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뱅상] 합연
비낭만적 운명 개척론
※리라이트판 (원본(포스타입 멤버십): https://posty.pe/jfgayy )
※체대생 병찬 & 공대생 상호
준향대학교 기계공학과 기상호는 가끔 생각한다.
누구나 한 번쯤 해 본 고민, 그때 그러지 않고 다르게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 봤자 의미 없지 않나."
만화 주인공이었다면 말투에서 자신감이 묻어났겠지만, 기상호의 말투는 체념에 가까웠다.
기상호는 자신이 주인공과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다. 유명한 사람들은 흔히 자기 인생의 주인공은 자신이다, 격려하고는 하는데 기상호가 생각하기에 그는 기계 부품 중 있으면 좋고 없어도 큰 문제 없는 보조 부품이었다. 기계는 현대 사회를 비롯한 여러 단체요 부품은 사람이었다.
고등학생 시절 국어보다 수학을 잘했고 사회탐구보다 과학탐구가 쉬웠다. 그것만이 기상호가 기계공학과를 고른 이유였다. 흥미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요즘 '흥미가 있었기 때문에'라는 이유는 큰 이야깃거리가 못 됐다. 위에서 말한 유명한 사람들이 말해야 이슈가 되는 거지, 평범한 사람이 말하면 '그렇구나' 정도의 답만 나올 거다. 고등학생 시절 진로 선택의 이유에 대해 배운 기억이 있기는 한데 자세히는 기억 안 났다.
상수.
기상호는 어떤 변수도 되지 못하는 고정된 값으로 살게 될 것이다.
한 줌도 쥐어본 적 없는 낭만을 쑤셔넣자면, '운명'이다.
[뱅상] 합연
비낭만적 운명 개척론
6월 말, 준향대 체육대학 전용 기숙사가 리모델링을 시작했다. 다행히 1학기 종강 후부터 공사할 예정이라고 미리 공지가 나와 있었기에 체육대학 학생들이 신청했던 거주 기간을 다 못 채우고 나오는 불상사는 없었다. 준향대 학생 전원을 위한 공용 기숙사 신청이 더 늘어났을 뿐이었다.
올해 초 연간 거주를 신청했던 학생들은 상관없었지만, 학기 거주나 반기 거주를 신청했던 학생들은 2학기를 노리고 몰려오는 체육대학 학생들과 경쟁을 치러야 했다. 그들과 체육대학 학생들 중에도 기숙사보다 자취가 낫겠다고 생각한 학생들이 있었을지도 모르나 3끼 식사와 근거리라는 이점은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기상호는 학기 거주를 신청했었고 학기가 끝나고 바로 나왔다가 체대생 기숙사 리모델링 공지를 알게 되었다. 평소 기숙사 공지를 잘 읽지 않아 일어난 사건이었다. 학교와 본가 간 거리는 서울-양산으로 약간 불리했으나 성적은 충분히 도움이 되었다. 2학기에도 1인실을 차지할 수 있었다.
"높네."
준향대 기숙사는 남학생 건물과 여학생 건물 전부 22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층은 현관과 로비 겸 부대시설이고 2층부터 호실이 시작되는데 2층은 이동이 불편한 학생들을 위한 전용 층이었다. 기상호가 받은 카드키에 적힌 숫자는 2106호, 옥상에 가까웠다.
막 엘리베이터에 탔을 때는 사람들이 많아 답답한 느낌이 들었지만 올라갈수록 사람들이 줄어들어 편해졌다. 짐들을 실은 카트를 끌고 2106호가 있는 복도로 들어서니 낯선 인영이 보였다.
"2106호 사세요?"
쌍꺼풀 없이 시원한 눈매와 살짝 긴 뒷머리가 매력적인 남성이었다. 기상호는 요즘 남자 연예인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지만 누구와 비교하든 저 형 ― 자신은 빠른 생일이라서 동기들도 거의 형이니까 ― 이 꿀리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네. 옆 호실 쓰세요?"
"네. 3학년 박병찬."
남자는 웃는 얼굴로 자신을 박병찬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일찍이 짐을 다 옮겼는지 2105라는 호수 푯말 아래에 들어갈 거주자 2인의 이름이 프린트된 종이만 들고 있었다. 생글생글 웃으며 다가오는 것은 천생 I인 기상호에게는 조금 부담스러웠다. 그는 박병찬에게 알았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고 카드키를 꺼냈다.
"학우분은요?"
"네?"
"학우분 이름."
그때 박병찬이 또 말을 걸어왔다. 기상호는 당혹감을 느꼈다. 지난 학기 기숙사에서 살 때는 옆 호실 사람과 교류하지 않았다. 먼저 교류를 시도하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떡 돌릴 것도 아니고, 학과가 같거나 하지 않은 이상 얼굴 맞댈 일도 없을 테니 말이다. 게다가 그는 기숙사를 신청하기는 했으나 기숙사에서 지낼 날보다 공대 건물에서 지낼 날이 많을 예정이었다.
"기상호, 요."
"학년은요?"
"1학년."
박병찬의 맑은 눈동자가 기상호를 담았다. 기상호는 그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피하고 싶었지만 그가 받은 2106호를 비롯한 모든 1인실은 복도 끝에 위치했고 지금 그가 들어갈 수 있는 곳은 그의 호실뿐인데 말 건 상대를 두고 문 너머로 사라지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제가 형이네요. 말 놓아도 돼요?"
"어…, 편하신 대로 하세요."
"그럼 잘 부탁해, 상호."
어째 휘말린 것 같다. 기상호가 그렇게 생각했을 때 박병찬은 오예~ 작은 감탄사와 함께 자기 호실로 들어간 뒤였다. 기상호는 카드키로 문을 열고 카트를 끌었다. 지금 급한 것은 옆 호실 사람이 아니고 짐이었다.
뒷날을 생각한 듯한 박병찬의 말과 달리, 기상호가 개강 전까지 그를 보는 일은 없었다. 사실 그것은 기상호가 밖에 나가지 않았기 때문일 가능성이 컸다. 애초에 옆 호실에 무작정 찾아온다면 그것은 친화력이 좋기 때문이 아니고 무례하기 때문일 것이었다.
"어, 상호!"
"병찬, 선배?"
"형이라고 불러."
대신 정확히, 개강 당일에 만났다. 학과 관계없이 들을 수 있는 교양 강의로 이름이 '인간관계'로 시작했다. 인문학 티를 팍팍 내는 강의를 공학도 기상호가 듣게 된 연유는 간단했다. 준향대 졸업 요건에 특정 분야의 교양 강의를 듣는 것이 있었다. 물론 인문대 학생들도 소프트웨어 관련 강의, 즉 공대 분야 강의를 들어야 하니 쌤쌤이었다.
"형은 체대인데, 상호는 어디?"
"저 공대요."
"오, 공학 하는구나? 멋지다."
학과도 아니고 체대라고 소개하는 것이 조금 특이했다.
"형 룸메이트 있지 않아요?"
"있어! 그런데 여친 있다는 거 있지."
룸메이트는 여친과 같이 지내느라 기숙사 신청해놓고 잘 안 들어올 거라는 이야기를 간단히 전달한 박병찬은 별 거 아니라는 듯, 혹은 그게 중요하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기상호는 자기 말고 룸메이트하고 어울리라는 뉘앙스를 도로 집어넣었다. 어차피 자신도 다른 이유 때문이기는 하지만 잘 안 들어갈 예정이니 말이다.
"그나저나 상호하고 이렇게 만나고, 이런 걸 운명이라고 하나?"
"네?"
박병찬은 척 봐도 들뜬 듯한 표정이었다. 냉소적인 면이 있는 기상호는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웬 운명.
"상호 생각했거든."
덜컥, 기상호의 몸이 굳었다. 박병찬은 기상호 눈앞에 손바닥을 갖다 댔다가 아예 손으로 얼굴을 톡톡 건드렸고 비로소 기상호는 하하, 어색한 웃음소리와 함께 슬금슬금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저 형이 미쳤나, 기상호 속도 모르고 박병찬은 자기 옆 의자를 툭툭 두드리며 여기 안 앉냐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앞자리에 앉으려고요."
미친 발언이었다. 기상호는 지금까지 교수 눈에 띄지 않는 뒷자리를 고수해 왔다.
"그래? 어쩔 수 없네."
박병찬은 아쉽다는 듯한 표정으로 기상호에게 강의 잘 들으라는 듯 손을 흔들어주었다. 기상호는 다시 웃어 보였다. 당연히, 의례적인 웃음이었다.
하지만 그의 뇌리에는 한 줄기 직감이 스쳐지나갔다.
저 형 자주 볼 듯.
그 직감은 들어맞았다.
박병찬은 기상호에게 다가왔다. 아니, 다가왔다는 표현은 순하고 들이댔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 기상호도 어디 가서 작다는 소리 들을 키는 아닌데 박병찬은 체대생이라는 걸 증명하듯 청순한 얼굴과 그것에 어울리지 않는 두꺼운 몸으로 기상호를 졸졸 쫓아다녔다.
"상호, 같이 먹을래?"
학교 식당에서 기상호가 치즈버거, 감자튀김과 케첩, 치즈스틱, 제로사이다 구성 세트를 먹고 있을 때, 박병찬은 따끈한 순두부 정식을 가지고 나타났다. 뜨끈하고 무거운 뚝배기를 공깃밥과 다른 반찬 몇 개와 함께 들고 있는 모습을 보니 차마 거절할 수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형아가 사 주마."
또 기숙사 1층 카페에서 기상호가 아메리카노를 마실 때, 박병찬은 미숫가루 라떼를 주문하고 크림치즈가 동봉된 베이글을 사 내밀었다. 솔직히 기상호도 커피를 맛으로 먹는 게 아니어서 곁들일 음식이 당길 때가 있었는데, 무난한 조합을 사 주겠다니 거절하기 어려웠다.
같이 1층에 위치한 편의점에서는 어땠는가, 기상호가 집어온 것은 . 박병찬이 집어온 것은 치킨 샐러드였다. 흔히 먹는 튀긴 치킨이 아니고 평범하게 닭고기라는 의미의 치킨. 여기 브랜드 샐러드가 맛도 가성비도 괜찮다며 기상호에게 매끈하게 찢어진 하얀 살을 포크로 찍어 한 입 먹어보겠냐고 했다. 솔직히 맛있었다.
"상호."
마주치는 어느 곳에서나, 박병찬은 기상호에게 싱긋 웃어보이고 총총 다가왔다.
그는 말 한 마디라도 더 붙여보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호의를 베풀지 못해 안달 났다.
기상호는 그 행동이 싫지는 않았다. 그의 시간을 뺏으려 들지 않고 딱, 그가 허락하는 시간만을 활용했다. 기숙사 옆 호실에 사는데도 귀찮게 굴지 않았다. 기상호가 오히려 룸메이트가 들어오지 않아 1인실이나 다름없는 그 공간에서 사람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그 사람이 혼자 뭘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내 어딜 보고 그러는 기고?"
이상했다.
기상호는 박병찬이 커뮤니티에서 준향대 체교과 온미남으로 자주 뜨는 인물이라는 것, 준향대 농구부의 국대급 가드라는 정보를 알게 되었다. 박병찬이 경기 한 번 보러 오지 않겠냐고 제안해 관람한 적이 있는데 그가 슛을 쏠 때마다 탄성이 절로 나왔다. 남자 여자 가리지 않고 박병찬 혹은 그의 별명을 연호했다.
그런 사람이 자신에게 왜 다가오는가.
짐작 가는 구석이 있기는 했다. 고등학생 시절 사귄 친구에게 성별을 숨기고 말해줬더니 '관심 있나 보다'라는 답이 왔다.
왜?
체대 슈퍼스타가 공대 너드에게 관심이라니.
고민이 깊어질수록 박병찬이 기상호에게 잘해주는 날과 기상호가 머리 싸매는 날은 늘어만 갔고, 쾌적한 학업을 위해서라도 기상호는 물어봐야겠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왜 잘해주냐고?"
"네."
원래 상대의 속마음을 끌어내려면 술이 제격이라고 하지만, 기상호는 빠른 생일이라는 한계 때문에 술집에 못 가고 고깃집에 갔다. 술집 비슷한 장소를 찾아보려고 고른 결과였다.
"… 상호야."
기상호의 질문을 들은 박병찬은 고개를 푹 숙였다. 뭐고, 뭔 말을 하려고 저러는 기고. 평소 쾌활하고 들떠 있던 박병찬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기상호는 진지하게 듣겠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래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지금의 박병찬은 기상호가 알던 박병찬과 전혀 달라 보였다.
"형아가 티를 덜 냈어?"
"네?"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은―
"좋아해."
진지하게 들어야 하는 말은 맞았으나 내용은 예상 밖의 것이었다.
"형 동생끼리 좋다 말고…, 어, 애인끼리 좋다는 그거."
관심 있는 수준을 넘어선 고백.
"어딜 보고? 같은 말은 참아주라. 지금은 네 옆 방 된 게 운명이다, 생각이 들 정도라서…"
'이런 걸 운명이라고 하나?'
박병찬과 다시 만났던 날 들었던 말이 다시 울렸다.
"아, 맙소사."
박병찬은 과연 변수였다.
고정되어 있던 기상호의 삶에 변화가 찾아온다.
그래, 이것이 정말 '운명'이다.
(소장용 결제창.)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