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릭터 로그

레레카 과거로그

눈부신 은빛눈물 호수의 정경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제 육체에 새겨지지 않은 5년의 시간 후에, 처음으로 눈에 담은 그 모습을 어렵지 않게 그려낼 수 있었다. 정신없던 와중에도 그 얼마나 아름다운 풍경이었던가. 그 이후에 목도하게 된 현실은 결코 달갑지 않았지만 은빛눈물 호수의 모습만큼은 빛바래지 않고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편속성 크리스탈이 지면을 뚫고 나와 엉망이 된 모르도나의 모습에 놀랄 새도, 망자의 종소리 너머로 보이는 설원에 경악을 토해낼 새도 없이, 밤낮 쉬지 않고 울다하를 향해 달렸다. 제가 느낀 시간은 순식간이건만 제 눈에 담은 세계의 시간은 제 기억과 너무도 달랐다. 카르테노 전투에 참가하게 되었다는 말을 들은 부모님과 오빠의 경악 어린 표정이 머릿속에 아른거려 떨어지지 않는 탓이었다.

모험가 부대의 일원으로 참여하는 값으로, 목숨 값을 대신해 받아온 돈주머니를 든 채 카르테노 전투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저는 그들에게 일방적으로 통보했더란다. 앞으로 제가 몇 년간 의뢰를 받으며 뛰어야 갚을 수 있는 빚을 통째로 갚는 것으로도 모자라 제 오빠가 바라는 작은 상점 하나를 차릴 수 있을 정도의 비용이었다. 그래도 지금껏 제가 위험한 곳을 들쑤시고 다니면서도 목숨을 부지하고 의뢰를 해내며 이룩한 값어치가 이 정도는 되는구나, 싶은 마음에 뿌듯했더란다.

제가 건넨 돈주머니의 액수를 보곤, 제 부모와 오빠의 표정에 웃음꽃이 피는 것을 기억했다. 그 돈의 출처를 듣고 나서 파랗게 질리던 안색도, 기어이 화를 내거나 울음을 터트리던 얼굴도 기억했다. 네 목숨과 맞바꾼 돈은 필요 없어, 레카! 왜 가장 어린 네가 이 고생을 해야 하냐며, 네 죽음 위에 쌓아올리는 행복이 무슨 소용이냐며 통곡하는 가족들을 모두 강제로 재워버리곤 그 길로 그들을 떠나 모험가 부대로 향했었다.

그 때는 그것이 제게 있어 최선이었다. 제가 어렸을 적 일가족이 사기를 당해 어마어마한 빚을 지게 되었을 때, 막내딸만이라도 빚쟁이들의 손에 닿지 않게 하려고 남은 돈을 모두 제게 쥐여 주며 성인이 될 때까지 주술사 길드에 의탁시킨 가족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기에. 그들에게 들키지 않게 성별과 이름을 속인 채 목숨을 건 모험가 생활을 시작하고, 목숨만 겨우 건져 가족들에게 돌아왔을 때. 그저 저를 껴안고 펑펑 울음을 터트리던 그들의 체온과, 눈물의 온도를 똑똑히 기억하기에. 저만이라도 수렁에서 건져 주고 싶어 했던 가족들의 마음만큼, 제 마음도 그러했기에.

“이제 빚도 어느 정도 청산했으니까 모험가 일은 그만 두자, 레카. 응? 이 정도면 우리 가족이 열심히 일해서 갚으면 갚을 수 있는 금액이야.”

“레카, 난 빚을 다 갚고 난 다음에 상단을 다시 세워볼까 해. 아냐, 아냐. 걱정 마. 예전에 부모님이 했던 것처럼 호락호락 사기를 당하진 않을 거야. 그 때가 되면 너도 위험한 일은 이제 그만 두고 함께 일하는 게 어때?”

“만약 상단을 세우게 된다면 상단 이름은 네 이름을 따서 지을 거야. 레카 상단, 어때? 멋지지? 뭐? 내 이름이나 쓰라고? 싫어. 이건 네가 세운 거나 마찬가지야. 우리 가족의 기적의 빛이나 다름없는 네가 일으켜 세운 거야. 이건 물러설 수 없어.”

모르도나를 지나, 그리다니아를 거쳐, 다날란의 넓은 황야를 가로질러. 저를 태우고 달리는 초코보의 달음질이 땅을 박찰 때마다 기억 속에서 제 형님의 목소리가 새록새록 떠올랐다. 왜 갑자기 세계가 변했는지는 몰라도, 제가 왜 모르도나에 있는지는 몰라도. 저는 살아남았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제 가족에게 지워진 빚은 모두 사라졌을 것이고, 형님은, 아니, 오빠는 상단을 만들기 위해 뛰어다니고 있을 것이었다. 이제 저만 돌아가면 되었다. 아직도 막내딸이 언제나 돌아오나 노심초사하며 가슴 졸이고 있을 가족들에게 저는 살아 있다고, 살아 돌아왔다고 안심시켜주면 되었다.

밤낮 쉬지 않고 달려 돌아간 울다하는 기억과 달랐다. 전체적인 모습은 변함이 없었지만 세세한 부분이 달랐다. 원래 있었던 상점이 사라지고 다른 상점이 들어섰다. 거리에는 난민이 들끓고 분위기는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재해 직후라기엔 묘하게 맞지 않은 부분들이 갈 길을 잃은 퍼즐마냥 떠돌았다. 가족들이 살던 집을 찾아갔으나 살던 사람이 바뀌어 있었다. 물어보니 3년 전에 이사를 갔다고 했다. 3년.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이다. 제 7 재해로부터 몇 년이 지났는지 물었다. 5년이 지났다고 했다. 역시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이다. 더 묻지 않고 뛰쳐나왔다.

5년. 제가 죽었다고 가족이 단언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거리를 달렸다. 상점을 차린다고 했으니 상점가에 가면 볼 수 있겠지. 분명 제 이름을 딴 상점을 만들고, 상단을 만들 것이라고 하였다. 레카 상점. 혹은, 제가 죽어서 다른 이름으로 대체했다면 이름 짓는 센스라곤 조금도 없는 형님이니 본인의 이름을 따 루루비드 상점 정도로 지어두었겠지.

정신없이 사방을 둘러보았다. 몇 분을 달리고 둘러본 끝에 간판을 찾아내었다. 레카 상점. 자잘하지만 확실히 유용 가치가 있는 물건들을 모아 파는 가판대가 눈에 들어 왔다.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크기의 상점이었지만 번듯하게 제 자리를 지키고 선 모양새를 보아 잘 운영되고 있는 곳임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다행히 자취를 찾았다. 상점에 발을 디뎠다. 먼지와 모래로 엉망이 된 차림새로 깔끔한 상점 안에 들어가기가 영 미안스러웠지만 그 정도쯤은 이해해주리라 믿었다. 다행히 발을 들이자마자 제 혈육을 찾아낼 수 있었다. 제 것보다 조금 더 짙은 머리색을 하고, 제 것과 같은 눈동자를 가지고, 저보다 조금 순한 외형을 가진 사막 종족 라라펠. 기억 속의 모습보다 조금 더 나이가 들어 보였지만 알아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형님.”

10여 년을 레레카 레카가 아닌 레레디브 카카디브로 살았던 탓에, 형님 소리가 오빠 소리를 제쳐두고 튀어나왔다. 하지만 이 정도 쯤이야 그저 웃어넘겨주겠지. 언제나 그랬듯이. 생사를 확인한 그는 마음씨가 유순한 편이니 울음을 터트릴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든 좋았다. 제가 아는 오빠는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그의 반응은 둘 중 아무 것도 아니었다.

저를 눈에 담은, 제 것과 똑같은 색을 품은 눈동자가 의아함을 품었다. 처음에는 5년 만이라 기억을 하지 못하나, 싶었다.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살아 돌아와서 그랬던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의 구겨진 미간은 펴질 줄을 몰랐다.

“아는 사람인가요, 점주님?”

“아니, 모르는 사람일세.”

그는 나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칭했다. 그가, 루루비드가 저를 모르는 사람이라 말하자 점원은 저를 밖으로 이끌어냈다.

모르는 사람이라고? 지금껏 잊고 있던 피로감이 일시에 온 몸을 덮쳤다. 가족을 찾는 것이고 뭐고, 일단 휴식이 급했기에 모래늪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곳에서 5년 전 카르테노 전투에 참전한 빛의 전사들에 대한 기억이 모두 사라졌음을 알게 되었다.

아, 그래서였나. 나는 그들에게 잊힌 것인가. 기억나지 않는 5년. 그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내 나이만큼의 시간.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진 거의 일주일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들은 나를 잊었다. 나는 그들에게 없는 사람이다. 이제 자리를 잡고 바로 서게 된 내 소중한 사람들 사이에, 내 자리는 없었다. 그 사실이 못내 서러웠지만 받아들이지 못할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친절하고 마음이 약하니 아마 그들에게 사실은 막내딸이 있었고, 그 딸은 5년 전 카르테노 전투에 참여했던 빛의 전사였고, 그가 자신이라고 말한다면 저를 받아줄 것이었다. 그 동안 조금 각박해졌음을 생각하여도 어느 정도 친절하게 대해주겠지. 하지만 그 설명을 제 입으로 하기엔 이유 없이 서러웠다. 이젠 행복해진 가족 사이에 이물질이 되어 끼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어차피 지긋지긋했던 울다하. 저 없이도 온전할 수 있는 제 소중한 사람들. 짜증나는 모래바람. 짜증나는 더위와 추위. 짜증나는 물질만능주의. 하나 같이 제가 남을 필요는 없는 것들이었기에 사막 도시를 등졌다. 그리고 그대로 떠나, 내심 동경했던 그리다니아로 발을 들였던 것이 몇 년 전이었더라. 손가락을 꼽아 보다가 포기했다. 저보다 다섯 살은 많은 빛의 전사, 레레디브 카카디브로서의 인생과 얽혀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제 원래 나이를 기억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지. 어쨌든 중요한 것은 이 구질구질한 옛 기억이 아닌, 지금이었다.

“은빛눈물 호수에 보내진 이들...... 그들의 생명의 빛은 5년 전 참극에서 산산이 흩어질 뻔 했습니다.......”

“빛을 지키기 위해 싸운 이들... 도리어 그들의 빛이 무참히 스러지게 둘 순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생명의 빛이 별의 바다로 산산이 흩어지기 전에...”

“저에게 남겨진 작은 빛의 권능을 이용해 다시금 생명의 빛을 뭉쳐내었습니다...”

사실 저는 카르테노 전투 중에 사망하였고 제 목숨은 하이델린이 남은 힘을 억지로 뭉쳐내어 붙잡아둔 결과물이다. 왼팔을 걷어보았다. 왼팔의 손목 아래에 선명히 자리 잡던 마크가, ‘사려 깊은 속임수’가 사라져 있었다. 온갖 복잡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는 것을 그저 내버려 두었다. 듣고, 느끼고 생각하세요. 신물 나도록 들었던 소리였지만, 하이델린에게 양심이 있다면 지금은 그것을 제게, 우리들에게 강요해서는 안 되었다.

울고 괴로워하는 동료들이 눈에 들어 왔다. 그들에 비하면 제 과거는, 제 고통은 옅을 것이 분명했다. 과거에 좋아하던 자가 저를 억압한 적도, 저를 강요한 적도, 그들을 잃은 적도 없었으니.

“역시 내게 이 별의 운명을 맡기는 것은 너무 과분합니다, 하이델린. 예나 지금이나, 저는 제 목숨 하나 편히 부지할 환경만 있으면 아무래도 상관없는 사람이니까요.”

차마 힘을 잃어 가고 있다던 그의 면전에서 말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기에 생각만 했던 말이었다. 하지만, 어쩌면 그는 이미 제 이 말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번 일을 마지막으로, 제 목숨을 두 번 살려 놓은 하이델린의 힘을 돌려주기로 마음먹었다. 첫 번째 살려준 목숨은 카르테노 전투에서. 두 번째 살려준 목숨은 제 정신과 마음을 수없이 갉아먹는 이번 일로. 이 정도면 그럭저럭 괜찮은 대가일 터였다. 이것으로 이만 이 별의 운명과는 마지막 매듭을 짓자, 그렇게 마음을 먹었다. 죽을 목숨을 멋대로 살려주고, 그 살려준 목숨을 지킬 힘도 없는 주제에 휘둘리고 있는 하이델린에 대한 분노는 어렵사리 가라앉혔다. 이것으로 그만두면, 이제 정말 위험한 일은 끝내게 되는 것이었다. 적어도, 저 자신은.

내일 다가오게 될 동료의 마지막 분노에 삼켜 죽는다면 그걸로 저는 이만 별의 바다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게 되겠지. 그러나 내일에도 결국 살아남는다면 힘을 하이델린에게 돌려주고, 그 뒷일은 더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었다. 어디로 발걸음을 옮겨도 비겁한 도망길이겠지만. 이제 그만 제 귓가에 남은 휴식을 권하는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여줄 때도 되었다는 생각에 천천히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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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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