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오는 길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집에 가자
고작 하룻밤 사이에 옥새의 주인이 바뀌고, 대신들은 가지가 잘려 나가듯 서걱 사라지니 혼란한 시국이었다. 반정의 북소리가 울려 퍼지던 날, 두 사람은 죽음 이후 삶을 기원했으나 이마저 허락되진 않았다. 하나는 바닥에 내려앉을 적에 머리부터 닿고, 하나는 어깨부터 닿아 그렇지 않음이 원인이었다.
도망가는 궁녀들은 남은 하나를 일으켜 함께 가려 했다. 그 와중 어찌나 슬피 울던지 일을 수습하던 병사마저 안타까워 하였다. 우는 것 말고는 할 것이 없었던 그 애는 궁녀들에게 손목이 붙잡혀 갔다. 그리고 댕기 끝이 펄럭거릴 때마다 붉은 색을 떠올렸다. 그건 지붕 끝을 매운 단청 색이었을까, 안대 하나 가득 채운 비린 색이었을까. 눈을 질끈 감았다.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어느새 궁 밖에 당도해 있었다.
"너 팔이...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큰일 날 거야. 혼자서 괜찮겠니?"
나이 많은 궁녀 하나가 말했다. 혼자가 될 자신도 없었고, 살 자신도 없다. 대답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궁녀들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그 애도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그 애의 집에는 항상 사람이 있어야 했다. '그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집이 생기랴? 결국 뒷산 찬 바닥을 바닥 삼아보기로 했다.
뒷산은 추웠고, 오래 있을 곳이 되지 못했다. 궁 안에서 봤을 때는 녹음이 짙다고만 생각했지만 직접 앉아보니 나뭇잎 하나하나가 시렸다.
'시간이 반나절도 지나지 않았는데... 지금 나서면 만날 수 있으려나.'
그 애는 산 높은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정상에서도 그리움을 달랠 수 없다면, 줄 위에서 했던 것처럼 하늘과 멀어지기로 결심하면서. 이미 한쪽 팔에는 감각이 없었고, 온 몸에 성한 곳이란 없어 보였다. 어쩌면 산꼭대기에 이르기 전에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내 가장 높다고 생각되는 곳에 도착했다. 바위에 걸터앉으니 궁 아래가 훤히 보였다. 하지만 구태여 자세히 보려 하지 않았다. 혹시나 제대로 수습되지도 못한 그 모습이 보일까 봐. 그 모습을 보면 다시 궁으로 달려갈까 봐.
누구보다 순수했던 그 애는 두려움을 느꼈다. 원래는 산에서 궁을 보고 떨어질 마음이었다. 마지막 모습이라도 눈에 담아야 할 것 같아서. 하지만 서러운 기분이 들었다. 정말 다시는 그를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마음에 무작정 산 아래로 발걸음을 옮겼다.
'두렵지는 않다. 하지만 어디로? 어디로 가야 너를 만날 수 있을까.'
산을 오르고 있는지, 내려가고 있는지도 모호하였다. 해가 저물며 공기는 점점 차가워지고 숨을 가빠지게 만들었다. 온 몸에 힘이 빠지며 의식도 함께 흐려져 갔다. 의식이 흐려지니 여러 기억들은 마지막이라는 듯 오히려 선명해졌다. 그 애는 과거가 보여주는 찬란한 빛깔에 눈이 멀었다. 눈이 멀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무엇을 찾아서 가야 하는지를
"궁에 들어오니 좋아?"
"응, 좋아."
"졸릴 텐데, 어서 자라. 내일은 육갑이 줄 타는 걸 알려달라고 하더라."
"사실 잠이 안 와. 내 목이 달린 것도 실감이 안 나고."
"그래? 사실 난 죽어도 좋다. 인생 뭐 있나? 한바탕 놀다 가면 그 뿐이지. 그래도 집 하나는 있어야 쓸 텐데... 내 집 하나 찾겠다고 개고생이란 개고생은 다 하더니 조선에서 제일 큰 집에 들어왔네 그래."
"궁이 네 집 같아?"
"아니. 궁이 왕 집이지 내 집은 아니야. 살면서 내 집은 없었어. 어릴 땐 배곯지 않고 살고 싶다는 생각. 노비 생활 도망치고 나서는 엽전 받아 먹겠다는 생각. 항상 쓸데없는 생각만 하고 살았지. 원래 집이라는 건, 내일 살아갈 걱정이 들지 않아야 집이거든."
"아래를 보지 마"
"무서워."
"줄 위는 반허공이야. 땅도 아니고 하늘도 아닌 반허공."
"그러니 떨지 않아도 돼. 떨어져도 하늘이 널 살피고, 아무리 높이 뛰어도 받아줄 땅이 있으니."
"정말 괜찮을까?"
"앞으로는 네가 가장 오래 지낼 곳이야. 제집에서 떠는 년이 어디 있다고."
"발을 올리자마자 떨어지게 생겼네! 태어나서 처음 걸어보나. 자, 내가 먼저 보여줄 테니 천천히 따라 하라고."
"미안해. 주인마님 금붙이 내가 훔쳤어."
"도망가자."
"무슨 뜻이야?"
"도망가자고. 며칠 전 광대들이 앞뜰에서 공연하는 걸 봤어? 탈을 쓰고, 부채를 들고 줄을 타는 거. 난 태어나서 그렇게 재미있는 게 있을 줄 몰랐어. 줄이 얼마나 얇은데 겁도 없이 뛰어다녔잖아."
"그런데 그게 참 즐거워 보이지 않아? 당장 떨어져 죽을 지도 모르는데..."
"난 그렇게 살고 싶어. 당장 떨어져 죽어도 이상할 것 없지만, 한바탕 놀면서 살고 싶어."
"가자. 네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갈게."
눈이 멀고서야 목적지를 찾아낸 자의 모습은 얼마나 절박하던가. 산 아래쪽 불빛에 의지해 정신없이 산을 내려갔다. 가슴이 불규칙하게 울리고 온 몸에는 끈적한 피 혹은 땀이 흘렀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음을 느낀 그 애는 잰걸음을 재촉했다.
붉은 입술이 창백해질 때, 노을이 지고 어두운 별이 떠오를 때. 그 애는 장터 한복판에 놓인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몸은 집에 닿자마자 제구실을 잃었지만, 한쪽 손만큼은 그러지 않았다. 단단히 집 기둥을 붙잡고 있었다.
'인제야 내일 살아갈 걱정이 들지 않아. 우리가 영원히 존재할 집을 찾았구나.'
집 기둥을 붙잡은 손은 이제 한을 풀었다는 듯 힘을 놓았다. 색색대는 숨소리가 점차 가라앉으며 그 애는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시장에서 각자 분주해야 할 사람들은 공터에 모여 있었다. 광대들이 가끔 와서 놀다 가는 공터였다. 오랜만에 놀이판이 열린 것도 아니고, 그곳에서 새 장사가 시작되기 때문도 아니었다. 사람들은 안타까워 하려 그곳에 모여 있었다. 줄 타는 기둥에 기댄 채 이를 집이라고 여긴 애를 안타까워 하고 있었다. 누구는 혀를 차며 불쌍하다 하였고 누구는 가까이 다가가서 이를 어쩔까 고민하였다. 하지만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했던 정말로 중요한 것은, 그 애는 집을 찾아서 돌아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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