회전문이 양쪽으로 두 개가 설치되어 있었고, 가운데는 양측으로 열리는 문이지만, 입구를 지키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체슬리를 보자마자 바로 문을 열었다. 사전에 얘기는 끝난 모양이었다.

체슬리는 망설임 없이 엘리베이터를 탄 뒤 3층을 눌렀다. 아무래도 일반적인 식당으로 위장하였으니, 너무 높은 층은 쓰지 않는 듯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주위를 살피니 평범한 레스토랑과 다를 바 없었다.

검은 정장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오면 당연히 의심받기 쉬울 테니 모쿠마와 체슬리만 이곳에 입장했다. 웨이터는 인원수를 파악하고 2인용 테이블에 안내했다. 체슬리는 자연스레 앉아 메뉴판을 한 번 훑더니 음료와 음식을 주문했다. 아마, 그랬던 것 같다. 모쿠마는 메뉴의 이름을 들어도 알아듣지 못했을뿐더러, 아까부터 ‘내가 체슬리를 좋아하나?’라는 의문으로 가득 차 어느 것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모쿠마 씨. 듣고 계시나요?”

“어? 어어?”

“어디서부터 듣지 않으셨나요?”

“어, 그러니까… 처음, 부터?”

체슬리는 가볍게 한숨을 한 번 뱉었다. 톡, 톡, 식탁을 두드리던 체슬리의 검지가 뚝 움직임을 멈추었다. 무언가 고민하던 게 해결책을 찾아갈 때쯤에 나타나는 체슬리의 습관 중 하나였다. 일에 관련된 고민인 걸까. 모쿠마는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신경 쓰이시나요?”

“어, 음… 조금은.”

“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런 일로 사이가 어색해지는 게 더 싫군요. 모쿠마 씨께서 당황하신 것 같아서 표현은 하지 않고 있지만, 그렇게 벽을 치는 건 꽤 상처입니다.”

“……미안.”

어른답지 못했네. 어쩐지 체슬리와 있으면 그가 더 어른스러운 탓에 늘 애처럼 굴곤 했다. 하지만 이런 일에서는 너무 휘둘리지 않는 편이 나았겠지. 모쿠마는 자기반성을 마치고 마음을 굳게 잡았다. 괜히 감정을 확립하려 들었다가 사이가 어색해지기보다는, 현 상황을 유지하는 게 나았다. 그렇게라도 곁에 있고 싶었으니까. ‘왜?’라는 의문은 계속 따라붙었지만, 모쿠마는 애써 무시했다. 그 이유를 알아차리는 순간 어떤 감정이 될지가 두려웠다.

웨이터는 음료 두 잔을 들고 돌아왔다. 그리고 각각 모쿠마와 체슬리의 앞에 하나씩 놓아주었다. 색이 다른 걸 보아하니 음료의 맛이 다른 것 같았다. 모쿠마는 아무 생각 없이 빨대를 물었다. 투명한 빨대를 타고 올라가는 음료의 색은 붉었다. 한참을 보던 체슬리는 넌지시 모쿠마에게 물었다.

“어떤 맛인지 궁금해서 그러는데, 한 모금만 마셔 봐도 될까요?”

“어? 응. 물론이지.”

“감사합니다.”

모쿠마가 아무런 경계 없이 음료를 내밀자, 체슬리는 그대로 빨대를 물었다. 방금까지 더 이상 휘둘리지 않겠다고 생각했던 모쿠마의 마음가짐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모쿠마는 경악한 채 지켜보기만 했다.

그런 모쿠마의 반응에도 체슬리는 아주 평범한 일상이라는 것처럼 음료를 바꿔 마신 뒤, 제 음료도 마셔보고 푸른색 음료를 모쿠마에게 내밀었다. 모쿠마의 것이 더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보니 모쿠마는 평상시의 체슬리를 떠올렸다. 믿기지 않았지만, 거리감이 제법 많이 없어져서 음료 바꿔 먹기 같은 짓을… 하기도 했다. 꼭 다른 맛의 음료를 두 개 시키고 둘 다 마셔본 뒤, 제가 마음에 드는 걸 가져가는 식으로. 평소에는 크게 의식하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둘이 사귀어요?’라는 말의 여파가 컸다.

체슬리가 한 번 썼던 빨대… 의식하고 나니까 변태가 된 느낌이었다. 나도 좀 아무렇지 않아야 하는데! 모쿠마는 눈을 질끈 감고 빨대로 음료를 마셨다. 푸른 액체가 빨대를 따라 올라왔다.

곧이어 웨이터가 음식을 가져왔다. 평범한 음식들이었다. 모쿠마는 제가 음식을 어떻게 먹고 있는지도 모른 채 꾸역꾸역 먹었다. 아마 이곳을 벗어나면 소화제를 먹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어쩐지 체기가 도는 느낌이었다.

“잘 먹었습니다. 그리고, 후식으로는 아이스 코코아를 주문하고 싶은데요.”

“…! 알겠습니다. 옵션을 적어주시면 주방장께 전달하겠습니다.”

체슬리는 웨이터가 내미는 종이에 무언가를 적어 돌려주었다. 상대 조직의 정보에 대한 질문이었다.

평소라면 체슬리에게 무엇을 물었는지, 이제부터 뭘 하면 될지 같은 것을 귀찮을 정도로 물어봤을 테지만, 아까부터 넋이 나간 모쿠마는 그럴 의지가 없었다. 그저 빨리 이곳을 벗어나 제 마음을 잠재울 필요가 있었다.

웨이터는 영수증으로 위장된 답장과 함께 돌아왔다. 주문한 아이스 코코아는 나오지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이해가 갔다. 그런 걸 만들 수 있었다면 정보상의 음식점이 아니라 일반적인 고급 레스토랑을 차려서 성공했겠지. 모쿠마는 평소처럼 능글맞게 웃으며 서둘러 엘리베이터를 탔다.

“이제 어디 가?”

“다른 곳도 한 군데 더 들러보려 하는데, 모쿠마 씨의 상태가 영 좋아 보이진 않네요. 잠시.”

체슬리는 몸을 숙여 제 이마를 모쿠마의 이마에 갖다 대었다.

“열은 없는데 말이죠.”

“그, 속이 좀 안 좋아. 미안하지만 먼저 쉬어도 될까?”

“저와 함께 길을 걷기로 하셨다면 제게서 떨어지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만, 몸이 좋지 않은 사람을 억지로 데리고 다니는 악덕 업주는 아니라서요. 부디 푹 쉬시길 바랍니다. 저도 곧 숙소로 돌아가겠습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체슬리는 리무진에 곧바로 타지 않고 기다렸다. 모쿠마가 먼저 타라는 의미였다. 의도를 알아차린 모쿠마는 짧게 감사 인사를 하고 리무진에 탔다. 그제야 체슬리가 따라 탔다.

체슬리의 명령에 따라 리무진은 호텔로 향했다. 모쿠마를 내려주고 나서 다음 목적지인 공방으로 향할 거라 말했다. 차가 달리는 동안 모쿠마는 얌전히 입을 다문 채로 있었다. 마음이 심란했다.

“호텔에 도착했습니다.”

“그렇다고 하네요, 모쿠마 씨. …좀 괜찮으신가요?”

“응, 괜찮아. 번거롭게 해서 미안. 먼저 실례할게.”

“푹 쉬고 계세요. 곧 돌아가겠습니다.”

모쿠마는 리무진에서 내려 호텔로 향했다. 어차피 체슬리 명의로 된 호텔이라 원하는 아무 곳이나 써도 된다는 얘기를 들었기에, 마음 편히 침대에 누울 생각이었다. 오늘부터는 좀… 각방을 쓰자고 요청해야겠다. 일단 마음이 제대로 정리되기 전에는 최대한 각자만의 시간을 갖는 게 좋겠지.

방에 들어선 모쿠마는 바로 침대에 누우려다 한바탕 체슬리에게 혼난 경험을 떠올리곤 욕실로 향했다. 그와 함께한 뒤로 외출하고 나서 그대로 침대에 눕는 건 절대 금지였다. 정말 아주 가끔은 그 규칙을 깨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암묵적 ‘약속’인 만큼 잘 지키는 편이었다.

씻고 환복까지 마친 모쿠마는 그제야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당장 오늘만 해도 너무 많은 위기를 겪은 기분이었다. 몸이 위험한 것보다, 정신이 위험한 게 더 피로하구나. 그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도 이렇게 지내면 될까? 비록 내가 피 말리고 아찔해지는 순간이 계속해서 찾아오겠지만, 그걸 신경 쓰는 순간 우리의 관계는 정확해져 버릴 테니까, 애써 무시하면서 살아가면 계속 함께할 수 있을까? 모르는 척하는 건 모쿠마의 특기였다. 그러니 아주 어렵진 않을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

모쿠마는 체슬리를 좋아한다. 그렇다면 체슬리는 모쿠마를 좋아하는가? 좋아하지 않으면 그런 짓은 하지 않는다고 생각이 되지만, 너무 사소하고 애매해서 ‘파트너’의 사이에서도 충분히 행할 수 있는 일들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그러니까, 제가 생각하는 ‘좋아해’와 그가 생각하는 ‘좋아해’는 다를 수도 있다. 손을 잡고 거닐고, 밤에는 야경을 같이 구경하고, 함께 잠들며, 키스를 해도 좋고, 부끄러운 사랑의 말을 나누어도 그저 좋은 ‘좋아해’일까. 적어도 모쿠마는 그랬다.

“……좋아하나보다.”

작게 심장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랑을 인정하는 감정이 이리도 귀엽고 따스했던가. 아까는 이름을 붙이지 못해서 토할 것처럼 속이 울렁거리고, 답답하고, 토할 것 같다는 느낌이었는데. 인정하고 나니 이리도 아련하고, 애틋하고, 설레는 마음이 되었다. 모쿠마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웅얼거렸다. 이걸 알아차린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고! 쟤랑 나랑 마음이 같은지 아닌지도 몰라서 지금은 오히려 이런 마음이 독이란 말이야! 그가 분하다는 듯이 주먹으로 침대를 몇 번 내리쳤다. 아주 조금은 나아졌다.

…모르겠다. 일단 자고 생각하자. 모쿠마는 바로 누워 이불을 폭 뒤집어엎은 채 눈을 감았다. 꽤 몸이 피로했는지 금세 잠들었다.

깜빡.

모쿠마는 누군가 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손길에 눈을 떴다. …뭐지? 힘겹게 뜬 눈앞에는 흐릿하게 체슬리가 보였다.

“일어나셨나요?”

“어어, 어… 체슬리?”

“네. 당신의 체슬리입니다.”

그저 빙긋 웃기만 하던 체슬리는 모쿠마의 손을 잡고 그를 일으켰다. 잠에 몽롱하게 취한 상태이던 모쿠마는 순순히 그 손길에 이끌렸다. 침대 머리에 몸을 기댄 채 앉게 된 모쿠마는 체슬리가 손에 무언가 쥐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저게 뭐지? 의아하게 보던 순간, 체슬리의 반대쪽 손이 모쿠마의 턱을 잡았다.

순식간에 모쿠마는 체슬리를 거부할 수 없이 바라보게 되었다. 체슬리는 유심히 모쿠마를 바라보다가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모쿠마의 입술에 바르기 시작했다.

“모쿠마 씨의 입술이 터서요. 립밤을 발라 드리겠습니다. 입을 꾹 다물었다가 떼보시겠어요?”

이렇게요. 체슬리는 직접 시범을 보여 주며 모쿠마의 반응을 기다렸다. 얼결에 모쿠마는 그것을 따라 하며 입술을 오물댔다. 체슬리는 그제야 흡족한 듯 웃었다. 하여간에 제 뜻대로 움직여주는 걸 정말 좋아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립밤을 제 입술에 발랐다. …일부러인가? 저게 무자각으로 저러는 거면 심하지 않나? 모쿠마는 금방이라도 머리를 처박고 다시 잠들고 싶었다. 그만 생각하려고 일부러 잠으로 회피했는데 깨자마자 본 게 저런 모습이라니!

“체슬리. 당분간은 우리… 각방을 쓰는 게 어때?”

“어라,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곡해해서 들을까 봐 걱정되긴 한데, 절대로, 저어어어어얼대로 네 문제는 아니야. 그냥 내 마음의 정리가 필요해서 그래.”

체슬리는 한참 답이 없었다. 화났나? 금방이라도 체슬리의 표정이 서운함으로 바뀔 것 같아서, 모쿠마는 그것이 견딜 수 없을 만큼 괴로울 것 같아서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예상은 어느 정도 맞았다. 체슬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군요. 모쿠마 씨가 그걸 원하신다면야.”

괜찮지 않지만 괜찮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여 더 마음이 쓰였다. 어떻게든 저를 배려해 주려는 것처럼 보여서. 물론 체슬리라면 되레 이런 점을 노리고 슬픈 척 연기하는 걸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적어도 그건 모쿠마에게 잘 먹히는 방법이었다.

애초에 지금 그에게 흔들린다는 지점부터 모쿠마는 이미 체슬리를 꽤 마음에 두고 있다는 소리였다. 그걸 알기에 좀 더 완강하게 나서야 하는 게 맞지만… 그럴 수 없었다. 체슬리의 얼굴을 보면 어쨌든 마음이 약해져서는 제가 설설 기게 되었다.

그래도 지금은, 지금만큼은 마음을 굳게 먹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제가 엄청나게 고생할 터이니. 그걸 알면서도 나온 말은 다른 말이었다.

“어… 네가 싫다면, 그냥 계속 같이 써도 되고.”

“정말인가요?”

반색한 체슬리가 물었다. 모쿠마는 순간적으로 귀엽다고 생각하다가 정신을 차렸다. 망했다! 완전 코가 꿰였어! 그러거나 말거나 체슬리는 옅게 웃고 있었다. 아아, 이제는 모르겠다. 저렇게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신나있는데 제가 초 칠 자신은 없었다.

*

그렇게 몇 주가 지났다. 체슬리는 유구하게 선을 지키는 듯 아닌 듯 줄을 타며 모쿠마를 괴롭혔고, 모쿠마는 그런 그의 모습에 한참 괴로워하다가 잠들기를 반복했다.

가령 오늘만 해도 아침에 씻고 나왔더니 의자에 앉혀 놓고는 머리를 말려주겠다며 손수 드라이기를 들었다. 드라이기의 따스한 바람에 노곤해질 무렵에 ‘쪽’하는 소리가 나서 놀라서 눈을 떴더니, 체슬리가 모쿠마의 머리칼에 얼굴을 갖다 대고 있었다.

“체, 체슬리? 뭐 하는 거야?”

“향기를 좀 맡았습니다. 모쿠마 씨의 샴푸 향이 제 것과 같다는 게 어쩐지 기분이 좋아서요.”

미친 거 아냐?!??? 모쿠마는 심장을 뱉는 기분에 속으로 입을 벌리고 비명을 질렀다. 이게 수작이 아니라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확신이 없어서 묻지도 못했다. 근데 쪽? 쪽은 뭔데? 내가 잘못 들었나? 설마 진짜로 입을 맞추는 소리는 아니었겠지? 워낙에 태연한 연기를 잘하는 사람이니 환청이었는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유죄, 유죄다. 물론 그는 정말로 범죄자이긴 하지만. 젊은이들이 많이 쓰는 표현의 의미인 유죄다! 이게 고백이나 수작이 아니면 뭐란 말이냐! 그러나 확신할 수 없었던 것은, 체슬리의 태도가 상당히 애매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이 일어날 때마다 모쿠마는,

“근데 체슬리, 이런 건 사귀는 사람한테나 해줘~”

라고 말했고, 체슬리의 대답은,

“아, 역시 그런가요?”

였다. 늘 똑같았다. 차라리 착각이 아니라면 그냥 호쾌하게 ‘제가 좋아하는 사람은 당신이라서요.’ 라고 말했으면 좋겠다! 거절할 거라면 확실하게 선을 긋던가! 이도 저도 아니면서 계속 선을 넘나드는 건 너무한 행동이었다.

모쿠마는 머리를 싸매며 갈등했다. 고백이나 다름없는 행동을 계속해서 하고 있는데, 내가 눈치 없이 고백하면 과연 받아줄까? 단순히 파트너의 의미로 계속 친근감을 표시한 건 아닐까? 당연히 거절하겠지? 그러면 이렇게 굴지라도 말던가. 모쿠마는 오늘도 일찍 숙소로 돌아와 베개에 파묻혀 소리를 질렀다.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이 타이밍이라면 찾아올 사람은 딱 한 사람밖에 없었다.

“모쿠마 씨, 계신가요? 할 말이 있어서요.”

“어어, 들어와.”

좀 껄끄러운데. 방금까지 네 생각만 해서. 모쿠마는 떠오른 생각을 잠시 옆으로 치워두고 문밖의 상대가 원하는 말을 뱉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체슬리의 얼굴이 보였다. 평소와 똑같은 얼굴. 어쩐지 태연하면서도, 자신감 있는 얼굴. 나는 누구 때문에 이러고 있는데… 어쩐지 좀 얄미웠다.

“제가 몇 주간 해결하지 못한 문제에 대한 고민을 들어주시고, 같이 해결책을 논의해 주셨으면 합니다.”

“네가 고민이 있었다고? 별일이네.”

“네. 물론 저보다는 모쿠마 씨께서 더 많이 고민하신 것 같다고 생각하긴 합니다만. 몰골에서부터 드러나니까요.”

체슬리는 장갑을 낀 손으로 모쿠마의 양 볼을 조물거렸다. 으븝, 모쿠마는 이상한 소리를 냈지만 딱히 제지하거나 하진 않았다. 그는 몇 번 더 모쿠마의 볼을 만지작거리다가 놓아주었다. 체슬리는 진지한 눈빛으로 모쿠마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운을 떼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모쿠마 씨께서만 괜찮으시다면 저와 연인 사이로 발전하는 것은 어떠신가요?”

“어?”

모쿠마의 머릿속엔 거대한 물음표 하나가 가득 찼다. 그, 그러니까 이게… 진짜로 수작이었다고? 아니, 하지만… 모쿠마는 잠깐 생각했다. 그러면 그게… 좋아하는 사람이 저였으니까, 매번 그런 식으로 답하면서 태도에 변함이 없었던 건가? 아, 그건 그것 나름대로… 더 얄미운데. 그냥 좋아하는 사람이 나라고 말해줬으면 내가 이런 고민을 길게 하지도 않았을 텐데! 넋이 나간 모쿠마는 얼빠진 표정이 되었다. 그가 정신을 차린 건, 체슬리의 목을 울려 웃는 낮은 웃음소리 덕분이었다.

“제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이시네요.”

“당연하지! 너, 너, 그럼 그게 다 수작이었던 거야?”

“음… 원래부터는 아니었지만, 모쿠마 씨께서 저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난 뒤부턴 수작이 맞습니다.”

“…정말로?”

“그렇게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보지 마시죠. 모쿠마 씨께서 본인이 저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자각하게 만들어야 하니, 약간의 행동을 보였을 뿐이니까요.”

결국 그 전부터 수작이었다는 소리였다. 모쿠마는 어쩐지 분해져서 체슬리를 노려보았다. 그는 그런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마음을 자각하고 난 모쿠마 씨의 표정들은 정말… 별미였습니다. 그걸 구경하는 재미가 있어서 고백까지 좀 더 뜸을 들이긴 했지만요.”

“……한 대만 쥐어박아도 될까?”

“제가 뭐라고 답할 것 같나요?”

“’안 됩니다.’”

“잘 아시네요.”

모쿠마는 슬금슬금 다가가 체슬리를 와락 안았다. 으스러뜨릴 정도로 힘껏. 그러나 정말로 으스러지진 않을 정도로만.

“이건 좀 아픈데요.”

“아프라고 한 거야. 내 사랑의 크기라고 생각하고 감내해.”

체슬리는 살짝 뚱한 표정을 짓다가 모쿠마의 머리칼에 얼굴을 갖다 대고 향을 맡았다. 기겁한 모쿠마가 몸을 흠칫 물리자, 그는 큭큭 웃으며 말했다.

“사귀는 사이에나 해달라면서요.”

모쿠마는 입을 몇 번 뻐끔거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체슬리를 이겨 먹는 날은 오지 않을 것 같았다.


Special Thanks, M.

늘 글 컨펌 문제로 신세를 지고 있는 M님께… 답례를 하고자 리퀘를 받았습니다. 제 글에 좀 자신이 없는 편이라 커미션, 연교 형식은 절대 받지 않는 편인데, 조금 용기를 내서 M님께 커미션 형식으로 리퀘를 드리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컨펌 2번을 거쳐 나온 글입니다. 평소보다 더 매끄럽거나, 보기 좋게 느껴졌다면 좋겠네요!

사실 M님과 저는 취향이 극과 극을 달려서… M님이 제게 주신 키워드가 너무 어려웠어요.

<모호한 동의 / 확립된 관계인데 사귀기까지의 과정이 좋음. 근데 너무 길면 별로. / 폭닥폭닥하고 귀엽고 소프트한 느낌 선호 (근데 반대도 괜찮음)>

저는 폭닥폭닥한 걸… 별로 안 쓰는 편이기도 하고… 사랑이란 토할 것처럼 울렁거린다, 라는 게 요즘의 꽂힌 부분이라 폭닥폭닥 소프트완 멀었네요. 게다가 길어지니까 글이 재미 없는 거 같아서 큰일입니다. 저의 고질병이죠.

당분간 글은 휴식기에 들어가려 합니다. 1년 동안 쉬지 않고 썼으니 이제 좀 쉬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내킬 때에 다시, 쓰고 싶은 걸 쓰게 되겠죠.

벌써 12월이 끝나가네요. 이번 겨울은 유독 추워요. 그래도 견뎌봅시다. 우리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힘내 봐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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