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솔라]설령 이를 사랑이라 부를지라도

사실 그들의 끝은 이미 정해져 있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영원을 사는 악마와 인간. 비록 신의 사도이고, 그렇기에 낙원에서의 영원이 약속되어 있다고 하나 문솔라는 결국 인간이었다.

나는 불행한가? 아가레스는 자문했다. 시선 끝에 걸리는 자신의 연인이. 눈을 감고 따뜻한 숨 한번 내뱉지 않는…무정한 껍데기를. 아가레스는 솔라를 사랑했다. 솔라가 점차 나이 들어가도, 심지어는 죽음이 목전까지 찾아와도. 아가레스는 그럼에도 문솔라를 사랑했다. 영원히 변하지 않을 전제다. 죽음이 온전한 끝이 아니라는 것을 타천사이자 지옥의 대악마인 그는 알고 있었고, 신의 사도인 솔라 또한 그것을 지당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그렇다고 하여 죽음이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문솔라."

"솔라야." 고통스럽게 숨을 내뱉었다. 내리 쉬는 숨이 송곳에 뚫린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거친 숨을 다스리며 아가레스는 솔라가 남겨두고 간 껍데기. 그것의 손에 제 얼굴을 묻었다. 처음 만났던 그때, 그 어린 소녀의 것보다 나이가 든 손. 약간 까칠하고, 딱딱하고, 또 차갑고……. 아가레스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죽음이 그의 연인을 기어이 그에게서 앗아갔던 것이다. 이미 예정되어 있었던.

"……."

……예정되어 있었던 이별이다. 솔라는 마치 잠이 들듯이 그를 떠났다. 이것은 꿈일까. 제 옆에 내려앉아서 묵묵하게 저를 응시하는 시선을 느꼈다. 아가레스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단지 씹어뱉듯이 웃을 따름이었다. 꿈일까. 그 자문에 대한 대답은 그것으로 충분했기 때문에. 부서지는 황금빛 깃털들이 솔라의 위로 내려앉았다. 아가레스는 묵묵하게 솔라의 손을 잡았다. 차가운 감촉만이 그동안의 모든 시간이 꿈이 아님을 증명해 주으니. …그것이 전부였다. 눈을 감고 있는 솔라가 다시 일어나서 저를 보며 옅게 미소 지어줄 일은 요원해 보였다.

그들은 이제 다시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솔라는 신의 사도였고, 아버지를 등지고야 만 그는 이제 영원히 들어가지 못할 그 아름다웠던 낙원의 꽃밭에서 기거할 터이니. 그렇지만 아가레스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는 숨을 멈췄다. 그래, 정말로 괜찮다. 솔라의 곁에서 보냈던 짧다면 짧았던 나날은 그를 기어이 견디도록 해줄테니……. 그 찰나의 순간이 그가 영원을 버틸 수, 있도록…….

솔라의 손등에 입술을 묻고 있던 그의 숨이 덜덜 떨렸다. 편안한 죽음이 짙게 드리운 솔라의 얼굴이 못내 괴로웠다. 그는 내내 이 순간을 두려워해 왔다. 기어이 솔라가 자신이 찾아갈 수 없는 곳으로 영영 떠나버리는 이 순간을…. 문솔라를 잃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아가레스는 언제나 그렇게도 두려워했다. 그는 차라리 형제의 손에 떠밀려 지옥으로 몇백 번이고 떨어지고 싶었다. 솔라가 떠나버린 이곳은 지옥보다도 더 혹독하고, 괴로워서……. 그러니까, 그는 그 자신이 장담했던 대로 찰나로 영원을 살 것이다. 영원히……. 그는 솔라가 제 옆에 있던 그 찰나를 결코 잊을 수 없을 테니.

아가레스는 가만히 솔라의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끝이. 그래, 좋은 끝을 맺어야지. 그래야지 솔라도 자신을 생각하면서 슬퍼하진 않을 것 아닌가? "……솔라야." 형편없는 목소리였다. 솔라가 듣는다면 특유의 무심한 표정을 하고서는 비수를 찔러대는 말이나 했겠지. 거기까지 생각하며 아가레스는 겨우 웃을 수 있었다. "솔라야."

"좋은, 꿈……."

좋은 꿈 꾸거라. 목이 메여 제대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말해야 하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보내주어야 하는데. 아가레스는 멍하니 눈을 감고 잠든 것처럼, 그리 누워있는 자신의 연인을 보다가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따가운 빛. 태양. 잠이 든 솔라. 아……그는 느릿하게 깨달았다. 그는 이 찬란한 세상에 드디어 홀로 남겨졌다는 것을.

솔라가 함께 했을 때는 그렇게도 빠르게 흐르던 시간이었는데, 이제는 초침에 숫제 무거운 추를 매단 것처럼 초침 소리가 느렸다. 째, 깍. 그러니까……. 아가레스는 눈을 감았다. 무거운 초침소리만 계속 귀를 찔러댔다. 추위를 느낄 턱이 없는데도 겨울의 눈밭 한가운데에 맨몸으로 던져진 것처럼 추웠다. 아가레스는 솔라의 손을 잡은 채로 가만히 있었다.

**

솔라가 죽고 지옥으로 돌아간 이래로 시간은 그러니까, 정말 빠르게 흘렀다. 아니, 느리게 흐른 것인가? 계절이 몇 번 바뀌었는지 알 수 없었고,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건지도 정말 알 수 없었다. 그냥 오랜 시간이 흘렀겠구나, 했다. 아가레스는 그저 견뎌냈다. 다짜고짜 천국에 가서 강짜를 부리며 솔라를 내놓으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그러니까. 그래. 아가레스는 그저 견뎠다.

시간이 지나고, 지나고, 지나고, 다시 지나가고…….

해가 얼마나 바뀐 건지 모를 무렵, 아가레스는 자신이 지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옥은 지독히도 무료했고, 그는 솔라가 보고 싶었다. 그 전까지는 지옥에서 어떻게 버텼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는 정말, 정말로. 지독하게도 지쳐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그저 추억으로 남아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사랑은 아직도 견고하게 서서 그를 짓누르며 빛나고 있지 않던가. 아니, 오히려 그때보다도 더욱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추억은 언제나 찬란하기 마련이니까.

사랑했던 시간에 기대어 하루하루를 버텼지만, 그는 사랑하는, 사랑스러운 자신의 연인을 보고 싶었다. 그래서 아가레스는 진실로 죽고 싶어졌다. 차라리 숨이 끊겼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다못해 소멸이라도 되었다면 나았을까?

정말, 정말 우스운 일이었다. 시간은 아가레스 그 자신을 깎을지언정 사랑을 깎아내진 못한 것 같았다. 아가레스는 망연하게 중얼거렸다. "솔라야." 검은 피가 쏟아져 얼굴을 흠뻑 적셨지만, 그는 상관없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는 닥치는 대로 자신의 영역에 불을 지르고, 폴암을 휘두르며 분풀이를 했다. 그렇게 하다 보면 나았다. 정말로 멍하니 앉아있는 것보다는, 그렇게 돌아오지도 못할 추억을 곱씹는 것보다는 나쁘지 않아졌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상념이 그를 지배하지 않는 것 같았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긴 겨울도 불을 휘두르고 있다 보면 조금은 따스해지는 것 같아서…….

"하……."

하하하. 아가레스는 마침내 웃었다. 피를 뒤집어쓰고 웃는 몰골은 퍽 스산했으나 이제 그는 그런 것 따윈 가리지 않아도 되었다. 솔라가 없으니까. 그는 지옥 한가운데에 던져졌으니까. 이제 영원히, 영원히 봄은 찾아오지 않을 테니까…….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그는 이제 더는 솔라를 만나지 못하는데. 이것이 다……. 차라리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을. 차라리 무력행사를 해대며 그때만이라도 괴로움을 덜어보겠다고, 그렇게 무의미하게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더 나았다. 그는 망연한 눈으로 제 구역에 흩어져있는 육편조각들과 낭자한 피들을 바라보았다. 이곳으로는 달빛조차도 비치지 않는다. 신의 손에 처박힌 나락이 으레 그러하듯이. 이곳이 불에 타 난장판이 된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아가레스는 그날 이후로 쓸데없는 분풀이를 관두었다.

**

다시 시간이 흘렀다. 아가레스는 이제 자신이 숫제 바알 같은 미친놈 취급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긴, 그것은 그럼에도 아무 상관이 없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미친놈이었으니까. 바알도 그렇고 자신도 그렇고. 아무래도 이 넓디 넓은 지옥의 가장 위에 서면 필연적으로 미치고야 마는 모양이었다. 이를 드러내며 아가레스는 웃었다. 아니, 웃은게 아닌가?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가레스는 제 구역 깊숙한 곳에 틀어박혀 때때로 솔라와의 추억을 곱씹었고, 때때로 불을 지르며 화를 쏟아내다가, 마지막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망연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기를 반복했다. 지옥과 천국의 거리는 너무나도 멀었다.

말로써 타락한 타천사는 제 마음대로 천국에 드나드는 것조차도 허락받지 못하였으므로. 아가레스는 이제 자신의 목을 찔러버리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갈 곳 잃은 원망은 가끔은 자기자신을 난도질했고, 심지어는 낙원에 계신 위대하신 아버지를 원망하게 만들었으며, 간혹은 누구를 원망해야 할지 몰라서 그를 멍청이로 만들었다.

"아버지."

그는 대체 어떻게 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그 사실이 못내 견디기 힘겨웠다. 그는 차라리, 차라리…….

"아버지……."

그는 정말로 죽고 싶었다. 정말로, 정말로……. 그게 아니라면 솔라를 보고 싶었다. 안절부절 못하던 그는 언제부터인가 원망하던 야훼에게 기도했다. 인간들이 신에게 기대는 이유를, 그것을 우습게도 알 것 같았다. 그는 기도했다. 이것이 당신의 징벌이라면 차라리 그 벌을 죽음으로 달라고. 아니라면 기꺼이 지옥 구석에 처박혀 있을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솔라의 소식이라도. 한번이라도…….

정말로 우스운 일이다. 지옥 가장 높은 곳에 선 자신이 신에게 엎드려 기도하는 것을 본다면 지옥이 뒤집어질지도 모르지. 하지만 아가레스는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무엇이든. 무엇이든 솔라를 잃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정말로…….

다시 시간이 흘렀다. 무기력하게 늘어져 있던 아가레스는 꿈을 꾸었다. 낙원에서 형제와 함께 있던 자신을. 메마른 웃음을 흘리며 그는 마른 세수를 했다. 낙원. 그래, 그 낙원. 그 아름다웠던 그곳이…….

**

야훼는 언제나 자신의 피조물들을 가여이 여겼다. 비록 다른 신들에게는 가혹했을지라도.

"야."

"……."

"…이게 뭐냐?"

온 몸으로 못마땅함을 드러내고 있는 라파엘을 보던 아가레스는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 손을 내려다본 후에야 멍하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꽃향기가 만발하고 사시사철 해가 지지 않는 낙원. 그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흘러넘치는 신성에 고통으로 온 몸이 저릿해졌다. 그 고통만으로도 이것이 꿈이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사랑했던 곳. 솔라가 거하는 곳.

"…인간계로 내려가라."

"뭐야?"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느릿하게 명령하는 라파엘을 보며 아가레스는 결국 눈썹을 치켜올렸다. 다짜고짜 여기까지 끌고 와놓고서 다시 내려가라고. 그러나 그는 불만을 표하는 대신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가레스는 당장 이곳을 헤집어서 솔라를 보고 싶었다. 이윽고 라파엘의 시선이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어둑하게 내려앉은 황금빛 눈동자. "아버지께서." 그의 목소리는 역천사의 그것이었다. 

"야훼께서 네 소원을 들으시고 네게 기회를 주라 이르셨으니 돌아가라는 뜻이다. 네가 인간계로 내려간다면 솔라는…신의 사도는 네 뒤를 따를 것이라."

……기회. 아가레스는 멍해졌다. 기회, 기회라고. 이제 영원히 잡을 수조차 없으리라 생각했던……. 차가운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허나 아버지께 죄 지은 너는, 인간계에 당도할 때까지 뒤돌아보지 말라."

뒤돌아본다면 필히 끝을 면치 못하리니.

**

휘청거리며 아가레스는 걸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솔라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그 단순한 희망이 무기력해졌던 그를 걷게 만들었다. 솔라가 존재하지 않는 그곳이 곧 지옥이었으므로, 그는 야훼가 지옥 가장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라 명해도 기꺼이 시행했으리라. 어떤 것이든 솔라가 없는 곳보다는 나았다. 그는 정말로…정말로 그 끔찍했던 지옥을 벗어나고 싶었다. 타락했기에 저주받은 온 몸이 신성으로 인해 비명을 질러댄다. 눈앞이 점멸했다가 다시 되돌아오기를 반복했다.

한 발, 두 발. 그는 솔라가 쫓아오지 못할까봐 속도를 낮추어 걸었다. 마음 같아서는 날아오르면 금방이었으나 그는 그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아주 오래전, 자신이 누워 뒹굴었던 옛 고향을 느릿하게 걸었다. 그토록 돌아오기를 바랐던 곳이건만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넘치는 신성에 온몸이 타들어가는 것처럼 고통스러웠으나, 이 또한 견딜만 했다.

"솔라야."

아가레스는 쉼없이 걸으면서도 이름을 불렀다.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가 한심했다. 하지만, 하지만…….

"네가 보고 싶었다. 망할, 잘 지내면 잘 지낸다고 말이라도 해주지 어찌 그리 매정하느냐. …뭐, 그래도 네 생각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더니 세월이 빠르게 느껴져서 견딜만 했으니, 괜한 걱정은 말거라."

아가레스는 두서없이 말했다. 혹시 걱정했을까 싶어서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뒤돌아보고 싶은 마음이 불쑥 튀어나올 때마다 그것을 억누르며, 그는 계속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간 어찌 지냈느냐?"

그는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다. …본디 솔라가 이리도 말이 없었던가? 고요가 무겁게 그 발목을 잡았다. 물론 솔라는 그랬다. 그랬었다. 그렇지만 솔라는……. 아가레스는 간신히 다시 발을 딛었다. 그는 언제나 솔라를 믿었다. 평소처럼 신경질적인 말은 차마 하지 못하고, 그는 사뭇 다정한 말을 입에 주워담았다.

"…되었다. 답하기 싫다면 나 혼자 말하면 되는 것 아니냐. 그간 못봤으니 조금 예쁘게 굴면 어디가 덧나는건지. 예나 지금이나 매정한 것 같으니."

그는 느릿느릿 발을 옮겼다. 불안감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목구멍을 넘어 혀 끝에서 맴돌았다. 과연 이 아름다운 낙원을 벗어나면서까지 네가 나를 사랑해줄까. 이전이라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믿었을 것이다. 물론 아가레스는, 이제는 설령 솔라가 저를 사랑하지 않더라도 솔라의 선택이니 존중해줄 자신이 있었다. 아니, 아니! 이러한 전제를 생각하는 순간부터 그는 솔라를 제대로 믿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그제서야 그 오랜 시간이 자신의 확신을 깎아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제 와서 어찌할 것인가. 그는 야훼가 제게 적선하듯 내려준 동정을 희망으로 품고서 내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솔라가 싫다고 하면 그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저 과거를 붙잡고 다시 살아가는 수밖에.

"……."

지독한 침묵이다. 아가레스는 그 침묵 사이로 제 발소리만 들리는 것이 못내 불안했다. 어째서 네 소리는 들리지 않는 것인지. 이대로 우리가 함께 하던 그곳으로 돌아가서 뒤를 돌아보면 네가 없는 것이 아닐지.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는 뒤를 돌아볼 수 없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얼마나 잔인한 이인지는 그가 가장 잘 알고 있었으니. 한순간의 충동으로 과실을 먹은 아담과 이브는 영원히 에덴에서 추방 당했고, 죄의 온상인 소돔과 고모라에 미련을 둔 롯의 아내는 소금기둥이 되었다. 야훼는 그런 신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소돔과 고모라에 미련을 둔 롯의 아내처럼은 될 수 없었다.

"……이곳은 라파엘이 능천사로서의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나와 함께 쉬던 곳이었다. 꽤 예쁘지 않더냐?"

예전이었다면 담을 수 없던 말까지도 거리낌없이 담았다. 이 지독한 침묵이 그에게 불안감만을 심어주었기에. 당장 뒤돌아보고 싶을 만큼, 솔라가 저를 따라오고 있는지 확신을 받고 싶을 만큼 불안했기에. 그는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입에 담았다. 그러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말로서 막아두었던 불안감이 봇물 터지듯 흘러나올까봐 그것이 두려웠다.

"…아."

아가레스는 문득 탄식을 흘렸다. 익숙한 곳이었다. 날개를 잃고 추락하기 전까지 지겹도록 봤던 곳이다. 한 발만 더 넘으면 이제 그는…….

"……."

그는 그 한 발을 딛을 수가 없었다. 두려워서. 이대로 돌아가서 뒤를 돌아보았는데 솔라가 없을까봐. 결국 그 모든 희망이 전부 물거품처럼 부스러져 사라질까봐. 이곳을 걷는 내내 폐부로 들이차던 불신이 기어이 그의 걸음마저도 붙잡아 매었다. 이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차라리 네가 내 옆에 있다는 위안이라도 삼을 수 있을터인데. 그래서 그는 도무지 이 발을 뗄 수가 없었다.

"……."

끔찍한 침묵이었다. 이대로는 이도저도 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안다. 아가레스는 그리고, 그런 애매한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관계라는 것은 언제나 그를 그렇게 멍청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을……. 언젠가는 이 발을 떼어야함을 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방식으로도 이 상황을 종식시킬 수 없을 것이다. 하릴없이 입구만을 응시하던 아가레스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무의식적인, 그러니까…. 극에 달한 불안감이 반사적으로 터져나온 것에 가까울지도 몰랐다.

"…아가레스?"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제 이름을 읊조리는 솔라를 마주한 순간…그러니까, 자신의 행위를 인지한 순간 그의 머릿속이 희게 물들었다.

"어째서……."

그는 제 눈앞이 산산히 부서지는 것을 보았다. 낙원도, 그저 아연하게 저를 바라보던 솔라도. 야훼는 약속을 어기는 모든 것들에게 잔인했다. 아가레스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음에도 그는……. 그래. 모든 것이 부서지고 나면 다시 지옥이라는거지. 허무한 웃음이 잇새 사이로 새었다. 차라리 견딜 수 없다고 생각했을 때 제 목을 베어버리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을. 그는 뒤를 돌아 굳어진 소금 기둥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뒤돌아본다면 필히 끝을 면치 못하리니. 그 말이 저주처럼 달라붙었다. 잿가루가 날렸다. 두려움과 불신이 기어이 그의 목을 조르고 폐허만을 남겼으니…….

아, 그의 두려움 또한 사랑이라고 부르던가?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